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에 따르면 이러한 《반야경》의 무상(無相) 법문은 

동아시아 불교, 특히 한국 불교에서 중시하는 

《화엄경》의 교지(敎旨)와도 다르지 않아 

두 경전은 동등한 지위를 차지한다. 

그는 《대혜도경종요》에서 중국 교상판석의 시초가 되는 

이교오시설(二敎五時說)과 《해심밀경》에 의거한 법상종

(法相宗)의 삼시설(三時說)이 갖는 오류를 지적하면서, 

《대지도론》에 근거하여 《반야경》이 "논쟁할 여지가 

없는(無諍處)" 가르침이며 성문ㆍ연각ㆍ보살의 모든 

승(乘)을 위한 제3시의 요의법륜(了義法輪)적 

성격을 갖는다고 보았다.[138]

또한 원효는 '생사와 열반, 어리석음과 지혜가 모두 

허망하고 진실하지 않다'는 《화엄경》의 궁극적인 깨달음과 

'열반보다 훌륭한 법이 있더라도 환(幻)과 같고 꿈과 같다'는

 《마하반야바라밀다경》의 가르침이 일치한다고 말하였다. 

즉 원효의 해석에 따르면 반야교와 화엄교 모두 일체법의 

공(空)·무자성(無自性)·무생무멸(無生無滅)·본래적정

(本來寂靜)·자성열반(自性涅槃)·무자성성(無自性性)

을 설시하고 있으며, 

따라서 두 전승 중 어떠한 것을 요의로 간주하더라도 

불성, 여래장, 열반, 법신 그리고 그와 동일한 의미로 

쓰이는 "참 나" 또한 고정불변한 실체가 아니라 무자성, 

공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는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다.

이기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대혜도경종요(大慧度經宗要)》

■ '산은 산, 물은 물(山是山 水是水)' 의 반야중관적 해석

이 노승이 30년 전 참선을 하기 이전에는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것(山是山 水是水)’으로 보였다. 

그러던 것이 그 뒤 어진 스님을 만나 깨침의 문턱에 

들어서고 보니, 이제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더라(山不是山 水不是水).’ 그러나 마침내 

진실로 깨치고 보니, ‘산은 역시 산이고, 

물은 역시 물이더라(山祗是山 水祗是水)’. 

그대들이여, 이 세 가지 견해가 서로 같은 것이냐 

다른 것이냐? 만일 이것을 터득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 노승과 같은 경지에 있음을 내 허용하리라.

《속전등록(續傳燈錄)》(김종욱 譯)

송대(宋代) 청원 유신(靑原 惟信) 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山是山 水是水)' 공안은 공성과 연기의 

쌍운(雙運), 혹은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제법실상

(諸法實相)을 표현한 공안이다. 

공안의 세 구절은 각각 다음의 인식들과 상응한다.

자성(自性)으로 성립한다고 여기는 세속의 전도(顚倒)된 

인식-공성삼매(空性三昧) 중 근본지(根本智)(=무분별지

無分別智)와 공성이 물에 물을 따르듯, 버터에 버터를 

따르듯 하나되어 일체의 차별상을 여읜 인식- 후득지

(後得智)를 통해 일체법이 신기루, 환(幻)과 같이 

자성으로 현현하는 것을 분별하는 인식[139][140]

김종욱 동국대 교수는 청원 유신의 공안을 하이데거와 

불교 양자의 관점에서 비교철학적으로 분석하였는데, 

그 중 (주로 반야중관에 입각한) 불교적 관점에서의 

해석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것(山是山 水是水)’

'산은 산이다’ 또는 ‘산은 산으로서 있다’는 것을 

불교식으로 표현하면, ‘산은 자성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 된다. 여기서 자성(自性, svabhāva)이란 문자 

그대로 ‘스스로 있다(sva-bhāva)’는 측면에서는 

‘자기만의 존재 방식을 지니고 있는 것’을 뜻하고, 

‘언제나 있다(sarvadā-bhava)’는 측면에서는 ‘삼세의 

매 찰나마나 실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산이 산으로서 있다’는 것은 설일체유부식으로 표현하면, 

‘산은 색법으로서 자성적으로 있다’는 말이 된다. 즉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저 산은 매 찰나마다 변화해 

가는 무상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특정한 모양과 색깔을 지닌 어떤 물질적인 것이라는 

점, 다시 말해 색법(色法, rupa-dharma)이라는 점에서는 

삼세에 걸쳐 실유하는 자성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무상한 변화 과정을 인정하면서도 그 배후에 

연속적으로 항유하는 기체적(基體的) 요소를 상정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변화 현상 이면의 불변적 본체를 

존재자성이라는 형식으로 찾고자 한 서양의 전통적 

형이상학의 발상법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삼세에 걸쳐 항유하는 자성과 영속적으로 현존하는 

존재자성은 산을 산으로서 있게 하는 근거와도 같은 것들이고, 

여기에 토대를 두고 있기에 ‘산은 산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2.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더라

(山不是山 水不是水).’ 산불시산 수불시수

'산은 산이 아니다’라는 말은 ‘산은 자성적으로 있다’는 

주장에 대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비판은 

소위 반야의 통찰에 의해 얻어진다. 

반야는 개념적 분별을 넘어선 직관적인 통찰이며 또한 

있는 그대로를 보는 여실지견(如實知見, yathābhūta-

ñāṇa-dassana)이라는 의미가 있다. 

분별을 넘어선 직관이기에, 반야는 주객 분리의 이원적 

사고가 극복된 무분별의 지혜(無分別智)이며, 그런 무분별적 

불이(不二)의 집중(samādhi, 三昧, 定)을 통해 주어지는 

근본적인 체험이다. 

또한 반야가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을 연기(緣起)의 원리에 따라 무상(無常)하고 

무아(無我)인 것으로 본다는, 일체법에 대한 

연생적(緣生的) 통찰을 의미한다. 

즉 반야의 시야 한가운데서 일체법의 총체적 모습이 

무상과 무아의 것으로 드러나는데,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공(空)한 것으로 나타난다고 하며, 이 공이 바로 자성

(自性)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자성에 대한 전면적 부정, 그것이 공(空, śūnyatā)이다. 

연기한 모든 것에 자성이 없으므로 일체는 모두 공이다

(一切皆空). 이렇게 자성을 부정하여 ‘공을 설하는 

목적(空用, śūnyatā prayojana)’은 희론의 

적멸에 있다. 

희론(戱論, prapañca)이란 문자 그대로 허위의 쓸모없는 

이론을 말한다. 이처럼 지혜를 얻는 데 전혀 도움이 안 되는 

희론이란, 자성을 상정함으로써 일어나는 사유 구성, 혹은 

결정화되고 대상화된 분별(vikalpa), 한마디로 

자성적 분별심을 뜻한다.

분별하고 나서는 그렇게 분별된 것이 있다거나 없다라는 

양자택일적인 판단을 내린 다음, 그 극단적인 판단 

내용의 어느 하나에 집착하게 된다. 

무수한 조건들의 상호 작용하는 모습을 각 측면에 따라 

‘생(生)이다’ ‘멸(滅)이다’ 등으로 나누지만, 그것들 자신이 

어떠한 자성도 지니고 있지 못하므로 확정적으로 단정

지을 만한 생과 멸의 상(相)이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생과 멸에는 애당초 자성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생을 부정하면 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생이 부정되므로 

멸 또한 부정되어 불생 불멸이 된다. 

따라서 연기한 모든 것에는 자성이 없어 불생불멸(不生不滅), 

불상부단(不常不斷), 불일불이(不一不異), 불래불거(不來不去)

한 것이므로(八不), 양극단의 어느 하나에도 집착해서는 

안 되는 것(中道)이다. 

이렇게 무자성(無自性, nihsvabhāva)이어서 무분별(無分別, 

nirvikalpa)이고 무집착(無執著, anabhiniveśa)인 중도에 

설 때, 희론은 종식된다.

3. ‘산은 역시 산이고, 물은 역시 물이더라

(山祗是山 水祗是水)’ 시기시산 수기시수

'산은 역시 산이다’라는 것을 불교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일체를 철저히 공화(空化)시킴으로써 일체가 신비롭게 

드러난다는 것, 다시 말해 진공(眞空)이 곧 묘유(妙有)

라는 것을 의미한다.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의 모든 현상이 공한 것이라면, 

일체를 허무화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으나, 

공이란 비유비무(非有非無)의 중도로서 다만 무자성의 

연기를 의미할 뿐이다. 

연기한 것을 공이라 하는 이유는, 연기한 것에는 자성이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공이 곧 연기한 것을 가리키는 이상, 

공이야말로 모든 것을 연기적으로 성립시켜 주는 근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공의 이치가 있음으로써 모든 것이 이루어지니, 

공의 이치가 없다면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공이 곧 물질적인 것이다(空卽是色)’고 한다. 

오히려 공이기 때문에 공허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공이 이렇게 일체를 성립시켜 주는 것이라면, 

공은 현상 이면의 절대적 본체가 아닐까 하는 혐의를 

받을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무자성의 공이 자성화되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이에 대해 용수는 이렇게 말한다. 

“만약 공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응당 공한 것도 있어야 

하지만, 실제로 공하지 않은 것이 없으므로, 어떻게 공한 

것이 있을 수 있는가?” 즉 모든 것이 공이므로(一切皆空), 

공 또한 역시 공하다(空亦復空)는 말이다.

색과 공 모두 무자성의 공이므로 색은 곧 공이 되고 

공은 곧 색이 된다. 그리하여 색은 곧 공이라 하여 일체를 

철저하게 공화시키는 것(眞空)과, 공은 곧 색이라 하여 

그렇게 공화됨으로써 일체가 신비롭게 드러난다는 

것(妙有)이 둘이 아닌 것이 된다. 

즉 진공이 곧 묘유로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부정(眞空)을 통해 대긍정(妙有)이 된다는 

뜻이기도 하고, 대부정(眞空)과 대긍정(妙有)에 

차별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렇게 진공이기도 하고 묘유이기도 한 것에 대해서는, 

부정과 긍정의 어느 하나로 고정적으로 분별되지 않기 

때문에, 그저 같고도(如) 같다(如)고 할 따름이다. 

그저 ‘같고도 같은 것(如如, tathatā)'은 '진실로 같은 것

(眞如, bhūta-tathatā)'이며, '참으로 있는 그대로의 것

(如實, yathā-bhūta)'이다. 바로 이런 진여가 일체의 

진상(諸法實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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