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서는 ‘일체(一切)는 오온(五蘊)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체라고 하는 것, 혹은 나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단독자가 아니고, 다섯 가지의 쌓임에 불과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즉, 나라고 할 실체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대승불교가 출현할 당시에는 기존의 불교가 오온을 구성하는 각각을 실체(實體)가 있는 요소라고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에서는 그런 요소설과 실체설을 부정하는 내용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나’라고 작용하는 정신작용을 한 번 보세요. 눈으로 보고 안다, 귀로 듣고 안다, 코로 냄새 맡고 안다, 입으로 맛을 보고 안다, 손으로 감촉하고 안다, 머리로 생각해서 안다, 이렇게 외부에 무언가 대상이 있고, 그 대상을 내가 아는 것이 ‘색(色)’이에요. 그 대상을 알 때 어떤 떨림이나 느낌이 일어나는데, 그것이 ‘수(受)’입니다. 느낌은 아는 작용하고 달라요. 느낌은 불쾌하다, 유쾌하다, 즐겁다, 괴롭다 하듯이 어떤 떨림 같은 감정입니다. 아는 것이나 감정을 기억했다가 다시 생각해내고 질서를 잡고 논리를 따지고 추론을 하는 작용이 ‘상(想)’입니다. 그 생각에 따라서 ‘하고 싶다’, ‘하기 싫다’, ‘해야 된다’, ‘안 해야 된다’ 이렇게 행위를 유발하는 의지 작용이 일어나는데, 그것이 ‘행(行)’입니다.


아는 작용(색), 느낌 작용(수), 생각 작용(상), 의지 작용(행)이 일어나면, 이것이 그냥 사라지는 게 아니고 쌓이게 되는데, 그것이 ‘식(識)’입니다. 식은 다시 우리가 어떤 것을 볼 때 선입관으로 작용을 해요. 사물을 볼 때 그냥 기계적으로 보는 게 아니고 식이 영향을 끼쳐요. 기분이 좋고 나쁜 데에도 식이 영향을 끼치고요.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식이 오온의 맨 끝에 오지만, 어쩌면 식이 오온의 맨 앞에 올 수도 있습니다. 식은 마음작용의 바탕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색수상행식 다섯 가지 정신작용을 뭉뚱그려서 그냥 ‘나’라고 부르고 마치 하나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분류해보면 다섯 가지입니다. 이 다섯 가지에는 실체가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바깥 대상에도, 들리는 소리에도, 냄새에도, 맛에도, 감촉이나 생각에도 실체가 없고 늘 변합니다. 색에 따라 일어나는 느낌도 늘 그때그때 달라지고, 생각도 달라집니다. 하고 싶고, 하기 싫고, 해야 되고, 하지 말아야 되고, 이런 의지도 항상하지 않고 늘 바뀝니다. 식도 고정 불변하는 것이 아니고 늘 형성되고 바뀌는 겁니다. 그 어디에도 고정된 실체는 없습니다.

여기서 ‘무(無)’는 ‘고정 불변하는 요소는 없다’, ‘실체가 없다’ 이런 뜻입니다. 제법이 공하다는 차원에서 보면(시고 공중, 是故 空中), 색이라는 실체도 없고(무색, 無色), 수상행식이라고 하는 실체도 없습니다(무수상행식, 無受想行識). 이렇게 반야심경에서는 오온의 실체설을 부정하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소승불교 교리에서 굉장히 중요한 것 중 하나가 12처설입니다. 12처는 인식 기관과 인식 대상인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을 말합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감촉하고, 머리로 생각하는 작용이 일어나는데, 우리가 안다는 것은 이게 전부입니다. 안다는 게 별 거 아니에요. 앎이란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육근과 육경이 만나서 형성되어진 것이라는 것이 12처설입니다.

그런데 당시 소승 불교인들은 12처설을 또다시 요소설로 이해한 거예요. 색이란 실체가 있고, 성향미촉법, 안이비설신의 역시 각각 다 실체가 있는 걸로 생각한 겁니다. 세상 속에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생각이 ‘실체가 있다’ 하는 쪽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는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지만 밖에 나가 하늘을 처다 보면 해가 뜨고 해가 지니까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문장은 12처 앞에 무(無) 자가 각각 다 붙어 있는 것인데, 무(無) 자가 모두에게 적용된다고 보시면 됩니다. 12처설의 요소화, 실체화를 비판하는 내용입니다.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이 문장은 18계설의 요소화, 실체화를 부정하는 내용입니다. 일체가 12처라면, 같은 것을 눈으로 보고, 같은 것을 귀로 들을 때, 모든 사람이 똑같이 알아야 되겠죠. 그런데 제가 지금 강의를 하는 중에도 여러분들이 똑같은 목소리를 듣고 똑같은 모습을 보지만 여러분들 각자 받아들이는 게 다르잖아요. 이것은 12처설로는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법륜스님 얘기를 듣고 알았고, 법륜스님 모습을 보고 알았다. 아는 게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이렇게 인식 기관과 인식대상이 만나서 아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12처설로 설명이 됩니다. 그러나 왜 사람마다 아는 것이 다른지는 12처설로 설명이 안 돼요.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면 결과가 똑같이 나오는 것 같지만, 흑백으로 찍는지, 칼라로 찍는지, 카메라 성능이 어떠한지에 따라 사진이 다르게 나오잖아요. 그렇듯이 사람마다 각각 인식을 할 때 그 바탕이 되는 ‘식’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다르게 알게 됩니다. 그걸 업식이라고 해요. 볼 때도 업식이 작용하고, 들을 때도 업식이 작용하고, 냄새 맡을 때도 업식이 작용합니다. 똑같이 된장찌개 냄새를 맡아도 업식에 따라 어떤 사람은 구수하게 느끼고, 어떤 사람은 역겹게 느끼게 됩니다.

냄새에 객관적인 실체가 있다면, 모든 사람이 똑같이 느껴야겠죠. 이렇게 다르게 느끼는 이유는 코에 문제가 있어서도 아니고, 된장에 문제가 있어서도 아닙니다. 사람마다 각각 업식이 다르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업식 역시 형성된 것입니다. 업식은 볼 때도 작용하고, 들을 때도, 냄새 맡을 때도, 맛볼 때도, 감촉할 때도, 생각할 때도 작용합니다. 그래서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 이렇게 여섯 가지로 말합니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와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여기에 더해서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까지 이렇게 18가지가 일체라고 보는 것이 18계설입니다. 오온설은 약간 주관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면, 12처설은 약간 객관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양쪽을 보완해서 나온 것이 18계설이에요.

대승불교가 일어날 당시 기존 불교는 18계설을 18가지 요소설로 이해했습니다. 요소설은 각각이 실체가 있는 근본 종자라는 생각입니다. 그런 실체가 있지 않다고 주장한 것이 대승불교입니다. 18계를 다 나열하지 않고, 첫 번째와 마지막 것만 쓰고 나머지는 생략해서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眼界 乃至 無意識界)’ 이렇게 썼습니다.

소승불교에서는 ‘일체는 오온이다’, ‘일체는 12처다’, ‘일체는 18계다’ 이렇게 얘기하는데, 반야심경에서는 각각을 요소화하는 것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숯을 태우면 탄소와 산소가 만나서 이산화탄소가 나옵니다. 이런 화학변화에서는 질량 불변의 법칙, 배수 비례의 법칙, 일정 성분비의 법칙이 성립합니다. 여기에는 원자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불변의 존재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돌턴의 원자설입니다. 원자가 만물의 근원이라고 생각한 거죠. 근대 과학에서 만물은 92개의 원자로 되어 있다고 생각했던 것도 모두 요소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소승불교에서 일체를 5요소설, 12요소설, 18요소설로 이해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현대 과학에 와서 소립자와 쿼크가 발견되면서 이런 요소설이 부정됩니다. 소승불교가 오온, 12처, 18계를 변하지 않는 요소로 이해한 것을 대승불교가 부정한 것처럼요.


부처님은 요소설을 부정했는데, 불멸 후 브라만교와 우파니샤드 철학의 영향으로 어느덧 실체가 있다고 다시 생각하게 된 거죠. 요소설을 부정하기 위해 설명한 오온설, 12처설, 18계설이 다시 요소설로 받아들여지게 된 거예요. 당시 사람들에게는 요소설이 정통 불교였어요. 부처님의 말씀을 그대로 외우고 학습을 했지만, 진리라는 법상을 지어버린 거죠. 이렇게 당시 불교가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반야심경은 어디가 잘못됐는지 하나하나 지적하고 있는 겁니다.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이 부분은 12연기를 요소설로 이해하는 것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12연기의 첫 번째가 무명이죠. 그다음에 행, 식, 명색, 육입, 촉, 수, 애, 취, 유, 생, 노사, 이렇게 12가지 연관 고리를 설명한 것이 12연기입니다. 무명부터 노사까지 12연기 각각에 실체가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명이라 할 것이 없다. 이름하여 무명이지, 무명이라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모르면 어리석다고 말하는 것이지 별도로 어리석음이라는 실체는 없다는 뜻입니다. 무명의 실체가 없으니까, 또한 무명을 없앤다 할 것도 없다는 의미예요. 굉장한 얘기입니다. 그다음에 ‘내지’라고 적고 12연기의 중간 10개를 생략한 후 ‘노사’가 나옵니다.

‘노사라고 하는 실체도 없다. 그러니 노사를 멸한다고 할 것도 없다.’

무고집멸도
無苦集滅道

불교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것이 사성제입니다. 사성제를 오롯이 아는 것이 곧 지혜라고까지 강조합니다. 그런데 반야심경에서는 사성제도 부정합니다. 왜 사성제를 부정할까요? 사성제를 일종의 요소설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고(苦), 이것이 괴로움이다.
집(集), 이것은 괴로움의 원인이다.
멸(滅),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
도(道),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방법이다.

반야의 세계에서는 괴로움이 없습니다. 그래서 괴로움의 실체도 없어요. 여러분이 밤에 자다가 강도에게 쫓기는 꿈을 꾸었다고 합시다. 꿈속에서는 괴로움이 있습니다. 괴로움의 원인은 강도입니다.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강도를 피해야겠죠. 그래서 관세음보살님께 도움을 요청했더니 관세음보살님이 도와주셔서 살았어요. ‘아이고, 관세음보살님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를 하는데, 눈을 딱 뜨니까 꿈이에요. 그럼 눈 뜬 소식은 어떻게 설명해야 되나요?


애초에 괴로움이라고 할 것이 없었고, 강도도 없었어요. 눈을 번쩍 뜨고 깨면 관세음보살도 없고, 관세음보살에게 구원받을 일도 없는 거예요. 이게 대승 불교의 관점입니다. 괴로움이 있고, 괴로움을 없애고,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은 아직 눈 감은 소식에 불과해요. 잠이 덜 깬 소식입니다.

‘눈을 번쩍 떠버리면 본래 괴로울 것이 없다. 그래서 괴로움을 없앨 것도 없다’

무고집멸도(無苦集滅道)는 바로 이런 뜻입니다. 이 문장도 각 단어마다 ‘무(無)’자가 생략된 겁니다.

무고(無苦), 괴로움이라 할 것이 없으므로
무집(無集), 괴로움의 원인이라 할 것도 없고
무멸(無滅), 괴로움의 소멸이라 할 것도 없고
무도(無道), 괴로움을 없애는 길에 이른다는 것도 없다.

이어서 깨달음의 실체를 부정합니다.

무지 역 무득
無智 亦 無得

여기서 ‘무지(無智)’는 ‘깨달음이라고 할 것이 없다’ 하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깨달음이라는 실체가 있다고 또 생각합니다. 그래서 ‘깨달아야지!’ 결심하고 평생을 거기에 묶여서 살기도 합니다. ‘깨달음’이라는 상을 짓고 매달리고 있는 겁니다. ‘신이 있다’ 하는 것처럼 깨달음이라는 실체를 상정하고 평생을 거기에 매달려서 인생을 살아가는 거죠.

‘무득’은 ‘얻음도 없다’라는 뜻인데 깨달음을 얻음도 없다는 의미입니다. 깨달음이라고 할 것이 없으니까 당연히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 것도 없죠.

이것은 모두 진리를 절대화시키는 바람에 중도와 연기에서 벗어난 것을 비판했다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반야심경은 이렇게 당시 소승불교의 문제점을 공의 차원에서 낱낱이 비판한 후 이어서 대승불교의 위대함을 강조합니다. 그 부분은 다음 시간에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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