依法出生分 第八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若人(약인)이 滿三千大千世界七寶(만삼천대천세계칠보)하야 以用布施(이용보시)하면 是人(시인)의 所得福德(소득복덕)이 寧爲多不(영위다부)아 須菩提言(수보리언)하사대 甚多(심다)니다 世尊(세존)하 何以故(하이고)오 是福德(시복덕)은 卽非福德性(즉비복덕성)일새 是故(시고)로 如來說福德多(여래설복덕다)니이다 若不有人(약부유인)하야 於此經中(어차경중)에 受持乃至四句偈等(수지사구게등)하야 爲他人說(위타인설)하면 其福(기복)이 勝彼(승피)니라 何以故(하이고)오 須菩提(수보리)야 一切諸佛(일체제불)과 及諸佛(급제불)의 阿多羅三邈三菩提法(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이 皆從此經出(개종차경출)일새니라 須菩提(수보리)야 所謂佛法者(소위불법자)는 卽非佛法(즉비불법)이니라.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만일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를 가득 채워서 보시했다면, 이 사람이 얻는 복덕은 얼마나 많겠느냐?』

수보리가 여쭈었다. 『아주 많사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 하오면 이 복덕은 곧 복덕의 성품이 아니기 때문이오니 그래서 여래께서 복덕이 많다고 하신 것이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경 가운데 네 글귀라도 받아 지니고 남을 위해 말해 준다면 그 복이 저것보다 더 뛰어나리라. 왜 그러냐 하면 수보리야! 모든 부처와 모든 부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이 다 이 경으로부터 나온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이른바 불법이란 곧 불법이 아니니라.』

 

 

第八 依法出生分---모든 것 여기에서 나오다

 

 

[科 解]

의법출생분(依法出生分)의 의법이란 법에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흔히 법, 법 하는데 세상에서도 법은 국회에 한 번 통과되면 다시는 변할 수 없는 성질을 가지고 있고 만인이 누구나 다 같이 지켜야 합니다. 적어도 국회에서 다시 개정통과(改正通過)하기 전에는 변할 수 없다는 뜻을 가집니다. 그러나 이런 법은 정당(政黨)이 한 번 바뀌면 변하게 되고 국체(國體)가 바뀌면 180도로 뒤집히기도 합니다. 우주만유(宇宙萬有)의 모든 존재가 전자와 에네르기가 변하는 데 따라서 물리적(物理的)·화학적(化學的)으로 다 변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법은 참된 의미의 법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알 줄 아는 알음알이의 힘은 어제도 오늘도 그대로고 24시간 안 변하는 영원불변의 존재입니다. 변하는 법칙은 찰나(刹那)로 변하는 것이니 잠시라도 1분 1초 동안이라도 안 변하는 것은 물질의 법칙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아는 능력이 있는 이 마음만은 모든 욕심을 초월했고 이해관계(利害關係)가 없는 자성(自性)자리로서 법 중의 법이란 뜻으로 법왕(法王)이라고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 마음의 작용(作用)은 미워하고 좋아하고 생각하고 연구하고 모든 사고활동을 다 하지만 그 마음의 그 본체(本體)인 자성(自性)은 불변합니다. 그래서 이 마음의 작용은 착하려면 요순(堯舜)으로도 되고 악하려면 도척(盜?)으로도 되고 자기 마음먹기에 달렸지만 그러나 이렇게 변하는 작용은 물의 파도(波濤)와 같고 마음의 본체는 물의 수분(水分)처럼 변동이 없습니다. 수분은 얼음도 되고, 안개도 되고, 이슬도 되고, 파도도 되어 천만가지로 변하지만 물의 수분은 불변입니다.

이렇게 알 줄 아는 마음자리 그것이 법입니다. 말하기 전, 생각하기 이전의 자리, 오롯한 자기 정신, 이것이 우주의 진리고 가장 거룩한 자리이며 이것만이 법입니다. 그러니 법철학(法哲學)을 해도 부처님 법의 원리를 알면 다른 법은 그 지말(枝末)의 한 마디만 들어도 그 근본까지 다 알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성자리 그 근본만 깨달아 가지고 가만히 지키고만 있으면 그것은 죽다가 못 죽은 반 송장에 불과한 소승(小乘)일 뿐입니다. 그래서 무소부지(無所不知)로 아는 것은 모르는 것 없이 다 되지만 현실적으로는 복이 없어서 마음대로 잘 안되어 무소불능(無所不能)은 안 됩니다. 그래서 완전한 대성인(大聖人), 완전한 인격자(人格者)가 되기 위해서는 마음의 본성(本性) 자리를 깨달아 가지고도 중생을 위해 봉사(奉仕)해야 되는 것이니 계(戒)를 가지고 육도만행(六度萬行)을 해야 합니다. 만일 소승모양 자성자리만 지키고 가만히 들어앉아 있기만 하면 계행(戒行)을 가질 필요도 없고 보살만행(菩薩萬行)을 닦을 필요도 없으며 이 마음이 까딱하지도 않고 적멸(寂滅)만 지키게 됩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나와서 중생을 위해 온갖 괴로움 다 건져 주고 마음자리를 일깨워 주고 발심(發心)해서 보살행을 하고 성불(成佛)하도록 까지 이끌어 지도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남 하는 것 나는 안하고 남 먹는 것 나는 다 안 먹으면서 오직 남만을 위해 일해 주고 돈도 벌어 주고 약도 사서 주고 병도 치료해 주고 법문도 잘 가르쳐 주고 좋은 사람이 되도록 인도할 뿐입니다. 남 하는 것 다 하고 먹을 것 다 먹으며 세상 생긴 대로 따라 하기만 해서는 세상에 나온 뜻도 없어지고 아무것도 안됩니다.

의법출생분(依法出生分)이란 「이렇게 법에 의지해서 마음을 내라, 출생(出生)해라, 사업을 해라, 중생을 제도해라.」 그런 뜻입니다. 이런 내용을 모르고 이 네 글자만 가지고는 백 년을 읽어도 무슨 말인지 알기 힘듭니다. 이런 진실한 자성에 의지해서 참선을 한다든지, 보리심(菩提心)을 발했다든지, 사상이 바뀌어졌다든지 하는 것을 말합니다. 보리심을 발했다는 것을 요새 말로 풀어서 말하자면 범부가 육체 때문에 탐진치(貪瞋痴)에 얽매어 밥 세 그릇 먹으려고 싸우고 죄를 짓기만 했는데, 이제 알고 보니 「인생이란 그게 아니고 내 마음을 닦아야 하겠구나, 육체생활이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하여 물 불 헤아리지 않고 온갖 욕심으로만 살아 왔는데 그것은 다 헛된 것이고 주객(主客)이 전도(顚倒)된 생활이었구나, 물질본위의 생활, 객관 현상에 구속된 생활을 버리고 오직 마음의 성품을 찾고 온 중생을 위해서 보살행(菩薩行)을 해야겠구나.」하고 참다운 인생관·우주관에 입각한 사상의 전환(轉換)이 이루어졌다는 말이 됩니다.

「일체의 모든 부처님과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이 다 이 금강경 가운데서 나온다(一切諸佛 及諸佛阿?多羅三?三菩提法 皆從此經出)」는 경문이 이절의 대문(大文) 가운데 있으므로 「이 법에 의지해서 모든 법이 나온다.」는 뜻으로 의법출생분(依法出生分)이라 한 것입니다. 이 경은 곧 마음 깨치는 법을 말씀해 놓은 경중의 경인데 부처님도 다름 아닌 마음을 깨치신 분이므로 부처님도 이 경에서 나온다 한 것이고 또 깨달은 마음의 경계가 곧 이 금강경이며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도 결국은 이 경에 의지해서 나온 부처님 마음이므로 모든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도 이 경에서 나온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금강경도 마음이고 부처님도 마음이며 부처님의 깨달은 법도 다름 아닌 마음이니, 알고 보면 셋이 다 같은 한 덩어리입니다. 그러므로 이 경으로부터 나왔다고 하는 것도 말로 하자니까 그렇지 실제로는 나온 것도 아니고 의지한 것도 아닙니다. 나오고 들어가는 자리가 아니고 얻을 것도 없으며 설명할 수도 없으며 글로 옮길 수도 없는 것이 마음이고 부처님의 깨달음이기 때문입니다.

 

原 文 : 須菩提 於意云何 若人滿三千大千世界 七寶 以用布施 是人 所得福德 寧爲多不

 

[解 義] 『수보리야! 네 마음에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만일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의 가득 찬 칠보(七寶)를 가지고 남을 도와주면 그 복이 얼마나 많겠느냐?』하고 부처님께서 물으십니다. 삼천대천세계란 말이 여기 나오는데 10년 20년 절에 다닌 신도 보살님들에게 그 뜻을 물어보니 모른다는 것입니다. 들으면 인연된다 하여 부지런히 다니며 듣기만 들었지 많이들은 말이기는 한데 그 뜻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애초에 알려는 생각도 안합니다.

삼천대천세계란 말은 불교 용어 가운데 가장 많이 쓰는 기본용어인데 삼천대천은 하나의 숫자의 단위입니다. 그 당시 인도에는 소천(小天)·중천(中天)·대천(大天)이라 했는데 우리가 백· 천·억·조·경 하듯이 고대 인도 사람들의 숫자의 단위입니다. 소천이라 함은 하나에서 백 천까지 올라간 것, 천이 하나다. 천쪼가리 모아 놨다, 금을 천개 모아 놓았다, 그런 뜻이니 곧 천이란 말입니다. 중천이란 소천을 천배 한 것, 곧 백만을 말하며 대천이 중천을 천배한 것이니 백만을 천배하면 십억을 가리키는 바, 대천이란 천 가운데 마지막 큰 수란 뜻입니다. 중국은 단·십·백·천하여 만 이상이 되면 배로 나가지만 만 까지는 열배로 올라가는 십진법(十進法)입니다. 하나를 열하면 십이라 하고 열을 열하면 백, 백을 열하면 천, 천을 열하면 만이 되는 것이 십진입니다. 만에서부터 억까지는 만으로 올라갑니다. 여기서 부터는 배수로 올라가서 억을 억하면 조고, 조를 조하면 경이고 이렇게 중국에는 24자의 24개 단위가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천문학이나 자연과학이 발달한 때가 아니니 그 이상의 숫자도 필요 없었을 것입니다.

인도에서는 이런 수의 단위가 중국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예컨대 아승지(阿僧祗)란 무수(無數)란 뜻인데 수가 하도 많으니 무수하다는 소리가 아니고 이 무수에도 한개의 숫자입니다. 그러면 이 숫자의 단위가 몇자나 되느냐 하면 중국이 24자 뿐인데 대해 인도는 220자가 배수로 올라갑니다. 나중에는 불가설 불가설 불찰미진수(不可說不可說佛刹微塵數)라는 숫자가 있는데 이 지구를 조직하고 있는 전자 수 만큼이나 될 겁니다. 이 지구를 조직한 전자알을 실제로 헤아려 센다면 얼마나 많을 것인가. 불가사의할 뿐입니다. 그 숫자의 단위들이 하도 복잡하여 나한과 보살들이나 환히 알고 있을 정도입니다.

인도의 수학 가운데는 영산법(影算法)이라고 부르는 수학이 있습니다. 그림자 영(影)자와 계산한다는 산(算)짜를 써서 영산법(影算法)이라 합니다. 큰 밭에 콩을 심어 놓고 이 밭에서 나올 콩이 몇 알이나 될까 물으면 영산법하는 사람들은 콩밭을 가만히 들여다보고는 몇섬 몇말 몇되 몇홉 몇직 하고 다섯개 남는 것까지 계산해 낸다고 하는데 실제로 나중에 보면 다섯알이 남는다고 하여 그렇게 신통하게 안다는 말이 전해 옵니다. 우리가 어릴 때는 손가락을 보고 하나·둘·셋 하다가는 그것도 잃어버리고 다섯조차도 못 셉니다. 그러나 어른은 세어보지 않아도 대번에 다섯개는 압니다. 따져보고 아는 게 아닙니다. 그렇듯이 마음에 망상이 없는 때는 고단위의 숫자가 탁 보입니다. 삼천대천세계라면 이런 지구덩이가 십억개라는 뜻입니다. 삼천이란 내내 삼자승했다 하는 소리인데 천을 삼자승한 것이 십억이므로 그런 지구덩이 십억이 모인 것을 대천세계라 합니다. 삼천하면 대천이고 대천하면 삼천인데 한문하는 사람들이 멋으로 삼천대천세계라고 엄청나게 쓴 것 뿐입니다. 그러므로 삼천대천세계란 십억이나 되는 해·달·지구·별들의 세계란 뜻이 됩니다.

만삼천대천세계칠보이용보시(滿三千大千世界七寶以用布施)란 십억의 해·달·별들에다 금·은·유리·마노·자거·산호·진주(金 銀 琉璃 瑪瑙 자거 珊瑚 眞珠)의 칠보를 가득 채워 가지고 그 많은 칠보를 사람만 보면 한 섬씩 주어서 없는 사람 다 잘살게 한다는 뜻입니다. 칠보 한 섬만 잘 굴리면 몇 십억씩 될 것인데, 이렇게 많은 재물을 가지고 오직 남만 잘 살도록 사용했다면, 가령 고아원(孤兒院)도 수 없이 많이 세워서 다 잘 자라서 학교에 잘 다니도록 해 주고 양로원(養老院)도 많아 만들어 즐겁게 해 주고 무료병원(無料病院)·무료극장 등 온갖 좋은 일을 다 했다고 가정을 해서 하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이 사람의 복덕이 금생, 내생에 받는 이 사람의 복(是人所得福德)이 얼마나 되겠느냐, 많겠느냐, 많지 않겠느냐(寧爲多不).』하고 부처님께서 물으십니다.

 

原 文 : 須菩提言 甚多世尊 何以故 是福德 卽非福德性 是故 如來說福德多

 

[解 義]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찬 칠보를 가지고 보시를 해서 많은 중생들을 잘 살게 해준 복덕이 얼마나 많겠느냐?』고 부처님께서 물으시는 말씀에 대해, 수보리존자는 이렇게 사뢰었습니다. 『참 많습니다. 기가 막히게 복이 많을 것입니다(甚多). 세존이시여! 제가 많다고 말씀드리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 금은 칠보를 대천세계에 가득 채워 가지고 나누어 주자면 아무래도 한해 두해가 걸려도 못 나눠 줄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 몇 만년 안 죽고 살아가지고 끝없이 많이 보시하고 내가 죽어 다시 태어나서 또 보시하고 하여 천생 만생해도 다 못 나눠 줄 정도이니 그렇게 복만 지으면 대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찬물 한 그릇 떠주고 큰 부자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찬물 한 그릇이 사람 살리는 수도 있고 평생 잊을 수 없는 그런 찬물이 있습니다. 밥 한 그릇 가지고도 그럴 수도 있는데 엄청나게 복을 많이 진 이런 사람의 복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저렇게 큰 복을 엄청나게 많이 지었으니 가령 억만겁 드나들면서 전 세계 화폐를 혼자 다 차지할만한 그런 복을 지은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 큰 복을 지어 놓으면 제가 돈을 일일이 벌어 쓰는 게 아닙니다. 자기한테 신세 진 사람들이 형제·부모되어 가지고 다 돈 벌어 놓으면 그런 집에 태어나 돈 공짜로 막 씁니다. 가령 상속법이 없다 하더라도 그런 재산이 또 돌아오고 복을 지어 놓으면 설사 돈을 쫒아 내 버려도 쫒아 낼 수 없이 소낙비 오듯이 막 퍼부어 밀려옵니다. 무엇을 해도 엎어지나 자빠지나 잘됩니다. 반대로 복을 못 지어 놓으면 엎어져도 뒤통수가 깨지고 안 되는 사람은 온 시민이 도와 줘도 안 되고 대통령이 따라 다니며 밀어 줘도 그것 때문에 병이 나서 죽습니다. 그 돈이 없어질 때까지 병이 납니다. 배가 아프고 온갖 데가 다 아픕니다. 또 돈이 떨어지면 병이 낫습니다. 진주 논산이란 곳에 농사를 스물다섯 섬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아는 것도 많고 똑똑해서 친구들이 돈을 막 대줍니다. 그런데 양식을 스물다섯 섬만 사 놓으면 마누라가 앓든지 자식이든지 부모든지 병이 납니다. 스물다섯 섬을 다 잘라 먹어야 병이 낫습니다. 그래서 스물다섯 번을 스물다섯씩 해 봤습니다. 동네에서는 하도 신용 있고 부지런하고 똑똑하니 자주 뒤를 대주고 나중에는 장사 밑천도 대 주어 그래서 또 장사를 하고 돈 모으느라 애를 쓰고 그러는데 그러면 꼭 병이 나고 그럽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그날그날 벌어먹고 살다 죽는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래께서 이 사람에게 복이 한 없이 많다고 하시는 데는 참 이유가 있습니다(是福德). 그것은 이런 물질적 복덕은 복덕의 성품이 아니기 때문이옵니다(卽非福德性).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그것 참 복덕이 많다고 말씀하신 것이옵니다(是故如來說福德多).』이렇게 말씀하시는 수보리존자의 뜻은 무엇인가.

수보리존자는 40년 동안이나 부처님 따라 다니며 법문을 들어 다 아시지만 그러나 지금 세상의 우리는 좀처럼 그 뜻을 해득(解得)하기 어렵습니다. 여기서 복덕성(福德性), 곧 복덕의 성품이라고 한 것은 마음을 가리킵니다. 마음은 곧 복덕을 지을 수 있는 주체성(主體性)이고 성품이 되므로 <복덕성>이라 한 것입니다. 재물을 아무리 많이 보시(布施)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한계가 있고 끝이 있는 상대적 복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십억세계에다 칠보를 가득 채워서 그것을 여러 수천 만년을 두고 보시를 하면 복이 많긴 많지만 마음 깨쳐 우주 전체를 깨치는 것에 비하면 태평양 가운데 물방울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많다고 했느냐 하면 그것은 불보살의 경계에서는 복이 많다는 말은 곧 복이 적다는 소리가 되기 때문이고, 정말 큰 것은 크다고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크다는 말은 작은 것을 상대로 해서 성립되는 말이고 이것보다 작은 저것하고 비교해서 이게 크다는 말이 됩니다. 사바세계 중생들은 복덕이 아주 작기 때문에 그런데 비교하면 크다고 할 수 있지만 극락세계(極樂世界)나 불보살세계의 복력(福力)에 비교 한다면 삼천대천세계의 칠보 아니라 그것 몇 억만배의 복으로 비교한다 하더라도 견주어 볼 가치조차도 없게 됩니다. 그것은 이 마음자리인 성품의 깨달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복덕 지을 수 있는 마음자리, 곧 복덕의 근본자리인 이 마음은 물질도 허공도 생각도 지식도 신앙도 많은 것도 적은 것도 아닌데, 그게 깨끗이 살아 있으니 거기 들어서서 원대복귀하면 우주 전체가 <나>입니다. 허공도 현상계도 나고 내 마음에 그게 다 나타난 것입니다. 「복덕을 지을 수 있는 이 마음은, 곧 복덕성은 우주 전체를 차지하는 것인데 그까짓 십억세계 한두 개 차지해 봤자 그게 얼마나 되겠느냐?」 그런 뜻입니다.

이런 때는 뜻이 참 어렵습니다. 큰 대학자끼리 만나서 40년이나 불법을 들었으므로 이렇게만 얘기해도 알아들었지만 지금처럼 불교에 대한 기초도 없는데 이런 말을 내 놓아 봤자 깜깜합니다. 「이 사람 복덕이 많으냐 안 많으냐?」 「네, 많습니다. 복덕성이 아니기 때문에 여래는 복덕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말로만 따라다니면 무슨 말인지 말이 안되고 날마다 금강경을 봐야 뭘 설명한 것인지 평생 해도 모릅니다. 「이 복덕은 주체성이 아니기 때문에, 많다 적다하는 것을 초월한 마음을 깨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이 사람 복이 참 많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새겨야 그 뜻이 풀어집니다.

 

原 文 : 若不有人 於此經中 受持乃至四句偈等 爲他人說 起伏 勝彼

 

[解 義] 여기서부터는 수보리존자의 대답을 들으시고 나서 다시 부처님께서 물질로 지은 복은 마음의 복에 비교할 바가 아니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누구든지(若不有人)이 이 금강경의 네 구절만 배워서 읽고 남이 알아듣도록 해석해 준다면, 금강경 전부가 아니라도 어느 한 구절 열 여섯자만이라도 설명해 줄 수 있다면, 그 사람의 복이야말로 우주를 다 차지하고도 남을 것이니 그 복은 십억 세계의 칠보를 보시한 복덕보다 비교할 수 없이 많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을 듣는 사람도 그 뜻을 알아들었으면 그 복이 한가지입니다.

사구게(四句偈)는 제五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의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 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 諸相非相 卽見如來)라고 하는 16자와 같은 글귀를 말합니다. 이 글귀의 뜻만이라도 잘 가르쳐 주어서 보리심을 일으키게 하라는 것 입니다. 육조 혜능(六祖慧能)대사는 금강경의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이란 법문 강의하는 것을 한번 듣고 일자무식(一字無識)한 나무 장사하는 소년으로 그 자리에서 마음을 깨쳤습니다. 육조대사와 같이 대번에 이렇게 되기는 어렵다고 하더라도 과학자·철학자·종교가등 많은 사람들이 이 사구게 해설하는 그 뜻을 알아듣고 육체가 나라고 하던 마음을 돌이켜서「나 자신을 알아 봐야겠다. 이 마음을 깨쳐야 되겠구나. 산을 보면 높은 줄 알고 물을 보면 깊은 줄 아는 이것만 깨치면 우주의 주인공(主人公)이고 생사를 해탈하는 굉장한 게 있는 걸 몰랐구나. 부처님을 믿고 절에 가서 불공하고 기도한다. 하느님 믿고 교회가서 기도한다 했지만 그게 다 무엇이 그런 짓을 했는가. 복을 받아 보았자 제가 지은 것만큼 받고는 또 가난뱅이 되고 지옥도 가고 그러는 것이니 그런 것은 다 완전한 것이 못되고 참된 복이 아니구나.」하는 마음이 생기도록 잘 설명해 준다면 곧 부처가 되도록 하는 것이고 십억세계의 칠보를 가지고 자선사업(慈善事業)한 것보다 복덕이 더 클 것은 당연 합니다.

마음을 깨쳐서 아는 지혜는 연구하고 따져서 아는 것이 아니고 저절로 알아지는 지혜고 무소부지(無所不知)로 알지 못하는 것이 없고, 우주를 다 차지하고도 남는 그런 절대적인 법을 알려 주는 것이 이 사구게(四句偈)를 설명해 주는 것이니, 그 공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설사 이 설법을 듣고 나서 저희들끼리 지껄이는 쓸모없는 소리라고 불평이나 하고 믿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사람은 욕하고 비방(誹謗)한 인연으로 마침내는 불법에 귀의하여 성불(成佛)하는 날이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에 굶어 죽을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이렇게 남만을 위해서 사는 세상이 되면 사바세계가 그대로 극락이 되고 공산주의가 발붙일 수 없고 자본주의가 있을 수 없습니다.

금강경의 사구게 하나만이라도 남에게 똑똑히 알아듣도록 설명해 준다면 참말로 큰 시주고 다시 없이 큰 복을 지은 것입니다. 그러니 금강경을 내가 설명할 줄 모르면 천리만리 밖에라도 가서 법사스님을 모시고 오고 처사나 신도 가운데서라도 잘 아는 이가 있으면 모셔다가 금강경 법회를 하고 다른 경이라도 대승경의 골수를 설법하게 한다면 법사 스님을 모시고 온 그이가 법사 스님하고 똑 같은 공덕을 받습니다. 법사의 입이 내 입이고 법사의 공덕이 내 공덕이 되고 그런 것이니 불공을 한다든지 기도를 드린다 하는 것 보다 온 우주의 재산을 다 차지하는 것 보다 법회를 열어서 마음을 열어서 마음을 열어 준 그것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공덕이 더 큽니다. 이것이 정말 인류정화(人類淨化)고 불교정화(佛敎淨化)입니다. 그러니 견성했다고 적멸(寂滅)의 열반에만 머물러 있으면 그것은 불교도 아니고 소승불교에 불과합니다. 탑골 공원이고 장충단이고 사방으로 다니면서 중생제도를 하는데 그렇게 해서 종일 설법해도 말한 흔적이 없고 한번 입을 떼 본 적이 없는 그런 식으로 자꾸 닦아 나가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됩니다. 그러니 공덕 가운데 이런 법문을 설명해 주는 공덕이 제일 큰 것입니다.

 

原 文 : 何以故 須菩提 一切諸佛 及諸佛阿?多羅三?三菩提法 皆從此經出

 

[解 義] 『일체의 모든 부처님과 모든 부처님께서 얻으신 아뇩다라삼먁삼보리까지 다 이 금강경으로부터 출생했다 나왔다.』고 하셨는데 여기서 경이란 말은 이 문자경(文字經), 곧 말과 글로 된 경을 뜻합니다. 문자로 된 이 금강경에 의지해서 문자반야(文字般若)·관조반야(觀照般若)·실상반야(實相般若)의 三반야를 성취하게 되는 때문입니다. 문자반야에 의지해서 발심하여 무명(無明)에 속지 않고, 탐진치 三독에 속지 않게 되며 자성(自性)을 번조(返照)해서 자기 마음의 근본자리를 관조(觀照)하는 관조반야를 닦아 가지고 마침내는 실상반야를 체득(體得)하게 됩니다. 그러니 종이 위에 먹칠해 놓은 문자경에 의지해서 필경에 성불할 수 있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하게 되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이 문자경(文字經)에 의지해서 아공(我空)·법공(法空)·구공(俱空)의 경지를 체득하여 성불한다는 말씀입니다. 아공은 육신이 나인 줄 알았던 생각을 버리고 몸뚱이는 물리적 요소로 구성된 것인데 물질 자체는 근원적인 실체가 없는 공한 것임을 체득한 것을 말하며, 또한 생각이나 희로애락의 감정 역시 찰나 찰나로 변멸(變滅)하는 것으로서 그 근본은 다 같이 공무(空無)한 것임을 체득한 것을 아공(我空)이라 합니다. 법공(法空)은 현상계의 모든 것은 다 인연으로 모였다 흩어지는 것으로 그 실재가 없으며 따라서 어떤 결정된 법이 없어서 온갖 법이 다 공했음을 증득(證得)한 경계를 말합니다. 그러니 <아공>은 육신이 내가 아님을 깨달은 것이고 <법공>은 객관세계가 다 공해서 안으로나 밖으로나 나를 구속할 게 없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생사를 벗어난 경지를 체득한 것이 법공입니다.

구공(俱空)은 「이것이 진리구나, 모두가 다 공했구나, 내가 이제 견성을 했구나」하고 자기가 해탈한 것을 인식하고 있는 한 인식한 주체가 주관이 되고 인식한 내용이 객관이 되므로 다시 상대세계에 떨어져서 정말 대열반 . 대해탈을 성취할 수 없게 되므로 아공 법공까지도 다 여의어야 비로소 마음의 본 바탕자리에 계합하는 것임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정말 아무것도 없는 공무(空無)한 적멸(寂滅)의 경계에 들어가서 마음의 실재 하나만 오롯이 남아 있더라도 「아아 이런 것이로구나」 하든지 「아아 내가 이제 깨달았구나.」 하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이것이 구공이 아니라 법공에 도달한 것 밖에 안됩니다. 온갖 망상 미련이 다 끊어졌지만 「아 참 이렇구나」하는 그것만 남아 있으므로 이 생각까지 끊어져야 구공이고 참다운 견성입니다.

부처님께서 처음에 이 금강경을 설법하시기 40년 전부터 아공(我空)을 설명하시고 21년간 반야경 600부를 설명하셨는데 반야를 말씀하실 때도 처음에는 법공(法空)을 말씀하셨고 이 금강경을 설명하시게 되어서 부터는 구공(俱空)을 말씀하십니다. 금강경은 577권째이니까 반야 600부에 거진 끝부분에 해당합니다. 그러니 이런 구공 도리에 의지해서 모든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하시고 성불하십니다. 그래서 반야심경(般若心經)에도 「삼세의 모든 부처님께서 이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었다(三世諸佛 依般若波羅蜜多故 得阿?多羅三?三菩提)」고 했습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고 나서는 반야바라밀도 금강경도 필요 없지만 이 실상반야(實相般若)·구공소식(俱空消息)을 얻는데 이 문자반야(文字般若)가 근본이 돼 가지고 거기서부터 깨달음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므로 「모든 부처님과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다 이 경으로부터 나온다(諸佛及諸佛阿?多羅三?三菩提).」고 하신 것입니다.

 

原 文 : 須菩提 所謂佛法者 卽非佛法

 

[解 義] 부처님께서 이제까지 금강경으로부터 부처님께서 나오고 이 경으로부터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나온다고 하셨는데, 그 말씀하신 바로 뒤에 『수보리야! 이른바 불법이란 곧 불법이 아니다.』하고 딱 잡아떼십니다. 당신이 평생 동안 말씀하신 팔만대장경 그것이 불법이 아니라는 것이니 이것이 큰 문제입니다. 이렇게 되면 또 꽉 막힙니다. 우리가 마음을 깨닫지 못해서 내 살림살이가 아니기 때문에 꿈 가운데서 꿈 이야기 하는 것처럼 아득하게 됩니다. 참선을 좀 해서 견성(見性)은 못했다 하더라도 마음이 어느 정도 가라앉기만 해도 이런 말이 머리에 쑥 들어갑니다. 이런 문제가 나오면 혼비백산(魂飛魄散)이 되고 어떤 정의(定義)나 개념(槪念)이 성립될 수 없어서 언어의 표현으로 뜻을 전달할 수 없고 생각으로 헤아려 볼 수 없는 문제입니다. 여기서는 한번 머리를 숙이고 참구(參究)해 봐야 합니다. 참으로 몇 번 죽었다 깨어나기 전에는 입김도 안 들어갑니다. 불법은 천당에 가는 얘기도 지옥 가는 얘기도 아니고 철학자나 과학자가 되는 얘기도 아니고 이것을 의지하면 부처가 될 수 있는 법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에 의지하고 경전에 의지해서 보리심(菩提心)을 일으키는 도리를 알아서 참된 발심을 해가지고 또 수도하는 방법까지 배워가지고 선지식 지도에 의지해서 필경에는 성불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체득하게 된다고 하십니다. 이때까지 꼭 내(부처님)가 시키는 대로 내 얘기만 듣고 그대로 해야지 다른 얘기 들으면 안된다. 다른 얘기 듣고 다른 데로 가다가는 성불하지 못한다. 이렇게 40년 동안 고구정녕(苦口丁寧)으로 말씀하셨고, 또 이렇게 보살들을 잘 호념(護念)하시고 부촉(付囑)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불법이 아니라」고 딱 잡아떼시니, 그러면 어떤 게 불법이겠습니까? 부처님께서 거짓말하시는 것도 아니고 엉뚱한 말을 하시기 위한 말씀도 아니고 이 말도 꼭 있어야 하겠기에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안 하면 불법이 잘못 전해질 논리적 결함이 생기겠으므로 그래서 그 논리적 의의를 가지고 있는 말씀입니다. 정말 이런 엉뚱한 말이 나올 적에 선근(善根)이 있는 사람이면 그 자리에서 탁 깨쳐서 대번에 생사를 초월해 버리고 불법을 성취할 것입니다.

이런 문제 때문에 옛날부터 공부하는 이들이 다시 한번 재출가(再出家)를 해 가지고 방방곡곡 찾아다니며 「어떤 게 불법이냐?」 하고 묻습니다. 그래도 마음이 확연(廓然)해 지지 않으니까 또 다른 이한테 찾아갑니다. 「그 이가 잘못 깨쳐서, 설명이 철저하지 못해서 그런가. 내가 이것을 깨치지 못하는 것인가.」 하고 일 평생 찾아다니며 꼭 알고야 말겠다는 일념뿐 딴 생각은 아무것도 없는 도저한 경지가 되면 그때는 선지식·선사(禪師)의 말이 푹 들어와서 깨치게 됩니다.

혹 구공(俱空)의 도리를 몰라서 법공에 이끌릴까 해서 하신 말씀으로 생각할지 모르나 그렇지만 여기서는 이미 구공까지 넘어서서 하는 소리며 구공까지 체득했더라도 구공에 떨어져 있음을 경계하는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내(부처님)가 한 소리는 아무것도 아니고 도깨비 같은 소리니 거기에만 이끌려도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또 그렇다고 해서 팔만대장경을 다 불 질러 버리고 보지도 않을 경이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처음 40년 동안 하신 설법은 말로도 할 수 있고 이론으로도 할 수 있으며 생각도 할 수 있는 대목이지만, 구공(俱空)에 들어서면 말도 아니고 생각도 아니고 생각 아닌 것도 아니고 그렇지만 구공이 불법인 줄 알면 안 됩니다. 그러면 실제로 「어떤 것이 불법인가.」 분명하고 오롯한 실재를 끄집어내야 할 것입니다. 이 문제는 우선 숙제로 두기로 합니다.

 

 

[說 義]

▶업(業)이라는 것

내가 기회 있을 때마다 종종 하는 이야기인데, 전남 순천(順天) 송광사(松廣寺)에서 혜공(惠空)스님을 내가 모시고 있을 때일 입니다. 그 절에 머슴살이하는 사람의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집이 너무 가난하여 집에 두어 봐야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으니까 절에 데려다 놓고 잔심부름이나 시키고 군불도 좀 때주고 하면서 밥 한 그릇 더 얻어다가 나누어 먹이고 그럽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아주 박복한 아이어서 절에 재나 불공이 들어 떡이나 뭐 먹을 게 생기면 꼭 배가 아프다고 그럽니다. 그래 참말인가 의심이 돼서 큰 불공이 들었을 때 그 놈 몫을 내가 떡이랑 과자를 아무도 모르게 꼭 숨겨 놓았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 놈이 그만 배가 아파서 못 일어납니다. 다음날 누가 와서 아이가 배가 아파서 물도 못 먹으니 누구든지 그 아이 몫으로 떡 받아 놓은 게 없느냐는 겁니다. 그래 숨겨 놨던 떡과 과자를 내 놓고 여럿이 하는 말이 그대로 두면 죽지도 않고 앓기만 하니 우리가 나누어 먹자고 해서 할 수 없이 그 떡과 과자를 다 먹고 나니 거짓말같이 싹 일어났습니다. 그 때 절에 불공 온 한 신도가 광주 시내에 부자인데 장가를 들어 첫 아들을 낳았다고 애 보는 사람 구한다 하여 그 애를 추천했습니다. 얼굴은 괜찮고 해서 부잣집 애 보는 심부름꾼으로 월급도 많이 받기로 하고 갔는데 보름 만에 자다 말고 밤중에 도망을 왔습니다. 그래서 모두들 「거기 있으면 대학도 다니고 너 팔자 고칠 텐데 왜 왔느냐?」고 물어 보니 그 집에 이 애가 가고서부터 아들이 자꾸 아프다는 겁니다. 부모가 여러 가지 약을 해도 잘 안 났고 그래서 그 어머니가 걱정이 되니까 점을 치게 됐는데 이 집에 박복한 애가 하나 들어와서 그 아들이 자꾸 앓는 것이니 그 애를 내보내라고 했다는 겁니다. 어느 날 밤에 내외간에 소곤소곤 얘기하는 것을 듣고 부끄러워서 자다가 살그머니 도망쳤다는 것입니다.

전생에 남 잘되는 것 미워하고 도둑질이나 하고 협잡이나 하고 그런 사람은 금생뿐 아니라 내생에도 부모덕도 없고 시집가도 남편 덕도 없고 장가가야 마누라 복도 없고 자식 낳아 봐야 모두 불효하고 명 짧고 박복한 아이만 내 앞에 태어나게 되는데 그것은 하는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복만 짓고 나면 엎어지나 자빠지나 잘되니 큰 돈 번 사람들은 꼭 운수가 있습니다. 마을 사람(세속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고 불교에서는 인과(因果)라 한다고 일소(一笑)하지만 그러나 인과는 알고 보면 과학적인 내용이 다 있습니다. 운수니 사주팔자니 하는 것도 들어맞는 소리를 하기도 합니다. 얼굴도 가령 정치가라든지 큰 사업가라든지 다 업보(業報)로 타고나는 운명이 있습니다. 누가 돈을 가져가도 그 사람 갚을 건가 안 갚을 건가 그 사람 얼굴에 다 나타납니다. 볼 줄을 몰라서 그렇지 시간 시간 미래에 관한 관상이 얼굴에 나와 있습니다. 관상 잘하는 사람은 내일은 뭐가 되고 모레는 뭐가 되고 미래를 다 설명합니다. 손금에도 거기 평생이 다 들어 있습니다. 정말 잘 보는 사람은 피 한 방울만 봐도 그것을 가지고 그 사람 평생을 알 수 있습니다. 더 잘 보면 전생도 알 수 있고 죽어 내생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의 수기예언(授記豫言)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대중에게 수기(授記)를 주십니다. 이를테면 제자에게 미리 예언 하시는 것인데, 가령 갑이나 을은 금생에 죽으면 내생에는 어떤 집에 태어나게 되고 아버지가 뭘하고 형제간이 어떻고 장가가면 어떤 처녀한테 가고 시집가면 어떤 총각한테 간다. 그렇게 백천만겁 돌아다니며 도를 닦아 가지고 필경 성불하면 어떻게 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실달태자처럼 아버지는 정반왕이고 어머니는 마야부인이고, 유성출가(遊城出家)하여 도망해 가지고 어느 산에 들어가 수도를 해서 몇 살에 네가 마음을 깨쳐 부처가 되겠다고 예언해 주시는 것이 수기입니다.

번뇌망상 아무것도 생각없는 무아지경에 들어서면 그것이 초차원의 세계인데, 너도 나도 없고 나도 남도 아니면서 확실히 나이기는 나입니다. 그 지경에 가면 조금조금 알아집니다. 그러니 요새 도통했다 통령했다 하는 건 모두 텅 빈 데 들어간 것을 가리키는데 거기도 백천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사차원의 영계(靈界)에 들어가서 점점 차원이 높을수록 자유가 많아지고 아는 게 많아지고 신통도 많아지고 참으로 근심 걱정 없고 의식주가 필요 없는 그리고 생사와 아무 상관이 없는 불보살의 차원에 들어갑니다. 이때가 되면 세상에 나와서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해도 됩니다.

이렇게 복을 받든지 마음을 깨쳐 성현이 되는 것이 다 자기가 닦은 전생의 인과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우주에 가득 찬 보배를 보시한 그 사람이 복을 많이 받긴 받는데 그러나 그것도 부처님의 마음자리에서 보면 복이 많다는 소리는 작다는 소리가 됩니다. 크다는 소리는 작은 것을 상대해서 크다는 것이고 작은 거 제해 놓고 크다는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절대로 큰 게 아니고 작다는 소리입니다.

 

복덕(福德)의 주체(主體)

정말 큰 건 크다는 소리를 못합니다. 전체가 다 내가 되어 놓으면 무엇에다 비교해 많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많다는 소리는 작다는 소리입니다. 따라서 모든 착한 일 해서 복을 짓는데 그런 인과로 큰 복을 많이 지었다고 하더라도 그건 우주의 어느 부분을 그 복이 다할 동안 잠시 차지한 것이며, 이 우주를 다 차지했다 해도 그건 많은 게 아니라 물질을 두고 한 소리니 많다고 할 것이 못 됩니다. 이 마음이 우주의 생명이며 마음은 곧 우주와 둘이 아니니 이 마음을 깨쳐 놓으면 우주와 마음이 하나가 됩니다. 너니 내니 하는 주객이 없어지고 이렇게 되면 그 성품에 들어서서 전 우주를 차지한 것이며 우주를 마음대로 창조도 하고 없애기도 하는 능력을 갖게 되어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시는 것이니 물질로 보시하여 얻는 공덕이 아무리 크다 해도 그것은 마음에 비교하면 태평양 한 가운데 수증기 한 방울 밖에 안 됩니다.

그러므로 많다고 하는 게 적다는 소리고 크다는 게 작다는 소리이며 큰건 큰게 아니라 마음에 비하면 우주 전체가 적다느니 크다느니 하고 말도 붙일 수 없습니다. 한 생각을 내어 착한 일 해 가지고 복을 아무리 많이 받는다 해도 허공의 한쪽 구석밖에 안 찹니다. 그런데 복을 짓고 싶어하는 거룩한 생각을 낼 줄 아는 주체성인 그 마음을 깨쳐 놓으면 우주 전체가 다 나이므로 작다 크다 소리는 없어집니다. 전체를 다 차지해야지 착한 일 좀 하여 한쪽 구석만 차지해 봐도 그건 네 마음을 깨치는 것만 못하다는 것입니다.

 

흐르는 물같은 인생

인생의 근본이 되고 있는 <나>란 과연 무엇인가. 죄를 짓고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져서 한없는 고생을 하기도 하고 복을 지어서 천상(天上)에도 나고 사람 세상에 나와서 국왕 대신이나 큰 부자로 복을 많이 받기도 하지만 그 근본 주체는 다 마음이란 <내>가 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나>는 무엇인가. 그 핵심을 집어 내 보라는 것입니다. 우주 전체가 내가 아닐 게고 오장육부인가, 귀구멍인가, 머리인가, 다리인가, 팔인가, 그 핵심이 있을 것이니 이것이 먼저 확인되어야 합니다. 옛날에는 심장이 뭘 생각한다고 했지만 지금은 대뇌가 생각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대뇌의 어느 세포인가. 대뇌만 하더라도 세포가 여러 수백만개인데 그 가운데 어떤 세포가 나라 할 수 있을까? 그것 다 종합한 것이 나타나면 너무 막연한 말입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 물건을 모아 놓은 세포의 집단이지 어째 그게 나일 수 있는가. 나라는 소리는 그 핵심을 말합니다. 여기 40억 인구가 있지만 그건 다 내가 아니고 마누라도 부모 형제도 내가 아닙니다. 내가 무엇인지 모르고 오늘은 이 사람 따라가고 내일은 저 사람 따라가고 엎어졌다 자빠졌다 사는 겁니다.

한평생 살아 봐도 누구를 위해 살았는지, 나를 위해 살았는지, 남을 위해 살았는지 까닭도 모르고 한평생 살아가는 겁니다. 그러니 모두 바보가 되어 한강에 가자하면 한강에 가고 창경원에 가자하면 창경원에 가고 이리 가라하면 이리 가고 저리 가라하면 저리 가고 모두가 이런 식입니다. 장사하는 사람도 다 그런 식이고 정치하는 사람은 더합니다. 흘러가는 물과 한가지입니다. 물이 흐르는 것은 정처 없이 그저 흐르다가 바위에 부딪치면 툭 치고 흙탕물이 되기도 했다가 또 거기서 뺑뺑 돌다 막 뒤집힙니다. 한강 물이 어떻게 흐르느냐 하면 여러 억만년 흐르긴 흘러도 어떤 모양으로 흐르는 일정한 형태가 없습니다. 저쪽 모래에 부딪쳐 모래를 뒤집고 흐르고 그러니 한강물이 일정한 모양이 없습니다. 강원도에서 서해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데 참 풍파가 많습니다. 강원도 오대산 산꼭대기 위로 올라갔다 아래로 내려갔다 고기가 마셔 버리기도 하고 사람이 받아먹기도 하고 나무뿌리에 들어갔다 또 수증기가 되어 올라가는 놈 그 신세가 어찌될는지 모릅니다.

우리 인간도 한 평생 사는 신세가 어찌 될는지, 오늘은 오늘 생각하고 내일은 내일 생각하고 그러니 서양 철인들이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하는데 이 말은 알려고 하면 머리가 아프니까 그렇게 단정해 버린 말에 불과합니다. 곧 나는 없다는 소리와 한가지입니다. 허무한 인생이고 물거품 같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도 나는 시집을 잘 갔느니 장가를 잘 갔느니 돈이 많으니 합니다. 그렇지만 그게 어째서 제 돈입니까? 돈한테 이끌리는 겁니다. 돈 일원 모아 놓으면 일원에 구속되고 저걸 누가 집어 갈까 꾸어 달라면 어쩌나. 백만원 모아 놓으면 백만장자만큼 생각이 많고 백억원 모아 놓으면 백억장이 낱낱이 사람을 눌러 밤에 잠이 안 오고 꿈에서까지 걱정입니다.

그러니까 돈 많은 사람은 자유롭지가 못합니다. 원수가 많아지고 친한 친구 다 떨어지고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고독해집니다. 권리가 높아도 높을수록 원수가 많고 고독해집니다. 그러니 돈도 모을게 못되고 권리도 높을 게 아닙니다. 개 돼지 소리 들으면서 모았다가 나중에 죽을 때는 「지금 죽을 줄 알았으면 마음이나 좋게 쓰고 죽을 걸.」 그렇게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 그러니까 일생을 산다는 것이 무엇 때문에 사는 건지 그 까닭을 모릅니다. 꼭 흘러가는 물처럼 아무 까닭 없이 이리 부딪치고 저리 부딪치며 삽니다.

 

깨달으면 지옥도 극락

부처님의 말씀하신 뜻대로 하면 「네가 너를 알고 너대로 살아라.」 그렇게 됩니다.

왜 빈껍데기만 가지고 사느냐? 이리 끌리고 저리 끌리고 하느냐? 가령 이성끼리 상종하는 것을 보더라도 여자가 바람이 나면 오늘 저녁은 이런 남자한테 끌려가고 내일 저녁은 저런 남자한테 끌려가고 그런건 미칠 겁니다. 그런데 그것도 자꾸 하면 또 하고 싶어집니다. 그러면 이 세상은 혼탁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물질문명만이 발달되고 성을 개방해 놓으면 인생이 고독해지고 허탈해집니다. 나를 아껴 주는 사람도 없고 아껴 줄 사람도 없는 신세가 되니 이유 없는 반항과 욕구불만이 되어 자꾸 자살하는 겁니다.

결국 물질문명은 인간의 행복을 객관세계에서 얻으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게 됩니다. 나한테 본래 있는 행복이 정말 행복입니다. 죽을 수 없는 마음을 깨쳐 얻어야 영원한 행복입니다. 불에 뛰어들어도 안 죽고 칼로 쳐도 안 죽고 원자탄 다 퍼부어 놔도 까딱없는 것 그 자리에서 얻어진 것이 비로소 행복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는 못됐다 하더라도 그런 원리를 알고 믿기라도 해야 합니다. 안심을 하려면 그 정도는 되어야지 그까짓 돈 천만원 얻어 놓고 안심할 수야 있습니까? 바람만 불어도 어느 놈이 담 안 넘어 오나 깜짝깜짝 놀라고 불쌍한 게 돈버는 재미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깨치면 정말 돈도 필요 없고 의식주도 필요 없고 생사고도 아무 상관없는 대행복을 얻습니다. 지구가 다 깨져도 나는 까딱없습니다. 마음을 깨쳐 놓으면 지옥을 가서 기름 가마에 집어넣어도 거기가 극락이 됩니다. 그 자리는 뜨겁고 찬 것도 없고 마음대로 안 돌아가는 게 없으니 이 마음 앞에 나를 어찌할 수 있는 법이란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그래도 오늘 저녁 법문한 후에 저녁밥을 안 준다고 위협하면 이 법회 안할지도 모릅니다. 저녁 밥 한그릇 있으니 안심하고 하라 해서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의식주 밥 세그릇에 생명을 달아 가지고 사는 것이고 육신에 매달려 온갖 고생하느라고 밤에 잠을 안자고 허덕이는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주인과 노예와의 관계에 비할 수 없습니다.

 

둥근 것도 모난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금강경 전체를 남을 위해 말해 주면 더욱 좋지만 사구게 16글자만이라도 남을 위해서 설명해 주는 것은 우주의 핵심인 마음, 만사의 주체인 진짜 나를 발견하게 해 주는 것이므로 그 공덕은 십억 세계에 가득찬 보배를 가지고 온 중생을 잘 살게 해 준 복덕보다도 몇 천만배 큰 것이라고 합니다. 물질로 보시해서 얻는 복은 그 과보도 역시 물질로 받고 몸으로 받는 중생의 과보일 뿐, 복덕 지을 수 있는 주체, 주인공을 찾는 복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깨치는 일은 주인이 되는 일이고 영원불멸하는 절대자가 되는 것이지만 객관에 끌리고 몸뚱이로 사는 것은 종이 되는 것이고 생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무엇인지 <내>가 무엇인지를 모르면 제 정신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노름꾼 만나면 노름장이가 되고 술꾼 만나면 술꾼이 되고 아편장이 만나면 아편장이 되고 도둑놈 만나면 도둑놈 되고 깡패 만나면 깡패 되어 온갖 곳으로 다 끌려 다니며 마음에도 없는 일을 시키는 대로 종노릇 하느라고 온갖 고생을 합니다. 그러니 자기를 아는 사람, 마음을 깨쳐 주객을 초월하여 부처를 안 사람은 누구를 따라 가더라도 거기 따라가서 나한테나 남한테나 이익이 되면 따라 가지만 이익이 안되면 안갑니다. 자기를 모르는 사람들 따라다니면 덕 될 것 아무것도 없습니다. 인간이란 몸뚱이를 나라고 속아 살기 때문에 어떤 것이 나에게 정말 이익이 되는지도 모릅니다. 금강경의 사구게 스무자를 일러주는 것은 곧 영원히 행복한 행복의 모체, 주체를 밝혀 주는 것이지만, 물질로 복을 짓는 것은 아무리 크게 했다 하더라도 하나의 부분밖에 안됩니다. 사구게는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 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 諸相非相 卽見如來)』도 있고, 이 금강경 맨끝에 가면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이란 게송도 있습니다.

또 제 26장에 가면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란 게송도 있고 금강경 어느 구절에도 네 글귀의 내용이 다 있습니다. 물질로 많이 보시하는 것은 아무리 잘 해도 종을 호강시켜 주는 폭 밖에 안 되고 사구게를 잘 일러 주는 것은 수많은 종의 주인일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의 주인이 되는 마음을 깨우쳐 준 것이므로 그 공덕이 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에 모든 부처님과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다 이경에서 나온다고 한 것입니다.

이 마음은 둥근 것도 모난 것도 아니고 얻은 것도 설명할 수도 없는 것이며 어떻다고 결정된 내용이 있거나 어떤 개념으로도 규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나 불법은 곧 불법이 아니다.」고 하셨던 것인데, 그러면 그 속뜻이 무엇인가. 강의를 안 들으면 칠판도 글씨도 아무것도 아닌 셈이고 아무런 뜻이 없으니, 팔만대장경도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경을 일러 보고 거기서 조금 알았다고 해서 어떤 소견을 내면 그러다간 나도 속고 남도 속이는 것입니다. 장님한테 장님이 끌려가는 것과 한 가지여서 나중에는 둘이 다 구렁에 빠지게 된다는 겁니다. 「소위 불법이란 참말로 불법이 아니라, 그런 게 불법이다. 불법이라고 이름 지을 수 없는 게 불법이다(所謂佛法 卽非佛法)」의 뜻은 글자 음성 따라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 마음자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설명하는 이 마음자리를 자꾸 생각하면 깨달아지는 때가 있습니다. 밥 먹다가 깨닫거나 변비로 애쓰다가 대변보는데 툭 터집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물으시고 수보리는 또 이렇게 대답하셨는데 그러면 그 논리가 어디로 들어맞는가. 그것을 자꾸 생각해 보면 탁 깨칩니다. 이 문자와 인연이 없어서 여기서 깨치지 못하면 더 뒤에서 깨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금강경 보고 못 깨치면 유마경(維摩經)보고 깨칠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깨치는 것도 여러 가지입니다. 「오직 이 법문을 설명할 줄 알고 들을 줄 아는 그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이 인생의 가장 근본 문제입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대답이 안 됩니다. 동서 오천년 문화를 다 듣고 나서 설명을 한다 하더라도 어떤 학문으로라도 이것은 설명이 안됩니다.

부산에 혜월(慧月)스님이라고 하는 큰 도인(道人)이 계셨습니다. 이 어른은 일자무식(一字無識)인데 선지식(善知識) 가운데도 한국 최근세(最近世)에서는 유명한 분이었습니다. 동네 어린 아이들처럼 순진하게 어린애 양을 합니다. 당시에 어떤 목사(牧師) 한 사람이 혜월스님이 불법을 잘 아는 선지식이라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서 「어떤 것이 불교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혜월 노장스님은 「선생님」하고 부릅니다. 「예」하고 대답하니 「저 샘에 가서 물 한 그릇만 떠다 주시오.」 그래서 목사는 할 수 없이 노장님 시키는 대로 물을 한 그릇 떠다 드렸습니다. 그러니 노장님은 「그게 불법입니다.」하고 대답을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목사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목사가 과거세에 불연(佛緣)이 깊은 아주 수승(殊勝)한 선근(善根)이 있는 사람이었다면 아주 깨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목사로서는 수수께끼도 아니고 사람을 놀리는 것도 아니고 싱겁기만 했습니다. 이론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물이나 떠 오라고 해 놓고는 불법 설명을 다 했다고 하니 그 스님이 무심해서 그런 것인가 어떤 것인가 하고 물러났습니다.

이에 대한 대답이 고래(古來)로 수백 가지 수천가지가 됩니다만 대개가 다 이 혜월스님이 보이신 것과 비슷했고 그때그때 경우에 따라서 방법이 다른 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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