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은 불교대학에서 초기불교의 가르침을 배웠다면, 경전 대학에서는 대승불교와 선불교의 정신을 배우게 된다고 강조하며 그 이유를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왜 경전을 공부해야 될까요? 경전이란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해놓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정토경전대학에서 배울 경전은 대승불교(Mahayana Buddhism)와 선불교(Zen Buddhism)의 경전입니다. 경전대학에 입학하기 전 여러분들은 불교대학에서 초기불교의 경전에 기초해서 불교란 이런 것이다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제 경전대학에서는 대승불교와 선불교의 경전을 통해 우리의 삶을 조명해보고 좀 더 자유롭고 행복해지는 길을 배우게 됩니다.

 

2600년 전 부처님이 걸어간 길

하나의 경전만 갖고 공부하면 되지 왜 이렇게 대승이니 소승이니 하는 것이 생겨서 복잡하게 되었을까?’

 

이런 의문이 여러분들에게 생길 것 같아요. 그래서 경전대학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오늘 입학식을 맞이해 왜 우리가 대승불교와 선불교의 경전을 공부해야 되는지 간단하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인도에는 옛날부터 전해 내려온 베다(Veda)’라는 문헌이 있습니다. 베다는 선조들의 경험에 의해 진리라고 알려진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불교 경전이나 성경처럼 옛날부터 내려오는 진리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사람들이 논쟁을 할 때 베다를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베다에 어떻게 쓰여 있느냐, 베다의 내용을 많이 아느냐 모르느냐, 베다에 나온 내용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어떤 것이 바른 해석이냐, 이런 식이었습니다.

 

리그베다, 사마베다 등 방대한 베다를 어릴 때부터 전문적으로 공부한 사람들이 브라만입니다. 브라만은 인도에서 최고로 성스러운 계급으로 신의 입에서 창조됐다고 합니다. 두 번째 계급인 크샤트리아는 세상을 다스리는 왕족으로 신의 옆구리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세 번째 계급인 바이샤는 장사하고 농사짓는 평민 계급으로 신의 배에서 나왔다고 하고, 네 번째 계급인 수드라는 노예 계급으로 신의 발바닥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브라만 계급은 진리를 독점했습니다. 진리를 독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의 선택이 아니고 출생, 태생, 혈통에 의해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주어져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조선 시대에 남자만 공부를 시키고 여자는 안 시킨다든지, 양반만 공부를 할 수 있었고 상놈은 할 수 없었던 것처럼 베다 시대에는 브라만 계급만 베다를 읽을 수 있었고 다른 사람은 배울 수가 없었습니다. 브라만이 진리를 독점해서 제사도 지내고 철학적 논쟁도 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진리는 이렇게 과거로부터 전승되어온 윤리, 도덕, 관습, 습관, 경전, 계율 등에 근거해서 검증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과거로부터 전승된 것을 갖고 수도 없이 논쟁을 했지만, 부처님은 그런 논쟁에 관여하지 않으시고 눈 있는 자 와서 보라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진리는 눈 감고 더듬어서 짐작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고, 눈을 뜨고 확연히 보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여기 상자가 하나 있습니다. 사람들은 상자 안에서 병아리들이 우는 소리를 듣고 세 마리다’, ‘다섯 마리다이렇게 논쟁을 하지만, 그런 논쟁을 할 필요가 없어요. 뚜껑을 확 열어보면 두 마리이구나’, ‘다섯 마리이구나이렇게 확연히 알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을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를 볼 수 있는 것은 브라만만 되는 것이 아니고, 크샤트리아도 되고, 바이샤도 되고, 수드라도 된다. 남자만 되는 것이 아니고 여자도 된다. 어떤 혈통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선택할 수 있다. 누구나 눈만 뜨면 진리를 볼 수 있다

 

진리에 눈 뜬 자가 수행자입니다. 수행자들의 모임이 상가입니다. 진리에 눈 뜬 수행자 중에는 브라만도 있고, 크샤트리아도 있고, 바이샤도 있고, 수드라도 있었습니다. 이 공부는 계급과 관계가 없습니다. 평민이나 노예 계층까지도 상가의 일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부처님을 배척한 이유예요. 부처님을 비난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살해 위협까지 했습니다. ‘어떻게 저런 노예 계급 출신을 이 성스러운 길에 허용하느냐’, ‘무지렁이 평민을 이 성스러운 길에 허용하느냐이런 반대가 많았습니다.

 

 

더 반대가 많았던 것은 여성에게 출가를 허용한 것입니다. ‘여자가 어떻게 진리를 깨닫고 수행자가 될 수 있느냐라는 비판은 낮은 계급의 출가를 허용한 것보다 더 큰 저항이 있었습니다. 여성 중에도 유녀들이 진리에 눈 뜨고 출가를 하게 되었을 때는 엄청난 사회적 저항까지 받았습니다. 범죄자라고 불리는 도둑이나 강도가 눈을 뜨고 새 사람이 되어 진리의 대열에 참여한 것을 갖고도 비난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비록 범죄를 저질렀지만 진리에 눈을 뜨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과거에 집착해서 상가를 범죄자들이 참여한 교단이라고 비난했고, 그로 인해 교단이 무너질 뻔한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출가수행자들은 걸식을 해서 대중들에게 밥을 얻어먹어야 하는데, 대중들이 밥을 안 주는 일까지 벌어질 정도로 사회적 저항이 심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오해가 풀리고 출가수행자들은 바르게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이 점점 신뢰를 얻어갔습니다. 초기에는 과거에 매여서 부처님을 따르는 수행자들을 카스트나 성별을 갖고 주로 평가하다가, 시간이 흐르면서는 주로 인격을 갖고 평가하게 됐습니다. 이렇게 해서 불교는 사이비 취급을 받다가 점점 대중의 신뢰를 얻어 주류가 됐습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 일어난 일

부처님이 돌아가시고 200년 후 아쇼카왕 때는 왕이 불법에 귀의하면서 불교가 탄압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장려를 받는 정도가 됐습니다. 그래서 급속도로 불교의 세력이 확산되었습니다. 그 결과 출가 승려 중에는 깨달음의 눈이 열린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고, 깨닫지도 못한 사람들이 그냥 머리만 깎고 승복만 입으면 존경을 받으니까 무조건 교단에 들어온 경우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대한 비판도 조금씩 제기가 되었고요.

 

 

불멸 후 400년이 지났을 때는 출가한 승려들도 부처님 말씀을 갖고 이게 옳으니 그르니 하는 논쟁을 하게 되었고, 논쟁을 한 결과 파를 형성해서 갈등하게 되었습니다. , 부처님의 말씀이 진리로 절대화가 된 것입니다. 언어와 문자가 마음과 생각을 표현하는 방편이 아닌 절대화가 된 거죠. 출가한 승려들은 어느덧 과거의 브라만처럼 복을 빌어주는 성스러운 존재가 되었고, 재가 수행자들은 과거의 신자들처럼 수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복을 비는 신자가 됐습니다.

 

원래 인도의 전통에 따르면, 브라만이라고 하는 창조의 신이 있고, 신의 힘을 빌려오는 사제 계급인 브라만이 있고, 복을 비는 신자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브라만교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신, 사제, 신자를 모두 부정하고, 오직 무지를 깨쳐 지혜를 얻어 해탈과 열반을 증득하는 길을 제시했습니다. 누구든지 다 수행자가 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수행자에는 출가한 남자 수행자인 비구, 출가한 여자 수행자인 비구니, 재가에 있으면서 수행하는 남자 수행자인 우바새, 재가에 있으면서 수행하는 여자 수행자인 우바이, 이렇게 네 가지 종류가 있었어요. 혈통으로 주어진 계급에 관계없이 누구나 다 수행자가 될 수 있었지만, 남녀 성별과 출가자와 재가자를 기준으로 네 종류로 분류할 수 있었기 때문에 ‘4부 대중이라고 합니다.

 

경전에는 출가 수행자뿐만 아니라 재가 수행자들 중에서도 수많은 깨달은 자가 나왔고, 남자와 여자를 구분할 것 없이, 비구와 비구니를 구분할 것 없이, 여성들 중에서도 수많은 깨달은 자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점점 시간이 흘러가면서 출가 수행자는 브라만처럼 사제 계급이 되어 갔고, 재가 수행자는 점점 수행을 하지 않고 복을 비는 신자가 되어 갔고, 부처님은 어느덧 무한한 위신력을 갖고 복을 주는 신이 되어 갔습니다. ‘수행자라는 이름과 그 가르침은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불교는 점점 종교화의 길을 걷게 됩니다.

 

또 한쪽으로는 학문화의 길, 철학화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이것이 불교다’, ‘이것이 진리다하는 철학적 논쟁에 빠지게 되면서 마치 부처님 당시에 브라만교라는 종교와 우파니샤드 철학이 있었지만 굶어서 죽어가는 사람, 병들어서 죽어가는 사람, 늙어서 버려진 사람, 온갖 갈등과 고뇌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외면되었듯이, 불교 안에서도 살아 있는 사람이 외면되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불교가 아니다. 원래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하는 새로운 불교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것이 대승불교 운동입니다.

 

원래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

대승경전은 부처님이 지금 태어나신다면 어떻게 말씀하시고 살아가시겠느냐라는 관점이 담긴 경전입니다. 경전을 보면 부처님에게 혼란스러운 현실에 대해 수보리가 묻고, 관세음보살이 묻습니다. 대승불교의 입장은 비록 부처님이 하신 말이라고 하더라도, 불교 용어를 썼다 하더라도 그 말이 절대화되고 형상화됐다면 진리가 아니라는 겁니다. 부처님은 과거로부터 전승된 윤리나 도덕, 관습이나 습관, 경전이나 계율을 근거로 논쟁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대승불교에서는 내가 직접 눈을 뜨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대승불교 운동이 일어나자 부처님 당시와 똑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새롭게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사이비 취급을 받았어요. 기존 불교사회에서 기득권으로 자리 잡은 승려, 그중에도 남자인 비구 중심의 교단에서 특히 반발이 거셌습니다. 새로운 불교운동을 일으킨 사람들은 기존 불교를 비판했지만 그렇다고 아예 불교가 아니라고 비판하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기존 불교를 혼자 해탈하려고 한다는 의미로 작은 수레, 소승(小乘)이라고 불렀습니다. 반면 새로운 불교운동을 일으킨 사람들은 나와 남을 다 함께 행복으로 인도하는 큰 수레, 대승(大乘)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소승대승이라는 말은 대승불교인들이 만든 용어입니다. 대승불교인들은 처음에는 권위가 없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주류로 자리 잡았습니다. 부처님의 본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대승불교인들은 인격과 실천력이 높았고 관념을 타파했기 때문에 대중에게 지지를 얻을 수 있었어요.

 

지금까지 대승불교가 나타난 배경을 설명했습니다. 대승불교의 사상을 담은 경전이 대승경전이에요. 정토경전대학에서는 대승경전 중에서도 한국 사람들이 많이 읽는 금강경과 반야심경을 공부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새롭게 일어난 대승불교는 중국으로 전래되면서 역시 종교화 되고 학문화 되었습니다. 그러자 다시 새로운 불교운동이 일어났어요. ‘다시 수행으로 돌아가야 한다. 언어와 문자에 매여서는 안 된다.’ 이런 비판을 제기하며 일어난 불교가 바로 선불교입니다. , 음식에 대한 지식을 아무리 많이 알고, 요리법을 아무리 많이 안다고 해도, 한 숟가락 떠먹어야 맛을 알고 배가 부른 것과 같습니다. 먹지 않는 이상 배는 안 부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배가 고픈데 음식을 먹지는 않고 음식 이야기만 실컷 하는 거예요. 선불교인들은 이런 사람을 두고 아무리 지식을 많이 알아도 숨넘어갈 때 아무 도움이 안 되고 헐떡거리다 죽게 된다는 거예요. 지식은 많이 모르더라도 직접 맛을 보고 자기 배가 불러야 합니다. 직접 체험을 해야 해요. 이렇게 해서 선불교에서 불립문자 (不立文字)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문자로 진리를 검증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다시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으로, 수행으로 돌아가자는 선불교 운동이 일어납니다.

 

선불교도 초기에는 사이비 취급을 받았습니다. 출가해서 30년을 공부해도 불교를 겨우 알까 말까 한데, 선불교인들이 경전 한 줄도 안 읽고 진리를 체험했다고 하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선불교인들은 복잡한 언어를 쓰지 않고 생활 언어로 단도직입으로 접근했기 때문에 대중의 지지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나라에서 기존 불교를 보호할 때는 권위 있는 종교지도자 중심으로 하는 것이 가능했는데, 나라가 망하고 혼란기가 되니까 결국 대중에 뿌리내린 실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대중의 지지를 받게 돼서 중국이나 한국에서 선불교가 주류가 됐습니다.

 

 

이러한 불교의 역사는 정토불교대학에서 이미 공부했습니다. 대승불교의 주요 초기 경전인 금강경에는 대승불교를 주창한 사람들이 새로운 불교운동을 일으킨 관점이 뭐였는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금강경에는 믿음이 아니라 깨달음을 강조했습니다. 깨달음이야말로 어떤 믿음이나 지식보다도 더 위대한 경험이라고 해서 반야심경에 시대신주(是大神呪) 시대명주(是大明呪) 시무상주(是無上呪) 시무등등주(是無等等呪)’라고 표현합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깨달음이나 진리, 부처님이라는 용어로 쓰였다고 해서 진리가 아니라는 겁니다. 언어와 문자를 절대화해서 고집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대승경전은 색이니 공이니 이런 용어가 나와서 이해하기가 좀 어려울 수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께 드리고 싶은 말씀은 어렵다고 포기하지 말라는 거예요. 요즘 사람들은 즉문즉설을 듣다 보니 쉬운 법문에 익숙해져서 조금만 내용이 어려워져도 아예 안 해버리려고 하는 것 같아요. 물론 우리가 불교학자가 되려는 것은 아니니까 지식에 연연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대승경전은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에 언어가 조금 생소합니다. 생소한 언어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생소함을 넘어서야 그 속에서 담긴 굉장한 의미를 볼 수 있습니다. 알밤을 먹으려면 밤송이에 붙은 가시는 좀 뛰어넘어야 되잖아요. 가시가 있다고 통째로 버려버리면 안 되고, 언어라는 가시를 조금 헤집고 들어가야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서툴러도 직접 해야 실력이 늡니다

공부는 직접 체험해봐야 합니다. 요리를 지식으로 알기만 하지 말고 직접 만들어 먹어봐야 해요. 직접 해보면 책에 있는 내용과 현실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서툴러도 직접 해봐야 실력이 늡니다. 실력은 지식만 많이 쌓는다고 느는 것이 아니라 직접 해야 늡니다.

 

 

직접 해봐야 하는데 아직 코로나19 때문에 모여서 실천 활동을 못 하니까 실천과제를 드리겠습니다. 직접 꼭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코로나19가 잠잠해지면 밖으로 나와서 우리가 사는 세상을 위한 실천도 해야 합니다. 대승불교는 기존의 불교가 수행을 한다는 이유로 세상을 외면하는 쪽으로 갔기 때문에 세상과 함께 가자고 일어난 운동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대해 열린 자세를 굉장히 중요하게 여깁니다. 대승경전을 배우는 경전대학에서도 경전 공부와 더불어 사회적 실천을 함께 해야 합니다.

 

앞으로 여러분을 위해 매달 한 번 즉문즉설이 열립니다. 경전을 공부하면서 궁금한 점은 그때 질문하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경전 공부를 하면서 세 가지를 꼭 지켜보면 좋겠습니다.

 

첫째, 사전학습 법문을 꼭 듣습니다.

둘째, 수업시간에 빠지지 말고 꼭 참여합니다.

셋째, 실천과제를 꼭 해봅니다.

 

요리를 직접 해보면서 요리를 배워야 합니다. 계속 방송만 듣지 말고, 직접 썰고 볶고 삶고 요리해서 맛보아 가면서 공부해 나가시면 좋겠습니다. 다시 한번 경전대학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입학법문을 마치겠습니다.”

 

 

스님과 함께 걷는 길

문경 수련원에 도착하기 전 쌍곡 계곡에 차를 세우고 내렸습니다.

 

“오늘도 걷기 운동을 해야겠어요. 오르막이 끝나는 지점에 내려서 내리막길을 한 시간 정도 걸읍시다.”

 

 

스님의 하루 제작팀도 스님과 함께 도로 위를 걸었습니다. 입춘이 지난 지 오래지만 아직 산속 나무에는 앙상한 가지만 무성했습니다. 그러나 잎이 돋아나지 않은 빈 가지 사이로 따뜻한 봄바람이 불어왔습니다. 스님은 나뭇가지에 물든 초록빛을 찾아냈습니다.

 

잎은 나지 않았지만, 가지가 먼저 연초록색으로 바뀌고 있어요.”

 

 

스님이 내리막길을 빠른 속도로 걸어가는 가운데 반대편에서 무거운 콘크리트 하수관을 실은 화물트럭이 안간힘을 쓰며 오르막길을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요즘 제 모습이 저 화물트럭이랑 비슷해요. 내리막길은 잘 가는데, 오르막길은 저 화물트럭처럼 겨우 올라가거든요.” (웃음)

 

 

오르막길을 걷기가 어려워진 스님은 요즘 내리막길 걷기를 틈나는 대로 하고 있습니다.

 

인적이 드문 도로에는 스님의 발걸음 소리만이 뚜벅뚜벅 들렸습니다. 고요한 정적을 깨고 스님이 산속을 바라보며 한마디 했습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는 무문관이나 명상을 하려면, 이런 산속보다 아파트 문을 잠가 놓고 하는 게 훨씬 더 좋을 것 같아요. 저도 젊은 시절에는 산속에 토굴에서 정진을 해봤는데, 산속에 혼자 살면 할 일이 정말 많습니다. 뭐가 고장 나서 고쳐야 되고, 이것저것 하다 보면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해요. 처음 가졌던 목적을 잊어버리고 결국 다른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인생을 살아보면 그런 경우가 굉장히 많아요.

 

자꾸 엉뚱한 결과가 빚어지는 이유

옛날에 어떤 스님이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정진을 했어요. 너무 열심히 정진을 하는 바람에 몸이 안 좋아서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영양실조라고 하면서 우유를 매일 한 잔씩 먹으라고 했습니다. 우유를 가지러 몇십 리를 걸어서 마을까지 왕복을 하려니까 너무 힘들잖아요. 그래서 시장에서 염소 한 마리를 샀습니다. 그런데 염소 키우는 게 보통 일이 아니잖아요. 결국 염소를 돌보는 아이를 한 명 데려오려고 하니까 밥도 먹여줘야 하고, 월급도 줘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바보 같이 왜 돈이 드는 그런 방식으로 염소를 키우느냐? 여자 한 명과 결혼을 하면 여자가 염소도 키워주고 밥도 해주고 다 해주지 않느냐?’

 

이 제안이 너무 그럴듯하게 들렸습니다. 월급을 안 줘도 되니까요. 그래서 결국 스님이 결혼을 하고 아이까지 낳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웃음)

 

그때 그때는 다 자기 나름대로 잘한다고 한 행동이에요. 그런데 결과는 전혀 엉뚱하게 된 겁니다. 이게 우리의 인생이에요. 그때 그때는 다 잘한다고 한 행동입니다. 그 순간에는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그런데 지나 놓고 보면 처음 세웠던 목적지가 아닌 엉뚱한 곳에 가 있는 거죠.”

 

 

그렇게 안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처음 세웠던 목표를 늘 자각해야죠. 네비게이션도 목적지를 입력해 놓으면, 길을 잘못 들어섰을 때마다 경로를 이탈했다고 계속 알림이 나오잖아요. 그것처럼 목표를 늘 잊지 말아야 해요.

 

목표를 망각하면, 본인이 엉뚱한 길로 가고 싶어서 그렇게 가는 게 아니고,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사회적으로 말썽을 일으킨 사람들도 일부러 말썽을 일으킨 사람은 열 명 중에 한 명도 안 돼요. 대부분 어리석다고 말할 수 있지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워요.”

 

스님과 함께 걷는 길, 마음도 점점 가벼워지고 발걸음도 점점 가벼워졌습니다.

 

지나가는 길에 아주 예쁘고 큰 정원을 가진 집이 하나 나타났습니다. 스님은 큰 집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생 돈 벌어서 이런 집 하나 사서 가꾸는 재미로 살잖아요. 그런데 꼭 내 집이 아니어도 농사짓고 정원 가꾸는 일은 얼마든지 재미있게 할 수 있거든요. ‘내 집이라는 생각만 버리면 돼요. 지부별로 수련원에 와서 농사도 짓고 정원도 가꾸는 일은 언제든지 할 수 있습니다. 차이는 오직 내 것이라는 생각 그것 하나뿐이에요.

 

비싼 옷을 입어봐야 같은 옷이지, 비싼 목걸이를 목에 걸어봐야 무겁기만 하지, 비싼 화장품을 얼굴에 발라봐야 냄새만 나지, 차는 이동만 하면 되지 비싼 차가 무슨 필요가 있어요? 명품에 집착하는 것도 결국 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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