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제행무상이 왜 중도인가?

 

2.연기가 왜 중도인가?

 

3.공이 왜 중도인가?

 

중도에 대한 이해가 확실하면 제행무상이든 제법무아든, 연기든, 공이든 다 이해하게 될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성취한 후 제일 먼저 오비구를 찾아가셔서 "나는 중도를 정등각했노라"고 선언하시니

 

이것을 초전법륜이라 합니다. 따라서 중도란 부처님의 깨달은 내용이며, 부처님께서 깨달은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진리의 참 모습이므로 중도란 진리의 참 모습을 말합니다.

 

 

그러면 중도를 좀 더 자세히 말씀드려 보겠슴니다.

 

부처님께서 중도(中道), 즉 진리의 참 모습을 깨닫고 보니 진리의 참 모습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

 

니면서 또한 있고 또한 없는 것" 이라는 것입니다. 즉 있음의 변(邊)도 아니고 없음의 변(邊)도 아니면서 또

 

한 양변을 아우러므로 이것을 치우침이 없는 것 즉 중도라합니다. 있음과 없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것과

 

저것, 옳음과 그름, 선과 악, 높고 낮음, 남과 여도 그렇고 일체 모든 것 즉 제법이 다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 양변을 쌍조(雙照)라고도 합니다. 서로 상대를 비추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 양변이 소멸한 공을 쌍차(雙遮)라고도 합니다. 서로 상대를 막아서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마치 음전자와 양전자가 서로 비추어 쌍으로 나타나고, 서로 막아서 쌍으로 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을 물리학에서는 쌍생성이라고 합니다.

 

이 쌍조가 곧 십이연기의 순관으로서 사성제의 집(集)제이고, 쌍차가 곧 십이연기의 역관으로서 사성제의

 

멸(滅)제입니다.

 

가전연경에서 "가전연아. 바른 지혜로 여실히 세간의 집(集)을 관하는 자에게는 이 세간에 없음(無)이 없다.

 

가전연아. 바른 지혜로 여실히 세간의 멸(滅)을 관하는 자에게는 이 세간에 있음(有)이 없다."

 

(남전대장경제13권,상응부경전2 가전연경p24,백일법문p106,112)

 

이렇게 십이연기를 순관과 역관으로 관찰하여 설명하는 것을 증명중도(證明中道)라고 합니다.

 

결론적으로 부처님이 깨닫고 본 연기의 내용인 여실한 세간의 모습은,

 

집(集)이 곧 멸(滅)이라는 것이며 이것이 중도라는 것입니다.

 

 

이미 이해를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것은 당연한 말이겠지만, 처음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면 잘 이해하기

 

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깨닫고 진리를 적나라하게 들여다 보니 바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물과 파도를 비유로 한 번 설명해 보자면, 제법 즉 보이고, 들리고, 냄새나는 것, 맛, 닿이는 것, 생각으로 아

 

는 정신적인 것등 일체 우주 만법을 파도라고 하면 그것들이 다 부처님께서 깨닫고 보니 공, 마음, 성품(불

 

성,자성,법성)으로 물에 해당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영원토록 수없는 각각의 파도가 쉬임없이 일어났다가 꺼지지만 사실은 알고보니 그 파도는 항상 같은 그 물

 

의 출렁임으로서 아무리 수없는 파도가 쉬임없어도 항상 그 물 하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로 여기서 물에 해당하는 비유가 공이며 마음이며 성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체 제법은 근본적으로 마음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라는 것은 반야심경에서 말하듯이 모양도 없고 크기도 없고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공이라 합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으니 없음(無)이라고 하면 될 것인데, 굳이 공(空)이라고 한 것은 반야가 있어서 아주 없

 

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반야가 있기 때문에 이것을 불성이라고 합니다. 반야란 바로 부처님의 원만덕성인 우리 마

 

음작용입니다.

 

그것은 무량무변의 다함없는 지혜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성품 즉 불성이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알고보면 일체 제법, 가없는 이 우주 법계는 불성의 작용입니다.

 

여기서 그 작용하는 원리를 설명한 것이 연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기란 곧 성기(性起)와 같은 말로서 성품이 일어나는 것 즉 성품.불성의 작용.활동이 연기입니다.

 

이것을 화엄종에서는 진공묘유라고 합니다. 곧 진공반야입니다. 반야공을 말합니다.

 

진공이란 반야의 공간적 표현으로 즉 체(體)를 말하며, 반야란 진공의 기능적 표현으로 즉 용(用)을 말합니

 

다.  곧 중도입니다.

 

그러므로 공과 반야는 다른 몸이 아니고 즉해 있는 하나입니다.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인 것과 같습니다.

 

이제 정리를 하자면 일체 제법은 그 근본 본질은 공(마음.성품.불성.자성.법성)이므로 그 공이 작용.활동하는

 

모습 즉 연기하는 모습이 일체 만법이라는 것입니다. 즉 중도라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유.무, 선.악, 시.비등의 일체 제법은 각기 양변임과 동시에 그 근본은 공.마음....

 

하나인 것을 중도라합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공은 바로 불성으로서 일체의 다함없는 원만덕성을 갖추고 있어서 우리가 참선을 해서 참

 

자기인 이 마음 즉 중도를 깨달으면 바로 부처입니다. 중도를 걸림없이 씀니다. 영원히 자유한 해탈입니다.

 

이것을 화엄경에서는 이사무애(理事無碍), 사사무애(事事無碍)라 합니다.

 

우리는 만유의 본성입니다.

 

이런 사실은 요즘에는 벌써 오래 전에 과학에서 아인쉬타인의 상대성 이론에서 4차원 세계와 등가원리라는

 

것이 나와서 여지없는 사실임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4차원이란 시공이 융합하는 세계를 말하는데 가령 내가 공간적으로 여기 있으면서 동시에 다른 데에서도

 

있을 수 있고, 시간적으로 지금 여기 있으면서 과거나 미래에도 갈 수 있는 것을 말하며 또 금고의 문을 열

 

지 않고도 물건을 꺼냈다가 넣었다가 하는 것을 말한다고 합니다.

 

현재는 이 이론은 과학자라면 누구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다만 현실화하기 위해 경쟁하고 있습니다.

 

또한 등가원리에서 E(에너지) = m(질량)c(상수)²이라하여 무형(에너지)이 곧 유형(질량)임이 밝혀 졌고,

 

이는 곧 불생불멸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것의 응용이 바로 원자탄입니다.

 

또 동물 세포나 식물 세포가 똑 같고 그 세포 속에는 DNA라는 물질이 있어서 정신 활동을 하고 있음이

 

증명되었습니다.

 

이론 물리학에서는 소립자도 자유의사를 갖고있다고 주장한다고 합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물심불이(物心不二)라 합니다. 물질이면서 마음이고 마음이면서 물질입니다.

 

곧 중도입니다.  하물며 과학의 궁극 진리인 부처님의 말씀이겠습니까!

 

ㅡ 성철스님의 법문집 `영원한 자유`에 소개하고 있는 말입니다. `백일법문`과 더불어 읽어 보시면 불교에 관

 

한 어떤 이론도 이해할 것이며 나아가 가늠하고 간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 ㅡ

 

 

우리는 부지런히 수행하여 이몸 죽기 전에 깨달아서 영원토록 자유하면서 만 중생을 위하여 제도하는 향상

 

일로의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다.

 

하나 덧붙이자면 제행무상이라는 것은 이 모든 연기하는 성품의 작용.활동은 쉬임없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제법의 근본이 공이며 또한 그것은 마음.성품으로서 즉 생명으로서 무한 역

 

동하는 것인 바 머물지 않기 때문입니다.

 

중생은 이 근본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연기한 겉모양이 진실한 것인 줄 알고 불쌍하게 집착하므로 마치 저

 

파도를 진실한 모습인 줄 알고 집착하지만 파도는 그런 중생심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무정하게 스러져가므

 

로 중생은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 파도는 아무런 허물이 없으며 다만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로

 

여겨서 스스로 집착하여 괴로워하는 중생만 고달플 뿐입니다.

 

중생은 아무리 과학적으로 부수고 헤아려도 그 본질인 공과 연기하여 나타난 겉 모습을 동시에 볼 수는 없

 

습니다.

 

산은 분명 산이요 물은 분명 물이지만 다만 겉보기의 산.물만 볼 뿐 그 산.물의 진정한 모습인 공은 끝내 볼

 

수 없어서 겉모습에만 집착하고 맙니다. 즉 중도를 볼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토록 자유자재한 우리의 성품을 즉해서 쓸 수는 없습니다.

 

어서 빨리 참선을 하여 그 근본 즉 바로 참 자기인 마음.성품을 깨닫는 방법이외에는 그 허상 겉 모습에만

 

집착하여 수업수생(隨業隨生)하는 허물의 영원한 생사고통을 벗어날 길은 없습니다.

 

중도를 중용(中庸)과 혼돈하여 그 이해에 스스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중용의 뜻은 희로애락등의 감정이 조절된 상태의 중생심을 의미하며, 너무 과하지도 말며 부족하도 않게 해

 

야한다는 사람들의 처신에 대한 유교의 사상을 말합니다.

 

단순한 중간적인 뜻으로 불교의, 부처님께서 깨달아 본, 만법의 근본 모습을 이르는 중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말입니다.

 

그리고 색즉시공 공즉시색등에서 `즉`이라는 말은 `그대로`라는 뜻입니다.

 

가전연경등에서는 `법이 그대로(法爾)다`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것은 `자연법 그대로다 `라는 뜻이 아니라

 

`자연법 즉 제법(諸法)이 진여법(眞如法) 즉 공(空)그대로다`라는 뜻입니다.

 

다시말하자면, 얼음이 녹으면 물이 되고 물이 얼면 얼음이 됩니다. 이런 것을 얼음이 즉 물이라고 하지 않습

 

니다.

 

물질이 에너지가되고 에너지가 물질이 되었습니다. 이런 것을 물질이 즉 에너지라고 하지 않습니다.

 

`즉`이라는 말은, 물이 녹는다 든가 언다 든가 물질이 에너지로 된다 든가 환원한다 든가하는 것 처럼 조금

 

이라도 어떤 과정을 거친다는 것이 아니라,

 

물 그대로 얼음이며 얼음 그대로 물이고, 물질 그대로 에너지이며 에너지 그대로 물질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물이 녹는다 든가 언다든가, 물질이 에너지로 된다든가 에너지가 물질로 전환한다든가 하는 것도 근본

 

적으로 그것이 즉해 있어서 같은 것, 즉 그대로 이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우리의 중생심도 마친가지입니다.

 

근본적으로 진여공인 우리의 참 모습 마음이 무량무변한 부처님의 원만덕성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즉 불

 

성이기 때문에 중생심의 작용이 있는 것이고 또한 그것을 깨달으면 본래 그대로인 불성의 다함없는 부처님

 

의 원만덕성 즉 무량무변한 능력 즉 그 작용을 즉해서 그대로 쓰는 것입니다. .

 

그것을 진리를 바로 보고 즉 깨닫고 부처가 된 것이라 하며 그것을 오비구에게 처음으로 말씀하신것이 `

 

"중도 대 선" 이라하고 `초전법륜`이라 합니다.

 

공이 곧 우리의 마음. 불성이며 시방세계 만법이며 이것이 중도입니다.

 

오직 깨달아야만 이것을 바로 보며 즉 해서 씁니다.

 

그래서 우리가 공안을 타파하여 자성을 철견하면 삼신사지(三身四智)를 원만 증득하고 전기대용(全機大容)

 

이 일시에 현전하는 것입니다.(성철스님의 선문정로 서언)

 

 

 

어떤 사람은 부처님의, 거문고 줄을 적당히 하여야 그 소리가 좋은 것처럼 수행 공부도 적당하게 하여야 한

 

다는 데 대한 비유를 중도에 대한 비유라고 하는데, 이것은 그 수행하는 방편을 적당하게 하는 것 즉 중용의

 

뜻이지, 진리의 참 모습인 공과 제법이 서로 무애하게 융합하는 것을 말하는 중도에 관한 것이 아닌데 잘 모

 

르고 하는 말입니다.

 

제법무아라는 말도 있는데 이것은 대승불교에서는 공이라고 표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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