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과 마음으로 체험하는 공부
“불교에 대해서 지식적으로 공부하고자 하면 10년을 공부해도 모자랄 만큼 내용이 많습니다. 그러나 정토불교대학은 불교를 전공하는 박사가 되고자 학문을 연구하는 곳이 아니에요. 정토불교대학은 내가 내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가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이치를 알고 경험하는 과정입니다. 여기에 필요한 필수적인 내용만 배우고 나머지는 삶을 살아가면서 경험을 통해 체득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물론 이론적인 내용을 더 배우고자 하면 정토불교대학과 경전반을 공부한 후에 동국대에 가서 더 배우면 됩니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을 통해 계속해서 탐구해 나가야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정토회에서는 2년 동안의 공부가 끝나면 경험하고 탐구하는 것에 중점을 둡니다.
자기 스스로 탐구를 해야지, 남이 쓴 글이나 남의 이야기를 듣고 따라 하기만 하면 결국 맹신자가 되거나 추종자가 됩니다. 누구를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스스로 붓다가 되어야 합니다. 죽을 때 입가에 미소를 띠며 편안하게 세상을 떠나야지, 죽는 그 순간에도 ‘극락에 갈 수 있을까?’, ‘천당에 갈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한다면 죽는 순간에도 안심입명 하지 못하고 헐떡거린다는 의미입니다.
이치를 깨닫고 나면 누가 천당에 보내준다고 해도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만약 천당이 있다면 나같이 살아온 사람이 가겠지’ 하고 편하게 받아들이고, 만약 지옥에 간다고 해도 겁을 내지 않는 경지가 되어야 합니다. 지옥에 가면 할 일이 많습니다. 지옥에서는 사람들이 괴로워하니까 도울 일이 많아요. 그러니 지옥에 가면 할 일이 많아서 좋지요. ‘평소에도 일을 많이 하는데 거기 가서 일이나 많이 하자’ 이렇게 받아들이면, 어디를 가든 좋은 일이 되기 때문에 인생이 편안해집니다.
인생이 스스로 자립되지 않으면 자기가 같이 살 부인이나 남편도 자기가 선택하지 못하고 부처님한테 구해달라고 하고, 자기가 하는 사업도 부처님한테 잘 되게 해달라고 하고, 시험을 치는 것도 자기가 공부를 해서 합격하면 될 일인데 그걸 부처님한테 합격시켜 달라고 하면서 평생을 남에게 빌며 헐떡거리고 삽니다. 그리고 숨이 넘어 가는 순간까지도 ‘지옥에는 보내지 말라’, ‘천국에 보내달라’ 이렇게 구걸하는 인생을 삽니다. 이건 중생의 길입니다. 나쁜 길은 아니지만 어리석은 길입니다.
이런 헐떡거림을 놓고 자기가 자기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다가 여유가 조금 생기면 허우적대는 사람을 건져주기도 하고, 도와달라는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습니다. 나쁜 일을 해놓고 천당에 가길 바라는 더러운 심보를 갖지 말고, 좋은 일을 많이 해서 천당에 갈 자격은 있지만 지옥의 중생들이 괴로워하니 그 사람들을 돕고자 내 발로 지옥에 가는 배짱과 패기가 있어야 합니다. 천당에 못 가는 게 아니라 갈 자격은 있지만 자기 스스로 지옥 중생을 돕고자 지옥으로 가는 거예요.
어린아이도 아니고 모두 다 어른이 되었으니 이제는 삶을 장부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장부다운 가르침’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부처님을 영웅 중의 영웅인 ‘대웅(大雄)’이라고 부릅니다.
언젠가 즉문즉설을 하는데 어떤 분이 스님은 좋은 일도 많이 하시는데 자기가 보기에는 안타깝다고 해요. 이유를 들어보니 하느님을 믿어야 천당에 가는데 하느님을 믿지 않으니 천당에 가지 못한다며 너무 안타깝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예수님 믿고 천당 가세요’ 하시길래 저도 ‘걱정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예수님 믿고 지옥에 가겠습니다’라고 했어요. (모두 웃음)
예수님을 진짜로 믿으면 천당에 가야 돼요? 지옥에 가야 돼요? 예수님의 가르침은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 중생의 죄를 대신하는 거였잖아요. 그런 예수님을 따르는 자라면 지옥에 가서 다른 사람을 구제하는 행동을 할 때 그 가르침과 일관성이 있잖아요.
그러니 우선 이 가르침이 이치에 맞아야 합니다. 이치를 깨닫고 나면 우선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만 행동으로 다 옮겨지는 건 아니에요. 아직 체험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습니다. 복을 지어야 복을 받고, 나쁜 짓을 하면 과보가 따릅니다. 이것이 인연 과보(因緣果報)입니다. 이 이치를 알면 껄떡거릴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모두 내가 지은 것이기 때문이에요. 돈을 빌렸으면 갚아야 하고, 돈을 갚기가 싫으면 앞으로는 돈을 빌리지 않아야 합니다. 남의 물건을 훔치면 벌을 받아야 하고, 벌을 받기 싫으면 다음부터는 물건을 훔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매사에 자기가 선택을 하고 자기가 결과를 책임지는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삶을 살지 않고 그저 ‘한 가지 소원은 무조건 들어준다’는 말에 혹해서 쌀자루를 짊어지고 불상 앞에 올려놓고 ‘이거 해주세요’, ‘저거 해주세요’ 하고 비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지 않는 행동이에요. 비는 것이 나쁜 행동은 아니지만, 이치에 맞지 않는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이제 여러분도 1년 가까운 시간 동안 공부를 했으니 이치가 어떠한지 대충은 알겠죠?”
“네!”
“그런 관점을 분명히 가지고 공부를 해나가야 합니다. 이 이치를 아는 것도 쉽지 않은데, 그래도 여러분들은 정토불교대학을 다녀서 이치를 짧은 시간에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치를 안다고 해도 그것을 몸과 마음으로 체험하는 것은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이렇게 설명을 한 후 몸과 마음으로 체험하기 위한 프로그램인 깨달음의 장, 인도 성지순례, 명상수련이 어떤 배경에서 마련되었는지 각각 소개해 주었습니다.
이어서 불교대학 학생들이 그동안 수업을 들으며 궁금했던 점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다양한 질문 중 한 가지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자신에게 의지하라고 할 때 자신의 무엇에 의지해야 합니까
“지난주 불교대학 수업에서 자신이 법을 체득하는 것이 중요하고, 자신의 주관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경(經)과 율(律)에 견주어 법이 아닌 것에 의지하지 말고 법에 의지하라는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에 대한 법문을 들었습니다. 남에게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 체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셨는데, 제 자신을 보면 저는 습관의 덩어리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에게 의지하라 하실 때 나 자신의 무엇에 의지하라는 말씀이신지 궁금합니다. 여기에서 업식인 나와 의지의 대상인 나는 어떻게 구분이 되는지요?”
“부처님께서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마도 부처님께서 ‘자등명 법등명’이라는 언어를 그대로 사용했다기보다는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요점 정리를 그렇게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뜻을 헤아려보면,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기가 쉽습니다. 어릴 때는 부모에게 의지하고, 결혼해서는 아내와 남편에게 의지하고, 나이가 더 들면 자식에게 의지합니다. 스승에게 의지할 때도 있고, 친구에게 의지하기도 하고, 부처님이나 하느님께 의지하기도 합니다. 모두 다 다른 사람에게 의지해서 살아가려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네 스스로 인생의 주인이 되어야지 다른 사람에게 의지해서 살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의지하는 자를 중생이라 합니다. 의지하지 않는 자가 곧 부처입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지 말고 독립하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자등명(自燈明),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라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지 말고 너 자신에게 의지하라는 말은 자립하라는 의미입니다. 스님을 찾아와서 ‘돈을 빌려야 됩니까, 빌리지 말아야 합니까?’ 또는 ‘돈을 갚아야 합니까, 갚지 말아야 합니까?’라고 물을 게 아니에요. 이치를 깨달으면 돈을 빌리면 갚아야 하고, 갚기 싫으면 안 빌려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돈을 빌릴 때 대개 빌리는 것만 생각하는데 갚을 일도 미리 생각해봐야 하는 것입니다. 내 수입은 100만 원인데 다른 사람에게 매달 100만 원을 빌리면 마치 내 수입이 200만 원인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빌린 100만 원들은 쌓여서 시간이 지나면 모두 이자까지 쳐서 갚아야 합니다. 그러니 빌리는 돈은 지금 당장은 좋을지 모르지만 나중에 무거운 짐이 됩니다. 지금 좋은 것만 보고 결정을 하면 안 돼요. 나중에 큰 과보를 받게 될 것을 미리 알고 결정을 해야 합니다.
만약 이것을 모르고 돈을 빌리게 되면 나중에 갚을 때 힘이 많이 듭니다. 그렇지만 힘들다고 해서 그게 또 나쁜 건 아닙니다. 이번에 힘든 것을 알았으니까 다음에 비슷한 상황이 오면 조금 궁하게 살더라도 빌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경험을 통해 자기가 선택하고 책임지는 훈련을 몇 번 하면, 이제 이런 일이 생겨도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지 않습니다.
자등명에서 ‘나(自)’라는 용어에 너무 집착하지 마세요. 자신에게 의지하라는 말은 곧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지 말고 자립하라는 의미입니다.
○법등명(法燈明), 법에 의지하라
물론 이런 연습을 통해 점차 자립된 삶을 살고, 필요한 결정을 스스로 하더라도, 그 결정이 어리석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뭔가 필요한 결정들을 스스로 하긴 하는데 그 결과가 좋지 않을 때가 있잖아요. 스스로 결정을 하긴 하는데 나의 주관이나 무지에 빠져서 결정을 할 때는 엉터리로 결론을 내버립니다. 이런 부분을 경계하기 위해 ‘자등명’과 함께 ‘법등명’을 덧붙여 놓은 겁니다. 법에 의지해야지 법이 아닌 것에 의지하지 말라는 겁니다. 이 말은 내가 어떤 판단을 하더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그 기준을 두라는 뜻입니다. 막연히 부처님께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리는 판단이 부처님의 가르침, 즉 이치에 부합하는지 여부를 확인하라는 거예요.
지금 질문한 내용에도 두 가지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어떤 결정을 할 때 이치에 맞도록 하라는 말이 ‘법등명’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말만 들을 게 아니라 내가 중심이 되어서 결정을 내리라는 것이 ‘자등명’입니다.”
“네. 감사합니다. 자립하겠습니다. 이치에 맞게 결정을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궁금한 게 있을 때 지금처럼 즉문즉설 시간을 통해 스님에게 물어봅니다. 예를 들어, 남편이 미웠는데 스님의 말씀을 들으니 ‘미워할 필요가 없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두 번, 세 번 정도 물어본 다음에 이치가 파악이 되면 차츰 물어볼 일이 줄어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처음에 스님한테 결혼에 대해 물으러 온 사람이 스님의 의견을 듣고 내린 결정이 더 유리했다는 것을 알고, 그다음에는 집 사는 문제도 물어보고, 집 파는 문제도 물어보고, 아이 키우는 것에 대해서도 물어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모두 웃음)
이렇게 되면 물어보면 물어볼수록 앞으로 물어봐야 할 것이 더 많아집니다. 이렇게 되면 벌써 자기도 모르게 스님에게 의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님의 법문은 자립을 돕는 가르침인데 도리어 법문을 통해 자립이 훼손되는 것입니다. 유튜브에 1500여 개의 영상이 있는데, 5개를 보든 100개를 보든 보면 볼수록 차츰 자립의 길이 넓어져야 합니다. 그게 아니라 스님에게 질문하지 않고서는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하거나, 비슷한 주제의 유튜브를 찾아보지 않고서는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면, 처음에는 스님에게 도움을 얻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스님에게 의지하게 된 경우입니다. 이것은 가르침과 정반대로 간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금강경에서는 뗏목에 비유합니다. 강을 건널 때 뗏목의 도움을 얻었는데, 강을 건넌 뒤에도 그 뗏목을 계속 지고 다니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지팡이에 비유되기도 합니다. 다리를 다친 사람이 지팡이에 의지하면 걷는 데 도움이 됩니다. 다리가 다 낫고 나면 지팡이를 버려야 되는데, 계속 지팡이를 가지고 다니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다리가 멀쩡한 사람인데 지팡이를 계속 가지고 다니니 결국 멀쩡한 사람이 다리에 문제가 있는 사람처럼 보이게 됩니다.
법륜 스님이 필요하고 필요 없고의 문제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처음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거기에 의지하며 살아가지만 공부를 해나갈수록 점차 의지심이 줄어들고 자립도가 높아지는 것이 진정으로 부처님의 제자가 되는 길입니다. 그러니 부처님을 믿고 따르는 것만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시간이 갈수록 부처님의 삶처럼 우리의 삶도 바뀌어 가야 합니다. 부처님께 무얼 해달라고 하는 게 아니라, 설령 해주겠다고 해도 ‘제 인생은 이제 제가 살 수 있으니 저기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와주세요’라고 말해야 합니다. 나아가 ‘저 사람들 돕는 일은 제가 하겠습니다. 부처님은 더 급한 일을 보십시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네. 감사합니다.”(모두 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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