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보리야, 보살도 또한 이와 같아서

만약 내가 마땅히 한량없는 중생을 멸도에 들게 했다고 한다면

이는 보살이라 이름할 수 없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실로 어떤 법에도 집착하지 않는 이를

보살이라 이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래는

일체법은 아도 인도 중생도 수자도 없다고 한 것이다.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내가 마땅히 불국토를 장엄하리라고 한다면

이는 보살이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여래가 설한 불국토의 장엄은 곧 장엄이 아니라

그 이름이 장엄이기 때문이다.

 

무아의 설법은 계속되고 있다.

보살이라고 하더라도 스스로

내가 중생을 멸도에 들게 했다거나

내가 깨달았다거나

내가 중생을 깨닫게 했다거나 하는 등의

내가라는 아상에 빠져 있다면 그는 보살이라 이름할 수 없다.

 

보살은 중생을 멸도에 들게 할주체가 없다.

라는 것이 완전히 사라졌는데

어찌 중생을 멸도에 들게 할 내가 생겨날 수 있겠는가.

 

보살은 한없이 중생을 멸도에 들게 하지만

단 한 명의 중생도 멸도에 들게 한 적이 없다.

보살이란 어떤 한 법에도 머물러 집착하지 않는 자를 이름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멸도에 들게 했다라는 상에 갇혀 있다면,

중생을 구제했다는 법에 집착해 있다면

그는 보살일 수가 없는 것이다.

 

아직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중생에게는

부처와 중생이 나누어져 있고,

생사와 열반이 나누어 져 있지만

이미 무아법을 깨달은 보살에게는 그 어떤 종류의 나뉨도 없다.

 

부처와 중생도 없으며,

생사와 열반도 다 헛된 꿈에 불과하다.

이 세상은 이미 활짝 핀 한 송이 연꽃이다.

 

모든 사람에게 깨달음의 씨앗 불성이 있으나

아직 발현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 불성을 싹틔워야 한다는 말은 다 방편일 뿐이다.

 

무아법을 깨달은 보살에게는 중생도 없고 부처도 없다.

깨달음에 이르게 할 중생도 없으며,

이미 깨달음에 이른 부처도 없다.

그것이 바로 무아법의 증득이 가져다 주는

대 해탈, 대 자유의 깨달음이다.

 

내가 없다는 무아의 가르침은

나와 남, 인간과 자연, 인간과 신, 중생과 부처,

생사와 열반, 삶과 죽음 등의

그 어떤 나뉨도 용납하지 않는 진리를 대변한다.

 

그렇기에 무아법을 체득한 보살은

스스로 중생을 구제한다는 상을 가질 수가 없다.

구제할 중생이 없고, 구제할 내가 없으며,

그렇기에 구제라는 말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보살은 깨달음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깨달음의 회향인 중생구제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상구보리에도 머물지 않고

하화중생에도 머물러 있는 않는 이가 보살이다.

상구보리 하화중생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서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실천하는 이가 바로 보살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일체법이 곧 불법이라고 했는데 일체법, 즉 불법에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그 어떤 상도 용납되지 않는다.

즉 그 어떤 나다라고 하는 상도 용납지 않는다는 말이다.

 

깨달을 도 없고, 중생을 구제할 도 없다.

지혜를 증득할 도 없으며, 자비를 베풀 도 없다.

상구보리할 내가 없으며 하화중생할 내가 없는 이가 바로 보살이다.

일체법은 한 치의 아상도 인상도 중생상도 수자상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보살이 내가 불국토를 장엄한다고 한다면

그는 보살일 수가 없다.

내가 불국토를 장엄하리라고 하는 말이

그대로 스스로 보살이 아님을 대변하는 말일 뿐이다.

 

내가 없고, 장엄할 불국토가 없으며, 장엄할 것도 없는데

어찌 내가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상에 머무를 수 있단 말인가.

 

무아법을 깨달았다는 것은

내가 없음을 깨달았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일체 모든 법, 일체 모든 존재에

고정된 실체적인 관념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말이다.

 

그 어떤 것도 실체적인 존재가 아니다.

나도 너도 없으며, 중생과 부처도 없고, 예토와 정토도 없다.

오염된 예토인 중생의 국토가 없고, 장엄된 불국토가 따로 없다.

 

무아법에는 그 어떤 차별도 분별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보살의 깨달음일진데,

어찌 내가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다만 여래가 불국토를 장엄한다고 했던 말은 어디까지나 방편일 뿐이다.

여래가 설한 불국토의 장엄은

실질적인 그 어떤 장엄이 아니라 이름이 장엄일 뿐이다.

불국토의 장엄은 곧 장엄이 아니다. 그러므로 장엄인 것이다.

 

 

수보리야, 만일 어떤 보살이 무아의 법에 통달하였다면

여래는 이 사람을 진실로 보살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구경무아분의 핵심이며,

나아가 금강경의 핵심이 되는 구절이다.

무아법의 통달이 바로

금강경에서 줄기차게 말하고 있는 가르침의 핵심이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타파가

바로 무아법의 이해를 위한 설명이며,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라는 게송 또한

무아법의 통달을 위한 사구게다.

 

반야 지혜를 증득한다는 말이 바로 무아법을 깨닫는다는 말이며,

무아법이 바로 무자성, , 중도, 연기법의 다른 표현인 것이다.

 

이 세상에 펼쳐져 있는

이 모든 존재와 현상들은 모두

다만 인연따라 잠시 그렇게 모습을 보인 것일 뿐,

고정된 실체로써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내 눈 앞에 있는 것처럼,

고정된 실체적인 존재처럼 보이지만

그 안을 깊이 살펴보면 어디까지나 연기적인 현상으로

잠시 꿈과도 같이, 환영과도 같이, 그림자와도 같이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어떻게 인연을 만났느냐에 따라

물이 소를 만나면 우유를 이루고,

독사를 만나면 독을 만들 듯

그렇게 인연따라 겉모습이 끊임없이 변화될 뿐이지

결코 고정된 실체인 것은 아니다.

 

또한 물은 계곡에서 시내로 강으로 바다로 흘렀다가

수증기로 변하고 구름으로 변하고

또한 인연을 만나 비로도 우박으로도 눈으로도 내리는 것이다.

 

그렇게 내린 눈비가 또다시 계곡을 지나면서

나무도 되었다가 식물도 되었다가 사람 몸으로도 변했다가

또다시 시내로 계곡으로 강으로 흘러 흘러 가는 것일 뿐이다.

 

그럴진데 어떤 하나를 선택하여

이것이 물의 실체다고 고집할 수 있겠는가.

다만 연기법에 따라 겉모습을 바꿀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은 무아법이라고 하는 것이다.

고정된 실체로서의 자아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어디에 집착할 것인가.

고정된 실체가 없고 다만 꿈처럼 신기루처럼

몸을 바꾸면 끊임없이 변화하며 흐를 뿐인데,

어떤 하나를 붙잡고 집착하고

내 것으로 만들려고 아집을 부릴 수 있겠는가.

나다라고 고집하여 내 몸에 혹은 내 생각에 집착할 것인가.

 

내 몸도 끊임없이 변화하는 지수화풍의 변화의 한 모습일 뿐이다.

이 몸의 지수화풍의 구성원들은

흘러 흘러 바다고 되고 강물도 되고 산도 되었다가

나무도 풀도 되고, 또한 짐승도 되고 풀벌레도 되고

바람도 구름도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내 몸에 집착할 것인가.

 

내 생각이라는 것도 가만히 살펴보면

고정된 실체로써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어떤 생각을 불변하지 않는 내 생각이라고 할 것인가.

 

모든 생각은 변화한다. 흐를 뿐이다.

이 생각을 선택할 수도 있고, 저 생각을 선택할 수도 있다.

이러한 가치관을 선택할 수도 있고 저러한 가치관을 선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어떤 생각도 관념도 가치관도

고정된 실체로써 내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 세상에는 어디에도 내 것이라고 고집할 만한 것이 없다.

내 돈도, 명예도, 권력도, 지위도, 학벌도, 배경도, 사랑도, 가족도,

결국에는 내 것이 아니다.

 

그러니 어디에 머물러 집착할 것인가.

집착은 곧 괴로움을 불러올 뿐이다.

돈에 집착하면 돈으로 인해 괴롭고,

명예나 권력에 집착하면 그로 인해 괴로울 뿐,

결국에는 괴로움을 가져올 뿐이다.

 

라는 것이 없는데,

어디에 내 것을 붙일 것이며, 집착할 것인가.

 

이 구경무아분에서는 바로 이 점을 설하고 있다.

구경에는 모든 것이 무아라는 것이다.

무아이기 때문에 비관적으로 살라는 말이 아니라,

무아이기 때문에 어디에도 집착함이 없이 자유롭게 살라는 것이다.

 

어떤 물질에도, 어떤 존재에도, 어떤 깨달음에도,

어떤 생각에도, 어떤 사상에도

얽매임 없이 자유롭게 살라는 말이다.

 

한 평생 잠시 왔다가 갈 뿐이다.

인연따라 잠시 어떤 한 몸으로 왔다가 갈 뿐이다.

죽는다고 끝나는 것도 아니고 산다고 영원히 사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인연따라 끊임없이 몸을 바꿀 뿐이다.

 

그러니 어디에 집착하며 살겠는가.

집착할 것이 하나도 없는데 과연 어디에 집착하며 살 것인가.

다만 인연따라 법계의 몸을 잘 쓰다가

법계로 잘 돌려줘야 할 일이고,

인연따라 법계의 돈도 잘 쓰다가

법계로 잘 회향시켜 줘야 할 일이다.

 

내가 가져갈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돈도 명예도 권력도 지위도 사랑도

모두가 잠시 인연따라 응해 줬다가

인연이 다하면 자연스럽게 사라지고 말 것이다.

 

집착하지 않을 수 있어야

인연이 다 해 사라질 때 자연스럽게 놓아줄 수 있다.

붙잡고 조마조마 하며 살 것인가

놓아버리고 자유롭게 살 것인가.

 

자유롭게 사는 방법이 바로 무아법의 터득이다.

 

'공 부 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1. 한마음 깨치면 부처  (0) 2024.01.07
무아(無我), 대아(大我), 시아(是我) (월호스님)  (0) 2022.11.27
공과 색  (0) 2022.10.30
금강경 수업나누기  (0) 2022.10.12
이산 혜연 선사 발원문  (0) 2022.09.28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