大乘正宗分 第三
佛告(불고)--須菩提(수보리)하사되 諸菩薩摩訶薩(제보살마하살)이 應如是降伏其心(응여시항복기심)이니 所有一切衆生之類(소유일체중생지류)--若卵生(약란생) 若胎生(약태생) 若濕生(약습생) 若化生(약화생) 若有色(약유색) 若無色(약무색) 若有想(약유상) 若無想(약무상) 若非有想非無想(약비유상비무상)을 我皆令入無餘涅槃(아개영입무여열반)하야 而滅度之(이멸도지)하리니 如是滅度無量無數無邊衆生(여시멸도무량무변중생)하되 實無衆生得滅度者(실무중생득멸도자)니 何以故(하이고)오 須菩提(수보리)야 若菩薩(약보살)이 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유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하면 卽非菩薩(즉비보살)일세라.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보살 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시킬 것이다. 무릇 일체 중생의 종류인 <알로 생긴 것>·<태로 생긴 것>·<습기로 생긴 것>·<화하여 생긴 것>·<형상이 있는 것>·<형상이 없는 것>·<생각 있는 것>·<생각 없는 것>·<생각 있는 것도 생각 없는 것도 아닌 것>들을 내가 남김없이 다 부처되는 열반에 들게 하여 제도하리라. 하여 이와같이 한량없이 많은 중생을 다 제도하지만 실로 한 중생도 제도된 바 없느니라. 왜냐 하면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나라는 생각>·<남이라는 생각>·<중생살이라는 생각>·<오래산다는 생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第三 大乘正宗分--대승불교의 진수
[科 解]
대승정종분 제삼(大乘正宗分第三)이라 함은 대승의 골수를 말하는 제삼장이란 뜻입니다. 대승불교(大乘佛敎), 소승불교(小乘佛敎)하는데 소승불교는 자기 하나만 열반(涅槃)을 얻어 가지고 이 세상에 근심, 걱정 없이 나 홀로 편안하게 지내는 불교를 말합니다. 「열반의 대해탈(大解脫)을 증득(證得)했으므로 지구(地球)가 깨지거나 우리 민족 다 죽거나 정치 거꾸로 하거나 그것은 내가 알 바가 아니다. 이 육신(肉身) 잡아다 마음대로 해라. 나는 그런 것 때문에 신경 쓸 것 하나도 없다. 말도 안 듣는 중생들한테 타이르고 가르쳐 줘 봐야 말 안 들으면 욕하고 야단하고 똑같이 해야 되니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중생들 시비에 나 까지 말려들어서 번뇌망상(煩惱妄想)이 다시 일어나고 말겠다.」고 하여, 자기 본위(本位)로만 생각하고 중생들 구제(救濟)할 생각을 안 하는 것이 소승불교(小乘佛敎)의 태도이고 나한(羅漢)님들의 용심(用心)입니다. 그러니 이런 열반은 옳은 열반이 아니고 옳은 깨달음이 되지 못하므로 소승불교라 이름했고, 대승불교에서는 이것을 하나의 염세주의(厭世主義)라고 지탄합니다.
대승보살(大乘菩薩)은 자비심을 일으켜서 고약한 중생에게 이런 법을 얘기해 주고 그들을 괴로움으로부터 건져주는 일에 헌신하는 구세주의(救世主義)입니다. 내 옳은 것을 남에게 옳다고 인식시키는 설교시간이 나에게 가장 철저(徹底)하는 시간입니다. 나 혼자 독경(讀經)을 일년내 또는 평생 하는 것보다도 금강경을 한 번 읽고 단 반시간만이라도 남을 위해 해설하는 그 공덕(功德)이 참으로 비유도 안 되는 정도로 더 크다는 것입니다. 남이 알도록 설법하는 그 시간이 정말 불법이 자기 뼈 속에 골수 속에 박혀 자리 잡는 시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남에게 법문 해 주는 공덕이 가장 크다고 한 것입니다. 대승불교는 「나쁜중생 이것이 나를 부처로 만드는 좋은 부처로구나, 도가 되는구나.」하고 부처와 중생과 마음을 하나로 봅니다. 그러니 가령 신부나 목사나 유교의 선비나 누구나 간에 몇 달 며칠이 걸리든지 그 사람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일으키는 걸 봐야 안심하고 가만히 있지 그전에는 밥을 얻어먹어 가면서 매일 자꾸 얘기만 합니다. 「내 얘기 안 들으면 못가겠다, 죽여도 좋다, 죽이려면 죽여라, 귀신이라도 당신에게 설교하고 말겠다.」 이렇게 까지 적극적이고 중생과 나는 일심동체(一心同體)라는 대자비심(大慈悲心)으로 대원력(大願力)의 수행을 목적으로 하여 마침내 성불하려는 것이 대승불교입니다.
이와 같은 대승(大乘)의 참 불교가 여기서부터 나오게 된다는 뜻으로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이라 한 것이며, 또한 이것이 금강경의 요긴(要緊)한 대의를 밝힌 대문(大文)이라 할 것입니다. 금강경의 정종분(正宗分)은 서분(序分)과 맨 끝의 끝 부분인 유통분(流通分)을 뺀 전부이지만 그러나 금강경의 정종분(正宗分)을 다시 삼십일분으로 나누어서 볼 때에도 정종분 중의 정종분이 된다는 뜻으로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이라고 한 것입니다.
原 文 : 佛告須菩提 諸菩薩摩訶薩 應如是降伏其心
[解 義] 부처님께서 수보리존자에게 「이와 같이 마음을 가지고(應如是住) 이와 같이 번뇌망상을 항복받으라(降伏其心)」하신 <이와 같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말씀하시려는 차례입니다.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란 말이 많이 나오는데, 보살은 인도말로 보리살다(菩提薩?), 곧 보리의 보(菩)자와 살타의 살(薩)자를 줄여서 합친 말입니다. 보리는 <깨달음>이란 말이고 <살타>는 중생이란 말이니 <보리살타>의 뜻을 번역하면 <깨친 중생(覺有情)>이 됩니다. 『마음을 깨쳤는데 아직 업이 남아 있어서 이성(異性)끼리 만나면 딴 생각이 나고 좋은 음식 봐도 먹고 싶고 그런 오욕업(五欲業)이 남아 있어서, 요새말로 덜 떨어진 걸로 봐선 중생이고 깨친 것으로 봐선 보리고, 그래서 부처도 중생도 아닌 도인이다.』 이런 뜻을 가진 말이 보살입니다. 또 <마하살>(摩訶薩)이라고 하는데 마하(摩訶)는 크다는 뜻이며, 큰 보살이란 뜻으로 씁니다.
우리가 도인이란 말을 흔히 쓰는데 부처가 다 됐느냐 하면 아직 그렇지는 못하고 그렇다고 마구잡이 중생이냐 하면 중생도 아니란 뜻입니다. 참 중생도 참 부처도 아니고 부처가 되어가는 그런 중생, 부처에 가까워 가는 선비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아직 성인은 아니고 부처가 되지 못한 보살들, 마음이 완전히 밝게 드러나지 못한 도인은 이와 같이 마음을 항복받아라.」 그렇게 말씀하고는 여기서부터 조금씩 풀어 나가며 어찌해야 부처가 되는지를 말씀하십니다. 다 같이 동냥해서 밥 먹고 똥오줌 누고 부처나 비구나 누구나 대중과 함께 앉았으니 표면상(表面上)으로는 똑 같은 것 같습니다.
수보리존자는 여기서 부처님과 우리의 차이가 무엇이며 우리가 부처님을 어떻게 따라 배우겠습니까? 부처님께 여쭌 것입니다. 아란존자가 경 첫머리에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나는 이렇게 들었다.』고 한 「이렇게」와 여기서 이와 같이 마음을 가지고 이와 같이 항복하라고 한 「이렇게」는 같은 말입니다. 곧 자세한 내용이 그 경안에 들어 있다는 뜻을 암시합니다. 하나의 전제로써 「이와 같이」란 말씀을 해놓고 이제 그 부처되는 길, 마음 항복 받는 방법을 이렇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原 文 : 所有一切衆生之類 若卵生 若胎生 若濕生 若化生 若有色 若無色 若有想 若無想 若非有想 若非無想
[解 義] 「소유일체 중생지류」(所有一切 衆生之類)란 광대무변한 우주에 무수한 중생들이 살고 있음을 말합니다. 그 많은 중생들은 그 종류와 수가 많아서 사람·벌레·물고기·날짐승 등 온갖 것이 다 있는데, 금강경에서는 이 중생들을 대체로 아홉가지로 분류합니다.
첫째 난생(卵生)인 알로 까는 중생이 있고, 둘째 태로 나온 태생(胎生)이 있고, 셋째 습생(濕生)은 습하고 썩은 데서 나오는 세균 같은 벌레들을 말합니다. 또 화생(化生)이란 꿈의 몸뚱이, 지옥천당의 몸을 말합니다. 꿈에 있는 몸뚱이는 아버지 어머니한테 받는 몸뚱이가 아니고 우리 마음으로 만든 몸뚱이 인데 이 몸뚱이는 기억에 의해 생겨 나온 기억의 몸뚱이며, 이것은 난생·태생도 아니고 습생도 아니며 이 몸뚱이는 허공에서 생긴 것이라 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허공에서 생긴 것도 아닙니다. 지옥 중생의 몸뚱이도 영혼이 바로 지옥으로 들어가 받는 몸으로 꿈에 있는 몸뚱이와 똑 같습니다. 그곳에는 부부 생활을 통해 태어나는 난생, 태생류의 출생(出生)이 아니고 영혼이 바로 천당 지옥에 가서 태어나는 출생입니다. 천당사람은 영혼이 그대로 하늘나라에 태어나며 극락세계는 빨간 연꽂이 피어 나와 가지고 그 속에서 사람이 저절로 생깁니다.
일정때 원산서 있던 실화로서 화생의 실제를 말해주는 재미난 이야기가 있습니다. 번뇌가 있어서 크게 고민하고 있던 한 청년이 밝은 달밤에 명사십리(明沙十里)로 나갔습니다. 사람들을 피해 한 쪽에 자리를 잡고 눈을 감은 채 이 생각 저 생각 얼마를 고민하다가 눈을 떠보니 달도 지고 오고 가는 사람도 없는 한밤중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청년은 집에나 들어가 보자 생각하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얼마쯤 가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나이도 자기와 비슷하고 키도 비슷한 웬 처녀가 자기 앞을 지나갑니다. 이 깊은 밤에 처녀가 혼자 가는 것을 보니 저 처녀도 나처럼 번뇌가 있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어 이야기나 해 보려는 마음으로 자꾸 가까이 붙어 따라가는데 그 여자는 뒤도 보지 않고 급히 가기만 합니다. 이 처녀는 무슨 번뇌인지는 모르지만 나와 동지적 입장일 것이라는 호기심에 끝까지 따라가기로 마음먹고 가는데 나중에는 어떤 집으로 들어가더니 마루에 올라서서 건너방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청년은 닭 쫓던 개처럼 그 집 마당에 혼자 우두커니 서 있게 되었는데 갑자기 여러 사람이 나와서 「너 이놈 웬 놈인데 밤중에 남의 집에 왔느냐? 도둑놈 아니냐?」하고 끌어내어 파출소에 붙들러 갔습니다. 청년은 범인이 아님을 밝히기 위해 사실을 얘기를 했습니다. 「나는 어떤 고민이 있어서 명사십리에 나갔다가 정신없이 저녁 늦게까지 있게 되었는데, 마침 깊은 고민에 잠기어 걸어가는 처녀를 보고 나와 같은 입장인가 싶어 동정하는 뜻에서 끝까지 따라 왔을 뿐입니다.」 「이놈아 우리 집 딸은 몸이 아파 석 달째나 몸져 누어서 바깥출입을 못하고 지금도 미음을 못 마시는데 명사십리를 어떻게 갈 수 있겠느냐?」하며 그 딸의 아버지가 호통을 합니다. 그런데 집에서 딸이 아버지하고 그 청년을 부른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보니 딸의 이야기가 「아버지 제가 조금 전에 꿈을 꾸었습니다. 제가 평소에도 명사십리 한번 나가 봤으면 하는 생각이 있었는데 오늘따라 밝은 달이 창문에 비춰오는 바람에 명사십리 생각을 몹시 하다가 깜박 잠이 들어 꿈 가운데서 명사십리로 나갔습니다. 꿈속에서 저도 너무 늦도록 오래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부지런히 집으로 오는 중인데 웬 청년이 제 뒤를 자꾸 따라 왔습니다. 저는 걸어가는 사람들도 없는 밤중에 가뜩 무서운데 청년이 따라오므로 더 무서워져서 부지런히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꿈이 깨었는데 지금 그 청년이 꿈에 본 청년인 것 같습니다.」하는 꿈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이 처녀의 꿈은 단순한 꿈이 아닙니다. 여러 달 명사십리만 자꾸 생각하다보니 자기 화신(化身:마음으로 화하여 된 자기의 분신(分身))이 꿈으로 나타나서 그 화신이 명사십리로 가게 된 것이고 그 청년과 만났던 것입니다. 이런 예는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다 자기 생각이 자기 몸으로 나타난 것인데, 꿈의 경우보다 한층 더 강한 마음의 힘에 의해 나타난 화신의 현실적 예라 할 것입니다. 요새 미국이나 영국이나 독일 일본의 심령학계(心靈學界)에서는 자기 화신을 외국에 보내서 같이 말도 하고 같이 일도 보고 그런 사람도 있고 말은 못하고 나타나서 얼마동안 있다가 없어지는 것도 있고 그런 화신이 있습니다. 부처님도 백억화신(百億化身)을 나타내시어 교화하셨습니다. 싣달타태자도 사실은 부처님의 천억 백억의 몸 가운데 해당하는 화신입니다. 그래서 화신, 보신(報身:공덕의 과보로 받는 불신의 하나), 하는 것이 다 꿈에 육신이 마음으로 나타난 것이듯 다 같은 이치로 나타난 몸입니다. 인도의 싣달타태자(悉達太子)는 천백억분의 일의 화신으로서 정반왕(淨飯王)의 아들로 마야부인(摩耶夫人)의 뱃속에 들어가서 열달동안 커가지고 나오느라 애썼고,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 제일성(第一聲)을 하신 것 그것이 다 마치 화신이 나타난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엔 꼭 엄마 뱃속에서 나온 역사적 인물임에 틀림없는 것 같지만 그러나 역사적 인물 그대로가 화신이라는 것입니다. 요컨대 화신(化身)이란 꿈에 그 몸뚱이가 단순한 죽은 물질이 아니어서 꼬집으면 아프고 참으로 육신이 있는 것으로 느끼듯이 그런 마음으로 화해서 나서 사는 생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유색(有色)이란 사람이든 짐승이든 벌레이든간에 몸뚱이가 있는 중생세계를 말하고, 무색(無色)이란 정신만 있는 것 마음으로만 사는 중생을 말합니다. 하늘나라의 경우와 귀신의 세상이 그런 세상입니다. 유상(有想)은 정신활동을 하고 있는 중생세계, 무상(無想)은 아무 생각 없이 있는 하늘나라의 세계를 말합니다. 그러나 아무 생각도 없다고는 하지만 근본적인 잠재의식까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늘나라 무색계천(無色界天)에 가면 현상계를 초월하고 있지만 그러나 아직 어떤 근본적인 번뇌, 잠재의식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상이란 잠재의식만 있는 상태의 생활, 다시 말하면 잠재의식이 근본적으로 끊어진 것이 아니고 우리한테 비하면 잠재의식까지도 끊어진 거나 한가지인 세계를 말합니다. 비유상비무상(非有想非無想)의 중생세계는 무슨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생각 없는 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있고 없고를 다 초월하고 나면 마음속에 저절로 이런 경지가 나옵니다. 인간세상에서도 공부를 해서 무아지경(無我地境)에 들어가면 자꾸 깊이 들어갈수록 재미납니다. 마치 고단할 때 잠이 푹 들어 깊어지면 그럴수록 재미있어서 잠을 깨기가 싫은 것처럼 선정(禪定)도 그와 같습니다. 그래서 모든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없는 것도 아닌 상태에 사는 하늘나라의 중생을 비유상비무상(非有想非無想)의 중생이라고 합니다. 하늘나라의 가장 높은 최고의 하늘나라에 가면 비상비비상천(非想非非想天)이 있는데 이곳의 하늘나라가 바로 그런 정신의 경지에서 사는 중생들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이 하늘나라도 생사(生死)를 완전히 해탈(解脫)한 것은 아닙니다.
原 文 : 我皆令入 無餘涅槃 而滅度之 如是滅度 無量 無數無邊衆生 實無衆生 得滅度者
[解 義] 이렇게 각양각색 각종의 모든 중생의 수는 실로 무량무수이어서 한강모래의 천만억배나 되는 그런 모래 수의 몇억 제곱보다도 훨씬 더 많습니다. 그 많은 중생들을 「아개영입 무여열반(我皆令入 無餘涅槃), 내가 모두 부처님께서 들어가시는 열반에 들어가도록 공부를 가르쳐 한 중생도 남김없이 부처가 되게 하고 말겠다.」 보살은 이렇게 원(願)을 세우고 그 원을 끝까지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내가 중생들을 다 제도해서 그 많은 중생들로 하여금 적멸열반(寂滅涅槃)에 들어가도록 했고, 번뇌망상을 남김없이 없애서 절대의 행복을 얻게 했다 하더라도, 그리고 그것은 오로지 내가 인연 따라서 그들이 수도할 수 있도록 가르친 때문이었다 하더라도, 이렇게 하는 동안 무수한 나의 목숨을 저들을 위해 희생했고 그래서 그들이 다 부처가 되었다 하더라도, 실무중생득멸도자(實無衆生得滅度者), 곧 한 중생도 제도한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중생으로서 너한테 배워 발심하고 네가 지도해서 마음 깨쳐 부처된 중생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금강경에만 있고 다른 데는 없는 법문(法門)입니다. 어느 중생도 제도(濟度)했다는 생각이 없는 이것은 일체 번뇌가 없기 때문이니, 만일 그 생각이 남아 있으면 그 생각을 하는 것이 곧 번뇌가 되기 때문입니다. 번뇌가 다 떨어져서 열반의 경지에 마음이 합하면 그런 생각 낼 필요도 없고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니, 말이나 이치로만 그렇고 실제로 안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이치도 실제도 완전하게 그렇다는 뜻입니다. 중생이니 부처니 선(善)이니 악(惡)이니 하는 것은 다 중생의 현실이라고 하는 꿈속에만 있는 번뇌이기 때문입니다.
原 文 : 何以故 須菩提 若菩薩 有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卽非菩薩
[解 義] 『한없이 많은 중생을 네가 실제로 제도했지만 제도했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너는 보살이 아니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내가 모든 중생을 제도했다는 생각이 있기만 하면 이것은 곧 아상(我相)이 되고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이 되고 수자상(壽者相)이 되는 때문이다.』라는 부처님의 말씀이 이어서 나옵니다. 여기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은 금강경에서 중요한 대문이니 역시 이것을 바로 알면 마음을 깨칩니다. 내가 착한 일을 했다는 생각 그것도 아상이 됩니다. <나>라는 것을 인정하고 나면 아무 딴 조건 없어도 이것이 주관(主觀)이 되어 다른 사람을 인정하게 되고 무정·유정 등의 온갖 객관(客觀)이 있게 됩니다. 객관을 전제로 인식하는 것, 이것이 인상(人相)입니다. 더욱 단도직입적(單刀直入的)으로 말하면 「나는 육체를 가지고 있다. 육체가 나다.」라고 하는 그 나라고 하는 생각 그것이 아상이고 또 나 아닌 모든 것, 현상계, 객관, 공산주의도 자본주의도 허공도 다 나는 아닙니다. 이것이 인상입니다. 중생상(衆生相)이란 「결혼해야겠다, 돈을 벌어 살림살이 장만해서 아들 딸 대학까지 졸업시켜야겠다. 우리도 남들처럼 뭣도 하고 뭣도 해야겠다.」하여 모든 살림살이를 차리는 것이 중생상입니디. 「장가가려면 부자집 딸한테 가서 처가집 덕을 좀 봐야겠다, 부자집 총각한테 시집가서 호강 좀 해야겠다.」 하는 등의 이런 생각 내는 게 다 중생상입니다. 다시 말하면 중생살림살이에 대한 번뇌망상을 중생상이라 합니다.
수자상(壽者相)이란 남도 칠십 팔십 사는데 나도 적어도 칠십 팔십은 살겠지, 금방 아파 죽을지도 모르면서 만날 오래 살기 위한 준비하느라고 온갖 애를 다 쓰다 준비도 못하고 죽는 것이 인간입니다. 언제 죽을는지 알 수 없습니다. 술먹은 깡패에게 맞아 죽을는지, 마누라하고 싸움하다 죽을는지,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인데 칠십 팔십 나도 살겠거니 안심하고 삽니다. 또 칠십 팔십 살았다 해서 만족하냐 하면 그렇지 못하고 몇 억만년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병이 들어 곧 죽게 되었을 적에 이 약 먹어야 산다고 하면 쓴 약을 자꾸 받아먹습니다. 이것이 삶에 대한 애착이고 수자상입니다. 산삼을 보면 한 뿌리 사먹었으면 해서 침 안 삼키는 사람 없습니다. 난 복이 없어 산삼 구경도 못한다고 한탄합니다. 좋은 약 비타민 영양제 나왔다면 다만 한 병이라도 사먹고 싶어 하는 것, 이게 모두 수자상입니다.
그런데 만일 보살이 「어떤 중생을 내가 제도했다」그러면 그것이 아상입니다. 대승불교하는 사람은 아상·인상·중생상이 있으면 안됩니다. 살림살이 걱정하든지 아들 딸 걱정하면 안됩니다. 전 중생이 모두 우리 아버지이고 우리 어머니이고 우리 딸이고 아들이라고 그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또 중생제도 하겠다고 나선 보살이 내가 지도해서 깨달은 중생이 있거니, 제도받은 중생이 있거니, 생각하면 이것이 인상(人相)입니다. 그래서 나는 선생이고 너는 제자라고 하면 이것이 중생상(衆生相)이고 그러면 자연히 수자상(壽者相)도 따라오게 됩니다.
[說 義]
○육신 생활 떠난 보살의 세계
무량무변 중생을 모두 내 식구로 삼고, 이 식구를 모두 불문(佛門)에 들어오게 하여 자기자신의 인간성(人間性)을 개발해 가지고 생사를 초월하게 합니다. 이렇게 인간성(人間性)을 깨달아서 전지전능해 놓으면 아무 근심 걱정 없습니다. 내 앞에 죽은 귀신이 다 대들어도, 세계 깡패 다 모여들어도 내가 손톱 하나만 까딱하면 다 떨어지는 그런 완력(腕力)이 생깁니다. 그런 신통(神通)도 있을 뿐 아니라 지혜로도 모르는 게 없습니다.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항상 마음 하나입니다. 우리가 <나>라고 하는 데서 과오(過誤)가 있고 전생(前生)이고 후생(後生)이고가 있지, 마음이 나인 줄 깨달아 놓고 나면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없고 이 전체가 마음 하나뿐이므로, 허공이 한없이 무한허공(無限虛空)이라고 하지만 마음한테 비하면 무한대의 허공도 역시 내 털구멍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적은 것에 불과합니다. 마음을 깨치면 세상의 모든 것이 그렇게 됩니다. 그러니 아무 근심걱정 일어날 조건이 없어지고 번뇌가 일어날 아무 이유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마음만 깨치면 의식주(衣食住)가 필요 없고 권리(權利)도 돈도 필요 없고 꼭 살아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것은 죽을 수 없는 산 것이니까 영원히 자유한 것이고 그리고 남녀노소가 없는 평등한 것이니 오직 마음자리만이 전 우주에서 완전한 것입니다.
이렇게 완전한 것이 <나>이거니 생각하고 우리의 육체생활(肉體生活)을 조금씩 축소시켜야 하며 하루 밥 세 그릇 가지고 세 끼 먹던 것을 두 그릇 먹고 한 그릇 남겼다가 불쌍한 사람, 거지 오면 밥 한술 더 주는 이것이 자기 육신생활 포기(抛棄)하는 것인 동시에 참 자기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차차 「한 그릇 가지고 하루 먹고 두 그릇 남 주자」 그렇게 할수록 한 그릇 먹고 사는 때가 세 그릇 먹고 사는 때보다 욕심이 없으니, 그래서 욕심이 떠나면 마음이 안정되는 것입니다. 잠 안 자도 정신이 깨끗해지고 편해집니다. 밥 세 그릇 꼭 먹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염불이나 참선해 봐야 큰 공부 할 수 없습니다. 아침 먹고 얼마 있다가 배고프면 또 점심먹어야 하니 「이 밥 왜 안 주나. 왜 목탁(밥 먹는 신호)을 안치나」하는 생각으로 화두(話頭)고 참선이고 다 달아나 버립니다.
그러므로 육체를 나라고 하는 생각을 떼어 버리는 생활, 이런 사고방식((思考方式)으로 나아가면 차차 음식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적어지고 조금 먹어도 건강이 유지됩니다. 그러니 이것이 참 우리 생활개선(生活改善)입니다. 꼭 잘 먹어야 하는 줄 알고 영양가치 있는 것만 찾고 이런 것은 몸에 해로운 것인 줄로만 알았던 것도 마음이 편하고 나면 그렇지 않습니다. 양잿물을 먹어도 독소(毒素)가 안 됩니다. 실지로 해 본 사람은 그렇게 됩니다. 그러니 잘 먹고 못 먹는 것이 없어집니다. 「항복기심」(降伏其心)을 이런 식으로 해야 합니다. 육체 생활만 치중(置重)하는 것에서 차차 육체 생활을 감축(減縮)해가면 편안하고 잠 잘오는 음식을 조금 먹어도 몸이 건강해지고 이렇게 마음 세계로 들어가서 마음이 드러나기 시작하다가 나중에 완전히 마음을 깨쳐 불보살 지경(地境)에 들어서면 전지전능해집니다. 집도 밥도 없는 게 승려생활입니다. 남이 해 놓은 밥 얻어먹고 그저 만나는 대로 애나 어른이나 자꾸 따라다니며 <마음>을 일러주고 알아 들었으면 또 딴 사람에게 가르쳐 줍니다. 하나를 모른다면 하나를 일러 주고 누워 자도 설법해 주고 죽어 송장이 되어도 가르쳐 주고 「죽어도 네가 죽은 것이 아니다. 네가 왜 죽느냐 너는 죽을 수 없다」 우리 불교법문 전부가 이런 소립니다. 경전이 모두 한문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 내용을 모를 뿐 입니다. 「그러므로 보살이 만일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라」하신 것입니다.
○중생교화(衆生敎化)가 곧 나의 완성
불교는 말하기는 쉬운 것 같아도 실천하기는 참 어렵습니다. 왜정 때 개운사(開運寺)에 시골서 큰 대법사(大法師)가 한 분 올라왔습니다. 그 법사가 법화경(法華經)·화엄경(華嚴經) 설명을 하고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우주관·인생관을 설명하는 것을 보면 틀림없이 부처가 다 된 것 같습니다. 그 사람 생긴 것도 그런 법문을 할 때 보면 얼굴이 꼭 부처님 닮았습니다. 밑에서 쳐다보면 세상에 사람이 저렇게 잘생길 수가 있나 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법문 다 듣고 신도들이 다 돌아갔는데 어느 한 선비가 그 법사님을 개인적으로 찾아뵙고 하는 말이 「우리 조모님이 한 분 계신데 돋보기가 없습니다. 스님께서도 우리 조모님과 나이가 같으신 것 같은데 그 돋보기가 좋아 보이니 그것을 주시면 참 고맙겠습니다.」하고 간청했습니다. 그 스님은 「내가 이것 없이는 설법도 못하고 큰일 납니다. 다른 것은 다 줘도 이것만은 안 됩니다.」 하자 그 선비는 코웃음 치며 「안경도 못 내놓는 사람이 딴 걸 어떻게 내놓겠는가. 돈이 있어도 혼자만 쓰려고 할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는 껄껄 웃으며 「입으로만 부처 노릇 하면 됩니까?」 하고는 절한 뒤 물러갔던 일이 있었습니다.
다시한번 부처님의 뜻을 요약하면『수보리야! 발심한 보살은 이와같이 네 마음을 항복 받는 것이다. 네 마음 가운데 죽 끓듯이 일어나는 태평양 파도 같은 번뇌를 항복받는 방법이 무엇이냐? 「이와같이」란 「여시」의 내용은 이러하다. 내가 이제 무량한 중생을 다 제도하리라 원을 세워가지고 동대문 시장도 가고 남대문 시장도 가고 남산도 올라가고 한강·해운대·금강산 어디에도 가서 길에서나 차안에서나 어디 가다가 아무데서나 사람모인데 있으면 설법해 주고 그래서 실지로 미쳤다고 젊은 놈이 저런다고 쫒아내면 달아나다 안 쫒아오면 또 사람들에게 설명해 주어라. 이렇게 확실히 미쳐야 하는데 여러 평생 미쳐 따라다니며 이렇게 하지만, 그래서 실지로 내가 많은 중생을 발심(發心)시켜서 성불시키지만 내 마음에는 내 설법 듣고 발심해 부처된 사람 하나도 없어야 하느니라. 그것이 너의 번뇌를 꺼 버리는 항복기심(降伏其心)하는 법이다.』그러신 것입니다.
이에 대한 뜻을 잘 모르면 염불(念佛)·참선(參禪)해 가지고 그 뜻을 알 때까지 해서 그 말을 알아들으면 부처가 됩니다. 사실은 우리가 몰라서 중생이지 불법을 다 알아듣고 나면 중생이 곧 부처입니다. 그러니 문수보살(文殊菩薩)·보현보살(普賢菩薩)은 정말 부처님 말씀을 못다 알고 덜 닦아서 보살이 아니라 중생을 다 건지기 위해 일부러 하는 보살입니다. 그러나 일체중생이 그 법문을 듣고 깨달아도 문수보살에게는 부처 된 중생 한 중생도 없습니다.
그러면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데 번뇌가 끊어지느냐? 왜 그렇게 똑바로 생각하는데 팔만 사천 번뇌를 일시에 다 해결 할 수 있느냐?」하는 그 뜻을 짐작이라도 바로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사상(四相)은 육체를 나로 삼는 데서
금강경에서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의 사상(四相)을 중시하는 것은 이것만 떨어지면 <마음>이 드러나게 되고 <참나>를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아상>이라 함은 내가 항상 말하는 육체를 <나>라 하고 생각을 <나>라고 하는 <가아(假我)>를 말합니다. 이 <가아>인 <아상>이 있기 때문에 인상·중생상·수자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를 다시한번 더 되풀이해서 사상(四相)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이 무엇인가. 발심이 무엇인가를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불교를 안다는 말은 인생을 바로 안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본성(本性)을 발굴해서 자기가 갈 수 있는 길을 깨달은 사람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깨달은 이인데, 「이런 사람은 어떻게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하며 어떻게 백팔번뇌 팔만사천 번뇌를 항복받아야 하겠습니까?」 하고 수보리가 질문을 하셨는데 그 뜻을 한번 더 풀어보면 이런 것입니다.
「인생이 꿈속이란 것은 알지만 그러나 이해가 앞설 때는 욕심도 나고 남녀 이성끼리 만나면 이상한 생각이 일어나고 이런 쓸데없는 꿈속의 일에 시달립니다. 태평양바다보다 더 복잡하고 심한 번뇌의 파도가 일어나서 잠도 제대로 못자고 음식을 먹어도 소화가 잘 안되니 옳지 않은 이 마음을 어떻게 항복 받아야 하겠습니까?」 하고 여쭈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이렇게 마음을 가지고 이렇게 항복 받아라. 「모든 중생을 다 제도하고도 제도한 것이 아니다」라고, 만일 중생을 교화했다는 생각이 있으면 그것은 <나다><남이다><중생이다><부처다><오래 산다> 하는 분별심(分別心)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이것은 발심한 보살이라 할 수 없다.』
중생은 다 제 잘난 멋에 삽니다. 부처님의 말씀에 「중생을 제도하라 하시면서 제도했다는 생각이 있으면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는 것이므로 보살이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사상(四相 :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으면 중생에 떨어진다는 것인데 이 사상은 곧 <나>로부터 벌어집니다. <나>란 생각은 본래부터 있는 생각이 아니고 객관을 상대할 때 <나>라는 생각을 냅니다. 그러나 이 생각이 사람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며 우리의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지금은 이 물건을 사랑하는 마음을 내다가도 얼마 안가면 싫어하고 미워합니다. 이와 같이 종잡을 수 없는 생각이 자기의 바탕일 수는 없고 그런 것을 좋다 싫다 하고 생각을 내는 주체가 <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내가 항상 말한 바와 같이 물질도 허공도 아닌 산 생명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동그라미도 네모 세모도 아닙니다. 마음자리는 모나고 둥근 게 아닌 형상을 초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먹물은 본래 검은 것이기 때문에 세계의 먹을 다 갈아도 하얗게 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물질이나 허공은 본래 생명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아무리 뭉치고 천층만층 높이 쌓아 봐도 그것이 듣고 보고 생각할 줄은 모릅니다. 그와 같이 물질적 요소로 이루어진 육체도 무엇을 보고 들을 줄은 모릅니다. 마음이 보고 싶어야 보고 듣고 싶어야 들립니다. 육체는 내가 아니라 나의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마음은 육체도 아니고 모든 것을 다 초월한 자리, 차원이전(次元以前)이고 태초이전(太初以前)이며 질량이전(質量以前)입니다. 이것이 온갖 생각의 주체(主體)이고 진아(眞我)입니다. 따라서 진아의 상대가 가아(假我)이며, 생각의 <나>입니다. <진아>니 <가아>니 해도 실제 마음은 <진아><가아>를 초월한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것조차 아닌 만사의(萬事)의 주체(主體)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설명으로 될 것이 아니고 스스로 깨쳐야 합니다,
깨달았다 견성(見性)했다는 말은 소위 밥 먹고 자고 일어나고 할 줄 아는 그 자기를 깨친 것이니 깨달았다고 해도 말이 안 됩니다. 부처님께서 깨쳐 놓고 보니 출가(出家)하려고 할 때 애쓰던 그 마음 그대로고 실달태자(悉達太子) 그대로입니다. 「육체 말고 자기 마음 그대로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아닌 진실상(眞實相) 그대로의 마음이 있겠구나」하고 이해가 될 때 그래서 우주에 대자유(大自由)있고 전지전능(全知全能)한 부처님께서 될 수 있다고 믿어지는 이 마음을 깨쳤다고 하는 것이 밥 먹고 똥 싸는 그 마음, 산모(産母)가 아기 어서 나가라고 힘주는 마음 그대로이니 이것은 깨쳤다고 해도 안 됩니다. 본래 미(迷)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깨칩니까? 그런데 육체를 <나>라고 하는 데서 <아상(我相)><가아(假我)>가 생기고 인상·중생상·수자상의 사상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체를 나라고 하다 보니 술에 미친 사람, 아편에 미친 사람이 되고 정치에 미친 사람, 문학에 미친 사람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 인간의 본성(本性)이 개발(開發)되지 않아서 그럽니다. 인간성(人間性)은 모든 것을 초월한 것을 뜻하며 선한 것 악한 것이 인간성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공부하는 사람은 번뇌가 일어나는 것을 걱정 말고 깨치지 못한 것만 걱정하라는 것입니다. 망상을 안 일으키려면 더 일어납니다. 망상 일어나려는 것은 내버려 두고 망상도 내가 일으키는 것이지 망상 저 혼자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망상은 가만두고 염불이든 참선이든 그것만 하면 오늘밤에 깨칠지 금생에 깨칠지 여하튼 깨치게 됩니다. 사람이 전생에 공이 많으면 금생에 깨치고 공이 적으면 내생에 깨치게 됩니다. 하여튼 깨치게 될 그 시간을 바라고 금생에 못하면 늙어 죽을 때까지 염불이나 하고 참선하고 마치면 그러면 내생에는 깨칩니다. 복도 많이 지어서 내생에는 복을 가지고 태어나고 머리도 지금보다 몇 억 만 배 좋게 태어납니다. 다만 공부하는 데는 깨치려 해도 안 되고 안 깨치려 해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다되어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가 될 그런 요소가 나한테 있구나, 오온(五蘊)이 내가 아니구나, 말하는 여기에 배고프면 밥 먹는 여기에 있겠구나.」 여기 저기 관혁(貫革)을 깨치게 됩니다. 그 부처님께서 이것을 어떻게 하면 알아들을까 하고 말씀하신 것이 49년 설법입니다. 그러니 경전마다 다 다른 것 같아도 모두 이 이야기입니다. 온갖 세상 학문의 원리가 다 나옵니다. 그걸 모르고 경을 들여다보면 불교의 핵심(핵심)이 어디 있는지,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마음이 부처란 소리가 어떤 뜻인지를 모르게 됩니다. 그러니 불교가 뭔지를 모른다는 것 입니다. 평생 강사(講師) 노릇해서 제자가 수천 명이 돼도 자기가 모르고 가르치니 제자도 모르고 듣습니다. 마치 눈먼 장님에게 매달려 길을 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참선을 하는 것도 그렇고 염불도 그렇고 다른 어떤 공부를 해도 불교의 근본진리가 어디로부터 어디로 가는지, 생사를 어떻게 해서 해탈할 것인지를 확실히 알고 가야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49년간의 기나긴 설법을 하셨던 것입니다.
육조(六祖)대사께서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을 듣고 깨치셨는데, 그 뜻은 「번뇌 망상 없이 살아라. 아무 모양, 주의, 사상 그런 거 개의치 말고 지금까지 배운 거 다 청산(청산)해 버리고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라.」 그런 뜻입니다. 욕심이 없어지고 아무 생각 없이 되면 물건이 제대로 보입니다.
우리가 기분으로 만물을 대하고 사람을 대하니 제 기분대로 비판해 치워 버립니다. 남의 말을 들어도 자기 기분 좋을 때는 그 말이 좋게 들리고 기분 나쁠 때는 나쁘게 처리되어 버리니 이것이 망상(妄想)입니다. 그것은 결국 육체 때문에 하루 밥 세 그릇 먹느라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좋은 말도 나쁘게 받아들이고 나쁜 말도 좋게 받아들이는 것은 필요 없다. 나는 물질도 허공도 아니니 자살도 할 수 없고 타살도 할 수 없고 죽을 방법이 없다. 그게 이렇게 얘기하고 듣고 있다. 이것이 마음이다.」 늘 이것을 앞세워서 <나>다, <남이다.> 하는 것이 없는 생활을 해야 중생을 초월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오늘도 병원에 어떤 보살을 문병 갔다 온 일이 있는데 별안간 사람이 와서 스님 좀 꼭 보자고 해서 누군지도 모르고 따라가서 한 시간이나 이야기했습니다. 집안 형편이 복잡해져서 마음을 쉴 수 없다며 눈물을 자꾸 흘립니다. 가정불화(家庭不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과(因果) 얘기를 해주고 관세음보살님 자꾸 부르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이 세상을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병이 됩니다. 그렇게 마음이 불안해지면 대번에 이것이 독소(毒素)로 변해서 온갖 병을 일으키는 때문입니다. 그래 당신이 그 마음을 풀기 전에는 천하 없이 기도(祈禱)를 하고 한국 돈 다 갖다 바치고 기도해도 천년만년 해도 그 병이 낫질 않습니다. 당신이 전생에 첩이 되어 남편에게 곤란을 주었거나 그렇지 않으면 본마누라가 되어가지고도 남편 번 돈으로 자꾸 딴 놈과 쓰고 다니고 나쁜 짓했기 때문에 이생에 와서 남편이 그러는 것이지 모든 것이 다 인과법(因果法)인데 아무 까닭 없이 그러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를 한 시간 정도 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그러냐?」고 하다가 나중에는 그 말 꼭 믿겠다고 하면서 안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당신이 인과를 안 믿으면 죽는다. 암(癌)은 아무리 째고 해봐도 별 수 없어 다른데 또 생긴다. 기분이 만든 암이기 때문에 뇌가 또 나빠지기도 하고 그러니 마음부터 항복 받으라」고 말해 주고 온 일이 있습니다.
마음이 먼저 바로 안정이 되어야 병도 낫습니다.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치료를 받는 것도 「병원에 가면 의사가 우리 병을 책임지고 고쳐준다」고 믿는 마음의 안정이 있기 때문에 효과가 잘 나타납니다.
치료하기 전에 벌써 자기 마음이 반은 고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주체는 마음이고 이 현실은 꿈이어서 꿈은 다 마음이 꾸어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서부터 백까지가 다 마음으로부터 나온 것인데, 중생들이 스스로 우주의 주재신(主宰神)의 피조물(被造物)이라 믿어 구속(拘束)되고 자연계(自然界)의 물리 화학(物理化學)의 원리가 절대적이라 하여 그것에 구속되고 무당이나 점장이에 구속되고 그러지만 중생들의 마음자리 불성자리는 본래부터 완전한 부처이어서 죽을래야 죽을 수 없는 전지전능(全知全能)한 실존(實存)이어서 가사 우주를 창조(創造)한 신(神)이 온다 해도 그 앞에서는 꼼짝 못하고 항복(降伏)하게 됩니다. 그것이 다 자기 마음이 만들었던 망상(妄想)이었으니 망상이 천리만리 사라진 본 마음자리가 나타나면 자연히 신이니 과학이니 신앙이니 미신이니 불교니 유교니 하는 따위의 제二의 산물(産物)인 그야말로 피조물(被造物)들은 다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중생들이 스스로 우주의 주재신(主宰神)이 있다고 믿고 자연과학(自然科學)의 원리에 의해 우리는 지배된다고 믿는 마음에 의해 지배(支配)되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그 실은 우리가 평소 아무것도 모르고 불법도 모르는 이런 사람이라도 심지어는 개·소·도야지같은 금수(禽獸)까지라도 산보고 높다는 말은 안하지만 산보고 높은 줄 알고 물보고 깊은 줄은 압니다. 이렇게 말은 없어도 알 줄 아는 이 자리는 전혀 아무것도 모르는 시간(時間)이나 공간(空間)이 아닌 실재(實在)이고 물질(物質)이나 에너지처럼 죽은 존재(存在)가 아닌 산 생명(生命)입니다. 이것이 눈을 통해서 내다보고 귀 구멍을 통해서 듣고 이러지 다른 놈은 다 죽은 것들이므로 그럴 놈이 없습니다. 보인다, 들린다 하는 생각 그것이 보고 들을 줄 아는 게 아니고 일체 보는 마음도 없고 생각하는 것도 없으며, 시간 공간을 초월하여 아무 생각도 없는 실재(實在)이고 실존(實存)이고 실상(實相)이고 한 이것이 직접 눈구멍으로 내다보고 귀 구멍으로 듣는 것입니다. 생각 그것도 이 실상의 반야(實相般若)인 마음으로부터 생각되어진 만들어진 피조물(被造物)임이 불과합니다.
지금까지 며칠 동안 이야기를 들어서 어느 정도 인식(認識)이 되었으리라 믿습니다. 맨 처음 절에 와서 법문(法門)을 듣고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 모르고 들을 때에도 실상(實相)인 적멸(寂滅) 그것이 귀를 통해서 잘 듣지 못하는 대로 들었지 딴 놈이 들을 놈은 없습니다. 허공이 들을 수 없고 고깃덩어리인 육체는 물질일 뿐이니 역시 못 알아들을 것이고 다른 귀신이나 도깨비가 와서 듣고 알려 준 것도 아닙니다. 설사 도깨비라 할지라도 그 실상은 역시 불성자리인 마음입니다. 지옥에 가서 두드려 맞고 아픈 줄 아는 것도 알고 보면 역시 실상자리인 그것이 알지 이것 빼놓고는 무엇이 아픈 줄 알고 재미있는 줄을 깨달을 놈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르고 들은 그때도 완전히 부처가 돼 가지고 들었고 차차 법문(法門)을 들어서 「세상은 무상(無常)한 것이다. 참선(參禪)을 해야겠구나」하고 말을 알아들을 때에도 역시 본래 완전히 부처가 되어서 듣습니다. 그러니 제도(濟度)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중에 번뇌망상이 다 없어졌다고 해서 별것이 아니고 내내 산보고 높은 줄 알고 물보고 깊은 줄 아는 그대로이고 다른 면목(面目)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도가 다 돼 있는 것이므로 실로 한 중생도 제도한 일이 없다(實無衆生 得滅度者)고 하신 것입니다. 다만 멀쩡한 부처가 딴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술 취해서 길 가는 것 붙들어 준 폭 밖에 안 됩니다. 술 취했다고 해서 다른 사람인 것은 아니고 술이 깨도 그 사람, 취해도 그 사람인 것과 같습니다.
중생들이 탐진치(貪瞋痴) 삼독주(三毒酒)에 취해 가지고 육체만 나인 줄 알고 이해타산(利害打算)하고 온갖 아상(我相)·인상(人相)·중생상(衆生相)·수자상(壽者相)에 집착(執着)하여 복잡한 세상을 만듭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탐진치의 삼독주(三毒酒)에서 깨어나라, 육체가 나라는 생각을 버려라, 내다 남이다 하는 것이 관념이고 없는 것이다.」하는 법문을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아공(我空)입니다. 번뇌망상, 온갖 지식(知識)과 경험(經驗)을 쌓아 가지고 하는 법은 이렇고 땅의 이치는 어떻고 인간 사회의 도리는 이런 것이라는 관념을 가지고는 서로 죽이려고 하고 전쟁을 하고 그럽니다. 그러나 네가 생각하는 그런 하늘도 없고 그런 땅도 그런 인생도 없고 그런 아버지 어머니도 없고 네가 생각하는 그런 몸뚱이도 있는 게 아닌 도리를 말씀하셨는데 이것이 법공(法空)입니다. 부처님의 법공(法空)의 진리를 듣고 나서 여태까지의 지식을 다 놓아 버리고 온갖 생각이 끊어지면 본래 있던 적멸(寂滅) 그 자리가 나타납니다. 마치 구름이 벗겨지고 나니 본래 있던 밝은 달이 나타난 것과 같아서 아예 없던 달이 구름 벗겨지고 나서 새삼스레 생긴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되면 「아아! 이제 알았구나」하고 깨달았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깨달았다는 생각마저 놓아 버리는 이것이 구공(俱空)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아공(我空)·법공(法空)·구공(俱空)의 이치를 깨달았다고 해서 본래 부처자리인 마음 바탕이 더 밝아진 것도 아니고 알 줄 아는 성품은 잘못된 착각을 품었다고 해서 손상(損傷)이 있느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닙니다. 근본 마음자리는 버러지나 굼벵이가 되었다고 해서 더러워진 것도 아니고 하나도 증감(增減)이 없이 불생불멸(不生不滅)이고 불변(不變)하는 일여평등체(一如平等體)입니다. 그러니 애당초에 이렇게 완전한 부처가 되어있으므로 제도(濟度)한다는 생각이 성립(成立)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생을 내가 제도 하겠다, 깨우쳐 주겠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이 사람은 중생 제도할 자격(資格)이 없는 사람이고 보살(菩薩)이 될 수는 더욱더 없는 것입니다. 실제로 중생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고 전체가 부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법사(法師)거니, 내가 누구를 가르쳐 주었거니, 계(戒)를 내가 일러 주었거니, 내 제자(弟子)거니 하는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르쳐주지도 않고 제도하지도 않았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고 제도하기는 하되 그런 생각이 없이 무심(無心)으로 하고, <하는 것> 없이 한다는 말씀입니다. 만일 아무것도 안하는 것이 있다면 이것은 소승이고 공(空)에 떨어진 것이며, 대승(大乘)이 아니고 금강경의 말씀을 바로 배운 것이 아닙니다. 금강경의 말씀은 공의 사상을 철저히 말하지만 거기에 집착하여 머무르라는 것이 아니고 상없는 마음으로 머무름 없이 중생을 제도하고 인류의 구제를 위해 공의 원리로 백천억의 육신을 바치고 봉사하라는 뜻입니다.
중생을 발심시켜서 일일이 지도를 해서 견성(見性)을 하게하고 보살만행(菩薩萬行)을 잘하도록 호념(護念)해 주고 부촉(付囑)해서 정각(正覺)을 이루고 성불(成佛)을 하게 하는 것이 분명히 있지만 그것은 다 꿈속에서 하는 일이고 관념(觀念)일 뿐, 꿈을 깨고 보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도 거기까지 가는 길인 노정기(路程記)만을 말씀하신 것이지 그 당처(當處)자리는 시방제불(十方諸佛)이 한 마디도 말씀하시지 못한 것입니다. 그곳은 말이나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꿈속에 들어가서 꿈으로 꿈같은 이야기를 해서 꿈으로 꿈을 깨도록 하는 말씀일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꿈밖의 이야기는 한 마디도 이야기하지 못했고 실상(實相)의 소식에 대해서는 입을 뗄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부처님도 아무 상관도 없는 말씀만 하셨지 사실로 중생이 제도 받은 일은 없습니다. 생각이 미치지 못 하는 자리이고 본래부터 그렇게 완전한 자리이므로 제도 한다는 말이 성립될 수 없습니다. 이 자리는 일체 사상, 인륜도덕(人倫道德)이 용납(容納)되지 않습니다. 선방(禪房)에서 참선(參禪)할 때 조금만 허술하면 방망이가 막 내려옵니다. 망상이나 피우는 그런 머리통은 부서져도 좋다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일체 중생을 실제로 제도했다 하더라도 제도했거니 하는 생각이 있다고 하면 이 사람은 곧 중생의 실재가 무엇인지를 잘 모르는 사람이고 동시에 불법을 잘 모르는 사람이니, 이런 사람은 보살일 수 없고 중생을 제도할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굶는 사람에게 쌀말이나 주었다 하더라도 주었거니 하는 생각이 있으면 아상(我相)·인상(人相)이 있는 것이고, 중생을 제도하겠다고 나선 보살이 제도를 했거니 제도를 받았거니 하는 생각이 있어서 선생이니 제자니 하는 생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고 불법을 성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