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正信希有分 (정신희유분)
須菩堤 白佛言 世尊, 頗有衆生 得聞如是 言說章句 生實信不. 佛告須 菩堤 莫作是說 如來滅後
수보리 백불언 세존, 파유중생 득문여시 언설장구 생실신부. 불고수 보리 막작시설 여래멸후
後五百歲 有持戒修福者 於此 章句 能 生信心 以此爲實 當知是人 不於 一佛二佛三四五佛
후오백세 유지계수복자 어차 장구 능 생신심 이차위실 당지시인 불어 일불이불삼사오불
而種善根 已於 無量 千萬佛所 種諸善根 聞是章句 乃至一念 生淨信者. 須菩堤, 如來 悉知悉見
이종선근 이어 무량 천만불소 종제선근 문시장구 내지일염 생정신자. 수보리, 여래 실지실견
是諸 衆生 無復 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無法相 亦 無非法相. 何以故. 是諸衆生 若心取相
시제 중생 무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무법상 역 무비법상. 하이고. 시제중생 약심취상
卽爲著我人 衆生壽者, 何以故 若取法相 卽著我人衆生壽者, 若取非法相 卽著我人衆生壽者. 是故
즉위저아인 중생수자, 하이고 약취법상 즉저아인중생수자, 약취비법상 즉저아인중생수자. 시고
不應取法 不應 取非法. 以是義故 如來常設 汝等比丘, 知我說法 如筏喩者 法尙應捨 何況非法.
불응취법 불응 취비법. 이시의고 여래상설 여등비구, 지아설법 여벌유자 법상응사 하황비법.
만나기 어려운 부처님 법을 바로 믿고 행하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되, "세존이시여, 어떤 중생이 이런 이야기를 듣고 '정말 그렇다'고 할 수 있을까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시되, "그런 소리 하지 말아라. 이 여래의 몸뚱이가 없어진 오백년 후에 계행을 지키고 복을 닦는 자가 부처님 말씀에 '그것이 진실이다'라고 생각한 이 사람은 한 부처나 두 부처나 셋 넷 다섯 부처님에게서 착한 마음을 닦은 것이 아니라 한량없는 천이나 만분의 부처님 계신 곳에서 모든 착한 마음을 닦으며, 그 이야기를 듣고 '참 이말이 옳구나' 그렇게 생각했던 사람이니라.
수보리야, 여래는 그러한 중생이 이와같이 한량없는 복을 짓고, 덕을 쌓는 것을 다 아시고 다 보시느니라. 왜냐하면 그 모든 중생이 나라는 생각과 남이라는 생각과 중생이라는 생각과 수자라는 생각이나 법이라는 생각이나 법 아니라는 생각이 모두 없기 때문이니라. 모든 중생이 마음의 모양(고정된 관념)에 집착하면 곧, 나라는 생각과 남이라는 생각과 중생이라는 생각과 수자라는 생각이 있게 된다. 만약에 법상(만유의 형상)을 취해도 역시 나라는 생각과 남이라는 생각과 중생이라는 생각과 수자라는 생각이 있게 된다. 이러하기 때문에 법도 취하지 말 것이며, 또 법 아닌 것도 갖지 말아라(말들었으면 그대로 실행을 해야 하느니라) 이러한 이유로 여래가 항상 너희 비구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설명한 법은 마치 강건너가는데 쓰는 뗏목이나 널조각과 같다. 그런데 마음이 밝으면 즉, 강건너 갔거든 배를 내려야 되는데, 강을 건너가고도 여전히 배를 타고 있으면 어떻게 되느냐. 법도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법 아닌 것을 그대로 갖고 있다면 곤란하지 않겠느냐. "
6. 올바른 믿음을 희유하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먼 뒷날 많은 중생들이 이와같은 부처님의 말씀이나 경전을 진실이라고 믿는 마음을 일으키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시되
걱정하지마라. 여래가 이 세상을 떠나 5백세가 지나가도 계를 지니고 복을 닦는 자만 있으면
능히 믿는 마음을 일으키고 그것을 진실이라고 여기게 될 것이다.
믿음에 대한 것이군요.
믿음! 이것은 참 중요한 말씀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여기 금강경과 화엄경에서 믿음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믿음은 어느 종교나 어느 신선한 단체나 다 필요한 것입니다.
특히 신을 믿는 유일신 종교에서는 특히 강조하였던 부분입니다.
신이라는 존재 자체가 눈에 보여지거나 어떤 작용력이 있는 것이 아닌데 그것을 믿게 하려면
이 믿음을 강조해야 할 수밖에 믿음은 어떤 것을 사실처럼 여겨지게 하는 마력이 있습니다.
그것이 지나치면 문제가 되나 적당하면 좋은 효력이 나타납니다.
반면 너무 안 믿어도 가능한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리는 수가 있어요.
불교의 깨달음은 가능한 일입니다. 많은 깨달은 선사들의 행적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증거입니다.
그리고 마음이라는 것이 보이지는 않으나 일상사에 그대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깨달아 붓다가 된다는 사실을 약간만 믿어도 이루어질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도 믿음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수보리가 부처님의 말씀을 듣다가 갑자기 궁금한 생각이 들었어요.
만약 저 뒤에.....5백세가 지나서도 부처님의 이런 설법을 믿는 사람이 있을까 궁금했던 것입니다.
5백세는 5百世인데 1世는 한 생이라는 의미가 있어요.
사람의 한 생을 60년으로 잡는다면 60*500 하면 됩니다.
그러면 몇년인가요?
30000 년이네요, 먼 미래군요. 말법세계라고하지요.
이렇게 많은 세월이 지나도 믿는 사람이 있냐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조건이 있습니다. 계를 지키고 복을 닦는 자만 있다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계란= 부처님의 규율입니다.
남자스님=250 계
여자스님=348계
불자=5계 등 각자에 맞는 계율이 있습니다.
중요한 계율이 4계인데 모두 공통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바로 살,도,음, 망입니다.
살생, 도둑질, 사음, 망어인데
살생=생명을 죽이는것
도둑질=물건을 훔치고 거나 강도질하는 것
사음=외도
망어=거짓말, 사기, 쓸데없는 말, 악한 말
모두 '살도음망'만 외우세요.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은 지켜야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복을 닦는다는 것은
경을 읽거나, 보시나 봉사에 임하여 복을 짓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진실하니까 틀림없이 부처님의 말씀을
믿는 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교는 마음을 다루는 종교이기 때문에
조금만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면....
마음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면 이 불법을 믿게 되어있습니다.
왜냐면 불교는 사람이 중심이고 마음이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도에 들어가는 근본이고 깨달음을 일으키는 중요한 기반입니다.
만약 믿음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소리도 옳은 소리도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러면 결국 붓다의 길을 가지 못합니다.
여러분들은 다른 것은 몰라도 부처님말씀은 꼭 믿도록 하십시오.
스님도 아니고, 선사도 아니고, 선배도 믿음이 가지 않는다면
부처님의 말씀을 공부해야 합니다. 특히 이 금강경은 다른 경보다
부처님의 사상이 그대로 압축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옛부처 많은 스님들이 이 금강경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어요.
바로 육조스님도 금강경 한 대목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선의 이치는 사실 금강경에서 나왔습니다.
때문에 금강경을 잘 읽으면 깨달음을 얻을 수있고 대평안을 얻습니다.
사람들이 믿음이 없고 남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어서 그렇지 진심을 가지고 들으면
보배를 만날 수 있습니다.
한마디 한마디가 중요한 말이니 거듭 말하지만
진심을 가지고 겸손한 마음으로 들어보세요. 믿음을 가득히 안은 채로
불교는 깨달음은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유는 깨달음은 무의식을
순식간에 넘어서 바로 참 자기를 세워주기 때문입니다.
간혹 깨달으려면 얼마의 세월을 닦아야 하느냐고 질문이 오는 경우가 있는데
깨달음은 시간이 없습니다. 이것은 즉석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고
수십년을 닦아도 안오는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저는 누구나 다 깨달을 수있는데 왜 사람들은 늦게 깨닫나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거기서 일단 두 가지 결론을 얻었어요.
하나는 전생의 업연이 나타나서 이해를 가로막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참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지금 견성방에 가면 견성이라는 글들이 있는데
이것을 보고 즉시 아는 사람이 있고, 잠시 제 강의를 듣다가 아는 사람이 있고,
아직도 여러번 읽었는데 도대체 무엇을 깨달으라고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있어요.
당시 그 강의를 할 때는 많은 사람들이 알았습니다. 그때는 그것이 주로 강의 주제였어요.
그런데 그런 것을 매번 할 수도 없고 해서 요즘은 잘 말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요즘은 그 글을 보아도 아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현장 설법이 참 중요합니다.
또 하나는 자세입니다. 법문을 들을 때 신심과 간절한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우선 진리를 알려는 마음이 가득해야 합니다.
화두도 의심이 안생기면 자기가 가장 궁금한 것 아무거나 들고 탐구하면 됩니다.
예를 들어서 인생은 무엇인가? 내가 죽어서 다음에 어디로 가나?
나는 전생에 어디서 왔는가? 이것을 곰곰히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젤 궁금하다면 답이 나타날 때까지 연구하면 되요.
항상 앉으나 서나 궁리해요. 그러다가 여기 금강경강의에 들어와서 설법 듣다가 보면
어느 순간 탁 알아지는 수가 있어요. 전혀 상관없는 스님의 말에 깨닫기도 하고
연관된 말에 깨닫기도 합니다. 그러면 다음에 또 궁금한 것이 없는가 찾아보세요.
있으면 또 그것을 들고 연구하세요.
그러다가 보면 어느날 중요한 본질을 알게 되요.
그리고 금강경 강의를 여기 현장에서 듣는 것과 나중에 갈무리한 것 읽는 것이 달라요.
평상시에는 다름을 못느끼나 어떤 진실을 깨닫는 부분에 있어서는 확연히 다릅니다.
그러니까 여기는 싱싱한 것입니다.
공지에 올려진 것은 식었어요. 그래서 다른 글들처럼 읽을 뿐이지요.
그러니까 지식을 전달하는 것은 같아도 깨달음의 부분에서는 아주 달라집니다.
깐돌님께서 처음에 강의를 듣고 견성을 이해하려고 했으나 도대체 무엇을 깨달으라고 하는지
이해가 안 갔어요. 그래서 총무님께 전화해서 스님을 찾아뵐때 어떻게 하면 되냐고 묻고는
찾아와서 절 3배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저기 난초를 보라고 했어요. 순간 고개가 돌아가요.
그순간 '그것을 보는 자가 누구냐' 고 하니까 순간 알았어요.
아~ 감사합니다. 그것을 말하는군요. 하고 깨닫고 돌아갔습니다.
그리고는 지금 열심히 화두 들고 공부합니다.
현장 설법이 이렇게 다릅니다. 그래서 육조스님은 자기를 보지(견성) 못한 사람은
즉시 선지식을 찾아가서 물으라고 했습니다.
물을 건너고 산을 넘어서 고생해서 찾아가면 우선 간절하게 되죠.
절에 가는데 무슨 행세할 것이 없지 않습니까? 견손하게 3배하고 물어요.
그러니 얼마나 간절합니까? 그러니까 한마디 듣는 것에 깨닫고 마는 것입니다.
아직도 견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분들은 즉시 선지식을 찾아가서 깨닫도록 하세요.
아니면 여기 강의에 오셔서 현장에서 설법을 들으세요.
글자가 한줄 한줄 올라오는데 얼마나 답답하겠어요.
그래도 마음을 쉬고 다음에 무슨 말이 오는가 하고 기울이다가
어떤 말한마디에 깨닫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듣는 사람의 자세가 중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간절하고 정말 알려는 마음이 있으면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에 꽂힙니다.
그러나 그런 간절함이 없으면 아무리 들어도 느낌이 없습니다.
깨달으면 순간 50%~80%의 무의식이 순식간에 날아갑니다.
예전에 안되었던 것이 잘 되지요. 분노도 안 일어나고 마음이 차분해지고....
원래 카페회원 깐돌님은 화를 잘내는 사람이었습니다. 본인이 말해요.
직장에서 유명한 사람이고 다열질로...집사람도 다아는 것인데....
책을 200권을 보고 각종 수련과 수행을 다했으나 소용없었는데
말 한마디에 깨닫고 직장에서나 집에서나 화가 나지 않더래요.
그래서 본인도 참 이상하다 하였고 직장에서도 사람이 많이 변했다 하고
부인도 절에 하번 가고 싶다고 하더랍니다.
그 외에는 자유게시판에 가끔 올라오니까 아실 것입니다.
외국에 가서 상담할때도 화두 들고.....일거수 일투족이 부처가 하는 구나....
사람이 이렇게 순식간에 바꿔지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그런데 그 깨달음이 좀처럼 오지 않으면 이 두 가지중에 하나를 생각해야 합니다.
업연과 알려는 자세....
업연이 문제인데 이것은 깨달음을 막는 업장입니다.
이것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할 수 없이 1080배라든가 예배수행을 하여 참회정진을 많이 하시고
꾸준히 경을 읽거나 참선하면서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깨달음은 억지로 되지 않습니다.
그대는 이 사람이 한 부처님이나 몇 분 부처님에게만 귀의하고 선근을 심는 것이 아니라,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만큼 많은 부처님 밑에서 갖가지 선근을 심었기 때문에
이 경전을 듣고 보고나 잠깐 생각만 해도 청정한 믿음을 일으킨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경을 보고....바로 전시간에 말했듯이 부처는 형상에 없다는
이 말을 그대로 믿고 깨닫는 것은 한 생의 복이 아닙니다.
물론 믿음만 일어나도 한 생의 복이 아니지요.
생각해보세요. 여러분이 여기에 모인 것은 다생의 복을 심어서 오신 것입니다.
사람이 곧 동물이나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런데 유난히 여러분들은 자기가 무엇이고 진실이 무엇이고 우주는 어떻게 되었고
깨달음이 무엇인지 알고 싶으니 이 어찌 희귀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공에서 우주가 태어나서 이 몸이 만들어졌는데 껍데기 몸의 쾌락에 연연하지 않고
자기의 본질을 알려고 한다는 것이 얼마나 희귀한 일입니까?
이것은 많은 생의 복이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착한 일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잠깐만이라도 이 경을 들으면 곧 믿음을 냅니다.
수보리야, 여래는 이런 것을 다 잘 알고 보나니,
이 중생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복덕을 누리게 되느니라,
또한 전생의 복으로 여기에 모였고 여기에 모여서 법문을 들어 또 복을 짓으니
법문을 듣는 것 자체가 큰 복입니다. 저 뒤에 나와요.
왜냐하면, 이들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법상도 없고 또 비법상도 없기 때문이니라.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으면 절대 이 법을 듣지 못합니다.
스스로 최고인데 법을 들어서 무엇합니까?
그러니 여기에 오셔서 들으려고 하는 것 자체가 겸손한 것이지요.
어떤 사람이 불교는 꽤 어렵다고 말해요. 그래서 제가 물었어요. 무엇이 어렵던가요?
왜 스님을 친견할 때 절을 해야합니까? 그냥 다른 상담사를 찾듯이
고개만 숙이고 인사하고 말하면 되지 큰절을 올리려니 쑥스럽습니다 해요.
저도 한동안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역시 옛스님들이 현명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스님들이 절을 받아보아야 뭐합니까? 좋은 것이 뭐 있겠어요?
그래도 하라고 하는 것은 스님앞에서 말하려면 겸손하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라도 들어서 자기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게 하려면 간절하게 들어야 되고
그럴려면 겸손하게 자기를 버리고 들으라는 것입니다.
만약 와서 절도 안하고 ....자기를 버리지 않으면 뭘 가르켜주어도 전혀 가슴에 남지가 안하요.
알기는 알겠는데 깨침이 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넓게 알지 못하고 좁게 아니까
가르쳐 주었는데도 박혀있지 않아서 나중에 잊어버리고 또 인생이 무엇인가 질문하는 것입니다.
아는 것과 깨침은 달라요 아까 깐돌님이 와서 절이 작다고 무시하고
거기다 꾀죄죄한 스님이 젊어가지고 턱 앉아있는 것이 못마땅하고
저런데 무슨 도가 있겠는가 생각하고....
그래도 왔으니 한번 물어나 보자하고 물었다면 난초를 가르쳐주어도 몰랐을 것입니다.
혹시 무얼 말하는지 않았다 하여도 깨침은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깨닫지 못하면 그것은 자기 것이 안됩니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원래 우리 속에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어요. 원래 그러하느니라 하고 가르켜주면
아~ 그렇구나 하고 바로 알고 즉시 내(我)가 없음을 실천합니다.
그런데 그런다더라 하고 깨닫지를 못하니까 나중에 닦아서 없애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이것은 닦아서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관념은 자기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을 바꾸거나 잘못 안 것을 시정하면 되었지
물리적으로 무엇을 바꾸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굳이 미련한 사람들 말을 듣고 닦아서 없애려고 하고
경을 읽고 3천배를 해서 닦으려고 하니까....
원래 없는 것을 닦고 있으니까...닦아지겠습니까?
닦아도 닦아도 맨날 같은 것입니다. 오직 한 순간에 탁 깨달아야 합니다.
마음은 텅 비어서 원래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은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 한 마디에 믿고 즉시 깨달아서 다시는 아상에 떨어지지 말도록 하세요.
비법상(非法相) : 법이 아니라는 생각, 법 아닌 것을 세우는 것.
그런데 부처님은 법상(法相)도 없고 비법상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법상은 법이라는 상이어요. 이것이 법이다,
이것이 진리이다는 라는 것인데 이런 것은 없다는 말이어요.
바로 기독교와 판연히 다른 것이 이점입니다.
기독교는 나는 진리요 길이요. 희망이니 나를 따르라 해요.
바로 나를 세웁니다. (나=신) 그러나 부처님은 부처라는 이름도 세우지 말라 했습니다.
진리도 세우지 말고 만약 이것이 법이라고 생각하면 상이 걸리고
그러면 그것 때문에 불행해진다고 하였어요.
부처님의 법은 단지 병을 치료하는 일회용 처방입니다.
병을 나으면 필요 없어요. 불교는 불법을 하나의 도구로 생각합니다. 필요할 때 쓰고 버린다.
그러나 기독교는 진리를 대단하게 생각하고 불변의 신을 세웁니다.
그래서 그 신을 위하여 자기를 버리고 부모도 버리고 조상도 버려요.
오직 신만을 최고로 여겨요.
이렇게 자기를 잊고 신에게 다가가게 하는데 나중에는 다시 사람에게 돌아와야 하는데
신에게 머물러있기 때문에 신을 위한 종교이지 사람을 위한 종교는 아닙니다.
그래서 절도 태우고 단군상도 무너뜨립니다.
그것을 세우기 위하여 노력하고 들은 공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불교는 진리를 쫓아 가다가 가다가 결국 인간에게 돌아와요.
사람이 곧 붓다이고 자기가 부처이기 때문에 스스로 부처의 행을 하라고 하죠.
그리고 많은 진리를 깨달았으면 이것이 진리이다 라는 것도 버리라 해요.
그것이 있으면 결국 그것에 매이므로 불행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골수사상이어요.
그런데 비법상, 즉 그렇다고 해서 법이 아닌 것에도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상은 원래 없는 것이니라.' 이 말은 만고불변의 법이어요.
그렇다고 이런 법을 무시하고 아무 법이나 찾는다거나,
법이 없다고 없다는 것에도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상은 원래 없는 것이니라.
이법은 원래 법이 아니라.
불법은 원래 없느니라.
하면 대부분 없다는 병에 결려요, 그러나 조심해야 합니다.
이 법은 .... 부처님의 뜻은 있다 없다는 것을 다 주장하지 않는데 있어요.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없다는 말에만 빠져서 허무에 빠지는 것입니다.
양자를 다 없에야 합니다. 양자를 다 없엔 경지는 고요한 마음입니다.
지금 당장 집에 난초나 화초가 있으면...
아니면 다른 것이라도 지금 즉시 한번 들여다 보세요.
잠깐 동안무심으로 보세요. 거기에 난초가 있다 없다 하지 말고 그냥 보세요.
보긴 보아도 아무 생각이 없으면 바로 그 자리가 부처님께서 말하고 싶은 자리입니다.
있어도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생각없이 보라.그것이 진실이다.
있다 없다는 것은 그대의 상념이고 언어의 개념일뿐
진실이 아니죠. 말을 통하기 위한 언어예요.
진실은 그런 것이 없는 태초의 그 시각, 바로 있다 없다를 세우지 않는 그 시각이 진실입니다.
그 시각이 진실을 보는 시각입니다.
그렇게 무심으로 화초를 보듯이 모든 것을 보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법조차도 그 어떤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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