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과법因果法(인연법因緣法)
인과법이란?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현상은 지나간 과거에 일어났던 모든 현상이 원인이 되어 그 결과의 과보로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지금의 현상(나에게 주어진 여건)을 어떻게 대처해 나가느냐에 따라 미래가 결정된다. 이것은 진여眞如의 알아차리고(전지全知) 작용하는(전능全能) 우주의 경영(운영)원리이기 때문에 이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있을 수 없다. 이러한 이유로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 할지라도 우연이란 없다. 반드시 필연일 뿐이다.
인과의 원리는 이것과 저것이 서로 주고받는 상호관계성(원인과 결과의 연기緣起, 상호의존성)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인연법因緣法이라고도 한다. 나쁜 행위를 하면 나쁜 인연을 만나고 좋은 행위를 하면 좋은 인연을 만난다,
인과법을 인간의 문제로 탐구해보면 다음과 같이 적용된다.
인간은 누구나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배우고 익혀 학습한 것에 의해 생각을 하고 모든 행위를 하기 때문에 생각이 똑 같은 사람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하는 행위도 다 다를 수밖에 없다. 사람마다 하는 생각과 행위를 총칭해서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이것을 ‘업業’이라 한다.
업 자체는 우리들이 마음먹은 대로(의식적으로) 쓸 수 없다. 업은 만들어지는 즉시 마음의 95%를 차지하고 있는 무의식(제8아뢰야식)에 저장되며, 같은 업을 자주 되풀이하면 할수록 내 것(고정관념, 아상我相, 무명無明, 알음알이, 내 생각, 습관, 중독) 으로 굳어져 바꾸기가 어렵게 된다. 무의식은 우리들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5%를 차지하고 있는 의식(제6의식)을 지배하기 때문에 인간은 ‘업력業力(업이 작용하는 힘)’에 의해 조종되는 것이다.
따라서 과거전생에 지은 업은 지금(금생)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원인이 되기 때문에 업은 윤회(순환)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라는 말과 같다.
인과의 원리가 이러하기 때문에 과거로 인해 지금(현재)의 현상(나아가야 할 길)이 결정됨으로 이것을 우리는 운명이니 팔자니 하는데 주어진 길을 지금 내가 어떻게 가느냐에 따라 미래가 새롭게 결정되기 때문에 가야할 길은 주어지나 그 길을 지금 내가 어떻게 가느냐에 따라 나의 미래는 결정됨으로써 바꿀 수 없는 숙명이니 운명이니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우리들은 누구나 삶에 있어 많은 고통이 있다. 이것을 어떻게 하면 잘 해결할 수 있을까 해서 상담을 하거나 선각자를 만나 ‘즉문즉설’을 통해 해답을 구하거나 아니면 점집을 찾아다니기도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시원스럽게 해결되는 경우는 극히 드문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이렇게 방황하는 이유는, 인과법이 순환하는 원리를 깨닫지 못한 어리석음 때문이다.
인과법이 순환하는 원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시간을 과거(전생) 현재(금생) 미래(내생)로 나누지 말고 하나의 거대한 흐름으로 인식하는 개념의 전환이 필요하다.
시간은 본래 시작도 끝도 없이(무시무종無始無終) 흐르는 물과 같아서 나눌 수 없는 것이나 인간이 편의상 나누어 놓은 것일 뿐이다. 한 찰나(약 구백 분의 일초)가 지나가면 과거(전생前生)라 하고 다가올 것이면 미래(내생來生)라 하기 때문에 지금이라는 시간은 잠시도 머무를 수가 없다.
예를 들어서, 오늘 친구에게 돈을 빌렸다면 갚을 날이 되면 갚아야 할 것이다. 만약 갚지 못했다면 언젠가는 갚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두 사람 중에 어느 한 사람이 죽으면 갚지 않아도 무방하다는, 다시 말해서 인과(업)의 순환 원리를 몰라서 죽으면 다 끝난다고 하는 시간에 대한 개념(고정관념, 내 생각, 아상我相, 무명無明)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의 삶은 오히려 더욱더 복잡해지는 원인이 된다. 까닭은 모든 삶이 이기적으로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업의 순환원리를 알면 결코 아무렇게나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두려워서도 하지 않을 것이다.
금생에 돈을 빌리고 갚지 않으면 반드시 내생에 그 돈을 갚기 위해 가까운 인연으로 다시 만나 어떠한 형태로든 갚아야한다는 말이다. 돈을 빌려가고 갚지 않는 사람은 과거에 내가 그의 돈을 빌리고 갚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전생에 내가 다른 누구에게 고통을 주었다면 내생에는 반드시 가까운 인연으로 다시 만나 이번에는 반대로 그에게 내가 고통을 당하게 되는데, 이러한 일은 한 두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세생생 끊어지지 않고 반복되기 때문에 업은 윤회한다고 한다.
가까운 인연 중에서도 특히 가족 간의 인연은 전생에 서로 주고받을 것이 가장 많기 때문에 매우 복잡하다.
그렇다면 업이 윤회하는 순환의 고리는 어떻게 하면 끊어질까요? 업(인과)의 순환 원리로 볼 때 지금 내 앞에 현상적으로 벌어지는 모든 일은 다 ‘내 탓’이라는 진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에게 주어지는 모든 여건(상황, 조건 가야 할 길)은 내가 그 원인(주인공)이라는 사실이기 때문에 남을 원망하거나 나에게 주어진 여건에 불평불만을 한다거나 하지 않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함으로써 서로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상대방에게 또 다른 고통을 주지 않기 때문에 비로소 윤회(악연)의 고리는 끊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참회고 용서하는 일이다.
인과법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너의 과거전생을 알고자 한다면 지금 너에게 주어진 여건(조건, 상황)을 보면 알 수 있고, 너의 미래(내생)를 알고자 한다면 지금 네가 어떻게 하고 있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원리에서 깊은 깨달음을 얻으면 과거전생을 훤히 꿰뚫어 아는 통찰력인 ‘숙명통宿命通’이 열린다.
업이 순환할 때 과거전생에 서로 주고받을 것이 많을수록 금생에 가장 가까운 사이로 인연이 맺어지기 때문에 부부, 부모 자식, 친구, 직장동료 등으로 인연지어진다.
인연이 멀면 멀수록 객관적으로 보게 되고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주관적으로 보게 된다. 다시 말해서 가까울수록 ‘나’라는 생각(내 부모, 내 친구, 내 형제)이 끼어들어 집착하게 되고 집착은 바라는 마음에서 생기고 바라는 마음은 욕심을 만들고, 우리들은 이 모든 마음을 ‘사랑하기 때문에’라는 생각으로 포장하게 되는데 이것이 모든 일을 지혜롭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이 된다.
업(나의 모든 행위)은 철저하게 독립적이어서 내가지은 업은 오직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이것은 마치 내배가 불러지려면 내가 먹어야 한다. 다른 어떠한 사람이 대신 먹어주어도 내 배는 부르지 않는 것과 같다. 그래서 “수행은 항상 나를 바꾸는 일이다.”
나를 바꾸기 위해서는, 지금 내 앞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주어진 조건, 여건, 상황)은 과거전생에 내가 행한 것(업業)이 원인이 되어 그 과보로 나타나는 일이기 때문에 그 책임은 다 나에게 있다는 인과(업)의 순환원리(윤회)를 깨달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과거전생에 내가 상대방에게 고통을 주었다면 지금(금생)은 내가 반대로 그에게 고통을 당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지금 나에게 고통을 주는 그(상대방)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나를 참회(반성)함으로써 미워하는 마음이 사라져 오히려 고통스럽게 하는 그에게 잘 대해 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업장業障을 소멸하는 일이며, 업장이 소멸됨으로써 비로소 윤회의 고리는 끊어지는 것이다.
업장을 소멸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업이 작용하는 힘(업력業力, 업식業識)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오직 법法(원리)을 깨달아 체득되는 법력法力(완성된 중도의 지혜)으로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신앙信仰의 힘으로는 가벼운 업력은 이겨나갈 수 있으나 무거운 업력은 이기기가 매우 어렵다.
다시 말해서 법력이 아닌 다른 어떠한 것으로도 업력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비교하자면, 나에게 적은 피해를 입힌 경우에는 용서해 줄 수도 있고 잊어버리기도 할 수 있으나 심각한 피해를 입힌 경우에는 용서하거나 잊어버리는 일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결론적으로 무의식(제8 아뢰야식)에 저장된 업장을 소멸함으로써 윤회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원리를 체득하고 이루어지는 깨달음으로 ‘나(자아自我)’를 소멸시켜야 된다.
이러한 원리를 모르는 사람에게 고통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아무리 좋은 열쇠(해답, 조언)를 준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것이 오늘 날 유행하고 있는 즉문즉설卽問卽說의 한계점이다.
인과법의 핵심은 [“선인선과善因善果요 악인악과惡因惡果다(좋은 일을 하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오고, 나쁜 일을 하면 반드시 나쁜 결과가 온다.)”]
그래서 “자업자득自業自得이요 사필귀정事必歸正”이다.
이것은 마치 좋은 대학에 가려면 열심히 공부해야 된다는 말과 같아서 “세상에 공짜는 없다.”
좋은 인연(선연善緣)과 나쁜 인연(악연惡緣)을 판단하는 기준은 과정에 있지 않고 결과에 있다.
예를 들어서 주방장이 주인 망하게 하려고 고기를 많이 넣어 주었는데 그 집에 가면 고기를 많이 넣어준다는 것이 소문이 나서 오히려 손님이 많아져 돈을 많이 벌었다면 좋은 인연이다. 그러나 반대로 주인 잘되게 하려고 고기를 조금 넣어주어 식당이 망했다면 나쁜 인연이라는 말이다. 전자는 동기는 나쁘나 결과가 좋기 때문에 선연이고 후자는 동기는 좋았으나 결과가 나쁘기 때문에 악연이다.
모든 수행의 핵심(궁극)은 “나(자아自我, 주관)를 죽이는(소멸) 일이다.” 나를 죽이면 모든 것은 저절로 객관화됨으로써 동시에 사라지기 때문이다.
‘나’를 버리지 않는 이상 바라는 마음 없이 늘 그냥 최선을 다하는 ‘무심無心’의 삶은 이루어지기 어렵다. 무심은 모든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짐으로써 대자유인이 되는 해탈解脫이요,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이 없는 열반涅槃이기 때문이다. 무심은 중도中道를 정등각正等覺 함으로써 얻어지는 최고의 지혜다. 따라서 무심이 끊어지지 않는 것이 깨달음의 궁극이다. 무심 하나면 어떠한 고통도 일어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인생을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모든 고통은 무심 하나로 다 해결되어진다는 말이다.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무심으로 살아 갈 것을 다짐하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오늘 하루 무심으로 살았는지를 점검해 보는 일은 어떠한 수행(기도, 명상) 보다 나에게 더 이익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우주는 원인에 의한 결과의 나타남만 있을 뿐이기 때문에 그것을 주재하는 별도의 주재자(절대자)는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우리들이 신앙적으로 절대자에게 의지하는 것은 믿음의 문제일 뿐 근본원리에는 어긋나는 일이다. 그래서 수행자는 오직 자기 자신이 진여의 성품(무상, 연기, 중도, 공)인 원리를 깨우쳐 완성되는 궁극의 지혜(완성된 중도의 지혜)로 세상을 살아간다. 이것이 부처님의 유언인 "자등명 자귀의自燈明 自歸依:(스스로의 등불이 밝으니 스스로에게 돌아가 의지하고) 법등명 법귀의法燈明 法歸依:(법의 등불이 밝으니 법에게 돌아가 의지하라)"다.
이와 같이 우주의 순환 원리인 인과법을 확실하게 알아서 숙명통宿命通이 열리고 진여의 성품인 원리를 깨달아 지혜가 완성되면 어디에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모든 고통을 헤쳐 나아가는 주인공의 삶을 살아 갈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어떠한 것에도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고 물과 같은 대 자유인(해탈자解脫者)이 되는 것이다.
해탈자는 ‘나(자아)’를 소멸 시켰기 때문에 존재자체만 있을 뿐 나를 위해 필요한 어떠한 그 무엇도 필요치 않게 된다. 다만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 필요할 뿐이다. 이것이 진정한 무소유無所有다. 무엇을 하든 다만 그냥 최선을 다 할 뿐이기 때문에 늘 만족하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것이 생각은 있으나 번뇌 망상이 없는 무념無念, 어떠한 것도 내 것(아상我相, 무명無明, 알음알이, 고정관념)으로 삼지 않는 무상無相,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는 무주無住 즉 무심無心의 삶이다. 따라서 무심이 깨달음의 궁극이요, 해탈이요, 중도를 정등각正等覺하는 일이다.
‘나’를 죽이지 않으면 무심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를 죽여야 바라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목적의식에 떨어지지 않고, 집착하지 않아 어디에도 걸림이 없고, 어떠한 경우(상황, 여건, 조건)에도 절대긍정의 마음이 만들어 지고, 다 사랑 할 수 있게 된다. 성경말씀의 핵심인 ‘할렐루야’ ‘아멘’도 ‘나’를 죽임으로써 가능해 진다. ‘나’를 죽여야 성령聖靈이 나에게 온전히 임臨하게 된다.
무심으로 한다는 것은, [모든 일에 그냥 최선을 다 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이것이 진여의 성품이다.
무심으로 행行한 것은, 행하기는 행하였으나 행한 바가 없기 때문에 삶의 찌꺼기인 업을 남기지 않으므로 윤회의 고리가 다 끊어진다.
이것이 금강경에서 말하는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어느 곳에도 마음을 머물지 않게 하여 마음을 일으키라’고 하는 것.)”의 의미다.
[출처] * 인과법因果法(인연법因緣法)|작성자 여해 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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