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를 들어야 할까요, 호흡을 관찰해야 할까요?

 

화두를 들어야 하는지, 호흡을 관찰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먼 과거에 강렬한 화두 참구 경험이 있었는데 제가 그 상에 붙들린 것이라고 생각해서 화두는 잊고 호흡 명상만 하고 있었습니다. 화두와 관련한 스님의 법문을 듣고도 계속 가슴에 답답함이 있어서 화두 참구를 해야 하는 건가 싶기도 합니다. 어떡하면 좋을까요?”

 

수행은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계율을 잘 지켜야 합니다. 둘째, 선정을 닦아야 합니다. 셋째, 지혜를 증득해야 합니다. 계율을 지키는 것은 윤리를 지키는 것에 해당합니다. 더 나아가 선정을 닦는 정도까지는 불교가 아닌 다른 종교의 수행법에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요가는 주로 선정을 닦습니다. 그런데 불교의 가장 큰 특징은 지혜를 증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혜만 증득하면 계율은 안 지켜도 되고, 선정은 안 닦아도 될까요? 계율을 지키지 않고, 선정을 닦지 않으면, 지혜가 증득 될 수 없습니다. 계율을 지키고 선정을 닦는 것은 지혜를 증득하는 바탕이 됩니다. 계율을 지키는 것은 남이 보기에 훌륭한 사람이 되는 거예요. 선정을 닦는 것은 자기 스스로 편안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지혜를 증득하는 것은 스스로 번뇌가 없고 모든 사물의 근본 이치를 통달하는 것입니다. 불교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말하면 지혜를 증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혜를 증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계율을 지키고 선정을 닦는 것을 기초로 해야 됩니다.

 

대승불교, 소승불교, 선불교, 밀교 등 각 불교마다 계율이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큰 차이가 없습니다. 계율은 소승불교의 계율이 기본입니다. 소승은 계율을 굉장히 중요시합니다. 그러나 대승불교와 선불교에서는 깨달음을 너무 중요시하다 보니까 계율을 좀 덜 중요시하는 풍조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선승 중에 청정한 계율을 지켜서 인격을 갖춘 사람이 드물고 막행막식 하거나 욕하고 화내고 술을 먹어도 저분은 깨친 사람이다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보면 계율을 청정히 지키는 것이 중요하지 그 사람이 깨달았는지 안 깨달았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계율을 청정히 지켜서 타인에게 해를 주지 않고 이익을 주는 것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더욱 중요합니다. 그러나 해탈과 열반이라는 수행의 목표를 기준으로 생각하면 계율을 지키는 것은 한 부분이지 전부는 아닙니다.

 

선정은 마음을 고요히 하는 가운데 정신이 한곳에 집중되어 깨어있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을 고요히 하는 가운데 자기 상태에 뚜렷하게 깨어있어야 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몸에 깨어있고, 느낌에 깨어있고, 마음에 깨어있고, 법에 깨어있고, 이렇게 네 가지에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고 해서 사념처관이라고 합니다. 호흡에 깨어있기는 그전에 해야 할 수행입니다. 초심자들에게는 소승의 기본 계율을 지키는 것과 소승의 기본 수행법을 행하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호흡관을 먼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승불교에서는 선정을 염불로 닦습니다. ‘관세음보살을 부르면서 그 소리에 집중하지요. 밀교에서는 옴마니 반메홈을 반복해서 염하는 주력을 수행이라고 합니다. 선불교는 나라고 하는 이것이 무엇인고?’ 하는 화두를 참구 합니다. 각 종파는 자신들이 닦는 선정 수행법이 제일이라고 주장하지만, 깨어있는 상태를 유지한다면 화두를 들어서 깨어있든, 호흡에 깨어있든, 동작에 깨어있든, 염불에 깨어있든, 주력에 깨어있든, 선정을 닦는 수행에는 큰 차이가 없어요.

 

저는 선불교의 전통을 계승한 선사입니다. 선불교는 통합 불교이기 때문에 저는 어릴 때부터 선정을 닦는 방법으로 참선도 배우고, 주력도 배우고, 염불도 배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불교이기 때문에 화두에 깨어있는 화두 참구를 기본 수행법으로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법문을 할 때 화두를 참구 하는 수행법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 질문자가 정토경전대학에 입학하게 되면 선불교의 발생 원인과 선불교의 장점에 대해 많은 공부를 하게 될 것입니다.

 

화두 참구란 참선 방법의 한 종류인데 어떤 생각이나 관념을 모두 내려놓고, 불교라는 생각이나 부처님이란 생각도 모두 내려놓고, 오직 화두에 깨어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위빠사나 수행에서도 마찬가지예요. 부처님이라는 생각이나 불법이라는 생각도 모두 내려놓고 오직 호흡에 깨어있는 것입니다. 앉아서 머릿속으로 이건 어떻고 저건 어떻고 생각하면, 그것은 화두 참구가 아니라 번뇌와 망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 불교는 원효대사 이후로 통불교 사상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자기 종파만 옳다고 주장하는 종파불교가 아니라 다른 종파도 인정하자는 지향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어떤 수행을 해도 좋습니다. 이를 근간으로 용성조사님께서는 5대 수행을 정립하셨어요. 첫째, 참선하는 사람은 화두에 깨어있어야 하고, 둘째, 염불 하는 사람은 염불에 깨어있어야 하고, 셋째, 주력하는 사람은 주력에 깨어있어야 하고, 넷째, 간경 하는 사람은 간경에 깨어있어야 하고, 다섯째, 불사 수행을 하는 사람은 일에 깨어있어야 합니다. 불사 수행이란 일을 하면서도 일하는 데에 깨어있는 수행법을 말합니다.

 

이런 많은 수행법이 있지만 지금 우리나라에서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조계종은 화두에 깨어있는 것을 가장 중요한 수행법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화두 참구를 하든, 다른 네 가지 중 하나를 하든, 어떤 것을 해도 좋습니다. 저는 출가했을 때 먼저 스승으로부터 화두 참구부터 배웠습니다. 그러나 일반인들에게 선정을 닦는 방법을 가르칠 때는 우선 호흡에 깨어있기를 가르칩니다. 화두 참구든 호흡에 깨어있기든 편안한 가운데 한곳에 집중해서 깨어있는다는 측면에서 그 원리는 똑같습니다. 먼저 호흡에 깨어있기가 되면 나중에 화두 참구를 할 때도 굉장히 도움이 됩니다.

 

예를 들어 건강이 안 좋아서 운동을 좀 하려고 할 때 무슨 운동이 좋을지 정한다고 합시다. 그때는 인연을 따라서 농구를 하든지 축구를 하든지 등산을 하든지 어떤 운동을 해도 괜찮습니다. 어느 한 가지 운동을 콕 집어서 이 운동이 제일 낫다고 주장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자기가 좋아하거나, 누가 가까이에서 도와줄 사람이 있거나, 자신이 사는 환경이 그 운동을 하기에 적당하거나, 이렇게 인연을 따라 하면 되는 것처럼 수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한 가지 수행법이 최고라고 고집하는 것은 종파적 개념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약에 질문자가 어릴 때 화두 참구하는 습관이 생겨서 화두 참구가 수월하다면 화두 참구를 해도 좋다는 거예요. 그러나 이거 좀 했다가 저거 좀 했다가 이렇게 섞어서 하는 것은 좋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러면 마음이 산란하기 때문입니다. 처음 마음을 집중시킬 때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을 했다가 그다음에 저절로 이 뭣고!’ 하는 화두가 참구 되면 거기에 집중해도 좋습니다. 간화선은 깨어서 화두를 참구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화두 참구를 하다 보면 화두에 깨어있기를 하는 게 아니라 생각에 빠질 위험이 많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스스로는 화두를 참구하고 있다고 착각할 소지가 있습니다. 호흡을 알아차릴 때는 그런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호흡 알아차리기는 생각이 일어나면 제가 망상을 피웠습니다하고 비교적 구분을 명확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화두 참구는 이 뭣고!’ 하고 참구를 하지 않고 이게 뭐지?’ 하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서 그걸 화두 참구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화두 참구를 잘못하는 승려들을 향해서 선방에 앉아서 망상만 피운다이런 비판을 하기도 하는 겁니다. 어떤 방법으로 선정을 닦아도 좋습니다. 그 원리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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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  (0) 2022.11.20

날씨가 많이 춥죠? 올 가을은 유난히도 따뜻했는데, 갑자기 이렇게 한파가 몰려왔습니다. 우리 인생도 그런 것 같습니다. 평온한 삶을 살다가 이렇게 한파가 몰려오듯이 어느 날 인생이 많은 어려움에 부딪힐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파는 얼마 있으면 또 지나가고, 날씨는 곧 평년 기온을 회복했다가, 또 더 추웠다가, 그러다가 대한, 소한을 지나면 다시 따뜻한 봄날이 찾아옵니다.

 

날씨와 같은 우리들의 인생

사람들은 인생살이가 늘 이렇게 봄날 같기를 바라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때로는 여름처럼 더울 때도 있고, 때로는 겨울처럼 추울 때도 있습니다. 특별히 여름이 더 좋은 것도 아니고, 특별히 겨울이 더 나쁜 것도 아닙니다. 이런 게 인생인 줄 알면서, 이럴 때는 이렇게, 저럴 때는 저렇게 대응해가는 것이 수행입니다. 매일 봄날 같기를 원하지만 매일 꽃이 피는 하와이 같은 곳에 산다고 해서 꼭 좋은 건 아니에요. 사계절이 있으면 또 거기 나름대로 계절의 맛이 있습니다.

 

인생도 늘 평온하다고 좋은 것만은 아니에요. 바깥의 환경은 어찌 되든 내 마음이 편안해야 됩니다. 주어진 조건이 어떻든 그 본질을 꿰뚫어 보면 사실은 별 일이 아닙니다. 늘 있는 일이고 세상 사람들이 다 겪는 일입니다. 다만, 내가 원하는 것과 좀 안 맞았을 때, 분하기도 하고, 원망도 생기고, 괴로움도 생기는 겁니다. 그런 내용을 대승불교사상, 특히 그 가운데 반야(般若) 사상 또는 공() 사상에서 여실히 보여줍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오늘은 반야심경의 마지막 문장을 배울 차례입니다. 스님이 맨 마지막 문장을 직접 읽은 후 그 의미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고설 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故說 般若波羅密多呪 卽說呪曰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苦提娑婆訶

 

이런 까닭으로 부처님께서 말씀을 하셨다는 뜻이 고설입니다. ‘반야바라밀다는 확 깨달아서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을 뜻합니다. ‘반야바라밀다주는 반야바라밀다의 진실한 말씀이라는 뜻이고,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를 말합니다. 이 구절은 반야심경을 마무리하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어떤 것인지 요약하고 있습니다.

 

아제아제는 한문을 우리말로 읽은 거예요. 인도말로는 갓떼 갓떼이고, 우리 말로는 가세 가세이런 뜻입니다. ‘바라아제에서 바라저 언덕이라는 뜻이고, 한문으로는 피안입니다. 그래서 가세 가세 저 언덕으로 건너가세이런 뜻입니다. ‘저 언덕은 괴로움이 없는 세계 곧 열반의 세계입니다.

 

그동안 반야심경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긴 시간 동안 배웠는데 이제 남은 과제가 무엇일까요? 이렇게 백 번 말해봐야 소용없잖아요. 이제는 구체적인 행동을 해야 됩니다. 그것은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출세하는 것도 아니고, 건강해지는 것도 아니고, 유명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바로 깨달음을 이뤄서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깨달음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깨달음이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

가세! 가세! 저 언덕으로 건너가세

 

바라승아제는 인도말로 빠라상갓데라고 읽는데, 빠라는 저 언덕이고, ‘갓데(아제)’ 앞에 ()’이 붙어서 가자의 완료형이 됩니다. ‘가자가 현재형이기 때문에 완료형이 되면 저 언덕에 도달하여이런 뜻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모지보리(菩提, Bohdi)’를 우리 식으로 읽어서 모지가 된 거예요. ‘사바하(스바하)’하소서라는 뜻으로, 기도를 할 때 마지막 구절로 들어가면 뭐뭐 하게 하여 주소서이런 뜻이 됩니다.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저 언덕에 도달하여 깨달음을 이루세!

 

반야심경의 마지막 구절인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는 굉장히 힘찬 표현입니다. 반야심경의 전체적인 경구를 다 이해하고 난 결론에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가세, 가세, 저 언덕으로 건너가세! 전 언덕에 도달하여 깨달음을 이루세!’

 

3.1독립선언서의 공약삼장도 마찬가지입니다. 3.1독립선언서는 먼저 세계사를 주욱 설명하고, 우리의 요구를 주장하고 난 뒤에 맨 끝에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하는 내용으로 마무리가 됩니다. 반야심경도 결국 어떻게 하자는 거냐?’ 하는 것에 대한 내용을 마지막에 표현한 겁니다. 그러니 마지막 문장은 힘 있게 읽어야 하겠죠.

 

그런데 여러분은 그 뜻을 모르니까 하기 싫은 사람이 억지로 하듯이 힘 빠진 소리로 읽는 경우가 많아요. 반야심경의 마지막 부분은 마치 공약삼장처럼 아주 힘 있게 읽어야 합니다. 반야심경의 결론은 돈을 벌자는 것도 아니고, 출세하자는 것도 아니고, 유명해지자는 것도 아니고, 깨달음을 이루자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이루자는 것이 반야심경 전체를 이해한 사람이 도달해야 할 결론이에요.

 

 

네 가지 진리의 차원

이제 다음 시간부터는 화엄경을 공부하게 됩니다. 반야심경에 나오는 신해행증에 기초해서 화엄경에서는 4가지 진리의 차원인 4법계(四法界)를 이야기합니다. 그중 첫 번째인 사법계(事法界)는 현상계를 말합니다. 두 번째인 이법계(理法界)는 본질계입니다. 세 번째인 이사무애법계(理事無礙法界)는 현상과 본질이 사실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세계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인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는 차별 현상계에서 자유로워진 세계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우리는 욕망에 찌들고, 성질에 사로잡히고, 어리석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 괴로움을 만듭니다. 자기 손으로 자기 발등을 찍는 것처럼 자업자득의 인생을 삽니다. 남을 원망하고 남을 탓하지만, 사실은 다 자기가 어리석어서 자기의 고통을 만드는 겁니다. 이것이 사법계(事法界)입니다.

 

이런 걸 더 깊이 관찰해서 시류에 물들거나 흔들리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하고 은거를 하기도 합니다. 요즘 유행하는 자연인처럼요. 아니면 머리 깎고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혼자 살기도 하죠. 그것이 이법계입니다. 그렇다고 세상 문제가 해결될까요? 자기가 물들지 않는 건 좋은데, 세상은 그냥 흘러가죠. 그리고 자기는 갇혀 있습니다. 새가 새장에 갇혀 있듯이, 물고기가 연못에 갇혀 있듯이, 그 울타리 안에 갇혀 있습니다. 마치 잔잔한 호수에서 배를 젓는 사람과 같습니다. 풍랑을 만나서 물에 빠지는 일은 없지만, 그 배는 호수 밖을 나가지 못합니다. 크게 보면 새장의 새와 차이가 없습니다. 이것이 이법계(理法界)입니다.

 

세상 속에서 걸림 없는 삶을 사는 방법

이사무애법계라고 하는 세 번째 세계는 보살의 세계입니다. 보살의 세계는 원을 갖고 큰 배를 만들고, 풍랑을 이용하는 기술을 터득하고, 바람을 이용하는 돛을 만들어서 바다를 항해합니다. 호수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풍랑이 이는 바다를 마음껏 항해합니다. 보살은 욕망의 세계 속에 살면서도, 욕망에 물들지 않고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유유자적(悠然自適)하게 세상 속에서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하고 바른 길로 이끄는 활동을 합니다. 이것이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세계입니다. ()이 즉 공()이고, ()이 곧 색()인 이사가 무애한 세계죠. 본질과 현상이 둘이 아닌 세계입니다. 절에 가면 일주문(一柱門)이 있죠.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다해서 불이문(不二門)이라고도 하고, ‘중생과 부처가 하나다해서 일주문(一柱門)이라는 말도 씁니다. 이것이 이사무애법계의 세계입니다.

 

 

이렇게 반야심경에서는 이사(理事)가 무애(無礙)한 세계, 즉 현상과 본질이 둘이 아닌 세계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화엄경에 가면 사사무애법계가 나옵니다. 현상 속에 있으면서도 걸림이 없는 세계입니다. 삶이 그냥 이 세상 속에서 걸림 없이 이루어지는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큰 배를 갖고 바다를 항해한다 하더라도 물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사법계 는 놀러 갔다가 물에 빠져서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세계이고, 이법계는 물에 안 빠지려고 호수에 사는 세계이고, 이사무애법계는 바다에는 가고 싶고 물에는 안 빠지고 싶어서 큰 배를 갖고 바다에 나가는 세계입니다. 이 셋의 공통점은 물에 안 빠지는 것이 좋다는 거예요. 물에 안 빠지는 게 좋은데 첫 번째는 물에 빠져서 괴롭고, 두 번째는 물에 안 빠지려고 울타리를 치고 살고, 세 번째는 물에 안 빠지려고 큰 배를 탑니다.

 

바다에 빠진 김에 진주조개를 줍고

그런데 사사무애법계는 물에 빠져도 상관이 없습니다. 물에 빠지면 안 된다는 생각도 안 해요. 어차피 바다에 있는 진주조개를 줍기 위해서는 내 발로 물에 들어가야 합니다. 안 빠지려고 했는데 빠지면 고통이지만, 이 사람은 내가 볼 일이 있어서 내 발로 물에 들어가기 때문에, 남이 볼 때는 물에 빠졌지만 본인은 물에 빠진 것과 차원이 다릅니다. 이것이 지장보살의 원입니다. 지장보살은 중생을 구제하는 일을 하기 위해 지옥에 갔는데, 우리가 볼 때는 바보 같죠. 다른 사람은 지옥에 안 가려고 아등바등하는데, 지장보살은 안 가도 되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발로 가서 지옥에 빠진 사람들을 구제합니다. 이것이 사사무애법계입니다.

 

걸레처럼 다른 사람의 더러움을 닦아주고

사사무애법계라는 경지는 이 세상에서 남이 울 때 같이 울고, 남이 웃을 때 같이 웃고, 남들과 똑같이 삽니다. 남이 울 때도 안 울고, 남이 웃을 때도 안 웃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내가 남에게 물듦으로 해서 걸레처럼 다른 사람의 더러움을 닦아주는 역할을 합니다. 사법계는 깨끗하게 살고 싶은데 물드는 존재, 이법계는 깨끗하게 살려고 더러운 곳에 가까이 안 가는 존재, 이사무애법계는 가까이 가도 물 안 드는 존재인데, 마지막 단계인 사사무애법계는 내가 물 들고 상대를 살리는 존재입니다. 내가 지옥에 가고 상대를 지옥 밖으로 내보냅니다. 세상에서는 보통 사람과 똑같이 보여요. 그런데 본인의 마음속에는 괴로움이 없습니다. 이것을 현현(顯現)한다’, ‘천백억 화신(千百億 化身)한다’, ‘자유자재(自由自在)하다이렇게 말합니다.

 

사사무애법계에서는 우리가 어떤 잣대로 저 사람은 수행자이다이렇게 가늠하기가 어렵습니다. 사법계, 이법계, 이사무애법계는 물에 빠졌나, 안 빠졌나하는 잣대가 있는데, 사사무애법계는 기준이 없으니까 잣대를 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일의 결과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가 그렇게 삶으로 해서 주위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느냐?’

 

본인은 괴로워하느냐?’

 

이런 걸 봐야 돼요. 운다고 다 괴로운 건 아니에요. 남이 슬퍼하니 함께 슬퍼해 주고, 남이 무거운 짐을 지고 있으니 같이 가서 들어주고, 남이 감옥에 갇히니 같이 가서 감옥에 갇혀도 주지만 본인은 괴롭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표시가 안 납니다. 그것을 화작(化作) 또는 화현(化現)의 세계라고 말합니다.

 

반야심경에서는 아직 부처의 길과 보살의 길이 다릅니다. 보살은 아직 부처가 못 된 단계로 설정되어 있는데, 화엄경의 사사무애법계에 가면 보살은 이미 부처가 됐지만 부처의 모습을 보이지 않고 보살행을 하는 모습까지 나오게 됩니다. 이런 식의 얘기를 공부하는 것이 다음 시간에 배우게 될 화엄경입니다.

 

 

반야심경의 요지는 네 가지입니다. 첫째, 주인공이 스님이 아니고 보살입니다. 깨달음을 얻겠다고 원을 세운 선남자, 선여인, 누구든지 다 주인공입니다. 둘째, 이들이 행하는 수행은 반야바라밀다행입니다. 확 깨달아서 눈을 떠버리고 진실을 아는, 그런 수행입니다. 셋째, 그렇게 확연히 사실을 알게 되기 때문에 제법이 공하다하고 공을 체험합니다. 넷째, 실체가 없고 항상 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체험하니까 괴로울 일이 없어져 버려요. 반야심경 첫 문장에 이 네 가지가 모두 담겨 있습니다.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반야심경은 한문으로 되어 있긴 하지만 내용이 아주 짧기 때문에 앞으로 여러분들이 반야심경을 독송할 때마다 이런 요지를 항상 마음에 새겨보면 좋겠습니다.”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시제법공상(是諸法空相)이란 ‘제법이 공한 실제의 세계는 어떠한가’ 이런 뜻입니다. 반야심경에서는 실제의 세계가 불생불멸이요, 불구부정이요, 부증불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
첫째,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생멸이 있습니다. 우주도 생겨나고 사라지고, 별들도 생겨나고 사라지고, 사람도 태어나고 죽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생멸의 세계입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기뻐하고, 사람이 죽으면 슬퍼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일 뿐입니다. 우리는 ‘해가 뜬다, 해가 진다’라고 말합니다. 지구에 사는 내 눈에는 해가 보였다 안 보였다 하니까 인식한 대로 말하는 거예요. 하지만 실제로 태양계를 보면 태양은 늘 그 자리에 있고 지구가 자전하는 겁니다. 실제로는 해가 뜨는 바도 없고, 지는 바도 없어요. 그것처럼 실제의 세계는 생하는 바도 없고 멸하는 바도 없고 여여합니다.

바닷가에서 파도를 보면 파도가 생겨나고 파도가 사라집니다. 파도 하나하나를 보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이 있어요. 그러나 바다 전체를 보면, 파도는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에요. 그냥 물이 출렁출렁할 뿐입니다. 파도 하나만 보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으로 인식이 되는데, 바다 전체를 보면 생겨나는 것도 없고 사라지는 바도 없습니다. 그냥 변할 뿐이에요. 개별로 볼 때는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처럼 인식이 되지만, 전체를 보면 생겨났다고 할 것도 없고 사라졌다고 할 것도 없어요. 이것이 불생불멸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불생불멸이라고 하면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불생불멸의 의미는 생한다고 하지만 생했다고 할 수 없고, 멸했다고 하지만 멸했다고 할 수 없다는 뜻이에요. 생한 것도 아니고 멸한 것도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인식과 실제는 항상 일치하지 않아요, 그 이유는...
다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1차원, 2차원, 3차원, 4차원에 대해 들어본 적 있나요? 1차원은 수직선을 말해요. 수직선은 가운데가 숫자 ‘0’이고, x축만 있는 거예요. 오른쪽으로 갈수록 +1, +2, +3, +4가 되고, 왼쪽으로 갈수록 –1, –2, –3, –4 가 됩니다. 한마디로 파이프와 같은 거예요. 파이프 안에 구슬 하나가 이쪽에서 오고, 다른 하나는 저쪽에서 온다고 합시다. 그러면 구슬이 탁 하고 서로 부딪칩니다. 피할 곳이 없어요. 이것이 1차원이에요.


그러나 2차원은 평면입니다. 그래서 x축과 y축이 있어요. x축의 제로에도 y축으로는 0 콤마 1, 0 콤마 2, 0 콤마 3, 0 콤마 4, 이렇게 y축이 있습니다. 또 밑으로도 0 콤마 –1, 0 콤마 –2, 0 콤마 –3, 이런 식으로 y축이 있습니다. 평면은 표시를 어떻게 할까요? x 콤마 y, 이렇게 점의 위치를 두 숫자로 표시하죠. 우리가 서 있는 여기를 동경 몇 도, 북위 몇 도, 이렇게 표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때 1차원의 세계에 있는 사람은 두 개의 구슬 중에 하나가 없어지지 않는 한 서로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2차원의 세계에 있는 사람이 볼 때는 아무 문제가 아니에요. 다른 하나의 구슬을 y축으로 옮겨 놓으면 충돌을 피할 수가 있습니다. 2차원에서는 ‘옆으로 갔네’ 하고 느끼는데, 1차원에서는 순간적으로 앞에 있던 게 금방 없어졌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보이면 ‘다시 생겼네’ 이렇게 되는 거예요. 1차원에서는 생기고 사라지는 게 2차원에서는 그냥 이동에 불과한 것입니다.

3차원은 x축, y축, z축이 있습니다. 즉, 가로, 세로, 높이가 있는 세계입니다. 2차원에서는 건물을 1층밖에 지을 수가 없지만, 3차원에서는 같은 면적에 높이로 올라가면서 1층도 짓고, 2층도 짓고, 3층도 짓고, 4층도 지을 수 있습니다. x축 y축은 같은데 z축이 점점 달라지는 것입니다. 비유를 들어서 말하면 개미는 2차원의 세계에 살기 때문에 높이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그래서 평면에 울타리를 쳐 놓으면 개미는 넘어갈 수가 없죠. 그런데 그 개미를 사람이 손으로 잡아 약간 위로 올리면, 평면의 눈을 가진 사람은 ‘없어져 버렸네’라고 생각할 겁니다.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고 생각하다가 막상 다시 내려오면 ‘개미가 나타났다’라고 말하며 귀신같다고 생각할 거예요. 이처럼 2차원에서는 생기고 사라지는 것이 3차원에서는 그냥 이동에 불과한 것이 됩니다.

4차원은 어떨까요? 4차원은 가로 세로 높이인 xyz에 시간 축인 t가 추가됩니다. 방 안에 내가 갇혀 있으면 3차원에서는 방 안에 벽을 뚫어야만 나갈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4차원에서는 시간 축으로 이동을 하면 됩니다. 4차원에서 보면 그냥 단순히 시간 축의 이동에 불과한데 3차원에서 보면 그냥 연기처럼 사라져 버려요. 그러다 갑자기 연기처럼 탁 나타나는 겁니다. 3차원에서 볼 때는 ‘사람이 사라졌다가 나타났다’ 이렇게 생각하지만, 4차원에 볼 때는 사람이 시간 이동을 한 거예요.

실제의 세계는 4차원의 세계입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4차원의 세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빛의 속도만큼 빨리 가는 로켓이 있다고 가정하면, 그 로켓 안에서의 시간은 점점 제로에 가깝다는 것이 특수상대성 이론이죠. 이런 것처럼 차원에 따라서 달리 보입니다. 1차원적 사고를 가진 사람은 2차원적 사고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고, 2차원적 사고를 가진 사람은 3차원적 사고를 가진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고, 3차원적 사고를 가진 사람은 4차원적 사고를 가진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거예요. 장벽을 무너뜨리지 않는 한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이 탁발을 나갔는데 어느 바라문이 ‘왜 육신도 멀쩡한데 일을 해서 밥을 먹지, 얻어먹느냐?’ 하며 욕을 했어요. 3차원에서는 상대가 나한테 욕을 하면 ‘쟤가 나한테 욕을 했어. 나쁜 놈이야’ 하며 화를 내는 식으로 대응을 할 수밖에 없는데, 부처님은 욕하는 바라문에 대해서 참는 게 아니라 4차원적으로 대응을 했습니다. ‘그 바라문의 수준에서는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고 이해를 한 거죠. 그 차원에서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다고 이해하니까 부처님께서는 빙긋이 웃었습니다.

부처님이 빙긋이 웃으니까 바라문이 또 ‘왜 웃냐?’ 하고 화를 냈습니다. 욕을 들으면 대응을 해야 하는 게 3차원의 세계인데, 부처님은 욕을 듣고도 웃으니까 바라문은 부처님이 자신을 비웃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이 바라문에게 물었어요.

‘당신 집에 손님이 가끔 옵니까?’
‘네’

‘선물을 가지고 옵니까?’
‘네’

‘손님이 가져온 선물을 안 받으면 그 선물은 누구 거예요?’
‘가져온 사람 거죠’

이 정도면 알아들어야 하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고 ‘그건 왜 물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조금 전에 당신이 저한테 욕을 선물했는데 제가 웃으면서 안 받으면 그 욕이 누구의 것인가요?’

바라문은 이제야 말귀를 알아듣고 3차원에 갇혀 있던 자기 생각이 탁 무너지게 됩니다. 우리가 인지하는 것이 실제의 세계와 항상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바로 불생불멸의 뜻입니다.

불구부정(不垢不淨)
둘째, 실제의 세계에서는 더러운 것도 없고 깨끗한 것도 없습니다. 이것을 불구부정(不垢不淨)이라고 해요.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는 더러운 것도 있고 깨끗한 것도 있잖아요. 푸세식 화장실에 가보면 더럽죠. 더러운 곳에서 바글바글 사는 구더기가 불쌍해서 채로 건져서 깨끗이 씻은 후 하얀 그릇에 담아놓으면 어떨까요? 우리가 보기에는 깨끗해서 보기 좋잖아요. 그런데 구더기는 다 튀어나와서 다시 똥통으로 들어갑니다. 그것이 그들의 세계예요.


마약을 하는 사람은 마약이 몸을 병들게 해도 마약에 집착되어 있죠. 여러분도 마찬가지예요. 욕망에 집착하는 것이 자신을 병들게 하고 자신을 괴롭히는데도 그 세계에서 기쁨을 느끼고 즐거움을 느끼잖아요. 엄마가 볼 때는 지금 게임에 빠진 아이들이 문제이지만, 아이들은 그 속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거예요.

불구부정(不垢不淨)이란 사실은 청결하고 불결하다고 말할 때의 위생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정확한 의미는 신성한 것도 없고 천한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신분적으로 브라만은 신성하고, 천민은 천하다고 여겼습니다. 모든 사람이 천민 가까이 가면 부정 탄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브라만이라고 성스럽다 할 것도 없고, 불가촉천민이라고 부정하다 할 것도 없다’

참 굉장한 얘기죠. 당시에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남자는 성스럽고 여자는 부정하다고 생각하는 문화도 있잖아요. 가게 첫 손님으로 여자가 오면 재수 없다고 한다거나, 인삼밭에 여자가 오면 재수 없다고 하거나, 배가 출항할 때 여자가 타면 재수 없다고 하거나, 이런 말들은 모두 남자는 성스럽고 여자는 부정한 존재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성스러움도 없고 부정함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생긴 모양이 다를 뿐이지 남자라고 해서 우월하다 할 것이 없고, 여자라고 해서 열등하다고 할 것이 없다는 겁니다.

부증불감(不增不減)
셋째, 실제의 세계는 늘어나는 것도 없고 줄어드는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재산이 늘어났다’, ‘재산이 줄어들었다’, ‘몸무게가 늘어났다’, ‘몸무게가 줄어들었다’ 이런 말들을 늘 사용하는데, 왜 늘어나는 게 없고 줄어드는 게 없다고 할까요?

저울대를 놓고 왼쪽에 2kg 저울추를 두고, 오른쪽에 큰 바구니를 뒀어요. 큰 바구니 안에는 작은 바구니 2개를 넣어 두고, 이쪽 바구니에는 사과 5개를 넣고, 저쪽 바구니에는 배 5개를 넣어 두었다고 합시다. 이쪽 바구니에 있는 배를 하나 집어서 저쪽 바구니에 집어넣으면, 배 바구니는 하나가 줄고, 사과 바구니는 하나가 늘었죠. 그런데 저울추는 안 움직입니다. 2개의 작은 바구니 사이에서는 늘었다 줄었다 하지만 큰 바구니 안에는 사과 5개와 배 5개가 그대로 있잖아요. 좁게 보느냐, 넓게 보느냐, 짧게 보느냐, 길게 보느냐,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인식이 다르게 일어납니다.

비행기에서 기내식을 먹으면 몸무게가 늘어납니다. 그때 비행기가 무거워졌을까요? 탑승객이 먹을 음식물이 가득 실린 비행기에서 그 음식물을 다 나눠줘서 싹 없어졌다고 해서 비행기가 가벼워질까요? 개개인으로 보면 늘었다 줄었다 하지만, 비행기 전체로 보면 늘어난 것도 없고 줄어든 것도 없습니다.

부모와 두 명의 자식들이 명절에 카드놀이를 하면서 돈내기를 했다고 합시다. 아빠가 좀 따고, 엄마가 좀 잃고, 큰 애가 좀 따고, 작은 애가 좀 잃었어요. 그러면 애들은 싸웁니다. 돈을 잃었다고 화내고, 돈을 땄다고 좋아해요. 자기 돈 가져간 것 좀 달라고 하고, 자기가 땄는데 왜 돌려줘야 하냐면서 막 울고 싸우면, 엄마가 이렇게 말합니다.

‘애들아, 그만 싸워라. 그 돈이 그 돈이잖니? 그게 어디 간 것도 아니고, 그 자리에 있는데 싸우기는 왜 싸워’

엄마는 집안 전체를 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 거예요. 자식들은 자기만 보니까 절대로 그 돈이 그 돈이 아닌 거죠. 이런 경험은 종종 생활 속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그 돈이 그 돈인 줄 아는 사람은 그 일로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너의 것과 나의 것이 따로 있는 사람은 땄느니 잃었느니 하면서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자신만 보거나 자기 가족만 보거나 자기 지역만 보거나 자기 나라만 보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을 하나로 봅니다. 만약에 한국과 일본이 싸웠다고 가정해봅시다. 우리는 부처님께 한국이 이기게 해달라고 빕니다. 그 말은 일본 사람들이 많이 죽게 해 달라는 거잖아요. 일본 사람들도 자기 나라가 이기게 해달라고 부처님께 빌어요. 그것은 한국 사람들이 많이 죽게 해 달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부처님이 이 사람 말 듣고 저 사람 죽이고, 저 사람 말 듣고 이 사람 죽이고, 이런 일을 하는 존재일까요? 이런 신앙이 어떻게 진리겠어요?

그러니 여러분들이 눈을 조금 크게 떠야 합니다. 작게 보면 이기고 지는 것이 있지만, 크게 보면 이기고 지는 개념이 없어집니다. 늘어나고 줄어드는 게 없는 줄 알아야 해요. 본질의 세계에서는 부증불감이 진실입니다.

오늘 강의는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세 가지를 공부했습니다. 진리의 세계에는 세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에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이것을 ‘불일불이’라고 합니다. 이 세계는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정지한 것도 아닙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이것을 ‘무시무종’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창조론이 나오고 종말론이 나오는 거예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줄 알면 창조도 없고 종말도 없어요. 변화만 있지요.”

“부처님께서는 ‘일체(一切)는 오온(五蘊)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체라고 하는 것, 혹은 나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단독자가 아니고, 다섯 가지의 쌓임에 불과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즉, 나라고 할 실체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대승불교가 출현할 당시에는 기존의 불교가 오온을 구성하는 각각을 실체(實體)가 있는 요소라고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에서는 그런 요소설과 실체설을 부정하는 내용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나’라고 작용하는 정신작용을 한 번 보세요. 눈으로 보고 안다, 귀로 듣고 안다, 코로 냄새 맡고 안다, 입으로 맛을 보고 안다, 손으로 감촉하고 안다, 머리로 생각해서 안다, 이렇게 외부에 무언가 대상이 있고, 그 대상을 내가 아는 것이 ‘색(色)’이에요. 그 대상을 알 때 어떤 떨림이나 느낌이 일어나는데, 그것이 ‘수(受)’입니다. 느낌은 아는 작용하고 달라요. 느낌은 불쾌하다, 유쾌하다, 즐겁다, 괴롭다 하듯이 어떤 떨림 같은 감정입니다. 아는 것이나 감정을 기억했다가 다시 생각해내고 질서를 잡고 논리를 따지고 추론을 하는 작용이 ‘상(想)’입니다. 그 생각에 따라서 ‘하고 싶다’, ‘하기 싫다’, ‘해야 된다’, ‘안 해야 된다’ 이렇게 행위를 유발하는 의지 작용이 일어나는데, 그것이 ‘행(行)’입니다.


아는 작용(색), 느낌 작용(수), 생각 작용(상), 의지 작용(행)이 일어나면, 이것이 그냥 사라지는 게 아니고 쌓이게 되는데, 그것이 ‘식(識)’입니다. 식은 다시 우리가 어떤 것을 볼 때 선입관으로 작용을 해요. 사물을 볼 때 그냥 기계적으로 보는 게 아니고 식이 영향을 끼쳐요. 기분이 좋고 나쁜 데에도 식이 영향을 끼치고요.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식이 오온의 맨 끝에 오지만, 어쩌면 식이 오온의 맨 앞에 올 수도 있습니다. 식은 마음작용의 바탕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색수상행식 다섯 가지 정신작용을 뭉뚱그려서 그냥 ‘나’라고 부르고 마치 하나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분류해보면 다섯 가지입니다. 이 다섯 가지에는 실체가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바깥 대상에도, 들리는 소리에도, 냄새에도, 맛에도, 감촉이나 생각에도 실체가 없고 늘 변합니다. 색에 따라 일어나는 느낌도 늘 그때그때 달라지고, 생각도 달라집니다. 하고 싶고, 하기 싫고, 해야 되고, 하지 말아야 되고, 이런 의지도 항상하지 않고 늘 바뀝니다. 식도 고정 불변하는 것이 아니고 늘 형성되고 바뀌는 겁니다. 그 어디에도 고정된 실체는 없습니다.

여기서 ‘무(無)’는 ‘고정 불변하는 요소는 없다’, ‘실체가 없다’ 이런 뜻입니다. 제법이 공하다는 차원에서 보면(시고 공중, 是故 空中), 색이라는 실체도 없고(무색, 無色), 수상행식이라고 하는 실체도 없습니다(무수상행식, 無受想行識). 이렇게 반야심경에서는 오온의 실체설을 부정하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소승불교 교리에서 굉장히 중요한 것 중 하나가 12처설입니다. 12처는 인식 기관과 인식 대상인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을 말합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감촉하고, 머리로 생각하는 작용이 일어나는데, 우리가 안다는 것은 이게 전부입니다. 안다는 게 별 거 아니에요. 앎이란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육근과 육경이 만나서 형성되어진 것이라는 것이 12처설입니다.

그런데 당시 소승 불교인들은 12처설을 또다시 요소설로 이해한 거예요. 색이란 실체가 있고, 성향미촉법, 안이비설신의 역시 각각 다 실체가 있는 걸로 생각한 겁니다. 세상 속에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생각이 ‘실체가 있다’ 하는 쪽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는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지만 밖에 나가 하늘을 처다 보면 해가 뜨고 해가 지니까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문장은 12처 앞에 무(無) 자가 각각 다 붙어 있는 것인데, 무(無) 자가 모두에게 적용된다고 보시면 됩니다. 12처설의 요소화, 실체화를 비판하는 내용입니다.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이 문장은 18계설의 요소화, 실체화를 부정하는 내용입니다. 일체가 12처라면, 같은 것을 눈으로 보고, 같은 것을 귀로 들을 때, 모든 사람이 똑같이 알아야 되겠죠. 그런데 제가 지금 강의를 하는 중에도 여러분들이 똑같은 목소리를 듣고 똑같은 모습을 보지만 여러분들 각자 받아들이는 게 다르잖아요. 이것은 12처설로는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법륜스님 얘기를 듣고 알았고, 법륜스님 모습을 보고 알았다. 아는 게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이렇게 인식 기관과 인식대상이 만나서 아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12처설로 설명이 됩니다. 그러나 왜 사람마다 아는 것이 다른지는 12처설로 설명이 안 돼요.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면 결과가 똑같이 나오는 것 같지만, 흑백으로 찍는지, 칼라로 찍는지, 카메라 성능이 어떠한지에 따라 사진이 다르게 나오잖아요. 그렇듯이 사람마다 각각 인식을 할 때 그 바탕이 되는 ‘식’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다르게 알게 됩니다. 그걸 업식이라고 해요. 볼 때도 업식이 작용하고, 들을 때도 업식이 작용하고, 냄새 맡을 때도 업식이 작용합니다. 똑같이 된장찌개 냄새를 맡아도 업식에 따라 어떤 사람은 구수하게 느끼고, 어떤 사람은 역겹게 느끼게 됩니다.

냄새에 객관적인 실체가 있다면, 모든 사람이 똑같이 느껴야겠죠. 이렇게 다르게 느끼는 이유는 코에 문제가 있어서도 아니고, 된장에 문제가 있어서도 아닙니다. 사람마다 각각 업식이 다르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업식 역시 형성된 것입니다. 업식은 볼 때도 작용하고, 들을 때도, 냄새 맡을 때도, 맛볼 때도, 감촉할 때도, 생각할 때도 작용합니다. 그래서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 이렇게 여섯 가지로 말합니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와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여기에 더해서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까지 이렇게 18가지가 일체라고 보는 것이 18계설입니다. 오온설은 약간 주관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면, 12처설은 약간 객관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양쪽을 보완해서 나온 것이 18계설이에요.

대승불교가 일어날 당시 기존 불교는 18계설을 18가지 요소설로 이해했습니다. 요소설은 각각이 실체가 있는 근본 종자라는 생각입니다. 그런 실체가 있지 않다고 주장한 것이 대승불교입니다. 18계를 다 나열하지 않고, 첫 번째와 마지막 것만 쓰고 나머지는 생략해서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眼界 乃至 無意識界)’ 이렇게 썼습니다.

소승불교에서는 ‘일체는 오온이다’, ‘일체는 12처다’, ‘일체는 18계다’ 이렇게 얘기하는데, 반야심경에서는 각각을 요소화하는 것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숯을 태우면 탄소와 산소가 만나서 이산화탄소가 나옵니다. 이런 화학변화에서는 질량 불변의 법칙, 배수 비례의 법칙, 일정 성분비의 법칙이 성립합니다. 여기에는 원자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불변의 존재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돌턴의 원자설입니다. 원자가 만물의 근원이라고 생각한 거죠. 근대 과학에서 만물은 92개의 원자로 되어 있다고 생각했던 것도 모두 요소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소승불교에서 일체를 5요소설, 12요소설, 18요소설로 이해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현대 과학에 와서 소립자와 쿼크가 발견되면서 이런 요소설이 부정됩니다. 소승불교가 오온, 12처, 18계를 변하지 않는 요소로 이해한 것을 대승불교가 부정한 것처럼요.


부처님은 요소설을 부정했는데, 불멸 후 브라만교와 우파니샤드 철학의 영향으로 어느덧 실체가 있다고 다시 생각하게 된 거죠. 요소설을 부정하기 위해 설명한 오온설, 12처설, 18계설이 다시 요소설로 받아들여지게 된 거예요. 당시 사람들에게는 요소설이 정통 불교였어요. 부처님의 말씀을 그대로 외우고 학습을 했지만, 진리라는 법상을 지어버린 거죠. 이렇게 당시 불교가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반야심경은 어디가 잘못됐는지 하나하나 지적하고 있는 겁니다.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이 부분은 12연기를 요소설로 이해하는 것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12연기의 첫 번째가 무명이죠. 그다음에 행, 식, 명색, 육입, 촉, 수, 애, 취, 유, 생, 노사, 이렇게 12가지 연관 고리를 설명한 것이 12연기입니다. 무명부터 노사까지 12연기 각각에 실체가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명이라 할 것이 없다. 이름하여 무명이지, 무명이라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모르면 어리석다고 말하는 것이지 별도로 어리석음이라는 실체는 없다는 뜻입니다. 무명의 실체가 없으니까, 또한 무명을 없앤다 할 것도 없다는 의미예요. 굉장한 얘기입니다. 그다음에 ‘내지’라고 적고 12연기의 중간 10개를 생략한 후 ‘노사’가 나옵니다.

‘노사라고 하는 실체도 없다. 그러니 노사를 멸한다고 할 것도 없다.’

무고집멸도
無苦集滅道

불교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것이 사성제입니다. 사성제를 오롯이 아는 것이 곧 지혜라고까지 강조합니다. 그런데 반야심경에서는 사성제도 부정합니다. 왜 사성제를 부정할까요? 사성제를 일종의 요소설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고(苦), 이것이 괴로움이다.
집(集), 이것은 괴로움의 원인이다.
멸(滅),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
도(道),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방법이다.

반야의 세계에서는 괴로움이 없습니다. 그래서 괴로움의 실체도 없어요. 여러분이 밤에 자다가 강도에게 쫓기는 꿈을 꾸었다고 합시다. 꿈속에서는 괴로움이 있습니다. 괴로움의 원인은 강도입니다.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강도를 피해야겠죠. 그래서 관세음보살님께 도움을 요청했더니 관세음보살님이 도와주셔서 살았어요. ‘아이고, 관세음보살님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를 하는데, 눈을 딱 뜨니까 꿈이에요. 그럼 눈 뜬 소식은 어떻게 설명해야 되나요?


애초에 괴로움이라고 할 것이 없었고, 강도도 없었어요. 눈을 번쩍 뜨고 깨면 관세음보살도 없고, 관세음보살에게 구원받을 일도 없는 거예요. 이게 대승 불교의 관점입니다. 괴로움이 있고, 괴로움을 없애고,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은 아직 눈 감은 소식에 불과해요. 잠이 덜 깬 소식입니다.

‘눈을 번쩍 떠버리면 본래 괴로울 것이 없다. 그래서 괴로움을 없앨 것도 없다’

무고집멸도(無苦集滅道)는 바로 이런 뜻입니다. 이 문장도 각 단어마다 ‘무(無)’자가 생략된 겁니다.

무고(無苦), 괴로움이라 할 것이 없으므로
무집(無集), 괴로움의 원인이라 할 것도 없고
무멸(無滅), 괴로움의 소멸이라 할 것도 없고
무도(無道), 괴로움을 없애는 길에 이른다는 것도 없다.

이어서 깨달음의 실체를 부정합니다.

무지 역 무득
無智 亦 無得

여기서 ‘무지(無智)’는 ‘깨달음이라고 할 것이 없다’ 하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깨달음이라는 실체가 있다고 또 생각합니다. 그래서 ‘깨달아야지!’ 결심하고 평생을 거기에 묶여서 살기도 합니다. ‘깨달음’이라는 상을 짓고 매달리고 있는 겁니다. ‘신이 있다’ 하는 것처럼 깨달음이라는 실체를 상정하고 평생을 거기에 매달려서 인생을 살아가는 거죠.

‘무득’은 ‘얻음도 없다’라는 뜻인데 깨달음을 얻음도 없다는 의미입니다. 깨달음이라고 할 것이 없으니까 당연히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 것도 없죠.

이것은 모두 진리를 절대화시키는 바람에 중도와 연기에서 벗어난 것을 비판했다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반야심경은 이렇게 당시 소승불교의 문제점을 공의 차원에서 낱낱이 비판한 후 이어서 대승불교의 위대함을 강조합니다. 그 부분은 다음 시간에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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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세계의 현상, 성주괴공

부처님께서는 이 우주가 이루어지고, 머무르고, 붕괴되고, 사라진다고 하셨습니다. 우주도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눈에 안 보이고 없는 무()에서, 어떤 존재가 인연을 따라 모여 형성되고(), 그것이 일정한 형태를 유지하고(), 그러다가 붕괴하고(), 결국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이것을 한문으로 성주괴공(成住壞空)’이라고 그래요.

 

작다고 할 수도 없고, 크다고 할 수도 없다

오늘날 밤하늘에 보이는 수많은 별들은 금성, 목성처럼 지구 가까이에 있는 행성(行星) 몇 개를 빼고는 대부분이 스스로 빛을 발하는 항성(恒星)입니다. 그러나 지구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서 별로 보입니다. 행성인 달과 수성, 금성, 화성, 목성 정도는 지구 가까이에 있기 때문에 밤에 맨 눈으로 볼 수 있지만, 나머지는 망원경을 통하지 않으면 거의 안 보입니다.

 

지구와 태양의 거리는 빛의 속도로 8분이 걸리는 거리입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태양빛은 8분 전에 출발한 거예요. 밤하늘에 보이는 별들은 제일 가까운 것이 4광년 떨어져 있습니다. 빛의 속도로 4년을 가야 하는 거리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은하계의 크기는 지름이 10만 광년입니다. 빛의 속도로 10만 년을 가는 거리죠. 이 은하계 안에 태양계 같은 것이 약 1천 억 개가 있습니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수죠. 그런데 이런 은하계가 우주의 전부가 아닙니다. 망원경으로 밤하늘을 보면 뿌옇게 보이는 은하계의 별들을 볼 수 있는데, 이런 은하계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제가 학교 다닐 때는 교과서에 1천 억 개가 있다고 나왔는데, 요즘은 망원경이 더 좋다 보니까 그 열 배인 1조 개나 된다고 합니다. 시간이 더 지나면 더 발견될 수도 있겠죠. 은하계를 소우주라고 하는데, 대우주에는 이런 소우주가 1조 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우리가 사는 태양계를 세계라고 한다면, 이런 세계가 천 개 모여서 소천 세계를 이루고, 소천 세계 천 개가 모여서 중천 세계를 이루고, 중천 세계 천 개가 모여서 대천 세계를 이룹니다. 이걸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라고 합니다. 금강경에는 이런 삼천대천세계가 갠지스 강의 모래알 수만큼 많고, 갠지스 강의 모래알 수만큼 많은 갠지스 강이 있고, 그 모든 갠지스강의 모래알 수만큼 많은 삼천대천세계가 있다고도 표현합니다. 옛날 인도 사람들이 과학적 사실을 모르고 허풍으로 한 얘기라 하더라도, 실제로 오늘날 발견된 우주는 그 허풍보다도 더 큽니다.

 

대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소우주는 티끌 같은 존재이고, 소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태양계는 티끌 같은 존재이고, 태양계에서 보면 지구는 티끌 같은 존재이고, 지구에서 보면 나는 티끌 같은 존재예요. 그러니 우주의 크기를 생각하면 나라는 존재는 정말 티끌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또 원자의 입장에서 보면 나는 어마어마하게 큰 우주예요. 그 작은 원자도 소립자의 관점에서 보면 어마어마하게 큰 우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존재는 작다고 할 수도 없고, 크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짧다고 할 수도 없고, 길다고 할 수도 없다

별이 하나 형성되고 사라지는 데 걸리는 시간은 현재 태양을 기준으로 백억 년 정도라고 해요. 지구가 생긴 지 지금까지 46억 년이 지났다고 하는데, 46억 년의 세월에 비하면 만 년은 아주 짧은 시간이고, 인간이 사는 백 년은 시간 축에도 안 들어갑니다. 인류 역사가 긴 것 같지만, 우주적 시간에서 보면 인간이 이 세상에 출현한 것 자체가 그냥 반짝하는 순간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원자핵 속에 마이너스 전기를 띈 파이 중간자가 중성자에서 튀어나와서 양성자로 옮겨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10의 마이너스 23승 초라고 그래요. 그 시간에 비하면 1초는 우주적 시간입니다.

 

시간도 어디에 기준을 두느냐에 따라서, 원자적 시간에 비하면 인간은 영원히 산다고 할 수도 있고, 우주적 시간에 비하면 밤하늘에 불꽃놀이보다 더 짧은 찰나의 인생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짧다고 할 수도 없고, 길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우주의 성간물질이 모여 지금의 태양 같은 주계열성(主系列星, Main sequence)이 되고, 주계열성이 나중에 팽창해서 거성(巨星, Giant star)이 되고, 거성이 폭발하면 백색왜성(白色矮星, white dwarf)으로 돌아갑니다. 이렇게 별이 생성되었다가 소멸하는 것을 일컬어 별의 진화라고 하는데, HR(Hertzsprung-Russell diagram)도를 보면 그 과정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것도 다 성주괴공을 똑같이 보여주는 현상이에요.

 

생명세계의 현상, 생로병사(生老病死)

우리 생명은 어떨까요? 유전자에 들어 있는 설계도에 따라서 물질이 세포를 구성하고, 그 세포가 모여서 만들어진 것이 다세포 생물입니다. 세포는 계속 교체가 되기 때문에 6개월만 지나면 우리 몸을 구성하는 모든 물질이 다 바뀝니다. 그러니까 물질적으로 보면 6개월 전과 지금은 다른 사람입니다. 모양이 같을 뿐이지 부속을 계속 갈아 넣게 되는 거예요.

 

자동차 두 대를 놓고, 이 차는 내 차, 저 차는 네 차라고 합시다. 계속 양 쪽 부속을 서로 바꾸면 어떻게 될까요? 오늘은 문짝을 하나 바꾸고, 내일은 바퀴를 하나 바꾸는 식으로요. 자동차 부품이 2만 개 정도 된다고 하는데, 하루에 천 개씩 바꾼다면 모든 부품을 서로 교환하는데 20일 정도 걸리겠죠. 20일이 지나서 모든 부품을 교환했다면, 저 차가 내 차고 이 차는 남의 차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계속 이 차가 내 차라고 생각하죠. 우리들의 인식이 그렇다는 거예요. 그러나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

 

 

우리 몸도 세포 차원에서 보면 계속 끊임없이 변하고 있지만, 외형을 보면 그 형태를 유지하니까 오늘도 내일도 그대로 존재하는 것처럼 인식될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점점 늙고 병들고 죽어갑니다. 이건 모든 생물의 현상입니다. 모든 생물은 태어나고 늙고 병들어 죽습니다. 이것을 생로병사 한다고 해요.

 

정신세계의 현상, 생주이멸(生住異滅)

우리들의 정신은 어때요? 한 마음이 일어나고 머무르고 흩어지고 사라지고, 한 생각이 일어나고 머무르고 흩어지고 사라집니다. 그것이 정신이든, 생명이든, 물질이든,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지형도 항상 하지 않고 변화합니다. 원지형(原地形)에서 유년기, 장년기, 노년기를 거쳐 준평원이 되고, 다시 또 융기해서 새로운 원지형이 되어 변화를 시작하게 됩니다. 이걸 데이비스의 지형윤회설이라고 하죠.

 

암석도 마찬가지예요. 화산 폭발로 분출한 마그마가 굳어서 암석이 되거나, 흙이나 모래가 굳어서 암석이 되는데, 그것이 깨지면 바위가 됩니다. 바위가 깨지면 자갈이 되고, 자갈이 깨지면 모래가 되고, 모래가 깨지면 흙이 됩니다. 그것이 다시 녹으면 마그마가 되고, 마그마가 굳으면 암석이 됩니다. 마그마가 분출해서 화성암이 되고, 또는 모래나 흙이 굳어서 퇴적암이 되고, 열과 강한 압력을 받아 물리적 혹은 화학적 변화를 겪으면 변성암이 됩니다.

 

제행무상, 영원한 것은 없다

그래서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저 태양도 산도 바다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판게아(Pangaea)가 남반구에 곤드와나(Gondwana) 대륙과 북반구의 로라시아(Laurasia) 대륙으로 갈라졌고, 그 사이에 테티스 해(tethys ocean)라는 바다가 있었는데, 오랜 시간 동안 바다에 흙이 쌓이고, 그것이 습곡 작용으로 솟은 것이 지금의 알프스 히말라야 조산대입니다. 그래서 이 지역에 계속 지진이 나고 화산 폭발이 일어나는 거예요. 히말라야 산 꼭대기에서 조개껍데기가 발견되고요.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꾸 영원하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를 알아야 됩니다. 그래야 잘난 척 하지만 별 거 아닌 줄 알고, 영원히 살 것 같지만 금방 죽는 줄도 알게 됩니다. 좋은 거 입고 좋은 거 먹는 것이 좋은 일 같지만, 그것이 남의 것을 뺏어 먹고 지구 환경을 파괴하는 겁니다. 어떻게 남의 것을 뺏어 먹고 지구환경을 파괴하는 것을 부러워합니까? 그게 뭐가 좋다고 부러워해요? 남의 살코기를 베어서 구워 먹고 씹어 먹는 것이 뭐가 좋다고 그걸 부러워하며 사나요? 조금만 이런 이치를 알면 우리가 인생을 이렇게 어리석게 살 수가 없는 거예요.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느냐

화를 어떻게 참아야 되느냐

어떻게 기도해야 하느냐

어떻게 믿어야 되느냐

 

이렇게 묻는 것은 다 진실을 모르니까 눈을 감고 하는 소리예요. 눈을 감고 어디로 가야 됩니까?’, ‘뭘 어디에서 찾아야 됩니까?’ 이렇게 묻는 것과 같습니다. 눈을 뜨면 한눈에 그냥 다 보여요.

 

제법무아(諸法無我), 고정된 실체는 없다

불교의 핵심 가르침인 무상과 무아 중에 무상(無常, 아니짜)은 그래도 이해하기 쉽습니다. 계절의 변화 등 일상에서 경험하는 것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왜 무아(無我, 아나뜨)인지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변하는 중에도 그 안에 변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지 않느냐하는 생각을 못 버리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나고 늙고 병들어 죽어도 영혼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것은 윤회하지 않느냐?’

 

이런 생각을 못 버리니까 윤회관이 나오는 거예요. 영혼이 지옥에 갔다가 아귀도에 갔다가 인간계에 갔다가 천상계에 갔다가 이렇게 윤회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뭔가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변하지 않는 실체는 하나님이 만들었다는 생각, 죽어서 영혼이 천당에 간다는 등의 생각, 이런 생각들은 다 유아(有我)적 견해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불교든 기독교든 무슬림이든, 인도의 어떤 사상이든, 모든 종교와 철학이 내가 있다는 아트만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의 99.9퍼센트는 아트만에 근거를 둔 인식과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고 말했고, 현대 과학에 와서 상대성 이론이나 양자역학까지 밝혀졌지만, 이런 것들이 이해가 안 되니까 무아마저도 그냥 아트만으로 이해하는 거예요.

 

부처님께서는 ()라고 할 것이 없다’, ‘나라는 것은 다섯 가지 쌓임(오온, 五蘊)에 불과하다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 아트만적 견해로 돌아가서 그 다섯 가지는 불변하는 요소다이렇게 이해하는 거죠. 부처님의 말씀을 그대로 외우고 설명하고 따라 하지만, 철학적 기반은 뒤바뀌어 버린 거예요. 무아가 아니라 유아로 가버렸어요. ‘불성이 있다’, ‘불성을 찾아라’, ‘불성을 깨달아라이렇게 얘기하면 벌써 아트만론()에 빠져 버립니다.

 

누구나 괴로움이 없는 경지에 이를 수 있다. 부처가 될 수 있다.’

 

이런 부처님의 가르침을 불성이 있다이렇게 설명하면, 다시 불성을 찾는다하는 식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이렇게 이해하다 보니까 사람들은 어딘가에 참나라고 하는 변하지 않는 불성이 있는 줄 알아요. 역사적으로도 끊임없이 유아적, 아트만적 개념을 갖고 무아를 이해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니까요.

 

그런 과정을 거쳐 본래 부처님 가르침의 의미가 바뀌게 되는 거예요. 세상이 신분 제도를 두면 불교도 거기에 맞추려고 하다 보니까, ‘전생에 복을 많이 지으면 양반이 되고, 죄를 지으면 상놈이 된다이렇게 얘기하고, 세상이 가부장적 제도를 두면 복을 지으면 남자가 되고 죄를 지으면 여자가 된다이렇게 얘기하게 된 겁니다. 이것은 불교의 가르침이 아니라 봉건 질서에 부합하는 논리로 바뀌어버린 겁니다. 그래서 법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무상하고 무아이기 때문에 공하다

사람의 눈으로 우주를 보면 공이에요. 허공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눈으로 지구를 보면 색이에요. 꽉 찼어요. 그렇듯이 우주의 눈으로 우주를 보면 꽉 찼겠죠. 우주의 눈으로 우주를 본다면 색이에요. 그런데 원자의 눈으로 지구를 보면 공입니다. 텅텅 비었어요. 원자의 눈으로 원자를 보면 색입니다. 소립자의 눈으로 원자를 보면 공이에요. 그러니 색이라는 것과 공이라는 것은 결국 같은 거예요. 그래서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존재는 똑같은데, 멀리서 보면 색이고, 가까이 가서 보면 공입니다.

 

이렇게 오늘 강의에서는 모든 존재가 공하다는 것을 다시 정신현상, 생명현상, 물질 현상의 3가지 차원에서 설명했어요. 물론 반야심경은 물질 현상이나 생명현상을 갖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정신현상을 설명한 것입니다.

 

내가 뭔가를 알 때, 눈으로 보고 알거나, 귀로 듣고,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감촉해서, 혹은 생각해서 압니다. 이게 색이에요. 색은 실체가 없고 항상 함이 없습니다.

 

색이 일어날 때, 기분이 좋거나 기분이 나쁜 느낌이 일어납니다. 눈으로 볼 때, 냄새 맡을 때, 맛볼 때, 감촉할 때, 생각할 때 느낌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수()입니다. 색이 공하듯이 수도 또한 공()합니다.

 

아는 것(, )과 느낌(, )은 우리에게 기록되어 있고, 그것을 꺼내서 쓸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분류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상()이라고 합니다. 상도 실체가 없고 항상 하지 않고 변합니다. 공합니다.

 

이래야지’, ‘저래야지’, ‘이거 하고 싶다’, ‘저거 하고 싶다하는 의지 작용인 행()도 항상 하지 않고 실체가 없습니다. 담배를 하나 피우고 싶다는 욕구가 일어나면, 담배를 피워야 할 것 같지만, 가만히 있어보면 죽을 것 같다가도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담배 피우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가라앉습니다. 이것도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일 뿐이에요. 이 사실을 직시해야 거기에 끌려 들어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인지하는 것과 옳으니 그르니, 맞느니 틀리느니 하고 분별하는 식()도 다 실체가 없고 영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살아오면서 어제 옳았던 것이 오늘 그른 경우를 경험하죠. 조선 시대 옳았던 것이 지금 보면 그른 것이 있잖아요. 식도 변하는 겁니다. 항상 옳다고 할 어떤 실체도 없습니다.

 

 

이렇게 나라고 할 어떤 실체도 없다는 것을 소승불교에서는 무아라고 했고, 대승불교에서는 이라고 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사람들이 진리가 있다이렇게 주장하니까 부처님께서는 이것이 진리라는 실체가 없다라는 뜻으로 제법무아(諸法無我)라고 했습니다. 대승불교에서는 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제법개공(諸法皆空 )이라고 표현한 겁니다.

 

원래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에,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렇게 이해해야 된다

 

이렇게 주장하는 것이 반야심경이고, 대승불교의 주장입니다. 그래서 대승불교는 표현 양식으로 보면 새로운 불교이고, 내용으로 보면 원래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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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

오온이 공하다는 것을 비추어 보고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났다

 

반야심경의 핵심은 바로 이 문장입니다. 우리는 오온이 공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거예요. 왜 깨닫지 못했을까요? 반야바라밀다 수행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천적 측면에서는 육바라밀을 행하는 것이 중요하고, 사상적인 측면에서는 제법이 공한 줄을 깨닫는 게 중요합니다.

불교대학에서 일체는 오온이다하는 것을 배웠잖아요. 오온이란 존재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의 쌓임,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을 말합니다. 오온개공이란 오온이 모두 공하다는 뜻이에요. 일체가 오온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이 말은 일체가 공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일체개공(一切皆空)’ 또는 제법개공(諸法皆空)’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라고 할 수 있는 어떤 실체가 없는 이유

세상은 를 구분하죠. 그러나 부처님은 라고 할 수 있는 어떤 실체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자기 자신을 한 번 자세히 관찰해 보세요.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고, 생각하는 작용이 있습니다. 각 작용마다 기분이 좋고 기분이 나쁜 반응이 일어납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면 바로 인지하고 분별하는 작용도 있습니다. 이래야지 저래야지 하는 의지 작용도 있습니다. 과거를 떠올리며 이러쿵저러쿵 생각하는 작용도 있습니다. 이런 작용들이 그냥 있을 뿐이지 라고 할 실체가 따로 있는 건 아니에요.

자동차를 예로 들어볼게요. 자동차는 바퀴로 굴러가고, 소리도 나고, 불도 켤 수 있지만, 자동차라고 할 어떤 주체가 있는 건 아니잖아요.

물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물을 아무리 쪼개도 물이라는 성질이 계속 남아있을까요? 옛날에는 물이라고 하는 어떤 근본 요소가 있는 줄 알았습니다.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최소의 알갱이가 분자인데, 과학이 발전하면서 물 분자는 수소 원자와 산소 원자로 이루어져 있음이 밝혀졌습니다. 수소와 산소만 각각 놓고 보면 물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물이라고 할 실체가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수소 2개와 산소 1개가 105도의 각도로 결합하면 물이라는 물질이 되는 거예요.

물의 작용이 있을 뿐이지 그 속에 물의 본질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옛날에는 이것을 알 수 있는 방도가 없었지만, 오늘날 과학 문명의 발달로 물의 본질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예요. 그런데 물 분자를 이루고 있는 산소 원자와 수소 원자는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과학이 더 발달해서 수소에 핵 변화가 일어나면 수소가 헬륨이 되듯이 다른 원자로 바뀐다는 사실을 새로 발견합니다. 이렇게 과학이라는 학문이 발달하면서 물질의 작용은 있지만, 그것의 실체는 없다는 것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게 된 겁니다. 더 미시적인 세계로 들어가면 텅 비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작용은 있지만 실체는 없다

오온이 공하다하는 말은 작용은 있지만 실체는 없다는 뜻입니다. ‘라는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라고 할 실체는 없어요. 아이가 학교에 입학하면 인연을 따라서 학부모라고 불리는 것이지 학부모라고 할 정해진 실체가 없습니다.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면 인연을 따라서 엄마라고 불리는 거예요. 딸이 되면 인연을 따라서 딸이라고 불리는 겁니다. 결혼을 하면 인연을 따라서 아내라고 불리는 것이지, 아내라고 하는 실체가 있는 게 아니에요. 인연을 따라서 잠시 생겼다가 인연이 사라지면 그런 작용도 사라지는 거예요.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이를 두고 꿈같고 그림자 같고 신기루 같고 아침이슬 같고 번갯불 같다고 했습니다. 있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없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해가 잘 안 되죠. 현실에서는 늘 나라는 실체가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마치 원시인이 라디오에서 소리가 나오는 것을 들으면 그 안에서 작은 사람이 노래를 부른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원시인은 TV 화면을 보면 그 안에 작은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전원을 꺼버리면 모두 사라집니다.

그래서 오온개공은 그 당시 사람들의 인식 수준으로는 굉장한 얘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오온개공을 이해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결국 시간이 흐르면서 색수상행식의 각각은 변하지 않는 요소라고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부처님이 나라고 할 것이 없다라고 말씀하셨으니까 나라고 할 것은 없지만 나를 이루고 있는 다섯 가지는 실체가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무아는 인정하는데 무아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는 유아라고 이해한 겁니다. 이것은 마치 처음에는 물의 실체가 있다라고 생각하다가 물의 실체가 없다는 것까지 인정을 하게 되었는데, 물 분자를 이루는 산소 원자와 수소 원자는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과 같아요. 과학계에서도 이런 오류가 반복되었듯이 불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얼음이 녹아서 물이 되고, 물이 증발해서 수증기가 됩니다. 수증기는 기체이고, 물은 액체이고, 얼음은 고체잖아요. 이렇게 상태가 다르니까 어린아이가 볼 때는 서로 다른 물질인 줄 압니다. 그런데 조금만 관찰해보면 같은 물질이거든요. 이런 물리적인 변화에서는 모양이 어떻게 바뀌든 물 분자의 구성은 똑같아요. 그래서 물의 실체는 물 분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물이 분해되는 화학적인 변화에서는 어떻게 될까요? 물이 없어져 버립니다. 그러나 물 분자를 구성하는 수소 원자와 산소 원자는 그대로 있으니까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원자는 그 실체가 그대로 있는 것 아니냐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요소설입니다.

이런 화학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서 돌턴이 원자설을 주장합니다. 물질을 이루고 있는 기본 알갱이가 원자이며, 원자는 더 이상 쪼갤 수 없고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거죠. 이걸 전제로 해야 화학 변화가 설명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온 화학 변화의 3대 법칙이 일정 성분비의 법칙, 배수 비례의 법칙, 질량 불변의 법칙입니다. 여기에는 원자는 불변하고, 원자는 쪼개지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그런데 톰슨에 의해서 전자가 발견되고, 러더퍼드에 의해서 양성자가 발견되면서, 원자는 더 작은 소립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원자가 소립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은 원자도 변한다는 거죠. 그것이 바로 핵 변화입니다. 핵 변화가 일어나면 원자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질량 불변의 법칙이 성립하지 않고 질량 감소가 일어납니다. 그것이 핵에너지입니다. 아인슈타인의 에너지 공식 E=mc2(제곱)에 따르면, E는 에너지이고, m은 질량이고, c는 빛의 초속인데, 질량 감소에 의해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나오잖아요.

이렇게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물에는 본질이 없다는 것까지는 알았는데 그 물을 이루고 있는 원자는 불변하는 요소라고 생각했던 돌턴의 원자설 같은 것이 바로 소승불교라는 겁니다. 그 점을 지적하는 것이 반야심경이에요. ‘일체는 오온이다라는 가르침을 통해 라고 하는 것은 오온의 결합에 불과하다는 것까지는 받아들였는데, 오온의 각각은 불변하는 요소라고 이해한 것이 소승불교라는 겁니다. 부처님의 말씀과 논리를 다 받아들였는데 그 바탕에는 요소설이 깔려있는 겁니다.

오온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도 모두 실체가 없다

그래서 대승불교에서는 산소도 수소도 다 실체가 없다고 지적합니다. 그 표현이 바로 오온개공이에요. 오온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각각이 모두 실체가 없다는 겁니다. 그것을 증명하려면 우선 색이 무상하고 무아라는 것을 증명해야 합니다.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이 문장은 색이 무상하고 무아라는 것을 증명하는 문장입니다. 무상과 무아는 부처님의 법이잖아요. 그다음에 수, , , , 역시 무상하고 무아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다음 문장입니다.

 

수상행식 역부여시

受想行識 亦復如是

무상하다는 것은 변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얼음이 녹아서 물이 된다는 것은 얼음이 항상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어린아이는 얼음하고 물을 다르다고 봅니다. 세 살짜리 어린아이가 아주 단단한 얼음으로 만든 구슬 세 개를 가지고 놀다가 놔두고 밖에 나갔다가 한참 후에 들어와 보니까 물로 변해 있으면 이렇게 말하겠죠.

엄마, 내 구슬 없어졌어, 대신에 물이 생겼어.’

이것은 변화를 못 보기 때문입니다. 변화를 다 보는 엄마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말하죠.

얘야, 그것은 구슬이 사라진 것도 아니고, 물이 생긴 것도 아니야. 변했을 뿐이야.’

얼음이 변해서 물이 됐으니까 물과 얼음은 다르다고 말할 수가 없죠. 그렇다고 얼음과 물이 같다라고 말하기는 좀 곤란해요. 본질은 같지만 현상은 다르니까요. 그렇다고 얼음과 물이 다른 물체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그래서 불이’, 즉 얼음과 물은 다르지 않다고 표현하는 겁니다. 색불이공 공불이색에서 불이는 다르지 않다는 뜻입니다.

 

얼음이 변해서 물이 되니 얼음과 물은 다르지 않고, 물이 변해서 얼음이 되니 물 또한 얼음과 다르지 않다

AB가 같음을 증명하는 방법

왜 이렇게 문장을 뒤바꿔서 말할까요? 이것은 AB가 같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논증 방법입니다. AB가 같음을 증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A이면 B이고, B이면 A이다이것을 증명하면 됩니다.

‘A이면 B이다가 성립하면 AB가 되기 위한 충분조건이 되고, BA가 되기 위한 필요조건이 됩니다. 이 명제의 역인 ‘B이면 A이다역시 성립하면, 에 의해 AB가 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 되고, BA가 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 됩니다. 그러므로 AB는 같다는 것이 성립하게 되죠.

이렇게 색불이공 공불이색은 무상을 증명하는 논리입니다. 그다음은 색이 무아라는 것도 증명해야 하잖아요. 무상과 무아가 성립해야 연기법에 맞으니까요.

무아‘A 그대로 B이다이렇게 증명을 해야 합니다. 이것도 무상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방법과 논리가 똑같아요. A이면 B이다. 그 역이 성립한다. B이면 A이다. 그러므로 AB가 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고, ‘A=B’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쉽게 예를 들어볼게요. 바람을 불어넣은 고무풍선을 이 방 안에 계속 집어넣는다고 합시다. 100개 집어넣고, 500개 집어넣고, 1000개 집어넣고, 10000개 집어넣으면 언젠가 이 방 안에 고무풍선이 꽉 차겠죠. 그 모습을 보고 방 안이 꽉 찼다이렇게 말합니다. 꽉 차서 사람이 들어갈 수가 없어요. 그런데 또한 이 방 안은 텅 비었다고 말할 수 있죠. 고무풍선 표면을 중심으로 관찰하면 꽉 차 있다고 볼 수 있지만, 공기 분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 방 안은 텅텅 비어 있어요. 만약에 더 이상 밖에서 들어오거나 밖으로 나가는 것 없이 바늘로 고무풍선을 다 터뜨려 버리면 이 방 안에는 아무것도 없게 됩니다. ‘꽉 찼다하는 것과 텅 비었다하는 게 같은 거예요. 꽉 찼다는 것이 A라면, 텅 빈 것이 B라고 합시다. 그 역도 성립하기 때문에 ‘A=B’가 성립하는 것입니다.

아주 크고 동그란 쇳덩어리를 봅시다. 이런 쇳덩어리는 철 원자인 Fe가 수도 없이 결합해서 원자와 원자 사이에 빈 곳이 없어요. 원자와 원자 사이 또는 분자와 분자 사이에 빈 곳이 있으면 수증기처럼 기체가 되는 건데, 쇳덩어리는 다닥다닥 붙어 있어요. 이것을 고체라고 합니다. 보어가 그린 원자의 구조도를 본 적이 있나요? 가운데에 핵이 있고, 바깥에 전자가 돌고 있죠. 그런데 그 사이가 텅텅 비어 있어요. 원자의 지름은 약 10-8cm(1억 분의 1 cm) 정도입니다. 그런데 핵의 지름은 원자의 지름보다 훨씬 더 작아요. 마치 태양이 있고 바깥에 지구가 도는 것과 거의 모형이 비슷합니다. 핵이 있고 바깥에 전자가 도는 거예요.

 

꽉 찬 것이 텅 빈 것입니다, 그 이유는

지구가 꽉 차 있는데 그 각각을 구성하는 원자의 전자는 무게가 없습니다. 전자를 떼 버리고 핵끼리만 딱 결합을 시키면 지구의 크기가 농구공만 해집니다. 그런데 무게는 똑같아요. 사람의 눈으로 보면 지구의 속이 꽉 찼는데, 소립자의 눈으로 보면 밤하늘을 보듯이 텅텅 비어 있는 겁니다.

 

그러니 꽉 찬 것이 텅 빈 거예요. 이것이 색즉시공입니다. 색이 곧 공이며, 공이 곧 색입니다. 아인슈타인의 에너지 공식도 질량이 곧 에너지이다이것을 증명한 거예요. 질량이라는 것은 꽉 찬 것입니다. 에너지라는 것은 텅 빈 것입니다. 질량을 이라고 하면, 에너지는 이라고 할 수 있겠죠. 수소와 수소가 결합해서 헬륨이 되거나, 우라늄이 붕괴되어 다른 원자가 될 때는 질량이 감소하는데, 그 질량이 에너지로 바뀐다는 거죠.

 

색은 무아이므로 공하고, 색은 무상이므로 공하고, 그래서 색은 공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고 듣고 느끼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고 생각하는 것으로 상을 짓습니다. 같은 물건을 두고도 크다’, ‘작다하고 상을 짓습니다. 이것을 금강경에서는 제상이 비상이다하고 표현하죠. 이 말은 반야심경에서 색이 공하다하는 것과 같은 뜻이에요. ‘만 공한 것이 아니라 이때 일어난 느낌인 , 이때 남겨진 기억인 , 이때 일어나는 의지인 , 그때 인지하고 분별하는 , 하나하나 검증해보면 모두 공하다는 것입니다. 오온이 각각 무상하고 무아라는 것입니다. 무상하고 무아라는 것을 이라고 표현한 겁니다. 그래서 색이 공하다는 것을 먼저 증명하고, 같은 논법으로 수상행식 역시 공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그 결과 오온이 모두 공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순서로 이 문장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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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에서 상을 짓지 말라, 무슨 뜻인가요


질문자 : 금강경 제31분 지견불생분(知見不生分) 법문에서 ‘어떤 견해도 일으키지 말라’고 하시며 ‘상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견해도 내려놓아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은 그 밑바탕에는 견해가 있기 때문에 행해진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지난번 ‘지구를 위해 적게 먹고 남기지 않기’라는 수행 연습을 했는데, 이것이 지구 환경을 위해 좋다는 견해가 있고, 이에 동의하기 때문에 수행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견해를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니 혼동이 옵니다. 그렇다면 좋은 일을 하기 위한 판단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좋은 일이라는 판단도 상을 짓는 것이 아닌가요?

법륜스님 : 언어는 우리가 무엇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지 절대성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자칫 잘못하면 언어로 표현된 것이 절대화 되면 폐해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주먹을 쥐고 있는 사람이 물건을 집으려면 손을 펴야 합니다. 그때 ‘손을 펴라’ 하고 말해서 손을 편 건 그 상황에 맞는 행동입니다. 즉, 이건 주먹을 쥐고 있을 때 그것을 뛰어넘는 자유를 향해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때 손을 펴는 것이 진리라고 절대화 하면 이 사람은 오므려야 할 때 다시 못 오므리게 됩니다. 손이라는 건 필요에 따라 오므리기도 하고 펴기도 해야 물건을 집기도 하고 놓기도 할 수 있습니다. 물건을 집을 때는 손을 오므려야 하고, 물건을 놓을 때는 손을 펴야 합니다.

 물건을 집어야 하는데 손을 펴기만 하고 있으면 그 사람에게는 ‘손을 오므려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시간이 지나 이제는 물건을 놓아야 하는데 계속 손을 오므리고 있으니까 이 상황에서는 ‘손을 펴라’라고 말하는 겁니다.

 제31분 지견불생분(知見不生分)은 누군가에게 손을 펴라고 말할 때 펴는 것만 알아서는 안 되고, 손을 오므리라고 말할 때 오므리는 것만 알아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즉, 둘 중 어느 하나를 고집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예요. 아무 생각도 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라 둘 중 어느 것도 고집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누가 ‘서울에 가려면 어디로 갑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동쪽으로 갑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때 질문자의 경우 ‘금강경에는 상을 짓지 말라고 하는데 왜 동쪽으로 가라고 하느냐’ 하고 되묻는 것과 같습니다. 현실에서는 동쪽으로 가야 서울로 갈 수 있는 상황에 있는 겁니다. 즉, 인천에 사는 사람이 서울에 가려고 하면 동쪽으로 가는 길을 제시해야 합니다.

여기서 ‘동쪽으로 가라’고 하는 것이 상을 짓는 게 아니에요. 그 말을 듣고 ‘동쪽으로만 가야 된다’고 고집하는 것이 상을 짓는 것입니다. 질문하는 사람이 인천에 있는지 수원에 있는지 현재 위치는 고려하지 않고 동쪽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상을 짓는 거예요.

대부분의 종교는 성인의 말씀을 절대화 합니다. 그러나 금강경의 위대함은 부처님의 말씀도 절대화 하면 안 된다고 말하는 데 있습니다.

부처님이 질문한 사람에게 동쪽으로 가라고 말한 것은 동쪽으로 가도 되고, 서쪽으로 가도 되고, 남쪽으로 가도 되고, 북쪽으로 가도 되는데도 동쪽으로 가라고 한 걸까요? 그 사람은 꼭 동쪽으로 가야 하기 때문에 동쪽으로 가라고 한 걸까요?

 그 사람은 동쪽으로 가야 서울로 갈 수 있기 때문에 동쪽으로 가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왜냐하면 질문한 사람이 인천에 사는 사람이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질문하는 사람이 수원에 사는 사람인 경우에는 부처님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한다고 해서 진리에 맞는 대응이 나오는 게 아닙니다.

 상황이 달라졌기 때문에 가는 방향도 그에 맞게 달라져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쪽으로 가라’는 말을 고집해서는 안 됩니다. 즉, 어느 한 견해를 고집해서는 안 됩니다.

 견해를 고집하지 말라는 말의 뜻을 ‘앞으로 누가 물어도 동쪽, 서쪽, 남쪽, 북쪽에 대해 말을 하지 말아야 된다’라고 이해한다면 ‘상을 짓지 말아야 된다’는 새로운 상을 짓는 겁니다. 상을 짓지 말라고 했더니 이번에는 ‘상을 짓지 말아야 된다’는 상을 또 짓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어느 길로 가야 합니까?’ 하고 묻는데 ‘무유정법이다’라고 대답하는 것과 같습니다. 무유정법(無有定法)이란 ‘정해진 길이 없다’는 뜻입니다. 갈 길을 묻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가야 할 길을 묻는데 자꾸 정해진 길이 없다고만 하면 답답할 수밖에 없죠.

 금강경에서 ‘어떤 견해도 짓지 말라’는 말은 아무 생각도 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에요. 상을 짓는 것도 고집해서는 안 되고, 상을 짓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고집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자꾸 사람들이 ‘이것이다’라고 상을 지으니까 그 상을 깨기 위해서 ‘이것도 아니고’라는 말이 나오는 거예요. 반대로 ‘저것이다’라고 상을 지으니까 다시 그 상을 깨기 위해서 ‘저것도 아니고’라는 말이 나오는 겁니다.

 더 나아가서 이제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라는 상을 지으니까 그 상을 깨기 위해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니고’ 이런 표현이 나오는 거예요.

 이 말은 어떤 상도 짓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것이라는 상도 짓지 말고, 저것이라는 상도 짓지 말고, ‘아니다’라는 상도 짓지 말라는 뜻입니다. 늘 주어진 상황에서 구체적인 방향이 나오는 것이지 미리 절대화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다’라고 해도 극단이고, ‘저것이다’라고 해도 극단입니다. ‘이것이다’라는 극단을 피하기 위해 ‘이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고, ‘저것이다’라는 극단을 피하기 위해 ‘저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고,


‘이것이 아니다’라는 극단을 피하기 위해 ‘이것이 아닌 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고, ‘저것이 아니다’라는 극단을 피하기 위해 ‘저것이 아닌 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를 파악하며 읽지 않으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니라는 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 이렇게 반응하기가 쉽습니다.
 

‘이게 아니면 저것이든지, 저게 아니면 이것이든지,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든지, 이렇게 무엇이라고 정해져야 하지 않느냐?’ 하는 진리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겁니다. 이것은 관념이지 진리가 아닙니다.

 
고정관념을 내려놓아야 유연해지고 늘 상황에 맞는 적절한 길을 찾게 됩니다. 이것을 불교의 근본 가르침에서는 ‘중도(中道)’라고 하고, 금강경에서는 ‘무유정법(無有定法)’이라고 하고, 반야심경에서는 ‘공(空)’이라고 합니다.


공(空)이라는 말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 어떤 것도 고정화시킬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공(空)이라는 의미를 잘못 이해해서 공(空)이라는 상을 지으면, 누가 무슨 말만 하면 ‘공(空)이다’ 이렇게 대답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실제로 공(空)을 이해하는 게 아니라 공(空)이라는 상을 지은 겁니다.


금강경에 나오는 ‘어떤 견해도 가져서는 안 된다’ 하는 말은 정확히 표현하면 ‘어떤 견해도 고집해서는 안 된다’ 하는 의미입니다.

스님은 금강경 제14분 이상적멸분(離相寂滅分)을 읽은 후 한 문장씩 그 뜻을 해석해 주었습니다.

수보리여! 인욕바라밀이 여래가 인욕바라밀을 말함이 아니라 그 이름이 인욕바라밀이니라. 왜냐하면 수보리여! 내가 옛적에 가리왕에게 신체를 베이고 끊김을 당할 때 내가 그때 아상이 없으며 인상이 없으며 중생상이 없으며 수자상이 없었느니라. 왜냐하면 내가 지나간 옛적에 마디마디 사지를 베이고 끊길 때에 만일 아상과 인상과 중생상과 수자상이 있었다면 응당 성내고 원망하는 마음이 생겼을 것이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또 과거 오백세에 인욕선인이었을 때에도 아상이 없으며 인상이 없으며 중생상이 없으며 수자상이 없었느니라. 그러므로 수보리여! 보살은 응당 일체 상을 여의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키나니, 색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며 소리와 향기와 맛과 감촉과 법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지니, 마땅히 머무는 바 없는 마음을 내어야 한다.

여기서 인욕바라밀이란 무엇일까요? 인욕은 참는다라는 뜻이에요. ‘화가 나는데 참는다’, ‘욕심이 나는데 참는다이럴 때 주로 사용합니다. 참으면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참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보통 세 번 이상 못 참죠. ‘한 번도 아니고 두 번도 아니고 이게 세 번씩이나!’ 하고 터지거나 보자, 보자 하니까 이게!’ 하고 보통 세 번째에 터집니다. 참을 때는 성질을 바깥으로 드러내지 않더라도 내면에서는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잠시 참을 수는 있지만 오래 참을 수는 없습니다. 참는 것은 모든 괴로움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난 상태를 바라밀이라고 합니다. 바라밀이란 산스크리트어로 저 언덕으로 건넜다하는 뜻입니다. 저 언덕이란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난 깨달음의 세계를 의미해요. 참아서는 저 언덕으로 건너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인욕바라밀이란 인욕으로써 저 괴로움의 바다를 건넜다라는 뜻이에요. 그러므로 여기서 인욕참을 것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참을 것이 없을 때 진정으로 인욕바라밀이라고 할 수 있어요.

시어머니의 잔소리에 스트레스받지 않는 방법

말은 그럴듯한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거예요. 비유를 들어 보겠습니다. 오랜만에 시어머니가 아들 집에 방문했어요. 음식을 해드리면 음식을 드시고, 구경을 시켜드리면 구경을 하시면 되는데, 시어머니가 잔소리가 많아요. ‘이거는 생으로 먹어야 하는데 구웠다’, ‘이거는 볶아야 하는데 삶았다’, ‘이거는 국 끓여야 하는데 찌개를 했다이렇게 만들어 놓은 음식에 대해서 잔소리를 해요. 음식뿐만 아니라 내 아들 옷을 다려줘야지 그냥 주면 어떡하냐하며 온갖 잔소리를 합니다. 그러면 며느리가 듣기 싫겠죠. 그렇다고 일일이 다 말대꾸할 수가 없잖아요. 이건 참는 거예요. 그래서 시어머니가 계시는 동안에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만약 참지 못하고 말대꾸를 하면 갈등이 생깁니다. 이때 참지 못하는 사람은 범부중생이라고 하고, 참고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 사람은 현인이라고 합니다. 현인은 남한테 해는 안 되지만 자신은 괴로워요. 그래서 세상에서 착하다는 사람은 남에게는 좋은데 자신은 힘들어합니다. 착하다는 소리를 듣는 대신에 본인이 살기가 힘들어요. 그렇다고 성질대로 살면 비난이 따릅니다. 꾹 참고 잘 견디면 효부 소리는 들을 수 있지만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는 없어요.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남편에 대해서 내가 더 잘 알까요, 시어머니가 더 잘 알까요? 당연히 시어머니가 잘 알겠죠. 왜냐하면, 핏덩이를 낳아서 씻기고 입히고 먹이고 기저귀 갈고 30년을 넘게 키운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들이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성질이 어떤지, 옷을 어떻게 입는지, 다 압니다. 이 세상에 엄마보다 아들을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부인은 남편에게 잘한다고 하는데도 남편은 음식을 해놔도 잘 안 먹고, 옷을 빨아줘도 고맙다는 소리를 안 해요. 그래서 남편에게 맞추는 게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우리 남편을 세상에서 누구보다 잘 아는 시어머니가 오신 겁니다.

우리 남편에 대해서는 우리 시어머니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이 세상에 없어.’

우리 부인에 대해서 우리 장모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어.’

이렇게 어머니에게 내 배우자에 관해 물어보면 척척박사가 따로 없어요. 보통은 물어도 가르쳐줄까 말까 한데 우리 어머니는 워낙 사람이 좋아서 내가 묻지도 않는데 다 알려줍니다.

우리 아들은 이 음식은 생으로 먹고, 이 음식은 삶아야 하고, 이 음식은 무쳐야 하고, 이 음식은 볶아야 해. 이런 꼬들꼬들한 밥은 우리 아들이 먹기 힘들어.’

밥이 꼬들꼬들한 게 좋은 줄 알고 해 줬는데 내 배우자는 그걸 싫어한다는 걸 알게 되죠. 얘기를 들어보면 식은 밥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거든요. 부인은 남편을 위한다고 갓 지은 밥을 주는데 남편이 자꾸 식은 밥을 먹겠다고 하면 갈등이 생겨요. 부인은 남편이 식은 밥을 좋아한다는 걸 알 수가 없잖아요. 그런데 시어머니 얘기를 들어보면 사실을 알게 됩니다.

보통 속옷은 빨아서 그냥 입는데 우리 남편은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속옷을 다려서 입혔다는 걸 알게 되니까 남편이 왜 속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얼굴을 찡그렸는지 알게 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 집에 어머니가 한 번 오실 때마다 배우는 게 많은 거예요. 아무런 스트레스받을 일이 없을뿐더러 오히려 더 가르쳐 달라고 하게 됩니다. 어떤 싫은 말도 내가 필요하면 잔소리가 아니고, 어떤 좋은 말도 내가 필요하지 않으면 잔소리예요. 이렇게 관점을 바꾸면 어머니가 일주일을 계셔도 스트레스받을 일이 없고 배우는 것만 많습니다. 이러면 참을 것이 없어요. 참을 것이 없을 때 인욕바라밀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웃에서 보면 이렇게 말하겠죠. (마음을 바꾸어라 나도좋고 시어머니도좋은 긍정(중도)적 마음으로 처세를하라)

그 집 며느리 잘 참는다. 저런 잔소리를 참아내는 거 보니까 대단하네.’

참을 것이 있어서 참는 상태는 오래갈 수 없습니다. 언젠가 터지게 마련이지요. 언젠가는 괴로움에 빠집니다. 괴로움이 없는 경지에 이르려면 참을 것이 없어야 해요. 그래서 참을 것이 없는 참음을 인욕바라밀이라고 합니다.

수보리여! 여래가 얻은 법에는 실다운 것도 없고, 헛된 것도 없느니라. 수보리여! 만일 보살의 마음이 법에 머물러 보시를 행하면 마치 사람이 어두 운데에들어가 아무것도 볼수없는 것과같고,보살의마음 이 법에 머무르지 않고 보시를 행하면 사람이 눈이 있어 광명 이 비추어 여러 가지 모양을 보는 것과 같으니라.

우리는 법상을 짓기가 아주 쉽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산이라고 알고 있다가 깨닫고 보니 내가 알고 있던 것은 허상이에요. 헛된 것은 허상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사실은 실상이라고 이름을 붙이는 거죠. 그래서 실상은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니고 비동비서산이다하고 다시 고집하게 됩니다. 이렇게 실상을 고집하면 반드시 상대되는 허상이 또 생겨요. 허상과 실상 두 개 중에 하나인 실상은 참된 모습이 아닙니다. ‘동산과 서산은 허상이고, 비동비서산은 실상이다라고 고집하면 진실과 헛됨이 갈등을 일으켜서 다시 둘로 나눠집니다. 진실은 실상도 아니고, 허상도 아니고, 실상과 허상을 분리하지 않는 그 너머의 얘기예요. 그래서 이것이 진리이다하는 순간 곧 진리라고 하는 상을 짓게 되는 겁니다.

나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준 상이군인

상을 짓는 것이 무엇인지 저의 수행 이야기를 들려 드릴게요. 저는 고등학교 1학년 겨울에 절에 들어가서 수행정진과 전법을 아주 열심히 했습니다. 제가 제일 많이 했던 일은 청소년 포교였어요. 세상 밖에는 부처님의 법이 중생과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해서 머리를 기르고 법사가 되어 초중고 학생들을 위한 청소년 법회를 열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한 절에 법사로 있으면서 청소년 포교를 열심히 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열 시쯤 법당에서 사시불공을 드리고 있는데 누가 문을 쇠파이프로 때리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어요. 신경이 쓰였죠. 그래도 한두 번 하다가 그만두겠거니 했는데 계속 문을 때리는 거예요. 그래서 기도를 하다가 목탁을 내려놓고 문을 열었어요. 마음속에 짜증이 나서 누구냐?’ 야단을 치려고 딱 보니까 한쪽 팔과 한쪽 다리가 없는 상이군인이 목발을 짚고 서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팔이 없으면 쇠갈고리로 의수를 했습니다. 상이군인이 그 쇠갈고리로 문을 두드리니까 안에서 듣기로는 쇠파이프를 갖고 문을 때리는 것처럼 들린 겁니다. 그래서 화를 내려다가 그 사람의 모습을 보고는 정중하게 말했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제가 지금 불공 중이니까 곧 오겠습니다.’

저는 상이군인의 모습을 딱 보자마자 동냥을 얻으러 왔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지금은 불공 중이니 잠시만 기다리면 불공 마치고 동냥을 주겠다고 한 거예요. 다시 들어와서 하던 불공을 마저 하는데 또 문을 두드리는 거예요. 그래서 짜증이 탁 나서 다시 말했습니다.

조금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당신이 보다시피 내가 지금 불공을 하고 있는데 당신한테 동냥을 주려면 저쪽 요사체에 가야 돈을 가져오든 쌀을 주든 할 거 아니오?’

그랬더니 상이군인이 내가 언제 동냥 얻으러 왔다고 그랬소?’ 이러는 거예요. 그 말을 듣고 보니 그가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저 혼자 지레짐작을 했던 것이었음을 깨닫고 속이 뜨끔했어요. 그래서 동냥 얻으러 온 게 아니라면 왜 왔냐고 물었더니 내가 마음이 하도 답답해서 스님이 되려고 왔소이러는 거예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팔이 하나 없고 다리가 하나 없는 나이 먹은 사람이 스님이 되겠다는 게 안 맞는 얘기였어요. 그래서 차분하게 설명을 했습니다. ‘여기는 시내에 있는 포교당이고 학생들을 포교하는 곳이에요. 스님이 되려면 다른 절에 가보세요그랬더니 그 상이군인이 다른 절에 다 가봤는데 가는 절마다 다른 절에 가보라고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곳은 아이들을 포교하는 곳인데 어떻게 여기서 스님이 되겠소. 그런데 스님이 되려는 이유가 뭡니까?’ 하고 물어봤습니다. 그는 가슴을 치면서 내가 가슴이 답답해서 스님이 되려고 합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저는 입도 뻥긋할 수가 없었어요. 교리를 물었으면 설명을 잘해주었을 텐데 가슴이 답답하다는 말에는 아무런 대답을 해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슴이 왜 답답한지 물어보니 이렇게 대답했어요.

결혼한 후 얼마 안 돼서 월남전쟁에 갔다가 팔과 다리를 다쳐서 상이군인이 됐어요. 그래서 집에만 있는데 살기가 어려우니까 부인이 장사해서 생계를 해결했습니다. 연금이 나오긴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았아요. 몸을 다친 것도 힘들었지만 혼자 집에서 온종일 부인을 기다리는 게 너무 짜증이 났습니다. 부인은 밖에 나가면 저녁 늦게 들어왔어요. 그럼 왜 늦게 들어오는지 저도 모르게 자꾸 따지게 되었습니다. 그럼 부인이 내가 뭐 놀다 온 줄 아느냐고 하면서 성질을 냈습니다. 그러면 저도 성질이 확 나서 물건을 집어던지고 욕을 하게 되고, 그러다가 술을 먹고 취해 자는 일이 반복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부인도 집을 자꾸 나가게 되었어요. 집안이 제대로 되려면 내가 죽어야지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몇 번을 죽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죽으려고 해도 죽어지지가 않았어요. 도저히 내 손으로 죽을 수는 없어서 절에 가서 중이 되면 세상에서 없어지는 거니까 죽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절에 가서 중이 되게 해 달라고 했더니 절마다 다른 데로 가라고 했어요.’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이제 이유는 충분히 알겠는데 어디 산에 있는 절도 아니고 시내에 있는 포교당에 어떻게 왔소?’

그랬더니 상이군인이 누가 여기로 가보라고 했다면서 호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종이 하나를 턱 꺼내 보여주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 종이를 자기한테 주면서 여기 한번 가보라고 했다는 거예요. 그 종이를 받아봤더니 전단지 맨 위에 큰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어요.

 

마음이 답답한 자여, 이리로 오시오. 여기 부처님께서 마련한 좋은 안식처가 있습니다.’

그리고 밑에 법회 시간이 주욱 적혀 있었어요. 그 종이는 바로 제가 시내에 뿌린 포교 전단지였습니다. 제가 시내에 뿌린 전단지를 보고 누가 마음이 답답하다고 하는 상이군인에게 전해 주면서 가보라고 한 거예요. 그때 저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어요. 마음이 답답한 사람은 누구나 이 절을 찾아오라고 전단지를 2000장이나 뿌렸거든요. 그래서 진짜 마음이 답답한 사람이 찾아왔는데, 저는 그 사람을 보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동냥을 줘서 내보내든지 무슨 말을 해서 내 보내든지 오직 내보낼 생각만 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때 저 자신이 얼마나 웃기는 행동을 하고 있는지 돌아봐졌습니다. 정말 마음이 답답한 사람이 찾아왔을 때는 빨리 내보낼 생각만 하고, 저를 찾아와서 한 번도 답답하다고 말한 적이 없는 어린 학생들을 위해서는 법회도 열고 강의도 하고 있는 거잖아요. 학생들은 저에게 답답하다고 말도 안 했는데 너 답답하지? 답답할 때는 이렇게 해결하는 거야이러면서 열심히 가르치고 있었던 겁니다.

저는 저 자신을 열심히 전법하는 사람, 누구보다 훌륭한 포교사라고 생각했고 자신감도 굉장했어요. 부처님 법을 널리 전하기 위해서는 나의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전법을 하지 않는 기존의 스님들을 막 비난했어요. 그런데 정작 내가 한 말이야말로 거짓말이었고, 내가 한 행동이야말로 헛된 것이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정말 필요한 사람이 왔을 때는 몰아내고, 부처님의 가르침이 필요 없는 사람에게는 마치 내가 없으면 안 될 것같이 다가간 거예요. 그때 저의 존재가치가 탁 무너져 버렸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혼이 빠져서 멍한 상태가 되었어요. 그래서 학생 때 기도하던 칠불암이란 절에 가서 기도를 하다 쓰러져 버렸습니다. 3일간 정신없이 쓰러져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 내가 그래도 전단지를 뿌리고 전법을 했기 때문에 나의 어리석음을 알 수 있었다. 만약 아무것도 안 했으면 허상 속에 사는 나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열심히 했기 때문에 이번 일을 계기로 나의 어리석음을 깨우친 것이다.’

그 후 기존의 불교와 스님들을 비난할 아무런 이유가 없어져 버렸어요. 왜냐하면 제가 그들을 비판하지만 저 또한 상에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나는 잘한다’, ‘나는 법대로 한다’, ‘나는 진실하다이런 상을 짓고 있었던 겁니다. 이것이 바로 법상입니다. 그러니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진실이라고 생각하고, 옳으니 그르니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이렇게 들었습니다’, ‘나는 이렇게 알고 있습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저는 이렇게 느꼈습니다이런 관점을 가져야 해요.

갈등이 생기고 괴로움이 생기는 이유

내가 생각하는 건 내 생각일 뿐입니다. 생각은 다를 수도 있고, 믿음은 다를 수도 있고, 판단은 다를 수도 있어요. 그러니 고집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내 생각과 내 의견을 고집할까요? 내가 아는 것이 곧 사실이라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놓아버리면 여러분들의 삶은 아무런 두려움도 없어지고 갈등도 없어지게 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순간순간 상을 짓고 상에 집착하기 때문에 갈등이 생기고 괴로움이 생기는 거예요. 괴로움은 나쁜 일을 하지 말고 좋은 일을 하라는 방식으로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좋은 일에도 상을 짓고 집착하면 괴로움이 생깁니다. 좋은 일을 넘어서서 깨달았다는 상을 짓고 집착해도 괴로움이 생깁니다. 그것은 다 한밤의 꿈과 같은 거예요.”

 

오늘은 상을 짓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말하는 지에 대한 스님의 답변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상을 짓지 마라할 때 이 ()’은 어떤 것을 상이라고 하느냐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 물병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컵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뚜껑이 있습니다. 다 보입니까?”

“(대중들) .”

그러면 이 컵을 기준으로 해서 제가 물어볼 테니까 편안하게 얘기하세요. 이 컵은 이 물병보다 큽니까, 작습니까?”

“(대중들) 작습니다.”

이 컵은 뚜껑보다 큽니까, 작습니까?”

“(대중들) 큽니다.”

이 컵은 물병보다 큽니까, 작습니까?”

“(대중들) 작습니다.”

이 컵은 뚜껑보다 큽니까, 작습니까?”

“(대중들) 큽니다.”

, 그러면 컵은 큽니까, 작습니까?”

“(대중들 웅성)”

다시. 이 컵은 큽니까, 작습니까?”

“(대중들)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습니다.”

 

이 컵을 가지고 이 컵은 크다’, ‘이 컵은 작다라고 할 때 이 크다, 작다는 건 무엇을 뜻할까요? 크다는 것은 객관적인 이 존재, 즉 컵이 크니까 크다고 하는 게 아니냐고 보통 생각합니다. 또는 컵이 작으니까 작다고 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합니다. 즉 크다고 하는 것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내 눈이 그 컵을 보고 큰 것을 크다고 인식을 하고, 작은 것을 작다고 인식한다고 여기는 것이죠. 나는 바깥에 있는 사물을 그대로 인식한다고 대부분 생각해요. 가령 ‘1킬로미터라는 거리를 길기 때문에 길다고 인식했다하거나 ‘1킬로미터라는 거리는 짧기 때문에 짧다고 인식을 했다라고 인식합니다. 사실대로 인식을 했다고 여겨요.

그런데 제가 여러분께 질문을 했을 때 여러분들이 지금 느끼듯이 이 컵이 물병과 함께 있을 때, 즉 이런 조건에서 내가 이 컵을 인식할 때는 작다고 인식이 됩니다. 그런데 이 컵이 이 뚜껑과 비교해서 인식할 때는 크다고 인식이 됩니다. 그러면 이 컵은 객관적으로 큰 것이고, 객관적으로 작은 것입니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지요. 이 컵은 인식 상에서 크다고 인식이 될 때가 있고, 작다고 인식이 될 때가 있는 거지요. 크다, 작다는 것은 객관적 사물에 있는 줄 알았는데 객관적 사물에 크고 작음이 있는 게 아니라 나의 인식 상에서 크다, 작다는 인식이 일어나는 거예요.

, 그러면 이 컵 자체는 어떻습니까? 이 컵 자체는 크다고 말할 수도 없고, 작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이게 질문자의 용어를 빌려서 제가 대답하는 방법이에요. 질문자가 크냐, 작냐고 물었으니까 제가 크다고 할 수도 없고, 작다고 할 수도 없다고 답한다는 거예요.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그 컵은 다만 컵일 뿐이다.’ 이거예요.

이렇게 ‘크다’ 라고 말할 때 우리가 ‘상을 지었다’고 말합니다. 상을 지었다는 건 인식 상의 문제를 객관의 문제로 되돌린 것을 뜻해요. 내 눈에 크다고 보인 것을 존재 자체가 큰 것이라고 규정할 때 ‘크다는 상을 지었다.’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용어를 이해하셨어요?”

.”

내 눈에 빨갛게 보인 것이지 실제 그 색깔이 빨간지 아닌지는 우리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만약 빨간 색깔의 안경을 끼고 바깥 사물을 보면 흰 벽이 빨갛게 보이겠지요. 빨간색이기 때문에 내가 빨갛게 인식한 건지, 무색인데 내가 쓴 안경 때문에 빨갛게 보인 건지, 내가 현재 상태에서 그것을 알 수가 없어요. 그럴 때 내 눈에는 빨갛게 보입니다’, ‘내 눈에는 작다고 인식이 됩니다’, ‘나한테는 크다고 인식이 됩니다.’ 이렇게 아는 것이 사실을 사실대로 아는 거예요. ‘있는 그대로 보라라는 말의 뜻은 큰 건 크다고 보고, 작은 건 작다고 보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해하셨습니까?”

.”

내 눈에 크게 보였다고 아는 게 사실대로 아는 겁니다. 이걸 공이다라고 아는 게 사실대로 아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내 눈에는 빨갛게 보입니다’, ‘내 눈에는 크게 보입니다’, ‘내 관점에서는 작게 보입니다.’ 라고 아는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착각합니다. ‘작기 때문에 작다고 했지’, ‘크니까 크다고 했지’, ‘비싸니까 비싸다고 했지.’ 이렇게 주관을 객관화시킵니다. 이런 것을 상을 지었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인식 상 오류입니다.

금을 은이라고 착각을 했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큰 걸 작다고 내가 인식을 잘못했다.’ 이런 의미가 아니예요. 크다, 작다는 것은 객관적인 존재가 그런 것이 아니라 나에게 인식이 될 때 인식 상에서 그렇게 보인다는 겁니다. 그런데 나는 그 객관적인 존재가 크다거나 작다고 잘못 알고 있어요. 이것을 상을 지었다라고 말하는 거예요.

아까 상을 짓는 건 나쁩니까?’ 라고 물었는데, 이건 나쁘다, 좋다는 도덕적 개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류를 범하는 것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 대부분은 죽을 때까지 이 오류를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크니, 작니, 비싸니, 싸니, 옳으니, 그르니하면서 갈등하는 거죠. ‘어떻게 이 큰 걸 저 사람은 작다고 말할 수 있느냐?’, ‘어떻게 이 작은 걸 저 사람은 크다고 말할 수가 있느냐? 동네 사람들한테 다 물어봐라’, 이렇게 남한테도 물어보라는 말을 하는 이유는 그것이 객관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상을 지었다는 뜻입니다. 이해하셨어요?”

“(대중들) .”

주관을 객관화시키는 것이 상을 짓는 것입니다. 이런 오류는 그대로 가져가야 되겠어요? 아니면 개선을 해야 되겠어요? 개선을 해야 되겠지요. 오류니까요. 윤리 도덕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렇게 인식을 개선하면 번뇌가 없어집니다. 어떤 분이 우리 남편이 나쁜 인간이에요.’ 한다고 했을 때 그 남편은 실제로 나쁜 인간일까요, 그냥 존재일까요?”

“(대중들) 존재.”

, 그냥 하나의 존재예요. 그리고 술을 마신다는 것도 그냥 하나의 행동이에요. 그런데 내가 술을 안 마셨으면 좋겠다는 관점에서 바라보니 나쁜 행동인 거예요. 이해되세요?”

“(대중들) .”

그러니까 나쁘다는 것은 나한테서 일어난 인식이지, 존재에서 오는 게 아니에요. 반대로 나는 한 잔 마시고 싶은데 남편이 안 마신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럴 때 남편은 멋도 모르고, 풍류도 모르고, 답답한 인간이고, 그래서 나쁜 존재로 인식돼요. (모두 웃음) 그러니 여러분들에게 온갖 갈등, 미움, 원망, 슬픔, 이런 게 있었다면, 이 제법의 본질을 딱 꿰뚫어 알게 되는 순간 슬퍼할 일도 없고, 기뻐할 일도 없고, 괴로워할 일도 없고, 미워할 일도 없게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또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럼 목석같은 존재가 되어야 합니까?’ (모두 웃음) 이 때 우리는 구체적으로 그 인연을 살펴봐야 됩니다. ‘컵이 큽니까, 작습니까?’ 그랬을 때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답을 외우면 안 됩니다. ‘이 물병보다 큽니까, 작습니까?’ 라고 물으면 ()입니다라고 대답하는데, 이것은 또 법상에 빠진 경우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물으면 무조건 공입니다라고만 답하는 거예요.

‘제법이 공한데, 좋고 나쁨이 어디 있습니까’ 하는 분들이 있는데, 여기도 그런 병 걸린 사람 많을 거예요. 이런 분들은 대부분 책으로 불법을 공부한 사람들입니다. 아내한테 절에 뭐하러 가노? 부처가 따로 있나? 내가 부처다. 그 스님이 부처가 아니고, 그 돌이 부처가 아니고, 내가 부처다, 내가!’ 이런 소리나 하고, 아내가 뭐라 하면 공이다. 좋고 나쁜 게 어디 있나? 본래 없다는 거 안 배웠나?’ 이런 소리나 하게 되는 거예요. 자기는 뭘 좀 안다고 그러는 것 같은데, 그건 병이에요. 그런 병을 법집이라고 합니다. 아집은 자기 생각을 고집하는 것이고, 법집은 진리라는 잣대를 만들어서 자기 변명하는 데에 써먹는 거예요.

그래서 금강경은 부처님 말씀이라는 잣대 하나를 가지고 내내 써먹는 사람들에게 그 법에도 실체가 없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집을 타파하고, 동시에 법집도 타파하는 힘이 있지요. 크다, 작다는 걸 타파하는 게 아집을 타파하는 것이라면,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라는 정답을 하나 만들어서 움켜쥐고 있는 게 법집입니다. 이해하셨어요?”

“(대중들) .”

누가 부처님께 서울을 가려면 어디로 갑니까?’ 하고 물었어요. 그럼 우리는 어디로 간다.’ 이러는데, 부처님은 그 사람이 어디 사는 사람인지를 먼저 살피셨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인천 사람이라면 동쪽으로 가세요.’ 하는 거죠. 그런데 우리는 그 사람이 인천 사람인 건 고려도 안 하고 서울 가는 길은 동쪽이다는 것만 외워서 법칙을 만듭니다. 그래서 누가 또 와서 서울을 가려면 어디로 갑니까?’라고 하면 내가 압니다.’ ‘어느 쪽인데요?’ ‘동쪽이에요!’이러는 거지요.

그런데 그때 부처님께서 서쪽이다.’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또 부처님도 틀렸다!’고 하든지, 아니면 , 내가 잘못 알았네. 한 가지 길만 있는 줄 알았더니 두 가지 길이 있구나.’ 하는 거죠. 부처님께서 서울 가는 길이 서쪽이다라고 말씀하신 건 그 사람이 춘천 살기 때문인데, 법집을 만든 사람은 그걸 또 외우는 거예요. 교리를 외우는 거죠. ‘서울은 동쪽과 서쪽으로 가는 두 가지 방법이 있구나. 그런데 방금 남자가 물으니 동쪽이라 했고, 여자가 물으니 서쪽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남자는 동쪽으로 가야 되고, 여자는 서쪽으로 가야 되는 거구나.’ 이렇게 규정을 짓는 거예요.

그 다음에 또 한 남자가 물었어요. 부처님께서는 이번엔 북쪽으로 가라.’ 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남자는 남자인데 어린애인 거예요. 그래서 , 어린애가 물으니까 북쪽이라고 대답하는구나.’ 이렇게 또 해석을 붙이는 거예요. 그런데 부처님은 그 사람이 어린애여서가 아니라 수원에 살기 때문에 북쪽이라고 대답하신 거예요.

그 사람이 어느 위치에서 질문하는지를 고려하지 않고 그냥 서울 가는 방향을 정할 수는 없는 겁니다. 이걸 무유정법(無有定法)’이라고 합니다. ‘정할 수가 없다는 말은 서울 가는 길이 없다는 말이 아니에요. 또 정해지지 않았으니까 아무렇게나 가면 서울을 갈 수 있다는 얘기도 아닙니다. 이것도 치우치는 거예요. ‘없다를 단견(斷見), 무견(無見)에 떨어졌다고 말하고, ‘무수히 많다. 아무렇게나 가면 된다는 게 상견(常見), 유견(有見)에 떨어졌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서울 가는 길은 정해져 있지 않다는 말은 인연을 따라 가라는 말입니다. 인천이라면 동쪽이지요. ‘인천인데도 세 방향으로 가도 된다.’ 이런 건 없어요. 인천이면 서울 가는 길은 동쪽이고, 춘천이면 서쪽이에요. 그 인연에서는 그렇게 정해집니다. 그런데 그 인연에서 그렇게 정해졌다고 해서 그것을 동쪽이라고 확정 지으면 안 돼요. 우리는 왜 이렇게 자꾸 치우치는 걸까요? 여러분들은 자꾸 뭘 확정짓고 싶어 하거든요. 어릴 때부터 늘 정답을 만들어온 습관이 있기 때문에 정답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무유정법이란 인연을 따라서는 만 가지 길이 나올 수도 있다는 뜻이에요. 그 인연을 따라서 가야지 그냥 만 가지 방향으로 아무렇게나 가면 안돼요. 예를 들어 늘 옷을 입어야 됩니까, 벗어야 됩니까? 그 중에 어느 하나라고 말할 수 없어요. 옷은 입어야 된다고 말할 수도 없고, 벗어야 된다고 말할 수도 없는 거죠. 목욕탕 안에서는 벗어야지요. 밖에서는 입어야 되지요. 그런데 그것도 또 세세하게 들어가면 딱 안 맞아요. 인도 여자들은 목욕탕 안에서도 옷을 입거든요. 어릴 때부터 평생 옷을 입고 목욕을 합니다.

이런 것을 두고 인연을 따른다고 말하는 거예요. 이걸 법성계에서는 불수자성 수연성(不守自性 隨緣成)’이라고 합니다. ‘불수자성(不守自性)’, ‘스스로의 성품을 지키지 아니하고’, 다시 말해서 크다, 작다, 동쪽이다, 서쪽이다, 하는 것을 지키지 아니하고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하다. 정한 바가 없다는 뜻입니다. ‘수연성(隨緣成)’, 인연을 따라 이루어진다는 거예요. 이걸 반야심경에서는 공즉시색(空卽是色)’을 말합니다. ‘동쪽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인연을 따라 동쪽이라 이름 할 수 있다는 건 금강경 식 표현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사상(四相), 즉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子相)이 뭐냐?’ 하는 것은 지식에 속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그 네 가지가 본질이 아니고, 또 그 네 가지는 학자에 따라 규정하는 방식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울타리를 작게 치든, 크게 치든 울타리를 친다, 모양을 짓는다는 것이에요. 어떻게 울타리를 치든, 아상을 치든, 중생상을 치든, 수자상으로 치든, 울타리를 치면 그건 이미 보살이 아니니 그 네 가지에 너무 집착하지 마라는 거예요. 이해하셨어요?”

“(대중들) .”

그러니까 내가 너를 구제했다’, ‘내가 너한테 줬다.’ 이런다면 이미 니 하는 울타리를 쳤다는 거예요. 그게 아상으로 치든, 인상으로 치든, 중생상으로 치든, 수자상으로 치든, 뭐라고 치든 이미 울타리를 쳤다, 모양을 지었다는 거예요. ‘모양을 지었다면 이미 너는 깨달았다고 할 수가 없다. 번뇌가 없어졌다고 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보디사트바라고 할 수가 없다. 보살이 아니다.’ 이게 핵심입니다. 여러분들이 울타리를 치거나 모양을 지으면, 여러분들이 사물을 인식할 때 자기도 모르게 크니, 작니 상을 지었다면 번뇌나 미움, 또는 괴로움이나 슬픔 등이 생깁니다.”

 

“오늘은 금강경 제11분 무위복승분(無為福勝分)에 대해 공부해 보겠습니다. 무위(無為)의 행은 상도 짓지 않고, 집착하지도 않고,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는, 함이 없는 행을 말합니다. 반대로 유위의 행은 기대함이 있는, 함이 있는 행을 말합니다. 무위복승분(無為福勝分)이란 유위의 행으로 짓는 유루복에 비해 무위의 행으로 짓는 무루복이 더 수승하다는 뜻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 가운데 내지 사구게 등을 수지하여 다른 사람을 위해 설해 준다면 이 복덕이 앞의 복덕보다 더 뛰어나다.’

이 경 전체를 남을 위해 설해 주지는 못하더라도 이 경의 아주 중요한 핵심을 뽑아놓은 사구게만이라도 남을 위해서 설해 준다면 그 복덕은 강가강의 모래알 수만큼 많은 삼천대천세계를 칠보로 가득히 채워 보시한 공덕보다 더 뛰어나다는 뜻입니다. 함이 없는 무위의 행으로 인해서 지어진 공덕은 함이 있는 유위의 행에 따른 공덕과는 비교가 안 된다는 거예요.

법의 실상을 깨닫는 것이 중요한 이유
비유를 들어 보겠습니다. 내가 꿈속에서 부모님에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돈을 드렸는데 깨고 나니 꿈이었다는 것과 내가 실제로 부모님께 물 한 그릇을 떠다 드린 것, 둘 중에 어느 공덕이 더 클까요? 후자는 비록 한 그릇의 물을 떠다 드렸다 하더라도 실제로 드린 것이고, 전자는 무수히 많은 공덕을 지었다 하더라도 꿈에서 한 일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크기로 비유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이것은 깨달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제상이 비상인 줄 아는 것, 제법이 공한 줄 아는 것, ‘이것이 진리다’라고 할 법이 없는 줄을 아는 것, 정한 법이 없는 줄을 깨닫는 것이 ‘반야’입니다. 실제의 모습을 아는 깨달음은 우리가 어리석음 속에서 행하는 그 어떤 행위와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법의 실상을 깨닫는 게 이만큼 중요하다는 걸 강조하고 있습니다.

꿈속에서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눈을 뜨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꿈속에서 설령 나쁜 짓을 했다 하더라도 눈을 뜨고 꿈에서 깨면 그건 꿈속의 일입니다. 꿈속에서는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있지만, 눈을 뜨면 그것은 다 꿈속의 일이에요. 이런 꿈속에서 벗어나야 세상일을 두고 좋은 일, 나쁜 일을 가리지 않고 항상 웃을 수가 있습니다.

금강경은 내가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는 것뿐만 아니라 전법에 대한 중요성도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 경을 수지독송한다는 것은 내가 괴로움이 없는 상태에 이르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괴로움이 없는 상태에 이르는 것을 넘어서서 다른 사람도 이 법을 만나서 괴로움이 없는 상태에 이르게 한다면 이것은 더더욱 공덕이 크다는 겁니다. 자기가 괴로움이 없는 경지로 나아가는 것을 일러 수행이라 하고, 이 법을 타인도 깨달아서 괴로움이 없도록 도와주는 것을 전법이라고 합니다. 금강경은 전법의 공덕을 말하고 있습니다.

대승은 괴로움이 없는 상태에 이르게 하는 진리를 내가 체험하는 것, 즉 수지독송하는 것을 매우 중요시하고, 또 이 법을 타인에게 전하는 전법을 매우 중요시합니다. 절을 짓고 불상을 조성하는 외형적인 것은 세상일에 불과합니다. 그것이 비록 좋은 일이라 하더라도 또 공덕이 된다 하더라도 깨달음을 통해서 해탈하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되는 겁니다. 이런 세속적인 모양과 형상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잠꼬대와 같은 일이라는 거예요. 우리를 진정으로 해탈과 열반으로 인도하는 건 깨달음입니다.

세상의 모든 갈등이 일어나는 원인
다음 내용은 바른 가르침을 존중하라는 제12분 존중정교분(尊重正敎分)입니다. 여기서 바른 가르침이 뭘까요? 지금까지 금강경에서 배온 내용들을 뜻합니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則見如來)

무주상보시
(無住相布施)

무유정법
(無有定法)

응무소주 이생기심
(應無所主 而生其心)

이 법을 얻은 바도 없고 설할 바도 없는 제법이 공한 도리를 말합니다. 이 법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이보다 더 높은 것이 없는, 가장 높은 최상의 깨달음라는 뜻입니다. 가장 높은 최상의 깨달음이란 상을 짓지 않고 사물의 진실상을 보는 것입니다.

상을 짓지 않으면 집착할 일이 없어집니다. 우리는 집착을 놓아라 해도 집착이 잘 안 놓아집니다. 그 이유는 상을 짓고 있기 때문이에요. 내가 그렇게 듣고 내가 그렇게 알고 내가 그렇게 봤을 뿐이지 그게 진실은 아닙니다. 내가 인식한 것을 사실이라고 착각하는 것이 상을 짓는 것입니다. 사실이라고 생각하니까 당연히 그걸 주장해야 하고 강조해야 할 거 아니에요. 그래서 집착하게 되는 겁니다. 상을 짓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갈등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여러분들이 깨닫게 되면, 부처님이 법당에 계시는 게 아니라 부처님은 이 세상 어디에도 다 있어 처처에 부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이 없게 됩니다. 상을 짓기 때문에 불상이 있는 곳이 법당이고, 법당에 부처님이 계신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상을 여의면 처처에 불상이라 부처님 계시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사사에 불공이요. 하는 일마다 다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일이 됩니다. 과일을 사서 불전 앞에 올리는 것만 공양이 아니라 한 포기 나무를 심는 것도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이요, 죽어가는 생명 하나 살려주는 것도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이요, 병든 사람을 구하는 것도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이요, 모든 게 다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입니다.

어디 가서 중생을 별도로 구제한단 말이오
우리나라에서 제일 유명한 스님이 원효대사죠. 그런데 원효대사는 신라 시대에 한때 잘 나가다가 파계했다 해서 내쳐진 분이에요. 그러다 500년이 지난 고려시대에 와서 화쟁국사란 이름으로 원효대사의 업적이 복권되었습니다. 요즘 말하면 승려 자격이 없어졌다가 500년 뒤에 자격을 다시 얻은 거예요. 10년 있다가 복권한 것도 아니고, 50년 있다가 복권한 것도 아니고, 사후에 곧 복권한 것도 아니고, 500년 뒤에 복권이 된 분이에요. 그런데 지금은 다른 스님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스님이 되었죠. 그분의 수행 과정을 이야기해 드릴게요.

원효대사는 부처님의 경전에 대해서 논문을 쓰는 능력이 탁월해서 신라에서 아주 이름이 쟁쟁했어요. 그분이 쓴 글은 중국에까지 전해지고 일본에도 전해져서 아주 유명했습니다. 중국의 스님들은 원효의 글을 읽고 감동해서 원효 보살이라고 불렀어요. 성인의 칭호를 받은 겁니다. 성인으로 불리면 그가 쓴 글에 ‘논’이라는 칭호를 줍니다. 부처님의 말씀에 버금가는 성인의 글을 ‘논’이라고 합니다. 고려 시대 때 대각국사 의천이 중국에 갔다가 그걸 보고 놀라죠. 원효가 우리나라에서는 이름도 안 알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려로 돌아와서 원효를 복권시킨 거예요. 원효가 쓴 글들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감동하고, 왕도 감동했는데, 결국 파계를 하게 되면서 그 이름이 묻힌 겁니다.

당시 신라에는 세속에 묻혀 사는 스님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그중에 대안 스님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 스님은 늘 다니면서 ‘대안, 대안, 대안이로다’ 이렇게 말했어요. 대안은 ‘크게 편안하여지이다’ 이런 뜻입니다. 원효대사가 초야에 묻혀 사는 대안 스님을 길에서 만났습니다. 이 분이 ‘대사, 최근에 쓴 글을 봤는데 너무 감동했소. 그래서 내가 물어볼 게 좀 있으니까 나하고 얘기를 좀 합시다’라고 하니, 보통사람이면 초라하게 입은 거지 같은 스님을 무시할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원효대사도 이미 해골바가지 물을 먹고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에 안목이 있는 분이잖아요. 그래서 존중하는 마음을 내서 ‘예, 그러겠습니다’ 하고 따라갔습니다. 대안대사가 간 곳은 천민촌이었어요. 분황사 뒤에 북천이 있고 북천을 건너가면 ‘부곡’이라고 천민들이 사는 집성촌이 있었어요. 귀족이었던 원효대사는 사람들이 더럽다 여기는 천민촌은 간 적도 없고 갈 일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천민촌까지 따라갔어요. 그런데 대안대사가 그 천민촌 안에 있는 주막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주막으로 들어가면서 ‘주모, 여기 귀한 손님 왔소. 술 한 상 차려내시오’ 했습니다. 원효대사는 신라에서 유명한 스님이고 귀족이었습니다. 천민촌이면 평생 오지 않을 곳에 온 것이었지요. 도저히 주막까지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발길을 돌렸습니다. 대안대사가 ‘원효대사’ 하고 불러도 그냥 가버리니까 대안 대사가 이렇게 말했어요.

‘대사! 여기 마땅히 구제받아야 할 중생을 두고 어디 가서 별도의 중생을 구제한단 말이오.’

모든 대승 경전에 보살은 중생을 구제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자기 몸도 버린다고 되어 있어요. 그런 경의 글을 읽고 해설을 해서 일장 논문을 쓴 게 원효의 글이잖아요. 그런데 막상 실제로 천민촌에 들어가는 게 꺼려졌고, 특히 주모가 있는 주막에 간다니까 더 꺼려져서 돌아온 겁니다. 대안대사가 그 뒤에 대고 큰 소리로 말한 거예요. 보통사람 같았으면 중이 헛소리한다며 무시했겠죠. 그런데 원효대사는 곰곰이 생각해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수도 없이 중생 구제를 얘기하고 글을 쓰고 설법을 했는데 정말 구제받아야 할 중생을 두고 도망친 거잖아요. 자기를 돌아보니 아는 건 있지만 체험된 건 아니었어요. 그래서 ‘내가 수행을 잘못했구나’ 하고 깨닫고 분황사 주지 자리를 내려놓고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머리를 기르고 속복을 입고 학승들이 많은 절에 가서 부목으로 일을 했습니다. 복을 쌓아야겠다는 생각이었죠. 그 당시 신분제 사회에서 부목은 종의 신분이었습니다. 신라 시대만 하더라도 절을 유지하는 방식이 절에 훌륭한 스님이 계시면 왕이 그 절에 땅을 주고 그 땅을 경작할 종을 주었습니다.

부목이 된 원효대사는 스님들을 상전으로 모시고 부엌에서 밥하고 청소하고 빨래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같이 일하는 하인 중에 한 사람이 원효를 아주 심하게 구박을 했어요. 그래도 원효는 ‘나를 구박하는 그 하인도 보살이다’ 하면서 구박에도 개의치 않고 잘 견뎠습니다.

그 절에는 행색도 초라하고 키도 작고 약간 모자라는 사람처럼 보이는 방울 스님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항상 방울을 갖고 다니면서 딸랑딸랑 소리를 내고 다녔어요. 이름도 없이 그냥 방울 스님이라고 불리는 분이었습니다. 방울스님은 항상 스님들이 밥을 먹을 때 와서 밥을 안 먹고 나중에 부엌에 와서 ‘행자님, 어디 누룽지 좀 없나요?’ 하고 누룽지를 얻어가서 먹었습니다. 그러면 부목들이 ‘왜 밥 먹을 때 안 먹고 지금 와요!’ 하고 구박을 했는데, 원효는 방울 스님을 불쌍히 여겨서 누룽지를 남겨놨다가 드렸어요. 그렇게 부목이 되어 하심을 하고 살고 있었습니다.

본래 중생이라고 할 게 없구나
그런데 어느 날 그 절에 스님들이 ‘대승기신론’ 이라는 책을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스승이 제자들에게 유명한 불경을 주면서 공부하라고 한 거예요. 요즘으로 말하면 박사 과정에 있는 사람들이었는데 아무리 읽어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어서 자기들끼리 둘러앉아서 이런저런 해석을 각자 내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원효가 옆에서 마루를 닦으면서 듣자니 말도 안 되는 엉터리 해석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스님,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이건 이렇고 저건 저런 거요’ 이렇게 말을 해버렸습니다. 안 그래도 잘 몰라서 헤매고 있었는데 옆에 있는 종이 개입을 하니까 스님들이 ‘종놈 주제에 네가 뭘 아냐’ 하고 막 성질을 내고 난리를 폈어요. 그러자 원효가 ‘아이고,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입에서 헛소리가 나왔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판이 다 깨지니 제자들이 스승한테 찾아가서 ‘아무리 읽어도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니까 스승이 원효대사가 쓴 ‘대승기신론소’라는 책을 한 권 턱 주는 거예요. 그걸 딱 읽어보니까 조목조목 쉽게 정리가 되어 있었습니다. ‘역시 원효대사야!’ 하고 감동을 하면서 그 글을 읽어보니 조금 전에 청소하던 부목이 하던 얘기하고 비슷한 거예요. 그 부목이 지금까지는 그냥 종으로만 보였는데 다들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겁니다. 원효대사는 자신의 신분이 노출될 위기에 처한 것을 알고 밤에 아무도 몰래 절을 빠져나가기로 했어요. 그래서 모두 잠든 후에 문을 열고 나오는데, 문간방에 사는 방울 스님이 방문을 탁 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원효, 잘 가!’

그때 원효가 확 깨달았어요. 원효는 방울 스님을 불쌍히 여겨서 도와준 거예요. 방울 스님을 부처나 도인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을 못 했습니다. 항상 방울 스님이 불쌍해서 도와줬는데, 오히려 방울 스님은 원효가 보살행을 한 번 해보겠다고 나름대로 수행하는 모습을 다 지켜보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방울 스님의 눈에는 원효의 수행하는 모습이 다 보였는데, 원효에게는 방울 스님이 안 보였죠. 마치 원효의 눈에는 그 절에서 공부하는 스님들의 수준이 다 보였는데, 그 스님들은 원효가 안 보였던 것과 같았습니다. 그 스님들은 원효를 공경한다고 하면서 실제로 존재하는 원효에 대해서는 막 구박을 했잖아요. 이때 원효대사는 ‘여기 마땅히 구제해야 할 중생을 두고 어디 가서 별도의 중생을 구제한단 말인고’ 하는 대안대사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깨달았습니다. 그전까지는 천민촌에 불쌍한 중생이 있는데 자신이 외면했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자신이 언젠가 천민촌으로 가서 그들을 도와야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본래 중생이라고 할 게 없었던 거예요. 중생이라는 것 또한 어리석은 마음이 짓는 상에 불과한 것이지요.

원효는 방울 스님을 불쌍하다고 여겼는데, 정말로 방울 스님이 불쌍한 거였어요? 원효가 보기에 불쌍한 거였어요? 원효가 보기에 불쌍한 것이었습니다. 모양과 형색을 보고 불쌍하다는 상을 지었고, 또 그걸 구제한다고 노력했던 겁니다. 눈을 뜨고 보니 방울 스님은 불쌍하지도 않고 구제할 것도 없었던 거예요. 그것처럼 부곡에 사는 천민들은 불쌍한 중생이 아니었습니다. 원효는 크게 깨닫고 나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다시 천민촌으로 들어간 게 아니라 그들과 친구가 되기 위해 그곳으로 들어갔습니다.

유명한 원효를 버리고 친구가 되기 위해
그런데 새로운 난관에 부딪혔어요. 부곡에 사는 천민들이 원효대사 오셨다고 박수치고 떠받들어 버리니까 아무리 친구가 되려고 해도 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 이건 누구 책임일까요? 내가 그들을 불쌍하게 본 건 내 눈이 어리석어서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이제 눈을 뜨고 너와 친구가 되겠다고 갔는데 그들이 성인이 오셨다고 떠받들어서 친구가 안 되는 건 그들의 책임이라 할 수 있잖아요. 내 눈이 어두워서 부딪힌 건 내 책임이지만, 상대의 눈이 어두워서 나한테 와 부딪힌 건 상대의 책임이듯이요. 그러나 원효는 이것도 자기 책임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 유명한 원효라는 허상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본 겁니다. 그래서 원효는 그 유명한 원효를 버려버렸어요. 즉, 요석공주와 물의를 일으키고 파계를 한 겁니다.

그러자 지금까지 원효대사를 추앙하던 모든 사람이 ‘훌륭한 줄 알았는데 순 엉터리였구나’ 하고 원효를 무시해 버렸어요. 세상에서 매장이 된 거죠. 그런데 부곡에 사는 천민들은 원효가 자기들과 비슷한 처지가 되어 버리니까 원효와 금방 친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원효는 뽕따는 아낙네, 술 파는 사람, 천민, 뱀 잡는 땅꾼, 이런 사람들과 노래하고 춤추면서 그 노래와 춤 속에 걸림 없는 도리를 넣어서 그들을 깨우쳤습니다. 원효라는 모양과 형상이 없어지고 그들과 하나가 된 겁니다. 동시에 역사 기록에는 온 천지에 원효가 나타납니다. 우리나라에 어디를 가도 원효가 창건했다는 절이 있고, 동굴마다 원효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원효는 없어져 버렸고, 누가 원효인지도 몰라요. 그러나 원효는 곳곳에 나타나는 대승보살의 화현이 되었습니다.

원효대사의 이런 모습에서 우리는 상을 짓지 않는 길이 무엇인지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도무지 꿈에서 깨어나 본 적이 없이 살아가거나, 설령 꿈에서 깨어나 본 적이 있다 하더라도 다시 꿈속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늘 깨어있어야 해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지금 여기 깨어있으라고 말씀하신 거예요.

이렇게 금강경에서는 깨달음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을 계속 반복해서 하고 있습니다. 제법이 공한 도리, 무유정법, 무주상보시,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중도의 원리, 연기법, 이런 법을 받아 지녀야 깨달음에 이를 수 있습니다. 복을 구하거나 상에 집착하게 되면 해탈과 열반에 이를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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