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법(法)은 무생(無生)

"화성(化城)이란 이승(二乘) 및 십지(十地)·등각(等覺)·묘각(妙覺)을 말한 것이다. 이것은 모든 중생을 이끌어 주기 위한 방편으로 세운 가르침이므로, 글자 그대로 모두 변화하여 보인 성곽이다. 또한 보배가 있는 곳이란 다름 아닌 참된 마음으로서의 본래 부처이며, 자기 성품의 보배를 말한다. 이 보배는 사량분별(思量分別)에 속하지도 않으니, 그 자리에는 아무 것도 세울 수 없다.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으며, 주관도 객관도 없는데 어는 곳에 성(城)이 있겠느냐? 만약 '이곳을 이미 화성이라 한다면 어느 곳이 보배 있는 곳인가?' 하고 묻는다면, 보배 있는 곳이란 가리킬 수 없는 것인데, 가리킨다면 곧 방위와 처소가 있게 되므로, 참으로 보배가 있는 곳이 될 수 없다. 그래서 경에서도 말씀하시기를 '가까이 있다' 고만 했을 뿐이다. 그것을 얼마라고 한정 할 수 없는 것이니, 오로지 그 자체에 계합하여 알면 되는 것이다.

천제(闡提)란 믿음이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육도(六道)의 모든 중생들과 이승(二乘)들은 부처님의 과『佛果』가 있음을 믿지 않으니, 그들을 모두 선근(善根)이 끊긴 천제라 한다. 보살이란 불법이 있음을 굳게 믿고 대승·소승을 차별하지 않으며, 부처와 중생을 같은 법성(法性)으로 본다. 이들을 가리켜 선근이 있는 천제(闡提)라고 한다.

대개 부처님의 설법『聲敎』을 듣고 깨닫는 사람을 성문(聲聞)이라 하고, 인연을 관찰하여 깨닫는 사람을 연각(緣覺)이라 한다. 그러나 자기 마음속에서 깨닫지 못한다면, 비록 부처가 된다 하더라도 역시 성문불이라 한다.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교법(敎法)에 있어서는 깨닫는 것이 많으나, 마음 법『心法』에 있어서는 깨닫지 못하는데, 이렇게 하면 비록 겁을 지나도록 수행을 한다 해도 마침내 본래의 부처는 아니다. 만약 마음에서 깨닫지 못하고서 교법에서 깨닫는다면, 마음은 가벼이 여기고 가르침만 중히 여겨 흙덩이나 쫓는 개 꼴이 되고 말 것이다. 이것은 본 마음을 잊었기 때문이다. 본래 마음에 계합하면 될 뿐, 법을 구할 필요가 없으니, 마음이 곧 법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계가 마음을 가로막고 현상『事』이 본체『理』를 흐리게 하여, 의례껏 경계로부터 도망쳐 마음을 편히 하려 하고, 현상을 물리쳐서 본체를 보존하려 한다. 그러나 이들은 오히려 마음이 경계를 가로막고, 본체가 현상을 흐리게 한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다.

마음을 비우기만 하면 경계는 저절로 비고, 본체를 고요하게만 하면 현상은 저절로 고요해지므로 거꾸로 마음을 쓰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이 보통 마음을 비우려 들지 않는 까닭은 공(空)에 떨어질까 두려워해서인데, 자기 마음이 본래부터 비었음을 모르는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의 경우는 경계는 없애려고 하면서 마음은 없애지 않는다.

그러나 지혜로운 이는 마음을 없애지 경계를 없애지 않고, 나아가 보살은 마음이 허공과 같아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자기가 지은 복덕(福德)마저도 탐착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버림에는 세 등급이 있다. 즉 안팎의 몸과 마음을 다 버림이 허공과 같으며, 어디에고 집착하지 않은 다음에 곳에 따라 중생에게 응하되, 제도하는 주체도 제도될 대상도 모두 잊는 것이 '크게 버림『大捨』'이다. 만약 한편으로 도를 행하고 덕을 펴면서 한편으로는 그것을 이바지하여 놓아 버리고 바라는 마음이 전혀 없으면 '중간의 버림『中捨』'이다. 또한 착한 일을 널리 행하면서도 바라는 바가 있다가 법을 듣고서 빈『空』 줄을 알고 집착하지 않으면, 이것은 '작은 버림『小捨』'이다.

큰 버림은 마치 촛불이 바로 정면에 있는 것과 같아서 더 미혹될 것도 깨달을 것도 없으며, 중간 버림은 촛불이 옆에 있는 것 같아서 밝기도 하고 어둡기도 하며, 작은 버림은 마치 촛불이 등뒤에 있는 것 같아서 눈앞의 구덩이나 함정을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보살의 마음은 허공과 같아서 일체를 다 버린다. 과거의 마음을 얻을 수 없음이 과거를 버린 것이고, 현재의 마음을 얻을 수 없음이 현재를 버린 것이며, 미래의 마음을 얻을 수 없음이 미래를 버린 것이니, 이른바 3세를 함께 버렸다고 하는 것이다.

여래께서 가섭에게 법을 부촉하실 때로부터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하였으니, 마음과 마음이 서로 다르지 않다. 허공에다 도장을 찍으면 아무 문체가 찍히지 않고, 그렇다고 물건에다가 도장을 찍으면 법을 이루지 못한다. 그러므로 마음으로써 마음에 새기는 것이니, 마음과 마음이 다르지 않다. 새김『能』과 새겨짐『所』이 함께 계합하기란 매우 어려운 것이어서, 그것을 얻은 사람은 매우 적다. 그러나 마음은 마음 없음『無心』을 말하는 것이고, 얻음도 얻었다 할 것이 없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세 몸『三身』이 있는데, 법신(法身)은 자성의 허통(虛通)한 법을, 보신(報身)은 일체 청정(淸淨)한 법을, 화신(化身)은 육도만행법을 말한다. 법신의 설법은 언어·형상·문자로써 구할 수 없으며, 설할 바도 없고 증득할 바도 없이 자성이 허통(虛通) 할 뿐이다.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한 법도 설할 만한 법이 없음을 설법이라 이름한다'고 하셨다. 보신이나 화신은 근기에 따라 감응하여 나타나고, 설하는 법 또한 현상에 따르고 근기에 알맞게 섭수하여 교화하는 것이므로, 이 모두는 참다운 법이 아니다. 그래서 '보신·화신은 참된 부처가 아니며, 법을 설하는 자가 아니다'고 하신 것이다.

이른바 밝고 정밀한 성품인 일정명(一精明)이 나뉘어 6화합(六和合)이 된다고 하였다. 일정명이란 바로 한 마음『一心』이요, 6화합이란 6근(根)이다. 이 6근은 각기 6진(塵)과 합하는데, 눈은 색과, 귀는 소리와, 코는 냄새와, 혀는 맛과, 몸은 촉감과, 뜻은 법과 제각기 합한다. 그런 가운데 6식(識)을 내어 18계(十八界)가 된다. 만약 이 18계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음을 알면, 6화합이 하나로 묶이어 일정명이 된다. 일정명이란 곧 마음이다. 그런데 도를 배우는 사람들은 이것을 모두 알면서도, 일정명과 6화합에 대해 알음알이만을 지어서 드디어는 교설에 묶이어 본래 마음에 계합치 못한다.

여래께서는 세간에 나타나시어 일승(一乘)의 참된 법을 말씀하시려 하나, 중생들은 부처님을 믿지 않고 비방하여 고통의 바다에 빠지게 될 것이며, 그렇다고 부처님께서 전혀 말씀하시지 않는다면 설법에 인색한 간탐( 貪)에 떨어져 중생을 위하는 것이 못된다고 하시사, 현묘한 도를 널리 베푸시고 방편을 세워 삼승(三乘)이 있음을 말씀하셨다. 그래서 대승과 소승의 방편이 생겼고, 깨달음에도 깊고 얕음의 차이가 있게 되었으나, 이것은 모두 근본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오직 일승의 도가 있을 뿐, 나머지 둘은 참된 것이 아니다'고 하셨다. 그러나 마침내는 한 마음의 법『一心法』을 나타내시지 못했기 때문에 가섭을 불러 법좌를 함께 하시사, 따로이 그 '한 마음'을 부촉하셨으니, 이는 언설을 떠난 법이다. 이 한 가닥의 법령은 따로이 행해지는데, 만약 계합하여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은 그 즉시 부처님 지위에 이른다."

 

 

'공 부 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6. 마음을 잊어버림  (1) 2024.01.07
5. 허공이 곧 법신(法身)  (1) 2024.01.07
4. 일체를 여윌 줄 아는 사람이 곧 부처  (1) 2024.01.07
3. 근원이 청정한 마음  (0) 2024.01.07
1. 한마음 깨치면 부처  (0) 2024.01.07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