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산스님 성지순례법문

 

▲ 미얀마 파욱 수행센터를 탐방한 후 아침 공양 마치고 양곤 최고급 호텔인 롯데호텔 뒤뜰에 모인 각산스님 법문현장입니다. 성지순례하면서 시의적절하게 곳곳에서 해주신 법문으로 더 갚진 순례 여행이었습니다.

 

 

 

'중생의 몸으로 온 부처(불변수연)'

 

 

 

뛰어난 부처님 말씀도 각자의 인식대로 해석하기때문에 종파불교 부파불교를 형성하게 되는데 이것이 테라와다불교입니다. 테라와다 불교도 대승불교도 각자 이것이 부처님의 진의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초기불교는 부파불교 안에도 들어있고 대승불교 안에도 들어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가 알지 못하면 무명으로 인한 미혹함 때문에 남에게 종속되게 됩니다.

 

저역시 미얀마 불교가 부처님의 원형이 담겨있는 초기불교라고 믿고 수행을 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서 제 나름대로의 안목이 열리고 보니 초기불교의 원형이라고 주장한 미얀마 불교는부파 불교였습니다.

 

 

 

초기경전을 말하지만 철저히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이라는 주석서를 기반한 논장을 중심으로하는 부파불교입니다. 아비담마란 스님들이 공부를 하며 쌓아 온 부처님 말씀에대한 해석, 즉 법에대한 연구를 말합니다. 체험이 없으면 실참법은 전달할 수 없는 부분이라 각자의 관점에서 철학과 사상을 전달됩니다.

 

 

 

물론 테라와다는 부처님 당시의 장로적 성향, 생활상 계율적인 것은 그대로 가져왔지만 실제 수행 체험에서 보면 초기경전의 가르침과는 상이합니다.

 

 

 

특히 테라와다 불교인 남방불교 중에 미얀마 불교는 논점이나 위빠사나, 그리고 사마타 위빠사나 수행은 팔정도를 말하지만 팔정도의 하이라이트인 정정(正定, 바른삼매)를 증명시키기에는 뭔가 아직 충분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논서에 입각한 수행은 수행을 오래 한 사람들에게는 복잡하지 않지만 대중과는 괴리가 생겨 종교적 생동감을 잃고 번쇄철학으로 흐르는 요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용수(나가르주나)로 대표되는 새로운 승가운동 재가자들을 중심으로 대승불교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초기불교와 대승불교 종교철학에 대한 내용과 부처님 일생,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되어있는 책들을 다시 소개하겠습니다.

 

 

 

1. 히라가와 아키라(平川彰)의 '초기대승불교의 종교생활'

 

2.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의 ' '바웃드하 불교'

 

3. 나라다 마하테라 '(The)Buddha and his teaching' (그대 자신을 등불로 삼아라)

 

 

 

필독서로 삼아서 시간을 내서 꼭 읽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아난존자의 일기>를 병행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가슴이 먹먹해지는 부처님의 일대기 입니다. 감동있고 몰입되는 부처님의 일생입니다. 그리고 꼭 먼저 <법구경>(거해스님 번역)부터 독파하시기 바랍니다. 부처님 당시의 생활상을 알수 있습니다. 재미있습니다. 게송을 통해서는 삶의 방향을 잡을 수 있습니다.

 

 

 

 

 

대승불교를 연 대표적 인물인 '용수(나가르주나)에 대하여 간략히 살펴보겠습니다. 용수는 '삼사칠정의 계'를 받지 않고 불탑에 나아가 스승없이 스스로 삭발하였습니다. '십선계'를 말하므로 비구가 아니라 그냥 사마나(沙門)인 출가자입니다. 비구가 아니기에 승가의 공덕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용수가 비구가 아니라고는 제가 최초로 발견한 것 같습니다. 검증을 자료를 찾다보니 일본의 대표적인 불교학자 '히라가와 아키라'가 저와 같이 주장하고 있음을 뒤에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대승불교의 승단은 복합적 형태의 보살계본을 포살로 하기도 하지만 '사분률'을 승가의 계율로도 삼고 있기에 비구승단으로 정통성을 유지합니다. 대승불교의 철학은 시대적 상황에 적합한 사상입니다. 대승경전 또한 직설은 아닐지라도 불설이 담겨져 있으니 나름대로 초기경전의 뜻에 부합합니다.

 

 

 

문상의 글보다는 이면의 '뜻'인 문저(文低)를 살펴봐야 합니다. 초기불교와 간화선 통합수행의 대승사상을 전법하지만 진리는 한 사람의 것이기도 하지만 만 사람의 것이기도 하기 때문에 부처님 당시의 초기불교 정신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면 '실존적 부처님이 어떻게 존재할까요?' 부처님이 계셔도 못 깨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법이 부처입니다. 불법을 만난 자는 법의 인연이 되었기에 바로 눈앞에서 일어나는 것을 놓치지 않고 보면, 마음이 바탕이 되어 생각이 '조건따라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일 뿐, '생각은 내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보게됩니다.

 

 

 

이런 이치만 알면 모두 이자리에서 법을 만나고, 부처를 만나고, 견성이 되는 것입니다.이때 견성성불은 아라한을 뜻하고, 삼마삼붓다는 다른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초전법륜에 중도(팔정도)를 설하셨고, 사성제,그리고 연기법을 차례로 설하셨습니다.

 

 

 

이것을 정형화 시킨 것이 '무상' '무아' '고'이며 반야심경에도 그대로 다 나오는 내용입니다. 대승경전은 부처님 말씀이 아니라고 미얀마불교에서는 폄훼시키고 있지만, 반야심경의 260자는 초기불교의 법수들인 오온, 십이처, 사성제, 12연기가 모두다 집약 되었습니다.

 

 

 

핵심은 '나는 누구인가?' 를 계속해서 물어들어가는 것입니다. '나라고 여기는 건 오온일 뿐이다' 오온은 텅비어 실존적으로 드러난 것일 뿐!, 오온은 실존하나 실체는 없습니다.

 

 

 

'내가 없다'가 아니라 오온은 존재하나 내 마음대로 되지 않고, 자아가 아니며 소유할수도 없습니다. 내 것이 아니라 통제할 수가 없습니다. 내것도 아니고 통제 안되는 것을 통제하려는 것이 '고통'이므로 이것을 정확히 알면 바라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고, 애착, 집착의 갈애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온이 텅 빈 것을 아는 것'이 '돈교법'입니다. 보통 마음과 생각이 같다고 알고 있지만마음은 생각과 다릅니다. 마음은 있는그대로 원융한 본체를 말함이고 생각은 각자의 업식에 따라 일어나는 찰나의 작용입니다.

 

 

 

'의지'는 원력이요, '의도'는 자기 생각에 매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의지'는 가지되 '의도'는 없어야 합니다. 모든 괴로움과 번뇌는 '의도'때문에 생깁니다. 그안에 탐,진,치가 자리하기때문에 그러합니다.

 

 

 

마음 바탕은 누구나 똑 같지만 생각은 각양각색, 오만가지로 일어남을 우리는 쉽게 보게됩니다. 훈련을 통해 마치 드론을 띄워 보는 것처럼 보게되면 '생각이 일어나는구나'라고 구경꾼처럼 생각이 보이고, 생각과 마음이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그것이 실체없는 허상임을 알게 됩니다.

 

 

 

이런 훈련이 없으면 생각과 마음이 붙어있게 되어 마치 내것인양 부여안고 고통을 받습니다. 느낌(受), 인식(想), 의도(行)가 의식인 아뢰야식에 저장된 것일 뿐, 내 것이 아니고 그냥 조건따라 일어나는 것입니다.

 

 

 

먼저, 느낌은 내 것이 아니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마음 바탕위에 느낌이 일어났을 때, 그 느낌이 좋으면 애착. 집착이 일어나고 나와 안 맞으면 성냄이 일어납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일어나지만 수행이 안된 사람은 미혹으로 인하여 느낌에 사로잡혀 그 느낌에끌려갑니다.

 

 

 

사랑, 명예, 재물은 문제가 없지만, 그 속성이 가지려하고 추구하게 되는 것이므로 '독'

 

이 되는 것입니다. 애착, 집착은 바라는 마음이고, 의도하는 마음이라 그로 인해 고통이 일어납니다.

 

 

 

둘째 인식은 어떻게 저장 될까요? 아는 마음을 잘 살펴보면 항상 내 방식대로 알아집니다. 그 경험으로 '내가 최고다'라고 인식하게 되고 그것이 고착화 되면 '고집'이 됩니다.그것이 행동화되어 '의도'가 되고 각자의 식(윈냐냐)이 되어 저장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틀어 '찟따'라는 마음의 바탕에서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

 

그러므로 훈련을 통해 마음과 생각을 분리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드론을 띄운 듯 보면 '첫생각'을 보게되고, '생각이 일어나기 전'도 볼 수 있게 됩니다

 

 

 

 

 

'마음'이란 무엇일까요?

 

마음 그 자체는 변함이 없는데 (생.멸)인연을 따라 일어나게 됩니다. '인연'이란 것은 어떤 누구든, 만물,물질. 모든 것에 적용되는 법칙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법이란 모든것을 포함합니다. 마음은 과거의 인식을 가지고 '내 것'으로 삼고 있는 생각일뿐 , 마음은 물들 바가 없습니다.

 

 

 

허공같은 마음바탕엔 아무것도 없는데 각자의 생각으로 모든 것(만법)을 창조해 낸 것이라 만법은 곧 마음에서 일어난 꿈과 같고 물거품과 같은 현상입니다. 원래 마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아무 잘못도 없습니다. 절대 평화입니다.

 

 

 

본래는 마음 그 자체이지만 생각이 마음이라는 바탕을 두고, 생.멸의 인연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불성이라고하고 진여라고도 합니다. 명칭으로 드러내 보입니다.

 

 

 

"마음자체는 변함없는 본체이므로 '불변(不變)'이라하고

 

생.멸의 인연따라 드러나는 것을 '수연(隨緣)'이라 합니다."

 

 

 

만법은 생멸의 인연에 따라 변하지만 마음본체는 불변하는 것이고 이 마음은 만법에 영향을 받지 않고 다만 인연에 따라 흐를 뿐입니다.

 

 

 

모든 것은 생겨났다 사라집니다(생.멸) 그러나 마음바탕은 물들 자리가 없으니 그 본체를 성(性)이라 합니다.('隨緣不變而性). 그리고 마음은 생.멸의 인연따라 드러난 것이니 '不變隨緣而心'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음자체는 변함이 없지만 생멸의 인연따라 드러난 것을 '요동함' '들뜸'이라 하고,

 

인연따라 일어나지만 본체가 그대로인 것을 '고요함'이라 합니다. '성(性)'은 변하지 않는 바다자체요, 만법은 물결이라 생.멸함의 인연을 따르지만 본성의 마음(心)은 언제나 변함없이 그대로인 것이라 고통 받을 자가 없습니다. 헹위만 있고 행위자가 없는 이치입니다.

 

 

 

이것이 심성이 가지고 있는 것, 무시이래로 本覺, 본래 부처지만 중생의 몸을 받아 온 것일 뿐! 생멸의 인연을 따랐지만 부처의 불성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이말은"여러분이 이대로 부처"라는 뜻입니다. 그냥 '된다'라고 자신을 믿는 것, 자신감을 가지면 됩니다. 안된다는 마음 때문에 못 깨치는 것이지 안된다는 생각없이 하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변함없는 본체를 '불성'이라하고 드러난 현상을 '자성'이라 합니다. 업이라는 것도 스스로의 성품이 없고 마음 따라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일 뿐! 본체라는 것은 그대로 변한 바가 없으니 그 일어나는 힌 생각만 멈추면 됩니다.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일어난 생각을' 내 것'으로 삼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니 이것이 마음을 쓰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조견 오온개공" 입니다.

 

 

 

'불성'자리는 허물어 지지 않는 것이라 심성(불성)은 닦을 것이 없이 그냥 원융무애한'돈교'의 가르침입니다. 심성은 불성이라 이미 가지고 있기 때문에 드러난 것이고 점차적인 것이 아닙니다.

 

 

 

고요함에서 요동함(들뜸)을 멈추면 그대로 고요함이요, 상즉(相卽, 모든 현상의 본질은 서로 융합하여 걸림이 없다는 뜻)의 도리입니다. 번뇌가 보리요, 어두움이 바로 빛이고, 문제가 답인 것입니다. 이것이 닦을 것이 아닌 '돈교법'입니다

 

 

 

"바라는 마음 없이 다만 할 뿐!"

 

각자의 보리수를 가지십시오! 각자가 가지고 있는 나무를 내가 어떻게 조각하느냐에 따라 나무는 달라지는 것이니, 잘 배우고 익혀 능숙한 목수가 되어 각자의 보리수를 조각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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