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상대의 고통을 보고 내가 위안을 받을 때가 있는데, 괜찮나요?
“집단 상담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정토회의 나누기와 비슷한 형식이었는데, 제가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누구누구 씨의 상황에 비추어 보면 저의 고민은 아무 것도 아니군요’라고 발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프로그램을 진행하시던 교수님이 ‘그런 발언은 집단의 심리적인 안정성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상대의 이야기를 듣고 위안을 삼는 것은 상대와 본인 모두에게 위험한 방법입니다’라고 하시면서 제게 실망하시는 듯한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상대적으로 다행이다’라고 위안을 삼는 것이 수행자로서 위험한 일인지 궁금합니다.”
“일시적으로는 도움이 돼요. 아침에 일어났을 때 ‘아이고, 오늘도 살았네!’ 이렇게 하루를 시작하라고 제가 그동안 법문을 많이 했잖아요. 이것은 상대적인 비교가 아니라 절대적인 비교입니다. 즉 생존에 대한 자각이지 남보다 못하거나 낫다는 개념이 아니에요.
‘살아 있다는 것만 해도 나는 만족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 세상에 고민할 게 하나도 없어져요. 욕을 얻어먹어도 살아 있으니까 얻어먹는 것이고, 한 대 맞아도 살아 있으니까 맞는 것이고, 병에 걸려도 살아 있으니까 병에 걸리는 것이잖아요. 죽었다면 병들 일도 없고, 욕 얻어먹을 일도 없고, 굶을 일도 없어요. 이렇게 딱 관점을 바로 잡아버리면 모든 고뇌가 사라져 버립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법문을 할 때도 있잖아요.
‘즐겁고 괴로운 것은 상대적이다.’
예를 들어서 버스를 타고 가다가 전복 사고가 났다고 합시다. 정신을 차려보니 내 팔이 부러졌어요. 그런데 부러진 팔을 쥐고 주위를 돌아보니 다른 사람은 다 죽고 나만 살았어요. 그러면 우리는 ‘아이고, 부처님의 가피구나. 다행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똑같이 버스가 전복되는 사고가 나고 팔이 부러졌어도, 주위를 돌아보니 아무도 안 다치고 내 팔만 부러졌다면 어떨까요? ‘재수 없다!’ 이렇게 되잖아요.

 

재수 좋다, 재수 없다, 사실은 어떨까요?
이처럼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는 재수 좋음과 재수 없음은 객관적인 게 아니에요. 늘 주변과 비교해서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니 재수 좋고 재수 없는 것은 믿을만한 게 못 됩니다. 무엇과 비교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니까요.
팔이 부러진 상황은 똑같은데 어떤 경우에는 ‘다행이다. 부처님의 가피다’라고 하고, 어떤 경우에는 ‘재수 없다. 나만 벌 받았다’ 이렇게 생각한다는 거예요. 양쪽 모두 팔 하나가 부러진 것뿐인데요. 이게 중생의 복과 재앙입니다.
아마 그 교수님은 이런 식으로 위안을 받는 것은 바람직한 방법이 아니라는 뜻에서 문제 제기를 하셨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분에게 달리 특별한 기준이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러나 불교에서는 이런 이치에 따라서 이렇게 가르치는 겁니다.
‘어떤 상황이 벌어졌으면 그냥 상황이 벌어진 것일 뿐 그걸 갖고 재수 좋으니 재수 없느니, 좋으니 나쁘니, 옳으니 그르니 하지 마라’
팔이 부러졌으면 부처님의 가피라고도 하지 말고, 부처님을 안 믿어서 벌 받았다는 생각도 하지 말라는 거예요. 이건 상대적으로 일어난 생각일 뿐이니까요.
팔이 부러졌으면 그냥 부러진 것이니 병원에 가서 치료받으면 됩니다. 이걸 두고 재수가 좋으니 재수가 나쁘니 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러면 어떤 사건이 일어나도 마음이 널뛰기 하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어차피 한 생각 일으켰다면
그런데 마음의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할 상황이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차선책도 있습니다. 어차피 마음을 일으킬 바에는 ‘재수 없다’라고 하는 것보다는 ‘재수 있다’라고 일으키는 게 낫습니다. 평정심을 유지하는 게 최선이지만, 마음을 일으키는 것을 피할 수 없다면 이왕이면 ‘재수가 좋다’, ‘가피를 입었다’ 이렇게 마음을 내는 게 낫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대웅전에서 부처님께 삼배를 올리고 나와서 계단을 내려가다가 넘어져서 다리를 다쳤다고 합시다. 그럴 때 다친 다리를 부여잡고 ‘아이고, 부처님께 기도해도 소용이 없네!’ 이러면 자기에게 재앙이 생긴 것이 되고, 부처님도 원망하게 되잖아요. 그럴 때 이왕이면 마음을 다르게 가져보라는 거예요. 사실 부처님께 절하는 것과 계단에서 넘어진 것은 아무 관계가 없는 일입니다. 다쳤으면 그냥 치료를 하면 돼요. 그러나 이왕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어쩔 수 없다면 이렇게 마음을 일으키는 게 낫습니다.
‘아이고, 기도라도 했더니 그래도 한 다리만 부러지고 다른 다리는 안 부러졌네. 다행이다.’
마음을 이렇게 일으키는 것을 ‘긍정적’이라고 해요. ‘재수 없다!’ 이렇게 마음을 일으키는 것을 ‘부정적’이라고 합니다. 마음을 긍정적으로 일으키는 것은 나쁜 게 아니에요. 진리의 길은 애초에 이것을 좋고 나쁘게 보지 않는 것이에요.
그리고 어차피 한 생각을 일으켰으면 긍정적으로 일으키라는 거예요. 이왕에 마음을 일으킨다면 긍정적인 마음을 갖는 편이 본인에게도 좋다는 거죠.
수행의 목표는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런 목표를 가지고 나아가되 평정심을 잃었다면 재빨리 긍정적으로 마음을 돌리는 게 낫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일으키는 마음의 90퍼센트는 부정적으로 돌아가도록 되어 있어요. 우리의 까르마(습관)가 그렇게 형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문화적인 환경도 부정적인 심리가 작동되기가 쉽게 되어 있습니다. 부모 세대나 사회 전체가 어떤 일이 생기면 늘 부정적으로 보기 때문에 우리도 어릴 때부터 보고 들으면서 그런 습관이 들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걸 긍정적으로 돌리려면 의식적으로 연습을 해야 합니다.

 

천당과 지옥을 벗어난 해탈의 길
꿈으로 비유해 볼게요. 꿈은 안 꾸는 게 제일 좋아요. 그런데 꿈을 꾸는 상황이라면 이왕 꿀 바에야 악몽을 꾸는 것보다는 좋은 꿈을 꾸는 게 낫겠죠. 그러나 수행적 관점은 ‘그것이 설령 좋은 꿈이라 하더라도 안 꾸는 것보다는 못하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설령 그게 좋은 일이라 하더라도 좋다거나 싫다거나 하는 마음을 애초에 안 내는 것보다는 못한 거죠.
세상 사람들은 천당과 지옥만을 말하지만, 부처님은 ‘천당과 지옥을 벗어난 해탈의 길이 있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천당에 가는 것을 좋아하고, 지옥에 가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수행의 관점에서는 지옥에 안 가고 천당에 갔다고 좋아할 게 아닙니다. 천당 역시 불안정한 세계로 보기 때문에 거기서 벗어나야 한다는 관점을 갖고 있습니다. 이해가 됐어요?”
(후기)
우리는 늘 분별심으로<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 있다 없다> 양변으로 생각을 하는데 이것이 번뇌 망상이라는 것이다, 양변과 변견을 떠나 중도로서 보는 지혜를 터득해야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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