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得無說分 第七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如來(여래)- 得阿多羅三三菩提耶(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야)아 如來有所說法耶(여래소설법야)아 須菩提言(수보리언)하사 如我解佛所說義(여아해불소설의)로는 無有定法(무유정법)하야 名阿多羅三三菩提(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오며 亦無有定法(역무유정법)을 如來可說(여래께서설)이니이다 何以故(하이고)오 如來所說法(여래소설법)은 皆不可取(개불가취)며 不可說(불가설)이며 非法(비법)이며 非非法(비비법)이니 所以者何(소이자하)오 一切賢聖(일체현성)은 皆以無爲法(개이무위법)으로 而有差別(이유차별)일새니이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겠느냐? 또 여래께서 어떤 법을 설명한 일이 있느냐?』

수보리가 여쭈었다. 『제가 알기로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뜻은 결정된 법이 있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이름할 것이 없사오며, 또한 결정한 법 없는 것을 여래께서 설명해 주셨사옵니다. 왜냐하오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법은 취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고, 법도 아니고 법 아닌 것도 아니기 때문이옵니다. 그것은 모든 성현께서 함이 없는 법으로 차별이 있기 때문이옵니다.』

 

 

第七 無得無說分

 

[科 解]

여기 제7장에서는 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 곧 석가여래는 아무 법도 얻은 법이 없고 깨달은 법도 없으며 부처님께서 입으로 49년 설법을 하셨지만 꼭 해야 할 말씀은 하나도 없음을 말한 것입니다. 사람이 고향으로 가는 길을 모르고 딴 길로 험한 길을 가느라고 땀만 흘리고 고생을 하고 있으니 그 사람을 위해 「이리 가는 것이 옳소. 이리 가시오.」했지만 꼭 그 길이 참된 길도 아닙니다. 이 마음 깨치는데 여행하는 것 같은 길이 있는 것도 아니고 팔만사천가지 방편이 있지만 그것도 결정된 법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당신도 아무것도 얻은 게 없고 누구를 얻도록 해 줄 방법도 없고 또 말할 수 있는 어떤 진리도 없고 석가여래 49년 동안 단 한마디도 말한 적도 없다고 잡아떼십니다. 이것이 석가여래의 불법이라고 하면 어떤 사람은 「아! 이것을 불법이라고 남겨 놓았느냐?」고 실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불법은 이 금강경에 있는 것이 아니고 글자나 말에 있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어떤 개념으로 규정될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달았다고 하고 그것이 무상(無上) 최고의 정법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또 그 정법은 우주 어디에고 없는 데 없이 꽉 차 있고 그것이 내 마음이라 합니다. 정법이란 사실 그대로를 보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실 그대로를 여여(如如)하게 보고 듣는 게 없습니다. 종소리 하나를 두고 보더라도 우리는 제대로 못 듣습니다. 누구나 똑같이 듣는 것 같고 똑바로 듣는 것 같지만 우리의 얼굴, 귀가 서로 다른 것만큼 이 오관(五官)의 조직도 모두 다르기 때문에 듣는 것도 다 각기 다르고 진실 그대로의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일본사람은 <강강>, 우리나라 사람은 <땡땡> 그렇게 듣습니다. 일본사람은 우리나라사람 종소리 흉내도 낼 수 없습니다. 그 사람들은 「실지로 종을 쳐봐도 강강하는데 한국 사람은 왜 땡땡한다 하는지 모르겠다.」 하고 우리들은 종소리가 강강이 뭐냐고 일본사람들 참 우스운 사람들이라 그럽니다.

그러니 저의 어머니에게 어려서 종소리는 땡땡이라고 한번 들어 놓으면 죽을 때까지 땡땡이고, 어머니한테 강강으로 들어 놓으면 평생 강강입니다. 또 가령 슬픈 마음으로 있을 때 어떤 노래를 처음 들으면 그 노래의 곡은 어찌됐든지 항상 아주 슬프게 들립니다. 그 자체의 음성이나 가사가 슬픈 것이냐 하면 그렇지 않고 설사 재미있는 노래라 하더라도 그렇게 됩니다. 어떤 물건을 처음 볼 때 인상은 평생 못 바꿉니다. 그것은 다 오관이 전부 불완전하게 인식하고 사실대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깨끗한 마음을 깨닫고 나면 땡땡도 강강도 궁궁도 그게 한꺼번에 다 들리고 세계사람 소리가 한꺼번에 다 들립니다. 왜냐 하면 그 소리를 모두 초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실 그대로를 아무 조건 없는 마음으로 사물(事物)이나 사람을 보고 대할 때 이것이 정각(正覺)입니다.

우리는 물건의 빛깔도 노란 것을 검게도 검은 것을 희게도 봅니다. 전기 불 밑에서 보면 누렇지만 태양 빛으로 보면 하얗게 보입니다. 그러니 빛깔이 뭐냐 광선의 빛깔과 물체가 조화된 빛깔이지 실제의 빛깔은 아닙니다. 태양 밑에서 희게 보인다 해서 그것이 옳은 게 아니고 태양 빛깔과 섞여서 희게 보이는 것뿐입니다. 만일 여기다 붉은 전등을 비추면 모든 것이 빨갛게 보일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오관이 제대로 보고 듣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따라서 중생들의 생각, 개념은 다 이렇게 불완전한 오관작용에 의지하여 이루어진 것이므로 모두 다 잘못된 것입니다. 중생의 이런 잘못된 착각을 떼어버린 마음자리만 드러난 부처님에게는 얻은 것도 설명할 법도 없습니다. 만일 얻은 것이 있고 말할 것이 있으면 그것은 오관에 의한 착각일 뿐 마음자리가 아닙니다. 마음만 드러난 자리에서는 주관도 객관도 끊어지고 시간 공간이 벌어지기 이전의 자리이므로 얻은 법도 얻을 주관도 없습니다. 또 마음을 깨쳤다고 하여 새로운 것을 얻은 것도 아니고 본래부터 있던 마음 그대로이므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얻을 것도 말할 것도 없는 도리를 말하는 절이란 뜻으로 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이라 한 것입니다.

 

原 文 :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得 阿多羅三三菩提耶  如來有所說法耶

 

[解 義] 부처님께서 수보리존자에게 말씀하시기를 『여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일이 있느냐, 또한 여래께서 어떤 법을 설명한 바가 있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제2절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번역하면 곧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인데 「이 깨달음을 여래께서 얻었느냐? 또 여래께서 무슨 법을 설한 게 있느냐?」 하는 말씀은 「네가 날 40년 따라 다녔는데 부처님께서 성불했더냐? 그래 내가 성불하는 방법을 얘기한 적이 있었느냐? 그런 설법을 한번이라도 들어 본 적이 있느냐?」하고 물으신 것입니다.

 

原 文 : 須菩提言 如我解佛所說義 無有定法 名阿多羅三三菩提    

 

[解 義] 수보리존자께서 부처님 물으심에 『어떤 결정한 법이 있어서 이런 진리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하고 사뢰었습니다.

그런데 무유정법 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無有定法 名阿多羅三三菩提)를 해석하는 데 시비가 있습니다. 보통으로는 「결정한 법이 없는 것 그것이 이름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입니다」 그렇게 새깁니다. 이것을 달리 새기는 이는 「결정한 법이 있어서 그것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여 맨 나중에 전체를 부정합니다. 뜻을 아는 사람은 이리 새기나 저리 새기나 그 뜻은 똑같습니다. 그런데 처음 듣는 사람에게 차이 있게 들리기도 합니다. 첫번째 새김은 어떻다고 결정할 수 없는 것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이름 했다는 것은 일정한 법이 없어서 동그라미라든지 그렇게 결정한 모양 내용이 없는 것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무 모양도 빛깔도 없는 것, 아무 것도 아닌 것, 그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다 이렇게 되므로, 그러면 뜻을 잘 모르는 사람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이구나.」 그래서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인가.」하고 생각하게도 됩니다.

그런데 두번째 새기는 법은 「어떤 결정한 법이 있어 가지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없다.」 그렇게 하면 말로 할 수 없는 거 꼼짝할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어떤 결정한 법이 있어서 그것만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이름할 수 있는 그런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첫번째의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새긴 것과는 표현상 대조가 됩니다. 한문이니 그렇게 새길 수도 있고 또 이렇게 새길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결정한 법이 있어 부처님 얻은 법이 그것뿐이다. 그렇게 이름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렇게 새기는 경우에는 어떤 생각을 붙일 수도 없습니다. 마음을 까딱해 볼 수도 없이 아주 앞뒤가 딱 끊어져 버리게 새긴 것입니다. 「그런데 결정한 법이 없는 것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새기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닌 그건 것인가 보다 하고 꼬리가 남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아무것도 아닌 걸 깨달았나 보다 그렇게 잘못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결정된 법이 없다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조차도 아닌 것이 불법이란 뜻입니다. 이것을 잘못 해석하여 어떤 관념이 마음속에 남으면 나중에 참선이나 염불이나 하다 삼매가 나타날 때 제가 생각하던 것이 나타납니다. 자기 생각이 꿈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금강경 처음부터 말씀하신 내용을 생각해 보면 설명할 수 있는 법을 깨친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아무 것도 결정한 법이 있어 가지고 그것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이름 지은 법이 없느니라.」하고 새긴 두번째 새김이 더 분명합니다. 이것은 금강경뿐 아니라 일체 경전도 다 그렇습니다. 따라서 여기서도 「어떤 결정한 법이 있어서 이것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이름지을 수 있는 법이 애초에 없습니다.」 보통은 이렇게 새기지 않지만 이렇게 새겨야 좀 가깝게 새긴 것입니다.

앞에서 새긴 것처럼 「어떤 결정한 법이 없는 것이 이것만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다. 그 이름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다.」 이렇게 새기고 보면 삼보리의 이름지은 짐작이 남게 되기 때문에 그것은 자기 개념이 생기게 합니다. 처음부터 어떤 개념이 생길 수 없는 곳으로 몰고 들어가야 하는데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인가보다」하는 개념이 생겨 놓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공부하다 그런 경계가 나타나면 「아 ! 이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인가 보다. 이것은 참 뭐라고 할 수 없구나. 부처도 중생도 아니고 별 보고 깨친 것도 아니고 있고 없는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것뿐이구나.」하고 아무것도 아닌 그런 경계가 나타나면 공부가 다 된 줄 알고 거기 주저앉아 버립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사실 그런 게 없다. 꼭 그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지적할 수 있는 법이 없다. 열반 생사도 불법이 아니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아니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하신 것입니다. 이런 것은 공부를 해 보고 자꾸 들으면 짐작이 갑니다.

 

原 文 : 亦無有定法 如來可說

 

[解 義] 『어떤 경정된 법이 있어서 여래께서 그 법을 얻으신 것이 없으며, 따라서 이것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결정된 법을 설명할 만한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런 것을 저희들에게 그냥 말씀해 주신 것이오니 그것은 법을 설명하신 것이 아니옵니다. 『이것만은 오직 석가여래인 내가 깨친 법이니 팔만사천 외도(外道)에게 다 물어 봐도 아무도 모르지만 여래만은 설명할 수 있는 법이다. 하고 말씀하신 그런 법은 없습니다.』 하고 수보리존자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팔만대장경은 뭐냐? 그건 달 보라고 가리킨 손가락일 뿐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손가락만 봅니다. 어린아이니까 달 보라고 가리켜 줘도 손가락만 보는 소견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49년 동안 부처님께서 팔만대장경을 말씀하신 것은 달 가리키는 손가락이고 그게 불법의 골수가 아닌 줄을 알아야 하는데 아이가 달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듯이 팔만대장경에서 가리키는 마음을 깨치지 못하는 것이 중생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하는가.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있다고 설명한 것은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한 그 글자이고 음성이지 그것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아닙니다. 그것이 어떻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될 수 있겠습니까? 하나의 말이고 종이에 먹칠한 것이지 그 글자 가지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찾다가는 안 됩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손가락만 들여다보는 것처럼 백만년 들여다봐도 달은 못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49년 말씀하신 팔만사천대장경이 그 음성이고 글자 먹칠한 것이어서 아무 뜻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어떤 사람이 부처님께서 무상(無上)의 정법을 깨쳐서 성불했다고 한다든지, 최고의 묘법을 49년 동안 설법해 주셨다고 한다면, 이 사람은 곧 달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고 달은 보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原 文 : 何以故 如來所說法 皆不可取 不可說 非法 非非法

 

[解 義] 수보리존자께서 『부처님께서 깨달아 얻은 법도 없고 중생에게 설법하신 말씀도 없다』고 하신 뒤에 계속해서 그 까닭을 말씀하십니다. 『부처님은 새삼스럽게 성불하신 적이 없으며 부처님께서 40년 설하신 말씀도 다 들어 두어야 할 건 한마디도 없습니다(不可取). 또 들었다 하여 누구에게 말해 줄 것 한 마디도 없고 확실히 얘기 안 하면 안 될 그런 법은 본래부터 없습니다(不可說). 또한 받아들일 만하고 받아들여야 할 진짜 법은 하나도 없으며(非法) 더군다나 쓸데없는 것, 법 아닌 것,

아무 소용없는 법, 그런 법도 없다』는 것입니다. 비법(非法)은 잘못된 법, 그릇된 법인데 또 그것조차도 아닙니다. 만일 비법이라도 된다면 그대로 법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가치가 있지만 이런 비법도 아니라는 것 입니다(非非法). 왜냐하면 그것은 중생세계의 상대법(相對法)을 초월한 현성(賢聖)의 법이기 때문이라는 소이(까닭)를 다음에 말씀하십니다.

 

原 文 : 所以者何 一切賢聖 皆以無爲法 而有差別

 

[解 義] 왜 그러냐 하면 어째 제가 그런 말씀을 드리는고 하니 하면서 수보리존자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십니다(所以者何). 일체현성(一切賢聖)이란 곧 모든 불보살님들과 독성(獨聖)이나 나한님들의 세계를 말합니다. 불교에서는 마음을 깨달아 성인이 된 지위에 나아간 분들을 부처님과 보살님들이나 조사님, 나한님들이라 하며 이분들은 다 아무것도 하는 게 없는 무위법(無爲法), 텅 빈 경지, 아무것도 없고, 없는 것도 없다는 마음자리에 들어선 분들입니다(無爲法).

정말 마음의 본 자세에 들어가서 나와 남이 없고, 이해득실(利害得失)이 없고, 생노병사가 없고 아무것도 없는 경지인데, 그러나 이와 같이 하는 게 없는 법 거기에도 보면 초지(初地)보살·이지(二地)보살·삼지(三地)·십지(十地)보살도 있고 52위(位)의 보살경계를 넘어야 부처님께서 됩니다. 이 보살님들은 다 하는 것 없는데 들어가서 이렇게 등급(等級)이 있고 차별(差別)이 있습니다. 마치 서울대학에 입학했다 하면 1학년도 서울대학생이고 3학년, 4학년도 서울대학생이지만, 그러나 공부하는 내용을 보면 1학년, 4학년의 차이가 있고 대학원, 박사과정 이상의 더욱 깊은 내용을 공부하는 차이가 있는 것이나 한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참선(參禪)을 해서 견성(見性)을 했다 해도 처음 깨친 초견성(初見性)을 가지고 다 되는 것이 아니고 거기서부터 무위법(無爲法)에 들어선 것이므로 비로소 깊은 공부를 하게 되고 보임(保任)을 하여 참 수행을 하게 됩니다. 그래야만 초지(初地)에서부터 52위의 보살경계(菩薩境界)를 닦아 올라가서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무위법(無爲法)의 현성(賢聖)의 경계는 하는 것 없는 세계입니다. 그래서 닦는 것 없이 닦고 무심(無心)으로 하는 수행이어서 차별 없는 가운데 있는 차별이므로 중생세계의 분별심(分別心)으로 있는 차별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별입니다(而有差別).

 

 

[說義]

 

상이상학(相而上學)과 상이하학(相而下學)

불교를 처음 믿고 아직 번뇌가 안 떨어져서 육체를 아직 여의지 못한 사람이면 이것을 상이하학(相而下學)이라 할 수 있고 생각이 떨어지고, 육체가 내가 아닌 줄 확인되었다면, 이것은 상이상학(相而上學)이라 할 것입니다. 부처님의 법을 듣고 배워서 생각이 뚝 떨어져 버려서 일체 모든 망상이 없어져 몸뚱이도 어디 갔는지 모르고 이 세계도 안 보여 다만 자기 정신만 하나 깨끗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부터 이제 불법을 비로소 처음 만난 것입니다. 육체에 맨날 끄달려 사는 인간은 불법과 진짜 인연을 맺기 어렵습니다. 정말 진정한 불제자가 되려면 <상이상학> 여기 들어와서 52위나 되는 계급을 닦아야 합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무아(無我)는 육체를 <나>라는 망상을 버리는 데서 시작입니다.

 

무위법(無爲法)에도 차별 있다

육체를 가지고 <나>라 하는 뿌리가 박혀서 범부는 이것 때문에 고해(苦海)를 헤매고 돌아다니는 겁니다. 개나 돼지 그게 나라고 하여 남을 다 죽입니다. 육체가 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전 생명 다 죽이고라도 나는 살려고 덤비는 겁니다. 육체를 나라고 생각하는 여기서 온갖 생각을 다 내는 겁니다. 박사가 되어봤자 결국은 밥 한 그릇 잘 얻어먹자는 것 밖에 안 됩니다. 그러니까 상이상학(相而上學)에서부터 곧 생각을 초월하는 거기서부터 현성(賢聖)의 지위는 시작되는데 52위나 올라가야 합니다. 세상에 아무 할 일없다는 노자(老子)도 52위의 어느 정도까지 갔느냐, 우리가 볼 때 그의 도덕경 같은 내용으로 미루어 보면 12위까지 겨우 올라간 것으로 보입니다. 공자(孔子)는 그 가르침이 조리가 있긴 하지만 그러나 사서삼경의 내용으로 보아 무위법(無爲法)을 깨달은 깊이가 보살의 52위설(位說)에 대조해 보면 노자의 경우보다 못한 것으로 판명됩니다. 또 유교에서는 「인간 성품이 본래는 착하다고 하고 본래 착한 것인데 공연히 너희가 악에 젖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품이 본래 선 같으면 근본 성품이 선인데 악한 생각이 어디서 나올 수 있습니까?」 그것은 어설픈 얘기가 됩니다.

불교의 상이상학(相而上學)이란 보고 듣고 삼천대천세계 천당 지옥 돌아다니고 하는 거 모두를 말합니다. 이것을 초월한 경지에 들어가야 상이상학이 되니 불교는 세상학문이나 종교와 너무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겨우 영혼의 세계가 있겠다, 4차원의 세계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아무 생각 없는 세계, 거기 들어서서도 크게 52차원의 세계를 나눕니다. 잠재의식이 차츰 진보해 가는 과정입니다. 52위의 처음에 들어선 것은 무(無), 곧 아무 생각 없는 데 곧 현상계가 없는 데 들어선 것, 아무 것도 할일 없는 데 이른 것입니다. 그 실력에 따라 차이가 있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범부(凡夫) 때나 부처 때나 변하지 않는 것

불·보살이나 조사·나한네들은 무위법(無爲法)의 열반(涅槃)세계에서 생사를 초월했다 하고 범부중생들은 생사윤회(生死輪廻)의 세계라고 우리는 분별하지만, 이렇게 생각이 남아 있고 얻은 게 있다고 하는 한, 생사다 열반(涅槃)이다 하는 것이 모두 번뇌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나고 죽고 하는 이거나 생사를 초월한 그거나 다 같은 것인데 그러면 그렇게 꼭 같다고만 결정할 수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천당·지옥·축생으로 돌아다니는 그 가운데서도 뭐가 하나 안 죽는 게 있습니다. 몸뚱이는 천당·지옥·축생이 되고 남자·여자가 됐다, 부자도 가난살이도 온갖 것으로 바뀌지만 그래도 하나도 바뀌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중생의 몸으로 탐·진·치(貪瞋痴)로 남과 멱살 잡고 피투성이 되어 세계전쟁을 일으킨 그 사람이나 성불한 사람이나 달라지지 않는 그게 대체 뭐냐?

석가여래께서 깨쳤다고 하지만 실달 태자 때와 달라진 거 하나도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실달 태자가 왕자로 있을 때나 생사가 무서워 처자, 권속, 국가민족도 다 바리고 저 혼자만 살려고 성을 넘어 야반도주(夜半逃走)한 그때나, 또 마음을 깨쳐 생사를 완전히 초월한 때나 내내 그겁니다. 인생이 허망하다고 버리고 간 그 마음이나, 나중에 깨치고 나서 보니 내내 깨치려고 도망가던 그 마음이었습니다. 그 때는 육체를 나라고 믿었기에 육체 죽는 것을 겁내어 생사를 초월해야겠다고 했지만, 깨치고 보니 죽음이 싫다고 가던 그 마음이나 깨치고 안 그 마음이나 하나도 달라진 게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만이 나 혼자만 깨쳤다고 설명할 수 있는 그런 특별한 법은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 하면 태자로 있을 그때 내가, 사람은 누구나 죽는 것인데 이것이 급한 문제라고 하여 도망을 가서 야수다라도 자식도 국가민족 다 버리고 세상이 허망하니 도망가자고 결심하던 내내 그 마음이 꿈 깨고 보니 그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가 되고도 그 면목(面目)은 안 바뀌었으므로 성불해도 실달타 그대로입니다. 그러니 다만 없어졌다면 육체를 <나>라고 하던 착각만 없어진 것입니다. 깨치기 전에는 육체를 나라고 착각했을 뿐이지 이 마음자리가 조금도 달라진 건 아닙니다.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알고 다리 아프면 쉴 줄 아는 거 그 마음자리는 똑같습니다. 뱃속에서부터 이 마음이 나인 줄 알았으면 장가 들여도 마누라하고 안자면 그만이고 그렇게 할 수 있었지만 그땐 몸뚱이만 나라고 생각하던 범부이다 보니 마음이 <나>인 줄을 몰랐던 것입니다. 어떤 마음이 <나>인지 늘 밥 먹고 생각하는 이걸 가지고 마음이라 했으니 하루에도 천 가지 만 가지 생각이 죽 끓듯이 끓는 그 가운데 어떤 마음이 진짜 마음인지 그것을 모르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마음을 깨치고 보니 온갖 망상을 내고 죄짓던 그 마음 그대로여서 부처가 됐다해도 다른 사람보다 다른 걸 깨친 게 아닙니다. 실달타 태자 때는 없던 것을 새로 깨친 것이 아니고 다만 육체를 나라고 했기 때문에 세상이 참 복잡했던 것뿐입니다. 부처님께서 어떤 법을 깨쳐서 범부 때 모르던 것을 새로 깨친 것도 아니고 동시에 새로 얻은 법이라 해서 나만이 설명할 수 있는 법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론(理論)은 불법(佛法) 근처도 아니다.

깨쳤다고 해서 새로 얻은 것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법, 아무것도 할 일 없는 무위법(無爲法)의 세계를 알지 못하고 법도 아닌 것을 집착하고 <나>도 아닌 육신을 <나>로 삼아서 고해(苦海)에 헤매는 중생들을 위해 40년동안 말이 되지도 않는 것을 부득이 입이 닳도록 법을 일러 주셨지만, 그러므로 이것은 소위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은 가히 간직할 것이 못되고 한마디 기억해 둘 말이 없습니다. 남보고 불법을 들었다고 전해 줄 말도 못됩니다. 40년 설했다는 것도 말도 안되는 소리라는 이런 법이며 아닌 소리조차 아니어서 비판할 수 있는 대상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체 모든 성인들은 상이상학에 올라가 있으며, 거기서도 차별이 있어서 국민학교·중·고등·대학도 있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 떨어진 데를 뭐라고 설명합니까? 부처님 경지나 초지보살(初地菩薩)이나 상이상학에 올라선 자리는 설명이 안 됩니다. 불교를 학문이나 이론으로만 하는 사람들은 불법 근처도 못간 사람들입니다. 저 동구 밖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저 그 사람들 불교 설법한다고 하지만 참으로 경의 뜻을 알지 못합니다. 네가 옳으니 내가 옳으니 지도해 주는 법사마다 불법이 다릅니다. 팔만 사천법이 다 무위법에 들어서려는 것이며, 모든 번뇌를 떼어 버리려 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사건들은 허망하고 지킬 수 없는 것이고 지킬 수 없는 것을 지키는 것뿐입니다. 달아나 버리는 게 목적이고 아주 영원히 못 보게 달아나 버려야 합니다.

돈도 옷도 밥도 영감도 마누라도 딸도 이 지구도 태양도 우리가 보고 듣고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도 사실은 다 설명이 안 됩니다. 지구가 어떻게 생겼느냐 하면 과학적으로도 완전한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생각할 수 있는 것 모두가 다 어떻게 생겼다고 설명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부처님 불법만이 쓸데없는 소리가 아니라 세상만사가 다 그렇습니다. 그러니 일체현상이 다 무위(無爲)속에 들어서 거기서부터 불법 닦는 것입니다. 그러니 얘기 듣고 불법 아는 사람 참 딱한 일입니다. 마치 속아 있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부처님 말씀에 속아 있는 것이고, 남의 음성에 속아 있는 것이며 미친 소리에 속아 있는 것입니다.

참선하면 견성한다고 자꾸 참선만 하고 앉아만 있지, 그러나 참선을 무엇 때문에 하는 줄도 모르고 맹목적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참선하면 견성성불한다고 그러는데 견성성불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하니 큰일입니다. 옳은 선지식(善知識) 만나서 그런걸 다 알고 참선도 다 해본 사람, 그런 선지식 만나 공부하면 그 지식이 내 지식이 되기 때문에 무위법에 곧바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만일 선지식이 아닌 이를 만나 따라가면 극락세계 간다는 게 뒤로 되돌아가거나 까딱하면 지옥으로 가게도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선을 한다든지 염불을 하든지 아무 생각 아무 하는 것 없는 무위법(無爲法)에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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