正信希有分 第六

 

須菩提-白佛言(수보리-백불언)하사대 世尊(세존)하 頗有衆生(파유중생)이 得聞如是言說章句(득문여시언설장구)하고 生實信不(생실신부)이까 佛告須菩提(불고수보리)하사대 莫作是說(막작시설)하라 如來滅後-後五百歲(여래멸후-후오백세)에 有持戒修福者(유지계수복자)하야 於此章句(어차장구)에 能生信心(능생신심)하야 以此爲實(이차위실)하리니 當知是人(당지시인)은 不於一佛二佛三四五佛(불어일불이불삼사오불)에 而種善根(이종선근)이요 已於無量千萬佛所(이어무량천만불소)에 種諸善根(종제선근)이니 聞是章句(문시장구)하고 乃至一念(내지일념)이라도 生淨信者(생정신자)니라 須菩提(수보리)야 如來-悉知悉見是諸衆生(여래-실지실견시제중생)이 得如是無量福德(득여시무량복덕)이니 何以故(하이고)오 是諸衆生(시제중생)이 無不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무부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며 無法相(무법상)이며 亦無非法相(역무비법상)일새니 何以故(하이고)오 是諸衆生(시제중생)이 若心取相(약심취상)하면 卽爲着我人衆生壽者(즉위착아인중생수자)니 何以故(하이고)오 若取法相(약취법상)이라도 卽着我人衆生壽者(즉착아인중생수자)며 若取非法相(약취비법상)이라도 卽着我人衆生壽者(즉착아인중생수자)니라 是故(시고)로 不應取法(불응취법)이며 不應取非法(불응취비법)이니 以是義故(이시의고)로 如來常說 汝等比丘(여래상설 여등비구)하되 知我說法(지아설법)을 如筏喩者(여벌유자)니 法尙應捨(법상응사)어든 何況非法(하황비법)가하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어, 자못 어떤 중생이 이와 같은 말씀이나 글귀를 듣고 실다운 신심을 낼 수 있겠사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런 말을 하지 말라. 부처님께서 가신 뒤 후 오백세에 계를 받아 지니고 복을 닦는 수행자가 있어서 이 같은 말과 글귀에 신심을 내어 이것을 진실하게 여기리라.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한 부처님께서나 두 부처님께서나 셋, 넷, 다섯 부처님에게만 착한 마음의 바탕을 튼튼히 했을 뿐만 아니라 이미 한량없는 천 만 부처님 계신 곳에서 착한 마음의 바탕을 튼튼히 한 사람이니, 이 글귀를 듣고 한 생각에 거룩한 믿음을 내느니라. 수보리야! 여래는 이 모든 중생들이 이와 같이 한량없는 복덕 짓는 것을 다 아시고 보시느라. 왜냐하면 이 모든 중생들은 다시는 <나라는 생각>·<남이라는 생각>·<중생살이라는 생각>·<오래 산다는 생각>이 없으며 <법이라는 생각>·<그릇된 법이란 생각>도 없기 때문이니라. 왜냐하면 이 모든 중생이 만일 마음에 지키는 것이 있으면 곧 <나라는 생각>·<남이라는 생각>·<중생살이라는 생각>·<오래 산다는 생각>에 걸리기 때문이며, 만일 <법이란 생각>을 지켜도 <나라는 생각>·<남이라는 생각>·<중생살이라는 생각>·<오래 산다는 생각>에 걸리며 <그릇된 법>이라는 생각을 지켜도 곧 <나라는 생각>·<남이라는 생각>·<중생살이라는 생각>·<오래 산다는 생각>에 걸리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정법을 지키지도 말고 그릇된 법을 지키지도 말 것이니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항상 말하기를 「너희들 비구는 알라. 내가 말한바 법은 뗏목과 같으니 정법도 오히려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그릇된 법이야 말할 게 있겠느냐?」하였느니라.』

 

第六 正信希有分---말세에도 바른 신심 있다

 

[科 解]

우리가 만일 육신의 오관세계(五官世界), 물질세계만을 본위로 하여 삼차원세계에서만 산다면 사차원세계의 현실을 설명할 수 없게 되고 불법과는 거리가 먼 생활에 떨어집니다. 예컨대 육신 가지고는 장래를 예언할 수 있는 관능(官能)은 없지만, 정신이 무아지경(無我地境)에 들어서면 온갖 것이 다 보이고 자유입니다. 전에 말했듯이 문을 닫아걸었는데 육신이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든지, 큰 종속에 집어넣었는데도 쇠종을 뚫고 육안으로는 지나간 줄도 모르는 새 어느 틈에 나가는 등입니다. 이런 것은 다 사차원세계에 들어서면 허다하게 많습니다.

현실세계란 이것이 근본적으로 꿈이고 환상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가상(假相)으로 있는 것이니 법당은 불에 타면 재만 남는다는 생각, 인식 그 관념 때문에 불이 붙는 것입니다. 삼차원의 세계는 환상이고 그것은 다 생각하는 대로 될 수 있는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생각 없는데 들어서면 거기서 사차원세계가 벌어지는데 여기서 더욱 더 들어가면 육신으로 살 때 오관에만 의지했던 인간 능력을 초월하여 무한대한 절대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불교에서는 사차원세계 정도는 초학자(初學者)의 체험입니다. 나는 불교의 내용을 사의상학(思議上學)·사의하학(思議下學)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생각 합니다. 생각하기 이전, 마음이 생각을 내기 전은 <사의상학>입니다. 곧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세계를 말합니다. <사의하학>은 세상에서 말하는 형이상학(形而上學)·형이하학(形而下學)이 다 포함되었다고 봅니다. 그것은 다 생각 밑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의상학(思議上學)에서부터는 불교 냄새가 조금 납니다만 그러나 그것도 아직 마음의 본바탕은 아닙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사차원의 세계가 있다고 하여 전혀 없었던 것, 새로 발명한 것처럼 야단입니다. 사차원세계에 들어서서 시골에 있는 집이 보인다, 친구들이 지금 앉아서 밥 먹고 얘기하는 것이 보이고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고 하지만 이것은 아직 불교의 초입(初入)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천차원(千次元), 만차원(萬次元)의 무아경에 들어가서 생각의 주체인 마음의 본연자세(本然姿勢)를 발견하게 됩니다. 마음을 깨달으면 주객(主客)을 초월하게 되어 <나라는 생각>(我相)·<남이라는 생각>(人相)·<중생살이라는 생각>(衆生相)·<오래 산다는 생각>(壽者相)을 여의게 되는데 마음이 곧 부처라는 것, 육체가 <나>가 아니라는 진리를 믿는 것이 바른 신심(正信)입니다. 불멸 후(佛滅 後) 이천 오백년의 말세에도 다생으로 부처님을 따라 배운 이들이 있어서 이와 같은 바른 신심(正信)으로 계를 지키고 큰 복을 닦으며 금강경의 진리를 읽고 거룩한 신심을 내어 무량한 복덕을 짓는 일은 심히 희유(希有)하다는 뜻에서 정신희유분(正信希有分)이라 한 것입니다.

 

原 文 : 須菩提 白佛言 世尊 頗有衆生 得聞如是言說章句 生實信不

 

[解 義] 이제까지 말씀하신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수보리존자가 의문을 일으킵니다. 「현상계의 모든 것이 다 허망할 뿐이니 모든 현상이 현상 아닌 줄을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까지의 법문을 듣고 육신 본위로만 사는 중생들이 육신이 내가 아니라는 그 법문을 얼른 알아듣고 믿음을 낼 수 있겠느냐는 물음입니다.

파유중생(頗有衆生)에 파(頗)는 자못 파자인데 행여나, 진정 그런 중생이 있겠습니까? 라는 뜻입니다. 다음에 득문여시언설장구(得聞如是言說章句)는 어떤 중생이 「부처님의 이와 같은 말과 글을 듣고 나서」란 뜻이니, <언설장구>는 곧 경문(經文)을 가리키며 말과 글을 가리키는데 말이 세련(洗練)되면 그것이 글이고 글이 서투른 것이 말이어서 마치 시와 소설이 다르듯이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 제자가 됐을 때 부처님께서 이런 연설이나 이런 글자를 보고 이 금강경을 읽어보고 천독만독(千讀萬讀) 자꾸 읽어서라도 「그것이 참말이구나」하고 「실다운 믿음을 내는 중생들이 정말 있을까?」(生實信不)하는 의심을 냈습니다. 「지금까지 배운 것이 전부 거짓말이고 쓸데없는 소리였구나, 하나도 사실 없는 헛소리를 듣는 것이었구나, 마치 미친 사람이 술을 먹고 잠들어서 잠꼬대하는 꿈속의 헛소리였구나, 하고 느끼겠습니까?」 「이제까지의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닌 소리라,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고 나 아닌 다른 사람 얘기만 하는 도서관의 서적은 모두 다 미친 사람 술 먹고 자다가 헛소리하는 잠꼬대 녹음에 불과한 것이었구나. 그런 걸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부처님 말씀이 참말로 가치가 있는 진리의 실재 내용이 있는 것이 부처님 말씀이구나 하고 그런 신심을 낼 사람이 있겠습니까?」하고 부처님께 의문을 여쭈었습니다.

 

原 文 : 佛告 須菩提 莫作是說 如來滅後 後五百歲 有持戒修福者 於此章句 能生信心 以此爲實

 

[解 義] 수보리존자의 질문에 대하여 부처님께서는 일언지하(一言之下)에 그렇지 않다고 끊어서 말씀하십니다. 『그런 말 너 함부로 하지 말라.(莫作是說) 부처님께서 다른 세상으로 가신 뒤에, 불멸(佛滅)한 뒤에 부처님께서 육신의 몸뚱이를 버리고 열반적멸(涅槃寂滅)의 부처님 세계에 멸도(滅度)하신 뒤에(如來滅後) 다섯번째 오백세 되는 그 때에도(後五百歲) 계를 잘 받아서 목숨처럼 지키어 큰 복을 짓는 갸륵한 수행자가 있어서(有持戒修福者) 이 금강경의 이런 거룩한 법문을 듣든지 읽어보고 육조대사(六祖大師)께서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하라는 법문 듣고 깨치듯이 「참 그렇겠구나」하는 신심(信心)을 낼 것이다.(於此章句 能生信心) 그리고 「아 참말로 진실한 말이구나. 이런 내용 이런 말씀이었구나. 그것은 정말 한 말 한 글자도 거짓말이 없구나.」 하고 깨닫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런 뜻입니다.

후오백세(後五百歲)란 말은 오백년을 단위로 하여 제일 오백세는 부처님께서 돌아가신 뒤 오백년까지를 가리키고, 제이 오백세는 부처님 가신 뒤 오백년에서부터 천년까지를 가리키고, 제삼 오백세는 천오백년까지, 제사 오백세는 부처님 멸도(滅度)하신 뒤 이천년까지, 제오 오백세는 불멸(佛滅) 이천 일년부터 이천 오백년까지에 해당합니다.

무량대복(無量大福)을 지으려는 수행인이라면 계를 바로 지키지 않고서는 큰 복을 성취할 도리가 없습니다. 성직자라고 하면 남이 먹기 좋아하는 음식도 안 먹고 좋은 의복도 안 입고 좋은 데 거처(居處)도 안 하고 그리고 앉아서 밤에 잠도 안 자고 저녁도 굶고 하루 한 끼만 먹고 밤새도록 정진(精進)해야 남다른 수행도 되고 남들이 고마운 생각을 합니다. 먹을 것 다 먹고 할 짓 다 하고 공부도 잘 안하고 하면 하나도 고맙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계수복자(持戒修福者) 곧 「계 지니고 복을 닦는 사람」이라고 한 것입니다.

우선 먹을 것 다 먹어서 말하자면 고기를 먹는다, 파·마늘 먹는다 하면 영양 있고 자극성식물(刺戟性食物)이고 양기를 돕게 되기 때문에 비구나 비구니가 혼자 살 수 없게 됩니다. 몸뚱이는 뚱뚱하게 살이 찌고 정력이 강해지니 공부도 안 되고 번뇌가 막 일어납니다. 영양가치 있는 음식을 먹어서 피가 자꾸 들 끊고 술 같은 것 마셔 놓으면 온갖 생각이 나를 막 흔듭니다. 그래서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이 강해지니 한번 흔들어 어지럽혀 놓고 나서 나중 술 깬 뒤에 생각해 봐야 후회막심하고 이런 일이 생겨 놓으면 마음이 안정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먹을 것을 다 먹으면 독신생활(獨身生活)도 안 되지만 억지로 참고 한다 하더라도 번뇌를 참느라고 공부도 안 됩니다.

수도하는 데 제일 어려운 것이 남녀 성 문제인데 음식 같은 것은 좀 안 먹으면 참을 수 있지만 먹을 것 다 먹어 놓으면 이성끼리 만나면 견딜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성끼리 아무도 없는데서 만나면 할 수 없습니다. 성이란 본래 동물적인 본능일 뿐 눈도 코도 없고 머리꼬리도 없는 것이니 거기 이끌리면 동물입니다. 극단(極端)으로 말하면 애비와 딸을 이성이 하나도 없는 무인도에 갖다 놓으면 어린애라도 키워 가지고 손주를 낳습니다. 애비와 딸이 손주를 낳으면 그것은 딸이 낳았으니 손주고 애비가 낳았으니 자식이고 손주도 아니고 딸도 아닙니다. 금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충동 안 받으려면 애당초 영양가치 있는 것 먹지 말고 자극성 있는 음식물을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동시에 일상생활에 있어서도 항상 환경에 주의하고 계율에 맞추어 생활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계를 지키고 복을 닦아야 큰 복을 닦을 수 있지 계를 지키지 않고는 번뇌망상에 끄달리게 되고 탐진치 삼독으로 사는 중생놀음을 벗어나지 못하게 되므로 큰 복을 지을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계를 안 지키고도 복을 지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계를 가지고 짓는 복에 비교해 볼 수가 없는 작은 복입니다. 이런 지계수복자(持戒修福者)가 금강경의 이런 구절을 읽어 보고서 응무소주 행어보시(應無所住 行於布施)이나,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같은 구절을 읽어 보고서(於此章句) 능히 신심을 내어 「참말로 진실한 진리였구나. 한 글자 한 마디도 진리 아닌 것이 없구나」하고 깨달을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能生信心以此爲實)

 

原 文 : 當知是人 不於一佛二佛 三四五佛 而種善根 已於無量千萬佛所 種諸善根聞是章句 乃至一念 生淨信者

 

[解 義] 『당지시인(當知是人)하라,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잘 알아 두라. 불어일불이불삼사오불(不於一佛二佛三四五佛) 저 한 부처님께서나 두 부처님께서나 세 부처·네 부처·다섯 부처님께서 출현(出現)하실 때마다 태어나서 이종선근(而種善根)이라. 예배도 하고 참선도 하고 부처님께 법도 묻고 같이 공부도 많이 해서 착한 바탕을 많이 심었을 뿐이 아니라.』 착한 일 하는 것은 착한 뿌리가 되고 악한 일 하는 것도 뿌리가 된다는 말은 하나의 바탕이 되고 습관이 생겼다는 뜻입니다. 한 부처님께만 뵈옵고 따라 배우면서 하나도 빼지 않고 듣고 그걸 다 기억하면 전능만능해질 것입니다. 그렇게 한 부처님만 친견하고 신행(信行)하기도 어려운 일인데 한 다섯 부처님을 이 세상에서 만났다면 그건 참 큰 복 지은 사람입니다. 다섯 부처님한테만 이런 선근(善根)을 심은 것이 아닙니다.

한두 부처님 계신 데서가 아니라 이미 오랜 과거세(過去歲)부터 한량없는 천만 부처님 계신 곳에 가서(已於無量千萬佛所) 그 많은 부처님 앞에 참회를 하고 부처님 가르쳐 주시는 대로 목숨 내 놓고 철저히 좋은 수행을 했습니다.(種諸善根) 부처님 직접 만나 놓으면 얼마나 신심이 나겠습니까? 휘발유가 불을 만난 것처럼 우리의 마음바탕이 그만 환 하게 드러납니다. 후 오백세(後五百歲)에 계를 지키고 복을 닦는 사람들은 다 이렇게 많은 부처님 앞에서 많은 선근(善根)을 심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천 오백년이나 지난 말세에도 어려운 불법을 듣고 「그게 참말이구나.」하고 바른 신심을 내어 바로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이런 걸 가만히 생각하면서 매주 토요일마다 여러분들이 금강경의 어려운 법문을 듣기 위해 벌써 두해가 넘었는데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꾸준하게 나오는 신심을 보고 정말 고맙고 거룩하게 느껴 본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어쩌다가 지방에 가서 법문을 못하게 되면 마음이 참 아픕니다.

문시장구 내지일념 생정신자(聞是章句 乃至一念 生淨信者)니라. 금강경 가운데 어떤 구절을 듣든지 한 생각이라도 청정한 신심을 내는 자가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또 바로 믿는다는 정신(淨信)은 깨끗한 신심을 낸다는 말이니 이 마음에 조금도 부처님 뜻을 빼놓지 않고 다 받아들인 것을 정신(淨信)이라 합니다.

 

原 文 : 須菩提 如來 悉知悉見 是諸衆生 得如是無量福德

 

[解 義] 수보리야! 여래께서는 신령한 마음을 눈으로 다 아시고 다 보시느니라(如來悉知悉見). 이런 중생들이 곧 다생(多生)으로 부처님 처소(處所)에 인연을 맺어서 이 금강경의 네 글귀를 듣고 청정한 신심을 내는 그런 사람을 말합니다. 이 모든 중생들이 곧 말세에 가도 이런 사람이 한 두 사람 있는 것이 아니고 선근중생(善根衆生)들이 인연 있는 곳에 태어나 불법을 받아 지니고 거룩한 신행을 닦는 중생들이 많은데, 이와 같은 중생들이(是諸衆生) 무량한 복덕을 얻는 것을(得如是無量福德) 여래께서 다 아십니다. 금생에 이 중생이 죽어서 어디로 가고 내생에 공부를 많이 하여 그 후세에 가서는 어떻게 과보(果報)를 받는다, 그걸 부처님은 낱낱이 다 아십니다. 내생에는 어떤 사람으로 태어나서 글을 어디서 배우고 어떤 스님을 만나 출가(出家)하고 어디서 발심하여 어떻게 수행한다는 것을 활동사진 필름 들여다보는 것처럼 환히 듣고 보고 하시는데, 그것은 부처님은 사차원·천차원(千次元)·만차원(萬次元)·무한차원(無限次元)의 세계에 들어가서 시간공간을 자유자재하게 초월해 있기 때문에 일일이 지나온 일을 직접 경험하고 있는 본인보다 더 잘 아십니다.

 

原 文 : 何以故 是諸衆生 無不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無法相 亦無非法相

 

[解 義] 이 모든 중생들이 아(我)가 있어서 나라는 생각, 곧 아상(我相) 육체가 나거니 하는 그런 망상인데 이 생각이 앞서 가지고 제가 잘났다는 것이고 육신인 나 본위로 모든 것을 내세워서 남한테 안 지려고 싸우고 칼부림하고 합니다. 금강경을 아는 사람은 아상이 없어서 내가 잘났다는 생각이 없고 동시에 남을 멸시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나라는 생각이 붙어 있으면 무엇이든 조건이 있게 됩니다. 난 공산주의다, 난 자본주의다, 난 기독교다, 난 불교다, 그런 게 붙습니다.

그런데 2500년 뒤에 금강경의 사구게에 발심한 이런 중생들은 아상도 없고 또 인상(人相)도 객관도 없습니다. 인상은 남이라는 소리도 되지만, 사회환경 전체를 뜻하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이 육체가 나인데 육체 밖에 객관을 인정하는 것이 인상 입니다. 중생상(衆生相)은 「시집가 봐야겠다. 자식 낳아야겠고 그러면 돈도 벌어야겠다.」하는 것이 중생상(衆生相)이니 곧 살림살이 입니다. 또 중생들은 그냥 죽는건 생각 안 하고 죽게 되면 다 끝날 것인데 공연히 그 사람과 감정을 맺고 내가 공연히 마음 안 좋게 해주었구나, 이런 것이 모두 죽을 때 후회가 됩니다. 그러니 그거 천년 만년 살 줄 알고 생각하는 것, 오래 살려고 좋은 약이 있으면 그걸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 사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수자상(壽者相)입니다.

이런 법문(法門)을 처음 듣고 비로소 「아 진리가 이런 것이구나, 내가 이런 법문 이제야 만났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게 법상(法相)입니다. 그런 건 진리가 아니고 불법(佛法)만이 정법(正法)이니까 그것만 지켜야겠다는 마음도 없고 불법 믿는다는 생각도 없는 것 그것을 무법상(無法相)이라 합니다. 비법상(非法相)이란 건「잘못된 법이라고도 하고 이것이 법이라고 지키려는 법이 아니다」 「법이 없는 게 참말 법이구나 하는 생각」이라고도 하는데 그러니 또한 법 아닌 것, 잘못 생각하는 것도 그릇된 법이라는 생각도 없는 것을 무비법상(無非法相)이라고 합니다.

후오백세에 계를 지키고 복을 닦는 이가 금강경의 네 글귀를 듣고 깨끗한 신심을 낸 사람은 이렇게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의 이 네 상(四相)과 「법이란 생각」(法相) 「그릇된 법이란 생각」(非法相)이 없기 때문에 한량없는 복덕을 짓는다는 뜻입니다.

 

原 文 : 何以故 是諸衆生 若心取相 卽爲着我人衆生壽者

 

[解 義] 근본적으로 마음에 지킬 것이 있다면, 모든 중생들이 마음 가운데 무언가 하나 고집하는 것이 있다면, 모두 마음에 간직하는 게 있다면(若心取相) 아상, 곧 나라는 생각에 끄달리게 되고 따라서 사상에 끄달리게 되는 까닭이니, 그렇게 되면 사상이 따라오게 되므로 중생을 면할 수 없게 되고 따라서 금강경의 이런 글귀를 듣고 보더라도 청정한 신심을 낼 수 없습니다. 사상이 다 없어져서 조건 없는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으로 중생을 위해 봉사해야만 한량없는 복만 짓고 가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마음속에 집착이 있고 선택이 있으면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걸려서 결국은 육체의 속박을 벗어나지 못하고 생사의 굴레를 뒤집어쓴 중생에 떨어지며, 그러다 보면 지옥(地獄)·아귀(餓鬼)·축생(畜生)의 삼악도(三惡道)에 들어가서 한량없는 고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卽着我人衆生壽者).

 

原 文 : 何以故 若取法相 卽着我人衆生壽者 若取非法相 卽着我人衆生壽者 是故不應取法 不應取非法

 

[解 義] 또 마음속에 이것이 참다운 진리다, 이것이 바른 진리고 정법(正法)이란 생각을 가져도 안 됩니다. 불법도 법입니다. 「불법, 그게 옳구나.」하는 생각을 하면 불법에 이끌리는 생각이 있으니 그것도 안 됩니다. 결과적으로 불법과 멀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불법이 있고 그렇지 않은 게 있고 그러다 보니 사상에 이끌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가령 어느 사람 미워하는 생각을 내가 내버렸다 하더라도(若取法相) 「나는 분함을 내버렸다」하는 생각 그것이 아(我)가 되어 거기에 대한 중생상이 생기고 수자상이 따라오게 됩니다.(卽着我人衆生壽者)

법 아니란 생각, 그릇된 법이라는 생각이 마음에 있어도 역시 비법이란 생각을 일으킨 내가 있고 그렇지 않은 남이 있고 하여 사상이 있게 되는 때문에 그릇된 법이란 생각도 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저런 것은 그릇된 법이다」하는 생각이 있으면(若取非法相) 상대적으로 옳은 법이 있고 옳은 법이라고 생각하는 내가 있고 남이 있게 되어 사상에 떨어집니다.(卽着我人衆生 壽者)

그러므로 중생을 면하고 생사를 벗어나려면 그래서 부처가 되어 우주의 주인공(主人公)이 되려면 정법도 집착하지 말고 그른 법에도 이끌리지 말아야 합니다. 불법이 아무리 좋다고 하지만 불법에 취하지도 말고 기억하지도 말아야 하며 정법이 아니라는 생각 그릇된 법에 취하지 말아야 합니다. 불법까지도 초월하는데 그밖에 불법 아닌 것을 취하지 말아야 할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不應取法 不應取非法)

어떻게 하든지 좀 더 오래 살려고, 한 시간이라도 더 살아 보려고, 금방 죽을 것은 모르고 「백년은 살겠지」 안심하고는 허둥지둥(貪慾)으로 온갖 죄를 짓고 사는 것이 중생들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하지 말고「내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 이미 사형언도(死刑言渡)를 받아 놓았으니 그 사형이 언제 집행(執行)될는지 모른다. 오늘 밤중에 갈는지 내일 새벽에 갈는지 내일 낮에 갈는지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고 될 수 있는 대로 없는 사람 살려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게 선근(善根)입니다.

부처님께 이런 법문 듣고 이런 선근(善根)심어서 이제 아상만 없애면 그 밑에 세 가지 상(相)은 저절로 다 없어집니다. <나>라는 생각만 없으면 남보고 남이라 하는 생각도 없게 되고 아무 생각 없이 대하니 중생이란 생각도 없어집니다. 이 몸이 <나>라 하니까 마음에 의·식·주가 필요하지 마음은 밥도 옷도 필요 없고, 남편도 아들딸도 필요 없고 그런 이 <나>는 말하는 이 마음뿐입니다. 그러니 내가 이런 법문을 듣고 확실히 알아들으면 벌써 나란 생각, 곧 아상이 없어집니다. 이것이 여러 백천억 부처님을 섬기다 보니 「아 육체가 내가 아니구나. 이 말하고 말 듣는 마음자리가 바로 나구나 !」하고 깨달아지고 하는 그게 선근입니다. 그래서 계를 지키고 또 중생의 업을 안 만들려고 좋은 일은 다 하는데 계 지키는 것만 해도 큰 복이 아니면 안 됩니다. 그런데 그 위에 착한 일 또 다 합니다. 부처님 법 만나 법문 듣고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없어져야 그런 사람이 됩니다.

 

原 文 : 以是義故 如來常說 汝等比丘 知我說法 如筏喩者 法尙應捨 何況非法

 

[解 義] 이런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以是義故) 여래께서 항상 말하기를(如來常說) 「너희들 비구·비구니나 선남선녀(汝等比丘)들은 내가 설명한 법(知我說法)이 뗏목에 비유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줄을 알아야 한다(如筏喩者)」 고 하셨는데 이것은 불법도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고 불법 자체가 인생의 목표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강물 건너는데 떼를 많이 사용했습니다. 큰 나무를 연쇄적으로 연결을 시켜서 떼를 만들어 가지고 강을 건너갔습니다. 그러나 쇠로 좋게 만든 요사이의 큰 배에 비유해도 좋고 군함이나 큰 기선으로 봐도 됩니다. 하여간 강은 그 폭이 넓어서 헤엄쳐 건너갈 수 없고 꼭 건너는 가야겠고 하니 배를 타는 것입니다. 그런데 배는 강을 다 건너고 나서까지 배를 짊어지고 육지를 다닐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배가 아무리 고마워도 강 건너 저 언덕에 왔으면 배는 놔두고 가야 합니다. 배 타는 게 목적이 아니고 강을 건너는 것이 목적이고 집에 가는 게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서너 살 먹은 애기를 앉혀 놓고 밝은 달밤에 「저 달 좀 봐라」하며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켜 보이면 어린아이들은 달을 보지 못하고 엄마 손가락만 들여다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49년 설법은 네 마음 깨치라고 목이 터져라 하고 일러 줬는데도 그 목소리만 따라 다니며 「아, 깨쳐라, 그 소리구나!」 그러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말에 끌려 다니는 것이 마치 소가 코에 끌려 산이나 들이나 끄는 대로 가듯이 말에 끌려 다니기만 하니 한심한 노릇입니다. 이 자식 저 달을 볼 것이지 왜 내 손가락만 쳐다보느냐고 때려 줘봐야 울기만 하지 달을 볼 생각은 못 냅니다. 엿을 주며 달래 봐도 「저기, 저기」 하는 소리밖엔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길을 말로 가리킨 그것, 곧 팔만대장경에 있는 불법도 역시 남겨 두어 후손에게 전해 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이미 깨쳤다 해도 후대에 모르는 사람에게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경에서 실제로 깨치는 사람도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경전의 말과 글은 달 가리키는 손가락의 역할을 하는 정도일 뿐, 실제의 달 자체는 아니며, 강을 건너는 뗏목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고 경이고 법일 뿐, 저 언덕의 목적지는 마음을 깨치는 데 있습니다.

불법인 정법도 버려야 하는데(法尙應捨) 어찌 하물며 법 아닌 것, 무당 법, 삿된 법, 그릇된 법, 그걸 의지해서 점을 친다든지 관상보고 사주보고 손금보고 하는 사람이 무슨 불교 하는 사람이겠느냐? 또한 이 세상은 모두 허무한 존재이고 하나의 물거품이고 이것이 꿈인데 이것을 어찌 참말이라 하고 육신이 내라고 고집하겠느냐?(何況非法)

이와 같은 그릇된 법, 불법이 아닌 법들은 마땅히 다 버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 육체는 죽어있고 살아있다면 마음이 살아있는 것입니다. 몸뚱이가 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육체가 확실히 나라고 그렇게 믿고 있는 일반적인 중생들은 입은 옷을 주지 않으면 네 목숨을 죽이겠다고 위협 당했을 때, 아무리 대낮이라도 종로 네거리에서 옷을 훌쩍 벗어 줍니다. 반대로 몸뚱이가 내가 아닌 걸 확실히 아는 사람은 몸뚱이 벗어라 하면 몸뚱이 내버리고 마음만 갑니다. 옷 벗어 버리듯 하게 됩니다.

이럴 때 몸뚱이를 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릇된 법이고 몸뚱이는 옷이고 마음이 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법(正法)인데 마음을 깨치고 나면 이 두 가지를 다 버려야 합니다. 대승불법은 계를 지킬 필요도 없고 고기도 막 먹고 술도 계집질도 보리반야에 방해되지 않으니 삼가할 것도 없다는 막행막식주의(莫行莫食主義)의 그릇된 생각은 비법(非法)이고 계를 지키고 음행도 술도 하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해서 육신이 내가 아니라 마음이 나라는 진리를 체득하고 깨달음을 성취해야겠다는 생각은 정법인데, 우리가 마음을 일단 깨치고 나서는 계를 지니고 마음을 닦겠다는 정법도 버려야 하는데, 하물며 아무렇게나 막행막식해도 관계없다는 그릇된 법은 더 말해 볼 것도 없이 버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說 義]

●막행막식은 전도된 비법

계율(戒律)에 대한 말이 나왔으니 유감스럽지만 요사이도 더러 있는 우리 주위의 일로서 그대로 지나칠 수 없는 큰 사건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대승불법은 마음만 깨치면 일체에 걸림 없고 아무런 행동을 다 해도 파계가 아니고 무방하다는 생각입니다.

우리나라에 해방 전만 해도 이런 식으로 견성한 도인이 많았습니다. 모두 고기 먹고 술 마시고는 물 마시나 술 마시나 뭐가 다르냐고 하면서 술기운에 화두(話頭)가 더 잘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술기운에 취한 기분이지 공부가 잘되는 것은 아닙니다. 불교 공부뿐 아니라 어떤 학문이나 과학이나 육체수련에 이르기까지 술기운으로 인해서 더욱 좋은 효과가 나온다는 말은 그야말로 언어도단(言語道斷)입니다. 특히 참선 정진을 어떤 술이나 약품에 취한 마취된 기분으로 생각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또 그들은 야채를 먹으나 고기를 먹으나 한가지고 무엇을 먹든지 참선만 하면 그만이라고 합니다. 도둑질을 하든지 음란(淫亂)한 성생활을 하든지 대보리(大菩提)에 거리낌이 없다고 하면서 마구잡이로 막행막식(莫行莫食)을 합니다.

이런 풍습(風習)이 오늘까지 영향이 미쳐서 일대문제(一大問題)가 되고 있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불교를 거꾸로 해석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배운 금강경의 뜻으로 보더라도 보살은 모든 것을 중생을 위해 보시하고 제도해야 할 것인데 남의 것 도둑질 하고 음행하라고 한 데는 없습니다. 남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 대승불교의 정신인데 이것을 편의상 남의 것을 훔친다는 것은 자기를 위해 남을 희생시키는 것으로 불교의 정신과는 정반대되는 행위입니다. 소승불교의 이기주의(利己主義)는 차라리 남을 괴롭히는 것은 아니므로 그 보다는 났습니다. 또 불교에서는 윤회(輪廻)하는 것을 절대 인정해야 하므로 금수라 하더라도 그것을 다 형제동포와 같이 보고 자비심으로 이끌어 제도해야 하는 수행자로서 육식을 하고 음행을 하는 것은 자비의 종자를 끊고 번뇌를 가중하는 전도된 행동일 뿐입니다.

 

●아란존자의 위기련

그래서 우리 승려는 비구나 비구니나 독신수행에 알맞은 생활규법을 마련해 가지고 그대로 살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비구나 비구니는 혼자 다니지 못합니다. 둘도 안 되고 꼭 셋씩 다니라는 것입니다. 혼자 다니다 보면 불량한 사람 만나면 유혹도 되고 겁탈당할 염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둘이 다녀도 서로 뜻이 야합하기 쉽고 또 망신을 당해 놓고는 입을 다물고 시치미를 뗄 수 있지만, 셋이 되면 서로 의사가 맞기도 힘들 뿐 아니라 일을 당했더라도 참회하지 않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님네는 아무리 조그만 암자 움막에 살더라도 세 사람 이상이 살아야지 둘도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이 살면 뜻이 맞고 파계를 하고도 서로 감추게 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아란존자가 어디 가셨다가 일행(一行)스님 두 분은 딴 데 볼일로 가시고 아란존자 혼자 오게 됐는데, 오시다가 목이 말라서 샘가에 앉아 있는 처녀에게 물을 얻어먹게 됐습니다. 물을 떠주던 처녀가 아란존자를 뵈오니 풍모(風貌)가 너무 잘생긴데 아주 반했습니다. 그 당시 부처님 다음으로 아란존자가 잘 생기셨다고 합니다. 그 처녀는 상사병(相思病)이 나다시피 되어 그 어머니에게 아란존자에게 시집을 안 보내 주면 죽고 말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 되는 이는 주문(呪文)을 외워서 요즘 같으면 최면과 같은 신통력을 가진 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문을 외워가지고 아란존자를 집으로 되돌아오도록 했습니다. 수양이 높은 사람은 수양이 낮은 사람에게 정신력으로 에너지의 압력을 가하여 강제체면을 걸어가지고 자유로 그 사람을 부립니다. 딸을 위해 주문에 능한 그 여인은 주문으로 아란존자로 하여금 그 집으로 들어오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딸 방으로 그를 인도했고 딸과 단 둘이만 있도록 했는데, 그때 아란존자는 정신은 멀쩡한데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기는 결사적으로 딴 데로 간다고 간 것이 그 처녀의 방으로 들어오게 됐고 아란존자는 이제 속옷 하나만을 입고 겁탈을 당하기 일보직전입니다.

그때 부처님은 아란존자가 파계의 위기에 직면해 있음을 보시고 신통을 나타내시어 허공에 석가모니 부처님 한분을 화신(化身)으로 나투셨습니다. 그리고는 대중이 다 볼 수 있도록 하시고 능엄주(楞嚴呪)라는 천수대다라니의 일곱배나 되는 주문을 외웠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문수보살(文殊菩薩)을 시켜서 그대가 빨리 이 주문을 받아 가지고 가서 외도(外道)들이 하는 주문을 풀어 주고 아란존자와 처녀를 함께 그 상태 그대로 데리고 오라 하셨습니다. 문수보살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고 가서 주문을 외우니 강제최면(强制催眠)은 없어지고 눈 깜짝할 사이에 대중이 수천명 있는 데서 옷을 벗고 있는 상태로 나타났습니다. 아란존자는 부처님 앞이므로 부끄럽기 한이 없어 얼굴이 새빨개졌고 고개를 들지도 못합니다. 그리고 아란존자는 울면서 부처님께 대법문(大法門)을 여쭈어 묻게 됩니다.

「한량없는 우리의 선각자(先覺者)이신 부처님들께서는 처음에 어떻게 발심을 하셔서 아무 사고 없이 성불하시고 끝까지 어떻게 가시었습니까? 저는 힘이 약해서 중이 되기는 했지만 문수보살님이 아니시면 오늘 틀림없이 파계를 당할 뻔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정직한 마음으로 내가 묻는 대로 틀림없이 대답하라.」 「부처님께서 저의 마음을 환히 보고 계신데 무슨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이렇게 해서 능엄경의 법문이 시작된 것인데, 그 내용은 결국「네가 무엇이냐? 아란존자 네가 네 정신을 못차려서 이런 짓을 한 것이 아니냐? 네 정신을 똑바로 차렸으면 부처님께서라 해도 안 될 터인데 네가 무엇인지 그것을 모르니 그런 변을 당한 것이 아니겠느냐? 네 마음이 어디 있는지 그것을 먼저 밝히도록 하라. 네 마음이 어디에 있느냐? 안도 밖도 아닌 그 중간쯤에 있느냐, 가슴에 있느냐, 눈에 있느냐?」라고 따지다가 나중에 마음이 무엇이냐는 데까지 들어갑니다. 「네가 지금 속았다고 생각하는 그 주체가 무엇이냐, 무엇이 그렇게 속았다고 생각하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에 와서 아란존자는 눈물을 흘리면서, 「시방제불(時方諸佛)이 어떻게 발심해서 아무런 사고 없이 앉은 자리에서 부처가 되었습니까?」하고 파고 묻습니다. 그런데 부처님 답변하신 말씀도 결국「그렇게 파고 묻는 그것이 무엇이냐, 그것을 먼저 알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확실히 모르기 때문에 그런 강제최면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옛날 요술한다는 사람들이 인생의 근본을 모르기 때문에 육체본의 생각으로 살기 때문에 그런 삿된 짓을 합니다. 이런 강제최면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현재 일본만 해도 천명을 헤아릴 정도고 영국 미국 같은 나라에도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걸 무기로 해서 별짓을 다 할 수 있습니다. 그 수양이 물론 도저한 경지에 이르러야 합니다. 그러나 아란존자는 속는 줄을 알고 있었습니다. 속는 내가 무엇인가, 그것을 알지 못해서 힘이 약했을 뿐이며, 또 부처님께서 그 자리에서 밝히신 바 그 처녀와 아란존자는 전생에 다생겁래로 부부의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처녀도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그 자리에서 출가를 했다고 합니다.

아란존자가 여인에게 겁탈당할 뻔했을 때도 부처님은 그것을 구해 주셨을 뿐 아니라 음행과 살생계를 계 가운데 제일 무거운 계로 삼았음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계를 가지고 수행을 해야 하는데, 계에도 소승계(小乘戒)·대승계(大乘戒)의 구별이 있습니다. 소승은 기초지식을 가르치는 것이므로 고기라도 모르고 먹으면 허물없다고 말합니다. 정 죽게 됐거든 고기 먹어라, 많이도 먹지 말고 죽을 목숨만 건져 가지고 양치질하든지 참회를 해서 죄를 소멸해 가지고 수행을 열심히 하라는 내용이 소승경전에 더러 쓰여 있습니다.

그러니 동남아시아 비구스님들은 여자를 곁에 못 오게 합니다. 사진 좀 찍자고 해도 남자 처사를 불러 놓고 처사 앞에 여성을 앉게 하고서야 찍지, 직접 비구승 앞에다 바로 여성을 앉혀 놓고 사진 찍으면 그건 비구승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동남아시아 스님들은 한국·중국·일본 승려들은 비구가 아니라고 그럽니다.

 

●계(戒)를 가지고 닦는 복

계에 대해서는 부처님께서 열반하실 때도 유언(遺言)으로 훈계하신 일까지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 정말 부처님께서는 만사를 잘 일러 주시는 분입니다. 「부처님께서 세상을 떠나시고 나면 누구한테 의지해서 도를 받겠습니까?」 여쭈니 「네가 계를 지키면 내가 열반하고 천년 만년 지나도 부처님 옆에 있는 것이고 계를 파하면 내 곁에 있어도 부처님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다. 계가 생명이니 성불하는 데도 그게 생명이고 또 복을 짓는 데도 그게 생명이니 계율(戒律)을 법사로 삼고 계를 따라 지키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계를 가지고 복을 짓는다는 말이 보통 뜻이 아닙니다. 계 안 가지고 복을 질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계를 갖는 복에 비교해 볼 수도 없는 복입니다. 우리 스님들이 참말로 진실하게 중노릇 잘하는 율사(律師)가 하루 짓는 복이란 전 세계 인구들이 평생을 짓는 그 복을 다 모아도 억만분의 일도 못 따라갑니다.

 

●나다 남이다 없어져야

계율 지키는 것이 어렵고 거룩한 일이지만 그러나 불법이 계를 지키는 그것만 가지고 다 하는 것은 아닙니다. 계를 지키는 것은 최소한도 지켜야 할 기본과제이고 성불하는 최초의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치 강을 건너기 위해 배를 타야하고 배를 타기 위해서는 강가의 나루터에 나가야 하는데 계를 지키는 것은 나루터에 가기위한 신들매를 하고 떠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배를 타고 싶어도 나루터에는 가지 않고 육지 한 복판에서 잠이나 자고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루터에 도착해서는 서슴지 말고 배를 타야 합니다. 만일 나루터에까지 갔어도 막상 배를 타려 하니 육지에 대한 미련은 없지만 물길이 조심이 되어 주저하기만 하고 배를 타지 못 한다면 이런 사람은 강 건너 저 언덕에는 건너갈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배를 타는 것은 다름 아닌 마음을 깨쳐서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을 없애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나니 남이니 하는 생각 없이 아무 조건 없는 마음으로 머무름 없는 경지에서 모든 중생을 위해 보시하고 일체 중생의 제도를 위해 지계(持戒)하고 중생들의 안락을 위해 인욕(忍辱)하고 더욱 많은 중생을 깨닫게 하기 위해 정진·선정·지혜(精進·禪定·智慧波羅蜜)의 보살행(菩薩行)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상(我相)이 없는 마음에서 계를 지키고 복을 닦아야만 정말 남을 위해서는 큰 복을 지을 수 있고 참된 공덕을 짓습니다. 아상(我相)이 없어지면 참사람 진인(眞人), 좋은 사람이 되어 아무것도 적대시(敵對視)하지 않게 되므로 누구와도 잘 어울립니다. 미친 사람하고도 어울리고 잘 놉니다.

서울 여자 한 사람이 해방 이십년 전부터 공부한다고 하다가 미쳐서 순사고 서장이고 만나면 이 새끼 저 새끼 하고 일본 욕을 막합니다. 난 그 사람의 그런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람 만나서 웃지도 않고 깍듯이 시치미 떼고 인사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자기의 지난 것을 다 얘기했는데 자기는 전차 기차도 공짜로 타고 다닐 때 운전수가 돈 내라면 「아 이놈의 자식아 네가 그렇게 충성해서 좋을 게 뭐 있냐? 결국 왜놈한테 가는 게 아니냐? 우리 조선사람 좀 공짜 차타는 게 그렇게 배 아프냐?」하고 도리어 호통을 친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일본경찰이 못 잡아 갑니다. 파출소나 경찰서로 데리고 가도 아무한테나 막 욕을 하고 덤벼드니 미친 여자라고 아예 건드리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도 나에게는 하나도 미친 말이나 행동도 안하고 그러는데 요사이는 이제 나이도 많고 그러니 나를 만나면 아무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돈 좀 달라는 표를 합니다. 뭐가 먹고 싶은 모양입니다. 나는 누가 보는데 줄 수도 없고 따라오라고 해서 살짝 뒤로 줍니다. 일년에 두번 세번 그렇게 그 사람이 미친 짓을 하고 그랬습니다.

자꾸 미쳤다고 하면 누구나 미칩니다. 아무리 성한 사람이나 인격자라도 사람 서넛이 짜가지고 그 사람이 미치게 만들려면 일주일 안에 그 사람 미쳐 돌아다닙니다. 인격 있는 사람은 처음엔 억울하다고 야단하지만 나중에는 여럿에게 집니다. 물론 같은 정도의 인격자가 해야 됩니다. 인격이 떨어지는 사람이 그러면 곧이듣지 않습니다. 아내가 하든가 좋은 친구들이 짜고 차차 자기를 의심하게 만들면 미쳐가지고 일어나지도 못하다가 일주일내에 미쳐서 웃고 말도 함부로 합니다. 또 미친 사람을 성한 사람 대하듯 하면 미친 것이 나아집니다. 약을 먹이고 별별 치료를 해도 안 되지만 성한 사람끼리 앉아 그 사람 옳게 대해 주면 그는 성한 사람으로 돌아옵니다.

애초에 <나>란 생각(我相)이 없어 깨끗한 순수한 마음만 튼튼히 가지고 있는 사람은 무슨 소리가 들어와도 거기 흔들리지 않습니다. 「저건 다 바람소리고 물소리다. 이해 타산할 소리 하나도 없다. 사람 지껄이는 소리 역시 다 그렇다.」 이걸 알고 나면 몸뚱이 그것도 내가 아닙니다. 이 몸뚱이는 지금도 자꾸 죽어가는 판이고 언젠가는 어디가나 차에 깔릴는지, 나쁜 사람만나 칼이라도 맞아 넘어질는지 그걸 모릅니다. 어디가나 물에 빠질는지 불에 타서 죽게 될는지, 집이 무너져 자다 죽을는지 누가 알 수 있습니까? 몸뚱이가 나라고 기어이 아끼고 살아봤자 별수 없습니다.

몸을 애착 않고 사건에 내가 관심을 갖는 일이 없이 하면 농사, 장사해도 피로가 안 생깁니다. 그러니 아상 없이 하라. 내가 없으니 내 소유물도 없다. 다 필요하면 누구든지 가져가라. 남의 것은 소유로 인정하지만 나에게는 소유권 행사 없습니다. 물질을 자기 것이라 생각하고 몸뚱이를 저라고 생각하는 불쌍한 사람 어리석은 사람이니 불법(佛法)으로 교화해 주어야 내생에 나와서 악한 마음 안 먹고 법문 잘 듣고 부처님께 인도(引導)됩니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육체가 내가 아니니 나라도 땅도 아들딸도 자기 마누라도 버리고 누구든지 달라면 다 주고 안 간다고 그러면 업어다 주고 그런 식으로 나란 육체를 버리고 모든 지식을 다 버려 버리고 참선이나 불교공부까지 다 버리고 나면 그곳에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정말 텅 빈 그런 경지입니다. 「내 마음 자리가 이런 것이구나.」하고 모든 생각이 없어지면 부처님까지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부처님의 법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나라는 생각 <아상>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릇된 법은 뗏목도 못된다.

내가 처음 도선사에 들어가니 종래에 다니던 신도가 약 칠백 세대쯤 되었는데 모두 다 조상 때부터 이 절에 다녔기 때문에 다니는 것뿐 불교의 뜻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미신적으로 다니는 신도들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도선사에 기도를 해서 아들을 낳았다든지, 산신각에 기도를 해서 복을 받았다든지 자손에 대한 소원을 빌어서 성취했다든지 하는 이들이고 부모의 유언에 따라서 다닌다든지 하는 무당불교에 가까운 신도들이었습니다.

신라 고려 때에는 스님들이 사회의 지도자로서 일반 국민의 불교에 대한 신앙과 교양도 높았으며 국가 사회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왔으니, 불교의 지위와 교통이 거룩했지만, 조선 때에 와서는 죽일 것을 사정 봐서 살려두는 정도의 극한적인 배불정책(排佛政策)으로 말미암아 중은 식은 밥이나 얻어먹는 불교로 되었습니다. 신도들이나 스님이나 수준이 극히 낮아져서 여신도들은 부처님께서 복 준다니 복 좀 타 오려고 절에 가고 스님을 무당 취급해서 그 풍습이 해방 후에까지도 그런 정도였습니다. 쌀 외에는 돈 백원 가지고 와서 아랫목 차지해 가지고 스님들 보고 밥해 오라고 상심부름이나 시키는 불교로 타락했습니다.

그래서 한국불교는 신도정화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나는 도선사에 가면서 먼저 「점도 치지 말라. 사주도 보지 말라. 절에 온다고 택일도 하지 말라. 부처님께서는 사시공양을 하셨으니 불공도 다른 때는 하지 말고 공동으로 함께 하라. 부처님께서 굶어 돌아가신 분 아니니 밥만 자꾸 때 없이 해서 올릴 것이 아니라 제가끔 일심으로 마음으로 참회하라.」고 하며 미신적인 짓을 하지 말라고 했더니 그 칠백세대가 다 떨어져 나가고 한 사람도 안 왔습니다. 그래서 마을에 내려가서 밥을 얻어먹는 정도로 되었는데 요즘은 전혀 새로운 신도들이 일만 칠천 세대로 늘어났고 매월 오백 세대씩 늡니다. 나는 그 뒤에 산신각까지 헐고 신도들의 그릇된 신앙, 곧 비법(非法)을 고쳐 주기 위해 올바른 신앙을 기회 있을 때마다 이야기했고 마음을 깨쳐 생사고뇌를 벗어나야 한다는 불법을 말해 주었고, 마음을 깨치고 나면 부처님의 법문까지도 다 버려야 하는데, 미신·그릇된 법·법 아닌 법을 버려야 한다고 얘기한 보람이 있은 것입니다.

사람은 나면서부터 그 시간부터 죽음의 적에 쫒기고 있습니다. 사람은 개구리이고 죽음은 구렁이입니다. 낮이면 낮, 밤이면 밤마다 찰나도 쉬지 못하고 죽음이란 구렁이에게 쫒깁니다. 자는 시간까지는 죽음의 구렁이에게 쫒기는 개구리의 생활을 하는 것이 우리 중생들의 생입니다. 그것도 한번 죽고 그치는 죽음이 아니고 천당·지옥·축생으로 내생에도 무량겁을 쫒기고 죽고 합니다. 마음을 깨쳐서 육신은 내가 아닌 것을 확인해야 죽음의 쫓김을 면합니다. 이렇게 해서 마음을 깨치면 모든 근심을 여의고 어떤 법에도 걸리지 않습니다. 정법(正法)은 물론 사법(邪法)의 구애를 벗어납니다. 강을 건너서 뗏목을 버리듯 모든 것 다 버리고 사상(四相)이 떨어져 나갑니다.

 

●말하고 듣는 그것이 주인공

이상에서 말씀하신 부처님의 뜻을 다음과 같이 간추려 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40년 동안 하루도 쉬지 말고 법문하는 것을 따라다니며 배우고 듣고 애쓰는 제자가 많았지만 내 말에만 집착하면 안 된다. 내가 너희한테 가르치고 싶은 것은 너희들이 귀를 기울이고 가만히 듣고 「과연 그렇구나, 거기 들어가면 뭐가 있긴 있겠는데 알듯 알듯 하구나.」하고 생각하는 놈, 생각할 줄 아는 그게 바로 무엇인가? 그걸 알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내가 뭔지 그걸 알고 앉아서 법문을 들으라는 것이니, 내가 무엇인지 자신도 모르고 날 따라다니면서 배워봤자 그것은 한갓 바지 껍데기만 따라다닌 게 아니겠느냐? 따라서 내가 너희한테 법문을 한 것은 무엇을 깨닫게 해 주려고 한 것이지 말이나 글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니, 「그 무엇인가.」 그것 하나, 이름 성도 없는 것, 모양도 없고 빛깔도 없는 그것, 앉아 듣는 그것이 너의 마음인데, 내 이야기를 이렇게 듣고 있으면서 알지 못하겠느냐?

무량겁으로 너희가 육체를 <나>라고 착각하고 살아 왔으니 그래서 마음이 <나>라는 소리를 그렇게 못 알아듣느냐? 어째서 껍데기인 몸뚱이만을 알고 열매인 주인공을 모르느냐? 몸뚱이 위에 걸친 옷은 칼로 아무리 찢어봐야 아무 감각이 없지만, 몸뚱이는 바늘로 살가죽 어디에고 조금만 찌르더라도 곧 아픔을 느끼듯이, 몸뚱이는 너의 옷이고 껍데기며 참 너는 너의 마음이다. 몸뚱이는 하나의 기계이고 물질의 조직에 불과한데 그것을 자꾸 <나>라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이 말을 듣고도 말똥말똥 무슨 소린가 그렇긴 한데 하면서도 정말 마음은 모르는 것이다. 마음이 어느 것인지 알아보려고 들면 가령 또 이것이 객관세계 어디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차라리 한 십년 찾아서 땅속이든 어디든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마음 이 놈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와 말하고 말 듣고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관념 때문에 모르는 것이다. 그러니 그 생각만 놓아 버리면 모르겠다고 생각하던 그 주체가 드러날 것이다.

아주 천하에 제일 쉬운 일이다. 쉽기로 말하면 세수하다 코 만지기보다 마음 깨치기가 더 쉽고 낯 씻고 코 만지려면 시간이나 걸리지만 이 마음은 시간 걸릴 것도 없다. 말하는 이놈이고 듣고 있는 마음 그것이기 때문에 너무 쉬운 때문에 알려고 하는 생각이 도리어 장애가 된다. 저 말 듣지 말아야겠다고 하니 모르는 것이다. 그러니 이걸 가만히 생각하노라면 피를 토하다 죽을 일이다. 지금 이 몸뚱이는 오늘밤에 내 버릴지도 모르는데 이것만 소중히 생각해서 세계사람 다 잡아 먹고 저만 살려는 것이다. 그러면 왜 그렇게 깨치지 못하느냐? 깨치고 싶어 하는 생각이 있어서 늘 객관시(客觀視)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심지어는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가슴에 있는지 머릿속에 있는지 모르겠다.」 이런 망상을 다하는데 이런 생각 저런 생각 다 버리라.』고 하시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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