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란 무엇인가?

 

 

좋고 나쁨은 그대의 마음 속에서만 일어난다. 중도는 그대의 마음에 들어있다. 한쪽으로 치우친 견해는 더 많은 분별심과 망상들을 짓게 된다.

 

나를 버리면 참된 나를 만나게 된다.(모양이 있는 나가 아닌 무아의 나)

 

자기 생각을 내려놓은 고요한 사람은 집착을 내려놓고, 평온과 순수한 앎의 길로 나아간다.

이 길이 수행자가 가야하는 올바른 길이다. 그 길이 중도다.

 

붓다의 중도(中道)는 강기슭의 두 물줄기로써, 두 물줄기 사이의 중간 길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역사상 최초의 선언인 새로운 길(New way), 참된 길, 바른 길의 천명이다.

 

새로운 길을 보여준 중도는 불교만의 독창적 사상철학이다.

 

유심(唯心)론과 유물(唯物)론의 양변에 떨어진 인도사상을 붓다는 유심과 유물의 어느 한쪽의 견해에 치우치지 않는 양변을 포괄한 중도사상으로 불교철학을 재조명했다.

 

고따마 싣다르타는 쾌락과 고행주의의 어느 한쪽의 양 극단을 취하거나 굴복 당하거나 타협하지 않고, 욕망에 사로잡혀 안일하거나 고행이 아닌 합당한 정진으로 나아가는 중도를 취하였기에 견성오도 하였다.

 

욕망과 탐닉, 들뜸과 괴로움, 화와 두려움, 불만족과 혐오라는 것은 수행자가 가는 중도의 길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길이다 .

 

집착과 애착이 있는 곳은 양 극단이기 때문에 수행자가 가는 중도의 길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길이다 .

 

중도는 강기슭의 양 물줄기를 말하는 것으로 선과 악이 통하는 것, ()도 아니고 악도 아니라는 어중간한 형태를 취하지 않는다. ()은 적중의 중으로 중간이나 편견, 변견이 아니다.

시비선악을 구별하지 않는 것이 중도이다.

 

()가 있으면 비()가 있게 되고, 선이 있으면 악이 있기 때문이다. 시비가 융합하면 시가 비가 되고 비가 시가 된다. 시비가 없기 때문에 모순 대립 투쟁이 벗어난다. 이것이 중도다.

 

중용(中庸)과 중도는 다르다.

 

중용이란 너무 지나치지도 않고 너무 부족하지도 않는 과유불급의 중간을 취하는 것이지만 중도는 양변을 포섭한다.

 

가령, 유교의 중용철학은 오욕칠정을 겸양의 미덕으로 자제하거나 선비로서 과하지 않게 억제해야 하는 중간 도리를 취하게 하지만 중도는 그렇지 않다.

 

오욕칠정에게는 죄가 없기 때문에 즐기되 욕망을 추구하거나 탐착하지 마라.

 

 

*오욕칠정(五慾七情)

색욕(애욕), 재물욕, 명예욕, 식욕, 수면욕과 사람의 일곱 가지 감정인 희노애락, 사랑·미움·욕심을 말한다.

 

 

불교적으로는 희노애락·우비고뇌(憂悲苦惱)을 유교사상과는 다르게 초연성을 갖는다.

 

즉 슬프면 슬퍼하라. 슬픔을 억누르지 않는다.

 

무엇이든 억지로 통제하면 병이 된다. 목석이 아니기 때문에 슬퍼하되 비탄에만 빠지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중도는 중용과는 달리 양변에 떨어지지 않고 이렇게 달라진다.

 

 

사랑하되 애착하지 말라.

애착은 고통이다.

 

애착하지 않고 승화된 영혼의 사랑은 자유가 있는 참사랑이다.

재물을 가지되 소유하지 말라.

 

재물은 역사상 그 누구도 줄어들기를 원하지 않는다.

재물의 노예가 되지 않고 무소유의 마음으로 나누고 보시하면 도리어 재물은 더 늘어나고 번창한다.

 

권력을 가지되 남용하지 말라.

군림하지 않고 공평무사하면 만인에게 칭송 받고 명예가 높아진다.

 

 

즐기되 탐착하지 말라.

탐착은 멈추기를 원하지 않는다. 탐착하지 않는 문화적 심취는 예술과 낭만의 삶으로 이끈다.

 

 

쌍차쌍조(雙遮雙照)는 중도를 정의한다.

 

쌍차쌍조는 <영락본업경>에 나오는 용어로서 천태지의(智顗, 538~597)에 의해 널리 알려졌다.

이라고 하는 것은 나와 너, 진보와 보수, 옳고 그름, 시비분별과 주관과 객관을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의 양변(兩邊)을 말한다. ()은 악의 상대적 관념에서 나온다.

 

 

쌍차는 각각 한 쪽으로 치우친 변견적 양변의 사고를 차단하는 의미이고, 쌍조는 양변을 비춘다는 것으로서 태양이 만물 전체를 공평하게 비추듯이 양변의 서로가 햇빛의 자양분을 골고루 받으면서 회통 융합되는 것을 말한다.

 

 

 

천태의 공··중 삼관(空假中三觀)에 대하여

 

()이라함은 형성된 물질은 일시적인 모습일 뿐, 실재는 하나 실체가 없다는 것으로 관찰하는 것을 공관(空觀)이라 한다. 색즉시공이다.(형성된 물질은 곧 텅 비어있다)

 

()라고 함은 형성된 물질은 조건에 화합하여 잠시 드러나 있는 거짓의 모습으로 관찰하는 것을 가관(假觀)이라고 한다. 공즉시색이다. (텅 빔은 곧 물질이다. 즉 눈에 보이지 않지만 물질 아닌 것이 없고, 또한 의미는 텅 비어 있는 듯 하지만 조건을 맞으면 언제나 물질로 드러난다.)

 

()이라고 함은 ·를 별개로 구분하여 양변을 치우쳐 보지 않고 하나의 동시적 현상으로서 관찰하는 것을 중관(中觀)이라고 한다. 이를 천태학에서는 중도실상이라 한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다.

 

중도는 팔풍(八風)에 대한 초연함이다.

팔풍은 이((), ((), ()(), (()의 여덟 가지에 초연하지 못하고 바람에 흔들리듯이 영향을 받는 심리적 현상 작동을 말하는데,

 

이익은 좋아하되 손해는 싫어하며(·),

 

명예는 좋아하되 치욕은 싫어하며(·),

 

칭찬은 받는 것은 좋고 비난받는 것 싫어하며(·),

 

인내심이 약하고 이기적이어서 힘든 것은 하지 않으려고 하고 좋은 것만 하려고(·)을 말한다.

 

 

<무쟁의 분석 경(M.139)>에 부처님의 중도에 대한 말씀이다.

 

 

"수행자들이여 세상에는 두 가지 극단이 있다 . 수행자는 그 어느 한쪽도 기울어서는 안 된다 .

 

 

두 가지 극단이란 무엇인가?

 

하나는 욕망의 쾌락에 빠지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자기 자신을 학대하고 괴롭히는 것이다 .

쾌락의 탐착은 천박하고 저속하며 어리석고 무익하다 .

자신의 학대는 피로와 고통만 남길 뿐 아무런 이익이 없다 .

이 두 가지 극단을 떠난 것이 중도이다. 그것은 안목을 밝히고 지혜를 증진시키며 번뇌를 쉬고 고요하게 한다 ."

 

 

중도를 완성하는 길이 팔정도의 길이다. (중도 = 팔정도)

중도는 응무소주 이생기심' (응하되 머물지 않는 마음)의 무심이다.(중도 = 무심)

 

 

만물은 상호연기적 관계로 존재하나 실체는 없다.

그래서 중도는 연기, 연기는 곧 공이다(중도=연기=)

 

무심은 그 어느 곳에도 집착함이 없고 의도가 없는 마음을 말한다. 이를 용심(用心, 화엄경의 善用其心)이라고 한다.

 

마음이 무심하면 감정이 없고 자비심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행복, 기쁨, 사랑, 분노, 신경질 등의 감정들은 느낌과 감흥이기 때문에 나와는 관계없이 상황에 따라 일어난다.

 

그렇지만 그런 감정들에 물듦고 애닮음이 없다. , 상황에 반응하되, 그 마음은 작동(동요)하지 않는다.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란 사랑은 있되 애착·집착·소유욕이 없고, 사별과 실연 속에서 통곡과 애절함, 쓸쓸함은 있을지라도 비탄에 빠지는 일는 없다.

 

응무소주는 (사마타, )이며 진공(眞空)이요, 이생기심은 (위빠사나, )이자 묘유(妙有)이다.

 

정통 출가자는 아니지만,

대승불교의 거목인 용수 <중론(中論)>의 팔불(八不)에서도 중도를 잘 드러내고 있다.

 

 

불생불멸(不生不滅) 불상부단(不常不斷)

불일불이(不一不異) 불래불거(不來不去)

 

 

생기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며,

영원한 것도 아니고, 불멸하는 것도 아니며,

 

동일한 대상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며,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니다.(오고 감이 없다)

 

 

중론의 팔불은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과 같은 중도의 표명이다.

 

()은 일체를 부정하고 염세적인 허무주의가 아니고, 없는 무()도 아니고 그렇다고 있는 것도 아닌 비유비무(非有非無)을 초월한 유무가 서로 상생화합하는 원융무애의 공이다.

 

 

<화엄경>의 법성게는 중도의 압권이다.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법의 성품은 원융하여 두 모습이 아니다.

 

 

*()를 도라고 하면 도가 아니듯이 마음의 본질은 원래가 원융무애한데, 스스로가 죄와 벌을 주고 중생이다 부처다 분별한다.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

 

하나 가운데에 일체가 있고 모든 것이 하나로써,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

 

하나가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하나이다.

 

*하나와 일체라는 것은 양 변으로써, 하나와 일체에 국집하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중도이다.

 

생사열반상공화(生死涅槃常共和)

생과 사와 열반 또한 그 자체가 함께하는 조화로운 하나이네.

*한 생각 일으키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극락세계이다

 

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

본래부터 부동이라 이름 하여 부처라 하네.

 

*중생심만 내려놓으면 본래가 부처로세*

중생심이란 분별심이다,분별심은 양변에 치우치는 것이니 중도 연기인줄 알면 실체가 없는 무아이므로 이름하여 부처라 한다,

 

()적으로 중도를 잘 드러낸 양나라 황제 무제와 달마의 문답이다.

 

 

양무제 : 무엇이 불교의 가장 성스러운 진리입니까?

 

달 마 :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하여 성스럽다고 할 것이 없소.(확연무성 廓然無聖)

 

양무제 : ?????!!!!!

 

 

성철스님의 중도에 대한 말씀으로 마무리한다.

 

"서구 세계에서도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철인들이 일찌기 중용사상을 펼쳤는데, 그들도 중간 사상을 가지고 중용사상이라 하였을 따름입니다.

 

그들의 이른바 중용사상은 양변을 완전히 버리고 동시에 양변이 완전히 융합하는 사상을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양변을 여의고 양변을 융합한다는 것은 추호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중도사상과 중용은 결코 혼동될 수 없는 것입니다.

 

서양의 철학계에서도 근대에 이르러 언뜻 보기에 불교의 중도사상과 비슷해보이는 이론이 나왔습니다. 바로 헤겔의 변증법(辯證法) 사상입니다. (), (), (), 이 세 가지가 변증법의 기본 공식으로 정에서 반이 나오면 그것을 융합시켜서 합을 만든다는 논리입니다.

 

언뜻 생각하면 이 논리는 중도와 비슷한 듯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역사의 발전 과정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이 이론은 시간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 이와 같이 시간을 전제로 하는 역사적인 발전 과정을 말하는 헤겔의 이론도, 정과 반을 완전히 버리고 정과 반이 완전히 융합하는 것이 아니므로, 중도 사상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변증법에 대해서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한번은 괴테와 헤겔이 만났는데, 괴테가 헤겔에게 그 변증법의 내용이 어떤 것이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헤겔은 그것은 모순의 논리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곧 정과반의 모순, 시와 비의 모순, 선과 악의 모순을 말하니, 이것은 양 변이 서로 모순이므로 서로 통할 수가 없으니 이 이론은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이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불교의 근본 사상은 중도사상이니, 팔만대장경 전체가 여기에 입각해 있으며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법하신 모든 말씀이 바로 중도를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 불교를 설명한 많은 것들의 그 진위를 가리려면 중도논리에 위배되는지 아닌지를 가늠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에 위배되는 사상은 결코 부처님의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각산스님의 말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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