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법(法)은 무생(無生)

"화성(化城)이란 이승(二乘) 및 십지(十地)·등각(等覺)·묘각(妙覺)을 말한 것이다. 이것은 모든 중생을 이끌어 주기 위한 방편으로 세운 가르침이므로, 글자 그대로 모두 변화하여 보인 성곽이다. 또한 보배가 있는 곳이란 다름 아닌 참된 마음으로서의 본래 부처이며, 자기 성품의 보배를 말한다. 이 보배는 사량분별(思量分別)에 속하지도 않으니, 그 자리에는 아무 것도 세울 수 없다.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으며, 주관도 객관도 없는데 어는 곳에 성(城)이 있겠느냐? 만약 '이곳을 이미 화성이라 한다면 어느 곳이 보배 있는 곳인가?' 하고 묻는다면, 보배 있는 곳이란 가리킬 수 없는 것인데, 가리킨다면 곧 방위와 처소가 있게 되므로, 참으로 보배가 있는 곳이 될 수 없다. 그래서 경에서도 말씀하시기를 '가까이 있다' 고만 했을 뿐이다. 그것을 얼마라고 한정 할 수 없는 것이니, 오로지 그 자체에 계합하여 알면 되는 것이다.

천제(闡提)란 믿음이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육도(六道)의 모든 중생들과 이승(二乘)들은 부처님의 과『佛果』가 있음을 믿지 않으니, 그들을 모두 선근(善根)이 끊긴 천제라 한다. 보살이란 불법이 있음을 굳게 믿고 대승·소승을 차별하지 않으며, 부처와 중생을 같은 법성(法性)으로 본다. 이들을 가리켜 선근이 있는 천제(闡提)라고 한다.

대개 부처님의 설법『聲敎』을 듣고 깨닫는 사람을 성문(聲聞)이라 하고, 인연을 관찰하여 깨닫는 사람을 연각(緣覺)이라 한다. 그러나 자기 마음속에서 깨닫지 못한다면, 비록 부처가 된다 하더라도 역시 성문불이라 한다.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교법(敎法)에 있어서는 깨닫는 것이 많으나, 마음 법『心法』에 있어서는 깨닫지 못하는데, 이렇게 하면 비록 겁을 지나도록 수행을 한다 해도 마침내 본래의 부처는 아니다. 만약 마음에서 깨닫지 못하고서 교법에서 깨닫는다면, 마음은 가벼이 여기고 가르침만 중히 여겨 흙덩이나 쫓는 개 꼴이 되고 말 것이다. 이것은 본 마음을 잊었기 때문이다. 본래 마음에 계합하면 될 뿐, 법을 구할 필요가 없으니, 마음이 곧 법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계가 마음을 가로막고 현상『事』이 본체『理』를 흐리게 하여, 의례껏 경계로부터 도망쳐 마음을 편히 하려 하고, 현상을 물리쳐서 본체를 보존하려 한다. 그러나 이들은 오히려 마음이 경계를 가로막고, 본체가 현상을 흐리게 한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다.

마음을 비우기만 하면 경계는 저절로 비고, 본체를 고요하게만 하면 현상은 저절로 고요해지므로 거꾸로 마음을 쓰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이 보통 마음을 비우려 들지 않는 까닭은 공(空)에 떨어질까 두려워해서인데, 자기 마음이 본래부터 비었음을 모르는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의 경우는 경계는 없애려고 하면서 마음은 없애지 않는다.

그러나 지혜로운 이는 마음을 없애지 경계를 없애지 않고, 나아가 보살은 마음이 허공과 같아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자기가 지은 복덕(福德)마저도 탐착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버림에는 세 등급이 있다. 즉 안팎의 몸과 마음을 다 버림이 허공과 같으며, 어디에고 집착하지 않은 다음에 곳에 따라 중생에게 응하되, 제도하는 주체도 제도될 대상도 모두 잊는 것이 '크게 버림『大捨』'이다. 만약 한편으로 도를 행하고 덕을 펴면서 한편으로는 그것을 이바지하여 놓아 버리고 바라는 마음이 전혀 없으면 '중간의 버림『中捨』'이다. 또한 착한 일을 널리 행하면서도 바라는 바가 있다가 법을 듣고서 빈『空』 줄을 알고 집착하지 않으면, 이것은 '작은 버림『小捨』'이다.

큰 버림은 마치 촛불이 바로 정면에 있는 것과 같아서 더 미혹될 것도 깨달을 것도 없으며, 중간 버림은 촛불이 옆에 있는 것 같아서 밝기도 하고 어둡기도 하며, 작은 버림은 마치 촛불이 등뒤에 있는 것 같아서 눈앞의 구덩이나 함정을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보살의 마음은 허공과 같아서 일체를 다 버린다. 과거의 마음을 얻을 수 없음이 과거를 버린 것이고, 현재의 마음을 얻을 수 없음이 현재를 버린 것이며, 미래의 마음을 얻을 수 없음이 미래를 버린 것이니, 이른바 3세를 함께 버렸다고 하는 것이다.

여래께서 가섭에게 법을 부촉하실 때로부터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하였으니, 마음과 마음이 서로 다르지 않다. 허공에다 도장을 찍으면 아무 문체가 찍히지 않고, 그렇다고 물건에다가 도장을 찍으면 법을 이루지 못한다. 그러므로 마음으로써 마음에 새기는 것이니, 마음과 마음이 다르지 않다. 새김『能』과 새겨짐『所』이 함께 계합하기란 매우 어려운 것이어서, 그것을 얻은 사람은 매우 적다. 그러나 마음은 마음 없음『無心』을 말하는 것이고, 얻음도 얻었다 할 것이 없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세 몸『三身』이 있는데, 법신(法身)은 자성의 허통(虛通)한 법을, 보신(報身)은 일체 청정(淸淨)한 법을, 화신(化身)은 육도만행법을 말한다. 법신의 설법은 언어·형상·문자로써 구할 수 없으며, 설할 바도 없고 증득할 바도 없이 자성이 허통(虛通) 할 뿐이다.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한 법도 설할 만한 법이 없음을 설법이라 이름한다'고 하셨다. 보신이나 화신은 근기에 따라 감응하여 나타나고, 설하는 법 또한 현상에 따르고 근기에 알맞게 섭수하여 교화하는 것이므로, 이 모두는 참다운 법이 아니다. 그래서 '보신·화신은 참된 부처가 아니며, 법을 설하는 자가 아니다'고 하신 것이다.

이른바 밝고 정밀한 성품인 일정명(一精明)이 나뉘어 6화합(六和合)이 된다고 하였다. 일정명이란 바로 한 마음『一心』이요, 6화합이란 6근(根)이다. 이 6근은 각기 6진(塵)과 합하는데, 눈은 색과, 귀는 소리와, 코는 냄새와, 혀는 맛과, 몸은 촉감과, 뜻은 법과 제각기 합한다. 그런 가운데 6식(識)을 내어 18계(十八界)가 된다. 만약 이 18계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음을 알면, 6화합이 하나로 묶이어 일정명이 된다. 일정명이란 곧 마음이다. 그런데 도를 배우는 사람들은 이것을 모두 알면서도, 일정명과 6화합에 대해 알음알이만을 지어서 드디어는 교설에 묶이어 본래 마음에 계합치 못한다.

여래께서는 세간에 나타나시어 일승(一乘)의 참된 법을 말씀하시려 하나, 중생들은 부처님을 믿지 않고 비방하여 고통의 바다에 빠지게 될 것이며, 그렇다고 부처님께서 전혀 말씀하시지 않는다면 설법에 인색한 간탐( 貪)에 떨어져 중생을 위하는 것이 못된다고 하시사, 현묘한 도를 널리 베푸시고 방편을 세워 삼승(三乘)이 있음을 말씀하셨다. 그래서 대승과 소승의 방편이 생겼고, 깨달음에도 깊고 얕음의 차이가 있게 되었으나, 이것은 모두 근본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오직 일승의 도가 있을 뿐, 나머지 둘은 참된 것이 아니다'고 하셨다. 그러나 마침내는 한 마음의 법『一心法』을 나타내시지 못했기 때문에 가섭을 불러 법좌를 함께 하시사, 따로이 그 '한 마음'을 부촉하셨으니, 이는 언설을 떠난 법이다. 이 한 가닥의 법령은 따로이 행해지는데, 만약 계합하여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은 그 즉시 부처님 지위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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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마음을 잊어버림

9월 1일 대사께서는 배휴(裴休)에게 말씀하셨다.

"달마스님께서는 중국에 오신 이후로 오로지 한 마음만을 말씀하셨고 한 법만을 전하셨다. 또한 부처로써 부처에게 전하실 뿐 다른 부처는 말씀하지 않으셨고, 법으로써 법을 전하시고 다른 법을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법이란 설명될 수 없는 법이며, 부처란 취할 수 없는 부처로서 본래 근원이 청정한 마음이다. 오직 이 일승(一乘)만이 사실이고, 나머지 이승(二乘)은 참됨이 아니다.

반야(般若)는 지혜(智慧)라는 뜻으로서, 모양이 없는 본래 마음이다. 범부는 도(道)에 나아가지 않고 단지 육정(六情)만을 함부로 하여 육도(六道)에 빠져 방황한다. 도를 배우는 사람이 한 생각 모든 견해를 일으키면 곧바로 외도에 떨어진다. 또한 남(生)이 있음을 보고 없어짐으로 나아가면 성문도(聲聞道)에 떨어지고, 남(生)이 있음을 보지 않고 오로지 없어짐만을 보면 연각도(緣覺道)에 떨어진다. 법은 본시 남(生)이 없으므로 이제 또한 없어짐도 없으니, 이 두 견해를 일으키지 않아서 싫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으며 일체의 모든 법이 오직 한 마음이어야만 그런 다음에 불승(佛乘)이 된다.

범부는 모두가 경계를 좇아 마음을 내서 좋고 싫음이 있다. 만일 경계가 없기를 바란다면 그 마음을 잊어야 하고, 마음을 잊으면 경계가 텅 비며, 경계가 공적하면 곧 마음이 없어지느니라. 만약 마음을 잊지 못하고 경계만을 없애려 한다면, 경계는 없어지지 않으면서 오히려 분잡히 시끄러움만 더할 뿐이다.

그러므로 만법은 오직 마음일 뿐이며, 그 마음조차도 얻을 수 없는데 다시 무엇을 구하겠느냐? 반야(般若)를 배우는 사람이 얻을 만한 어떤 법도 없는 줄 알게 되면, 삼승(三乘)에는 뜻이 끊어져 오직 하나의 진실뿐이다. 증득하여 깨달았다고 할 것이 없는 자리인데도 '나는 깨달았노라'고 한다면, 모두가 증상만(增上慢)을 내는 사람이다. {법화경}회상에서 옷을 떨치고 나가버린 사람들이 모두가 이러한 무리들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있어서 실로 얻었다 할 것이 없다'고 하셨으니, 그저 묵묵히 계합할 따름이다.

범부 중생들은 다만 죽는 순간에 오온(五蘊)이 모조리 비고 사대(四大)는 '나(我)'가 없음을 본다. 그러나 참된 마음은 모양이 없어서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는다. 태어났다고 해서 성품이 오는 것이 아니고 죽었다고 해서 성품이 가는 것이 아니다. 담연히 둥글고 고요하여 마음과 경계가 한결같다. 이렇게 될 수만 있다면 그 자리에서 단박 깨쳐 삼세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니, 곧 세간을 뛰어넘은 사람이다. 털끝만큼이라도 나아가는 향방이 있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 만일 모든 부처님께서 맞이해 주시는 것 같은 가지가지 신기한 모습을 보게 될지라도 역시 마음에 두려움이 없어야 한다. 다만 스스로 마음을 잊고서 법계와 같아지면, 바로 자재(自在)를 얻은 것이니, 이것이 곧 요긴한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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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허공이 곧 법신(法身)

팔만사천 법문은 팔만 사천 번뇌를 치료하는 것으로서, 다만 대중을 교화 인도하는 방편일 뿐 일체 법이란 본래 없다. 그러므로 여의는 것이 곧 법이요, 여의줄 아는 이가 곧 부처이다. 일체 법을 여의기만 하면 얻을 만한 법이 없으니, 도를 배우는 사람이 깨닫는 비결을 터득하고자 한다면, 마음에 어느 것이라도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부처님의 참된 법신(法身)은 마치 허공과 같다'고 한 비유가 바로 이것이다.

법신(法身)이 곧 허공이며 허공이 곧 법신인데도 '법신이 허공계에 두루하고 있다'고 하면, 사람들은 허공 가운데에 법신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법신 그대로가 허공이며 허공 그대로가 법신임을 모른다. 만약 결정코 허공이 있다고 한다면 법신은 허공이 아니다. 그렇다고 결정코 법신이 있다고 한다면 법신이 허공이 아니다. 다만 허공의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 허공이 곧 법신이니라. 법신의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 법신이 곧 허공이니라. 허공과 법신은 전혀 다른 모양이 없으며, 번뇌와 보리도 다른 모양이 없는 것이니, 일체의 모양을 여윔이 곧 부처이니라.

범부(凡夫)는 경계(境界)를 취하고 도를 닦는 사람은 마음을 취하나니, 마음과 경계를 함께 잊어야만 참된 법이다. 경계를 잊기는 오히려 쉬우나 마음을 잊기는 매우 어렵다. 사람들이 마음을 감히 잊어버리지 못하는 까닭은 공(空)에 떨어져 부여잡을 바가 없을까 두려워해서인데, 이는 공이 본래 공이랄 것도 없고, 오로지 한결 같은 참된 법계[一眞法界]임을 몰라서 그런 것이다.

신령스런 깨달음의 성품은 비롯없는 옛날부터 허공과 수명이 같아서 한번도 생기거나 없어진 적이 없으며, 있은 적도 사라진 적도 없다. 더럽거나 깨끗한 적도, 시끄럽거나 고요한 적도 없고, 젊지도 늙지도 않으며, 방위와 처소도 없고, 안팎의 구분도 없다. 또한 개수로 셀 수량이나 형상·색상·소리도 없다. 그러므로 찾을래야 찾을 수 없고, 지혜로써 알 수도 없으며,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며, 경계인 사물을 통해서 이해할 수도 없고, 또한 힘써 공부한다고 해도 다다를 수 없다.

 

모든 불·보살과 일체의 꿈틀거리는 벌레까지라도 똑같이 지닌 대열반의 성품이다. 이 성품이 곧 마음이요, 마음이 곧 부처이고, 부처가 곧 법이니 한 생각 참됨을 여의면 모두가 망상이 된다. 마음으로써 다시 마음을 구하지 말고, 부처를 가지고 다시 부처를 구하지 말 것이며, 법을 가지고 다시 법을 구하지 말라. 그러므로 도를 배우는 사람이 당장에 무심하여 묵연히 계합(契合)할 뿐이니, 마음으로 헤아린다면 곧 어긋난다.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하는 이것이 바른 견해이니, 밖으로 경계를 좇으면서 그것을 마음이라고 잘못 알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이것은 도둑을 제 자식으로 잘못 아는 격이다.

탐욕·성냄·어리석음이 있기 때문에 계·정·혜를 세워 말씀하신 것인데, 애초부터 번뇌가 없다면 깨달음인들 어디 있겠느냐? 그러므로 조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부처님께서 일체법(一切法)을 말씀하신 것은 일체의 마음을 없애기 위함이로다. 나에게 일체의 마음이 없거니 일체 법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셨다. 본래 근원이 청정한 부처에다가는 다시 어떤 것도 덧붙이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마치 허공이 수많은 보배구슬로 장엄할지라도 마침내 머무를 수 없는 것과 같다. 불성(佛性)도 허공과 같아서 비록 무량한 공덕과 지혜로써 장엄한다 하더라도 마침내 머무를 수 없는 것이다. 다만 본래 성품이 미혹되어 더더욱 보지 못할 뿐이다.

이른바 심지법문(心地法門)이란 만법이 이 마음을 의지하여 건립되었으므로, 경계(境界)를 만나면 마음이 있고 경계가 없으면 마음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깨끗한 성품 위에다가 경계에 대한 알음알이를 굳이 짓지 말라. 또 '정혜(定慧)의 비추는 작용이 역력히 밝고 고요하면서도 또렷하다[寂寂惺惺]'든가, '보고 듣고 느끼고 안다[見聞覺知]'는 것은 모든 경계 위에서 알음알이를 짓는 것이니, 이 말은 임시로 중하근기의 사람들을 위하여 설법하는 경우라면 몰라도, 몸소 깨닫고자 하는 사람은 이와 같은 견해를 지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이것은 모두 경계의 법이므로 유견(有見)이라는 함정에 빠진 것이다. 일체 법에 대해서 있다거나 없다는 견해를 짓지만 않으면, 곧 법을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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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일체를 여윌 줄 아는 사람이 곧 부처

강서 그러므로 도를 배우는 사람은 의심치 말아야 한다. 사대(四大)로 몸을 삼으나, 사대에는 '나(我)'가 없고, 그 '나'에도 또한 주재(主宰)가 없다. 그러므로 이 몸에는 '나'도 없고 '주재'도 없음을 알아야 한다. 또한 오음(五陰)으로 마음을 삼지만, 이 오음 역시 '나'도 '주재'도 없다. 그러므로 마음 또한 '나'도 '주재'도 없음을 알아야 한다. 육근(六根)·육진(六塵)·육식(六識)이 화합하여 생멸(生滅)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다.

십계(十八界)가 이미 공(空)하여 일체가 모두 공하고, 오직 본래의 마음이 있을 뿐, 맑아서 호호탕탕 걸림이 없다. 분별의 양식[識食]과 지혜의 양식[智食]이 있다. 즉 사대(四大)로 된 몸은 주림과 질병이 근심거리인데, 알맞게 영양을 공급하여 탐착을 내지 않는 것이 '지혜의 양식'이고, 제멋대로 허망한 분별심을 내어, 입에 맞는 것만 구하면서 싫어하여 버릴 줄을 모르는 것을 '분별의 양식'이라 한다.

성문(聲聞)이란 소리를 듣고 깨닫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들은 자기 마음 자리를 깨닫지 못하고 설법을 듣고 거기에 알음알이를 일으킨다. 혹은 신통(神通)이나 상서로운 모양·언어·동작. 등에 의지하여 보리(菩提)·열반(涅槃)이 있다는 설법을 듣고 삼아승지겁을 수행하여 불도를 이루려 한다. 이것은 모두 성문의 도(道)에 속하는 것이며, 그것을 성문불(聲聞佛)이라 한다. 다만 당장에 자기의 마음이 본래 부처임을 단박 깨달으면 될 뿐이다.

한 법도 얻을 것이 없으며, 행도 닦을 것이 없으면, 이것이 가장 으뜸가는 도이며 참으로 여여(如如)한 부처이니라. 도를 배우는 사람이 한 생각 생기는 것만을 두려워하여 곧 도와는 멀어지는 것이니, 생각마다 모양이 없고 생각마다 하염없음이 곧 부처이다. 도를 배우는 사람이 부처가 되려고 한다면, 불법을 모조리 배울 것이 아니라 오직 구함이 없고 집착이 없음을 배워야 한다. 구함이 없으면 마음이 나지 않고, 집착이 없으면 마음이 없어지지 않나니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것이 곧 부처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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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일체를 여윌 줄 아는 사람이 곧 부처 ▲ 위로

강서 그러므로 도를 배우는 사람은 의심치 말아야 한다. 사대(四大)로 몸을 삼으나, 사대에는 '나(我)'가 없고, 그 '나'에도 또한 주재(主宰)가 없다. 그러므로 이 몸에는 '나'도 없고 '주재'도 없음을 알아야 한다. 또한 오음(五陰)으로 마음을 삼지만, 이 오음 역시 '나'도 '주재'도 없다. 그러므로 마음 또한 '나'도 '주재'도 없음을 알아야 한다. 육근(六根)·육진(六塵)·육식(六識)이 화합하여 생멸(生滅)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다.

십계(十八界)가 이미 공(空)하여 일체가 모두 공하고, 오직 본래의 마음이 있을 뿐, 맑아서 호호탕탕 걸림이 없다. 분별의 양식[識食]과 지혜의 양식[智食]이 있다. 즉 사대(四大)로 된 몸은 주림과 질병이 근심거리인데, 알맞게 영양을 공급하여 탐착을 내지 않는 것이 '지혜의 양식'이고, 제멋대로 허망한 분별심을 내어, 입에 맞는 것만 구하면서 싫어하여 버릴 줄을 모르는 것을 '분별의 양식'이라 한다.

성문(聲聞)이란 소리를 듣고 깨닫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들은 자기 마음 자리를 깨닫지 못하고 설법을 듣고 거기에 알음알이를 일으킨다. 혹은 신통(神通)이나 상서로운 모양·언어·동작. 등에 의지하여 보리(菩提)·열반(涅槃)이 있다는 설법을 듣고 삼아승지겁을 수행하여 불도를 이루려 한다. 이것은 모두 성문의 도(道)에 속하는 것이며, 그것을 성문불(聲聞佛)이라 한다. 다만 당장에 자기의 마음이 본래 부처임을 단박 깨달으면 될 뿐이다.

한 법도 얻을 것이 없으며, 행도 닦을 것이 없으면, 이것이 가장 으뜸가는 도이며 참으로 여여(如如)한 부처이니라. 도를 배우는 사람이 한 생각 생기는 것만을 두려워하여 곧 도와는 멀어지는 것이니, 생각마다 모양이 없고 생각마다 하염없음이 곧 부처이다. 도를 배우는 사람이 부처가 되려고 한다면, 불법을 모조리 배울 것이 아니라 오직 구함이 없고 집착이 없음을 배워야 한다. 구함이 없으면 마음이 나지 않고, 집착이 없으면 마음이 없어지지 않나니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것이 곧 부처이니라.

 

3. 근원이 청정한 마음

강서 본래 부처 자리에는 실로 그 어떤 것도 없다. 툭 트이고 고요하여 밝고 오묘하며 안락할 따름이다. 스스로 깊이 깨달으면 당장 그 자리이므로 원만구족(圓滿具足)하여 다시 모자람이 없다. 설사 삼아승지겁을 정진 수행하여 모든 지위를 거치더라도 한 생각 증득하는 순간에 이르러서는 원래 자기 부처를 깨달을 뿐, 궁극의 경지에 있어서는 어떠한 것도 거기에 더 보탤 것이 없다.

깨닫고 난 다음 지난 세월의 오랜 수행을 돌이켜 보면 모두 꿈속의 허망한 짓일 뿐이다. 그래서 여래께서는, '내가 아뇩다라삼막삼보리에 있어서 실로 얻었다 할 것이 없느니라. 만약 얻은 바가 있었다면, 연등부처님께서는 나에게 수기하시지 않았을 것이다'고 하셨다. 또 말씀하시기를,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으니, 이것을 깨달음이라 한다'고 하셨다.

본래 청정한 이 마음은 중생의 세계와 부처님의 세계, 산과 물, 모양 있는 것과 없는 것 및 온 시방법계가 다 함께 평등하여 너다 나다 하는 생각이 없다. 이 본래 근원이 청정한 마음은 항상 뚜렷이 밝아 두루 비추고 있는데도 세상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고 다만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見聞覺知]으로 마음을 삼고, 그것에 덮이어서 끝내는 정교하고 밝은 본체를 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당장에라도 무심(無心)하기만 하면, 본 마음자리가 스스로 나타나서 밝은 햇살이 공중에 떠오르듯 시방법계를 두루 비추어 장애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도를 배우는 사람이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일거일동(一擧一動)을 마음이라고 오인하는 것이다. 이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見聞覺知]을 텅 비워 버리면 마음 길이 끊기어서 어느 곳에라도 들어갈 틈이 없느니라. 다만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곳에서 본래 마음을 인식할지라도, 본래 마음은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데에도 속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떠나 있지도 않느니라.

그러므로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가운데 다만 견해를 일으키거나 생각을 움직이지 말아야 하며, 그렇다고 해서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을 떠나 마음이나 법을 찾아서도 안되며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을 버리고 법을 취해서도 안 된다. 그리하면 즉(卽)하지도 않고 여의지도[離] 않으며, 머물지도 집착하지도 않으며, 종횡으로 자재(自在)하여 어느 곳이든지 도량(道場)아님이 없다.

세상 사람들은 모든 부처님께서 마음 법을 전한다는 말을 듣고는 마음 밖에 따로 깨닫고 취할 만한 법이 있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마음을 가지고 법을 찾으면서, 마음이 곧 법이고 법이 곧 마음인 줄 알지 못한다. 마음을 가지고 다시 마음을 찾지 말아야 한다. 그래 가지고는 천만 겁을 지나더라도 마침내 깨칠 날은 없을 것이다. 당장 무심함만 같지 못할 것이니, 그 자리가 본래 법이다. 마치 힘센 장사가 자기 이마에 보배 구슬이 있는 줄을 모르고 밖으로 찾아 온 시방세계를 두루 다니며 찾아도 마침내 얻지 못하다가 지혜로운 이가 그것을 가르쳐 주면 본래 구슬은 예와 다름이 없음을 보는 것과 같은 일이다.

도를 배우는 사람도 자기 본심(本心)을 미혹하여 그것이 부처임을 알지 못하고 밖으로 찾아다니면서 의식적으로 수행을 하며 차례를 밝아서 깨달으려고 하지만 억겁 동안 애써 구한다고 해도 영원히 도를 이루지 못할 터인즉 당장 무심함만 못하다.

일체의 법이 있다 할 것도 얻었다 할 것도 없고, 의지할 것도 머무를 것도 없으며, 주관이니 객관이니 할 것도 없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알아야 한다. 망념(妄念)을 일으키지 않는 그 자리가 바로 깨치는 자리다. 그때 가서는 다만 본래 마음인 부처를 깨달을 뿐 많은 세월을 거친 노력은 모두 헛된 수행이다. 마치 힘센 장사가 구슬을 얻은 것은 자기가 본래 갖고 있던 구슬을 얻은 것일 뿐, 밖으로 찾아다녔던 노력과는 상관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내가 아뇩다라삼막삼보리를 실제로는 얻었다 할 것이 없으나 사람들이 믿지 않을까 염려스럽기 때문에 다섯 가지 눈[五眼]과 다섯 가지 말[五語]로써 끌어다 보였노라. 이것은 진실되이 허망하지 않은 것이니, 이것이 맨 으뜸되는 뜻의 이치[弟一義諦]이니라'고 하셨다.

 

1. 한마음 깨치면 부처

황벽(黃檗: ?-850) 스님이 배휴(裵休:797-870)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부처님과 일체 중생은 한마음일 뿐 거기에 다른 어떤 법도 없다. 이 마음은 본래로부터 생기거나 없어진 적이 없으며, 푸르거나 누렇지도 않다. 정해진 틀이나 모양도 없으며, 있고 없음에 속하지도 않고, 새롭거나 낡음을 따질 수도 없다. 또한 길거나 짧지도 않고, 크거나 작지도 않다. 그것은 모든 한계와 분량, 개념과 언어, 자취와 상대성을 뛰어 넘어 바로 그 몸 그대로 일 뿐이다. 그러므로 생각을 움직였다 하면 곧 어긋나 버린다. 이것은 마치 허공과 같아서 끝이 없으며 재어볼 수도 없다.

이 한마음 그대로가 부처일 뿐이니 부처와 중생이 새삼스레 다를 바가 없다. 중생은 다만 모양에 집착하여 밖에서 구하므로, 구하면 구할수록 점점 더 잃는 것이다. 부처에게 부처를 찾게 하고 마음으로 마음을 붙잡는다면, 겁(劫)이 지나고 몸이 다하더라도 바라는 것은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중생들은 마음을 쉬고 생각을 잊어버리면 부처가 저절로 눈앞에 나타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이 마음 그대로가 부처이고, 부처가 곧 중생이다. 그러므로 중생이라 해서 마음이 줄지 않고, 부처라 해서 더 늘지도 않는다. 또한 육도만행(六道萬行)과 항하사(恒河沙) 같은 공덕이 본래 그 자체에 갖추어져 있어서, 닦아서 보탬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인연을 만나면 곧 베풀고, 인연이 그치면 그대로 고요하나니, 만일 이것이 부처임을 결정코 믿질 않고 겉모습에 집착하여 수행하려 하고, 그것으로써 공부를 삼는다면 그 모두가 망상일 뿐 도와는 서로 어긋나게 된다.

이 마음이 곧 부처요 다시 다른 부처가 없으며, 또한 다른 어떤 마음도 없다. 이 마음은 허공같이 밝고 깨끗하여 어떤 모습도 하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마음을 일으켜 생각을 움직이면 법의 몸[法體]과 어긋나는 동시에 모양에 집착하게 된다. 비롯 없는 옛날로부터 모양에 집착한 부처란 없다. 또한 육도만행을 닦아서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곧 차제(次第)를 두는 것이니, 차제 있는 부처란 본래로 없다.

한마음 깨치면 다시 더 작은 법도 얻을 것이 없으니, 이것이야말로 참된 부처이다. 부처와 중생은 한 마음으로 다름없음이 허공과 같아서, 그것에는 잡됨도 무너짐도 없고, 온 누리를 비추는 햇살과도 같다. 해가 떠올라 온 천하가 두루 밝아질 때라도 허공은 한번도 밝은 적이 없으며, 해가 져서 어둠이 온 천하를 덮을지라도 허공은 어두웠던 적이 없다. 이렇게 밝고 어두운 경계가 서로 번갈아 바뀐다 해도 허공의 성품은 툭 트이어 변하지 않는 것이니, 부처와 중생의 마음도 꼭 이와 같다.

만약 부처를 관(觀)하면서 깨끗하고 밝으며 속박을 벗어났으리라는 생각을 떠올린다든가, 중생은 때묻고 어두우며 생사의 고통이 있으리라는 관념을 버리지 못한다고 해보자.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수많은 세월이 지나더라도 깨닫지 못할 것인데, 이는 모양에 집착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오직 이 한 마음일 뿐, 거기에 티끌만큼의 어떤 법도 있을 수 없으니, 이 마음 그대로가 곧 부처다. 그런데 지금 도를 배우는 이들은 이 마음 바탕을 깨닫지 모하고 문득 마음에서 마음을 내고 밖에서 부처를 구하면 모양에 집착하여 수행을 하고 있으니, 모두가 악법이지 깨닫는 도가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늙고 죽는다.



그렇다면 늙고 죽음이라는 현상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유사 이래 인류는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왔다. 신에게 기도하기도 하고,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냉동인간이나 동물복제를 통해 건강과 장수를 추구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들은 결코 궁극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병고에서 벗어나려면 병의 원인을 알아야하는 것처럼, 늙고 죽음에서 벗어나려면 늙고 죽음의 원인을 알아야 한다. 늙고 죽음의 근본원인은 무엇일까?



궁극적으로 ‘내’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있으므로 ‘나의 늙고 죽음’이 있는 것이다. 결국 늙고 죽음을 극복하는 궁극적이고도 유일한 방법은 ‘내’가 사라지는 것이다.



내가 사라진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들은 죽음을 ‘나의 사라짐’으로 생각하지만, 죽음은 단지 ‘내 몸’의 사라짐일 뿐이다. 몸이 사라진다고 해서 마음도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마음은 여전히 남아서 자신의 깜냥에 합당한 과보를 받는다. 베푸는 마음을 자주 연습했으면 부자가 되고, 화를 잘 냈으면 추하게 태어나고, 남이 잘 되는 것을 시기 질투했으면 천박한 가문에 태어나는 것이다.



결국 몸은 물론 마음까지 사라져야 온전한 ‘나’의 사라짐이라 말할 수 있다. 이 마음은 흔히 ‘생각’이라고 표현되는 시비 분별하는 마음을 말한다. 그런데 이 몸은 때가 되면 저절로 사라지는 것이므로 굳이 없애고자 애쓸 필요가 없다. 단지 마음만 쉬도록 해주면 된다. 그래서 ‘쉬는 것이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비 분별하는 마음, 즉 생각을 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붓다가 첫 번째로 권장한 방법은 바로 대면관찰(對面觀察)이다. 자신의 생각을 거울 보듯 영화 보듯 강 건너 불구경하듯 대면해서 관찰하되, 닉네임을 붙여서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그 생각은 더 이상 ‘나의 생각’이 아니라, ‘닉네임의 생각’(아바타의 생각)이 된다. 어떠한 생각이든 ‘닉네임의 것’(아바타의 것)으로 객관화시켜 관찰하면, 정작 나는 관찰자의 입장에 서게 된다. 이 관찰자가 바로 본 마음인 성품이다.



생각을 쉬는 두 번째 방법은 애초부터 이 성품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마하반야바라밀’을 염하면서, 그 소리를 듣는 것이다. 그리고 소리를 듣는 성품을 돌이켜 듣는 것이다. 몸과 마음은 생멸하지만 관찰자인 성품은 생멸하지 않는다. 예컨대 종을 치면 그 소리는 일어났다 사라지지만, 그 소리를 듣는 성품은 생겨났다 없어지지 않는다. 그 자체로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淨) 부증불감(不增不減)이다. 잠을 잘 때, 눈을 감고 자더라도 꿈속에서는 여전히 보고 듣는다. 육신의 눈은 감고 뜨지만 성품은 감고 뜨지 않는다. 항상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관찰자인 성품은 스스로를 볼 수는 없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거울과 같은 대상이 없이는 자신의 얼굴을 스스로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관찰자는 스스로 대상을 창조한다. 마치 푸른 허공에 구름이 일어나듯이, 몸과 마음이라는 대상을 창조해서 자신을 실감나게 알고 느낀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허공과 구름이 둘이 아니듯, 관찰자인 성품과 관찰의 대상인 몸과 마음 또한 둘이 아니다.



이러한 차원에 도달하게 되면, 늙고 죽음의 문제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늙고 죽음을 벗어난다는 것은 결국 늙고 죽음에 철저해지는 것이다. 철저히 늙고 철저히 죽는 것이다. 생(生)이 오면 생과 마주하고, 사(死)가 오면 사와 함께 한다. 늙어갈 땐 늙어갈 뿐! 죽을 땐 죽을 뿐!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이것 뿐! 이것이 분별 망상인 생각을 쉬는 세 번째 방법이다.



그러므로 선사들은 말한다.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잠잔다.’ 겉보기엔 범부들과 다름없지만, 그 내용은 사뭇 다르다. 범부들은 밥 먹으면서 오만가지 번뇌 망상을 하며, 잠자면서 갖가지로 꿈을 꾼다. 몸과 마음이 나누어지고, 현상과 본성이 이원화된다. 하지만 선사들에게 몸과 마음은 둘이 아니다. 현상과 본성도 둘이 아니다.



결국 생로병사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단순해졌다. 태어날 땐 태어날 뿐! 늙어갈 땐 늙어갈 뿐! 아플 땐 아플 뿐! 죽을 땐 죽을 뿐! 항상 바로 지금 여기서 완전 연소할 뿐이다. 이것이 현상에 철저하면서 본성으로 돌아갈 수 있는 비법이다.



이렇게 시시각각 평상심을 유지하며 살 수 있다면 더 이상 수행이 필요 없거니와, 그렇지 않고 자꾸 시비 분별심이 일어난다면, 얼른 대면 관찰을 해야 한다. ‘달마가 욕심을 일으킨다.’ ‘달마가 화를 내려한다.’ ‘달마가 근심 걱정 하는구나.’ 이렇게 닉네임을 붙여 거울 보듯 영화 보듯 강 건너 불구경하듯 대면해서 관찰하면, 생로병사와 탐 진 치는 달마의 것이 되고, 정작 자신은 관찰자의 입장에 서게 된다. 이 관찰자는 한없이 크고 밝고 충만하다.



결국 참 나는 무아(無我)요, 무아는 대아(大我)이며, 대아는 시아(是我)다. 진정한 나는 고정된 실체가 없다. 고정된 실체가 없으므로 어떠한 모습으로도 나타날 수 있으며, 바로 지금 여기에서의 내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바로 지금 여기에서 완전 연소하는 것이 참다운 무아의 삶을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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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보리야, 보살도 또한 이와 같아서

만약 내가 마땅히 한량없는 중생을 멸도에 들게 했다고 한다면

이는 보살이라 이름할 수 없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실로 어떤 법에도 집착하지 않는 이를

보살이라 이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래는

일체법은 아도 인도 중생도 수자도 없다고 한 것이다.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내가 마땅히 불국토를 장엄하리라고 한다면

이는 보살이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여래가 설한 불국토의 장엄은 곧 장엄이 아니라

그 이름이 장엄이기 때문이다.

 

무아의 설법은 계속되고 있다.

보살이라고 하더라도 스스로

내가 중생을 멸도에 들게 했다거나

내가 깨달았다거나

내가 중생을 깨닫게 했다거나 하는 등의

내가라는 아상에 빠져 있다면 그는 보살이라 이름할 수 없다.

 

보살은 중생을 멸도에 들게 할주체가 없다.

라는 것이 완전히 사라졌는데

어찌 중생을 멸도에 들게 할 내가 생겨날 수 있겠는가.

 

보살은 한없이 중생을 멸도에 들게 하지만

단 한 명의 중생도 멸도에 들게 한 적이 없다.

보살이란 어떤 한 법에도 머물러 집착하지 않는 자를 이름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멸도에 들게 했다라는 상에 갇혀 있다면,

중생을 구제했다는 법에 집착해 있다면

그는 보살일 수가 없는 것이다.

 

아직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중생에게는

부처와 중생이 나누어져 있고,

생사와 열반이 나누어 져 있지만

이미 무아법을 깨달은 보살에게는 그 어떤 종류의 나뉨도 없다.

 

부처와 중생도 없으며,

생사와 열반도 다 헛된 꿈에 불과하다.

이 세상은 이미 활짝 핀 한 송이 연꽃이다.

 

모든 사람에게 깨달음의 씨앗 불성이 있으나

아직 발현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 불성을 싹틔워야 한다는 말은 다 방편일 뿐이다.

 

무아법을 깨달은 보살에게는 중생도 없고 부처도 없다.

깨달음에 이르게 할 중생도 없으며,

이미 깨달음에 이른 부처도 없다.

그것이 바로 무아법의 증득이 가져다 주는

대 해탈, 대 자유의 깨달음이다.

 

내가 없다는 무아의 가르침은

나와 남, 인간과 자연, 인간과 신, 중생과 부처,

생사와 열반, 삶과 죽음 등의

그 어떤 나뉨도 용납하지 않는 진리를 대변한다.

 

그렇기에 무아법을 체득한 보살은

스스로 중생을 구제한다는 상을 가질 수가 없다.

구제할 중생이 없고, 구제할 내가 없으며,

그렇기에 구제라는 말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보살은 깨달음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깨달음의 회향인 중생구제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상구보리에도 머물지 않고

하화중생에도 머물러 있는 않는 이가 보살이다.

상구보리 하화중생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서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실천하는 이가 바로 보살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일체법이 곧 불법이라고 했는데 일체법, 즉 불법에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그 어떤 상도 용납되지 않는다.

즉 그 어떤 나다라고 하는 상도 용납지 않는다는 말이다.

 

깨달을 도 없고, 중생을 구제할 도 없다.

지혜를 증득할 도 없으며, 자비를 베풀 도 없다.

상구보리할 내가 없으며 하화중생할 내가 없는 이가 바로 보살이다.

일체법은 한 치의 아상도 인상도 중생상도 수자상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보살이 내가 불국토를 장엄한다고 한다면

그는 보살일 수가 없다.

내가 불국토를 장엄하리라고 하는 말이

그대로 스스로 보살이 아님을 대변하는 말일 뿐이다.

 

내가 없고, 장엄할 불국토가 없으며, 장엄할 것도 없는데

어찌 내가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상에 머무를 수 있단 말인가.

 

무아법을 깨달았다는 것은

내가 없음을 깨달았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일체 모든 법, 일체 모든 존재에

고정된 실체적인 관념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말이다.

 

그 어떤 것도 실체적인 존재가 아니다.

나도 너도 없으며, 중생과 부처도 없고, 예토와 정토도 없다.

오염된 예토인 중생의 국토가 없고, 장엄된 불국토가 따로 없다.

 

무아법에는 그 어떤 차별도 분별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보살의 깨달음일진데,

어찌 내가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다만 여래가 불국토를 장엄한다고 했던 말은 어디까지나 방편일 뿐이다.

여래가 설한 불국토의 장엄은

실질적인 그 어떤 장엄이 아니라 이름이 장엄일 뿐이다.

불국토의 장엄은 곧 장엄이 아니다. 그러므로 장엄인 것이다.

 

 

수보리야, 만일 어떤 보살이 무아의 법에 통달하였다면

여래는 이 사람을 진실로 보살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구경무아분의 핵심이며,

나아가 금강경의 핵심이 되는 구절이다.

무아법의 통달이 바로

금강경에서 줄기차게 말하고 있는 가르침의 핵심이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타파가

바로 무아법의 이해를 위한 설명이며,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라는 게송 또한

무아법의 통달을 위한 사구게다.

 

반야 지혜를 증득한다는 말이 바로 무아법을 깨닫는다는 말이며,

무아법이 바로 무자성, , 중도, 연기법의 다른 표현인 것이다.

 

이 세상에 펼쳐져 있는

이 모든 존재와 현상들은 모두

다만 인연따라 잠시 그렇게 모습을 보인 것일 뿐,

고정된 실체로써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내 눈 앞에 있는 것처럼,

고정된 실체적인 존재처럼 보이지만

그 안을 깊이 살펴보면 어디까지나 연기적인 현상으로

잠시 꿈과도 같이, 환영과도 같이, 그림자와도 같이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어떻게 인연을 만났느냐에 따라

물이 소를 만나면 우유를 이루고,

독사를 만나면 독을 만들 듯

그렇게 인연따라 겉모습이 끊임없이 변화될 뿐이지

결코 고정된 실체인 것은 아니다.

 

또한 물은 계곡에서 시내로 강으로 바다로 흘렀다가

수증기로 변하고 구름으로 변하고

또한 인연을 만나 비로도 우박으로도 눈으로도 내리는 것이다.

 

그렇게 내린 눈비가 또다시 계곡을 지나면서

나무도 되었다가 식물도 되었다가 사람 몸으로도 변했다가

또다시 시내로 계곡으로 강으로 흘러 흘러 가는 것일 뿐이다.

 

그럴진데 어떤 하나를 선택하여

이것이 물의 실체다고 고집할 수 있겠는가.

다만 연기법에 따라 겉모습을 바꿀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은 무아법이라고 하는 것이다.

고정된 실체로서의 자아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어디에 집착할 것인가.

고정된 실체가 없고 다만 꿈처럼 신기루처럼

몸을 바꾸면 끊임없이 변화하며 흐를 뿐인데,

어떤 하나를 붙잡고 집착하고

내 것으로 만들려고 아집을 부릴 수 있겠는가.

나다라고 고집하여 내 몸에 혹은 내 생각에 집착할 것인가.

 

내 몸도 끊임없이 변화하는 지수화풍의 변화의 한 모습일 뿐이다.

이 몸의 지수화풍의 구성원들은

흘러 흘러 바다고 되고 강물도 되고 산도 되었다가

나무도 풀도 되고, 또한 짐승도 되고 풀벌레도 되고

바람도 구름도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내 몸에 집착할 것인가.

 

내 생각이라는 것도 가만히 살펴보면

고정된 실체로써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어떤 생각을 불변하지 않는 내 생각이라고 할 것인가.

 

모든 생각은 변화한다. 흐를 뿐이다.

이 생각을 선택할 수도 있고, 저 생각을 선택할 수도 있다.

이러한 가치관을 선택할 수도 있고 저러한 가치관을 선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어떤 생각도 관념도 가치관도

고정된 실체로써 내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 세상에는 어디에도 내 것이라고 고집할 만한 것이 없다.

내 돈도, 명예도, 권력도, 지위도, 학벌도, 배경도, 사랑도, 가족도,

결국에는 내 것이 아니다.

 

그러니 어디에 머물러 집착할 것인가.

집착은 곧 괴로움을 불러올 뿐이다.

돈에 집착하면 돈으로 인해 괴롭고,

명예나 권력에 집착하면 그로 인해 괴로울 뿐,

결국에는 괴로움을 가져올 뿐이다.

 

라는 것이 없는데,

어디에 내 것을 붙일 것이며, 집착할 것인가.

 

이 구경무아분에서는 바로 이 점을 설하고 있다.

구경에는 모든 것이 무아라는 것이다.

무아이기 때문에 비관적으로 살라는 말이 아니라,

무아이기 때문에 어디에도 집착함이 없이 자유롭게 살라는 것이다.

 

어떤 물질에도, 어떤 존재에도, 어떤 깨달음에도,

어떤 생각에도, 어떤 사상에도

얽매임 없이 자유롭게 살라는 말이다.

 

한 평생 잠시 왔다가 갈 뿐이다.

인연따라 잠시 어떤 한 몸으로 왔다가 갈 뿐이다.

죽는다고 끝나는 것도 아니고 산다고 영원히 사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인연따라 끊임없이 몸을 바꿀 뿐이다.

 

그러니 어디에 집착하며 살겠는가.

집착할 것이 하나도 없는데 과연 어디에 집착하며 살 것인가.

다만 인연따라 법계의 몸을 잘 쓰다가

법계로 잘 돌려줘야 할 일이고,

인연따라 법계의 돈도 잘 쓰다가

법계로 잘 회향시켜 줘야 할 일이다.

 

내가 가져갈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돈도 명예도 권력도 지위도 사랑도

모두가 잠시 인연따라 응해 줬다가

인연이 다하면 자연스럽게 사라지고 말 것이다.

 

집착하지 않을 수 있어야

인연이 다 해 사라질 때 자연스럽게 놓아줄 수 있다.

붙잡고 조마조마 하며 살 것인가

놓아버리고 자유롭게 살 것인가.

 

자유롭게 사는 방법이 바로 무아법의 터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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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에 따르면 이러한 《반야경》의 무상(無相) 법문은 

동아시아 불교, 특히 한국 불교에서 중시하는 

《화엄경》의 교지(敎旨)와도 다르지 않아 

두 경전은 동등한 지위를 차지한다. 

그는 《대혜도경종요》에서 중국 교상판석의 시초가 되는 

이교오시설(二敎五時說)과 《해심밀경》에 의거한 법상종

(法相宗)의 삼시설(三時說)이 갖는 오류를 지적하면서, 

《대지도론》에 근거하여 《반야경》이 "논쟁할 여지가 

없는(無諍處)" 가르침이며 성문ㆍ연각ㆍ보살의 모든 

승(乘)을 위한 제3시의 요의법륜(了義法輪)적 

성격을 갖는다고 보았다.[138]

또한 원효는 '생사와 열반, 어리석음과 지혜가 모두 

허망하고 진실하지 않다'는 《화엄경》의 궁극적인 깨달음과 

'열반보다 훌륭한 법이 있더라도 환(幻)과 같고 꿈과 같다'는

 《마하반야바라밀다경》의 가르침이 일치한다고 말하였다. 

즉 원효의 해석에 따르면 반야교와 화엄교 모두 일체법의 

공(空)·무자성(無自性)·무생무멸(無生無滅)·본래적정

(本來寂靜)·자성열반(自性涅槃)·무자성성(無自性性)

을 설시하고 있으며, 

따라서 두 전승 중 어떠한 것을 요의로 간주하더라도 

불성, 여래장, 열반, 법신 그리고 그와 동일한 의미로 

쓰이는 "참 나" 또한 고정불변한 실체가 아니라 무자성, 

공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는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다.

이기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대혜도경종요(大慧度經宗要)》

■ '산은 산, 물은 물(山是山 水是水)' 의 반야중관적 해석

이 노승이 30년 전 참선을 하기 이전에는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것(山是山 水是水)’으로 보였다. 

그러던 것이 그 뒤 어진 스님을 만나 깨침의 문턱에 

들어서고 보니, 이제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더라(山不是山 水不是水).’ 그러나 마침내 

진실로 깨치고 보니, ‘산은 역시 산이고, 

물은 역시 물이더라(山祗是山 水祗是水)’. 

그대들이여, 이 세 가지 견해가 서로 같은 것이냐 

다른 것이냐? 만일 이것을 터득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 노승과 같은 경지에 있음을 내 허용하리라.

《속전등록(續傳燈錄)》(김종욱 譯)

송대(宋代) 청원 유신(靑原 惟信) 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山是山 水是水)' 공안은 공성과 연기의 

쌍운(雙運), 혹은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제법실상

(諸法實相)을 표현한 공안이다. 

공안의 세 구절은 각각 다음의 인식들과 상응한다.

자성(自性)으로 성립한다고 여기는 세속의 전도(顚倒)된 

인식-공성삼매(空性三昧) 중 근본지(根本智)(=무분별지

無分別智)와 공성이 물에 물을 따르듯, 버터에 버터를 

따르듯 하나되어 일체의 차별상을 여읜 인식- 후득지

(後得智)를 통해 일체법이 신기루, 환(幻)과 같이 

자성으로 현현하는 것을 분별하는 인식[139][140]

김종욱 동국대 교수는 청원 유신의 공안을 하이데거와 

불교 양자의 관점에서 비교철학적으로 분석하였는데, 

그 중 (주로 반야중관에 입각한) 불교적 관점에서의 

해석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것(山是山 水是水)’

'산은 산이다’ 또는 ‘산은 산으로서 있다’는 것을 

불교식으로 표현하면, ‘산은 자성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 된다. 여기서 자성(自性, svabhāva)이란 문자 

그대로 ‘스스로 있다(sva-bhāva)’는 측면에서는 

‘자기만의 존재 방식을 지니고 있는 것’을 뜻하고, 

‘언제나 있다(sarvadā-bhava)’는 측면에서는 ‘삼세의 

매 찰나마나 실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산이 산으로서 있다’는 것은 설일체유부식으로 표현하면, 

‘산은 색법으로서 자성적으로 있다’는 말이 된다. 즉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저 산은 매 찰나마다 변화해 

가는 무상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특정한 모양과 색깔을 지닌 어떤 물질적인 것이라는 

점, 다시 말해 색법(色法, rupa-dharma)이라는 점에서는 

삼세에 걸쳐 실유하는 자성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무상한 변화 과정을 인정하면서도 그 배후에 

연속적으로 항유하는 기체적(基體的) 요소를 상정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변화 현상 이면의 불변적 본체를 

존재자성이라는 형식으로 찾고자 한 서양의 전통적 

형이상학의 발상법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삼세에 걸쳐 항유하는 자성과 영속적으로 현존하는 

존재자성은 산을 산으로서 있게 하는 근거와도 같은 것들이고, 

여기에 토대를 두고 있기에 ‘산은 산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2.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더라

(山不是山 水不是水).’ 산불시산 수불시수

'산은 산이 아니다’라는 말은 ‘산은 자성적으로 있다’는 

주장에 대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비판은 

소위 반야의 통찰에 의해 얻어진다. 

반야는 개념적 분별을 넘어선 직관적인 통찰이며 또한 

있는 그대로를 보는 여실지견(如實知見, yathābhūta-

ñāṇa-dassana)이라는 의미가 있다. 

분별을 넘어선 직관이기에, 반야는 주객 분리의 이원적 

사고가 극복된 무분별의 지혜(無分別智)이며, 그런 무분별적 

불이(不二)의 집중(samādhi, 三昧, 定)을 통해 주어지는 

근본적인 체험이다. 

또한 반야가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을 연기(緣起)의 원리에 따라 무상(無常)하고 

무아(無我)인 것으로 본다는, 일체법에 대한 

연생적(緣生的) 통찰을 의미한다. 

즉 반야의 시야 한가운데서 일체법의 총체적 모습이 

무상과 무아의 것으로 드러나는데,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공(空)한 것으로 나타난다고 하며, 이 공이 바로 자성

(自性)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자성에 대한 전면적 부정, 그것이 공(空, śūnyatā)이다. 

연기한 모든 것에 자성이 없으므로 일체는 모두 공이다

(一切皆空). 이렇게 자성을 부정하여 ‘공을 설하는 

목적(空用, śūnyatā prayojana)’은 희론의 

적멸에 있다. 

희론(戱論, prapañca)이란 문자 그대로 허위의 쓸모없는 

이론을 말한다. 이처럼 지혜를 얻는 데 전혀 도움이 안 되는 

희론이란, 자성을 상정함으로써 일어나는 사유 구성, 혹은 

결정화되고 대상화된 분별(vikalpa), 한마디로 

자성적 분별심을 뜻한다.

분별하고 나서는 그렇게 분별된 것이 있다거나 없다라는 

양자택일적인 판단을 내린 다음, 그 극단적인 판단 

내용의 어느 하나에 집착하게 된다. 

무수한 조건들의 상호 작용하는 모습을 각 측면에 따라 

‘생(生)이다’ ‘멸(滅)이다’ 등으로 나누지만, 그것들 자신이 

어떠한 자성도 지니고 있지 못하므로 확정적으로 단정

지을 만한 생과 멸의 상(相)이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생과 멸에는 애당초 자성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생을 부정하면 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생이 부정되므로 

멸 또한 부정되어 불생 불멸이 된다. 

따라서 연기한 모든 것에는 자성이 없어 불생불멸(不生不滅), 

불상부단(不常不斷), 불일불이(不一不異), 불래불거(不來不去)

한 것이므로(八不), 양극단의 어느 하나에도 집착해서는 

안 되는 것(中道)이다. 

이렇게 무자성(無自性, nihsvabhāva)이어서 무분별(無分別, 

nirvikalpa)이고 무집착(無執著, anabhiniveśa)인 중도에 

설 때, 희론은 종식된다.

3. ‘산은 역시 산이고, 물은 역시 물이더라

(山祗是山 水祗是水)’ 시기시산 수기시수

'산은 역시 산이다’라는 것을 불교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일체를 철저히 공화(空化)시킴으로써 일체가 신비롭게 

드러난다는 것, 다시 말해 진공(眞空)이 곧 묘유(妙有)

라는 것을 의미한다.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의 모든 현상이 공한 것이라면, 

일체를 허무화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으나, 

공이란 비유비무(非有非無)의 중도로서 다만 무자성의 

연기를 의미할 뿐이다. 

연기한 것을 공이라 하는 이유는, 연기한 것에는 자성이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공이 곧 연기한 것을 가리키는 이상, 

공이야말로 모든 것을 연기적으로 성립시켜 주는 근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공의 이치가 있음으로써 모든 것이 이루어지니, 

공의 이치가 없다면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공이 곧 물질적인 것이다(空卽是色)’고 한다. 

오히려 공이기 때문에 공허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공이 이렇게 일체를 성립시켜 주는 것이라면, 

공은 현상 이면의 절대적 본체가 아닐까 하는 혐의를 

받을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무자성의 공이 자성화되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이에 대해 용수는 이렇게 말한다. 

“만약 공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응당 공한 것도 있어야 

하지만, 실제로 공하지 않은 것이 없으므로, 어떻게 공한 

것이 있을 수 있는가?” 즉 모든 것이 공이므로(一切皆空), 

공 또한 역시 공하다(空亦復空)는 말이다.

색과 공 모두 무자성의 공이므로 색은 곧 공이 되고 

공은 곧 색이 된다. 그리하여 색은 곧 공이라 하여 일체를 

철저하게 공화시키는 것(眞空)과, 공은 곧 색이라 하여 

그렇게 공화됨으로써 일체가 신비롭게 드러난다는 

것(妙有)이 둘이 아닌 것이 된다. 

즉 진공이 곧 묘유로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부정(眞空)을 통해 대긍정(妙有)이 된다는 

뜻이기도 하고, 대부정(眞空)과 대긍정(妙有)에 

차별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렇게 진공이기도 하고 묘유이기도 한 것에 대해서는, 

부정과 긍정의 어느 하나로 고정적으로 분별되지 않기 

때문에, 그저 같고도(如) 같다(如)고 할 따름이다. 

그저 ‘같고도 같은 것(如如, tathatā)'은 '진실로 같은 것

(眞如, bhūta-tathatā)'이며, '참으로 있는 그대로의 것

(如實, yathā-bhūta)'이다. 바로 이런 진여가 일체의 

진상(諸法實相)인 것이다.


 3강 나누기

어떻게 괴로운 마음을 극복해야 될까요

일체 모든 중생의 괴로움을 다 제도하되 한 중생도 제도 했다는 생각을 갖지마라

?

나의 괴로움은 바라는 마음이 있기때문에 즉 괴로움이 일어나는 것이다. 즉 아상 때문이죠

그러므로 기대하는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배프는 마음으로 돌려라

즉 이기심의 욕망을 곧 자비심인 보시하는 마음으로 바꾸어라

내 마음을 부정적 사고에서 긍정적 사고로 바꾸면 나도 남도좋다,

경계가 없음으로 다툼이나 시비가 없어 서로가 좋으니 이것이 중도라 할수 있다

 

그러나 배풀되 배픈다는 티나 꼴을 내지마라 즉 상을 내지마라

티나 꼴을 내는 것은 상으로서 허망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되 상이 없이 하라는 거지요.

모든 언어는 대비적으로 상반된 용어를 가지고 있습니다

: 옳다 그르다, 있다 없다, 색이다 공이다, 나다 너다 ,

 

법성계에 "법성원융무이상" 법의 성품은 원융하여 두모습이 없고,

그런데 우리는 생각이 대극적 경계선을 만들어 이원적사고를 하는 습성이 있다.

그래서 나는 곧 전체이며 전체는 곧 나라는 것을 깨우라는 가르침이라본다.

이것이 중도와 연기 무아공의 이치를 설명한 것리라 니다.

여기서 아상을 떠나서 구하는 마음을 배프는 마음으로 써라,

6바라밀중 첫째가 보시 이듯이 아상을 비우데는 보시가 첫째라고 합니다.

여기서 아상이 없다면 항복 받을것도 없고 주는것도 없고 받는것도 없겠지요.

 

 

*4강 나누기

여기서는 상에 대해서 설명을 하셨는데요

"범소유상 개시허망"

무릇 있는바 상이라는 것은 다 허망한 것이다.

상이란 우리의 생각으로 짓는 관념적 모양이나 또는 형상으로 있다고 여기는 것들 인데요

여기서 상이 있다는 것은 연기로서 설명을 해야 이해가 빠르다고 봅니다.

연기라는 것을 간단히 이해 하자면 여러가지 물질이 원인과 조건으로 말미암아

인연으로 결합되여진 상태이기 때문에 실체가 없으므로 허망한 것이다,

즉 꿈 환상 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불 과 같다.(여몽 환포영 여로역여전)

그럼 허망하지 않는 것은 뭐냐

"제상이 비상 즉견 여래"

모든상이 실체가 없는 비상()으로 알면 여래를 본다 즉 괴로움이 없다.

제상은 색에 비유 할수 있고. 비상은 공으로 비유 할수 있습니다.

공이라해서 텅비어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고 정해진 것이 없다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상을 상으로 알 것 같으면 공으로 보는 것이요

허망하지 않는 경지 곧 부처를 보는 것이다.

 

중도 연기 무상 무아를 한 단어인 공으로 설명한 것이라 봅니다.

부처는 모양도 소리도 없는 것이다, (약이색견아 이음 성구아)

 

즉 상이 없는 것이 그이름 부처라는 것이다,(리일체제상이 증명제불)

이 세상은 상 과 비상으로 즉 색과 공으로 되여 있다는 것이다.

공가운데 더불어 색으로 존재하고 있는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처이면서 중생으로 살고 있다는 것이다.(중생즉 부처)

텅빈 허공 가운데 온 우주가 동시에 공존하고있듯이 이게 바로 중도 연기라는 것지요,

그래서 반야심경에 색즉시공 공즉시색 색불이공 공불이색이라 합니다.

 

여기서 나라는 상을 분석해보면, 나는 연기로서 되여있기 때문에

즉 나 아닌 것들이 조건에 의해 결합 되여진 것이기 때문에

나라고 할수있는 것이 없고.

내것이라 할수 있는 것이 없고.

내 생각을 고집할 것이 없다는 것이지요 .즉 무상이다

나는 곧 있으면서 없는것이다,

나는즉공이요 공은즉나다 나는 공과 다르지안고 공은 나와 둘이아니다 라고 할수 있다,

중생이 색이라면 부처는 곧 공이라는 것이다.

 

나는 즉 부처요. 부처는 즉 나다, 이런 논리가 되는 거지요.

불교는 무유정법 이라 합니다. 정해진 법이 없다, 이것이 핵심이라고 합니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옳은 것도 아니고 그른것도 아니다,

색즉시공,공즉시색/ 응무소주 이생기심/ 제상즉 비상/무유정법/ 중도를 다른 말로 표현한 것들입니다.

금강경은 곧 공(중도)을 설명하기 위해서 여러모로 방편을 예로들어 이해를 돕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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