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아제아제 바라아제

 

故說 般若波羅蜜多呪 卽說呪曰,

고설 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고로 반야바라밀다주를 설하노라 곧 설하되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3번)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소승불교, 대승불교, 밀교....같은 부처님의 말씀을 두고도 이렇게 시대에 따라 다르게 신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소승불교, 대승불교, 밀교는 단지 어느 한 시대의 불교신행 풍속이지 부처님의 말씀이 달라진 것은 아닙니다.

대체적으로 5~6백년 주기로 불교 신행의 방법이 달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불교는 대승불교에서 세계적으로 전파되었어요.

아쇼카왕이 인도를 통일할 때에 많은 사람을 죽였는데 그래서 만년에는 불교에 심취하여 참회생활하였고...또한 불교의 이념으로 나라를 다스리려고 해서 불교를 산간 벽지나 타국에까지도 전했던 것입니다.

이 때가 대승불교였고 이 대승불교는 중국과 한국에까지 전파되었어요.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온 해가 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6년인가 하니까

대승불교는 인도에서 기원전 1세기에 시작되었고 그뒤 몇 백년이 지나서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까지 들어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중국에 대승불교가 전해지고 얼마후 인도 변방에 있던 한 나라의 왕자가 스님이 되었는데 그가 달마스님입니다.

달마스님이 중국에 와서 보니까 중국은 부처님께 기도하고 독경하고 경을 연구하는 것은 하는데깨달음을 위한 수행은 부족한 것 같았어요

그래서 중국에 왔다가 깨달음의 법을 전파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선불교의 시작입니다.

달마스님은 무심론에서도 밖혔지만 깨달으면 바로 부처라면서 경전에서 수겁을 닦아야 성불한다는 기존의 통설을 깨고 바로 성불하는 법을 폈습니다.

중생의 마음이 바로 부처이고 이 부처는 이미 되어있는 것이라 시간이 필요치 않다는 것입니다.

달마스님은 마음이 부처임을 깨달으면 그대가 바로 붓다라고 하면서 중생이 곧 부처임을 가르쳤습니다.

불교는 대승불교에서 이미 인반인 즉, 보살을 부처님과 나란히 법상에 모셔놓는 불상배치로서 부처와 보통 사람이 거리가 없는 동등한 사람임을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머리를 깍은 부처나 머리를 기른 보살이나 깨달으면 누구나 부처이다. 이 평등 사상이 대승사상입니다.

당연히 대승불교에서는 일반인도 성불할 수 있으니까 불교의 전파가 보다 적극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상이 중국에 와서도 변함이 없이 전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초기에는 경전이 전해지고 진리를 연구하는 풍토였으나 얼마후 깨달음이 구체화되어 깨달은 자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로 달마스님 이후부터인데 처음에는 숫자가 적다가 점차 많아져서 수많은 선사들이 나오기 시작하였고 나중에 원오스님,대혜스님 대에 와서는 일반인들에 까지도 참선이 유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일반인들 중에서도 한 시대에만해도 수십명의 깨달은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어요.

불교가 그 본래 사명을 충실히 다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러던 불교가 중국의 왕조 변화와 함께 탄압을 받는 시대가 있었고...부흥하는 시대도 있으면서....

선불교는 가히 중국불교의 중심적인 불교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왜냐면 불교는 탄합하면 산으로 들어가서 참선하면서 은든하는 불교가 선불교가 불교가 부흥할 때는 대중에게도 전파되면서 잘 발전해왔고 핍박 받을 때는 산중에서 조용히 전해졌기 때문에 오래 이어왔습니다.

그러다 중국이 공산주의되면서 선불교도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선불교는 한국에 이미 삼국시대부터 전해지기 시작하였고 고려때에는 완전히 정착되면서

나옹스님, 보조스님등 훌륭한 선사들이 나와서 고려 선불교를 주도했기 때문에 선불교의 전통이 한국에 남아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나라는 선불교의 종주국이 되었는데 안타까운 것은 중국 송나라부터 일반인들에게도 유행하던 선불교가 끊어지고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시대 억불정책을 받았고 현대에는 유신론자들이 극성을 피우면서 선불교가 일반 대중에게 널리 전해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혜성같이 나타난 무불이라는 사람에 의하여 과거 사대부들에게도 전해졌던 선불교를 전해보려고 선의 진수를 강의하고 전하고 있는데....아마도 얼마 지나지 않으면 과거 송나라보다 더 많은 깨달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올거야요

최근 전문 선서보기가 힘들어졌어요.

제가 좀더 시간이 나면 자료를 찾아서 깨달을 얻은 사람들이라는 책도 내고....저아래 게시판에 하다가 말았잖아요..

돈오돈수도 좀더 보강하여 하나의 책으로 내어 바른 선불교....그리고 바른 깨달음에 대한 책을 내야 하는데 먹고 사는 것이 바빠스리....시간을 못내고 있으니....그것이 안타까버요...

누가 날보고 걍 책만 쓰고 강의만 하라고 하면 좋겠는데 이렇게 사는데 매달리니 자료가 자꾸 늦어져요....아무래도 몇년은 더 가야 그 책들이 나올거야요

다행인 것은 그런 와중에서도 전심법요 완능록 무심론등을 강의하고 있어서 사람들이 언제라도 보게 된 것이 참 다행인 것입니다.

자...이렇게 해서 불교의 역사를 대강 흝어보았음다

현재는 선불교시대입니다. 선불교는 깨달으면 즉시 부처라 매우 매력적인 불교입니다. 따라서 앞으로도 선불교는 더욱 퍼질 것이고 얼마 있으면 전세게로 퍼질 것입니다.

선불교가 일반화되고...그리고 저 먼 뒷 세상 후대 불교가 또 어떻게 변화될지 모르나 과거 불교가 이렇게 변화되어왔듯이 미래 불교도 반드시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점점 인간 중심 적인 불교로 바뀌게 됩니다.

다른 것도 그랬듯이 불교도 그동안 권위적이고 일반인들에게 부처를 신격화하였던 스님 중심적이던 것이 이제 세속으로 내려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조만간 이제 스님들도 깨달은 일반인에게 배우는 역현상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면서 불교는 대중화되고 깨달음도 대중화됩니다.

문제는 스님이나 일반인이나 부처행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처의 길을 가야 용서하고 참고 고요해져요.

스님이 되어서 부처행을 포기하면 일반인보다 더 탁한 인생이 되는 것이고

불자도 부처행을 할 생각은 안하고 기도하고 신행하는 것에만 초점이 맞추어진다면

불교가 점점 쇠락해진다는 것입니다.

기도도 반드시 해야 업보가 줄고 부처행도 반드시 해야 이 땅이 아름다워집니다.

우주와 자연은 그대로 부처님의 몸입니다.

부처님이 주신 이 땅

이 땅 위에 살면서 부처행을 하지 않고 때묻은 중생의 길을 즐거워하고 간다면

고통은 줄어들지 않아요.

부처님의 땅에서 왜 부처행을 하지 못합니까?

부처행을 하면 편안하고 행복한데 왜 부처의 길을 포기해요.

부처행....이 정의부터 새롭게 내려야 해요.

언제 어디서라도 무심행을 한다면 부처행입니다.

용서, 화목, 자비, 행복, 기쁨은 부처행에서 나옵니다.

아직도 부처행을 안하고 입으로만 부처를 말하고 진리를 말한다면 어찌 불교가 발전하겠습니까?

불교는 말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행이 필요한 종교입니다.

왜 행이냐?

행에서 또 행이 나오고 부처행에서 기쁨이 나오고 행복이 나오기 때문에 그래요.

말보다는 행이 나와야 해요

사람에게는 감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가장 다스리기 어려운 것입니다.

감정!!

부정물하고 다른 것은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라는 것입니다.

인류가 발전하고 미래 재앙을 막는 것도 이 감정이 있어서 가능한 것입니다.

감정은 살아있는 느낌이어요.

사랑하는 감정, 미운 감정, 자비, 복수...등등은 전부 감정이고 살아있음을 이것으로 느껴요

이 감정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무심이 기본이 되어야 해요.

감정은 가족을 만들고 국가를 만들고 사회를 만듭니다.

인간은 감정없이 살아 갈수 없어요

그러므로 감정을 버리려고 하기보다는 잘 사용해야 합니다.

감정을 버리려고 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어요

불교는 감정을 버리지 않아요.

자비, 용서, 참회 ....이것 어디에서 나옵니까

사랑하는 감정에서 나오잖아요

돌이 되고 나무가 되는 종교가 아니고 감정을 잘 다스리는 종교입니다.

왜냐면 우리는 어차피 완전한 무심으로 살아가지 못해요.

무심이 감정을 사용해야 합니다

감정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고 사용해야 해요

사람은 감정의 지배를 받아요. 그래서 스스로 자살도 합니다.

사람의 감정을 이해해야 합니다.

내가 아픈 경험이 있으면 남의 아픔도 이해해야 합니다.

불교가 위대한 점은 공동의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불교가 인도에서 멸망한 이유에 대하여 우리는 잘 생각해야 해요

12세기~13세기경, 북쪽 얼라신을 믿는 이슬람주의자들이 인도에 쳐들어왔어요

당시 인도가 무방비였던 것은 불교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살생하는 도구와 훈련을 하지 않았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슬람주의자들이 쳐들어왔을 때 순순히 나라를 내주었던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부처님은 코살라라고 하는 이웃나라가 쳐들어오자 3번이나 나가서 참선으로 막아있지만 4번째는 안 나갔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왕국 카필라는 멸망당했습니다

전투를 하지 않고 내준 것입니다

전쟁...이것 도대체 뭐야요?

결국 돈있고 권력 있는 자들을 위하여 수많은 순진한 백성들이 죽는 것입니다.

서민은 누가 이 나라를 통치해도 상관없어요.

그런데 왜 한 나라 왕족을 위하여 많은 사람이 죽어야 합니까?

부처님은 반대야요. 오히려 네가 내 나라를 다스려라 한 것입니다.

그러자 아무도 죽은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13세기에 인도가 이슬람주의자들에게 멸망 당한 것도 기원전 6백년경에 부처님께서 나라를 빼겼던 이유와 같습니다. 한쪽이 약하면 피해자가 없어요.

우리나라에서 최근 유신론 주의자들이 늘어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불교는 싸움을 싫어해요. 남을 미워하지도 않고 사람의 의견을 존중합니다.

그래서 전쟁없이 유신론자들은 많은 불자들을 유혹하여 데려갔던 것입니다.

만약 불교가 반대로 기독교도들이었다면

어떤 나라도 불교때문에 죽은 사람들이 없어요.

이땅에 절대 그렇게 빠른 시간안에 불교를 전파할 수 없었을 거예요.

그러나 신을 믿는 종교는 그 종교 때문에 수 많은 사람이 죽었고 지금도 죽고 있습니다.

종교때문에 사람이 죽다니....이해할 수 없는 일인데도 사람들은 그 종교를 믿습니다.

이슬람주의자들은 미국에 빌딩을 폭파하여 6천명을 죽였어요

그러자 부시는 군사를 이끌고 수많은 이슬람주의자들을 죽였습니다.

그러자 자살폭탄이 등장하여 나라마다 또 많은 선량한 사람들이 죽습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복수....복수.....

이것은 신들의 싸움이지 사람의 싸움이 아닙니다.

사람이 자기를 잃고 이념이나 주의나 신을 믿으면 이렇게 불행해지게 됩니다.

사람이 자기를 알고 깨닫는다면 남도 부처임을 알아요.

어떤 이념에도 주의에도 신에게도 쫓아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잃고 신을 쫓아가면 자기를 잃는 것은 물론이고 남까지 잃게 되고 말아요.

도대체 신이 어디에 있다고 그럽니까?

신은 애초부터 없었어요.

사람이 세워 놓은 신들은 다 가공의 신입니다.

불완전한 사람이 창조한 신이라 그 신들 역시 불완전해요.

만약 신이 있다면 도대체 이 전쟁을 왜 중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까?

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야 하고 그 가족들이 고통받아야 하나요?

왜 지구에 이상기온이 생기고 지진이 일어나고 자연 재앙이 닥칩니까?

과거에... 권의주의가 있던 시절...종이 있던 시절에 오늘날 처럼 이렇게 인간의 능력이 뛰어나지 못했을 때에 나약한 인간들이 믿었던 가공의 신을 왜 오늘날 이렇게 위대한 인간임을 알게 된 지금에도 그 신을 믿어서 모두가 고통받습니까?

불교는 내가 당해도 복수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부처의 행이어요.내가 이렇게 아픈데 상대는 얼마나 아플까 이것을 생각해요.

인간을 존중해요.

그래서 용서하는 무심행을 합니다.

내 가족이 죽었으나 ....슬퍼할 뿐....슬픔.....이것은 깨달은 자도 있어요.

부처님은 만년에 제자들이 먼저 죽자 쓸슬해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아라한과를 얻고 깨달음을 얻었던 가섭존자는 나중에 부처님 대를 이어 제 2대 붓다가 됩니다.

그런 그 제자가 멀리 가서 불법을 전하고 있었는데 부처님이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 급히 돌아오는 도중에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셨습니다.

장남이 없는 죽음과 같아요. 장자가 임종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도착해보니 벌써 관에 들어가셨어요

그러자 가섭존자는 땅을 치고 통곡하면서 웁니다.

앙~앙~ 부처님이시어, 어찌 저를 보지 않으시고 가셨습니까?

아라한과를 얻은 자,

깨달음을 얻고 부처님도 인정했던 제자도 이렇게 울부짓는 장면이 팔상록에 나와요.

보통 중국의 선사라면 이때 벌덕 일어나 제자를 나무라고 야단칩니다.

실제 그랬다는 기록도 있어요

그러나 부처님은 제자에게도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부드러운 자비를 보입니다.

관 밖으로 발을 쑥 내밀어 나는 영원히 죽지 않는 자이다 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제자를 사랑하는 감정이 없었다면 어찌 이렇게 하겠습니까?

제자도 울고 스승도 부드럽게 위로한 것입니다.

죽음은 없다고 가르치고 그렇게 크게 깨달았지만 인간은 이렇게 울고 위로합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은 인간적일 때 이해받아요.

인간은 인간적일 때 아름답습니다

인간은 인간적일 때 훌륭합니다.

공연히 신선이 되는것, 숨을 참는 것, 정신이 독해지는 것, 자기를 잃고 남의 종이 되는 것을 선망의 눈으로 보지 마세요. 그런 특이한 짓은 조작하는 것이지 순수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감정을 잘 다스려라 라는 것입니다.

감정이 안 나올 수는 없다. 감정없는 것(무심)을 완성된 이후 시간은 짧고 감정이 들끓는 시간은 깁니다. 무슨 말이냐하면 부처는 되기 쉬우나 부처행을 하면서 부처를 회복하는 시간은 길다는 것입니다.

부처를 회복한 시점은 노년이라는 말입니다.

나머지 인생의 대부분은 감정을 다스리는 시간이지 감정이 없는 시간이 아닙니다

가족이 죽었으면 슬퍼할 뿐. 복수를 생각하지 않는 종교가 불교입니다.

그 렇게 복수심이 들끓고 ....하염없는 분노가 일어날 때

바로 그때 우리는 부처의 노래를 부릅니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제 모지 사바하"

그렇게 수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묻지 마세요. 뜻이 없어요. 진언의 뜻을 찾는 사람은 조작하는 것입니다.

무심의 노래요, 천연의 노래이고, 부처가 부르는 노래입니다.

과거의 부처도 이렇게 불렀고 미래의 부처도 이렇게 부를 것이고 오늘 우리도 그렇게 불러야 되요.

그냥 이 무심의 노래를 부르세요. 무심이란 뜻이 없어야 하고 생각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진실한 노래요, 헛되지 않는 주문이라고 했습니다.

부르면 행복이 일어난다

그러니....언제라도...그대가 슬플 때, 기쁠 때, 마음이 번뇌로울 때, 분노가 일어날 때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제 모지 사바하"

하고 부르라.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제 모지 사바하"

아무 것도 생각하지 말고 원하지 않은 채 세계가 행복해지고 가족이 행복해지고 그대가 행복해지는

이 노래를 부르면 반드시 영험을 보리라.

왜냐? 무심의 노래이기 때문이다. 무심은 모든 것이 나오는 근원지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 노래를 부르면서 부처행을 하다 보면 언젠가는 반야지혜를 터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두 자기가 이 땅을 책임지는 참 부처임을 크게 깨닫고 그 누구에게도 그 무슨 사상에도 유혹됨이 없이 당당히 혹은 담담히 부처의 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아침마다 외치세요.

" 마음이 부처, 내가 부처이므로 내 길은 내가 간다. "

모두 당당한 붓다의 길을 포기하지 마시길 바라면서 반야심경강의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그동안 강의 듣느라 수고하셨습니다.

 

  - 이내용은 무불선원 석우스님의 강의입니다.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

'반야심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21. 그러므로 알라  (0) 2015.01.09
20. 正覺에 대하여  (0) 2015.01.09
19. 삼먁(正等=中道)에 대하여  (0) 2015.01.09
18. 마침내 열반에 이르니라  (0) 2015.01.09
17. 걸림이 없는 까닭으로 두려움이 없고  (0) 2015.01.09

 

 

21. 그러므로 알라

 

故知 般若波羅蜜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고지 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고로 알라. 반야바라밀다의 크게 신비로운 주문

크게 크게 밝은 주문 가장 높은 주문 동등함이 없는 주문은

能除一切苦 眞實不虛

능재일체고 진실불허

능히 모든 괴로움을 없애주나니 진실하며 허망되지 않느니라.

마지막에 들어와서 주문 적인 것에 대하여 설명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오늘은 진언의 역사를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불교 역사를 보면

소승불교, 대승불교, 밀교, 선불교로 나눌 수 있습니다.

소승불교는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직후부터 대략 5백년정도의 불교를 그렇게 부릅니다.

물론 소승 불교에서도 세밀히 분류하면 상좌부와 대중부가 있었어서

처음 약 1백년 정도를 부파 불교라고 부르나 ...

그냥 통틀어 소승불교라고 말해도 됩니다.

이때는 부처님께서 돌아가신지 얼만 되지 않을 때라

불교의 기강을 엄격하게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미 전 인도가 불교를 믿는 나라가 되었기 때문에 굳이 포교니.세계화니 하는 개념이 없었고

스님들은 전적으로 수행하는 사람으로만 인식되었을 때입니다.

따라서 계율이 엄격했고 전적으로 자기 수행에만 중점을 두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당시 불교를 소승불교라고 하고. 그후 기원전 1세기에 대승불교 운동이 일어나서 대중불교가 되었을 때도 그 신불교운동에 끼어들지 않고 전통을 그대로 고수하면서 불교를 행하던 지역이 있었는데 그 나라들이 지금의 스리랑카, 버마 등의 남방불교입니다.

그러나 B.C.1세기경 부터는 전체 불교의 분위기는 매우 달라있었습니다.

스님들이 주축이 되어 이끌어 나가던 불교는 이제 재가에까지 퍼져서

인반인도 불교를 이끌어 나가는 관례가 보편화 되었어요.

무슨 말이냐 하면 예전에는 스님들이 불교를 수행하였고 스님은 불법승 삼보의 하나로서 공양을 받는 자요, 법을 설하는 당사자이고,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당사자라 스님이 주축이 된 불교였습니다.

주로 인반인들은 절에 와서 스님들의 법문을 듣거나 공양을 올리는 정도가 전부였어요.

다만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리면 그 공덕으로 복을 받으므로 일반인들이 할 수 있는 신행은 스님들의 공양을 대는 정도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수많은 백성들에 비하여 절은 얼마 없고 대신 들판에 서있는 부처님의 사리탑은 많았습니다. 그러나 보니 멀리 있는 신도들은 탑에 찾아가서 음식물을 올리고 마음속의 기원을 비는 신행이 전국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부처님의 사리는 8말 8되가 나왔다고 합니다.

온통 사리뿐이고 뼈는 없었다해요.

이때 8나라에서 사이좋게 나누에 분배하였고 8나라의 왕들은 사리 일부는 왕궁에 보관하고 대다수의 사리는 전국에 탑을 조성하여 부처님의 사리를 안치했기 떼문에 전국적으로 불탑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서민들은 자연히 대도시의 사원을 찾기 보다는 자기 주변에 있는 불탑을 찾아서 ...가정에 무슨 일이 있으면 가서 공양올리고 소원을 비는 기복신앙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뒤에 공양물을 관리하는 사람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라의 관리가 나아가서 불탑을 관리하게 되었고 이것이 시간이 오래 지나가고 또 어떤 불탑은 부처님의 영험이 좋아서 가서 기도하고 공양만 올리면 한가지 소원을 꼭 이룬다는 말이 전해지는 데가 있었고 이 소문이 또 전국적으로 전해지면서 사람들이 매일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그 불탑에 가려고 며칠 전부터 음식물을 짊어지고 걸으면서 절하면서 기도하면서 전국에서 몰려들었으니 아닌 것이 아니라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이때 절을 관리하는 관리자도 많이 필요하게 되었고 절을 지어야 하는 일이 생겼는데 절을 짓는다고 하니까 시주도 금방 모이고 해서 순식간에 궁궐같은 큰 사원이 지어졌고 이 모든 관리를 일반이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스님이 없으면 사원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스님들을 모시게 되었고 ...

최고급 호텔같은 곳에 자동 샤워기가 있는 독방을 주고 ....봉급은 얼마고 ...먹는 것은 공짜에다....

하면서 방을 붙여대니..ㅎㅎ

스님들이 기존 사찰을 이탈하여 이 곳으로 오게 되었고 스님들은 여전히 수행만 하면 되고 여기서도 큰스님을 뽑아 법문하여야 되니...큰스님을 선거로 뽑고....해서 격이 갖추어진 큰 사찰이 된 것입니다.

이때 스님들은 법상에 올라가서 사찰 관리자의 공로를 연일 칭찬했습니다.

그 황막한 들판에 첨에 와서 새우잠을 자면서....가족과도 2년을 보지 못하면서

오직 부처님의 집을 지으려고 고생했고....등등

그러면서 경전속에 나오는 보살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이 분들이 바로 보살이라고 하면서 크게 칭찬한 것입니다.

이때 일반인들은 처음으로 보살이라는 말을 알았어요.

이때 불교를 '보살불교'라고 하고 혹은 '탑신앙'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가 절에 가서 보는 보살을 보면 모두 화려한 복장을 하고 ....

문수보살...관세음보살....대세지보살....

등등의 보살상을 보면 모두 귀걸이...팔찌 등, 고급옷을 입고 있는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 보살의 상은 이때 바로 대승불교 때에 정형화된 것입니다.

즉, 경전에 나오는 보살의 복장이나 특징을 이때 사찰관리인의 복장을 그대로 후대 미술가들이 도입되게 되었던 것입니다. 즉, 경전에 나오는 보살의 복장이나 특징을 이때 사찰관리인의 복장을 그대로 후대 미술가들이 도입되게 되었던 것입니다.

머리도 기른 상태라 지금 절에 가서 보살을 보면 전부 일반인의 복장과 머리라는 것을 알수 있어요.

이렇게 사원의 재정이 풍부하게 되자

이제 전국적인 불교 포교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고 경전 결집, 제도변화, 심지어 사원 바깥의 이웃에게도 관심을 보이는등의 그 때의 불교운동은 참으로 대단하였습니다.

이때의 불교운동을 대승불교 운동이라고 하고 불교의 전파가 중국, 프랑스...등의 세계적으로 퍼졌고...

서기가 시작될 무렵부터 서기 6백년까지 인도는 완전히 대승불교국이 되었습니다.

스님들은 여전히 수행에만 몰두하면 되었고 일반인은 살림과 포교, 대사회적인 것을 도맡아

불교가 거의 일반 사회로 내려온 것입니다.

그러던 불교가 서기 6백년경부터 다시 밀교시대로 들어가게 되었어요.

밀교는 보다 인간적인 불교요, 다분히 힌두교적이기도하나 불교의 사상을 그대로 간직한 시대였지요.

밀교는 현재 두 가지가 전합니다.

하나는 진언적인것과 함께 신비주의 불교입니다

오늘날 티벳불교를 대표적인 신비주의 밀교라고 해요.

또 하나는 마을에서 수행하는 '성의 삼매'인데

남녀 성적인 행위를 수행으로 한단게 높혀놓은 것입니다.

오늘은 주문에 대한 말이 나와서 그 역사적인 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대승불교와 그리고 밀교까지 차분히 들으세요.

이것도 불자들이 중요한 상식이라 들어두어야 해요.

오늘날 우리나라가 왜 진언을 외우게 되었는지 천수경에 보면 많은 주문이 나오잖아요.

우리나라는 대승불교이면서도 밀교를 부분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다시 돌아가서.....

그러니까 밀교는 불교를 좀더 가정으로 끌여들었어요.

항상 법당에서 신성하게 외우기만 하던 경전이 이제 안방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그것이 '성의 삼매' 여요.

도대체 성의 삼매가 무엇일까?

불교의 많은 수행이 결국 하나 삼매를 이루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있어요.

정신이 하나로 통일되면 세상의 이치를 모두 깨닫게 된다...

따라서 삼매를 통하여 붓다가 되는 것은 가능하다

그래서 경전을 읽는 데 주력하는 독경삼매가 있고 성인의 명호를 읽는데 주력하는 염불삼매가 있고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 같은 칭명 기도지요.

또한 오늘날 참선 삼매도 같은 목적입니다.

그런데 삼매는 하나로 통일되어 나가는 것인데 망상없이 하나로 집중된다

이것 참 힘들어요.

그런데 한번 어떤 방식이든지 한 방법대로 집중하여 일단 삼매를 얻으면 그 뒤에 수행은 쉬워집니다.

즉, 이 삼매는 한번 얻으면 계속 그 삼매를 유지하게 되고 발전해가요.

무슨 말이냐 하면 예를 들어 염불삼매...즉 1시간을 '관세음보살' 불러서 망상없이 마음이 관세음보살에게만 집중되어있다면 그것을 삼매라고 하는데 그렇게 1시간을 집중하게 되면 점점 자동으로 그 시간은 늘어나고 나중에 24시간을 하나에 물두하는 신비로움을 맛보게 됩니다.

다른 것을 재미 없어지고 오직 관세음보살하는 것에만 마음이 자동으로 가서 계속하게 됩니다.

마음은 시간도 잊고 망상도 잊은 채 7일이고....열흘이고 1달이고 그렇게 흘러가게 되는데

바로 이때가 모든 망상을 씻어내고 자기 본래 자리에 들어가는 순간입니다.

어느날 저절로 세상의 이치를 알게 되고 기어이 위대한 붓다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도 스님들이 7일간 잠안자고 용맹정진하는 관습이 내려오고 있어요.

하옇튼 어떤 방법으로든 마음이 중지하고 하나에 모으면 결국 모든 이치를 알아지는데

밀교에서는 그것을 성의 삼매로 개발한 것입니다

즉, 남녀가 합궁할 때 보통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그만두게 되는데 밀교에서는 그 시간을 길게 늘이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감각을 잊어야 하고 감각을 잊는 것은 삼매에 들어가야 가능해요

그래서 여러 가지 체위가 나오고...하옇튼 요즘의 도색잡지같은 체위를 그려놓은 책이 있는데

이것이 좌도 밀교경전입니다.

아마도 성을 종교에 삽입시켰던 경우는 힌두교와 불교뿐일 것입니다.

그만큼 불교는 사상적으로 개방적이고 성을 오염된 행동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공부와 수행으로 승화시켰어요.

그런데 그것은 아마도 인도인들의 특징이라고도 생각해야할 것입니다.

인도의 힌두교 사원에 가면 자연스럽게 신들이 성행위를 하는 조각그림이 있어요.

인도인들은 성을 평범한 일상의 일로 보는 관점이 있었어요.

그것을 부끄러워하거나 숨길일이 아니고 드러내고 이용하여 수행으로 까지 끌어 올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필 불교에서, 밀교에서 성의 행위를 삼매로 끌어올렸던 것은 다 그런 이유가 있었어요.

하루종일 일하던 일반인들은 수행할 여가가 없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잊지않고 있는 것은 부부생활이잖아요

그러니가 거기다가 공부를 접합하면 참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원래 밀교 경전은 부처님께서 몇몇의 제자에게만 전수하던 부처님의 진설이이라고 합니다.

부처님은 출가전에 이미 성의 경험이 풍부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경전을 설할 수 있었다는데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부처님은 대단히 현명하게 가르쳤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볼 때는 대단히 현대적이고 사실적인 가르침이어요.

무엇을 하던지 삼매를 얻으면 좋으니까...성생활을 좀 바꿔서 수행으로 여기고 들어가게 하자....

그동안 소승불교에서는 금기시하던 성생활이 밀교에서는 오히려 이용하여 일반인도 수행하게 하려했던 것이 좌도밀교....즉 성의 삼매법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밀교가 인도에서 서기 1300년까지 번성하다가 유일신교도들인 이슬람주의자들이 처들어와서 약 120년간 인도를 정복하고 있는 바람에 사원을 폐지되고 불상을 깨졌으며 스님들은 환속시켰어요.

밀교시대 불교는 완전히 사람은 평등해진 것이고 누구나 깨달음에 들어가는 법으로 개방되고

자연스러워진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스님들도 성의 삼매를 수행하는 풍토가 생겼어요.

일본은 백제를 통해서 대승불교를 점차 유입하다가 인도 본국에 가서 불교를 배우고 싶어서 몇몇 스님들이 뒤늦게 인도에 도착했어요.

도착하니까 인도는 밀교시대인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이미 대승불교를 받아들여서 밀교를 안받아들였어요.

그런데 일본승들이 인도에 가서 보니까 스님들이 부인같은 보살을 두고 성의 삼매를 닦아요.

불교는 중국, 한국에 전해지면서 신비주의 도교와 합쳐져서

금욕주의가 되었던 것이고 인도는 안 그렇다 하고 귀국승들이 주장하기 시작했고

그 중의 유명한 어떤 고승이 일본에서 크게 전법하였는데 그 스님이 결혼하였고 그 스님을 따라서 스님들이 결혼하는 풍속으로 바뀌면서 스님들도 육식대처할 수 있다는 말이 지금부터 700년전에 공포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본은 80%가 결혼하고 그 불교가 한일합방때에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한편 일본 총독부는 한일불교합병정책으로 스님들을 정책적으로 강제 결혼시키기 시작했고 그렇게 36년간 결혼이 가능한 불교로 바뀌게 되었어요

해방후 독신승과 대처승은 갈라지고 오늘날 우리나라는 결혼과 독신이 함께 있는 불교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부처님은 어느 편이냐 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사람들은 말합니다. 오히려 천태종이나 기독교는 번성하는데 다 결혼하는 종파아닙니까

그런데 유독 조계종은 그대로라고 합니다. 시간적으로 사회는 엄청나게 변화를 겪었습니다.

그러나 조계종이 그대로 있음은 오히려 후퇴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앞으로 가니까 가만 있으면 뒤로간 것이자나요.

다행이 우리 무불은 인터넷 강의도하여 겨우 체면을 유지시키고 있으나

부처님은 이런 저런 종파를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보는가

사람의 마음을 봅니다.

이것이 대승불교의 특징입니다.

이 법은 이미 스님들만 아니고 누구나 깨달을 수 있는 법임이 만천하에 공개된 마당입니다.

따라서 그가 결혼했던 안했던 속가에 살던 승가에 살던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디에 살던 성실하게 종교생활하여 부처님의 법을 행하고 전파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부처님은 복을 주십니다. 따라서 밀교를 무시하고 대승법을 우위에 둔다던지

소승법을 하위에 두고 대승법을 상위에 둔다던지 하면서 편을 가르는 방법은 이미 캐캐묵은 방법이고 구시대 사고 방식입니다.

시간이 없어서 오늘은 밀교까지 간단히 흝어보았는데 담시간에는 중국 우리나라까지 전파되었던 선불교도 간단하게 하겠습니다.

오늘은 주문이 발생된 역사에 대하여 하였습니다.

밀교시대에 북방으로 전파된 수행법이 있었는데 바로 진언을 수행하는 법이었어요.

그러니까 밀교시대에는 대승경전에 나오는 이런 진언만 모아서 외우고 신행하였던 것이지 따로 진언학은 없습니다. 이런 진언을 외우면 가정이 달라짐을 확신하였던 것입니다.

진언의 효과나 진언을 통한 깨달음에 대한 것은 다음 시간에 하도록 하고 오늘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20. 正覺에 대하여

 

三世諸佛삼세제불

삼제의 모든 부처님도

3세는 과거 현재 미래이고

3세의 모든 부처님들도 다 이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여 최상의 깨달음을 얻는다는 말인데...

요점은 반야바라밀다에 있습니다.

依般若波羅蜜多故 得阿뇩多羅三먁三菩提

의반야바라밀다고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는 까닭으로 최상의 깨달음을 얻느니라.

금강경과 여기 반야심경은 똑같이 '반야'를 가르치는 경전입니다.

반야는 지혜를 말하고 지혜중에서도 자기를 비웠을 때 얻어지는 지혜를 말해요.

이 지혜를 얻기 위한 수행이 반야바라밀다이고

반야바라밀은 보시바라밀과 함께 불교의 큰 수행이 됩니다.

보시는 베풀다입니다.

가지고 있는 것을 남에게 베풀어 주므로 해서 집착을 버리는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가지고 있는 것을 비우고 버리는 연습을 자꾸 해야해요.

원래 수행자는 여섯가지 수행을 해야 합니다.

보시바라밀...베풀다

지계바라밀...약속을 지키기

인욕바라밀...참다

정진바라밀...부지런함

선정바라밀...삼매를 얻다

반야바라밀...지혜를 얻다

이것이 6바라밀입니다.

'바라밀'이나 '바라밀다'나 같은 의미입니다.

이 중에서는 '반야바라밀'이 깨달음의 완성이라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이 반야바라밀다심경은 '반야바라밀'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설명한 경입니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을 들으면 모두 지혜를 얻어야 해요.

그것도 위없는 최상의 깨달음을 얻어야 합니다.

금강경과 반야심경에서 부처님께서 말하고자 하는 것을 제대로 파악해야 합니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들도 다 한결같이

이 반야바라밀에 의지하는 까닭으로 최상의 깨달음을 얻는다 하였어요.

여러분도 반야바라밀에 의지하면다면 그렇게 됩니다.

무엇이 반야바라밀입니까?

바로 마음에 단 하나라도 세우지 않는 것입니다.

반야라는 말 자체가 '마음을 비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마음을 비울 것인가하면 하나라도 세우는 바가 없이 사는 것입니다.

일상사에 자꾸 세우면 버리고....세워지면 버리고.....해서 버리는작업을 수없이 해야 합니다.

화두 공부하다 보면 화두를 잃어버리면 다시 붙들고 하기를 수없이 반복합니다.

그러다 어느날 화두와 내가 일치되는 순간을 만나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흔들리지 않고 오직 화두 하나만 남아있습니다.

혹 아무리 힘겨운 일이 생겨도.....당혹 스러운 일이 생겨도....유혹하는 사건이 생겨도....

전혀 흔들리지 않을 때가 옵니다.

3일 이고 7일이고 유혹되지 않고 계속 화두가 들려있어요.

그때라야 비로소 바로 반야바라밀을 이룬 것입니다.

제가 간혹 여기에 점검하러 오는 분들이 '제가 깨달았으니 이제 어떻해야 합니까?'

하고 물어오면 화두를 들으라 해요.

그래서 일행삼매(一行三昧)를 이루라해요.

그러면 모두 멍하게 생각합니다.

'아니, 스님 제가 깨달았다니까요.....

확실하게 깨달았는데 뭘 또 화두를 들으라 합니까?? ' 라는 식야요.

그런데 정말 깨달아서 마음에 한 점의 오점도 없는 사람은 척 첫 말을 던지는 것이 달라요.

그래서 척 보고 대답한 것입니다.

임제 스님이 깨달음을 얻고 조주스님을 찾아갔습니다.

조주스님이 마침 발을 씼고 있었어요.

그러거나 말거나 턱 들어서서.....

"입이 있으면 짓이겨주고 귀가 있으면 쳐버리겠네...."

임제스님이 들어서면서 "무엇이 도입니까? "

하고 물었어요.

그러자 주주스님이 "나 지금 발을 씼고 있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임제스님이 발가까이 귀를 갔다대자

조주스님이 "입이 있으면 짓이겨주고 귀가 있으면 쳐버리겠네...." 하고 대답한 것입니다.

그러자 임제스님이 휙 나가버렸어요.

여기서 우리는 두 도인들의 도의 경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우선 임제스님은 들어서자 마자 질문해요.

무엇이 도입니까?

이렇게 질문하잖아요. 지지하게 안합니다.

이것은 상대의 경지를 한번 알아보려고 던져보는 것입니다.

몰라서 묻는 겨우도 있겠으나 깨달은 자는 이렇게 질문합니다.

턱 던지는 질문이 달라요.

그러자 도인도 대답이 다릅니다.

"나 발씼고 있네....."

이것이 대답이었습니다.

멋있고 대단한 말이잖아요.

던지면 자연스럽게 답이 툭 뛰어나옵니다.

그러자 임제스님이 좀더 확인해보려고 발에다 귀를 갔다댔던 것입니다.

이것은 '뭐라고 하시는 것인지 못들었습니다....'라는 뜻야요.

나 발 씻고 있네....라고 대답하신 의도가 무엇인지 재차 설명부탁합니다 라는 말이지요.

새소리님처럼 발에다 뽀뽀하면 조주스님이 바로 발로 쳐버려요.

이 요망한 것이!.....하면서....ㅎㅎ

그러자 조주스님도 알아듣고

"입이 있으면 짓이겨주고 귀가 있으면 쳐버리겠네...."

라고 한번 더 설명해 주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임제스님은 '음 과연 도인이군....'하면서 한번 배우고 휙 나가버린 것입니다.

도담할 때는 번개와 같이 속을 드러내기도 하고

상대의 허점을 잡아채서 내팽개치기도 하는 법인데

질문자가 끈끈한 정덩이리를 가지고 물어오면....

스님 제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후로 어떻게 수행해야 합니까? 하고 말입니다.

그러면 제가 화두들 들고 일행삼매를 수행하세요. 합니다.

그러면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면 알아채고 감사합니다 하고 물러가요.

그러나 도를 모르는 사람은 네? 뭐라구요....제가 깨달았다니까요....

하고 제 말을 못 알아듣습니다.

그러면 제가 '글쎄 그대가 깨달았다는것을 아네 ....

그러니가 일행삼매를 수행하라는 것이야....

.'하고 말해주면 대개 못알아들어요.

그래서 휙 나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뭐라고 반박하면서 장황설이 늘어집니다.

쯧쯧 ....도를 보여주어도 모르다니....하고 더이상 대답안해요.

반야바라밀을 얻은 자는 마음에 유혹되지 않는 자입니다.

작은 것에 유혹되는 사람은 깨달음후에도 계속 화두를 들고 수행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반야바라밀을 수행하는데 일상사에서 작은 것에 유혹되지 않도록 그때 그때마다 점검해도 되지만 그것은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생활속에서는 일단 유혹되고 반성하거나 유혹되려고 할 때 괴롭게 참고 있자나요.

괴로울 것도 없는 법인데 괴롭게 참고 있으니 이 또한 수행이 아니고 고행이 되어요.

대부분 말입니다.

그러니까 평상시에 화두를 들고 수행해서 화두가 지속되게 수련해놓으면 일을 당했을 때 잠깐 유혹되려 하다가도 금방 돌아오게 됩니다.

달아난 화두를 잡아채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깨달음 후에도 화두를 들라는 것입니다.

깨달음 후에.... 공부를 끝내어도 좋은가? 질문하기 전에 조용히 화두를 단 30분만 들어보면 금방 자기 할 일을 알수 있습니다.

'스님, 마음이 맑은 물처럼 된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고 묻는다면

화두를 들어보라고 하면 되요.

화두 이것 무미건조하고 재미없는 것인데 턱 들으면서 요놈이 재미없다는 분별도 일어나지 말아야 하고 지루하다는 분별도 없는 상태로 그대로 30분간 지속된다면 그사람은 평생 무심을 얻은 사람입니다.

수행할 필요없는 경지에 들어갔으니 더이상 닦을 것이 없어요.

그러나 30분동안 오만가지 잡동사니까 왔다 갔다하고 집중도 되지 않는다면 아직 부처행을 닦아야 되요. 매일 하루에 어떻게 하든지 15분에서 1시간씩 꼭꼭 참선수행 해야 합니다.

그러다 어느날 2시간을 앉아있어도 금방 지나가듯이 지나가고 지루함도 없이 쭉 화두로 이어진다면 비로소 마음에 원함이 끊어지고 특별함이 끊어지고 지루함도 끊어진 무심을 체득한 자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감히 일상사에서 무심이 되지 그렇지 않으면 계속 조그마한 일에도 흔들리고... 괴로워지고.... 이끌리고 ....이랬다 저랬다를 반복하는 사람이 됩니다.

오늘은 편안 하였다가 내일은 불안하고 .....

말은 청산 유수로 하여도 ....막상 일이 닥치면 하나도 마음대로 되지 않아요

그렇게 평생 지내면 불교를 아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도 모르는 채 세월만 가고 맙니다.

물론 염불도 좋습니다.

무엇을 하던지 하나로 통일되어 마음이 모아진다면 어찌 천문(天門)이 열리지 않겠습니까

제가 그전에는 하루종일 화두 드는 공부가 참 오랫동안 해야 되는 것인줄 알았어요.

그런데 어느날 제가 4일간 밤낮 주야로 화두가 들리는 것을 체험해보니까

그 핵심은 의심이었습니다.

궁금함이 극에 다다르니까 공부는 저절로 되고 24시간 화두가 떠나지 않아요.

급기야 어느날 밤부터는 밤에 잘 때도 밤새로록 잠시 틈도 없이 화두 하나로 몰두되는 것을 겸험했어요. 그렇게 하나에 몰두되니까 답이 안 나올래야 안 나올 수 없드라구요.

한순간 답이 알아져요.

음... 이것은 하나로 몰두하라는 말이 다 이유가 있었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로 지속되면 이루지 못함이 없다는 말도 이해되었어요.

동시에 일이관지(一以貫之)에 대한 뜻도 알게 되었습니다.

◆一以貫之= 하나로써 모든 것을 통한다.

하나를 아니까 모든 것이 그야말로 주마등같이 다 보여요.

그렇게 4일간 밤맞 주야로 단련하고도 일상사를 하는 것은 또 달라요.

일상사는 섬세하고 예민한 삶이라 때로는 화내고 때로는 그냥 지나가고 하지만

혹시라도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는가....항상 점검해야 합니다.

친구 말에 서운하지 않는가...모친의 말이 귀에 거스르지 않는가.....

물건 사러갔다가 친절하게 하지 않는 사람이 있어도 마음에서 찜찜함이 없고 고요한가...

쓸 돈이 없어서 가난해도 걱정이 되지 않는지....

남이 와서 시비를 걸어도 마음이 고요하게 대처하는지....

친한 사람이 남에게 나를 나쁘게 말하여 그 말이 나중에 내 귀에 들려올 때

그 마음이 고요한지.....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도 화를 안내는지....

공연히 많이 안다고 우쭐대거나....도를 안다고 권위를 내세우고 있지 않는지...

평범한 일상이 아니고 쓸데없는 상을 내세우는 것은 아닌지....

매일 매사에 점검하면서 살아야 해요.

그렇게 보림하면서 ...시간이 가고 가고 가다보면

어느날 매사에 비로소 편안 해졌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됩니다.

공부의 길은 이렇게 험난하고 예민하고 깁니다.

일단 화두를 타파하면 그 뒤론 평생 살아가면서 하는 공부이니까 삶이 공부입니다.

그런데....혹 도를 알았다 해도

평범함을 못 떠나는 것이니 혹 여기 계신 분들이 도를 몰라도 걱정하지 마세요.

이미 부처는 되어있는 것이고 마음이 나가면 도가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기 무불선원에 왔을 때 이미 부처입니다.

확실합니다.

여러분이 다른 곳에 가서는 참 자기를 알기 어려워요.

아무도 여러분을 안 알아줍니다.

그러나 여기는 바로 여러분을 알아주어요.

참부처로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무불에 오면 온 즉시 부처입니다.

더이상 부처가 되려고 닦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부처의 행을 수행함은 있어요.

여러분은 즉시 바로 부처의 길을 갈 것이지 다른 길은 가지 마세요.

여러분이 걷고 말하고 움직이는 것이 바로 부처의 행입니다.

그러니 운명적으로 부처의 행을 안할 수 없어요.

어떻튼 운명적으로 매순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처인줄 알고 바로 부처의 길을 가면 보림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부처가 되어서 부처의 길을 가는 보림자이니 고민하고 말고 더 얻으려 하지도 말아요.

8만4천대장경을 다 뒤져도 특별함은 없고 부처되는 방법이 구체적으로 나온 곳도 없습니다.

다만 이것만 있어요. 깨달으라, 그대가 부처임을.....

이 말에서 깨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대가 원래 부처이니 단지 깨어나라!"

이 말만 있습니다. 그리고 부처가 가는 길인 부처행에 대한 것은 수없이 많아요.

발닺는 것....손을 드는 것이 바로 부처행인 줄 아시고

여러분의 인생을 행복하고 편안하게 잘 살아가도록 하세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란 '가장 높고 깊고 바른 깨달음' 이라는 말입니다.

정등(正等)에 대한 것='깊다' 는 것에 대해서는 지난 시간에 말했지만

바른 깨달음....정각(正覺)에 대한 것은 오늘 말했습니다.

올바른 깨달음은 자기가 누구인지 확실히 아는 것입니다.

부처님을 자꾸 2500년전의 석가를 연상하지 마세요.

그 부처는 그렇게 살다 갔고

여러분은 여러분입니다.

그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자기만의 길을 갔을 때

사람으로써 자기

한 인간으로서 자기

한 여성으로서 자기

한 남성으로서 자기 이시대의 한 사람, 한 불자로서의 자기.그 자기의 길은 다 달라요.

자기 환경과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도 다르고

어떤 일을 하던지 죄안짓고 선행하면 바로 부처행이고 죄를 지으면 부처가 죄를 지은 것입니다.

참부처는 두려움이 없다고 했어요.

인도의 간디는 비폭력 무저항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할 것을 외쳤어요.

아무리 정당하다해도 폭력은 잘못입니다.

물론 우치하고 미련한 아이들과 같은 사람들에게는 때로는 폭력이 필요하겠으나

인간 사회에서는 비폭력이 원칙이어야 합니다.

자신의 정당함을 위하여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이기주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다수면 폭력을 써도 된다는 힘의 논리는 우치한 자들의 행태입니다.

소수가 옳은 경우가 있어요. .....소수가 옳아도...지켜보아야 할 때가 있어요.

우리는 항상 배우잖아요.

대통령 선거할 때 우리는 항상 다수를 인정해주잖아요.

살림을 잘못해도 기한을 인정해주고 기다리잖아요.

다수가 절대 옳지 않아요.

어리석은 자 다수라면 어찌 옳겠습니까?

그러나 소수의견도 무시하기 어려운데 어떻게 다수의 의견을 무시 할수 있겠어요?

어리석은 자 다수가 사는 것은 이 시대의 운명이기 때문에 나라가 잘못가는 것도,

사이비가 득세하는것도 그냥 보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포기하지 말고 끝없이 옳은 소수의견을 내야 해요.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을 계몽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결국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가득한 날이 될 때까지 우리의 대승운동은 계속 되어야 합니다.

날마다 그래서 이렇게 우리는 지혜를 전하고 갈고 닦는 것입니다

과거의 보살도 이렇게 붓다의 행을 하였고

지금 우리도 이렇게 붓다의 행을 하는 것이고

미래의 우리 후배도 이렇게 붓다의 행을 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다른 사람이 아니고 바로 부처라 것

이것을 바로 아는 것이 바로 정각(正覺)입니다.

더이상 의심하지 마시고 부처행을 하시는데 한 점의 망설임도 없기를 바랍니다.

 

 

 

19. 삼먁(正等=中道)에 대하여

 

三世諸佛 依般若波羅蜜多故 得阿뇩多羅三먁三菩提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고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는 까닭으로

가장 높고 깊고 바른 깨달음을 얻었느니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범어입니다.

우리말로는 '가장 높고 깊고 바른 깨달음' 이 됩니다.

아뇩다라=無上=제일 높다

삼먁=正等=평등하다, 치우치지 않았다.

삼보리=正覺=바른 깨달음

우리말로는 '가장 높고 깊고 바른 깨달음'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正等을....평등, 옳바른 균형의 의미를 한마디로 그냥 '깊다'로 표현하였습니다.

동양의 모든 철학은 균형의 철학입니다.

유교에서는 이 균형을 중용中庸이라해요

도교과 불교에서는 중도中道라고 합니다.

중용이나 중도나 의미가 비슷합니다

단지 불교에서는 조금 다르게 사용하는데 도교의 중도는 양자의 중앙지점처럼

이쪽과 저쪽에 치우치지 않는 것을 중도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불교의 중도는 이쪽과 저쪽을 떠난 것을 중도라고 합니다.

치우치지 않는다나 ....양쪽을 떠났다나 같은 의미같으나 엄밀히 따지면 다릅니다.

떠났다는 말은 양가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즉 더럽다....이런 형상 인정하지 않아요.

깨끗하다....이것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더럽다 깨끗하다는 것은 다분히 주관적이고 의미적인 것일뿐

그 실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깨끗하다는 의미에 끌려가지 않고 더럽다는 의미에도 끌려가지 않아요.

이 말은 우리가 있는 이 곳은 실제는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는 것인데

중생이 스스로 더럽다 깨끗하다 하고 정해놓았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어떤 사람이 몽상의 세계에 빠져있듯이....

그것은 마치 어떤 정신병자가 실제는 아무 것도 없는 텅빈 공간에....

텅빈 방에 마음으로 갖가지 아름다운 세계를 설정하여 놓고 계속 그렇게 생각하면

정말 환상이 실제처럼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멀쩡한 사람이 보면 그 정신 병자는 텅빈 공간에 왔다갔다하는 것인데

정신병자인 당사자는 지금 아름 다운 정원을 거니는 꿈을 꾸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아름다운 옷을 입고 시종 2명과 함께 정원을 걷고 있어요.

어디선가 라일락 향기가 불어오고 정원에는 각종 아름다운 꽃이 피어있습니다.

장미...팬지...제비꽃, 기타 이름 모를 들꽃들....

정원에 예쁘게 손질한 상록수가 열을 지어서있고 저 멀리 그림 같은 하얀 집에서 아이들이 피아노를 치면서 아빠와 즐겁게 웃는 소리가 들립니다.

자기는 지금 잠시 시종들과 밖에 산책나온 것입니다.

나비가 나르고 벌들이 꿀을 찾아 꽃들에 왔다갔다하는 것이 보여요.

그러면서 시종에게 말합니다.

참 아름답기도하지...아....얼마만에 맡아보는 꽃인가.....방안은 답답해...

조금만 걸어도 이렇게 상쾌한데...

너희들도 좋지....?하고 물으면 시종들이

네...마님, 오늘은 날씨도 좋고 아이들과 부군께서도 즐거운 날인가봐요.

이런 날 마님께서 이렇게 산책하시니 마치 공주님께서 걷는 것과 같사옵니다....

눈이 부셔서 저희들이 감시 쳐다보기가.....어렵사옵니다....ㅎㅎㅎ

그러면서 빈 방을 왔다갔다하면서 계속 중얼거려요.

무엇이든지 생각하면 금방 몽상의 세계에서는 나타납니다.

벌도...나비도...꽃도...말도...새소리도

멍쩡한 사람이 보면 지금 정신병자가 몽롱하게 꽃에 취해서 베게를 안고 거닐고 있으년서 즐거워하나....

사실은 텅빈 사각방입니다.

아무리 옆에서 사람이 계속 깨어나라해도 깨어나질 않아요.

간혹 친척 언니가 찾아와서 그동안 잘 있었냐고 물으면

이곳에 있는 이 흰 장미 참 이쁘지...? 하고 물어요.

아니, 흰 장미가 어디 있어....? 여기는 턴빈 방이야....제발 정신 좀 차려라...응?

하고 말해주어도...

아냐!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야....

봄부터 지금까지 내가 계속 물을 주어 가꾸고 예쁘게 손질해주었는데....

이 꽂들이 안 보인다니....내 눈에는 이렇게 아름답게 보이는데

언니는 안보인단 말야?....아니 어쩜 그럴 수가 있어 ....꽃을 보고도 마음이 기쁘지 않다니....

언니는 정서적으로 불안정해....여기 선생님 좀 한번 만나봐...참 좋으신분이야.....하는 것입니다.

이쯤되면 찾아간 사람이 정신이 멍해져요.

하도 완고하게 꽃이 있다고 하니까 혹시 자기 눈이 이상해진 것 아닌가 하고 일순간 착각할거예요. ....

이것이 바로 중생계입니다.

우리가 지금 멀쩡한 정신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깨어난 부처님과 보살들은 우리가 아직 꿈을 꾸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무슨 영화더라?? 3편인가 까지 나왔던 영화....검은 안경쓴 악당과..맞어...요

메트릭스에 보면 깨어난 자와 꿈꾸고 있는 자에 대하여 나옵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생활하고 있으나 사실은 이 현실이 모두 꿈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실제 인간들은 모두 실험관에서 길러지고 있는 에너지원일뿐이라고 해요.

기계가 돌아가려면 에너지가 필요한데 그 에너지는 사람의 몸입니다.

마치 짐승들을 길러서 사람이 그 고기를 먹듯이 기계들이 사람을 우리에 넣고 길러서

나중에 사람을 잡아서 그 피와 살등을 연료로 사용해요. 기계가 주인이 된 세상이지요.

사람들에게는 태어나면서부터 꿈을 꾸게 만들었어요.

그것이 바로 이 세상입니다.

거기서 사고가 나서 어떤 사람이 죽으면 친척들은 슬퍼하지만

사실은 아무 관련 없는 사람이고 다만 그렇게 훈련되는 프로그램의 일일뿐여요.

실제는 기계가 사람 하나가 필요해서 잡아서 에너지를 만들어서쓴 것인데

그 사람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사고로 죽은 줄 압니다. 그렇게 프로그램 시켜놨으니 그렇게 인정하고

관을 땅에 뭍고 돌아가요.

혹 20년 뒤에 파보면 그 시체가 썩은 것처럼 보이는데

이것은 모두 그렇게 보이도록 해놓은 프로그램일 뿐입니다.

실제는 20년 전에 기계가 사람 살과 뼈를 에너지로 써버렸어요.

그런데 그 중에서 유독 꿈꾸지 않고 깨어난 자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기계와 싸우는 영화가 메트릭스입니다.

그런데 그 영화를 보면 문득 섬득해집니다.

혹시 이 현실이 누군가 이렇게 조작한 현실이 아닐까?

실제는 현실은 따로 있는 것 아냐? 하고 한번 쯤 생각하게 되요.

영화를 유명한 철학가, 소설가들의 말을 빌려와서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 속에는 유명한 말들...철학가들이 하는 말들이 막 나옵니다.

그래서 꽤나 심도있게 거짓을 진짜처럼 만들어놓으니까 사람들이 이끌려 히트를 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면 마치 경전을 그대로 베낀 것 같은 착각이 들어요.

경전에 부처님께서 한 말들이 그대로 다 있잖아요.

실제는 아무 것도 없는 텅빈 공간인데...

중생이 스스로 더럽다, 깨끗하다....설정해 놓고

크다....작다.....부자다 .....독신이다....하고 설정해놓고

그 정해 놓은 가상 현실은 현실로 착각해서 사는 중생들을 그대로 표현했어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한번쯤 주변을 돌아보게 하였으니 메트릭스는 가장 철학적인 영화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한번 되돌아보아야 해요.

내가 지금 현실이라고 하는 이 상황이 정말 현실인가? 혹 꿈이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부처님은 한마디로 단언해버립니다. 바로 인간의 꿈일 뿐이라고 말입니다.

몽상일 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과 보살과 선사만이 이 몽상에서 벗어난 자들입니다.

마치 정신 병자가 몽상의 세계를 만들어 놓고 스스로 기뻐하고....슬퍼하듯이

인간들도 원래 텅빈 세계에서 갖가지 의미를 만들어 놓았을 뿐이고

그 의미에 이끌려사니 꿈꾸는 자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부처님은 양자.....즉 상대적인 가치의 세계를 떠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바로 반야심경이야요.

그것을 중도라고 했어요. 중도는 중간을 가는 자가 아니고 양변을 떠난 자의 삶을 말해요.

더럽다 깨끗하다....부자와 가난한 자....부처와 중생....이런 상대적인 개념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돈오입도요문론에 보면 중도는 가라고 했습니다.

중도는 가라고 했습니다. 중앙과 가를 말할 때 쓴 '가'입니다.

사투리로 '가생이' 라고 하지요

변방이라고 말하는 '가' 말예요

그 '가' 는 끝자락을 말하고 변방을 말하고 육지와 바다의 경계선인 육지의 끝을 말하는데

그 끝트머리가 중도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중도는 중용처럼 단순히 이것과 저것에 치우치지 않는 자리가 아니고 무심을 가진 자가 있는 곳이 바로 중도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있는 곳은 가일 수 밖에 없으니까 말입니다.

어디를 가나.... 더러운 곳에 가나..... 꽃밭에 가나 ....진흙구덩이에 가나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고요하다면 거기가 중도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불교의 중도는 어떤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마음을 말합니다. 고요한 마음이 바로 중도입니다.

즉, 중도는 마음에 있는 것이지 따로 여기가 중도라고 정해진 곳은 없다는 말입니다.

스님들이 사는 곳...사원은 원래 중도를 꿈꾼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세계입니다.

스님들은 중도를 실천하기 위해서 산중 사찰에서 살아요.

거기는 잘난 자가 없고 못난 자가 없습니다.

모두 같은 색의 옷에 같은 밥을 먹고 똑같이 생활하고 똑같이 시간을 지킵니다.

잠자는 시간도 같아요.

그런 속에서 살아야 중도를 실천하게 된다고 본 것입니다.

더럽다....깨끗하다....아름답다....추하다는 개념이 없는 곳....

그곳이 산중 사찰입니다.

그곳에서 몇년 그렇게 살게 되면 인간은 누구나 다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래서 고요해집니다.

오랜 수행후 저자거리에 나와도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게 된다고 하는데

물론 좋은 취지의 수행장소인 것은 확실합니다.

아직까지 지구상에서 사찰만끔 훌륭한 수행장소는 없을 것입니다.

좋은 점이 많은 곳이 사원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산중에 가야 좋은 수련을 하게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엄격한 규범이 있고 평등하다고 하여도 ....그곳도 사람이 사는 곳입니다.

사람은 어떤 황경에서 살아도 인간의 기본적인 문제는 반드시 나타나게 되어있습니다.

마치 군대에 가면 모두 같은 옷을 입고 규율이 엄하니까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하나....

그곳에서도 계속 문제가 생겨나듯이....

사람은 옷을 바꾸고 환경을 달리하고 다른 제도권에서 사는 것은 마치 이쪽 나라에서 저쪽 다른 나라에 이동하는 것과 같을 뿐입니다.

처음에는 그 나라의 제도와 관습과 말을 알려고 공부하느라 여가가 없으나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서 그 나라의 풍속과 규율을 익히고 나면 나중에는 사람 그 자체만 남습니다.

그 사람이 문제이지 제도와 규율은 문제가 아닙니다.

사찰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중에는 자기 문제만 남아요.

살아가는 자기 자신.....여전히 욕심을 버려야 하고 분별을 버려야 하나....

버려지지 않는 자기....

그래서 나중에 사회적인 문제거리를 일으키기도 하는 자신...

바로 종교인들의 비리도 자기에게서 나와요.

우리나라 불교는 지금 마치 중세 유럽의 암흑기시대 기독교가 겪고 있는 병 비슷한 것을 앓고 있어요.

중세유럽의 기독교의 병 말입니다.

사제들은 천국에 가는 티켓을 팔고....

교회의 최고 지도자가 나라의 통치자가 되는 교정일치의 시대에 생겨나는 비리들....

아직도 남아있는 교황이라는 지위인데 기독교에서는 교황을 기독교 이상 세계에 다가간 것으로 보지만

인간이 신처럼 위대해지고 대단한 권력을 가진 교황이니 말입니다.

그래서 만 백성은 신과 같은 왕에게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통치를 받습니다.

그러나 그 왕은 사실 평범한 사람일 뿐입니다.

지위가....권위가....그를 높이 올려놓았을 뿐...평범한 인간이어요.

그 자리를 지키려고 수많은 암투를 벌려야 하고 나라에 재난이 일어나면 신의 권능과 같은 능력으로 돈을 풀어서 구원을 해주어야 합니다.

그럴려면 돈이 필요해요. 그래서 교황이지만 재정을 축척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제들의 이해가 얽히게 되고 비리와 부폐가 꿈틀댑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천당으로 가는 티켓을 팔게 되었으나

나라에 역병은 돌고 .....농사는 흉년이 되어요.

콜레라로 수 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민심이 흉흉해지자 마녀를 사냥해서 백성을 안심하게 하려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생긴 역사가 중세 유럽 500년 암흑기라고 합니다.

최근에 교황이 거의 200년이 지나서야 교회의 잘못을 인정하고 참회하였으나

그 당시에 억울하게 죽었던 많은 희생자들....또한 구교와 신교의 갈림길에서 죽어갔던 수많은 많은 생명들....이런 사람의 억울함은 어디에서 보상받습니까

인간의 역사는 가치의 역사입니다.

헛된 가치를 설정하여 놓고 그 가치에 얼매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지 그 수를 헤아리기 힐들거예요.

유럽의 근세 역사는 기독교 신교와 구교의 피 비릿내나는 역사입니다.

현재 개신교 신자들은 마틴 루터를 마치 최대의 개혁자로 인정하나

위대한 종교개혁가.....구교의 문제를 극복한 성서주의의 사상가....

그러나 나는 그렇게 보지 않아요.

루터 때문에는 많은 사람들이 죽은 것입니다. 그는 역사의 죄인일 뿐입니다.

도대체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하여 다른 단체를 만들어 놓는 것은

대립과 쟁투만 가져올 뿐입니다.

그 사상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무참하게 죽었습니까?

마치 공산주의 같잖아요

자유주의의 문제점을 극복하고 공산주의의.....이상을 펼치자...

그러나 공산주의는 '인간' 이라는 특성을 살피지 않은 실수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비릿내나는 죽음을 겪어야 했나요?

우리나라도 당장 그 동족상잔의 피해자잖아요.

그렇게 얻은 결과가 결국 가난과 굶주림....그리고 후진국의 오명이 되니까

이제 공산을 포기하고 자본주의로 다시 돌아오고 있습니다.

도대체 그동안 일어났던 수많은 희생은 무엇입니까?

공산주의를 만들기 위해서 자본가들을 무참히 죽이고 짓밟았던

그 피의 역사는 어디에서 되찾습니까?

그 당시... 피해 입은 대중은 얼마나 가슴이 멍들고....괴롭고....한스러웠겠겠습니까?

그걸 어디서 보상 받나요?

도대체 우리는 무엇 때문에 계속 이렇게 피를 보는 불행의 역사를 반복합니까?

바로 이념입니다. 또한 의미입니다.

그런 의미에 가치를 두던 역사를 살아와서 그래요.

삶의 가치를 지식에서 찾은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념입니다.

이념이란 한 낱 허망한 망상이요,

기득권자들의 이해득실에 놀아나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새로운 이념은 충돌하게 되어있고 그 충돌은 낡은 이념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을 매도하게 되었습니다.

이념이란 모두 헛된 망상입니다.

고요한 데서 세운 허망한 망상일 뿐입니다.

그것이 결코 인간을 평안하게 하지 않아요.

무이념.....오직 무심!

어디에 살던 일어나는 생각을 털어버리고 무심으로 생활하는 것

몸은 부지런히 마음은 항상 고요하게 하는 것

이것이 필요하지 새로운 이념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중도! 이것은 그대들의 마음에 있어요.

아인슈타인이 말이 요즘 불교방송에서 전해집니다.

아인슈타인은 미래 진정한 종교는 불교라고 했어요.

그 이유는 자연과 영혼을 숭고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불교는 자연에 가까운 생활을.... 자연스럼움을 이상적인 삶으로 생각합니다.

늙어서 죽는 것.....이것을 받아들이는 종교입니다.

병듦의 고통을 받아들여요..죽음을 부정하고 허망한 부활의 꿈을 꾸지 않아요.

열심히 일해서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부에 만족하고 가난해도 부해도 받아들이고

죽음의 순간까지 헛된 생각을 일으켜 고통받지 안으려합니다.

위대하고 고등한 종교는 자연에 가까운 종교입니다.

불교는 위대한 종교입니다.

그 어떤 종교보다고 인간적이고 자연적이고 합리적입니다.

그래서 아인슈타인과 같은 지식인들이 불교를 좋아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좋은 종교에 우리가 속해있어도

불교라는 제도가 단체가 결코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는 않습니다.

최후에 남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이어요.

자기문제는 자기가 풀어야 하고 자기 행복은 자기가 찾는 것입니다

자기......바로 붓다......

여러분이 그 행복을 추구하는 당사자 부처입니다.

그 누구도 의지하지 말고 자기 부처를 의지하여 당당하게 붓다의 길을 가세요.

누가 뭐라고 하여도 스스로 부처의 행을 하여 행복하게 한 세상 살다가 가세요.

여러분의 인생은 여러분의 것입니다.

 

'반야심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21. 그러므로 알라  (0) 2015.01.09
20. 正覺에 대하여  (0) 2015.01.09
18. 마침내 열반에 이르니라  (0) 2015.01.09
17. 걸림이 없는 까닭으로 두려움이 없고  (0) 2015.01.09
16. 지혜도없고 얻음도없다  (0) 2015.01.09

 

 

18. 마침내 열반에 이르니라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전도된 몽상을 멀리 여의고 마침내 열반에 이르니라.

 

지난 시간에 몽상에 대하여 약간 하였는데

夢想은 꿈몽 자, 생각상 자입니다

마치 꿈 처럼 생각하는 것을 몽상이라고 하는데

불교에서 몽상은 한 생각이라도 일어나면 그것을 몽상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원래 우리 마음은 일어남이 없는 것인데

그 일어남이 없는 마음을 지키지 못하고 각종 생각을 일으켜서

가치를 매기고 의미를 만들어서 없는 데서 이런 것들을 만들어서

스스로 그 의미에 쫓아가서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누가 고통을 준 것이 아니고 스스로 만들고 받는 것입니다

몽상은 글자 그대로 사실이 아닌 '꿈 속 같은 허황된 생각'입니다.

우리가 어릴 때 많은 공상을 하지 않습니까

그것들은 모두 진실이 아니나

우리의 두뇌에게 많은 창조성을 준다는 것에 긍정적인 면도 있습니다만

그러나 긍정적인 이면에 또 한편으로는 사실이 아닌 것들을 설정하여 놓고

그 가치에 이끌리게 되는 원인도 되었습니다.

더럽다.....깨끗하다....옳다 그르다....부하다... 가난하다....선...악...

이런 개념들은 사실 정확한 개념이 아니나

우리가 대화하려면 차별을 두어서 말해야 의사가 통하기 때문에 하는 말의 뜻들일 뿐인데....

예를 들어 우리 동네에 박서방네 집을 찾아오는 사람에게 오는 길을 설명하는데

동네에서 젤 크고 3층 건물이야 ....밖에는 화단이 있고 넓은 주차장이 있고 마당도 있지....

대문이 근사해....자동문이고 ....차가 안으로 들어가려고 기다리면 차고문이 스스르 열려...하고 대충 말하면 찾아오는 사람은 그 특징을 기억하고 찾아옵니다.

동네에서 젤 큰집, 대문이 근사한 집, 문 앞에 화단이 있고 마당이 있는집....

이렇게 들은 그대로 생각하면 이것은 1차 생각인데 여기까지는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택시를 타고 오면서 가만히 생각하면 참 부잣집이 박서방이겠구나 해요.

2차 생각이지요. 한 단계 발전한 몽상이어요.

그리구는 계속 몽상이 불어나갑니다. ....

박서방네는 우리 남편과 같은 나이인데 그렇게 부자로 사는데

우리는 이렇게 작은 평수 아파트에서 사니 인생이 참 불공평하다면서 한숨을 쉬어요.

그리구는 좋은 집에 행복하게 살 박서방을 그립니다.

마당으로 유리문이 나있고 테이블이 있고 벽난로가 있고 ...

마당에 잔디가 쫙 깔렸으며 부인은 뜨게질하고 밖에는 눈이 내리는데 박서방은 신문을 보면서 파이프 담배를 물고 흔들의자에서...

아이들은 유행하는 책을 보면서 도란거리고 있는 것을 연상합니다.

한편 자기는 화장실 물내려가는 소리가 들리고 좁은 쇼파에서 식구들이 다닥붙어서 유일한 낙으로 tv보고 있는 가족이 연상되고 아이들이 작은 방에 들어가면 아이들이 꽉 차있는 것이 그려집니다.

옆집에서 못을 박아도 들리고 싸워도 들리고 ....

그래도 참고 살아야 하고....직원 월급 걱정 해야하고...세금 걱정해야 하고 남편 구멍가게 손님 걱정해야하는 신세가 한심해서 눈물도 한번 주르르 흘려봅니다.

그리고 나서 박서방네 막상 도착해서 택시에 내려보니 ....

넓은 시골 같은 동네에 허름한 집인데 집은 커요. 땅은 그린벨트에 묶여있고

넓기는 넓은데 주차장 하나만 현대식으로 지어놓고 푸세식 화장실에다....마당이 있고....문 앞에 화단이 있기는 있는데 가꾸지 않아서 꼭 밭데기 같아요.

그걸 보니 참 한심해요. 동네를 둘러보니 전부 그런 식이야요.

집안에 들어가니 방안에 바람이 황소처럼 들어오고 ....수건으로 군데 군데 막아놓았는데 보기가 흉해요....박서방 마누라가 말하길 집을 새로 지어야 하는디 돈이 없어서 이러고 산다오...해요.

그걸 보니 그래도 현대식 건물에 사는 자기가 더 행복한거야요.

이걸 쓸데 없는 몽상이라고 해요.

공연히 몽상하고....거기 생각 속에 빠져서 울고 웃고....

나도 나가 아닌데 내 것도 없고 남의 것도 없는데 것인데 무엇이 부자이고 가난입니까

이름이 나면 어떻고 안 나면 어떼요

국회의원 허리는 고무줄 허리잖아요

표찍을 때는 허리가 잘도 휘지만 일단 되면 뻣뻣해져요

겸손하고 사람이 되어서 허리를 구부린 것이 아니고 성공하기 위해서 표를 위해서 임시로

구부린 것입니다. 이것 위선이고 야비한 짓이니까 이런 위선자에게는 표를 주지 말아야 하는데

당장 앞에서 구부리니까 저 정도면 되었어...하고 표를 찍어줍니다.

그래서 성공한 사람들...공연히 없다가 좀 뭐가 있는 사람들 보면 대개 허리가 뻣뻣하잖아요.

그런데 이런 것이 뭐가 좋습니까?

모두 자기 잘난 맛에 살겠지만 남들은 하나도 안 알아주는데

자기만 스스로 잘낫다고 콧대 세우고 다녀요.

어디 근사한 식당에 갔더니 어떤 사장이 단주를 뒷짐지고 턱턱 굴리고 있어요.

밥먹다 소리가 나서 돌아보니까 식당 주인이 단주를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 스님들이 밥먹으려고 죽 앉아있으면 불자라면 얼른 다가와서 인사라도 할 생각은 안하고 스님들은 본척만척하고 턱 뒷 짐을 지고 뒤에서 단주를 턱턱 소리나게 굴리면서 직원에게 뭐라 뭐라 거만하게 말하데요. 염주는 그렇게 멋대로 굴리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요, 수행하는 법구예요. 겸손하게 굴려야 합니다. 그래도 멋으로 굴리는 것은 자유지만 그 모양새가 영 사장 답지 않고 거만해서 저이가 누군가 했어요.

그래서 나중에 누구에게 물었더니 그 집 사장이 맞기는 맞데요. 그런데 저렇게 일일이 잔소리하고 거드름 피워서 직원들은 모두 사람같이 보지를 않는데요.

돌아서면 욕한데요. 쌍노므새끼하고...ㅎㅎ

그런데도 손님은 식당이 크고 음식이 좀 맛이 있는 것 같아서 손님은 많은데

그래서 우리도 갔기는 갔지만....거좀 그 사장의 행동이 딱 하나 하나 흠이더라고요.

나중에 또 누구에게 들으니 어디서 교수하던 사람인데 온통 빚으로 사업을 시작했데요.

그래서 인테리어가 좋고 맛도 좀 내어서 저렇게 처음이라 사람이 몰리는데 ....

저렇게 자기 집도 아니고 남의 돈으로 하는 사람이 겸손하지 않고 저러니....

행복의 신이 오랫동안 복을 주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우리 전통 의식에 입춘날 개문만복래開門萬福來라고 글을 씁니다.

그리고 대문에 붙여놓아요.

입춘은 양陽의 기운이 들어오는 날이기 때문에 아침에 마당을 쓸고 이 글귀를 붙여놓아요.

그러면 양복陽福이 그 집을 찾아서 오는데 이 양복을 받기 위하여 대문을 활짝 열어 놓는 것입니다.

대문을 열어 놓는 것은 마음을 활짝 여는 것입니다.

마음이 활짝 열려야 복이 한결같이 오고 크게 와요.

그런데 양복은 사실 1년 365일 나날이 오는 것이지 일춘날만 오는 것은 아닙니다.

매일 해가 뜨잖아요. 입춘날 그러하듯이 1년 365일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그래야 복이 옵니다.

마음을 여는 것은 마음에 한 점의 때도 남겨두지 않는 것입니다.

밝고 명랑해야 양복이 오는데만약 마음에 한 점이라도 쓸데 없는 생각, 몽상, 오만, 도도, 자만심, 자아심...등이 있으면 그것이 큰 오점이 되어서 문을 막아요.

그래서 복이 한결같지 않게 되요.

우연히 전생의 복이 나타나서 한 때 좀 괜찮다가도 우연히 전생의 복이 나타나서 한 때 좀 괜찮다가도 걷잡을 수 없이 불행한 일이 닥치고 말아요.

마음에 한점 띠끌이 없어야 복이 계속 지속된다고 했어요.

마음에 욕심이 생기고 이기심이 생기면 그것 자체가 때가 되요.

더러우면 문이 닫겨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사귀는데 첨에는 모두 마음이 열립니다.

예의가 충분하고 설사 좀 예의에 벗어나도 첨이니까 잘 이해하고 하면서 사람을 사귀어요

그렇게 때가 없고 오점이 없으니까....

즉 불구부정이라는 말입니다.

누가 첨부터 사람을 사귈 때 맘먹고 사귀는 것 아니잖아요

어디에 갔다가 우연히 서로 좋아서 사귀는 것인데 그때는 서로 원하는 것이 없고 기대도 없고,,,,

또 남이니까 맘에 때가 없이 사귀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헤어질 준비가 되었으니까 집착도 없고....

그래서 첨에는 잘 사귀는데 이것이 복이야요. 서로 좋은 일이 많습니다.

조금 시간이 지나고 욕심이 생기면 서로 원함이 생깁니다. 즉 깨끗한 마음에 때가 생겨요.

이렇게 해주었으면....하고...

이렇게 해야하는 것 아냐? 하고 따지고....친구라면 생일도 챙겨주어야 하고...

이렇게 저렇게 해야되고....하면서 서로 자꾸 깨끗한 마음에 때를 묻혀요.

그래서 그 때(垢)에 맞으면 좋아하고 안맞으면 싫어하고 첨에는 조금씩 다투다가 ....

낭중에는 크게 다투어요.

도대체 주거니 받거니 한 것이 있어서 누가 잘했고 누가 더 주었는지 가리기도 어렵고 따지기도 어려워서 누가 잘못이라고 할 것도 없고 ....서로 원함만 가득한 채 기어이 대두리판 싸우고는 헤어집니다.

그렇게 헤어질 바에는 차라리 첨부터 만나지 말아야 하고 그렇게 싸우고 맘 상해서 괴로워할 바에는 첨부터 집착하지 말아야 했는데 두 사람이 서로 때(垢)가 꽉 찬 것이 고통의 원인이 되는 줄을 미처 모른 것입니다.

이 때들을 몽상이라고 합니다. 마치 꿈과 같은 생각들....

이것이 있어서 설사 헤어지지 않고 서로 보살피며 잘 살다가 늙어서 죽는다하여도 우리는 슬퍼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래요. 아니, 스님 인간이 좀 슬퍼하고 괴로워해야 하잖아요.

그런 것이 없으면 인생입니까?

그러면 제가 물어요. 아니 당신은 왜 당신 잣대로 인생을 막 정하십니까?

사람은 다양해요. 눈물을 흘리는 자도 인생이고 안흘리는 자도 인생이지 어찌 눈물을 안흘리고 괴로워 하지 않는 자를 인생이 아니라고 딱 정해 버리느냐는 말입니다.

누가 그렇게 정해두었답디까?

인생은 눈물을 흘려야 인생이라고....누가 도장찍어놨어요?

아니잖아요. 사람이 자기 살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이지....

꼭 눈물 흘려야 인간미가 난다고 누가 말하든가요?

당신 그런 소리하고 다니면 빰맞는 수도 있어요.

왜냐?

당장 고3 자식이 베란다에서 떨어져 죽은 사람에게 그렇게 말해봐요.

자살말입니다.

그렇게 슬픈 것이 인생이고 그것이 아름답지 않느냐고 말해봐요.....

암이 걸려서 고통스러운 사람에게 말해봐요. 그런 고통이 있어야 인간 답지 않느냐고...

그러면 그 사람은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이 정신 나간 놈아.....니나 암으로 고생해봐라....

그런 말이 나오나.....!할 것입니다.

인생을 가지고 당신의 얇은 정신과 지식으로 뭐라고 단정하지 마세요.

사람이 만남의 기쁨은 잠깐이나 헤어짐의 고통은 길어요.

그런 고통의 원인을 부처님은 추적한 것입니다.

몽상.....이것이 심적 고통의 원인이었어요.

경전에 보면 이런 말이 있어요.

'중생은 마치 자기 죽을 줄 모르고 불을 쫓아가서 날아가는 불나방 같다' 고 했어요.

분명히 나비는 불에 다가가면 타버리고 죽습니다. 그러나 불에 대한 집착이 강하여 장작불만 보면 달려가서 앉으려고 해요.

그리고는 타버리는 것입니다.또 그랬어요.

'마치 구더기가 냄새나고 더러운 오물을 좋아하듯이 중생은 음욕을 향하여 끈질기게 쫓아가 자기를 더럽힌다......'

이 모두 어리석은 판단 때문에 장차 불행이 일어날지 모르고 달려가는 것입니다.

몽상에 끄달려감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마음에 단 하나라도 무엇이라고 이것이 인생이다라든가.....이것이 의미이다 라든가...이것이 아름다움이다....혹은 더러움, 깨끗함, 아름다움 등의 개념을 두면 그 개념을 두면 그것이 결국 나를 괴롭히는 원인인 몽상인줄 알아야 해요.

무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항상 말하지만 몸은 부지런히 하고 마음은 항상 무심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일을 위해서는 예민한 부분도 살펴야 하나 기타 생활에서는 무심으로 일관해야 해요.

특히 일상사에서.... 시누이가 왔는데.....우짜고 저짜고....

선생이 왔는데 뭐이 어떻고 저떻고....저 아랫집에서 항의하러 왔는데 얼굴이 험악해가지고 입에 거품을 물고....우짜고 저짜고...하며 말하고 흉보고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입에 거품을 좀 물면 어떼요.

그 사람 성격이 그런 것 어쩝니까?

그것은 그 사람 사는 방식이니 놔두고 거기에 ...남의 살림에 공연히 감내라 배내라 하지말고

거품을 물던 안 물던 그런 것에는 신경쓰지 말고 나도 할 말 있으면 하고 그 사람도 그렇게 말하면 듣고 오면 되요.

공연히 남의 표정까지 신경쓰지 말고 딱 일만보고 오라는 말입니다.

나의 감정을 내세우지 말고....

일만 봐요. 그래서 일처리해요.

친해져도 .....할말만하고 모이기만 하지....공연히 그에 대하여 욕심내지 말고, 알려하지 말고...

정 해줄말 있으면 하기는 하되 기대하지 말고 말 안들어서 내가 자꾸 괴롭고 피해가 되면 안 나가면 되지 공연히 그것으로 시비를 삼지마라는 것입니다.

오로지 몽상을 여읜 자를 보살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과거 현재 미래 많은 성인들도 인생을 이렇게 꿈처럼 보았어요.

그래서 오직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였습니다.

반야바라밀다가 뭡니까? '마음을 비우는 지혜행'입니다.

모든 성인들도 여기에 의지하여 마침내 열반을 얻었어요.

열반은 涅般(샨쓰크리트어 발음)인데 번역하면 적정(寂定)이고 우리 말로는 '고요'입니다.

고요한 마음에 들어갔다......

다시는 유혹되지 않고 영원한 고요를 얻었을 때 그때를 열반이라고 해요.

사람이 어느 순간 그렇게 마음이 돌변할 때가 있어요.

제가 요즘 어떤 법우님에게 교리를 가르치는데 그 법우님이 그래요.

스님, 무심이 되어야 하는 줄 알겠는데요. 스님 말대로 그렇게 하면 행복해지겠는데요.

제 마음이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고 해요. 맘이 자꾸 '안돼.....

이것도 저것도 놓을 수가 없어....아직은 젊잖어...인생은 아름다움으로 가득한데....' 한데요

그래서 실행하지 못함이 또 괴롭데요....

사실은 저도 첨에는 잘 안 되었습니다.

어떤 선배가 절 보고 50세가 넘으면 인생이 쉬어지리....

하였는데 정말 이 쉬는 것이 30대까지는 잘 안되더라고요

욕망과 야망이 너무 강해요. 젊으니까...

그러더니 40대가 되니까 조금씩 쉬어지기 시작했어요.

이제 나이 오십이라고 하지만 저도 아직 다 쉴라믄 멀었어요.

그래도 쉬는 것을 느끼겠더라고요.

그려!! 나는 그대를 이해해....그리고 인생도 이해해....

하고 말하는데 그 느낌이 옛날과 영 틀려요.

그래서 나이가 들면 기운과 함께 마음도 쉬어지는 구나하고 저는 생각하고 있지만

그래도 부처님은 35세에 쉬었다는것을 생각해 보면

꼭 나이에 따라 쉬어지는 것도 아닌 것 같아요.

그러하니 여러분은 나이를 운운하지 말고 마음을 쉬고 쉬어서 영원히 쉰

대열반을 부처님처럼 얻으시길 바랍니다.쉬었다고 하나 부귀와 영광은 예전과 같아요.

즉 쉬어도 돈은 들어오고 생활비는 생기고....부자도 된다는 말입니다.

쉰다고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쉬면 ....열반을 얻으면 다만 마음이 영원히 행복해지는 것 뿐이예요.

모두 한순간 크게 쉬어서 큰 행복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17. 걸림이 없는 까닭으로 두려움이 없고

 

以無所得故 菩提薩陀 依般若波羅蜜多故

이무소득고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

얻음이 없는 까닭으로 보살이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나니

 

지난 시간에 얻음이란 없다고 하였습니다.

불교는 원래 가지고 있는 것으로 충분하지 더 보태고 늘리는 것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가끔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을 보면 처음에는 하심으로 버리고 겸손하다가도 어느 정도 불교를 알게 되면 거만하고 도도한 것을 보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잘못 공부한 것인줄 알아야 합니다

불교는 공부할 수록 더 겸손해지고 얼굴이 편안해지고 아무 주장도 하지 않은 채 마치 맑은 어린 아이처럼 되는 것입니다.

지식을 버리고 주장을 버리고 2변(양변)을 버린 사람은 눈동자가 맑아질수 밖에 없어요.

그러니 누가 보아도 청정한 느낌이 들어야 하고 단순하고 마음 씀이 넓어야 합니다

그런데 불교를 잘못하면 아상만 늘어나지고 나는 아는 자다 라는 아만이 생겨서

웬만한 스님은 안중에도 두지 않고 자기와 상관없는 스님을 공연히 무시하고

폄하하는 경향이 더러 있어요.

반야바라밀 수행을 한 것이 아니고 머리에 덕지덕지 지식의 때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불교 교리나 지식은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들어야지 머리에 쌓아두려고 읽으면 안됩니다.

글자에는 도가 없고 깊은 뜻이 없어요. 언어나 글자 밖에 있는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문자의 뜻을 캐야지 문자를 기억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문자에 담긴 뜻을 제대로 알았다면 어찌 조그마한 알음알이라도 가슴에 남겨두겠습니까

반야는 지혜라는 말인데 지혜는 지혜로되 철저히 비워서 얻는 지혜입니다

첫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지혜는 보리가 있고 반야가 있어요.

보리는 깨달음을 통하여 수많은 지식을 뛰어 넘어서

바로 깊은 오의를 터득하여 이룬 지혜입니다.

반야는 앎을 전부 버린 후에 얻는 지혜입니다.

앎뿐만 아니고 2변을 여의고 마음에서 단 한 가지라도 세우지 않는 자리에 들어가서 저절로 터득되는 지혜를 반야라고 해요

반야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비워서 얻는 지혜'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버려서 도대체 무엇을 얻는단 말인가 하고 생각하겠으나 부처님은 모든 것을 버렸을 때 창의적이고 참다운 지혜가 나온다 하였어요.

앎을 버리지 않으면 그 앎에 가로막혀 세상을 잘 살수 있는 지혜가 나오지 않아요.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이라는 것은 진실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다만 언어를 통용하기 위한 도구적 단어로 있을 뿐 그 언어의 뜻이 결코 진실을 담고 있는 말은 아니라는 것을 수 차례에 걸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 반야심경뿐이 아니고 금강경에서도

부처님은 수없이 말의 뜻이 잘못 되었음을 누누히 지적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말 때문에 얼마나 많은 오해와 불행을 불러옵니까?

말을 잘못해서 말을 들어서 온갖 감정을 일으키고 결정하고 단절하고 싸웁니다

그 말은 불완전한 의미를 담고 있는 하나의 표현일 뿐이고 거짓인줄을 모르고 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말에 속지말라고 끝없이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더럽다....깨끗하다....부귀하다....가난하다.....

옳다....그르다....이 모든 개념들은 허망한 개념입니다.

70세 할아버지가 13개월 동안 애를 잉태해서 애를 낳았다하면 여러분은 그대로 믿겠습니까?

10개월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할아버지가 13개월을 배부르다가

애를 낳았다고 하면 할아버지가 말야요

모두 진실이라고 인정하고 기뻐하거나 수고했다고 위로 하시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7살먹은 아이라면 할아버지에게 가서 할아버지 축하해요,

수고하셨어요, 미역국 많이 드시고 몸 푸세요

하겠으나 성인이라면 그 말에 전혀 반응을 안보입니다.

절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우리에게 들려오는 말들은 모두 헛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들일 뿐야요

그런데 더럽다 깨끗하다

옳다 그르다 하는 말에 어찌 반응을 보이고 이끌려가겠어요

이 들 말들은 70세 할아버지가 13개월만에 애를 낳았다는 말과 같습니다

전혀 관심가질 말들이 아냐요

그래서 보살은 보리살타는 원래 보살이라는 말의 원어입니다.

원래 보리살타여요

보리=지혜

살타=큰 수행자

이것을 줄여서 보살이라고 합니다.

보살은 진정한 수행자를 말해요.진정한 수행자라면 얻음이 없어야 해요

30년을 수행해도 50년을 수행해도 전혀 얻은 바가 없어야 합니다.

어떤 수행자가 40년을 참선하고 한 숨을 쉬는 것을 보았어요

73세되는 노승이지요.

왜 그러냐고 물으니까

40년을 참선했는데 무엇하나 얻은 것이 없데요

남들은 도를 얻었네....화두의 뜻을 알았네...

인가를 받았네...조실을 하네....하는데

그 스님은 선방에서 40년을 참선했는데도 도대체

무엇하나 얻은 것 없이 세월만 가고 말았다면서

저더로 부지런히 참선해서 자기처럼 되지 말라고 하더군요.

그래서인지 그 노스님과 3개월을 함께 참선한 적이 있었는데

무슨 일로 그 스님의 본전이 나오는 것을 보게 되었는데

정말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화를 내고 책을 태우고

어떤 스님을 막 나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순간 아~ 40년 수행이 어찌 저 정도일까 하고

매우 심란스럽게 생각했었는데 그뒤로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얻을 것이 없다고 경전에 그렇게 수없이 말했는데도 무엇을 찾는 마음이 있어서 ....

그 찾는 마음이 마음을 쉬게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작은 일에도 역정을 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수십년 닦아도 제대로 못닦으면 그 노스님처럼 됩니다.

사실은 40년동안 아무 것도 얻지 못함이 정상이어요.

얻을 것은 없습니다. 이것을 알고 항상 편안해야 해요. 그래야 마음이 쉬어집니다.

무엇을 얻었다하면 그것은 거짓일 뿐입니다.

누가 무엇을 얻었다고 하거들랑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달려가서 멱살을 쥐고 물어보세요.

정말 얻었냐고... 그래서 못얻었다고 실토하면 놓아주되 얻었다고 더 큰소리치거들랑 부처님 대신 경책하노라 하면서 사정없이 두둘겨 패주어야 합니다.

이 마군아! 하면서

거듭 말하건데 이 법은 무엇을 얻는 종교가 아닙니다.

충분해요 .여러분 가슴속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또 뭘 얻었다하고 알았다하면 그 놈은 천하의 큰 스승을 배반하는 것이고

부처님 법을 팔아먹는 도둑놈이고 그런 도둑놈이 있으면

불교는 조만간 망하는 줄 알아야 합니다.

보살은 반야바라밀다를 닦는 자입니다. 즉 버리는 것을 수행하는 자여요

가지고 있는 것을 버려야 합니다.

입차문내막존지혜(入此門內莫存知解)라했어요

절 입구에 들어서면 주련글씨에 이런 글이 있을 것입니다. 주로 입구에 걸려있어요

이 문 안에 들어와서는 지해(知解앎)를 두지 마라

지해를 두면 진실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학력, 지위, 앎, 도, ....

이 모든 것을 버려야 해요.

선문에서는 이런 말도 있어요.

길에서 도인을 만나거든 도를 묻지 마라

왜냐?

도인이란 길을 가는 자라는 뜻인데 그런 사람에게 굳이 도를 물어서 무엇합니까

길가는 사람은 다만 가는 길을 알려줄 뿐 도를 말하지 않아요.

도란 마음이기 때문에 따로 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혹시 멍청이가 도인에게 도를 묻는다면 멍청이니까 멍청이 짓을 한 것이고

거기에 또 어떤 자가 도라는 것은 넓고 크고 한 없으며...

세상을 다 담고도 남는 데고 있고 ...사람이 감히 근접할 수 없어서 도라하는데.... 어쩌구 하고

도를 설명해주는 도인이 있으면 그는 도인이 아니고 사깃꾼인줄 알아야 해요.

에잇! 사깃꾼아!!!

하고 소리쳐주고 지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옛 선사들이 말했어요.

길에서 도인을 만나거든 도를 묻지 마라

도를 물음도 잘못된 것이고 진정한 도인이라면 절대 도를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 생각도 두지 않음!

이것이 도입니다.

그렇게 절에 들어오는 입구에 턱 그렇게 써있는데도.... 절에 와서 각종 지식을 내보인다면

그것은 공부 잘못해도 한참 잘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는 익을수 록 아는 척하지 않고 남에게 말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저 살아가는 것을 말할 뿐

가을이 되니 마당에 낙엽이 쌓이고

선재는 구르는 낙엽에 김장 걱정하고 산비들기 어려운 집을 더 잘 알고 찾아와서 모이를 먹는구나

가지가 가늘어지면 가난해지는 법인데 나는 솜 옷으로 쌀찌고 있으니 어느 해에 도를 볼거나.....어헝~

하고 개짓는 소리 한번 할 뿐입니다

절에 가면 누구나 스님들이 일하고 빨래하고 농사짓는 것만 보여요.

도를 찾는 자는 이 절에는 도가 없구나하고 떠나가지만

누가 알랴....그곳이야 말로 도로 가득한 것을 자기 눈에 티끌이 들어간 즐 모르고 남보고 더럽다하니 그렇게 찾아서는 죽을 때가 되어도 도를 보지 못하고 죽을 뿐입니다.

도는 아무도 보지 못했으나 1년 365일 도가 가득함을 아는 사람만 알 뿐입니다.

그래서 보살은 아는 것을 놔버립니다.

놔버리는 공부를 해요. 그래야 도가 보이니까...

그것을 반야바라밀 수행이라고 합니다.

그런 수행을 하는 자라면 어찌 마음에 단 반개라도 아는 것을 두겠습니까?

心無罫碍  無罫碍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는 까닭으로 두려움이 없으며 마침내 뒤바뀐 몽상을 멀리 여의느니라.

보살이 버리고 비우고 놔버리는 공부를 하다가 하다가 보면 본심에 돌아갑니다.

원래 아무 것도 없는 자기 본 마음인 텅빈 세계에 들어가요.

이것을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비우고 비워서....더이상 비울 것이 없는 곳까지 들어가면 아무 것도 주장하지 않고 아무 것도 내놓을 것이 없습니다.

남들은 하나라도 더 내놓지 못하여 안달하고 자기 지식을 자랑하지만 보살은 더이상 내놓을 것이 없는 철저한 빔에 도달해요.

그러다 어느날 이젠 더이상 아무것도 주장할 수 없음을 깨달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가 깨달음의 극치입니다.

어떤 선사가 물었어요

입이 있으면 말을 하고 손이 있으면 지시하라고 했어요.

도에 대하여 한마디 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어떤 스님이 선사를 늘 옆에서 모시는 시자스님을 탁 때리면서 왜 빨리 말하지 않느냐 고 소리치고는 휙 돌아서서 가버렸어요.

나중에 선사가 그 스님을 찾으니 그때 바로 걸망을 매고 가버렸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선사가 그 스님 어디가서 크게 가르침을 펼 것이다 했어요.

자, 왜 시자를 때리면서 왜 빨리 말하지 않느냐고 다구쳤을 까요

이것을 풀어야 참으로 비워진 보살의 경계를 알수 있습니다.

보살이 이렇게 한번 깨닫고 더이상 내세울 것이 없어지니까

비로소 마음에 걸림이 없어졌어요.

그 전에는 고기를 먹어도...집신을 신어도 치마를 입어도....곡주를 한잔 먹어도

마음에 걸림이 많았는데 이제는 전혀 불교를 모르는 사람처럼 아무 걸림이 없어진 것입니다.

비로소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비로소 짐을 내려놓고 자유롭게 되었다

꿈같은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작은 말 한마디에도 부르르 떨면서.... 스발느무새기, 더러분 자슥 ! 하며

자유롭지 못한데 비로소 유혹되지 않는 자유를 얻다....

이것은 우리 모두 찾는 경지입니다.

大人대인!

이런 사람을 대인이라고 해요.

그 어떠한 것으로도 보살을 흔들 수 없습니다. 그래서 큰 사람이어요.

돈으로도.... 명예로도....분노로도....

그래서 대인이고 걸리없는 경지를 얻었다해요.

우리가 무심에 들어가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경지, 걸림없는 경지에 들어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일단 들어가면 되돌아오지 않게 되요.

걸림없이 없어지면 다음으로 두려움이 떠납니다.

두려움!

인간의 원초적 두려움!

저도 가끔 저 자신에게 물어요.

과연 죽음의 순간에도 초연할 수 있을까?

얼마전 대구 파티마 병원 근처에서 6.25때

그래서 국군이 마을 사람을 한데 모아놓고 몰살시킨 사건이 있었나봐요.

그 마을은 인민군 편을 든다라는 말이 나돌았답니다.

빨갱이를 감추어주었다고 국군에게 죽임을 당한다?

사람이 사람을 살려주었는데 죽음을 당해야 했던 당시 양쪽의 현실....

그런데 그 사진을 보면서 그때 내가 저기 있었다면

그 마지막으로 들려오는 총소리에 정말 두려움이 없을까?

하고 자문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일종의 공부 점검입니다.

여기 새소리님, 눈송이님, 연꽃님, 여래장님....하노백년님과 함게 혹시 어디 끌려가서

총맞게 되었을 때 나는 스님이라면서 ....

스님은 중생제도해야 되니까 좀더 살아야돼 하고 뒤로 서는 비겁한 짓을 하지 않을까.....

하하하....하고 생각해본 적이 있어요.

어떤 죽음이던지 담담히 받아들이는 자가 보살이요, 두려움을 떠난 자입니다.

병원에서 ....비행기 속에서 그 어디서고

두려움을 떠난 자는 보살처럼 비워진 자는 두려움이라는 것이 없어요.

오ㅐ냐? 죽음은 없으니까....그것을 잘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마침내 뒤바뀐 몽상을 여의고

영원히 대해탈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몽상은 헛된 생각들입니다.

영원히 망상을 여의고 대안락을 얻었다

명심하세요. 여기 관세음보살은 아무 것도 얻지 못했기 때문에 대해탈을 얻은 것입니다.

반야바라밀 수행, 즉 비우는 수행을 한 것이지

무엇을 얻는 수행을 한 것이 아닙니다.

겉에서 때뭍어 덕지 덕지 쌓여있는 때를 벗겨냈을 뿐입니다.

그래서 원래 가지고 있던 것이 드러나 빛난 것이지 무엇을 새로 얻은 것은 없어요.

이것은 반야심경에서만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닙니다.

금강경, 능엄경, 원각경에서도 그랬고 화엄경에서도 다 똑같이 설했습니다.

얻음이 없어야 진정한 깨달음에 들어간다고 말입니다.

또한 선서에서도 조사들이 한결같이 한 말이 그말입니다.

네가 하나라도 가지고 있는 것이 없어야 진정한 깨달음이라고 말입니다.

늦은 시간까지 오셔서 강의 듣는 모든 붓다들이시여

그대로 만족하니 더이상 찾지 말고 그대로 안락한 생활하시기 바랍니다.

 

'반야심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19. 삼먁(正等=中道)에 대하여  (0) 2015.01.09
18. 마침내 열반에 이르니라  (0) 2015.01.09
16. 지혜도없고 얻음도없다  (0) 2015.01.09
15. 고집멸도도 없으며  (0) 2015.01.09
14. 無明이 다함도 없다.  (0) 2015.01.07

 

 

 

16.지혜도없고 얻음도없다

 

 

無智 亦無得

무지 역무득

지혜도 없고 얻음도 없느니라.

 

오늘은 지혜와 얻음에 대한 내용입니다.

다 알다시피 알知 자와 지혜智 자는 다르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안다는 것은 지식이고 일종의 자료입니다.

그러나 지혜는 지식이 자기화되어

삶의 곳곳에 적용되어 나타나 삶이 편리해지는 것을 지혜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안다는 것은 머리에 저장되는 지식이나

지혜는 그 앎을 적절하게 잘 사용했을 때를 지혜라고 하지요.

보통 학교에서는 지식을 배우나 삶에서는 지혜를 배웁니다.

예전에는 선생님들이 지혜를 가르치려고 했어요.

그래서 서당에서 한문을 배울 때 지혜로운 이야기들을 들어내 보여서

귀감이 되게하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양의 지식을 공부 하기 보다는 적은 양이라 해도

지혜를 기르는데에 중점을 두고 차근히 가르쳤지요.

그러다보니 선생님에 대한 예의 범절이 중요했고 선후배간의 질서가 중요하였습니다.

그런데 현대는 지혜보다는 지식이 중요해졌습니다.

현대는 고대보다 많은 지식이 필요하지 지혜는 개인의 문제로 돌려버렸어요.

현대는 안다는 것이 중요진 것입니다.

누가 더 많이 아는가? 이것이 생존의 법칙이기도 합니다.

대입시험, 입사시험, 승진 등은 모두 앎으로 등수를 매겨서 선택되는 것입니다.

누가 더 똑똑한가? 많이 아는가? 이것이 중요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많이 아는 자는 살아남고 덜 아는 자는 탈락해요.

한마디로 많이 아는 자는 보장되나 적게 아는 자는 보장되지 않아요.

지식! 이것의 현대 생활에서 우열의 기준이 됩니다.

어쩔수 없는 운명같은 것입니다.

남녀가 사귈 때도 옛날에는 인간성이 중요했고 사람이 착하면 선택되었지만

지금은 얼마나 똑똑하고 능력이 있는가가 중요해졌어요.

물론 학벌과 부의 정도가 성공과 실패의 기준이 되었고

그러다보니 이 경쟁시대에 항상 공허한 것은 인간성이요, 지혜로운 성인의 말씀입니다.

예전에는 언제 어디서나 접할수 있었던 성구(聖句)들이

지금은 유행가 가사보다 더 천시되고 외면당하는 현실입니다.

깊은 내면의 지혜를 갖고 세상을 한낱 꿈과 같이 보려고 하여도

부인과 자식과 사회적인 환경이 현실에 부합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

비현실적인 듯한 도인이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도인이 되어도 네가 혼자 아는 도인이 되지 말고 사회에서 알아주는 도인이 되어서

부인과 아들이 만족하고 친구들이 만족하는 도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회의 욕구입니다.

큰스님이 되어도 어디 본사의 조실이 되어야 하고 메스컴에 오르내려서 유명인사가 되어야 큰스님이라고 이구동성으로 알아주고 조주스님처럼 저 먼 시골에서 배추심다가...고추 따다가 손이 거칠고 얼굴이 시커먼 스님은 아무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설사 아무리 높은 도안을 가지고 있어도 사회가 인정하지 않으면 인정되지 않아요.

그래서 도인들도 단계를 정해놓고 높이 올라가기를 희망하는 우스깡스런 제도가 도인들 사이에도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내부는 공허하고 겉으로 화려한 현대의 도인입니다.

도인뿐만 아니라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학교 선생도 소신을 가지고 학생을 지도하면 안되요.

학교 행정에 맞아야 하고 운영에 적합한 처세도 할 줄 알아야 하고 학부형에게도 잘 대접하여

학교라는 공간에서 살아남기 위한 기본을 갖추어야 살아남습니다.

학생도....선생도....교장도....모두 살아남기 위하여 겉만 치장합니다.

서울대 나온 선생을 영입하여야 하고 학부형과 관계가 좋은 선생을 영입하여야 하고

찬조비 잘 받는 선생을 영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현대 사회입니다.

지혜가 무시되고 지식이 중요해진 사회!

개인의 인격보다는 겉으로 화려한 치장이 중요한 현대!

이 사회에 따라가지 못하면 탈락되는 사회!

탈락된 사람에게 아무도 돌아보지 않고 그럴 시간도 없는 현대인!

탈락된 사람은 홀로 고독한 방에서 가족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우울증으로 시달려야 하는 현대!

이것이 오늘날 우리사회입니다.

먼 미래에는 분명 다시 과거와 같은 인간애와 인격이 중요해진 사회로 되돌아가겠으나

아직 우리는 비 인간적이고 비 인격적인 사회속에서 살아요.

그래서 어두운 곳과 밝은 곳이 함께 존재하는 사회가 된 것입니다.

범죄와 평화로운 마을이 두 세계는 어느 나라 어느 사회에 가도 함께 존재합니다.

잘 살게 되면 범죄가 없어져야 하는데 잘사는 만큼

범죄는 더 심해지는 것이 오늘날 우리사회입니다.

아직까지 티벳에는 법이 없는 마을이 있어요.

문제가 생기면 어른들의 말이 중요하고 촌장의 합리적인 판결에 따라

문제를 해결하고 모두 다 수긍하고 불 만족있어도 받아들입니다.

가난하지만 범죄율 제로인 마을이 부지기수입니다.

치안이 필요하다는 것에 도대체 이해를 못하고 경찰이 왜 있어야 하는지

자기가 부지런히 일해도 모은 돈으로 물건을 사면 되지

도대체 왜 도둑질을 하는지 이해를 못하는 나라가 티벳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어떤 여행가는 인류의 미래는 티벳이라고 했어요.

한편 우리보다 삶의 풍족을 누리고 살던 유럽의 신지식인들은

따로 공동체를 만들어 자기들만의 세계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인간이 인간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사회,

규율과 기계와 제도에 뭍혀 인간성을 잃은 사회를 탈피하려는 신지식인들의 그 그릅입니다.

혹 어떤 사람들은 과감히 아프리카 오지로 떠납니다.

그곳의 순수한 흑인과 결혼하고 흙에 가깝고 자연에 가까운 인간으로 돌아가려고 해요.

사회의 제도보다 자연적인고 인간중심의 사회에서 살고 싶은 것입니다.

틀림없이 미래는 정치와 인간성의 방향을 자연에서 찾을 것입니다.

자연... 그리고 사람 그자체가 중요해질 것입니다.

다행히도 불교는 끝없이...자연으로 돌가길 바라고 인간으로 돌아가길 바랍니다.

불교는 지혜를 존중하고 사람의 마음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획일적인 제도나 신을 향한 신앙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니! 불교는 무신론 종교입니다.

그 누구도...그 무엇도 인간보다 훌륭하지 않아요.

람이 가장 훌륭하고 위대합니다.

위대함.....이 용어조차 사람의 마음이 만든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사람이 부처!

이 선언으로 부처님은 인간을 높이 올려 놓고

스스로 자기 속의 부처를 찾고 믿고 깨달으라고 가르칩니다.

그 누구도 따르지 말 것이고 오직 진리만을 따를 것이고

진리를 가르치는 스승을 따르라 역설합니다.

혹자는 사람을... 스승을 너무 신처럼 떠받드는 것이 아니냐 하겠으나

불교는 사람이 사람을 존중함은 당연하다하고 사람이 사람을 포기하고

신을 존중함은 격이 떨어진 것이라고 봅니다.

오직 진리를 가르쳐주는 스승이 위대하고

나 또한 진리를 깨달으면 위대한 스승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붓다이다.

따라서 사람은 사람을 존중하고 사람에게 절하지 신에게 절하지 마라.

네가 사람을 존중하고 3배하는 습관을 들이고

너 또한 너의 제자에게 3배를 받는 자가 되어라...

철저히 사람이 중심된 종교가 불교입니다.

지혜! 이것은 선도 없고 악도 없다는데서 나와요.

더러움도 없고 깨끗함도 없다는 생각에서 나옵니다.

나에게 해롭게 하고 나를 사기쳐서 길거리에 나앉게 한 자에게 용서하고 무심으로 받아들이게 하려면 불구부정이 철저히 머리 속에 있어야 합니다.

외면이 중요해지고 똑똑한 남자가 중요해진 현대 사회에서 늙도록 장가 못가는 새로운 풍속이 생겨납니다.

또한 있던 남자도 팽개치고 새로운 남자에게 바람도 자연스럽게 피우는 사횝니다

어떤 사람 고민을 들어보니까

부인이 바람이 났는데 이유가 남편이 너무 고압적이고 자기 중심적이라는 데 있었어요.

그러다 남편에게 들켰는데 부인이 그냥 암말 안하고 친정으로 획 가버리 더래요.

남편은 30년 이상을 같이 살은 여자가 바람피운 것이 괘씸하고 억울하고 화나겠으나

요즘 여자는 자기가 문제 있는 남자라는 것을 모르는 남자에게 일일히 설명하고 분노내는 것

짜증내면서 말하는것 듣기 싫다고 그냥 그래!

바람폈다, 어쩔거냐!

니 맘대로 해라.

난 너와 헤어져도 상관없고 위자료 없어도 좋다...

그러나 나도 살아야 하니까 법정에서 보자...

하면서 친정에 가버렸는데 남자 혼자 전전긍긍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자는 사실 부인과 이혼하기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하면 좋겠냐고 묻는데

이혼은 안해주고 자기 체면은 살리려는 사람이드라고요.

그러니 불교 공부해두지 않으면 언제 어느 때 그런 일이 닥칠지 모르고

만약 닥치면 자기 분노에 괴로워해야 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하여

애들은 저리가라하고 신나통들고 가서 부인도 죽이고 자기도 죽는 비극으로 종말을 내립니다.

불구부정.....더러움도 없고 깨끗함도 없다....

사람은 평등하다

남녀도 평등하고 계급도 평등하다

인간은 누구나 붓다이다

그걸 안다면 어떻게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살겠습니까?

현대는 남도 배려해야하고 자기 생각도 하나의 의견일 뿐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것도 절대적이라고 생각하면 안되요

며칠전 어떤 사람에게 들으니 자기가 다니던 절의 스님이 장가를 갔데요.

그것을 보고 자기 친구(보살)가 배신감을 느끼고

친구 남편도 거기에 잘 갔는데 불교에 실망을 느껴서 부인보고 절에 가지마라고 했데요.

그러니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하더래요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그 보살 남편은 언젠가는 그 어리석은 생각으로 인하여 고통받을 것이다 했어요.

왜 불교를 자기 식으로 믿으려합니까?

진실의 불교를 믿어야지요. 자기가 세운 불교를 믿으려하면 안되요.

불교는 불구부정不垢不淨 사상을 가지고 있는 종교입니다.

누가 뭘하던....그가 이혼을 하던...범죄를 저지르던...

바람을 피우던 사람을 다 똑같이 보아요.

부처님은 다 똑같이 이해하시고 사랑합니다. 예전의 마음과 변함없어요.

그런데 부처님이 사랑하고 이해하는 사람을 왜 그 남자는 싫어합니까

왜 불교가 그 좁은 남자의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까

불교는 넓어요. 그 어떤 종교보다 크고 넓습니다

무심을 가르치는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이라고 마음에서 하나라도 세우면 바로 때뭍음이 되요.

당신이 온갖 이론과 사상으로 이것이 불교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죽어도 불교를 모른 것입니다.

누가 무엇을 하던 단 반 생각도 일어나면 안되요.

항상 똑같아야 합니다.

왜 스님이 장가가는데 죄진자처럼 가야합니까? 그 스님 당당하게 가야해요.

한 사람의 남자가 당당히 자기의 길을 가는데 부처님이 주신 남자의 기능을 살려서 살아가려는데 왜 축복하고 감사해하고 기뻐하지 않고 욕하고 질시하고 배반당했다고 생각합니까?

그러니까 불교가 발전이 없는 것입니다. 인재를 쫓는것 아닙니까.

장가 안간 것 자체가 중요하면 노총각들한데 다녀서 3배하고 모시지 왜 스님한테 다닙니까

그런 비불교적인 자세부처 버려야 해요.

그리고 부인이 다니는 종교를 부인이 다니게 내버려두지

당신이 무슨 권리로 다녀라 다니지 마라합니까?

불교는 당신보다 백배 천배 높아요.

당신의 잣대로 불교를 평가하지 말아요.

불교가 당신의 종입니까?

부인도 당신의 종이 아닌데 절에 알량한 시주 좀 했다고

당신 맘에 들지 않게 스님이 행동했다고 절을 당신 맘대로 해도 된다는 생각 버리세요.

부인도 인간관계가 있고 그 스님도 인간 관계가 있어요.

그런 좋은 관계가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것인데 당신의 잣대로 가라 가지마라

하고 또 거기에 질질 끌려다니면서 어떻게하면 좋을지 묻는 사람도 한심해요.

불교를 누가 가라 가지마라 해서 갑니까?

남편이라 해도 정당하지 못하면 안 따라가는 세상에 왜 남편에 의하여 종교가 좌지우지됩니까

제가 남편을 버리고 박차고 일어나서 당신의 길을 가라했어요.

남편이 도둑질하면 당신도 할거예요?

남편이 잘못가면 같이 고민하고 토론하고 정당함을 주장해서 이끌고 와야지

왜 아무것도 모르는 남편에게 따라 가야합니까

누그든 상관없어요

그가 불교를 이해하지 못하면 이해시키고 이끌어야지 그를 따라가면 안됩니다.

그러면 영영 지식에 이끌려가고 사회적 제도에 이끌려가고 옳고 그른 분별에 이끌려가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미국을 보세요. 밤 8시면 맘대로 나다니지 못합니다.

범죄인을 다스리는데 경찰은 총을 쏘고 곤봉으로 마구 때려서 끌고 갑니다

죄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죄! 아담과 이브의 죄!

그 죄는 시대에 따라 달라지고 죄가 아닌 죄도 있음을 인정하지 않고

죄앞에서는 인간을 무지하게 대합니다. 법....

이것은 이간성을 살리려는 것이 우선되어야 법이 됩니다.

만약 법 아래 사람을 놓으면 그 사회는 얼어버린 사회가 되요.

동양의 성자는 한결같이 인간의 성품을 곧 하늘의 성품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기본적으로 인간 존중의 정신이 있습니다.

그러나 서양은 그런 정신이 없어요.

인간은 신의 피조물이고 그래서 신의 이름 아래 마음대로 처단해도 된다는 정신이 있습니다.

그래서 부시는 폭탄도 막 퍼붓고....

아랍권은 그런 부시에게 또 알라의 이름으로 자살 폭발물로 보답합니다.

도대체 끝없이 인간이 빠진 이 전쟁 얼마나 더해야 합니까

불교가 전파되어야 없어져요

인간존중의 종교가 대륙을 지배해야 합니다.

우리는 뒤 쳐지지 말고 앞장서서 가야합니다.

불교를 공부하면 창의적이고 선진으로 나갑니다.

정신은 저 앞에 있게 되요.

인간 앞에 겸손하고 누구에게도 아무 것도 주장하지 않는 무심설사

그것이 위대한 지혜라해도 사람을 불행하게 하면 따르지 않아요.

불교는 아무 얻음도 없는 종교입니다.

만약 무엇 하나라도 얻음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불교를 모르는 것입니다.

당연히 깨달을 것도 없고 설사 누가 깨달았다고 해도 깨달았다고도 말하지 못해요.

허망한 세상에....도대체 무엇인들 영원한 것이 있다고 합니까

어떤 법이 위대하다고 그것을 주장하겠어요.

만약 하나라도 얻은 것이 있고 그것을 주장한다면 당신은 불교를 잘못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불교를 하면 영원히 불교를 모르는 것입니다.

불교는 버리는 종교입니다.

얻는 종교가 아니어요

당신의 생각을 버리고 남편의 생각을 버리게 하세요.

무엇이라도 불교에 대하여 선입견이나 오해가 있으면 안되요.

불교는 지금 당신 그대로가 부처님이라고 소리치면서 시작하는 종교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어떠한 일을 해도 부처이듯이 스님도 어떠한 일을 해도 부처여야해요.

스님이 장가가도 더도 덜도 말고 그대로 부처로 보고

존중 하여야 하고 더 잘 모셔야 불교가 살아나고 이 땅에 평화가 와요.

그것에 대해 조금이라도 무엇이라고 비방하거나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말은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일도양단!

한번 내리쳐서 잘라버린다.

무엇이라도 주장하고 얻으려하고 들으려하고 ....

알려하고 비방하려고 하면 불교와 멀리 달아나는 줄을 알아야 해요.

공에서 와서 공으로 돌아가는 자들이 무엇이 옳고 그르다고 그렇게 주장할 것이 있겠습니까?

모두 어리석은 마음이 만든 경계요,

이상이요, 환상임을 잊지 마세요.

그 누구의 말에도 흔들리지 말아요.

그래야 당신이 부처입니다.

종국에도 스승의 말에도 넘어가지 않아야 당신이 위대한 스승이 되어 남을 가르칠수 있어요.

그때서야 진정 남을 사랑하고 용서하고 포용할 수 있어요.

비워져서....

텅비워져야.....

새로 시작합니다. 아름다운 시작말입니다.

 

 

 

15.고집멸도도 없으며

 

 

乃至 無老死

내지 무노사

내지 늙음과 죽음도 없고

亦無老死盡

역무노사진

 

또한 늙고 죽음이 다함도 없으며

이것 지난 번과 연결해서 지난번에 끝내야하는데 못해서 오늘로 넘어온 것입니다.

12인연에서 무명이 처음 시작이고 늙음과 죽음은 맨 마지막인데

공空은 텅 비워져서 거기에는 늙음도 없고 죽음도 없으며 늙고 죽음이 다함도 없다는 말입니다.

생노병사가 다했다는 말은 생노병사가 끝났다는 말로서

윤회를 끊고 다시는 윤회하지 않게 되었다는 말인데

공은 텅 비어서 생노병사가 있지도 않고 생노병사가 끝났다는 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텅빈 공에 대해서 계속 설법하고 있는 것입니다.

無苦集滅道(무고집멸도)

괴로움, 집착, 멸함, 길(道)도 없으며

오늘은 사성제(四聖際)입니다.

부처님께서 성도하시고 첫 설법인데 그 첫째가 고(苦괴로움)입니다.

바로 4가지 괴로움에 대한 것입니다.

생노병사(生老病死)입니다.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

그런데 부처님은 태어남을 괴로움이라고 보았습니다.

태어날 때 아이 입장에서는 고통스럽 잖아요. 물론 어머니도 괴롭지만

어머니의 안락한 궁전을 벗어나서 좁고 길 터널을 빠져나오는 것은 고통입니다.

환경도 다르니까 놀라고...두렵고...그래서 아이는 울어요.

막 소리치고 울죠...앙! 앙! 싫단말야...전생에서도 살기가 지긋 지긋했는데....

또 살아야 한다니...앙앙! 싫어...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고, 죽음을 다시 맛보아야 하고

자식 새끼가 속 썩혀서 가슴이 문드러졌는데...싫어싫어! 앙앙!!

그렇게 울다가 울음을 그치면 전생을 다 잊고 새로운 세상을 보고 신기하게 생각한데요.

그래서 태어남도 고통이라고 했어요.

물론 늙음도 고통이고...

젊음은 그 자체로 희망이잖아요.

무엇이든지 될 것 같고...사랑에 대한 느낌도....성공에 대한 느낌도 다 싱싱하고

풋풋해요.

그러나 나이가 들면 몸이 말 안듣고...

아침에 일어나면 무겁고 무릎은 관절염 때문에 시큰거리고

얼굴에 주름은 늘어서 보기 싫고

젊은 사람들이 무시하면 자존심상하지만 힘으로는 안되서 져주어야 하고

하고 싶은 것은 안되어서 실패도 맛보고....살날은 얼마 없어

인생이 자꾸 아쉽기만 합니다.

다시 산다면 이렇게 했을걸 하는 후회는 있고....되돌아갈 수는 없고

그래서 늙음을 고통이라고 본 것입니다.

병듦도 고통입니다. 인생에서 병이 없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전에는 몰랐는데 요즘 이상하게 심장이 나빠져서 2년 정도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는데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해요.

그런데 실제로는 간혹 가슴에 통증이 옵니다.

숨쉬기 힘들 때가 있고 그래서 병원에 다녀보니까 맨 아픈 사람야요.

항상 장이 예민해서 얼마전에는 암 인가부다하고 대장 내시경을 했는데

대장이 실핏줄이 나있는 것이 보이길레 염증인가부다했더니

마지막으로 나오면서 항문을 보여주는데

내시경을 돌려서 안에서 항문을 찍는데 뭐이 시커먼게 항문 주변에 있는데

꼭 포도송이같은 큰 것이 하나 보여요

그래서 항문 치질이 심하여 암이 됐나부다했더니

10일 뒤에 오라해서 가보니까 대장이 깨끗하데요....

그래서 그 포도송이는 뭡니까 하고 물었더니 기계가 항문에 끼어있는 것이었데요.

그때 보니까 웬 내시경하려는 사람은 그렇게 많은지 한참 기다렸어요.

병이 인생에 큰 고통이잖아요.

마음병도 큰 고통이고...죽음도 고통이고...

이번에 벽송사 가는 버스를 운전하던 기사님 부인은 혈압으로 뇌출혈이 있어서

1년 가까이 중환자실에 누워있는데 첨에는 다 7일안에 죽는다했는데

이제 겨우 집안식구 알아볼 정도로 호전 되었으나 아직 몸도 못 가누어요.

여전히 중환자고....40대 초반인데...

그러니 그 기사님의 심적 고통이 어떻겠습니까?

돈도 돈이지만...

병...그리고 죽음까지....인간이 겪어야 하는 고통은 필연입니다.

죽을 때 어떤 사람은 몇 개월을 질질 끌다 죽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짧게 금방 죽고....이것은 차라리 나아요.

죽지도 않고 속 썩히면 환자나 가족이나 다 고통이잖아요.

금강경을 많이 읽으면 자는 듯이 간다는데 나이들은 사람은 그것이 희망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도 지금부터 금강경 읽는 연습 만이 하세요.

가을이 되면 저 낙엽처럼 인생도 언젠가는 가는데...하는 생각이 들잖아요

앞 선배들도 모두 갔고 우리도 그렇게 갑니다

잘났네...못났네 해도 결국 모두 가요....

어차피 누구나 죽는다하지만 인간의 생노병사는 필연입니다.

이 생노병사의 네가지 고통 때문에 종교는 생겨났어요

불교는 생사해탈이 목표이고

유신론 종교에서는 영생을 원합니다

예수님은 부활해서 영생을 얻었다고 합니다

이 모두가 짧은 인생이 허망해서 그것을 돌파하는 돌출구로 종교가 생겨난 것입니다.

종교는 현재 유신론 종교와 무신론 종교 이렇게 두가지입니다.

신神을 믿는 종교와 법法을 믿는 종교 불교는 당연히 무신론 종교기 땜에

모든 것을 과학적인 눈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어요.

그래서 신을 믿는 사람들을 보면 이해가 안가지만

우리나라는 유달리 신을 믿기 좋아하여 유신론 종교가 번성합니다.

일요일 되면 자랑스럽게 씩씩하게 신당으로 가요

이 모두가 신에게 의존해서 인간의 기본적인 불행인 생노병사를 바꿔보려는 몸부림이지요.

집集은 집착, 집합등으로 번역할 수있는데

모든 것은 집합되었느니라....어느 것도 고유한 나(我)는 없고

지수화풍이 모여서 생명체가 되고...또한 여러 재료가 모여서 집도 되고 하는 것이지

어떤 것도 절대적인 나는 없다는 것입니다

모여서 이루어졌다 이것이 부처님의 관법입니다

부처님 당시 인도는 힌두교를 믿는 나라였습니다

브라만, 비슈누, 시바가 큰 신인데 셋이나 하나라고 해요

창조하는 신은 브라만

유지 보수는 비슈누

파괴는 시바라고 부르지만 한 신이랍니다

그런데 이런 신관은 아트만 사상에서 나왔어요

우주에는 절대 불변하는 근본 요소가 있는데 그것이 아트만이고 신이다

그 아트만은 만물의 근원이다

그런 사상이 있어서 신이 있는데

웬일인지 부처님은 그 아트만을 철저히 부정했습니다

만물의 근원은 공이니라

공에서 만물이 나왔고 만물은 다시 공으로 돌아간다.

공이었다가 만물이었다가를 반복하는 것이 우주이다.

따라서 색과 공은 하나이고

물도 근원이고 공도 근원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아트만을 부정하고

만물은 원소들의 집합이니라 라고 말한 것이 집集입니다

그 옛날에 참 대단한 선언을 했는데 물론 싯다르타라는 왕자신분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신용했겠지만 그당시 누가 그런 말하면 믿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똑똑한 제자들은 믿었고 알았고 깨달았어요.

그래서 불교가 크게 전파된 것입니다

集자는 모을 집자입니다

집합集合하다 할 때 집자이죠

그래서 불교는 무아를 말하는 종교입니다

그러니까 불교는 한마디로 앉은 자리에서 생노병사를 벗어나게 합니다

대단해요. 부처님 말입니다.

나가 없는데 도대체 무엇이 윤회할 것이며 무엇이 죽는단 말인가?

무엇이 병들고, 늙는단 말인가?

너는 본래 없음을 깨달으라

골짜기가 생기면 긴 휘파람 소리가 나듯

선풍기가 돌아가면 일원상이 생기듯

지수화풍 4대가 모여서 너의 몸이 되고

네 몸이라는 그릇 안에 마음이라는 현상이 있을 뿐

그 그릇이 흩어지면

마치 밧데리 약이 다하면 시계가 정지하듯

너의 영혼도 마음도 사라지는 것인데

도대체 무엇이 영원한가

한순간 깨달으라.너는 본래 없음을....

그러면 즉시 생노병사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것입니다.

부처님 설법은 간단해요

네가 잘못알고 있는 것을 바꿔라

그러면 너는 해탈이다.

그러나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아직도

생노병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까.

集에 대한 이해를 못하는 것입니다.

골짜기가 비워져서 나는 휘파람 소리인지 모르고

골짜기 주인이 있고 거기에 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고 알고 있는 것에는 가짜가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 몸에 무엇이...주인이....나가... 있는줄 알지만

사실은 이렇게 몸이라는 그릇에서 나는 소리일 뿐입니다

이 몸이 흩어지면 아무 것도 없어요

나도...영혼도....주체도....

그러니 윤회할 것이 없죠.

이것이 집集에 대한 뜻입니다

모든 것은 모아졌을 뿐 불변의 나(我)는 없다

다음 멸滅인데 멸할 멸자입니다.

없어진다.....이것도 만고의 진리야요. 존재는 없어진다.

그래서 불교는 영원, 불변 등의 말을 안씁니다

기독교는 신의 힘으로 영원하기를 바래요.

그래서 그런 단어를 자주 쓰고 예수님이 틀림없이 부활했다고 주장합니다.

영원하고 싶은 욕구가 이런 터무니 없는 주장을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요

누구든지 죽는다.....이것이 진리입니다.

그래서 부처님도 80세에 열반하시고 화장하였느니라 라고 하면서

인간사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렇게 해도 아무도 그것을 실망하거나 하지 않아요.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살다가 평범하게 가는 것

이것이 불교입니다.

해답은 무아(無我)입니다.

나는 없어요.

그것을 알면 태어나지 않으나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또 태어나요.

그러니까 나는 정말 무아인가 이것부터 잘 생각해보세요

그래서 나가 있다고 생각이 들면 또 태어날 것이고

없다는 생각이 확실하면 태어나지 않아요. ...

멸滅, 이것은 몸이 멸하고 물질이 멸한다는 말입니다.

존재는 다 멸해요

그러니까 망상이 있고 번뇌가 있다면 그것도 반드시 멸해지게 되어있어요.

번뇌도 하나의 현상이니 없어지죠....모든 것은 멸해지니까

다음은 도道입니다.

도는 길입니다. 길은 도로입니다. 길이 없으면 얼마나 혼란하겠어요.

길이 있다는 것은 반드시 목적하는 곳에 도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는 인생을 편리하고 행복하게 인도하게 해요

도를 알면 인생이 훨씬 효과적이고 편리해집니다.

도를 모를 때에는 사람이 비효율적이고 무지막지해요

그래서 괴로움이 많아요.

그러나 도를 알면 즉시 괴로움이 없어져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4성제 마지막으로 도를 말씀하셨어요.

부정적인 앞의 3가지에다

인생을 긍정적으로 보는 도를 말하셨어요.

행복으로 가는 도는 있느니라.

그 도를 실천하라 그러면 행복해지리라 면서

8정도를 말씀하셨습니다.

여덟가지 바른 도 무엇이 바른 것인가

이쪽과 저쪽에 치우치지 않음을 바름이라고 해요.

정正 : 양변에 지우치지 않는 중도

정견....바르게 보라

정어...바르게 말하라

정업....바르게 행동하라

정명...바른 직업을 가져라

정념....바르게 생각하라

정사유.... 바르게 명상해라

정정진....바르게 정진해라

정정....바르게 선정에 들어라

결국 바르게 살라는 말인데

바르게 본다는 말은 매사를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으로 보라는 말입니다.

즉 생도 없고 죽음도 없으며

더러움도 없고 깨끗함도 없으며

늘어남도 줄어듦도 없다고 보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양변에 치우치지 말고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고 일하고 행동하라는 말입니다

도는 양변에 치우치지 않고 말하고 행동하면 도야요

일상사에 도가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사성제인데

공에는 이런 사성제도 없다 라고 결론내리는 것이었습니다.

즉, 이런 사성제 법문도 텅빈 공에서 나왔고 나오기 이전은

아무 것도 없는 텅빔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유부단? ..... 음......

그렇지 않아요.

더러움에도 끌려가지 말고 깨끗함에도 끌려가지 마세요

왜냐면 더러움도 깨끗함도 원래 없는 것이니까 그런 의미에 끄달려가지 말라는 말입니다.

항상 말하지만 불교는 마음을 바꾸는 종교입니다

모든 것을 그대로 두고 마음만 바꿔요

즉 있는 그대로 보지 더러움과 깨끗함 때문에 괴로움을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살다보면 그런 말도 해야 할 때가 있을 거예요

그러나 내부는 항상 고요해야 합니다.

더럽다....깨끗하다......하고 말을 사용하기는 해도 내부는 고요해야 해요,

그러니까 이 진리를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 무엇을 보고 들어도 흔들리지 않고 바르게 섭니다.

항상 고요함에 머물러 있으세요

그러면 됩니다. 여러분은 이미 고요해요. 원래 마음은 고요한 것입니다.

본래 대로 돌아가 행동하면 됩니다. 첨엔 안되나 자꾸 하다가 보면 되요.

고요하게.....고요하게.....

이것을 적멸위락(寂滅爲樂)이라고 합니다. 내 맘이 고요한데 왜 이리 좋노 라는 말입니다

 

 

14. 無明이 다함도 없다.

 

無無明 亦無無明盡

무무명 역무무명진

무명이 없고 또한 무명이 다함이 없고

 

 

12인연에 대한 설명입니다.

12인연은 불자들이 외워두어야 하는 기본 법수이니 반드시 외워야 합니다.

사람이 전생부터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고,

그리고 다음생으로 윤회하는 원인과 결과를 밝혀놓은 것입니다.

1. 무명無明...무지, 어둠

2. 행行...움직임

3. 식識...헤아림

4. 명색名色...몸과 마음

5. 육입六入...눈귀코혀몸뜻, 육근

6. 촉觸...촉감

7. 수收...받아드리는 작용

8. 애愛...사랑하는 마음

9. 취取...취하려는 욕구

10. 유有...취함으로 결과가 생김

11. 생生...다음생으로 태어남

12. 노사老死...늙고 병들음

이것이 12인연입니다.

보통 앞의 3개 無明 行 識까지는 전생이고 명색, 육입,촉,수,애,취,유까지는 금생을 말하고

생,노사는 다음생을 말한다 하여 삼생다중인과(三生多重因果)설이라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중생이 태어나는 원인과 금생의 변화과정 다음생으로의 윤회까지를 설명하신 것입니다.

우선 사람은 無明에서부터 시작하였습니다. 아득한 옛날부터 윤회하여 내려온 영혼은 전혀 진리를

모르는 것이 첫 시작입니다. 혹은 생명의 첫 출발을 무명에서부터 시작하였다고 보아도 됩니다.

어두움....아무것도 모르는 저 어두운 곳이 모든 생명체의 근원이라는 말입니다.

무명은 무지를 말합니다. 통상 아무 것도 모르는 무지한 상태, 明(밝음)의 반대라고 합니다.

진리를 모르는 중생의 마음을 그렇게 표현합니다.

그러니까 누구든지 이 땅에 태어나면 모름에서 부터 시작해요. 아무 것도 모름.....

이 어둠에서 생명의 시작인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행은 작용, 기의 운동, 꿈틀거림, '생명의 시작'을 이렇게 표현했어요. 바로 行입니다.

태초는 어두웠느니라, 거기서 생명체가 시작되어 움직이는 작용이 발생하였느니라.

그리고 식識(헤아리는 것)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식識은 인식하는 기본 느낌을 말해요.

두뇌가 없어도 느낌을 아는 감각....무척수동물....바다에 가면 두뇌가 없는 연체동물들이 있잖아요.

건드리면 반응하나 두뇌는 없어요. 두뇌 이전의 단계...느낌으로 아는 것....

어떤 동물은 한곳에 뿌리박혀 있으면서 호박꽃처럼 잎을 버리고 있다가 무엇이 걸리면 순간

닫혀져서 거기에 갇힌 고기를 빨아먹는 동물이 있어요.

순전히 감각으로....이런 기초적이요, 원초적 감각이 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였튼 부처님은 이 識의 작용을 육체보다 먼저 놓았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名色의 세계가 발생하였는데 名은 마음이요,

정신적인 것이고, 영혼이라 해도 되고...

色은 육체를 말합니다. 비로소 아주 작은 살덩이가 자라나더니 육체와 영혼을 성장시키기 시작해요.

이 단계가 바로 어머니 배속에서 10달간 입니다. 임신을 명색이라고 합니다.

티벳의 어떤 스님은 오랫동안 수행해서 보니까 명색(身)이 생긴지 49일만에 영혼이 들어간데요.

한편 명은 아버지의 뼈를 말하고 색은 이렇게 아이가 입태하여온 어머니의 살을 말하기도 해요.

10달동안 눈귀코혀몸뜻이 자라나요.이것을 육입六入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아이가 태어나서 감각이 자라나는 시기를 촉觸이라고 해요.

이때는 무조건 어머니의 젖만 찾아요. 입술의 감촉을 느낍니다.

감촉이 발달해요. 그리고 그 느낌을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바로 수收입니다. 받을 수...이 받아들임으로 욕구가 생겼어요.

여기가 욕구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받아들인 감정이나 물건을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아이가 엄마 젖을 물고 편안함을 느껴요.

그 느낌을 받아들여 기억하고 있으므로 엄마 젖을 사랑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만약 누가 엄마 젖을 못먹게 하면 막 화내고 싫어해요.

엄마 젖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감정이 익어지면 아예 자기 것으로 취하려고 합니다.

바로 취取입니다.

성인이 되어 배우자를 사랑하면 자기 것으로 취하려고 해요.

물건도 사랑하면 갖고 싶어지고....

바로 취하려는 욕구입니다.

그래서 취하면 그 결과가 생깁니다.

자식이 생기고... 업보가 생기고....

그래서 결과인 有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이 결과로 인하여 다음생에 태어나고 늙고 죽는 윤회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중생은 계속 쉬지 않고 윤회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윤회의 태초 원인이 있어요.

바로 어둠입니다.

무지! 이것이 윤회의 근원입니다.

반약 어둠을 밝음으로 바꾼다면

행이 없어지고 행이 없어지면 식이 없어지고

식이 없이지면 명색이 없어지고

명색이 없으면 육입이 없어지고

촉이 없으면 수가 없어지고

육입이 없으면 촉이 없어지며

수가 없으면 애가 없어지고

애가 없으면 취가 없어지고

취가 없으면 유가 없어지고

유가 없으면 生老死하는 윤회를 중지합니다.

그러니 문제는 바로 무명(無明)입니다. 없을 무자, 밝을 명자

바로 이 놈 때문에 이세상 저세상 돌아다니면서

지옥, 인간, 축생, 아귀, 아수라, 지옥으로

6세계를 윤회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육도윤회라고 해요.

지난번 꼬릿말에 혜공제일님이

識에 대하여 물으셨는데

식은 아직 마음에 전달되지 않는 육체(상)...

즉 기억 메모리(플로시)로 생각하시면 될 것입니다.

편의상 컴퓨터 하드라고 생각해도 좋고....

그러니까 두뇌의 작용으로 보라는 말입니다.

만약 마음에 식이라는 무의식 즉, 7식 말라식,

8식 아뢰야식 이런 무의식의 세계를 또 설정해놓고

의식의 깊은 곳이 그것이 있는데 그곳이 무의식이고 마음의 깊은 세계이다 하면 문제가 됩니다.

왜냐면 마음이 단계가 있다는 말이고 그러면 유형의 존재가 되고 말아요.

마음은 형체가 없어서 깊은 단계도 없고 낮은 단계도 없습니다.

그러나 7식, 8식과 같은 무의식은 있어요.

그러면 거기는 어디냐?

두뇌입니다.

두뇌가 마음에 전달하기 전의 의식의 저장고입니다.

두뇌에 식이 있다고 보아도 될 것입니다.

그 識이 최종 마음에게 전달해주는데

습관적으로 중생의 마음을 자주 보내기 때문에

중생의 마음을 쓰는 것이고

두뇌에 충격을 주어서 불구부정, 불생불멸, 부증불감임을 강하게 인지 시키면

더럽다는 것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게 되고

깨끗하다는 것 때문에 분별이 일어나지 않게 되는 부처의 의식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깨침으로 두뇌를 새로 정열시키는 것이지

마음을 새로 정열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마음에 그런 단계를 두면 그것은 무형의 존재가 아니다 라는

제 말을 잘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인식도 역시 두뇌의 작용입니다.

그런데 두뇌는 습관이 있어요.

그래서 새로운 인식으로 대체되어 행동하게 하는 것이 쉽지 않아요.

한번 알면 그 알던 것을 교정시키는 시간이 어느 정도 필요해요.

의식은 한번 알면 자꾸 그렇게 인식되는 성질이 있습니다.

진리가 아닌 데두 그것이 진실인것처럼 여겨지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뭔가 강력한 자극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깨달음이야요.

깨달으면 앎은 교정되고

행동도 새로 안대로 나옵니다.

다시 강의로 돌아가서....

명明은 깨달음의 세계입니다.

어둠에 갖혀있던 두뇌가 비로소 환하게 밝아지는 것입니다.

모든 것에 대한 궁금증이 가셔지고

모르는 것이 없어진 다음....세상을 훤하게 보게 된 것입니다.

특히 자기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 일어나면서 비로소 자기를 자각하게 된 것입니다.

아무 것도 모르던 것에서 비로소 눈을 척 뜨고

참자기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후 윤회를 중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윤회를 중지하면 어디로 가나?

오늘은 10월 25일이니라.

다시 설명하자면 극락세계로 갑니다.

극락세계는 부처님들이 가는 세계입니다.

관세음보살도 갔고 모든 보살이 갔으며

깨달은 선지식들이 전부 거기 가 있습니다.

자, 무명과 명은 이렇게 차이가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 반야심경 원문에서는 무명이 다함도 없다고 하였어요.

그런데 여기 반야심경 원문에서는 무명이 다함도 없다고 하였어요.

밝아졌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공에는 그런 밝음조차 없다는 말입니다.

텅 비어있는 곳에 어찌 밝음인들 있겠습니까? 그곳은 그야말로 텅 빔입니다.

그 곳은 이름도 없고 형체도 없고 맛도 없고 느낌도 없으나

어디에나 항상 있습니다.

그것이 공의 세계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원래 그처럼 공해요

공하기 때문에 만가지가 나옵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작용을 없애는 것이 아니고

없애면 어떻게 자연재해를 방지하는 연구를 하고

각종 질병을 없애는 연구를 합니까?

화두를 들고 탐구하고 연구하라 했지 생각하는 기능을 중지시키라하지 않았어요.

단지 더럽다 깨끗하다...색이다 공이다

이런 분별만 없앨 뿐 두뇌는 그대로 잘 사용하는 것입니다.

공연히 생각하는 기능을 정지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자가 되기 위하여

애를 쓰면 진짜 바보가 되는 것이지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탁 깨달았으면 헤아림과 분별은 버리고

생각하는 기능은 가정을 행복하게 하고 국가와 세계가 행복해지는 쪽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분별은 버리고 앎을 버리고 생각을 버려라

이 말은 쓸데 없는 두 상(二相)을 버리라는 말이지

생각하는 기능을 정지하라는 말이 아냐요

분별과, 헤아림과, 한 생각 드는 것이 두 상(二相)에 해당하면 망상이고.

일을 위한 생각이면 일 자체일 뿐이고 공부 자체일 뿐입니다.

 13. 空(공)에는눈귀코혀몸뜻도없다.

 

無眼耳鼻舌身意 (무안이비설신의)

눈귀코혀몸뜻이 없으며

 

지난 시간에 여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공(空)을 설명할 때 아니 不자를 넣은 것이 아니고

없을 無자를 넣었다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不垢不淨(불구부정)이라고 할 때는

아니불자를 썼으나 여기 공을 설명할 때는 없을 無(무)자를 썼습니다.

이유는 더러움이나, 깨끗함, 늘어남, 줄어듬, 그리고 생과 사등등은

어떤 현상이 있는데 그것을 부정 하였으므로 아니不(불)자를 썼어요.

즉 어떤 현상이 있는데....그것이 더러움이든지 깨끗함이든지

그러한 현상이 있음을 전제하고 그것이 사람들은 더럽다고 생각하나

실제로는 더러움이 아니다 하고 시정해줄 때 아니불자를 썼다는 것입니다.

즉, 공에는 아무것도 없으므로

무자를 써서 어떤 흔적도...개념도 싹 부정한다는 의미로 말입니다.

그러니까 공은 텅텅 비어서 눈귀코혀몸뜻도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지난 번 강의였습니다.

無色聲香味觸法 무색성향미촉법

색 소리 냄새 맛 촉감 법도 없으며 눈귀코혀몸뜻은 육근(六根)이라하고

색 소리 냄새 맛 촉감 법(法)은 육근으로 받아들이는 세계라 하여

6경(六境)이라고 말하거나 6진(六塵)이라고 합니다.

눈은 색을 보고

귀는 소리를 듣고

코는 냄새를 맏아요.

혀는 맛을 보고

몸은 감각을 느낌니다.

지난 번에 효원님께서 감정이 어디서 일어나는가 하고 물으셨는데

이것 심장에서 우러나는 현상입니다.

심장은 놀라고 느끼고 받아들이는 감정의 창고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심리를 만들어내는 창고라고 하여 마음 心자를 써서 심장(心臟)이라고 해요.

우리는 보통 心과 心臟을 혼동하는데 심장에서 최종적으로 느껴서 마음에게 보고하는 것이지

마음이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마음이 느낀다면 그것은 유형의 존재여야 합니다.

그러나 마음은 유형의 존재가 아니잖아요.

다만 心臟은 마음과 가장 가까운 관계라

만약 심장이 없으면 감정을 보고 받을 부하가 없는 것과 같아서 전혀 감정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만약 사람이 심장이 약하여 두근거려봐요.

매사에 의욕이 없어지고....나약해집니다.

그러나 심장이 튼튼하면 수행과 상관없이 든든해집니다.

도둑질을 해도 떨지않고 경찰을 만나도 태연자약해요.

반면 심장이 약하면 죄를 지은 일도 없는데 작은 소리에도 깜짝 깜짝 놀라고 마음이 약해집니다.

그런데 여기 무無자는 아예 첨부터 어떤 흔적도 없다는 것을 강조할 때 쓴 것입니다.

과거에 어떤 큰스님은 12세에 출가하여 평생 수행한 스님이 계셨었습니다.

설법도 잘 하시고 사찰 운영능력도 뛰어났어요.

어느 면에서는 성철스님보다 훌륭하다고 사람들이 말했어요.

그런데 선천적으로 심장이 약하셔서 늘 작은 소리에도 민감한 반응을 보이곤 하셨지요.

나중에는 불면증으로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셨는데 그래서 노년에는 활동을 중지하시고

법문도 안하셨습니다.

평생의 수행과 상관없이 신체가 약해서 오는 증세는 피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젊은 스님들이 간혹 말하길 그런 분이 어찌 큰스님이냐고 반문하였던

적이 있었는데 인간은 인간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숙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생노병사입니다.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법칙에서 벗어나지 못해요.

부처님같은 복인(福人)도 말년에 병들어 돌아가셨는데

하물며 평범한 사람들이야 말할 것이 뭐있습니까?

이런 것으로 그 스님의 경계를 오해하면 안되요.

그런데 그 스님들도 젊어서는 그렇게 말하더니 최근 무슨 모임에서 하는 말을 들으니

이제 자기도 느끼는 것이 있는지 큰스님을 보는 눈에도 융통성이 생겼드라구요.

물론 도인이 항상 건강한 몸으로 앉아서 참선하다가 90세 100세에 죽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러나 이것은 전부 전생의 복이 좌우하는 것이지 수행과 경지가 좌우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육조스님에게 단번에 깨달음을 얻고 증도가를 써내서 만고불변의 유명한 선서를 지었던 영가스님도

39세에 사망하였고 대혜스님 같은 큰 도인도 10년간 귀향살이를 하였던 적이 있고, 깨침을

정식으로 인가받았던 나옹스님도 50세에 사망하였습니다.

사람은 사람으로 살아가야 가장 가치 있고 의미있습니다.

특이한 사상, 특이한 경지를 얻어야 도를 아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만약 그런 말이 맞다면 제가 여러분을 부처로 인정하고 바로 부처행을 하라고 말하지 못하고

육조스님 설법도 틀리게 됩니다.

그러나 평범함 속에 도가 있기 때문에 모두 부처인 것입니다.

심장은 느낌을 맨 마지막에 마음에게 보고 하는 자입니다.

몸으로 느끼는 감촉...맛으로, 소리로, 색으로의 느낌을 심장이 먼저 파악하고 마음에 전달해요.

그러므로 슬픔....고독함....쓸쓸함....기쁨 이것은 심장이 느끼는 한 현상이지

마음이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은 아무 느낌이 없어요. 주인이 되어 다 알고 주관하나 비었습니다.

그래서 공에는 색 소리 냄새 맛 촉감 법(지식,법칙)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법은 식별하는 세계인데

法은 지식, 법칙, 이론, 만물, 의미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것은 의식 작용이 헤아리고 분별하는 것이기 때문에 한마디로 법이라고 합니다.

뜻의 세계이지요.

그런데 그 법도 공에는 없다는 말입니다.

만약 공을 포현하면서 그 어떤 한 마디나 앎으로 표현하면 안되는 이유가 바로 법(뜻)도 없다는

말에 힌트가 있어요.

진리...사상...뜻조차 없는데 공을 표현하면서 어찌 기이한 언구나 행동으로 보이려고 합니까?

그런 것은 다 머리에서 나온 또 하나의 작위입니다.

절대 인정받지 못해요.

뜻은 법을 세우려는 경향이 있어요.

이것이 습관이요, 무의식입니다.

그런데 이 무의식에 유혹되면 진정한 진리를 펴지 못하게 됩니다.

끝없이 뜻을 세워서 표현할 것이고 그것은 결국 또 작위에 떨어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안계(眼界)가 없고 무의식까지 없으며 이번에는 六界가 나옵니다.

원래 6근 6경 6식을 합하여 18계라하는데

사바세계에서 우리가 느끼고 아는 세계를 18계라고 해요.

6근과 그것의 상대인 6경

그리고 그것을 분별할 줄 아는 6식(六識)의 세계

6근6경6식(6根6境6識)을 합하여 18계라고 합니다.

이것 이외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하여 18계는 불교의 세계관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원래는 六識이라고 해야 하는데 여기서는 6계라고 말하고 있어요.

그렇게 말해도 틀린 것은 아닙니다.

▶6식은

▶眼識(眼界)

▶耳識(耳界)

▶鼻識(鼻界)

▶舌識(舌界)

▶身識(身界)

▶意識(意識界)

그러니까 육근(눈귀코혀몸뜻)이 육경을 대하고 육식으로 분별합니다.

눈으로 보고 예쁘다, 밉다, 좋다 나쁘다...헤아리는 세계를 안식이라고하고 안계라고 해요

귀로 소리를 듣고 시끄럽다...조용하다... 헤아리는 세계를 이식이라고 하고 이계라고 해요

코로 냄새를 맏고 좋다 나쁘다 헤아리는(識) 세계를 비식이라고 하고 비계(鼻界)라고도합니다.

혀로 맛을 느끼고 헤아려요. 짜구나 싱겁구나... 하고 이것을 미식(味識)이 작용했다해요.

그래서 맛의 세계라고 합니다.

혀로 몸으로 차고 덥고 두드러움을 느낍니다.

이것은 신식(身識:몸의 감촉)의 작용이라고 해요. 그리고 신계(身界)라고합니다.

신계(身界)= 춥다, 덥다, 거칠은 이불, 부드러운 이불, 부드러운 키스, 거칠은 손...

의식(意識)은 설명하지 않아도 알지요. 모든 느낌을 종합하여 판정하는 최후의 표면 의식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의식(意識界)의 세계라고 해요.

사람은 이것 이외의 것을 보거나 느낄 수 없어요.

그래서 3x6=18계가 중생계의 전부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여섯가지 기관(6근), 그것이 알고 느낄 수 있는 대상의 세계(6경),

그리고 그것을 판단하는 각종 정신의 세계(6식)....이것이 전부입니다.

이것을 18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혹 누가 영혼의 세계까지 감지해낸다고 하여도 그역시 뜻이 느끼는 세계일 뿐

다른 기능이 작용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 18계까지도 공의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나(六根)도 없고 삼라만상(六境)도 없고

정신이 헤아릴 수 있는 모든 세계(六識)도

공(空)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입니다.

현재를 느끼고 곧 저장하니까

결국 과거를 저장하는 것이 되겠지요.

저장....이것은 기억인데 이것은 또 두뇌의 작용이잖아요.

역시 신계(身界)입니다.

과거도 몸이 느끼고 아는 세계니까요.

이토록 공은 철저히 비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일종의 갖가지 나열을 통하여 공은 철저히 비었음을 설명하고 있어요.

엊그제 하늘님인가요...? 마음은 어디에서 왔냐고 질문하시기에 공즉시색空卽是色으로

대답해주었어요.

공은 곧 만물이니라...

그리고 색즉시공도 알아야 해요.

불교에서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만물과 본질을 설명한 중요한 단서입니다.

부처님은 색즉시공 공즉시색, 이 한 마디로 우주를 설명하고 말았아요.

존재는 곧 빔이니라.

이것은 시간이 가면 빔이라는 말이 아니고

존재(色)=빔(空)이라는 선언입니다.

존재 그 자체가 이미 빔이니라... 입니다.

그러니 마음도 한 현상이라면 색의 범주에 넣어야 합니다.

그러니 마음은 곧 빔이니라가 성립됩니다.

물론 마음은 이미 그 형상이 없는

▶6識(眼識 耳識 鼻識 舌識 身識 意識)이

작용할 때만 종합작용하는 한 현상인데 6개의 프로펠러가 움직일 때 존재하지 않는 하나의 원반

같은 것이 생겨나듯 육식이 작용할 때 마음이 있습니다.

이 말은 제 말이 아니고 경전에 나와 있는 부처님의 말입니다.

원각경에 나와요.

▶"六識이 종합작용하여 임시로 있는 듯한 것이 마음이니라" 라고

그러니 결국 몸이 없으면 맘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맘이 일어났던 근원지 바로 공은 항상 존재하잖아요.

그래서 맘은 불생불멸이고 영원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色卽是空은 곧 心卽是空을 말해요.

모든 것의 근원을 빔으로 보기 때문에 자꾸 비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너의 근원은 빔이니까

그 근원으로 돌아가라.

네가 각종 생각을 일으켜서 세웠던 허망한 개념에 떨어지지 말고

그 생각은 곧 작위요, 허망한 경계이니 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음은 형상이 없는 존재인데 무엇인들 받아들이는 작용을 하겠어요.

그러니 기생충 같은 것이라는 말도 안맞아요.

단지 유혹되기는 하겠죠.

원래 유혹되지 않는 것이 마음이나

자기를 모른 까닭으로

소리에... 빛에....명예에....의미에 이끌리잖아요.

빔이 근원인 자기...... 본래 비어있는 고요한 자기......

이것을 깊이 깨달았다면 본심으로 돌아가서 항상 유혹됨이 없이 고요하게 살아가겠으나

깨닫지 못한다면 만약 알기만 한다면 조그마한 것에 여전히 유혹되어 살아가게 되어있습니다.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 유혹당하지 않아요.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항상 실수하고 그때서야 반성해요.

물론 이런 정도라도 있다면 좋은 것이겠으나

한번 깨달음으로 저절로 유혹되지 않는다면 인생이 수고롭지 않지요.

한번 부처님께 내맡기고 놔버려야 합니다.

잡고 있는 것을 놔버리세요. 내가 잡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잘 생각해보고 놔버려야 합니다.

자기 변혁이 일어나야 해요.

그래도 사랑하고....여행가고...영화구경하고....맛난 것 먹고....다 합니다.

못하는 것 없이 다해요.

다만 몇푼어치 않되는 것들을.... 굳게 들고 있던 것들을 놓아버릴 뿐입니다.

이쪽(차안)과 저쪽(피안)은 확실히 달라요.

보는 각도가 다르고 생각이 달라요.

어찌 되었든 세상사가 매우 편안하고 고요한 것은 사실이고

세상사를 훤하게 꿰뚫는 것도 사실이고 할 일과 안 할일이 정확하게 구분되고

무엇이든지 하고 무엇도 안 할수 있습니다.

단 한번의 놓아버림으로 이렇게 아주 다른 인생을 살아가게 되요.

지금 즉시 모든 가치와 개념을 버리고 바람처럼 구름처럼...

대자연....부처님의 품에 내맡기세요.

그러면 참자기를 알게 되고 안개에 가려있는 미심적었던 것들도 다 걷혀지고 맙니다.

그야말로 더이상 알 것이 없어져요. 오직 부처행을 행할 뿐입니다.

'반야심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15. 고집멸도도 없으며  (0) 2015.01.09
14. 無明이 다함도 없다.  (0) 2015.01.07
12. 공(空)에는 눈귀코혀몸뜻이 없다.  (0) 2015.01.06
11. 不增不減 (부증불감 )  (0) 2015.01.06
10. 不垢不淨( 불구부정 )  (0) 2014.12.27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