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여문(眞如門)과 생멸문(生滅門)>
경문에 나오는 ‘문(門, skt. dvara)’은 출입문이란 의미보다는 따위, 부류, 그런 종류, 상태, 가르침 등의 의미로 쓰일 때가 많다. 그런데 여기서 ‘문(門)’이란 그런 마음상태, 혹은 마음이 드나드는 문을 말한다. 따라서 여기서는 문(門)이 곧 마음(心)과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다.
마명(馬鳴, 아슈바고샤/Asvaghoa, AD 2세기) 보살은 그의 저서 <대승기신론>에서 우리의 마음에는 두 가지 마음, 즉 생멸심과 진여심이 있다고 했다.


• 생멸심(生滅心)이란 마음이 움직이고 변화하는 측면을 말한 것인데, 이 생멸심이 바로 중생심이다. 중생은 대상에 따라서 온갖 마음을 일으키기 때문에 번뇌 망상이 마치 죽 끓듯 일어나, 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다. 즉, 세간법의 세계를 말한다.


• 진여심(眞如心)이란 우리의 본래 마음으로서, 이 마음은 맑고 청정하다고 해 청정심(淸淨心), 부처님의 성품과 같다고 하여 불성(佛性), 여래의 씨앗을 간직하고 있다고 해서 여래장(如來藏), 이 자리는 무엇이라고 이름 붙일 수 없다고 해서 ‘이 뭣고’ 등으로 부르고 있지만, 마음의 참된 모습을 언어로 설명할 수가 없다. 따라서 <대승기신론>에서는 진여를 ‘언어를 떠난, - 언어를 초월한 말(離言眞如)’이라고 했다. 즉, 출세간법의 세계를 말한다.


그래서 원효(元曉, 617~686) 대사는 사람에겐 부처와 같은 마음과 속된 마음, 이렇게 두 가지 마음이 있다고 했다. 부처와 같은 마음이 진여심이요, 속된 마음이 생멸심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진여심을 추구하는 가르침인 진여문(眞如門)은 모든 상대적 모습을 떠난 불변하는 마음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고, 생멸심의 가르침인 생멸문(生滅門)은 진여문의 반대말로서, 중생이 태어나고 죽게 되는 문, 중생세계로 나아가는 문을 말한다.


이와 같이 <대승기신론>은 일심이문(一心二門)을 말했다. 한 마음에 두 개의 문(심)이 있다는 말이다. 마음은 진리의 세계와 중생의 세계로 들어가는 중요한 관문이다. 그 마음의 문에는 모든 괴로움을 여읜 해탈로 가는 진여문(眞如門)과 중생세계로 가는 생멸문(生滅門)이 있다. 즉, 일체 세간법과 출세간법을 포괄하는 것이 일심인데, 이 일심은 진여와 생멸의 두 측면을 가진다. 생멸문은 세간법이요, 진여문은 출세간법을 일컫는다.


진여문을 심진여문(心眞如門), 생멸문을 심생멸문(心生滅門)이라고도 한다. 즉, 이문(二門)이란 진여문과 생멸문인데, 그 자체가 번뇌와 무명에 오염되지 않고 청정한 상태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 진여문이고, 번뇌와 무명 작용에 유전해 가는 것이 생멸문이다. 생멸에서 진여로 나아가는 문이 진여문이고, 진여에서 생멸로 나아가는 문이 생멸문이기에 이문(二門)이 된다.

<기신론>의 법문을 보자.
“현시정의자 의일심자 유이종문(顯示正義者 依一心者 有二種門) - 바른 뜻을 드러내 보인다는 것은 일심이라는 것에 의지해 두 가지 문이 있음이니,
일자 심진여문 이자 심생멸문(一者 心眞如門 二者 心生滅門) - 하나는 마음의 진여문이요, 둘은 마음의 생멸문이다.”


여기서 마음을 진여와 생멸로 나누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진여문이라는 것은 진여(眞如), 즉 ‘참나’를 느껴가는 수행과정을 말하며, 생멸문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나타나고(生) 사라지는(滅) 생각들을 말한다. 그래서 마음이 함부로 움직여 타락돼가는 과정을 생멸문이라고 표현했다. 즉, 생멸문은 본래 고요함을 잃고 인연에 따라 생멸하는 마음, - 번뇌가 들끓는 상태를 가리킨 것이다.

이른바 오온(五蘊)을 추구하면 색(色)과 심(心)이 있지만, 육진(六塵) 경계, - 육진을 초월한 경계는 필경 무념(無念)이다. 마음에는 형상이 없기 때문에 시방으로 구해도 끝내 얻을 수 없다. 오온이란 색(色)ㆍ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을 말하는데, 색을 제외한 나머지 수ㆍ상ㆍ행ㆍ식이 마음(心)이다.


육진(六塵)이란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ㆍ법(法)을 말하는데, 이들이 6근(六根)을 통해 몸속에 들어와서 우리들 정심(淨心)을 더럽히고 진성(眞性)을 덮어 흐리게 함으로 진(塵)이라 한다.
그러므로 이 육진 경계를 넘어서야 무념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그리하여 망념을 넘어 무념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 바로 생멸문에서 돌아서서 진여문(眞如門)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일반 범부가 일상적으로 자아(自我)라고 여기는 것은 바로 심신(心身)의 ‘나’, 색(色)ㆍ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 5온(蘊)의 ‘나’를 말한다. 물리적 존재인 신(身)이 곧 색이고, 심리적 존재인 심(心)이 곧 수ㆍ상ㆍ행ㆍ식이다. 이 색ㆍ수ㆍ상ㆍ행ㆍ식의 무더기를 진제(眞諦, Paramartha, 499~569)는 ‘5음(陰)’으로 번역했고 현장(玄奘, 602~664)은 ‘5온(蘊)’으로 번역했다.


그런데 불교가 강조하는 것은 일체가 무상(無常)하고, 고(苦)이며, 공(空)이라는 것이다. 색(色)이 곧 공(空)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 중관(中觀)사상이고, 공으로 드러나는 진여가 곧 심(心)이기에, 색이 곧 심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유식(唯識)사상이다.


유식에 따르면, 일체제법이 모두 다 심(心)의 변현(變現) 결과로서 마음을 떠나 존재하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마음을 떠나 마음 바깥에서 그 자체로 존재하는 6진 경계는 찾을 수는 없다. 일체는 마음의 경계인 것이다. 마음은 어떤 모습으로도 포착되지 않기에 시방세계 어디에서도 끝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치 사람이 미혹하기 때문에 동(東)을 서(西)라고 해도 방향이 실제로 바뀌지 않는 것처럼, 중생도 무명으로 미혹하기 때문에 마음을 생각[念]이라고 여겨도 마음 바탕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런데 마음은 불가득(不可得)이지만 중생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아무리 미혹해서 동서 방향을 분간하지 못한다고 해도 방향 자체가 실제로 바뀌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제대로 된 방향이 근저에 있기에 우리가 방향에 미혹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처럼, 중생의 마음 또한 그러하다.


우리가 아무리 우리 자신의 본래 마음인 진여성(眞如性)을 자각하지 못하고 자신을 스스로 떠올린 망념과 동일시하면서 그 망념에 끌려 다닌다 해도, 마음 바탕의 청정한 진여성이 사라지거나 망념으로 바뀌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진여성과 그 본각(本覺)이 근저에 놓여 있기에 그 진여 본각을 알지 못하는 미혹이 미혹으로 성립하는 것이다. 만약 능히 관찰해 마음에 염(念)이 없다는 것을 알면, 수순하여 진여문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 안의 마음 바탕을 관해 마음은 본래 무념(無念)이라는 것을 여실하게 아는 것이 곧 자신의 마음을 진여로 자각하는 것이다.
그와 같이 생멸하는 망념을 따라가지 않고 그 망념을 넘어 무념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 바로 생멸문에서 돌아서서 진여문(眞如門)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생멸문에서 몸만 돌리면 바로 그 자리가 곧 진여문이다.
생멸심과 진여심은 따로따로 떨어져 있는 별개의 마음이 아니라 마치 바닷물과 파도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바닷물이 바람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파도요, 파도는 바닷물을 떠나서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파도와 바닷물은 둘이 아니다. 또 푸른 하늘에 비유할 수도 있다. 하늘의 본바탕은 맑고 푸르다. 그러나 때때로 흰 구름ㆍ뭉게구름ㆍ먹구름이 낄 때도 있지만, 맑고 푸른 하늘의 본바탕은 변함이 없다. 여기서 맑고 푸른 하늘은 우리의 본래 마음이고, 구름 낀 하늘은 생멸심이다.


그리고 거울에 비유해 보자. 여기 거울이 하나 있다. 이 거울은 본래 맑고 깨끗했다. 그런데 이 거울에 때가 묻고 먼지가 끼면 물체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사람의 코가 둘로 보이기도 하고, 한 쪽 눈은 작고 다른 한 쪽 눈은 크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때가 묻었다고 해서 거울이 아닌 것은 아니다. 여기서 맑고 깨끗한 거울이 우리의 진여심이라면, 때 묻고 먼지 낀 거울이 생멸심이다. 때 묻고 먼지 낀 거울도 깨끗이 닦아내면 맑고 깨끗한 거울이 될 수 있듯이, - 진여문에 들어설 수 있듯이 우리 중생도 열심이 수행정진하면 불심(佛心)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진여문은 우주가 생겨나기 이전부터 존재했던 불변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으로서, 이 문은 어디에도 물들지 않은 청정한 마음을 통해 들어갈 수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유ㆍ무형의 사물이 모두 허상임을 깨닫고 애착이나 집착을 놓아야 들어갈 수 있다.
그렇다고 우리의 세속적인 마음(생멸심)이 일심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 마음의 본바탕이 되는 진여심 위에 세속적인 마음인 생멸심이 생겨나게 됨을 설명하면서 일심으로 돌아가야 함, - 일심으로의 회귀해야 함을 말한다[회귀일심(回歸一心)].


일심(一心)이란 분열되지 않는 우리의 본마음을 의미한다. 일심과 같이 분열되지 않고 하나의 마음으로 정돈된 마음을 진여심(眞如心), 심진여문(心眞如門) 혹은 불심(佛心)이라 한다. 불심은 부처와 같이 깨달은 마음이다. 이 불심을 일심이라고 한다. 일심은 불교에서 만유의 실체라고 보는 ‘참마음’이다. 일심은 크다거나 작다고 할 성질의 것이 아니며, 빠르다거나 늦다고 할 성질의 것도 아니어서, 정확하게 정의할 수 없어서 그냥 ‘참마음‘이라는 단어로써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진여문과 생멸문은 분리될 수 없지만은 동일한 중생심을 양쪽에서 관찰한 것이다. 영원한 불심에서 이를 보면 심진여문이요, 생멸의 현상에서 이를 보면 심생멸문이다.
일심의 ‘일’은 수적 또는 양적인 개념이 아니고, 개체가 그 안에서 진실로 살아 있는 조화로운 전체가 일심이다. 하나 속에 전체가 살아 있고, 그 전체 속에 하나가 살아 있음을 말한다. 일심은 우주의 진리, 진여심을 말하는데, 이 일심이 <대승기신론>의 핵심사상이다.


그리하여 일심의 덕성은 큰 지혜요 광명이며, 세상의 모든 대상 계를 두루 남김없이 비춰주듯이 환하게 모든 것을 다 알게 하는 것이고, 있는 그대로 참되게 아는 힘을 간직하고 있으며, 영원하고 자유자재하고 번뇌가 없고, 어떤 인과의 법칙에 따라 변동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대승기신론>의 이러한 일심사상을 우리나라 불교 속에 정착시키고 독특한 사상으로 발전시킨 고승이 원효(元曉) 대사이다.


원효 대사는 <대승기신론>으로 대립하는 여러 학파의 논리를 일심을 바탕으로 한 화쟁사상(和諍思想)으로 화합했다. <대승기신론>의 핵심은 한 마음에 두 가지 문이 있다는 일심이문론(一心二門論)이다. 이 두 가지 문이란 진여문(중관학파)과 생멸문(유식학파)이다. 진여문과 생멸문은 서로 대립한 듯 보이지만 일심(중생의 마음)에 의지한다는 점에서는 통하기 때문에 둘은 화합할 수 있다는 것이 원효 대사의 주장이었다. 그는 이러한 이론에 입각해 세속적 진리와 절대적 진리 사이의 모순을 극복하는 실천원리를 제시하고, 나아가 불교의 실천운동에 힘썼다.


비록 두 가지 문이 있어서 다른 문이라 하더라도, 결국은 같은 문이라는 것이 원효 대사의 사상이다. 일심은 중생의 마음이며, 그 문의 이름은 진여문인 동시에 생멸문으로 불린다는 것이 원효 대사의 대답이었다.

이와 같이 진여문과 생멸문은 같은 문으로 중생의 마음의 문이다. 일심은 비어있는 공(空)이며 누구나가 들어갈 수 있고, 모든 중생이 들어가더라도 항상 비어있다. 마음의 문은 우주 전체가 들어가도 닫히지 않는다                                                                                           

                                                                                                                   (이미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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