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은 간단히 줄여서 『법화경』이라고도 합니다.
이러한 『법화경』은 부처님의 묘한 가르침을 담고 있다고 해서 ‘묘법’이라고 합니다. 묘법은 마치 저 진흙 속에 뿌리를 박고 있으면서도 수면 위로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연꽃과 같은 것입니다. 혼탁한 세상 가운데 살아가면서도 얼마든지 불법의 진수를 체험하고 꽃피울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수행을 하려면 세간을 떠나야 잘 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법화경』에 의하면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세간 속에서도 얼마든지 수행은 가능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그것은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일대사인연은 무엇인가? 우리 모두에게 불지견(佛知見)을 열어 보이고 깨달아 들어가도록 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불지견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부처로서의 지견, 즉 깨달음의 지견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서, 나도 이미 부처님과 같은 깨달음의 성품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직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이제부터 닦아나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간직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이미 갖추고 있음을 확신하고 무한대로 써나가면 될 따름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삼승(三乘)은 방편이요, 일불승(一佛乘)만이 진실이라고 하는 방편품의 핵심입니다.


『법화경』의 일곱 가지 비유, 즉 법화 7유는 모두 이러한 내용을 부연 설명해주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첫 번째, 불난 집의 비유는 불타는 집에서 놀이에만 정신이 팔려 있는 아들들을 구해내기 위해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온갖 수레를 준다고 해서 밖으로 끌어내지만, 모든 아이들에게 한결같이 가장 훌륭한 수레를 주게 됩니다.
이것은 처음에는 소원성취나 마음의 평화 등을 얻기 위해 불도에 입문하지만 결국은 모두가 부처님 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가난한 아들의 비유는 자신이 본래 장자의 아들임에도 이를 모르고 궁핍한 거지생활을 하는 사나이를 다시 집안으로 끌어들여 가업을 잇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본래 부처님의 아들로서 가업을 잇는다고 하는 것이지요.

세 번째, 초목의 비유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저 단비와 같이 한 맛이지만, 나무는 나무대로 풀은 풀대로 각각 빗물을 받아 들이듯이 중생들도 근기에 따라 부처님 가르침을 다르게 받아 들인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한 맛인 일불승에 돌아간다고 하는 것이지요.

네 번째, 가짜 도성의 비유 역시 성불의 길에 지레 겁먹는 이들을 위해서 방편으로 중간에 가짜 도성을 만들어 용기와 희망을 준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옷 속 보석의 비유는 자기 옷 속에 천금이나 되는 보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궁핍하기 짝이 없는 생활을 하는 자와 마찬가지로, 우리 중생들이 스스로 불성을 이미 간직하고 있음에도 다만 중생지견(衆生知見)에 머물러 있는 것을 비유한 것입니다.
‘만일 한량없는 백천만억 중생이 여러 가지 고뇌를 받을 때에 이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듣고 일심으로 그 이름을 부르면, 관세음보살이 곧 그 음성을 듣고 모두 해탈케 하느니라.’
이것은 실제로 외부에 있는 관세음보살이 고뇌를 해탈케
여섯 번째, 상투보석의 비유는 전륜성왕이 오직 자신의 후계자에게만 상투속의 단 하나 밖에 없는 보석을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부처님께서 우리를 후계자로 생각하고 모든 가르침을 베푼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의사 아들의 비유 또한 뛰어난 의사인 아버지만 믿고 약을 복용하지 않는 아들들을 위해서 짐짓 다른 나라에 가서 머물며 죽었다는 말을 전해 약을 복용토록 하는 것처럼, 부처님께서도 열반의 모습을 보여주시지만 여래의 수량은 본래 한량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래께서는 이미 오래 전에 성불하셨으며, 다만 중생제도를 위해서 이 땅에 오시고 가시는 모습을 보이실 따름이지 실로 오고 감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 모두를 부처님으로 만들고자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일대사인연입니다.

상기 일곱 가지 비유는 한결같이 우리에게 중생지견에 머무르지 말고 어서 불지견을 열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내가 중생이란 생각에 빠져있는 한, 어쨌든 중생인 것입니다. 아무도 건져줄 수 없습니다. 비록 미흡하긴 하더라도, 내가 본래 부처란 확신을 가져야 비로소 성불의 길이 열리게 됩니다.
육조스님은 사람의 마음이 사량 분별치만 않으면 본래 근원이 공적해서 잘못된 견해를 여의는 것이 곧 일대사인연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한 생각 일으키지만 않으면 그대로 부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수많은 생각들이 일어나곤 합니다. 이럴 때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이를 잘 설명해주고 있는 부분이 바로 「관세음보살 보문품」입니다.
해준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마음 가운데 이미 갖추어져 있는 대자대비심을 불러일으킬 때 사소한 시비와 고뇌는 눈 녹듯이 사라져버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어떤 이가 이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받들면, 큰 불 속에 들어가도 불이 그를 태우지 못하며, 큰 물에 떠내려가더라도 곧 얕은 곳에 이르게 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실제로 그렇게 될 수도 있겠지만, 크게 화나는 일이 생기거나 아주 우울한 경우가 닥친다고 하더라도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지송하면, 관세음보살의 자비심을 염하는 힘(念彼觀音力)으로 성냄과 우울증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의미로 새겨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오묘한 가르침을 담고 있는 『법화경』은 참으로 희유합니다.
그러므로 이 경전을 받아 지녀 읽거나 외우거나 바르게 생각하거나 수행하고 배우거나 옮겨 쓰면, 이는 곧 석가모니불을 만나 뵙고 그로부터 직접 경전을 들은 것과 같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석가모니불을 공양함이 되며, 부처님께서 착하다고 칭찬하심을 받으며, 또한 석가모니불께서 손으로 머리를 어루만져주심이 된다고 합니다. 어찌 수지 독송하거나 베껴 써서 쌓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월호스님>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