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불기 2565년, 부처님께서 도를 이루신 성도절입니다. 어제 철야 정진은 하셨어요? 정진하고 깨달아서 다 얼굴이 밝아졌습니까?” (웃음)
인사를 나눈 후 부처님이 출가하고 깨달음을 얻고 열반하시기까지 일생을 요약하여 이야기해주었습니다. 부처님이 출가하여 6년 간 고행 끝에 마침내 성도에 이르는 대목은 더욱 자세하게 들려주었습니다.
6년을 고행했지만
“부처님은 시체를 내다 버렸던 시타림에서 6년간 극심한 고행을 하셨습니다. 음식도 제대로 안 먹고, 옷도 안 입고, 추위와 더위에도 상관하지 않고, 속된 말로 하면 죽기 살기로 정진을 했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할 수가 있을까?’ 같이 수행하는 친구들의 눈에도 너무나 존경스러웠어요. 우리가 아는 고행상은 바로 그때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몇 년을 밀어붙였는데도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자 마음속에서 회의가 생겼습니다.
‘이렇게 정진한다고 정말 괴로움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열반을 증득할 수 있을까? 그런 경지가 있기나 할까?’
경전에서는 이런 모습을 ‘마왕 파순이 유혹했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열반이란 없다. 그런 말만 있지, 실제 그런 경지는 없다. 네가 이곳에서 이렇게 정진하다가 죽어버리면 세상에는 아무도 너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없다. 그건 무의미한 죽음이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왕궁으로 돌아가서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복을 빌면 앞으로 너는 전륜성왕이 될 수가 있다. 전 인도를 통일하는 왕 중의 왕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 이 바보 같은 짓을 그만해라.’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정진했는데도 열반의 경지가 보이지 않으니까 마음 깊은 곳에서 의심이 들었다는 뜻으로 볼 수 있겠죠. 그래서 부처님은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봅니다.
‘도대체 뭐가 잘못됐을까?’
그렇게 지난 삶을 돌아봤더니 출가하기 전 왕자 시절에는 욕망을 따라 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즐기고 싶으면 즐기고, 놀고 싶으면 놀았습니다. 그것이 행복인 줄 알았어요. 실컷 즐겨봤지만, 욕망은 마치 마약 같아서 만족감은 그 순간뿐이고 오히려 갈수록 더 커졌습니다. 욕망을 채워서 얻는 즐거움은 지속 가능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즐거움에는 반드시 괴로움이라고 하는 과보가 따랐습니다.
그러다 출가 사문을 만나고 새로운 희망을 가졌어요. 출가를 한 부처님은 이번에는 욕망을 무조건 억제하고 절제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욕망과 싸웠습니다. 배고파도 참고, 벌레가 물어도 참고, 애들이 와서 때려도 참았어요. 욕망을 참을 수는 있었지만, 참느라 늘 몸과 마음이 긴장돼 있었어요. 이 또한 완전히 편안한 상태, 즉 열반의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
욕망을 따르면 과보가 생기고, 욕망을 억제하면 스트레스가 생깁니다. 부처님은 이 둘의 모순을 발견하시고 욕망을 따르지도 않고 욕망을 억제하지도 않는 중도(中道)를 발견했습니다. 즉, 욕망을 다만 욕망인 줄 알아차리는 겁니다. 게으르지도 않고 애쓰지도 않고, 멍청하지도 않고 긴장하지도 않고, 편안한 가운데 뚜렷이 알아차림을 유지하는 거예요. 편안하면 오래 할 수 있어요. 어떤 시공간을 제한하고 딱 결심하는 게 아니라 알아차림은 가장 편안하고 가장 앎이 분명한 상태이기 때문에 일상적으로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발견한 새로운 길인 중도는 불교에 있어 최고의 발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도를 발견한 부처님은 시타림에서 나와서 우선 지친 몸을 추슬렀습니다. 경전에는 몸에 막 이끼가 끼어 있을 정도였다고 기록되어 있어요. 먼저 냇가로 가서 몸을 씻고 나오다가 허기가 져서 쓰러졌는데 수자타가 준 유미죽을 받아먹고 기력을 회복했어요. 같이 수행하던 친구들이 볼 때는 이 모습이 좋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정말 극심한 고행을 이겨내는 모습을 보고 존경했는데, 결국은 목욕을 하고 부드러운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 ‘아, 고타마가 수행을 포기했구나’ 이렇게 생각해서 그에 대한 존경심을 거두고 다른 곳으로 가버렸습니다.
부처님은 굳이 해명할 필요도 없이 그냥 자기 정진에 집중했습니다. 그래서 네이란자라 강가의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깊은 선정에 들었어요. 경전 여기저기를 살펴보면 보리수 아래에서 49일간 한 번도 일어서지 않고 용맹정진을 한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더 이상 공양을 얻어먹었다는 기록이 없으니까요.
마왕의 유혹과 협박
보리수 아래 선정에 든 부처님은 전처럼 막 각오하고 결심하고 긴장하는 게 아니라 편안한 가운데 집중을 했어요. 모든 긴장을 풀고 편안하게 있다 보니 내면의 욕망들이 올라왔어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고행을 통해 이제는 욕망이 없어진 줄 알았는데, 긴장을 풀고 앉아 있으니까 아직도 그 욕망의 뿌리가 남아있어서 올라왔던 거죠. 여기서 ‘마왕의 세 가지 유혹’이 나옵니다.
독재정권도 이런 식으로 사람을 유혹하고 협박합니다. 처음에는 돈을 주거나 지위를 주면서 유혹하고, 그래도 말을 안 들으면 잡아다가 고문하고 협박하잖아요. 이게 전통적인 수법이에요. 종교도 대부분 이런 이 두 가지 방법을 씁니다. 첫 번째, ‘이거 믿으면 천당 간다. 돈 번다. 좋은 일이 생긴다’라고 합니다. 이게 유혹이에요. 두 번째, ‘안 믿으면 지옥 간다. 벌 받는다. 재앙이 닥친다’라고 해요. 이게 협박입니다. 이런 유혹과 협박은 고래로부터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는 방식인 겁니다.
여러분도 자식들한테 늘 두 가지 방법을 쓰죠. 첫 번째, ‘심부름 다녀와라. 공부해라. 그러면 뭘 줄게’ 이게 유혹이에요. (웃음) 두 번째, ‘이거 안 하면 때릴 거야!’ 이게 협박이에요. 경전에는 마왕의 그것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그래서 ‘마왕의 유혹’이라고 말하죠.
내가 유혹과 협박에 놀아나지도 말아야 하지만, 또한 다른 이에게도 유혹과 협박을 하지 마세요. 특히 애들한테 너무 유혹하고 협박하면 안 됩니다. 우리도 유혹과 협박 속에 자랐기 때문에 크고 나면 또 다른 사람한테 유혹하고 협박하게 되기 쉬워요. 부부도 늘 유혹과 협박 속에 살죠. 살다가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이혼할 거야!’라고 협박하고, 필요한 게 있으면 ‘당신이 뭘 하면 내가 뭘 해줄게!’ 이렇게 유혹합니다. 부처님은 이런 유혹과 협박을 이겨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왕은 부처님에게 유혹과 협박이 안 통하니까 마지막으로 마왕의 자리를 내놓겠다고 합니다. 자재천왕(自在天王), 무엇이든지 다 뜻대로 할 수 있는 마왕의 자리를 주겠다는 거예요. 이건 참 큰 유혹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뭐든지 뜻대로 다 되니까 중생 구제도 뜻대로 다 될 것이고, 살고 싶은 만큼 수명도 길게 할 수 있을 것이잖아요. 뭐든지 뜻대로 다 된다니까 얼마나 좋은 자리예요?
부처님께서는 마왕의 제안에 대해서 ‘나는 아무것도 바라는 바가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게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무득(無得)’이에요. 얻을 바가 없다는 뜻입니다. 얻을 바가 없는 경지에 이르러야 완전히 번뇌가 없는 경지에 이를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법문 하는 저도 아직 얻을 바가 있어요. 저는 아마 한국에 전쟁이 안 나도록 해준다거나, 통일을 할 수 있다거나, 북한 동포들이 굶어 죽는 사태를 해결해 준다면 ‘죽어도 좋다’라고 할지도 몰라요. (웃음) 그런데 부처님은 여기서 ‘나는 아무것도 바라는 바가 없다’라는 말로 물리치셨습니다.
깨달은 눈으로 본 세상이렇게 부처님은 욕망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났어요. 우리가 진실을 보지 못하는 건 늘 욕망에 가리어 있기 때문입니다. ‘욕심에 눈이 어두워’라는 표현을 쓰잖아요. 화가 나도 ‘눈에 뵈는 게 없다’라고 표현합니다. 모두 어리석다는 말이에요.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니까 눈에 씌어있던 것이 없어지고 세상을 환히 보게 되었어요.
열린 눈으로 본 이 세상은 단독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모든 것이 서로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은 변해갑니다. 형성된 모든 것은 변합니다. 변화해서 사라집니다. 고정 불변하는 건 없습니다. 나만의 나라고 하는 실체는 없어요. 그러니 ‘나’라고 고집할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인연 따라 관계 맺어서 형성되고 사라집니다. 이걸 연기법(緣起法)이라고 해요. 그래서 부처님이 ‘연기법을 깨달았다’라고 합니다.
이렇게 세상의 실상을 환히 보니까 괴로울래야 괴로울 일이 없었어요. 모든 번뇌와 의문이 사라졌습니다. 이렇게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날을 성도일(成道日)이라고 해요.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은 편안함과 기쁨을 만끽하셨습니다. 이걸 법열(法悅)이라고 해요. 그런 다음에 세상을 내려다보니 뭇 중생이 다 괴로워하고 있었어요. 혼자 잠에서 깨어나 보니 옆에서 막 악몽을 꾸고 잠꼬대를 한다고 난리인 형상과 같았습니다.
‘아, 내가 저들을 깨워줘야 하겠구나.’
부처님이 이 기쁜 소식을 제일 먼저 전하고 싶었던 사람은 두 분의 스승이었습니다. 그러나 두 분 모두 이미 돌아가신 뒤였어요. 그래서 자기를 오해하고 떠난 옛 도반들을 찾아가서 이 법을 전했습니다. 이들이 최초의 제자가 된 다섯 비구입니다. 이렇게 교화의 여정이 시작됩니다.
성도일을 맞이해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의미를 다시 새겨야 합니다. 이 좋은 법을 내가 유용하게 써야 해요. 아는 것에서 그치면 그림의 떡이에요. 내 삶에 적용해서, 나 역시 괴로움이 없는 경지까지는 못 가더라도 괴로움이 줄어드는 경험은 해야 합니다.
기쁘게 전법하기
그리고 이 좋은 법을 주변 사람들에게 널리 전해야 합니다. 불교로 전할 수 있으면 불교란 이름으로 전하고, 불교라는 이름이 장벽이 되면 불교라는 이름마저도 버리고 법을 전하자는 거예요. 정토회에서 불교라는 이름으로 전하는 게 불교대학이고, 불교라는 이름을 버리고 전하는 게 행복학교입니다. 다가오는 봄에 불교대학도 열고, 행복학교는 매달 진행하고 있으니까 틈나는 대로 법을 전하도록 합시다.
전법은 무거운 의무감으로 하지 말고 기쁨으로 해야 합니다. 내가 고질병에 걸렸는데 어떤 약을 먹고 나아서 ‘야, 이 약 참 좋구나’ 하고 감탄했어요. 그러면 다른 사람이 똑같이 아프다고 할 때 ‘이거 먹으니까 낫더라’ 이렇게 가볍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꼭 제약회사에서 홍보하는 사람이 아니라도 충분히 소개할 수 있어요. 전법이 잘 안 되는 사람은 아직 자기가 충분히 치료 효과를 못 본 겁니다. 그러면 전법이 자꾸 의무가 되고 무거운 짐이 돼요.
전법을 할 때는 상대에게도 강요해서는 안 돼요. 그들이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 가볍게 인연을 맺어줄 뿐입니다. 먹고 안 먹고는 그들의 문제니까 그것까지 간섭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까지 간섭하면 또 마음이 불편해져요. 내가 그렇게 얘기했는데도 상대가 안 한다고 하면 기분이 나빠지잖아요. 전법은 상대를 위해서 하는 것이니까,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는 그의 자유예요. 나는 다만 법을 전할 뿐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정진을 하고 전법을 해나가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스님은 비대면 온라인 시대에 적응하는 과정이 혼란스럽겠지만 수행자의 자세로 적응해가자고 격려하며 법문을 마쳤습니다.
“정토회는 그동안 법당 중심으로 수행정진하다가 온라인 기술의 덕분으로 이제는 개인 법당으로 전환하고 있습니다. 온라인으로 모든 것을 하게 되니까 훨씬 활동이 용이하고 확산도 쉬워졌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물론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라고 하는 재미가 좀 떨어지는 면도 있지만, 우리는 수행자이기 때문에 그런 데에 너무 연연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해요.
변화하는 과정에서는 좀 혼란스러울 수도 있어요. 그러나 우리는 새로운 환경에 또 적응을 해야 합니다. 수행이라는 것은 살아온 습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자기가 살아온 습관을 막 붙들고 고집한다면 그건 수행의 측면에서도 맞지 않습니다. 지금까지는 살아온 습관이 있더라도 상황이 바뀌었으니까 그 변화에 가장 적합하게 대응하는 방식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제는 비대면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을 해야 할 위치에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빨리 적응할 것이고, 연세 드신 분들은 그 습관의 벽이 두터워서 적응하는 데 조금 어려움이 있을 거예요. 그래도 우리는 수행자이니까 극복해 나가자는 말씀을 드립니다. 이런 관점을 갖고 정진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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