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相)을 짓지 않는 것과 뜻을 세우는 것이 양립할 수 있나요? 스님의 금강경 강의에서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가 무엇을 뜻하는지 잘 들었습니다. 분별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마음에 평온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것이 어렴풋이나마 이해가 되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통일을 염원하거나 정토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 상을 짓지 않는 것과 배치되는 것이 아닌지 의문이 듭니다. 만일 정토세상을 염원하게 되면 정토세상과 배치되는 사람들 또는 그들의 행동에 대해 분별심이 날 것 같습니다. 통일을 방해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행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고요. 상을 짓지 않고도 뜻을 세워 추구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번뇌 없이 인생을 의미 있게 살 수 있어 제일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질문자가 약간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아요. 상을 짓는 것과 뜻을 세우는 것은 상반되는 문제가 아닐 뿐만 아니라 양립할 수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 지금 전쟁이 일어난다면 죽는 사람이 수십만 명 생기겠죠. 수십만 명이 죽으면 그 가족들은 아마 백만 명이 될 것이고, 이 사람들은 굉장히 심적으로 괴롭겠죠. 또 난민이 많이 생기게 되겠죠. 그럼 여러분들도 집과 재산을 다 두고 도망을 다녀야 하고, 다른 나라에 가서 천막을 치고 산다든지, 학교 같은 데에 임시로 수용돼서 살아야 하니까 생활도 굉장히 불편하고, 마음도 굉장히 괴롭겠죠. 이 때의 괴로움은 지금 여러분들이 아이가 말을 안 들어서 괴롭다고 하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남편이 술 먹고 들어와서 못 살겠다 하는 것과도 비교가 안 됩니다. 회사에서 부하가 말을 안 듣는다, 상사가 잔소리를 해서 괴롭다 하는 것과도 비교가 안 됩니다.

물론 그런 상황 속에서도 수행자는 남을 도우면서 싱글벙글하고 살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국민들은 그 고통이 이루 말할 수가 없을 겁니다. 그럴 때 제가 지금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을 상담해 줘서 인생이 행복해지게 하는 것도 물론 필요한 일이긴 합니다만, 그것보다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환경을 조성해주는 일이야 말로 절대 다수 국민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일이 되겠죠. 그러니까 우리가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목표라면, 같은 조건하에서는 개개인들이 노력해서 행복도를 더 높이도록 하는 것이 과제가 될 테지만, 개개인들을 둘러싼 이 환경이 조금 더 나빠지는 것을 방지하거나 조금 더 나은 쪽으로 만들 수 있다면 우리는 더 행복해질 수가 있겠죠. 즉, 같은 조건에서 개인이 마음을 어떻게 갖느냐에 따라서 괴로움이 줄어들고 행복이 늘어나도록 하는 것을 ‘수행’이라 말하고, 주어진 환경이 나빠지는 것을 방지하거나 조금 더 나은 쪽으로 개선함으로 해서 사람들의 행복들을 높이는 것을 ‘정토세상 만들기’라고 말합니다. 이해가 되세요?”

“네.”

 

“그러면 ‘수행’과 ‘정토세상 만들기’, 이 두 가지가 다 필요해요, 그냥 개인이 수행만 하면 될 것 같아요?”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합니다.”

 

“예. 그렇다면 ‘불교를 믿는 사람이 개인 수행만 하면 되지 왜 세상 문제에 관심을 갖느냐?’ 이렇게 말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얘기가 됩니다. 그렇게 말하는 불교는 잘못된 불교입니다.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불교잖아요.

그래서 부처님의 원래 가르침은 두 가지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첫째, 환경이 어떻든 자기 수행을 해서 그 주어진 환경 안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이런 환경 자체가 악화되는 것을 막고 개선되는 쪽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부처님이 계급 제도를 부정하거나 남녀 차별을 부정하는 얘기를 하실 필요가 없었겠죠. 지금도 인도는 계급 차별이 얼마나 심합니까? 그런데 부처님은 그런 것들을 다 부정하셨습니다.

 

 

그것처럼 지금 남북이 분단되어 있으니까 서로 미워하고 군비 경쟁을 하는데, 평화적으로 통일하는 것이 이렇게 싸우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보고 그런 통일을 추구함으로 해서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중생들이 조금이라도 더 행복해지도록 도와주는 것이 바로 수행자가 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전쟁을 해서라도 통일만 되면 된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 통일을 하자는 것인데, 전쟁을 해서라도 통일하자는 것은 사람들이 괴롭든지 말든지 통일만 하면 된다는 통일 지상주의에 사로잡힌 생각입니다.

이렇게 ‘통일만 하면 된다’고 고집하는 것을 ‘상을 짓는다’라고 말하는 겁니다. 이와 달리 분단된 상태보다는 통일된 상태가 그래도 사람들에게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여주고 행복도를 높여준다고 보고 그것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바로 통일에 대한 원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상을 짓는 것과 원을 세우는 것은 차원이 다릅니다.

우리가 일본에 대해서 무조건 ‘우리 나라가 옳고, 일본은 틀렸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분별심에 해당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옳다고 하는 상을 가진 것입니다. 그런데 일본이 우리를 억압하고 한국 사람들을 차별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 차별에서 벗어나는 것은 한국 사람들의 행복도를 높이는데 도움이 된다고 보고 독립운동을 펼치는 것은 상을 짓는 것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여성이 만약 차별을 받는다면 이 차별을 없애는 것은 바로 정토세상을 만드는 일에 해당합니다. ‘남자들은 나쁜 놈들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것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상이 무엇인지 쉽게 비유하면 이렇습니다. 만약 제 안경에 파란 색깔이 입혀져 있다고 칩시다. 그러면 이 흰색 벽이 제 눈에는 파랗게 보이겠죠. 이 때 진실은 저 벽은 흰색인데 내 눈에는 파랗게 보인다는 것이죠. 그런데 제가 안경을 끼고 있는 상태에서는 그렇게 인식이 안 되고 ‘저 벽이 파랗다’ 이렇게 인식이 됩니다. 여기서 안경에 입힌 색깔과 같은 것이 바로 ‘업식’입니다. 여러분들은 다 자기 나름대로의 업식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자기의 업식으로 사물을 보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사물을 본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나에게 그렇게 인식이 될 뿐인 겁니다. ‘저 인간은 나쁜 놈이다’라고 말할 때 그 사람이 본래 나쁜 사람이 아니라 내 업식에 비춰진 인상이 나쁜 놈으로 인식되는 겁니다. 똑같은 행위라 하더라도 누가 보느냐에 따라 달리 인식된다는 얘기입니다. 어떤 행동은 본래 좋은 행동도 아니고 나쁜 행동도 아닌데 그것을 인식하는 과정에서는 그 행동을 나쁜 행동으로 인식하는 사람도 있고, 좋은 행동으로 인식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나에게 나쁜 행동이라고 인식이 될 때 ‘그 사람이 진짜 객관적으로 나쁜 행동을 했다’라고 착각한다는 겁니다. ‘저 벽은 내 눈에는 파랗게 보이는구나’ 이렇게 알고 있지 않고 ‘저 벽은 본래 파란색이야’ 이렇게 알고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주관을 객관화시키는 것을 ‘상을 짓는다’라고 말합니다. 상을 짓는다는 것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셨어요?”

“네.”

 

“상을 안 짓는다는 것은 저 벽을 곧바로 하얗게 보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저 벽이 파랗게 보일 때 ‘내 눈에는 저 벽이 파랗게 보이는구나’ 이렇게 아는 것도 또한 상을 안 짓는 것이 된다는 겁니다. ‘내 눈에는 저 행동이 나쁘게 보이네’ 이렇게 자각하는 것은 상을 짓는 것이 아닙니다. 그 행동이 잘된 것인지 잘못된 것인지는 나도 몰라요. 그러나 ‘내 눈에는 나쁘게 보이네’라고 아는 겁니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저 벽을 보고 ‘빨갛다’라고 주장해도 ‘눈이 삐었나?’ 이렇게 화내지 않는다는 겁니다.(모두 웃음)

 

 

상을 짓기 때문에 시비가 일어나는 겁니다. 상을 짓지 않으면 시비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네 눈에는 저 벽이 빨갛게 보이는구나’ 이렇게 될 뿐입니다. 상을 짓지 않으면 이렇게 서로 다르게 봐도 시비가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저 벽이 빨갛게 보인다고 해서 무조건 상을 지은 것이 아닙니다. ‘내 눈에는 저렇게 보이는구나’ 하고 자각하는 것이 상을 짓지 않는 겁니다. 그러면 ‘다시 한번 살펴보자’ 이렇게 나오게 되고 서로 소통을 할 수 있게 되죠. 한 사람은 빨갛다고 하고 한 사람은 파랗다고 해도 서로 소통이 가능해지고 갈등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저 벽은 파랗다’ 이렇게 객관적으로 여기니까 상대가 빨갛다고 하면 ‘저 사람이 미쳤나?’ 이렇게 시비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상을 짓지 않으면 서로 다른 견해를 갖고도 서로 소통을 할 수 있습니다. ‘상을 어떻게 안 지어요’라고 반문하겠죠. 예, 맞습니다. 우리는 상을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주관적으로 인식된 것을 객관화시킬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수행자라면 ‘파랗다’라고 할 때 얼른 자각을 해서 ‘아, 내 눈에는 파랗게 보이는거지’ 이렇게 사실대로 돌아올 수 있어야 합니다. 저 벽은 하얗다고 인식하는 것만이 사실이 아니라 ‘내 눈에는 파랗게 보인다’라고 인식하는 것도 사실인 거에요. 이렇게 상을 짓지 않으면 우리의 삶이 더 행복해지고, 인간관계가 더 좋아지고, 세상이 더 평화로워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상을 짓는 것과 ‘지구 환경을 보존해야겠다’, ‘저 가난한 사람들을 좀 도와야겠다’ 하고 원을 세우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데 남을 도와주어야겠다는 것도 상을 지으면 본질에서 어긋나게 됩니다. 남을 도와야 한다는 상을 지으면 상대가 도움이 필요없다고 하는데도 돕겠다고 고집하게 됩니다. 도움이라는 것은 상대가 필요로 하는 것을 도와주는 것이잖아요. 상대가 필요하지 않는 것을 돕겠다고 하는 것은 내 기분에 불과한 것이지 실제로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상대에게는 고통이 되는데도 자기는 돕는다고 난리인 경우가 있잖아요. 그런 행동은 사실 다 자기가 좋아서 하는 행동에 불과한 겁니다. 그래서 상을 짓는 것은 그것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다 일을 그릇되게 만듭니다.

 

 

예를 들어 ‘깨달아야 되겠다’ 하는 것도 상을 짓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을 객관화시키는 순간 깨달음이라고 하는 허상에 매이게 됩니다. 그래서 깨달았느니 못 깨달았느니 하는 것으로 상대를 시비하게 됩니다. 이것은 깨달음이라는 것으로 또 하나의 상을 만든 것입니다. 질문자는 의문이 좀 해소가 되었어요?”

“아니요. 아직 해소가 안 되었습니다. 뜻을 세워서 그것이 이뤄지기를 간절히 염원하게 되면, 그것이 안 될 때 실망을 하게 되잖아요.”

 

“실망을 하게 되면 그것은 상을 지은 것이 됩니다. 안 되었다고 왜 실망을 해요? 안 되면 될 수 있게 다시 하면 되죠.”

“그럼 ‘안 되어도 좋다’ 이렇게 생각해야 하나요?”

 

“안 되어도 좋다고 생각하라는 것이 아니라 노력을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안 된 것이잖아요. 안 되는 것이 뭐가 좋긴 좋아요?”(모두 웃음)

“그렇게 안 이루어졌을 때 어떻게 하면 다시 에너지가 생길 수 있을까 궁금하거든요.”

 

“뜻을 세우는 것은 좋은데 상을 짓게 되면 그것이 안 되었을 때 괴로워집니다. 그러나 상을 짓지 않게 되면, 안 되었을 때 괴로워하지 않고 다시 노력하게 됩니다. 괴로워하고 있을 시간에 한번 더 노력하지 왜 괴로워하고 있어요? 기분이 나쁘면 ‘아, 내가 집착을 했구나’ 하고 알아차려서 탁 놓고 다시 시작해야죠.

 

 

어떤 결과를 보고 기분 나빠하면 내가 상을 지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집착을 했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결과가 좋도록 최선을 다하되 결과가 주어지면 받아들이고 다시 개선을 위해서 노력해야죠. 부족하다 싶으면 ‘다음에 또 잘해야지’ 이렇게 다짐하고요.

그래서 ‘보살은 다만 할 뿐이다’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지장보살도 상을 지으면 성질이 나서 지옥에 오래 못 있습니다.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 힘든 것이 아니네요. 지옥에 떨어진 것은 자기가 잘못해서 떨어진 건데 너무 힘들어하니까 구제를 해줬단 말이에요. 그렇게 한 번 구해줬으면 정신차리고 다시는 지옥에 안 와야 하잖아요. 그런데 조금 있으면 또 지옥에 떨어진단 말입니다. 구제해주면 또 떨어지고, 구제해주면 또 떨어지고를 반복합니다. 저 같으면 세 번만 반복하면 그냥 포기해버릴 겁니다. 그 이유는 ‘내가 구제했다’ 하는 상을 짓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장보살은 ‘지옥에 떨어지는 것은 그 사람의 일이고, 그것을 구하는 것은 나의 일이기 때문에 나는 구하기만 할 뿐이다’라고 하면서 ‘저 사람은 두 번 떨어졌다, 세 번 떨어졌다’ 하고 따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원본존 지장보살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그 원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대원’이라고 표현하는 겁니다.

상대가 실수를 하더라도 보통 세 번까지는 봐주는데 그 이상이 되면 여러분들도 도저히 못 봐주잖아요. 지장보살을 염한다는 것은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도록 그 폭을 점점 넓혀간다는 것을 말합니다. 억울하게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벌받을 짓을 한 사람들까지도 불쌍하게 여겨서 돕고자 하는 것이니까 그 원이 얼마나 큽니까. 그러니까 남편이 바람을 피워놓고 그 상대 여자와 관계가 안 풀려서 너무 너무 괴로워하고 있는데, 그것을 도와주는 것이 지장보살이다 이 말입니다.(모두 웃음)

 

왜 지장보살을 ‘대원’이라고 부르는지 이해가 좀 되세요? 그러니 상을 짓게 되면 원이 그렇게 커질 수가 없습니다. 처음에 마음을 내었다가 자기 뜻대로 안 되면 성질이 나서 금방 집어치워 버리게 됩니다. 여러분들도 그동안 통일운동을 열심히 했는데 지금 돌아가는 상황은 오히려 거꾸로 가는 것 같으니까 절망감이 들지요? 이 때 절망감이 드는 이유는 ‘내가 노력했다’ 하는 상을 짓기 때문이에요. 뒤로 밀리게 되면 물러나서 다시 밀면 되거든요. 우리가 차를 밀다보면 밀고 있는데도 뒤로 밀릴 때가 있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바보 같은 짓을 한 것이냐. 아니에요. 내가 밀지 않았다면 뒤로 밀릴 때 더 멀리 밀려나가게 되었을 겁니다. 내가 밀어서 앞으로 간 것도 성과이지만, 가만히 내버려두면 뒤로 10m 밀려날 것을 그래도 내가 열심히 밀어서 5m만 밀리게 했다면 이것도 큰 성과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이것을 성과라고 생각하지 않잖아요. 죽어라고 노력했는데 오히려 안 좋아졌다고 여깁니다.

 

 

이런 어려운 시기에도 포기하지 않고 통일운동을 계속 해나가는 것은 앞으로 못 간다 하더라도 뒤로 덜 밀리도록 막는 효과는 있는 겁니다. 즉 5000원 손해 날 것을 3000원만 손해나게 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는 이렇게라도 해야 역사를 발전시킬 수가 있는 겁니다.”

“이제 이해가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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