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定慧)

 

내(육조) 이 법문은 정혜로써 근본을 삼는다. 그러므로 정과 혜가 다르다 하지 말아라. 정과 혜는 하나요 둘이 아니다. 정은 혜의 본체요, 혜는 정의 작용이다. 곧 혜 안에 정이 있고 정 안에 혜가 있는 것이니, 만약 이 뜻을 알면 곧 정과 혜를 함께 배운다. 도를 배우는 사람들은 먼저 정이 있고서야 혜가 나온다거나, 혜가 있는 뒤에 정이 나온다거나 하여 서로 다르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이런 소견을 가지는 자는 법에 두 모양을 두는 것이다. 입으로 착한 말을 하면서 마음은 착하지 않은 것이다.

  스스로 깨달아 닦아 나감에는 말다툼이 있을 수 없다. 만약 앞뒤를 다툰다면 곧 어리석은 사람과 같으므로 승부가 끝이 없어, 도리어 아(我)와 법(法)만 늘어서 사상(四相)을 버리지 못할 것이다.

  정과 혜는 이를테면 등과 불빛과 같다. 등이 있으면 불빛이 있고, 등이 없으면 불빛이 없다. 등은 불빛의 본체이고 불빛은 등의 작용이므로 등과 불빛의 이름은 다루나 본체는 하나인 것처럼, 정과 혜도 그와 같다.

 

 

일행삼매(一行三昧)

 

일행삼매란 가고 멈추고 앉고 눕고 간에 항상 곧은 마음을 쓰는 일이다. 그러므로 유마경에 말씀하기를 "곧은 마음이 도량이며, 곧은 마음이 정토(淨 : 깨끗할 정, 土)다."라고 한 것이다. 마음으로는 아첨하고 굽은 짓을 하면서 입으로는 곧은 체하거나, 입으로는 일행삼매를 말하면서 마음은 곧지 않게 하지 마라. 곧은 마음으로 행하여 모든 것에 걸리지 말라. 어리석은 사람은 법상(法相 : 법은 진이라는 뜻, 진리에 집착하여 그것을 고집하는 마음)에 집착하여 일행삼매를 가리켜 말하기를, 가만히 앉아 일으키지 않는 것 - 무기공(無記空), 공에 걸림'이라고 한다.

  이는 무정(無情)과 같아서 오히려 도(道)를 막는 인연이 된다.

도는 반드시 통하여 흐르게 해야 하는데 어찌 도리어 막히게 할 것인가. 마음이 무엇에고 걸리지 않으면 도가 곧 통해 흐를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무엇에 걸린다면 이것은 스스로 얽히는 일이다. 앉아서 움직이지 않는 것을 옳다고 한다면, 저 사리풋타가 숲속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유마힐에게 꾸중을 들은 일과 같은 것이다.

  어떤 사람은 "앉아서 고요히 마음을 관해 움직이지 않고 일어나지 않게 하면 이것이 공(功)이 된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어리석은 사람이 알지 못하고 집착해 전도된 말이다. 이런 사람들이 적지 않으니, 이와같은 상교(相敎)는 크게 그릇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무념(無念) 무상(無相) 무주(無住)

 

본래 바른 가르침에는 돈(頓)과 점(漸)이 없다. 사람의 바탕에 총명하고 우둔함이 있어 우둔한 사람은 차츰 닦아가고 총명한 사람은 단박에 깨닫는다. 그러나 '스스로 본심을 알고 본성을 보면 - 견성(見性)' 차별이 없다. 그러므로 돈이니 점이니 하는 것은 헛이름을 붙인 것이다.

  내 이 법문은 위로부터 내려오면서 먼저 무념을 새워 종(宗)을 삼고, 무상으로 체(體)를 삼고, 무주로 본(本)을 삼았다. 무상이란 상(相)에서 상을 떠남이요, 무념이란 염(念)에서 염이 없음이요, 무주란 사람의 본성이 선하거나 악하거나 밉거나 원수거나 간에 서로 말을 주고 받거나 좋지 못한 수작을 걸어 오더라도 모두 다 헛것으로 돌려, 대들거나 해칠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생각과 생각 사이에 지난 경계를 생각하지 마라. 만약 지난 생각과 지금 생각과 뒷 생각이 잇따라 끊어지지 않으면 이것이 얽매임이다. 모든 존재에 생각이 머물지 않으면 곧 얽매임이 없는 것이니 무주(無住)로써 근본을 삼음이다.

  모든 대상에 마음이 물들지 않으면 이것이 무념(無念)이니, 제 생각에 항상 모든 대상을 떠나서 대상에 마음을 내지 말 것이다. 그러나 만약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모든 생각을 아주 없애버리면, 한 생각이 끊어지면서 곧 죽어 딴 곳에 태어나니, 이건은 큰 착오이므로 배우는 사람은 명심해야 한다. 만약 법의 뜻을 알지 못하면 자기만 잘못 되지 않고 남까지도 잘못되게 한다. 또 자기가 어두워 보지 못하면서 부처님 말씀을 비방까지 한다. 그러므로 무념을 세워 종(宗)을 삼은 것이다. 무념으로 종을 삼은 이유는 무엇인가. 어둔 사람이 입으로만 견성했다 하면서 대상에 생각을 두고, 생각 위에 문득 삿된 소견을 일으켜 온갖 지저분한 망상을 낸다. 자성(自性)은 본래 한 법도 얻을 것이 없는데 만약 얻은 것이 있다 하여 망녕되어 화복(禍福)을 말하면 이것이 곧 지저분한 삿된 소견이다. 그러므로 이 법문은 무념을 세워서 종을 삼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無)란 무엇을 없앰이며, 염(念)이란 무엇을 생각함인가. 무란 두 가지 모양이 없고 모든 쓸데없는 망상이 없는 것이며, 염(念)이란 진여(眞如)의 본성품을 생각함이다. 진여란 곧 염의 본체이며 염은 진여의 작용이므로 진여의 자성이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고 눈,귀,코,혀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진여에 성품이 있으므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여가 없다면 눈과 귀와 소리와 물질이 곧 없어질 것이다.

  진여의 자성에서 생각을 일으키면 육근(六根)이 비록 보고 듣고 깨닫고 알더라도 모든 대상에 물들지 않고 참 성품이 항상 자재할 것이다. 그러므로 유마경에 이르기를 "모든 법상(法相)을 잘 분별하되 제일의(第一義)에 있어서는 움직임이 없다."고 한 것이다.

 

 

좌선(座禪)과 선정(禪定)

 

좌선은 원래 마음에 집착함도 아니고 청정에 집착함이 아니며 또한 움직이지 않음도 아니다. 만약 마음에 집착하는 것이라면 마음이 본래 망녕된 것이므로 알고 보면 환(幻)과 같아 잡을 데가 없다. 청정에 집착하는 것이라면 사람의 성품이 분래 청정한 것인데 망념(忘念) 때문에 진여가 파묻힌 것이니, 망념만 없으면 성품이 저절로 청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일으켜 청정하게 한다 함은 도리어 청정하다는 망념을 내는 것이 된다. 망념이란 처소가 없으니 조촐한 티를 내어 공부한다 함은 조촐한 데 얽매여 제 본성을 막는 일이 된다.

  만약 움직이지 않음을 닦고자 한다면, 모든 사람들을 대할 때 남의 시비와 선악과 허물을 보지 말 것이니, 이것이 곧 자성의 움직이지 않음이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몸은 비록 움직이지 않으나 입만 열면 곧 남의 시비 장단과 좋고 나쁨을 말하게 되니 이것은 도를 등지는 짓이다. 마음을 고집하거나 청정을 고집하면 곧 도가 막히게 될 거이다.

  그러면 어떤 것을 좌선이라고 하는가. 이 법문 중에 걸리고 막힘이 없어서 밖으로 일체 선악의 환경에 마음과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선(禪)이라 한다. 무엇을 선정(禪定)이라 하는가. 밖으로 상(相)을 떠나면 마음도 따라서 어지럽지 않다. 본성품은 저절로 청정하며 스스로 안정한 것이지만, 대상만을 보고서 대상을 생각하므로 곧 어지럽게 된다. 만약 모든 대상을 보되 마음이 어지러워지지 않는다면 이것이 참된 정(定)이다. 밖으로 상을 떠나면 곧 선(禪)이며, 안으로 어지럽지 않으면 곧 정(定)이니, 외선(外禪)과 내정(內定) 이것이 선정이다.

  '보살계경'에 이르기를 "내 본성품이 본래 청정하다." 하였으니 생각생각에 본성의 청정함을 보라, 스스로 닦고 행하여 스스로 불도를 이루도록 해야 한다.

 

 

오분법신향(五分法身香)

 

이 일은 모름지기 자성(自性) 가운데서 일어나는 것이니, 어느 때든지 순간순간 그 마음을 밝혀 스스로 닦고 스스로 행하면 자기의 법신을 보고 자기 마음의 부처를 보아 스스로 건지고 조심할 것이다. 먼저 자성의 오분법신향을 전할까 한다. 첫째는 계향(戒香)이니, 자기 마음속에 그릇됨이 없고 악독함이 없고 질투와 탐욕과 성냄이 없는 것을 말한다. 둘째는 정향(定香)이니, 여러 가지 선악의 환경을 보더라도 마음이 어지럽지 않음이다. 셋째는 혜향(慧香)이니, 자기 마음에 거리낌이 없어 항상 지혜로써 제 성품을 비춰 보고, 악한 일을 하지 않고 착한 일을 할지라도 자랑스런 마음이 없으며, 손위를 공경하고 손아래를 생각하며 외롭고 가난한 이를 가엾이 여김이다. 넷째는 해탈향(解脫香)이니, 마음에 반연함이 없어 선도 생각하지 않고, 악도 생각하지 않으며, 자유자재하여 거리낌 없음이다. 다섯째는 해탈지견향(解脫知見香)이다. 마음은 선과 악에 거리낌없더라도 공(空)에 빠져 고요함만을 지키면 옳지 않다. 그러므로 널리 배우고 많이 들어 자기 본심을 알고 부처의 이치를 통달하여 빛에 화(和)하고 사물에 대할지라도 나와 남이 없어 뒤바뀜이 없는 지혜의 참성품에 이른다. 이와 같은 향은 저마다 자기 안에서 피울 것이요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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