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심시불’이란 마음이 곧 부처라는 뜻이다. 여기서 ‘부처’라는 말은 석가모니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곧 진리 또는 우주, 불법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마음이 곧 우주요 진리요 부처라는 말이다. 즉, 도(道)를 깨달으면 마음은 곧 불심(佛心)이기에 마음을 떠나서 부처는 따로 없다는 말이다.

나아가서 ‘그대의 마음이 곧 부처-진리’라는 뜻, 깨달아서 얻은 나의 마음이 곧 부처이며, 그 밖에 부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대의 마음이 곧 깨달아야할 대상이라는 뜻이다. 마음의 실체, 마음의 움직임을 낚아채면 진리를 깨달은 것이라는 뜻, 따라서 ‘부처’란 법당에 모셔져 있는 불상을 가리키거나 인격화된 명칭이 아니라, 불교적 진리의 대명사로서 ‘부처’이다.

‘즉심시불(卽心是佛)’은 원래 <무량수경(無量壽經)>에서 “사람들 마음이 부처임을 생각하면, 그 생각하는 마음 전체가 부처로 가득 차게 된다. 마음이 부처임을 생각할 때, 그 마음에 부처가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 마음이 부처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마음이 곧 부처이다.”라고 하는 데에서 나온 말인데, 즉심시불(卽心是佛), 즉심즉불(卽心卽佛), 시심시불(是心是佛), 시심즉불(是心卽佛), 심즉시불(心卽是佛)들이 다 같은 의미의 말들로서 혼용해서 쓰인다.

그리고 중국 남북조시대 남조에서 활약한 재가불자로 선을 깨친 부흡(傅翕, 傅大士, 497~569)은 그의 저서 <심왕명(心王銘)>에서 ‘즉심즉불(卽心卽佛)’이라고 해서 다른 데서 부처님을 찾을 필요가 없고 마음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즉심시불이나 즉심즉불이 같은 말이므로 혼용해서 쓴다.

그 외에 선종 초기 2조 혜가(慧可)와 4조 도신(道信)의 설법에 “이 마음이 곧 부처”라는 설법이 등장하고 있으며, 즉심즉불(卽心卽佛)의 사상은 혜능(慧能) 남종선의 핵심법문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황벽 희운(黃檗希運, ?~850) 선사의 어록<전심법요(傳心法要>과 <완릉록(宛陵錄)> 등에도 같은 말이 나온다.

그리고 마조(馬祖道一, 709∼788) 선사의 주요 사상으로 즉심시불(卽心是佛),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등을 들고 있다. 그리하여 마조 계통의 홍주선(洪州禪)은 조사선(祖師禪)의 사상을 극명하게 드러내면서 즉심시불 사상을 적극적으로 계승 발전시켰다.

그런데 훗날 어떤 스님이 마조 선사에게 묻기를,

“왜 마음이 부처(卽心是佛)라고 말하십니까?”라고 하자,

“애기의 울음을 달래기 위함이다.”라고 대답했다.

“애기가 울음을 그친 후에는 어찌 합니까?”라고 하자,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다(非心非佛)”라고 대답했다.

“이 두 종류를 제외한 사람이 오면 어떻게 가르칩니까?”라고 묻자,

“마음도 아니요(不是心), 부처도 아니요(不是佛), 물건도 아니다(不是物)라고 한다.”라고 했다.

사람들은 스스로의 마음이 본래 부처임을 깨닫지 못하고 밖을 향해 부처를 구하고 있다. 마조 선사는 이러한 잘못된 견해를 깨우치기 위해 “마음이 곧 부처(卽心是佛)”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마조 선사가 즉심시불을 강조한 이후 사람들은 또한 즉심시불이라는 말에 집착해 수행하지 않게 되자, 지해(知解-알음알이)의 방편을 부수기 위해 이번에는 “비심비불(非心非佛)”이라고 설하게 된다.

처음에 즉심시불이라 답한 것은 우는 아이 달래기 위해서라 했다. 이것은 일종의 안심법문(安心法門)이다. 몹시 아파하는 이는 삶이나 죽음이나 같다. 아픔을 견디기 힘들면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말도 한다. 여기서 우는 아이는 질문을 한 그 어떤 스님이다. 의정(疑情)과 의단(疑團)에 가슴 막힌 수행승이 얼마나 고통스럽겠는가. 그 고통을 느끼는 절실한 마음이 곧 부처가 되는 길이다. 그리하여 마음이나 부처에 구애 받는 자의식을 떠나서 본래면목 참 마음에 이르게 되면, 나 자신에 사로잡힌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견성성불(見性成佛) 하게 된다는 말이다. 부처는 다른데 있는 게 아니다. 자기 마음속에 있다. 그렇게 달랬던 것이다.

그런데 왜 울음을 그친 뒤엔 비심비불이라 했을까. 아이는 절실한 의단을 가진 무명(無明)을 뜻하고, 우는 것은 고행(苦行)이다. 그러니 울음을 그친 것은 고행을 그침을 말하고, 무명에서 벗어나 고행을 그치면 텅 비어[공(空)] 아무 것도 없다. 마음의 움직임을 낚아채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공을 깨쳤다면 거기엔 마음이라든지 부처(佛)든지 하는 명색(名色)이 없다. 그래서 우는 아이가 울음을 그치면 깨쳐서 비심비불이 된다는 말이다. 이 경우 견성성불(見性成佛), 즉신성불(卽身成佛)과 같은 맥락이 된다.



그리고 또 다른 이야기----------------------



중국 당나라시대 대매 법상(大梅法常, 741-808) 스님은 명주(明州) 출신으로 휘호는 법상(法常)이며 형주 옥천사에서 출가했다. 계를 받은 후 수많은 경전을 공부했으며, 이윽고 크고 작은 경론을 강의했다. 그러다가 보니 지식은 나날이 늘어갔으며, 그의 강의는 더할 나위 없이 뛰어났다. 그러나 스스로 위화감에 깊이 번민하다가 드디어 도를 찾아 널리 유행에 나섰다. 마침 마조 선사가 수행승을 지도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대매는 곧 그에게 갔다.

대매가 하루는 마조 선사께 묻기를, "어떤 것이 불(佛)입니까." 하니, 마조 선사가 답하기를, "즉심시불(卽心是佛)"이라 했다.

“그것을 어떻게 체득합니까?”

“빈틈없이 지켜나가야 한다.”

“법이란 무엇입니까?”

“마음이 또한 그것이다.”

“달마의 의도는 무엇이었습니까?”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그럼 달마에게는 아무런 의도도 없었다는 말입니까?”

“부족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그 마음을 간파하라!”

마조 선사의 이 말에 대매는 비로소 심오한 뜻을 깨달았다. 그는 곧 석장을 짚어가며 구름이 걸려 있는 대매산(大梅山)에 올랐다.

대매 법상은 아주 자기 주관이 뚜렷한 스님이었는데, 마조 선사에게서 ‘즉심시불’이라는 법문을 들은 후,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알아 봤더니, 대매 스님은 대매산에 들어가서 혼자 살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그래서 마조 선가가 시자를 보내서, 그 사람(대매)이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한 번 가보고 오라고 했다.

그래 시자가 가보니까 거기서 혼자 살고 있는데, 그 심부름 간, 시자가 여기서 뭐하고 있느냐고 하니까,

“아 나는 전에 마조 선사에게 ‘즉심시불’이라는 소리를 듣고 뭐 그걸로 내 공부는 다 됐다 생각하고 그냥 여기서 이렇게 산다.”고 했다.

그러니까 시자가 있다가 아! 그건 이제 유행이 지나갔고, 요즘 마조 선사는 ‘비심비불(非心非佛)’을 말하고 계신다고 했다. 즉, 즉심시불 시대는 지나가고, 이제는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라는 법문을 하신다고 했다.

그랬더니 대매 스님 말이,

“저 노장이 사람을 호리기를 그칠 날이 없구나. 노장이야 뭐 비심비불(非心非佛)이라 하든, 즉심시불이라고 하든, 나는 오직 즉심시불(卽心是佛)이라 하겠네.” 이렇게 말하니, 시자가 돌아와서 마조 선사께 그 얘기를 전했다. 그랬더니,

“아! 참 매실이 잘 익었구나!”라고 해서 인가를 하며, 제자들에게 일렀다.

“매실이 잘 익었으니 여러분은 이제 그리로 가서 마음대로 따먹는 것이 좋겠다.”

그리하여 이삼 년도 안 되는 사이에 대매산에 큰 회중이 생겨나더니 그 수가 수백 명에 이르렀다는 그런 이야기가 <마조어록(馬祖語錄)>에 전한다.

「“마음이 부처[卽心是佛 또는 卽心卽佛]”에 나오는 마음은 최소한의 알아차림도 없이 무의식적으로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일상적인 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생각과의 동일시에서 벗어나, 순수하게 깨어있는 마음, 있는 그대로 현존하는 마음이다.

대매 스님은 마조 선사께서 ‘마음이 부처’라고 했을 때, 갇혀있던 생각과 감정으로부터 걸어 나와 ‘순수한 깨어있음’을 경험했다. 전에는 생각과의 동일시 그리고 감정의 혼란 속에 살아왔었는데, 마조 선사가 말하는 순간 순수한 내면 공간의 등장을 경험했다. 그것을 선에서는 견성(見性)이라 한다.

대매 스님은 이것을 완전하게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다.

마조 선사는 “빈틈없이 지켜나가라.”라고 말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순수한 깨어있음의 상태, 있는 그대로의 현존을 빈틈없이 유지하라는 뜻이다.

그러나 순수하게 깨어 있으려 해도, 있는 그대로 현존하려고 해도, 에고가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려고 머리를 내밀 것이다. 또한 과거생으로부터 익혀 온 업력이 대상을 만나면 머리를 들고 자신의 에너지를 발산할 것이다. 그때마다 알아차림을 유지하며 강력하게 현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생각과 감정에 동일시하게 되면 에고와 업력이 끝없이 이야기를 만들어가며 에너지를 키워 그대를 삼켜버린다.

그러므로 생각과의 동일시, 감정과의 동일시가 일어나려고 하면, 그것에 저항하는 대신 직접 그것에 주의를 집중함으로써, 생각과 감정의 지배를 받지 않고 있는 그대로 현존할 수 있다. 생각과 감정에 의식의 빛을 비춤으로써 에고와 업력의 지배에서 벗어나 순수한 깨어있음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계속해서 깨어있음을 유지하면 에고와 업력은 점점 힘을 잃어가다가 결국에는 완전히 녹아 사라진다. 왜 그런가? 에고와 업력은 생각과 감정의 동일시를 먹고 사는 유기체이다. 어떤 생각이 일어나든, 어떤 감정이 일어나든 알아차림을 유지하며 거리를 두고 연료를 보충해 주지 않고, 먹이를 주지 않으면 에고와 업력은 결국 에너지가 고갈돼 완전히 소멸한다.

대매는 30년 동안 깨어있음을 유지해 자신의 깨달음을 완성했다. 그것은 머리로 얻은 지식이 아니라 몸으로 완벽하게 체득한 깨달음이었다. 그래서 매실이 완전히 익은 것이다.」 - 무념



여기서 재미있는 일화 한 토막 ----------------------



옛날에 석두(石頭)라는 이름을 가진 수도승이 있었다. 하도 머리가 나빠 그의 이름이 '돌대가리'라는 뜻이다. 그의 머리로 이해하기에는 경전의 말들이 너무나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참선 공부를 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참선 역시 그에게는 너무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오직 옛날 혜능(慧能) 선사가 행자시설 그랬던 것처럼 “일하는 선(禪)”만 하기로 했다. 그는 늘 부엌에서, 들판에서 일만 했다.

그런데 그 선원에서는 한 달에 두 번씩 선사의 법문이 있었다. 이 법문들 역시 석두의 머리를 혼란에 빠지게 할 뿐이었다.

그런 어느 날 법문이 끝난 뒤 석두는 선사에게로 가서 말했다.

“스님, 저는 저의 어리석음에 진력이 났습니다. 제가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이에 선사가 말했다.

“질문을 하려면 제대로 된 질문을 하라.” 그런 막연한 질문이 어디 있느냐 하는 것이.

석두는 한참 동안 머리를 긁적이다가 말했다.

“그럼 말씀 드리겠습니다. 스님께서는 늘 부처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데 부처가 무엇입니까?” 이에 선사가 대답했다.

“즉심시불(卽心是佛)”이다.

그런데 마음이 곧 부처라는 이 말을 무식한 석두는 “짚신시불”로 알아들었다. 그는 부처는 곧 짚신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이 얼마나 어려운 공안인가?” 하고 석두는 생각하면서 스님께 절을 하고 물러나왔다.

어떻게 부처가 짚신일 수 있단 말인가? 아아, 어떻게 하면 이 오묘한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석두는 그 후 3년 동안 선원에서 일을 하면서 늘 이 큰 의문에 사로잡혔다. 화두 일념으로 일을 하면서도 그 말에 집중했다. 그냥 마음속에 그 의문을 늘 간직한 채 그 말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렇게 3년이 지난 어느 날 석두는 등에 잔뜩 땔감을 짊어지고 산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만 돌멩이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땔감이 나뒹굴고 그가 신고 있던 짚신 끈이 끊어지면서 허공으로 날아가 바닥에 '툭!'하고 떨어졌다. 그 순간 석두는 깨달음을 얻었다.

석두는 대단히 행복하고 흥분이 됐다. 그래서 그는 선사에게로 달려갔다.

“스님, 스님, 이제 저는 부처가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그 선사는 석두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그래? 그렇다면 부처가 무엇인가?”

석두는 짚신 한 짝을 벗어 들어 선사의 뒤통수를 갈겼다.

선사가 말했다.

“이것이 진리인가?”

석두는 말했다.

“내 짚신 끈이 끊어졌습니다!” 석두는 해탈한 것이다.

선사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고 석두는 기쁨의 춤을 추었다.

화두가 굳이 오묘한 뜻을 품은 글이 아니라도 된다. ‘짚신’이면 어떻고 ‘지게’면 어떤가. 일찍 숭산 행원(崇山行願, 1927~2004) 선사께서 미국에서 선교 사업을 벌일 때, 영어밖에 모르는 미국인들에게 어려운 한문 투의 화두보다는 그들이 알아듣기 쉬운 “코카콜라”를 화두로 정해도 된다고 했다. 염불을 할 때도 목탁만 고집하지 않고, 장구, 북, 꽹과리 등 각종 타악기를 동원했다는 일화가 있다. 선(禪)은 격식을 무시하는 수행이기에 굳이 딱딱한 화두나 틀에 매인 격식에 묶일 필요가 없다.



또 다른 이야기 ---------------------------------



옛날 어느 마을에 할머니가 홀로 살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자식들은 외지로 다 나가버리고 그렇게 혼자 살고 있었다. 외로움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할머니는 열심히 부처님에 의지했다.

처음에는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극락왕생을 빌기도 하고 때로는 객지로 떠난 자식들의 행복을 빌기도 하다가 세월이 흘러 수행이 어느 정도 깊어진 어느 날 할머니는 자신의 내면으로 눈을 돌리게 됐다.

“아! 이 모든 것이 덧없어 진다. 어떻게 하면 깨침을 얻을 수 있을까?”

그러나 할머니는 부끄러웠다. 자신은 글을 몰랐고, 때문에 지금까지 공부를 해본 적도 없었다. 그리하여 한 동안 고민하다가 드디어 용기를 내어 자신이 다니는 절의 한 스님에게 어렵게 말을 건넸다.

"스님, 제가 한번 마음을 깨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할머니의 질문을 받은 스님은 다름 아닌 그 절의 행자승이었다. 아직 정식으로 계를 받지 못한, 말하자면 수련승이었다. 하지만 할머니의 진지함에 그 행자승은 자기가 아는 범위에서 한 가지 이야기를 할머니에게 해주었다.

"노 보살님! 즉심시불(卽心是佛)입니다. 이것만 잘 생각해 보세요!"

할머니는 두 손을 공손히 합장하고 재빨리 암송했으나 할머니에게 이 어려운 말이 제대로 이해될 리가 없었다. 집에 돌아온 할머니는 기억을 더듬어 행자승이 일러준 말을 되새기다가 나름으로 정리를 했다.

“음, ‘짚신시불’이라, 짚신이 곧 부처란 말이지!”

“그런데 어떻게 짚신이 부처님이란 말인가?”

그리하여 할머니는 그날부터 짚신을 만들며 생각에 잠겼다. 지치지도 않고 한결같이 꾸준히 짚신을 만들며 이 말에 몰두했다. 그리고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할머니는 어느덧 짚신 만드는 할머니로 유명해졌고, 많은 사람들이 구경을 와서 말을 걸어도 할머니는 그저 묵묵히 짚신 만드는 일에 몰두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할머니는 ‘짚신시불’에 몰두하고 있었다. 할머니에겐 ‘짚신시불’이 곧 화두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 근처를 지나가던 스님이 마침 짚신이 해져 할머니에게 찾아갔다. 여느 때와 같이 할머니는 짚신을 만들고 있었고, 사람들이 달라고 하면 옆으로 하나 건네주곤 했다.

스님도 그렇게 짚신을 하나 얻으려는 참에 할머니의 두 뺨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을 봤다. 스님은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궁금증을 못 이겨 할머니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노 보살님, 무슨 연유로 눈물을 보이시는지요?”

그러자 뜨거운 눈물을 흘리던 할머니는 스님에게 미소를 보이며 말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내가 불법의 진리에 목이 말라 스님에게 법문을 하나 받았지요. 그것은 ‘짚신시불’이었는데, 처음에는 이상했지만, 무식한 내가 어찌 알음알이를 내나 싶어 그저 짚신을 만들면서 그 의미를 새겨보려 했답니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나는 그것을 잘못 들은 것임을 알았지만, 그것이 중요하다고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짚신을 만드는 내 마음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것을 봤기 때문입니다. 짚신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저는 짚신을 만들면서 계속 저의 변화하는 마음을 살펴봤습니다. 그리고 이제 저는 짚신을 통해서 저의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 졌습니다. 오늘에야 비로소 저는 참다운 짚신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즉심시불(卽心是佛)' 이었던 것입니다.“

할머니는 ‘짚신시불’ 화두를 통해 깨쳐 해달을 한 것이다. 할머니가 자나 깨나 ‘즉심시불’을 '짚신시불'로 잘못 알아듣고 그것만 들고 있다가 견성했다는 것은 ‘즉심’이나 ‘짚신’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화두로 들고 있는 할머니 마음이 중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知訥, 158~1210) 선사는 <진심직설(眞心直說)>에서 “심외무법(心外無法) 즉심시불(卽心是佛)”이라고 했다. 마음이 부처이고, 마음 밖에 부처가 따로 없다. 마음이 부처이고, 마음 밖에 부처가 따로 없다는 것을 분명히 믿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고려 말 태고 보우(太古普愚) 국사도 어록 <태고집>에서 “마음 밖에 부처가 없고 부처 밖에 마음이 없으며, 마음과 부처와 중생의 세 가지가 본래 차별이 없다”고 했다.

달마(達磨) 대사의 어록 <혈맥론(血脈論)>에서도 이와 같은 내용이 나온다. 이 마음 떠나서 다른 부처를 찾을 수 없나니 이 마음 떠나서 보리와 열반을 구한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 자기 성품은 진실해서 인(因)도 아니고 과(果)도 아니며 법(法) 그대로가 마음이라. 스스로 마음이 보리요, 스스로 마음이 열반이니, 만일 마음 밖에 부처와 보리가 있어 얻을 수 있다고 한다면 옳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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