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無我)의 의미와 삶의 주체
출처 : 서재영의 불교기초교리 강좌 (http://www.buruna.org/main.htm )
흔히 무아(無我)에 대해 말하면 "내가 없다면 아무렇게나 행동해도 된단 말인가?"라는 반문이 뒤따릅니다.
무아를 잘못 이해하면 '나'란 없기 때문에 바르게 살 필요도 없고, 선행을 할 필요도 없으며,
남을 괴롭혀도 그들도 무아이므로 상관없다는 궤변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불교에서 무아를 설한다고 해서 '행위의 주체로써의 나',
'삶의 주체로써의 나'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불교에서는 '나'는 내가 의지해야 할 가장 믿을만한 대상이라는 사실을 일관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무아의 참뜻은 '나'라는 존재의 완전한 부정이 아니라
'나'라는 개체의 독립적 실체가 있다는 인식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나'는 '나' 아닌 무수한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존재하는 연기(緣起)의 산물입니다.
삼법인에 따르면 모든 존재는 무상하고 고통스럽기 때문에 '내가 아니다[非我]'라고 합니다.
나는 나의 뜻과 무관하게 태어나고[生]·늙고[老]·병들고[病]·죽는[死] 과정을 거역할 수 없습니다.
나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에 대해 내 자신을 뜻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부처님은 나는 '내가 아닌 것[非我]'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나'라는 독자적 실체를 고집할 것이 아니라
나를 구성하는 그 '나' 아닌 것들과의 관계성을 바로 깨닫는 것이 나를 바로 아는 것입니다.
내 몸 속에 돌고 있는 피는 물[水]에서 왔으며,
체온은 불[火]에서 왔으며, 활동성은 바람[風]에서 왔으며,
피부와 머리카락은 땅[地]에서 왔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아니라 산이고 대지이며 강물이고 우주인 것입니다.
나는 내가 아닌 타자들이 인연(因緣)을 매개로 잠시 모여있는 오온(五蘊)일 뿐입니다.
이처럼 모든 존재는 독자적 실체가 없고 관계성 속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무아(無我)이며,
자성(自性)이 공(空)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용수(龍樹)는 {중론}에서 연기와 공의 관계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즉, "인연으로 생긴 법들(因緣所生法) 나는 그것을 공이라고 설한다(我說卽是空).
또 이것을 거짓 이름이라고 한다(亦爲是假名). 이것이 중도의 뜻이다(亦是中道義)."라고 했습니다.
모든 존재는 수많은 인연으로 존재하는데 '나'라는 존재도 바로 그 인연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개체는 다른 존재와의 관계성으로 인해 있기 때문에 독자적 실체성은 공(空)하며,
'나'라는 존재도 공하다는 것입니다.
다만 한시적으로 존재하는 인연의 산물에 대해
'인간', '동물', '무정물'과 같은 거짓의 이름을 붙였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무아를 설하는 것은 '내가 없다'라는
'나의 부재(不在)'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타자의 현전(現前)'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무아는 나와 타자와의 관계성을 확인하는 것이며,
'내가 바로 너'라는 자타불이(自他不二)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무아를 사유함으로써 없어지는 것은 내 자체가 아니라 '나'라는 아상(我相)의 울타리입니다.
무아에 대한 이해를 통해 우리는 협소한 자기인식을 벗어버리고 우주적이고 총체적인 나를 자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아설은 '나'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오히려 참다운 자기, 우주적 자아를 깨닫고 모든 존재와의 관계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아를 설한다고 해서 업(業)의 주체가 없다거나,
삶을 계획하는 창조적 행위와 미래를 설계하는 주체로써 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처님은 "자신을 등불로 삼고 진리를 등불로 삼아라."라는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을 유훈으로 남기고 계십니다.
{법구경}에서도 "나의 주인은 나이며, 나를 제어하는 것은 곧 나이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나의 삶과 행위의 주인은 바로 나이며,
나를 통제하고 미래의 올바른 삶을 빚어내는 것도 바로 자신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자기 자신이야말로 고해(苦海)에서 나를 구해주는 섬[洲]이라고 했습니다.
즉 장아함 [유행경]에 따르면 부처님은 "아난다여,
그대들은 스스로를 주(洲)로 삼고 스스로를 의지처로 삼되 타인을 의지처로 삼지 말며,
법(法)을 주(洲)로 삼고 법을 의지처로 하되 다른 것을 의지처로 하지말고 머물러라."고 당부하고 계십니다.
자기 자신이야말로 욕망[貪]·분노[瞋]·어리석음[癡]과 같은
삼독의 거센 물결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을 구해낼 수 있는 섬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변화하고 흘러가는 세상에서 오직 스스로 믿고 올바르게 실천하는 것만이 자신을 구하는 길입니다.
불교는 바로 우리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그 '섬'을 찾고 개발하는 종교입니다.
스스로 수행하고 깨달음을 추구하기 때문에 불교를 자력문(自力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무아설은 자아에 대한 허구적 이미지에 대한 부정이며 이를 통해 참다운 자기를 인식하기 위한 것입니다.
나 아닌 것을 나로 착각하고 있다면 참다운 나는 그 같은 오류를 부정하는 것을 통해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무아(無我)의 가르침은 고립적 개체주의를 부정하는 것이며,
존재의 보편적 관계성과 공존을 성찰하는 가르침입니다.
때문에 '자기를 포기하라'거나, '자기를 망각하라'는 등의 가르침을 위해 무아를 설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무아(無我)를 말하는 것은 자기 중심적 아상(我相)에 물든 삶을 일깨우기 위함이며,
관계성의 회복을 위한 것이지 허무주의를 조장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무아설은 창조적 인간의 행위와 그 결과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업과 행위의 주체로써 나를 인정하는 것은 인간의 의지적 노력과 그에 따르는 결과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있기 때문에 나는 삼독을 거슬러 수행할 수 있고 그 결과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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