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를 들어야 할까요, 호흡을 관찰해야 할까요?
“화두를 들어야 하는지, 호흡을 관찰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먼 과거에 강렬한 화두 참구 경험이 있었는데 제가 그 상에 붙들린 것이라고 생각해서 화두는 잊고 호흡 명상만 하고 있었습니다. 화두와 관련한 스님의 법문을 듣고도 계속 가슴에 답답함이 있어서 화두 참구를 해야 하는 건가 싶기도 합니다. 어떡하면 좋을까요?”
“수행은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계율을 잘 지켜야 합니다. 둘째, 선정을 닦아야 합니다. 셋째, 지혜를 증득해야 합니다. 계율을 지키는 것은 윤리를 지키는 것에 해당합니다. 더 나아가 선정을 닦는 정도까지는 불교가 아닌 다른 종교의 수행법에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요가는 주로 선정을 닦습니다. 그런데 불교의 가장 큰 특징은 지혜를 증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혜만 증득하면 계율은 안 지켜도 되고, 선정은 안 닦아도 될까요? 계율을 지키지 않고, 선정을 닦지 않으면, 지혜가 증득 될 수 없습니다. 계율을 지키고 선정을 닦는 것은 지혜를 증득하는 바탕이 됩니다. 계율을 지키는 것은 남이 보기에 훌륭한 사람이 되는 거예요. 선정을 닦는 것은 자기 스스로 편안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지혜를 증득하는 것은 스스로 번뇌가 없고 모든 사물의 근본 이치를 통달하는 것입니다. 불교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말하면 지혜를 증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혜를 증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계율을 지키고 선정을 닦는 것을 기초로 해야 됩니다.
대승불교, 소승불교, 선불교, 밀교 등 각 불교마다 계율이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큰 차이가 없습니다. 계율은 소승불교의 계율이 기본입니다. 소승은 계율을 굉장히 중요시합니다. 그러나 대승불교와 선불교에서는 깨달음을 너무 중요시하다 보니까 계율을 좀 덜 중요시하는 풍조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선승 중에 청정한 계율을 지켜서 인격을 갖춘 사람이 드물고 막행막식 하거나 욕하고 화내고 술을 먹어도 ‘저분은 깨친 사람이다’ 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보면 계율을 청정히 지키는 것이 중요하지 그 사람이 깨달았는지 안 깨달았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계율을 청정히 지켜서 타인에게 해를 주지 않고 이익을 주는 것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더욱 중요합니다. 그러나 해탈과 열반이라는 수행의 목표를 기준으로 생각하면 계율을 지키는 것은 한 부분이지 전부는 아닙니다.
선정은 마음을 고요히 하는 가운데 정신이 한곳에 집중되어 깨어있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을 고요히 하는 가운데 자기 상태에 뚜렷하게 깨어있어야 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몸에 깨어있고, 느낌에 깨어있고, 마음에 깨어있고, 법에 깨어있고, 이렇게 네 가지에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고 해서 ‘사념처관’이라고 합니다. 호흡에 깨어있기는 그전에 해야 할 수행입니다. 초심자들에게는 소승의 기본 계율을 지키는 것과 소승의 기본 수행법을 행하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호흡관을 먼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승불교에서는 선정을 염불로 닦습니다. ‘관세음보살’을 부르면서 그 소리에 집중하지요. 밀교에서는 ‘옴마니 반메홈’을 반복해서 염하는 주력을 수행이라고 합니다. 선불교는 ‘나라고 하는 이것이 무엇인고?’ 하는 화두를 참구 합니다. 각 종파는 자신들이 닦는 선정 수행법이 제일이라고 주장하지만, 깨어있는 상태를 유지한다면 화두를 들어서 깨어있든, 호흡에 깨어있든, 동작에 깨어있든, 염불에 깨어있든, 주력에 깨어있든, 선정을 닦는 수행에는 큰 차이가 없어요.
저는 선불교의 전통을 계승한 선사입니다. 선불교는 통합 불교이기 때문에 저는 어릴 때부터 선정을 닦는 방법으로 참선도 배우고, 주력도 배우고, 염불도 배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불교이기 때문에 화두에 깨어있는 화두 참구를 기본 수행법으로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법문을 할 때 화두를 참구 하는 수행법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 질문자가 정토경전대학에 입학하게 되면 선불교의 발생 원인과 선불교의 장점에 대해 많은 공부를 하게 될 것입니다.
화두 참구란 참선 방법의 한 종류인데 어떤 생각이나 관념을 모두 내려놓고, 불교라는 생각이나 부처님이란 생각도 모두 내려놓고, 오직 화두에 깨어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위빠사나 수행에서도 마찬가지예요. 부처님이라는 생각이나 불법이라는 생각도 모두 내려놓고 오직 호흡에 깨어있는 것입니다. 앉아서 머릿속으로 이건 어떻고 저건 어떻고 생각하면, 그것은 화두 참구가 아니라 번뇌와 망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 불교는 원효대사 이후로 통불교 사상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자기 종파만 옳다고 주장하는 종파불교가 아니라 다른 종파도 인정하자는 지향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어떤 수행을 해도 좋습니다. 이를 근간으로 용성조사님께서는 5대 수행을 정립하셨어요. 첫째, 참선하는 사람은 화두에 깨어있어야 하고, 둘째, 염불 하는 사람은 염불에 깨어있어야 하고, 셋째, 주력하는 사람은 주력에 깨어있어야 하고, 넷째, 간경 하는 사람은 간경에 깨어있어야 하고, 다섯째, 불사 수행을 하는 사람은 일에 깨어있어야 합니다. 불사 수행이란 일을 하면서도 일하는 데에 깨어있는 수행법을 말합니다.
이런 많은 수행법이 있지만 지금 우리나라에서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조계종은 화두에 깨어있는 것을 가장 중요한 수행법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화두 참구를 하든, 다른 네 가지 중 하나를 하든, 어떤 것을 해도 좋습니다. 저는 출가했을 때 먼저 스승으로부터 화두 참구부터 배웠습니다. 그러나 일반인들에게 선정을 닦는 방법을 가르칠 때는 우선 호흡에 깨어있기를 가르칩니다. 화두 참구든 호흡에 깨어있기든 편안한 가운데 한곳에 집중해서 깨어있는다는 측면에서 그 원리는 똑같습니다. 먼저 호흡에 깨어있기가 되면 나중에 화두 참구를 할 때도 굉장히 도움이 됩니다.
예를 들어 건강이 안 좋아서 운동을 좀 하려고 할 때 무슨 운동이 좋을지 정한다고 합시다. 그때는 인연을 따라서 농구를 하든지 축구를 하든지 등산을 하든지 어떤 운동을 해도 괜찮습니다. 어느 한 가지 운동을 콕 집어서 이 운동이 제일 낫다고 주장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자기가 좋아하거나, 누가 가까이에서 도와줄 사람이 있거나, 자신이 사는 환경이 그 운동을 하기에 적당하거나, 이렇게 인연을 따라 하면 되는 것처럼 수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한 가지 수행법이 최고라고 고집하는 것은 종파적 개념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약에 질문자가 어릴 때 화두 참구하는 습관이 생겨서 화두 참구가 수월하다면 화두 참구를 해도 좋다는 거예요. 그러나 이거 좀 했다가 저거 좀 했다가 이렇게 섞어서 하는 것은 좋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러면 마음이 산란하기 때문입니다. 처음 마음을 집중시킬 때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을 했다가 그다음에 저절로 ‘이 뭣고!’ 하는 화두가 참구 되면 거기에 집중해도 좋습니다. 간화선은 깨어서 화두를 참구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화두 참구를 하다 보면 화두에 깨어있기를 하는 게 아니라 생각에 빠질 위험이 많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스스로는 화두를 참구하고 있다고 착각할 소지가 있습니다. 호흡을 알아차릴 때는 그런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호흡 알아차리기는 생각이 일어나면 ‘제가 망상을 피웠습니다’ 하고 비교적 구분을 명확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화두 참구는 ‘이 뭣고!’ 하고 참구를 하지 않고 ‘이게 뭐지?’ 하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서 그걸 화두 참구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화두 참구를 잘못하는 승려들을 향해서 ‘선방에 앉아서 망상만 피운다’ 이런 비판을 하기도 하는 겁니다. 어떤 방법으로 선정을 닦아도 좋습니다. 그 원리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