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고 비워야 자유로와 진다.
꽃은 향기로 비우고 충만하며 / 나비는 춤으로 비우고 충만하네 - 도법 스님


중도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변증법적 유물론도 아니고 이분법적 견해의 그 중간도 아니다. '너와 나', '선과 악', '옳고 그름', '진보와 보수'와 같은 이분법적 견해에 얽매이거나, 그 두 개의 견해를 알맞게 절충하거나, 아니면 두 개의 견해 사이의 그 중간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또 중도는 단순히 극단적인 길을 피하고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중도는 이런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서는 것이다.

중도는 '바른 견해'이고, '바른 생각'이다. 중도는 우선 '바르다'라는 전제가 필요하다. 그리고 '바르다'라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사물과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다. 사실을 사실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바른 것이다. 자신의 생각이나 관념이나 가치관에 따라 사실을 달리 보거나 해석하는 것은 '바르다'고 할 수 없다.

그럼 사실은 무엇일까?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무상하고, 인과 연에 따라 생겨났다 사라지는 '연기적 존재' 혹은 '상호 의존적 존재'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홀로 존재할 수 있는 개체는 없다. 당신은 당신의 부모, 조상들 없이 존재할 수 없고, 음식, 물, 공기, 지구 그리고 우주의 어느 것 하나라도 없이 존재할 수 없다. 한 송이 꽃도 한 조각 구름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이다. 이것이 '바른 견해'이다. '바른 생각'도 우리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것이 상호 의존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이를 바탕으로 사유하는 것이다. 이것을 깨닫게 되면, 자신의 생각이나 관념이나 결해를 버릴 수 있다.

예를 들면, '나와 너'가 다르지 않고, '너와 꽃'이 다르지 않고, '꽃과 돌'이 다르지 않고, '돌과 집'이 다르지 않고, '집과 별'이 다르지 않고, '별과 연꽃'이 다르지 않고, '연꽃과 나'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세상의 모든 사물과 현상은 무상하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자아도 없다. 무상은 무아이기도 하다. 무상, 무아, 괴로운 것이 인생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며, 연기하고 있는 이 세계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다.

그러나 무상하기 때문에 어린아이가 자라서 소녀가 될 수 있고, 씨앗이 자라서 나무가 될 수 있다. 무아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인이 될 수 있다. 이것을 깨닫게 되면, 자신의 생각이나 관념이나 견해에 집착하지 않게 된다.

'무소유'가 자신이 소유한 것을 하나씩 버리는 것이라면, '중도'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견해를 하나씩 버리는 것이다.

비우면 채워진다. "꽃은 향기로 비우고 충만하며, 나비는 춤으로 비우고 충만하네"라고 하듯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관념이나 견해들을 다 비우면, 하나의 견해도 남지 않게 된다. '바른 견해'와 '바른 생각'으로 가득 차게 된다. 그때 우리는 자아에 집착하지 않고 중도의 길을 걸을 수 있다.

견해를 버리는 것은 자아를 버리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탐욕과 괴로움은 자아에 집착하고, 자아를 고집하고, 자신의 생각에 집착하고, 생존에 집착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중도는 바로 이런 관념들로부터 벗어나 자유로 나아가는 길이다.





'바른 견해'는 열린 마음을 갖는 것이고, 극단적인 시각과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만물의 본성은 상호 의존적이고 서로 인과 연에 의해 생성된다는 '연기법'을 따르는 것이다. ... 우리가 이러한 가르침을 잊고, 생각에 집착하고, 그리고 사물에 집착하면서, 또 그것들이 독립적이고 영원하다고 믿을 때, 우리에게 어려움들이 생기게 된다. 모든 만물은 상호 의존관계라는 본질을 받아들이고, 모든 극단을 버릴 때, 비로소 우리는 더욱더 평화롭고, 기쁨이 가득 찬 삶의 길을 걷을 수 있다.





'중도'는 '그것이 있기 때문에 이것이 있다', '그것이 없기 때문에 이것이 없다'라고 말한다. 무명(無明 : 무지 혹은 어리석음)이 있기 때문에 충동이 있고, 충동이 있기 때문에 의식이 있고, 의식이 있기 때문에 명색(名色 : 정신과 물질)이 있고, 명색이 있기 때문에 여섯 가지 감각기관(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이 있고,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있기 때문에 접촉이 있고, 접촉 있기 때문에 감정이 있고, 감정이 있기 때문에 갈망이 있고, 갈망이 있기 때문에 집착이 있고, 집착이 있기 때문에 생성이 있고, 생성이 있기 때문에 태어남이 있고, 태어남이 있기 때문에 늙음, 죽음, 고통, 슬픔이 있다. 이 세상의 모든 괴로움은 이렇게 일어난다. 그러나 무명이 사라지면 충동이 소멸하고, 충동이 사라지면 의식이 소멸하고, 의식이 사라지면 명색이 소멸하고, 명색이 사라지면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소멸하고,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사라지면 접촉이 소멸하고, 접촉이 사라지면 감정이 소멸하고, 감정이 사라지면 갈망이 소멸하고, 갈망이 사라지면 집착이 소멸하고, 집착이 사라지면 생성이 소멸하고, 생성이 사라지면 태어남이 소멸하고, 결국 늙음, 죽음, 고통, 슬픔이 사라질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괴로움이 이렇게 사라진다. - 잡아함경 301(Samyukta agama 301)

'중도'는 '존재한다' 혹은 '존재하지 않는다'와 같은 이분법적 사고는 우리가 넘어서야 할 관념들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중도는 극단적인 견해와 이분법적 사고를 피하는 것이다. 우리는 잘못된 견해로 인해 잘못된 인식을 하게 되고, 잘못된 인식은 두려움, 화, 분별심, 절망과 같은 모든 괴로움의 근원이 된다. 이런 모든 종류의 괴로움은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되는데, 이러한 모든 종류의 고통의 원인이 되는 잘못된 인식, 생각, 관념들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곳이 마음챙김에서 가장 중요한 수행이다.

'잘못된 견해'라는 말 자체는 정확히 맞는 말은 아니다. 잘못된 견해들도 상대적으로 시각을 달리하면, 그것이 옳은 견해들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유심히 더 들여다보면, 모든 견해들은 잘못된 견해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지금까지 어떤 견해도 진리인 적이 없다. 그것은 단지 어느 한 측면에서의 견해이다. 그래서 그것을 소위 하나의 '관점'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만약 우리가 다른 측면에서 보게 된다면, 우리는 사물을 다르게 보게 되고, 그럼 우리가 처음 가진 견해가 전적으로 옳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붓다의 가르침은 여러 견해들이 한 무더기로 모여 있는 견해들의 집합이 아니다.

 

그 반대로 붓다는 잘못된 견해들을 하나씩 버리도록 가르치고 있다. 즉 견해가 아니라 실천이다. 질적인 측면에서 우리의 견해들이 언제든지 향상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 궁극적 실재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바른 견해'란 모든 견해가 부재한 상태, 즉 하나의 견해도 갖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갖는 견해들은 우리의 인식을 토대로 하고 있다. 인식을 중국어로는 생각 '想'이라고 하는데, 한자 윗부분의 '相'은 표시, 기호, 또는 모양을 뜻하고, 한자 아랫부분의 '心'은 마음 혹은 정신을 뜻한다. 하나의 인식은 하나의 상을 가지고 있는데, 대부분의 그 상은 마음으로 그려낸 환영에 불과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붓다는 우리에게 우리가 인지하는 것으로 어리석음에 빠지지 말라고 가르친다.  붓다는 우리의 대부분의 인식들이 잘못이라는 것을 많은 사례를 들어 가르친다. 그리고 우리의 대부분의 괴로움은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된다고 가르친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 자신에게 묻고 또 물어야 한다. 우리가 명확히 알기 전까지는, 우리의 잘못된 인식들로 인해 우리가 '바른 견해'를 갖는 데 방해를 받게 된다.

<금강경>에서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가르치지 않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가르침도 버려야 한다." 당신의 관념과 견해들을 버리는 것을 실제로 실천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자유는 버리는 것을 실천하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다. 집착과 애착과 같은 정신적 의지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은 더 이상 자아를 고집하거나 상상하지 않는다.

'중도'는 '그것이 있기 때문에 이것이 있다', '그것이 없기 때문에 이것이 없다'라고 말한다. 이말은 아주 간단하지만, 아주 깊은 뜻이 담겨 있다. "그것이 있기 때문에 이것이 있다." 이것은 상호 의존적이라는 의미다. "그것이 나타나기 때문에 이것이 나타난다." '나타난다'라는 말은 '태어나다'라는 말보다 훨씬 맞는 말이다. 이것이 연기를 잘 표현한 말이고, 초기 경전에서 여러 번 반복되고 있다. "그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 "그것이 있기 때문에 이것이 있다, 그것이 없기 때문에 이것이 없다." "그것이 발현을 멈추기 때문에 이것이 발현을 멈춘다." "그것이 그렇듯 이것이 이러하다." 즉 이런 말들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연기법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다. 마치 우리가 미소를 지으면, 거울도 우리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것과 같다.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면, 그들도 우리에게 친절할 것이다.

붓다는 "가르침은 강 건너편으로 건너게 해주는 뗏목과 같다"고 말한다. 일단 강을 건너게 되면, 우리는 강가에 뗏목을 다른 사람이 사용할 수 있도록 남겨두고 떠난다. 가르침도 뗏목과 같아 놓아두어야지 집착해서는 안 된다. 붓다가 열반에 들기 전에 "45년 동안 가르침을 설하였지만, 나는 한 마디도 한 게 없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사실 그는 많은 가르침을 설하였지만, 그는 제자들이 그의 말에 얽매이지 않기를 바랐다. 우리가 무상, 무아, 연기적 존재라는 가르침을 올바른 견해들이라고 말하는 것도 이해를 쉽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우리가 쉽게 이해하도록 돕기 위한 가르침이지, 그것은 이론이 아니다. 예를 들어 무상함이라는 관념은 영원함이라는 관념을 극복하도록 돕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떠받들어야 할 진리가 아니다. 가르침으로부터도 자유로워야 하는데, 그래야 그 가르침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습관의 힘은 수천 번씩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게 하는 원인이다. 습관의 힘은 우리를 쉬지 않고 달리게 하고, 늘 무엇인가를 하게 하고, 과거나 미래에 대한 생각에 빠져 있게 하고, 우리의 고통이 다른 사람의 탓이라고 비난하게 한다. 또한 습관의 힘은 지금 이 순간 누려야 할 우리의 평화와 행복을 가로막는다. 마음챙김 수행은 그런 습관의 힘을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된다. 마음챙김은 우리 안에 내재된 그런 습관의 힘을 인식할 때마다 그런 습관의 힘을 멈추게 하고, 현재 이 순간을 누릴 수 있게 한다.

 

마음챙김의 힘은 우리 안에 내재된 습관의 힘을 받아들이며, 그것을 변화시키도록 돕는 최고의 에너지이다. 마음챙김의 힘은 지금 이 순간을 완전히 알아차리게 한다. 그리고 이 힘은 호흡하고, 걷고, 마시고, 먹을 때도 깨어있는 마음으로 마음챙기며 호흡하고, 걷고, 마시고, 먹는 실천으로부터 생겨난다. 마음챙김의 힘은 그 자체 안에 필연적으로 집중력이 따른다. 당신이 무언가에 마음을 모은다면, 그것이 꽃이든, 친구든, 한 잔의 차든, 마음챙김의 대상에 집중을 하게 된다.

 

집중력은 마음챙김의 힘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리고 만약 집중을 충분히 하게 된다면, 그 집중의 힘에는 또한 통찰력이 따르게 된다. 마음챙김, 집중력, 통찰력은 붓다가 되는 에너지들이다. 이 세 가지 종류의 에너지가 습관의 힘을 변화시켜, 치유와 양분을 이끌어 낸다. 며칠간의 마음을 챙기며 하는 호흡과 걷기만으로도 커다른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물론 그 수행은 즐거워야 하고, 노동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당신이 숨을 들이쉴 때, 들숨에 주의를 돌려보라. "들숨아! 나는 내가 숨을 들이쉬고 있다는 것을 안다. 들숨아! 나는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낀다." 이를 알아차린다면, 숨 쉬는 것은 행복이다.

'바른 견해'와 '연기'에 대한 가르침도 이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방법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는 것은 동시에 우리 자신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 만약 우리가 어떤 사람을 우리가 아닌 다른 누군가라고 생각하고, 그 사람의 성공이나 실패를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주의 깊게 들여다보지 못한 것이다. 다른 사람의 행복은 우리 자신의 행복과 연관되어 있다. 만약 우리가 행복하지 않다면, 다른 사람도 행복할 수 없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의 공동체도 행복하지 않게 된다.

수행의 목적은 현상계라는 들판으로부터 본질의 차원, 즉 진여의 세계로 내면 깊숙이 내려가는 것이다. 다시말해 우리가 관습적인 명칭들 - 부모, 아이, 나, 너, 꽃, 구름, 오다, 가다 - 에 의해 사로잡힌 것으로부터 벗어나 모든 관습적인 명칭들을 초월하는 중도의 차원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분노와 미움은 관습적인 명칭들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 만약 우리가 주의 깊게 그러면서 유심히 들여다본다면, 우리의 부모 안에서 우리 자신을 보게 된다. 그리고 우리의 자신 안에서 우리의 부모를 보게 된다. 우리가 그처럼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아주 깊은 차원, 진여의 세계에 닿을 수 있으며, 우리의 괴로움과 슬픔도 연기처럼 사라질 것이다. 만약 우리가 과거의 습관의 힘에 계속 갇혀 있다면,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을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

마음챙김 호흡은 우리에게 안락한 마음을 갖게 한다. 그리고 마음챙김은 이런 마음을 계속해서 지속시켜주려는 성향이 있다. "내가 숨을 쉴 수 있고, 웃을 수 있고, 또 내가 화가 날 때도 숨 쉴 수 있는 것만으로도, 그럼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이런 종류의 사고는 우리의 모든 족쇄들을 깨부수는 데 도움을 주는 통찰력을 갖게 하고, 또 우리를 두려움이 없는 마음으로 이끄는 지혜의 가르침, 즉 무분별심의 속으로 깊이 들어간 상태에 머물게 한다. 이는 수행의 가장 위대한 선물이고 가장 위대한 열매이다. 만약 우리가 생각에 얽매어 있고, 슬픔에 사로잡혀 있고, 다른 사람이 우리를 대하는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삶을 엄청나게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경전에서 말하는 중도에 대한 이해로부터 생겨난 통찰력은 습관의 힘을 부수고, 위대한 통찰과 사랑과 연민을 일으키는 에너지를 만들어 낸다. 이런 에너지들은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우리처럼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충분한 통찰력과 사랑을 미래 세대에게도 전하게 된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배워야 한다. 우리가 걷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자유로 가는 순간이다. 이렇게 걷는 걸음은 걸음마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셀 수 없는 수많은 세대들의 조상들과 수많은 세대들의 후손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우리가 붓다와 함께 걷고 있는 것이다.

고苦의 뿌리는 에고(ego:자아)의 생존욕에 있다. 그 생존욕은 '나'와 '나 아닌 것'이라고 갈라지고...., 이를 바탕으로 온갖 이분二分의 분별과 감정이 잇따라 일어나게 된다. 중생의 마음은 그 '이분'의 양쪽을 끊임없이 오락가락하므로 불안정하다. 안정되지 않은 마음 상태가 곧 '고'이다. 따라서 에고의 생존욕이 있는 한 '고'일 수밖에 없다. 결국 중생의 삶이란 에고의 만족을 위한, 에고에 상처를 입지 않기 위한 갈등에 지나지 않고, 에고의 올가미에 걸려든 그 삶은 탐욕과 불안에 휘몰릴 수밖에 없다. 따라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깨달음)는 에고의 죽음, 즉 '자아라는 생각'과 '자아에 대한 집착'의 소멸이다. - <금강경>, 곽철환, 살림, 2010, 3~4쪽

심층생태론, 인간과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본래의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모든 생명체와 자연은 상호 의존적이고 서로 얽혀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생태계의 근본적인 위기의 원인은 이 같은 사실을 무시한 결과이다. 모든 가치를 인간적 측면에서 평가하고, 자연을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자원이나 물질로 파악하는 인간 중심의 세계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생태계 위기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모든 생명이 평등하고 서로 공생할 수 있는 생태적 세계관으로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분별심'은 타인과 나, 좋고 싫음, 옳고 그름 따위를 헤아려서 판단하려는 마음이고, 이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못해서 생긴 것이다. 우리가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무엇이든 분별하려는 습관의 힘이 있는 것은 사물의 본성을 꿰뚫어 보지 못하고 진실하고 깊은 이해를 하지 못하는 분별지 때문이다. 그래서 괴로움이 생긴다.

내가 과거에 존재했는지 존재하지 않았는지, 내가 미래에 존재할 것인지 존재하지 않을 것인지. 내가 지금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사람들이 물어보면, 때에 따라 붓다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과거에 존재했다. 그리고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미래에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지금 존재한다.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다. .... 과거에는 내 과거의 존재가 현실이었고, 미래와 현재의 존재는 비현실이었다. 미래에는 나의 미래의 존재가 현실이며, 과거와 현재의 존재는 비현실이 될 것이다. 현재에는 나의 현존재가 현실이며, 과거와 미래의 존재는 비현실이다.(폴커 초츠, <붓다>, 김경언 옮김, 한길사, 1997, 106쪽'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수많은 사건이 일어났고 또 일어날 것이지만 모두 정확하게 각자의 '바로 지금'에서만 일어난다. 보르헤스는 "인간이 쳇바퀴처럼 흘러가는 일상에서 벗어나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지금 여기' 그리고 유일하게 실재하는 시간인 현재를 인식하는 것은 얼마나 황홀한 경험인가. '오늘'은 '오!늘常'인 것이다"라고 말한다. 의상대사가 "과거 현재 미래가 찰나 속에 깃든다"라고 말하였는데, 이 역시 모든 시간이 현재에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시간 문제와 정면으로 부딪친 사람중의 하나이다. 그는 <고백록>에서 그의 영혼이 무엇이 시간인지 알고 싶어 불타오른다고 말한다. 그는 신의 날은 나날이 아니라 '오늘' 뿐이라고 하면서 영원으로 통하는 시간인 현재를 강조했다(보르헤스 외, <보르헤스의 불교 강의> 김홍근 편역, 여시아문, 1998, 36쪽, 38쪽 참고)

원래 붓다가 가르치려는 길은 형이상학적의 길이 아니다. 해탈의 길이다. 붓다의 근본 가르침에는 철학과 신학, 자유와 이성 간의 보이지 않는 알력, 그리고 종교적인 권위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훗날 붓다의 가르침은 점차 종교적 색채를 띠지만, 불교는 붓다의 가르침을 이어가고 있다. 때문에 그 동안 전쟁을 비롯한 수많은 참사와 끔찍한 역사적 사건이 있었지만, 불교는 이교도 탄압, 종교 재판, 마녀 재판, 종교 전쟁을 일으키지 않은 유일한 종교이다(카를 야스퍼스, <위대한 사상가들 : 소크라테스, 석가모니, 공자, 예수>, 80~95쪽 참고)

구원으로 가는 결정적인 것은 믿음이나 희망이 아니라 오로지 올바른 방법 뿐이다. 구원의 가능성을 믿지만 잘못된 실천 방법을 취하는 사람은 "우유를 좋아하면서 쇠뿔에서 우유를 짜는 사람과 같다." "신념을 갖고 그렇게 하든 신념 없이 그렇게 하든, 그는 우유를 얻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유를 얻는 올바른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서 젖에서 우유를 짜는 사람은 그것을 바라지 않았어도 우유를 얻게 될 것이다. 이처럼 적절한 방법이 구원으로 이끌어주며, 이때 믿음은 부차적인 의미를 지닌다(폴커 초츠, <붓다>, 김경언 옮김, 한길사, 1997, 1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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