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
오온이 공하다는 것을 비추어 보고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났다
“반야심경의 핵심은 바로 이 문장입니다. 우리는 오온이 공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거예요. 왜 깨닫지 못했을까요? 반야바라밀다 수행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천적 측면에서는 육바라밀을 행하는 것이 중요하고, 사상적인 측면에서는 제법이 공한 줄을 깨닫는 게 중요합니다.
불교대학에서 ‘일체는 오온이다’ 하는 것을 배웠잖아요. 오온이란 존재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의 쌓임,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을 말합니다. 오온개공이란 오온이 모두 공하다는 뜻이에요. 일체가 오온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이 말은 일체가 공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일체개공(一切皆空)’ 또는 ‘제법개공(諸法皆空)’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나’라고 할 수 있는 어떤 실체가 없는 이유
세상은 ‘너’와 ‘나’를 구분하죠. 그러나 부처님은 ‘나’라고 할 수 있는 어떤 실체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자기 자신을 한 번 자세히 관찰해 보세요.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고, 생각하는 작용이 있습니다. 각 작용마다 기분이 좋고 기분이 나쁜 반응이 일어납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면 바로 인지하고 분별하는 작용도 있습니다. 이래야지 저래야지 하는 의지 작용도 있습니다. 과거를 떠올리며 이러쿵저러쿵 생각하는 작용도 있습니다. 이런 작용들이 그냥 있을 뿐이지 ‘나’라고 할 실체가 따로 있는 건 아니에요.
자동차를 예로 들어볼게요. 자동차는 바퀴로 굴러가고, 소리도 나고, 불도 켤 수 있지만, 자동차라고 할 어떤 주체가 있는 건 아니잖아요.
물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물을 아무리 쪼개도 물이라는 성질이 계속 남아있을까요? 옛날에는 물이라고 하는 어떤 근본 요소가 있는 줄 알았습니다.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최소의 알갱이가 분자인데, 과학이 발전하면서 물 분자는 수소 원자와 산소 원자로 이루어져 있음이 밝혀졌습니다. 수소와 산소만 각각 놓고 보면 물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물이라고 할 실체가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수소 2개와 산소 1개가 105도의 각도로 결합하면 물이라는 물질이 되는 거예요.
물의 작용이 있을 뿐이지 그 속에 물의 본질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옛날에는 이것을 알 수 있는 방도가 없었지만, 오늘날 과학 문명의 발달로 물의 본질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예요. 그런데 물 분자를 이루고 있는 산소 원자와 수소 원자는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과학이 더 발달해서 수소에 핵 변화가 일어나면 수소가 헬륨이 되듯이 다른 원자로 바뀐다는 사실을 새로 발견합니다. 이렇게 과학이라는 학문이 발달하면서 물질의 작용은 있지만, 그것의 실체는 없다는 것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게 된 겁니다. 더 미시적인 세계로 들어가면 텅 비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작용은 있지만 실체는 없다
‘오온이 공하다’하는 말은 작용은 있지만 실체는 없다는 뜻입니다. ‘나’라는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나’라고 할 실체는 없어요. 아이가 학교에 입학하면 인연을 따라서 학부모라고 불리는 것이지 학부모라고 할 정해진 실체가 없습니다.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면 인연을 따라서 엄마라고 불리는 거예요. 딸이 되면 인연을 따라서 딸이라고 불리는 겁니다. 결혼을 하면 인연을 따라서 아내라고 불리는 것이지, 아내라고 하는 실체가 있는 게 아니에요. 인연을 따라서 잠시 생겼다가 인연이 사라지면 그런 작용도 사라지는 거예요.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이를 두고 꿈같고 그림자 같고 신기루 같고 아침이슬 같고 번갯불 같다고 했습니다. 있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없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해가 잘 안 되죠. 현실에서는 늘 나라는 실체가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마치 원시인이 라디오에서 소리가 나오는 것을 들으면 그 안에서 작은 사람이 노래를 부른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원시인은 TV 화면을 보면 그 안에 작은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전원을 꺼버리면 모두 사라집니다.
그래서 오온개공은 그 당시 사람들의 인식 수준으로는 굉장한 얘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오온개공’을 이해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결국 시간이 흐르면서 ‘색수상행식’의 각각은 변하지 않는 요소라고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부처님이 ‘나라고 할 것이 없다’라고 말씀하셨으니까 나라고 할 것은 없지만 나를 이루고 있는 다섯 가지는 실체가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무아는 인정하는데 무아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는 유아라고 이해한 겁니다. 이것은 마치 처음에는 ‘물의 실체가 있다’라고 생각하다가 물의 실체가 없다는 것까지 인정을 하게 되었는데, 물 분자를 이루는 산소 원자와 수소 원자는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과 같아요. 과학계에서도 이런 오류가 반복되었듯이 불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얼음이 녹아서 물이 되고, 물이 증발해서 수증기가 됩니다. 수증기는 기체이고, 물은 액체이고, 얼음은 고체잖아요. 이렇게 상태가 다르니까 어린아이가 볼 때는 서로 다른 물질인 줄 압니다. 그런데 조금만 관찰해보면 같은 물질이거든요. 이런 물리적인 변화에서는 모양이 어떻게 바뀌든 물 분자의 구성은 똑같아요. 그래서 물의 실체는 물 분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물이 분해되는 화학적인 변화에서는 어떻게 될까요? 물이 없어져 버립니다. 그러나 물 분자를 구성하는 수소 원자와 산소 원자는 그대로 있으니까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원자는 그 실체가 그대로 있는 것 아니냐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요소설입니다.
이런 화학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서 돌턴이 원자설을 주장합니다. 물질을 이루고 있는 기본 알갱이가 원자이며, 원자는 더 이상 쪼갤 수 없고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거죠. 이걸 전제로 해야 화학 변화가 설명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온 화학 변화의 3대 법칙이 일정 성분비의 법칙, 배수 비례의 법칙, 질량 불변의 법칙입니다. 여기에는 원자는 불변하고, 원자는 쪼개지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그런데 톰슨에 의해서 전자가 발견되고, 러더퍼드에 의해서 양성자가 발견되면서, 원자는 더 작은 소립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원자가 소립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은 원자도 변한다는 거죠. 그것이 바로 핵 변화입니다. 핵 변화가 일어나면 원자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질량 불변의 법칙이 성립하지 않고 질량 감소가 일어납니다. 그것이 핵에너지입니다. 아인슈타인의 에너지 공식 E=mc2(제곱)에 따르면, E는 에너지이고, m은 질량이고, c는 빛의 초속인데, 질량 감소에 의해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나오잖아요.
이렇게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물에는 본질이 없다는 것까지는 알았는데 그 물을 이루고 있는 원자는 불변하는 요소라고 생각했던 돌턴의 원자설 같은 것이 바로 소승불교라는 겁니다. 그 점을 지적하는 것이 반야심경이에요. ‘일체는 오온이다’라는 가르침을 통해 ‘나’라고 하는 것은 오온의 결합에 불과하다는 것까지는 받아들였는데, 오온의 각각은 불변하는 요소라고 이해한 것이 소승불교라는 겁니다. 부처님의 말씀과 논리를 다 받아들였는데 그 바탕에는 요소설이 깔려있는 겁니다.
오온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도 모두 실체가 없다
그래서 대승불교에서는 산소도 수소도 다 실체가 없다고 지적합니다. 그 표현이 바로 ‘오온개공’이에요. 오온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각각이 모두 실체가 없다는 겁니다. 그것을 증명하려면 우선 색이 무상하고 무아라는 것을 증명해야 합니다.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이 문장은 색이 무상하고 무아라는 것을 증명하는 문장입니다. 무상과 무아는 부처님의 법이잖아요. 그다음에 수, 상, 행, 식, 역시 무상하고 무아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다음 문장입니다.
수상행식 역부여시
受想行識 亦復如是
무상하다는 것은 변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얼음이 녹아서 물이 된다는 것은 얼음이 항상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어린아이는 얼음하고 물을 다르다고 봅니다. 세 살짜리 어린아이가 아주 단단한 얼음으로 만든 구슬 세 개를 가지고 놀다가 놔두고 밖에 나갔다가 한참 후에 들어와 보니까 물로 변해 있으면 이렇게 말하겠죠.
‘엄마, 내 구슬 없어졌어, 대신에 물이 생겼어.’
이것은 변화를 못 보기 때문입니다. 변화를 다 보는 엄마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말하죠.
‘얘야, 그것은 구슬이 사라진 것도 아니고, 물이 생긴 것도 아니야. 변했을 뿐이야.’
얼음이 변해서 물이 됐으니까 물과 얼음은 다르다고 말할 수가 없죠. 그렇다고 ‘얼음과 물이 같다’라고 말하기는 좀 곤란해요. 본질은 같지만 현상은 다르니까요. 그렇다고 얼음과 물이 다른 물체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그래서 ‘불이’, 즉 얼음과 물은 다르지 않다고 표현하는 겁니다. 색불이공 공불이색에서 ‘불이’는 다르지 않다는 뜻입니다.
‘얼음이 변해서 물이 되니 얼음과 물은 다르지 않고, 물이 변해서 얼음이 되니 물 또한 얼음과 다르지 않다’
A와 B가 같음을 증명하는 방법
왜 이렇게 문장을 뒤바꿔서 말할까요? 이것은 A와 B가 같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논증 방법입니다. A와 B가 같음을 증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A이면 B이고, B이면 A이다’ 이것을 증명하면 됩니다.
⓵ ‘A이면 B이다’가 성립하면 A는 B가 되기 위한 충분조건이 되고, B는 A가 되기 위한 필요조건이 됩니다. 이 명제의 역인 ⓶ ‘B이면 A이다’ 역시 성립하면, ⓵과 ⓶에 의해 A는 B가 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 되고, B도 A가 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 됩니다. 그러므로 A와 B는 같다는 것이 성립하게 되죠.
이렇게 ‘색불이공 공불이색’은 무상을 증명하는 논리입니다. 그다음은 색이 무아라는 것도 증명해야 하잖아요. 무상과 무아가 성립해야 연기법에 맞으니까요.
‘무아’는 ‘A 그대로 B이다’ 이렇게 증명을 해야 합니다. 이것도 무상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방법과 논리가 똑같아요. A이면 B이다. 그 역이 성립한다. B이면 A이다. 그러므로 A는 B가 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고, ‘A=B’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쉽게 예를 들어볼게요. 바람을 불어넣은 고무풍선을 이 방 안에 계속 집어넣는다고 합시다. 100개 집어넣고, 500개 집어넣고, 1000개 집어넣고, 10000개 집어넣으면 언젠가 이 방 안에 고무풍선이 꽉 차겠죠. 그 모습을 보고 ‘방 안이 꽉 찼다’ 이렇게 말합니다. 꽉 차서 사람이 들어갈 수가 없어요. 그런데 또한 이 방 안은 텅 비었다고 말할 수 있죠. 고무풍선 표면을 중심으로 관찰하면 꽉 차 있다고 볼 수 있지만, 공기 분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 방 안은 텅텅 비어 있어요. 만약에 더 이상 밖에서 들어오거나 밖으로 나가는 것 없이 바늘로 고무풍선을 다 터뜨려 버리면 이 방 안에는 아무것도 없게 됩니다. ‘꽉 찼다’ 하는 것과 ‘텅 비었다’ 하는 게 같은 거예요. 꽉 찼다는 것이 A라면, 텅 빈 것이 B라고 합시다. 그 역도 성립하기 때문에 ‘A=B’가 성립하는 것입니다.
아주 크고 동그란 쇳덩어리를 봅시다. 이런 쇳덩어리는 철 원자인 Fe가 수도 없이 결합해서 원자와 원자 사이에 빈 곳이 없어요. 원자와 원자 사이 또는 분자와 분자 사이에 빈 곳이 있으면 수증기처럼 기체가 되는 건데, 쇳덩어리는 다닥다닥 붙어 있어요. 이것을 고체라고 합니다. 보어가 그린 원자의 구조도를 본 적이 있나요? 가운데에 핵이 있고, 바깥에 전자가 돌고 있죠. 그런데 그 사이가 텅텅 비어 있어요. 원자의 지름은 약 10에 -8승 cm(1억 분의 1 cm) 정도입니다. 그런데 핵의 지름은 원자의 지름보다 훨씬 더 작아요. 마치 태양이 있고 바깥에 지구가 도는 것과 거의 모형이 비슷합니다. 핵이 있고 바깥에 전자가 도는 거예요.
꽉 찬 것이 텅 빈 것입니다, 그 이유는
지구가 꽉 차 있는데 그 각각을 구성하는 원자의 전자는 무게가 없습니다. 전자를 떼 버리고 핵끼리만 딱 결합을 시키면 지구의 크기가 농구공만 해집니다. 그런데 무게는 똑같아요. 사람의 눈으로 보면 지구의 속이 꽉 찼는데, 소립자의 눈으로 보면 밤하늘을 보듯이 텅텅 비어 있는 겁니다.
그러니 꽉 찬 것이 텅 빈 거예요. 이것이 색즉시공입니다. 색이 곧 공이며, 공이 곧 색입니다. 아인슈타인의 에너지 공식도 ‘질량이 곧 에너지이다’ 이것을 증명한 거예요. 질량이라는 것은 꽉 찬 것입니다. 에너지라는 것은 텅 빈 것입니다. 질량을 ‘색’이라고 하면, 에너지는 ‘공’이라고 할 수 있겠죠. 수소와 수소가 결합해서 헬륨이 되거나, 우라늄이 붕괴되어 다른 원자가 될 때는 질량이 감소하는데, 그 질량이 에너지로 바뀐다는 거죠.
색은 무아이므로 공하고, 색은 무상이므로 공하고, 그래서 색은 공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고 듣고 느끼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고 생각하는 것으로 상을 짓습니다. 같은 물건을 두고도 ‘크다’, ‘작다’ 하고 상을 짓습니다. 이것을 금강경에서는 ‘제상이 비상이다’ 하고 표현하죠. 이 말은 반야심경에서 ‘색이 공하다’ 하는 것과 같은 뜻이에요. ‘색’만 공한 것이 아니라 이때 일어난 느낌인 ‘수’도, 이때 남겨진 기억인 ‘상’도, 이때 일어나는 의지인 ‘행’도, 그때 인지하고 분별하는 ‘식’도, 하나하나 검증해보면 모두 공하다는 것입니다. 오온이 각각 무상하고 무아라는 것입니다. 무상하고 무아라는 것을 ‘공’이라고 표현한 겁니다. 그래서 색이 공하다는 것을 먼저 증명하고, 같은 논법으로 수상행식 역시 공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그 결과 오온이 모두 공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순서로 이 문장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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