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읽은 경전은 사람을 분별하는 마음에 대한 내용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보면서 저 사람은 우등하다’, ‘저 사람은 열등하다’,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비슷하다이렇게 항상 누군가가 뛰어나다거나 누군가가 못하다며 비교를 합니다. 이렇게 비교를 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견해가 다를 때 논쟁을 하지 않는 방법

부처님 당시에는 진리에 대한 논쟁이 많이 벌어졌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것이 진리다’, ‘저것은 진리가 아니다’, ‘이것이 바른 견해다’, ‘저것은 삿된 견해다등 무엇이 바른 길인지 학문적으로 또는 종교적으로 많은 논쟁을 했습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에도 이러한 논쟁이 많이 벌어졌는데 이를 두고 백가쟁명(百家爭鳴)’이라고 합니다. 그처럼 당시 인도에도 육사외도, 62견해, 360견해 등 다양한 사상 속에서 많은 논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어떠한 견해가 옳은지 물었고, 부처님께서는 웃으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속에 탐욕이 있고, 성냄이 있고, 어리석음이 있다면, 무슨 이야기를 해도 진실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일체의 탐욕을 버리고, 성냄을 버리고, 어리석음을 깨우친 사람은 논쟁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탐욕, 성냄, 어리석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사람은 어떤 사물을 볼 때 뛰어나다’, ‘열등하다’, ‘동등하다이렇게 비교해서 사물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사물마다 모두 고유한 성질이 있기 때문에 다만 그것을 그것으로 볼뿐입니다. 사람도 사람마다 다 그 나름대로의 자질이 있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존중을 해야 합니다.

 

견해가 다를 때에도 누가 옳고, 누가 그르고, 누가 뛰어나고, 누가 못한 지를 보는 게 아니라 견해가 다르구나’, ‘생각이 다르구나이렇게만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논쟁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이런 도리를 아는 사람이 무엇은 옳고 무엇은 그르다고 주장하겠습니까.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건 아직 지혜를 증득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걸 반증합니다.

 

 

당시 인도에서는 바라문교 사상의 성전이며 가장 오래된 경전인 베다를 읽고, 그 베다에 근거해서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다하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판단 기준이 베다였습니다. 그 외에는 전승된 계율이나 관습, 습관에 의해서 판단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과거로부터 전승된 관습이나 습관, 계율이나 경전, 윤리나 도덕에 의해서 진리는 검증되지 않는다.’

 

이 산은 동산입니까, 서산입니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기 산이 하나 있습니다. 산의 동쪽에도 마을이 하나 있고, 산의 서쪽에도 마을이 하나 있습니다. 산의 동쪽에 사는 사람은 산이 서쪽에 있다고 생각하고, 산의 서쪽에 사는 사람은 산이 동쪽에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산의 동쪽 마을에 태어나서 다른 동네에 가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 산을 서산이라고 부를 겁니다. 동네 사람들한테 물어봐도 모두 다 서산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옛날 역사 기록을 다 찾아봐도 서산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직접 관찰을 해도 그 산 방향으로 해가 집니다. 자기 눈으로 직접 봐도 서산이 확실하고,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서 다수의 의견을 구해도 서산이 확실하고, 옛날부터 전해지는 기록을 뒤져도 서산이 확실합니다.

 

산의 서쪽에 사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마을 사람들은 모두 다 그 산을 동산이라고 하고, 그 마을의 기록을 뒤져봐도 모두 동산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직접 관찰을 해도 해가 그쪽에서 뜹니다. 그러니 이 산은 틀림없이 동산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그렇게 알고 있다거나 전승된 기록이 있다고 해서 진실은 증명되지 않습니다. 진실을 알려면 자기가 사는 마을에서 나와 봐야 됩니다. , 자기의 까르마와 아집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눈을 감은 사람이 눈을 뜨듯이 그 마을에서 한 번 나와 보면 이 산이 동산이 아니구나또는 이 산이 서산이 아니구나하고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이 산은 무슨 산일까요?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또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닌 산이다이렇게 규정합니다. 산은 그냥 산일 뿐입니다. 사람이 사는 마을의 위치에 따라, 즉 조건에 따라 동산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서산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이런 도리를 아는 사람은 누가 북산이라고 해도, 누가 남산이라고 해도, 논쟁하지 않습니다. 누가 북산이라고 하면 , 저 사람은 산의 남쪽에 있는 마을에 살고 있구나라고 알고, 누가 남산이라고 하면 저 사람은 산의 북쪽에 있는 마을에 살고 있구나라고 압니다. 누가 동산이라고 하면 저 사람은 산의 서쪽에 있는 마을에 살고 있구나라고 알고, 누가 서산이라고 하면 저 사람은 산의 동쪽에 있는 마을에 살고 있구나라고 압니다. 이렇게 그 사람이 사는 위치를 알아버리면 다툴 일도 없고, 논쟁할 일도 없어집니다. 전체를 보는 통찰력이 없기 때문에 논쟁을 하는 거예요.

 

덮인 것을 벗겨서 보여주는 것처럼

그래서 부처님의 이 가르침을 깨닫게 되면, 논쟁하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고, 그중 어떤 것이 옳은지 물을 것도 없습니다. 이 사람의 말이든, 저 사람의 말이든, 전혀 헷갈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의심이 풀어졌기 때문입니다. 마치 뭔가로 덮여 있어서 그 속에 무엇이 있는지 짐작으로만 알다가 덮개를 벗기고 나면 한눈에 보이는 것처럼 한 번에 알게 됩니다. 상자 속에서 나는 병아리 소리를 듣고 세 마리일까, 네 마리일까?’ 이렇게 서로 짐작하고 주장하다가 상자를 확 열어보면 몇 마리가 있는지 한눈에 알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나의 가르침은 눈 있는 자 와서 보라는 것과 같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번뇌와 의문이 탁 풀어진 경험을 한 사람들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마치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우는 것처럼 분명하고, 덮인 것을 벗겨서 보여주는 것처럼 분명하고, 길을 잃고 헤매는 자에게 길을 가르쳐 주는 것처럼 분명하고,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 등불을 비춰주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네 가지 비유를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깨달은 상태를 표현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스승의 손안에 숨겨둔 비밀 같은 건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진리라고 하면 무언가 비밀스러운 비법을 전수하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제자 중 누구에게만 비밀스럽게 특별한 것을 주었다는 이야기를 하곤 하는데, 이건 진리의 세계에서는 통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누군가 그런 이야기를 하면 벌써 진리가 아니라고 이해를 해야 합니다.

 

마지막 구절에 미래의 희망 같은 건 없다하는 표현이 나오는데 얼핏 보기엔 이해가 잘 안 되죠? 평소에 우리는 미래의 희망을 갖는다는 말을 많이 하니까요. 그런데 수행하는 사람들이 극락과 천당을 이야기하고, 죽어서 윤회한다거나, 좋은 일을 하면 다음에 복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법의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왜 정법이 아닌지 금방 알 수 있어요.

 

 

수행자는 어떠한 조건이 주어지든, 그것을 있는 그대로 알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여기에는 좋고 나쁨이 없습니다. 오늘은 나쁘고 내일은 좋을 때 미래의 희망이라는 말이 성립되고, 옛날보다 오늘이 나쁠 때 절망이라는 말이 성립되는데, 수행자에게는 좋고 나쁨이 없기 때문에 그런 말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봄을 좋아하고 여름을 싫어해야 여름이 오면 재앙을 받았다고 할 수 있고, 가을을 좋아하고 겨울을 싫어해야 겨울이 오면 재앙을 받았다고 할 수 있고, 겨울을 싫어하고 봄을 좋아해야 봄이 되면 대운이 찾아왔다고 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수행자는 어떤 계절은 좋고, 어떤 계절은 나쁘다고 바라보지 않기 때문에, 봄은 봄대로 여름은 여름대로 가을은 가을대로 겨울은 겨울대로 받아들입니다. 여기에 무슨 좌절할 일이 있고, 굳이 희망을 얘기할 일이 뭐가 있겠어요.

 

운명을 점치는 일을 금지한 이유

운명을 점치는 일을 일체 금한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수행자가 손금을 보고 관상을 보고 하늘의 별을 보고 사주를 보는 것도 일절 금지했습니다. 그런 일들은 모두 다 지금은 나쁘지만 미래는 좋아지기를 기대하는 심리 때문에 하는 거잖아요. 이건 수행자의 자세와 맞지 않습니다. 수행자는 언제 어디서든 늘 좋습니다. 어디를 가도 두려움이 없고, 걸림이 없고 편안한데 뭘 따로 더 좋은 걸 기대하겠어요.

 

이런 도리를 확연히 깨우쳐야 왜 부처님이 미래를 점치지 말고, 신통을 쓰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는지 알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좋은 것을 구하고 나쁜 것을 피하려고 하기 때문에 천당과 지옥을 나누고, 손금을 보고, 관상을 보고, 사주를 보고, 전생을 알려고 하면서 좋은 일이 생기겠냐, 나쁜 일이 생기겠냐늘 따지는 겁니다. 그러면서 해탈과 열반에 이른다는 건 애당초 도달할 수 없는 길을 가는 것입니다. 정진할 때도 여러분은 늘 정진하면 뭐가 좋아집니까?’하고 묻는데, 다만 정진할 뿐입니다. 명상을 할 때도 일체를 모두 내려놓고 다만 호흡을 알아차리기만 하고, 화두를 들 때도 다만 화두를 들기만 하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이러면 뭐가 좋아요?’, ‘저러면 뭐가 좋아요?’ 이렇게 늘 좋음을 구합니다.

 

신심명 첫 구절이 뭐예요?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것이 좋아하는 것을 의미하고 미워하는 것이 싫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갈애와 혐오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들 수는 있지만 그 마음에 집착하면 안 됩니다. 좋고 싫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마음이 편안해지고 삶이 자유로워집니다.

 

여러분도 기도를 열심히 하면서도 늘 좋은 걸 찾고 있습니다. 좋은 걸 찾는다는 건 지금이 어렵다는 거잖아요. 지금이 좋으면 좋은 건 또 유지하려고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형성된 것은 모두 다 변화한다는 진리입니다. 그러니 이루어지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하는 겁니다. 만나기도 하고 헤어지기도 합니다. 사람을 만나다 보면 내 취향에 맞는 사람도 있고 맞지 않는 사람도 있어요. 계절에도 내가 좋아하는 계절이 있고 그렇지 않은 계절이 있습니다. 좋아하는 계절이 없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좋아한다고 집착하지 말고, 싫어한다고 밀어내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옛말에 오는 사람 막지 말고 가는 사람 잡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얼핏 보면 무심하라는 말 같지만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각자 까르마 때문에 일어난 일에 너무 목매달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까르마로부터 일어난 일에 집착하면 평생을 껄떡거리고 살게 됩니다.

 

자기 생각과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이렇게 본질을 꿰뚫어버리면 공부할 게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본질을 꿰뚫지 못하면 공부를 해도 해도 끝이 없습니다. 방 안에 불을 탁 켜면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 한눈에 알 수 있는데, 불을 끈 채 손으로 더듬으면 사흘을 더듬고 한 달을 더듬어도 방 안에 무엇이 있는지 다 알지 못합니다. 애는 많이 쓰는데 얻는 건 없고, 설령 안다고 해도 잘못 알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늘 자기 생각을 쥐고, 자기 욕구를 쥐고 좋다, 싫다, 맞다, 틀리다늘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여기서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바로 그런 자기 생각과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그런 관점을 가지고 경전을 읽고, 일상생활에도 적용을 해봐야 합니다. 옛 선사들이 언하에 깨쳤다고 하잖아요. 눈을 감고 헤매다가 눈을 탁 뜨고 나면 별 거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평생을 이렇게 헤매고 애쓰고 괴로워하고 갈등하면서 살아갑니다. 갈애가 끝나지 않으니까 오늘이 내일을 연결하고, 내일이 모레를 연결하고, 인도식으로 표현하면 이생이 내생을 연결합니다. 이 연결의 고리가 끊어지는 것을 윤회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 삶으로 정진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그럼 다음 주에 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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