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불교에 관심이 있어서 이 자리에 모였을 텐데요. 불교만의 독특함이 무엇일까요? 그 얘기를 조금 해드리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부처님이 처음 말한 것이 여러 개가 있겠지만 저는 가장 대표적인 것이 두 가지라고 생각해요. 첫째, 연기법이고 둘째, 중도입니다. 연기법은 이 세상을 우리가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한 세계관을 말합니다. 중도란 우리가 어떻게 실천할지에 대한 실천관을 말합니다. 이 두 가지 역시 연관되어 있습니다. 연기법이기 때문에 중도이고, 중도이기 때문에 연기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불교의 세계관, 모든 존재는 서로 연관되어 있다
부처님 당시에는 그것이 어떤 철학이든 어떤 종교든 모든 사상의 세계관이 이 세상을 개별 존재의 집합이라고 보았습니다. 예부터 ‘삼라는 만상이다’ 이렇게 표현하곤 했죠. 개별 존재는 각각 자기라고 하는 독특한 특성을 갖는데, 그런 개별 존재의 집합이 이 세상이라는 겁니다. 사회라는 것은 사람들의 집합 아닙니까? 그래서 사회의 기본 특징에 대해 홉스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것처럼 이 세상을 개별 존재의 집합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자연 현상에 대해서도 ‘약육강식’, ‘적자생존’ 이렇게 이해했던 것입니다.
다윈은 모든 존재가 원래부터 그렇게 있었던 게 아니고 뭔가 변해서 점점 진화해 온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수많은 화석을 진열해 놓고 보니까 ‘처음부터 하나님이 만들어서 이렇게 된 게 아니고 점점 변화해 온 것이구나’ 하는 사실을 발견해서 그걸 ‘진화’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진화의 원리가 무엇인지는 몰랐어요. 그 후 진화의 원리에 대해서는 많은 이론이 나왔습니다. 적자생존, 용불용설 등 온갖 이론이 나왔다가 돌연변이설까지 나왔고, 최근에 와서는 유전자까지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런 진화의 원리를 적자생존 또는 약육강식이라고 이해한 이유는 이 세계가 개별 존재의 집합이라고 봤기 때문입니다. 뱀이 개구리를 잡아먹듯이 모든 존재가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의 원리로 살아간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고 나서 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았더니 어떤 존재도 개별적 단독자라는 것은 없고 서로 연관되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겁니다. 이것이 연기법이에요. 말미암을 연(緣), 일어날 기(起), 즉 말미암아 일어난다는 거죠. 이것은 그 당시에 누구도 생각해보지 못한 불교만의 독특함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으셨다고 할 때 무엇을 깨달았느냐? 바로 연기법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와 실제 세계가 다르다는 거예요.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는 개별 존재의 집합인데, 실제의 세계는 연기된 세계라는 겁니다. 이에 대해서 부처님께서는 한마디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이것이 생겨남으로 저것이 생겨나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
이 문장에서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라고 하는 것은 공간적 연관을 뜻합니다. ‘이것이 생겨남으로 저것이 생겨나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라고 하는 것은 시간적 연관을 뜻합니다. 시간적 연관이란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이것을 나중에 교리로 정리한 것이 바로 ‘무아(無我)’와 ‘무상(無常)’입니다. ‘무아’와 ‘무상’이 연기법입니다. 연기법을 알면, 즉 존재의 참모습을 있는 그대로 알게 되면 괴로울 일이 없습니다. 이것을 ‘열반(涅槃)’이라고 해요. 그런데 그걸 알지 못하면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고(苦)’라고 해요. 이렇게 불교의 가르침은 아주 단순합니다. 불교의 목표는 괴로움이 없는 상태, 즉 열반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가 갖는 독특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연기법은 오늘날 자연 과학적 관점에서 봐도 아무런 모순이 없습니다. 물의 근원은 물방울이죠. 물방울을 계속 쪼개서 더는 쪼갤 수 없는 단계까지 이르렀다면 이것을 물의 근본 알갱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입자론에서는 물 분자라고 하죠. 물 분자를 더 쪼갤 수 있을까요? 가능합니다. 분자는 더 작은 알갱이인 원자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물이라는 최소의 알갱이조차 단독자가 아닌 산소와 수소의 결합체입니다. 그러면 산소와 수소는 단독의 알갱이입니까? 단독의 알갱이라고 주장하는 게 돌턴의 원자설이죠. 그런데 원자는 다시 원자핵과 전자, 다시 양성자와 중성자와 중간자 등 소립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원자조차 단독자가 아니고 다시 여러 소립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거죠. 그러면 소립자는 단독의 알갱이일까요? 아닙니다. 쿼크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렇게 오늘날의 과학 연구 결과와 비교해 봐도 불교는 아무런 모순이 없습니다.
그러면 생명은 어떻습니까? 생명에도 종자가 있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생명의 근본을 찾아 연구를 한 결과 유전자를 발견했습니다. 유전자 역시 수많은 원자와 분자들이 고도의 설계에 의해 결합된 것에 불과하잖아요. 그 결합을 바꾸면 어떻게 될까요? 유전자를 조작하면 종자 자체가 바뀌어 버립니다.
2500년 전에 부처님은 생물학을 연구한 것도 아니고, 물질을 연구한 것도 아니에요. 부처님은 우리의 정신 작용에 대해서 연구하셨습니다. 정신작용의 원리와 근본을 연구해서 해탈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발견한 것은 오늘날 과학의 발달로 밝혀진 물질 세계의 원리나 생명의 원리에 적용해도 원리적으로 모순이 안 됩니다. 그렇다고 ‘불교는 과학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좀 과장된 표현입니다. 다만 과학적 사실과 불교의 가르침 간에는 상호 논리적 모순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죠. 그러니 이런 불교의 개념을 이해해서 물질 세계에 거꾸로 적용하면, 물질 세계에서 아직 해명하지 못한 원리를 밝힐 수 있는 어떤 아이디어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특히 연기법은 물질 세계든 생명 세계든 어디에든 적용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사회 과학이라는 것도 일종의 연기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공간적 연관뿐만 아니라 시간적인 연관도 마찬가지예요. 시간적인 연관이 바로 ‘인연과보’입니다.
불교의 실천론, 양극단에 치우치면 안 된다
불교가 갖는 독특함은 실천 방법에도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 인도 전통 사상에는 쾌락주의와 고행주의라는 두 가지 부류가 있었습니다. 욕망이나 욕구가 있을 때 그것을 충족시키면 기분이 좋죠. 이것을 즐거움이라고 합니다. 즐거움이 곧 행복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쾌락주의’라고 합니다. 쾌락주의에 의하면,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 더 즐거워야 하고, 더 즐겁기 위해서는 자기가 원하는 것이 더 많이 이루어져야 됩니다. 그러나 붓다는 이런 전통 사상을 부정했습니다. 물론 전통 사상을 부정한 것은 붓다만의 고유한 행위는 아니었습니다. 부처님이 살던 당시 사회는 브라만교를 중심으로 하는 전통적인 계급 질서가 붕괴되고 있었습니다. 기존 사상이 변화된 세계를 설명하지 못하니까 새로운 주장을 하는 신흥 사상가들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주류였던 브라만교는 브라만이라는 계급으로 태어난 사람만 사상가가 될 수 있지, 다른 계급은 될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여기에 반대하는 신흥 사상가들은 출생이 아닌 자기 결단에 의해서 수행자의 신분이 결정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결단이란 집을 떠나고 가족을 버리는 것을 의미했어요. 욕망을 충족해서 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이 모든 고의 근원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욕망을 용납하지 않고 철저하게 억제해야 진정한 해탈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을 ‘고행주의’라고 합니다.
부처님은 왕자로 태어나서 자랄 때는 주류 사상계에 있다가, 주류 사상의 모순을 느끼고 비주류 사상계 쪽으로 가서 출가 사문이 되었습니다. 출가한 후에는 6년 간 고행주의 쪽의 수행법을 선택해서 최고의 극심한 고행을 했습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주류와 비주류 양쪽을 다 경험해 봤기 때문에 그 모순을 직시하고 이 둘을 뛰어넘는 제3의 길을 제시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중도(中道)’입니다.
중도라는 용어는 다 들어보셨겠지만, 구체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을 거예요. 예를 들어, 명상을 할 때 다리가 아프다면 다리를 펴고 싶겠죠? 다리가 아프다고 다리를 편다면 그건 쾌락주의입니다.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에 해당합니다. 반대로 다리가 아프지만 참는다면 그건 고행주의입니다. 고행은 긴장이 되잖아요. 참으면 편안하지 않고 긴장이 되니까 열반에 이르기 어렵습니다. 다리를 펴면 욕구를 따르기 때문에 과보가 생기고, 참으면 욕구의 저항을 받아서 스트레스가 생깁니다. 둘 다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이 아닙니다. 붓다의 위대함은 이 둘을 뛰어넘은 것입니다. 붓다는 이 둘이 서로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욕구에 반응한다는 면에서는 같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욕구를 따르는 것만 욕구의 노예가 아니고, 욕구에 저항하는 것도 욕구의 노예라는 거죠. 욕구가 일어날 때 욕구를 따르거나 욕구에 저항하는 것은 모두 욕구에 대한 반응입니다. 둘 다 욕구에 대한 반응인데 반대로 반응하는 것일 뿐이에요. 우리는 늘 이렇게 욕구에 반응하고 있습니다. 기분이 나빠도 참습니다. 참으면 괴롭죠. 괴로우니까 감정이 터집니다. 감정이 터지면 과보가 따르니까 ‘조금만 더 참을 걸…’ 하고 후회를 합니다. 그래서 다음에 또 참고, 참다가 터지고, 이렇게 고행주의와 쾌락주의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붓다가 제시한 새로운 길은 욕망에 반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즉, 다리가 아플 때 그냥 통증을 느끼는 거예요. 통증이 일어나면 우리는 ‘싫다’ 하는 반응이 먼저 일어나잖아요. 그런데 ‘좋다’, ‘싫다’ 하는 반응을 하기 전에 다만 느낄 뿐이에요. 통증이 일어나면 ‘통증이 있구나’ 하고 알아차릴 뿐입니다. 알아차릴 뿐 다리를 안 폈으니까 외부적으로 드러난 것은 고행주의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를 악다물고 참는 게 아니니까 스트레스를 안 받습니다. 행하지는 않는데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요. 수행을 할 때 이를 악다물고 하면 그것은 ‘단련’ 또는 ‘수련’이지 수행은 아닙니다.
‘모든 긴장을 풀고 편안한 가운데 다만 알아차린다’
이것이 붓다가 발견한 제3의 길입니다. 이 방법을 통해서 붓다는 해탈에 이르렀습니다. 부처님이 깨닫고 나서 처음으로 한 설법의 내용은 세계관이 아니고 방법론이었습니다. ‘수행자는 양극단에 치우치면 안 된다, 양극단을 버려라’ 이렇게 중도를 먼저 설하고, 그리고 사성제를 설하고, 팔정도를 설했습니다. 이것이 초전법륜(初轉法輪)의 내용입니다.
부처님 당시 초기 불교의 가장 핵심은 중도와 연기법(緣起法)입니다. 열반이나 해탈, 붓다라는 용어는 부처님 이전에 이미 인도의 전통 사상에 있었던 용어입니다. 그러나 중도와 연기법은 새로운 개념이었습니다. 수행의 목표는 열반을 증득하는 것이고, 열반을 증득한 자가 붓다입니다. 열반을 증득하기 위해서는 무지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이것을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무지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사실을 사실대로 아는 것이고, 그 사실이란 바로 연기입니다. 연기를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이 ‘무상’과 ‘무아’입니다. 당시 인도 전통 사상에서는 ‘아(我, 나라고 할만한 실체)’와 ‘상(常, 변하지 않고 항상함)’을 강조했기 때문에 그걸 부정하기 위해서 무상(Anicca), 무아(Anatta)라고 표현한 거예요.
제가 즉문즉설을 할 때는 사상이나 철학에 대한 이론적인 얘기를 거의 하지 않는데, 여기는 서울대학교니까 여러분 모두 공부 꽤나 하는 사람들이 모였잖아요. 여러분 같은 사람들은 이론적인 얘기를 해야 관심을 갖기 때문에 서두에 이야기를 길게 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연기법과 중도를 얘기해야 법문이 아니에요. 어떤 사람이 대화를 하다가 괴로움에서 벗어난다면 그 대화를 법담이라고 합니다.”
<서울대 불교청년회초청 법륜스님 강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