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상비법상 法相非法相이여

개권부성장 開拳復成掌이로다.

부운산벽공 浮雲散碧空하니

만리천일양 萬里天一樣이로다.

법상과 비법상이여!

주먹을 펴니 다시 손바닥이로다.

뜬 구름이 푸른 하늘에 흩어지니

만리의 하늘이 온통 푸른 하늘뿐이로다.

 

운문 스님이 언젠가는 말씀하시기를 “옛사람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광명을 가지고 있는데 보려고 하면 보이지 않고 깜깜하고 어두울 뿐이다’라고 하였다. 어느 것이 그 빛이겠느냐?” 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도 대답이 없자 대신 말하였습니다.

“부엌 창고 삼문三門이니라.”

그리고 또 말했습니다.

“좋은 일도 없느니만 못하느니라.”

 

요즈음 납자들은 부처님의 말씀은 연구하지 않고 다만 조사의 말씀만 궁구하니 조사의 말씀이 곧 부처님의 말씀임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간택하지 마십시오. 도리어 불법을 비난하게 되는 결과를 만듭니다.

운문 스님이 ‘광명이 부엌 창고 삼문三門이니라.’고 하였는데 평소에 보입니까? 보이지 않습니까?만일 본다면 ‘볼 때는 어두컴컴하여 보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어떻게 광명이 되겠습니까? 이미 광명이 되었다면 ‘좋은 일도 없느니만 못하느니라.’고 하였는데 어째서 버리려고 하지 않습니까?조사의 말은 궁구하면서 부처님의 말씀은 궁구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어떤이는 ‘나는 부처님의 말씀도 쓰지 않고, 조사의 말씀도 쓰지 않고, 단지 스스로의 말만을 쓴다.’고 하는데 조사의 말씀이나 부처님의 말씀도 쓰지 않거늘 다시 스스로의 말은 쓸 일이 뭐 있겠습니까?또 어떤 이는 말합니다.

“나의 종宗은 말이 없다. 언어를 쓰지 않는다.”라고 하니 말이 있어도 옳지 않거늘 하물며 말 없음이겠습니까? 잠꼬대일 뿐입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부처님 말씀으로 한 축을 삼고 조사의 말씀으로 한 축을 삼고, 말 없음을 한 축으로 삼고 말 있음으로 한 축을 삼고, 망상으로 한 축을 삼고 망상 없음으로 한 축을 삼아야 하니, 이렇게 한다면 “진실로 볼 때에 컴컴하여 보지 못한다고 말할 것이다.”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어쨌거나 운문 스님은 ‘좋은 일도 아예 없느니만 못하느니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였습니다.

또 운문 스님께서 상당하여 말씀하였습니다

“천지가 기우뚱하니 일월성신이 온통 깜깜하다. 어떻게 말하겠느냐?”그리고는 한참 있다가 대신 말하였습니다.

“좋은 일도 아예 없느니만 못하느니라.”

 

또 어느날 운문스님께서 납자에게 물었습니다.

“등불을 보느냐?”

“다시 볼 것이 없습니다.”

“원숭이를 노주露柱에 묶어 두었군.”

대꾸가 없어 대신 말했습니다.

“그대의 불법에 대한 깊은 마음은 잘 알겠다.”

그리고는 다시 말했습니다.

“좋은 일도 없느니만 못하느니라.”

 

조주 스님도 이 말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법당을 지나가다가 한 납자가 예불 드리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바로 한 대 때렸습니다.

이에 그 납자가 발끈하여 말했습니다.

“예불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까?”

“좋은 일도 없느니만 못하다.”

 

종문의 소의경전인 『금강경』 정신희유분正信希有分에도 이런 말이 나옵니다.

“시고是故로 불응취법不應取法하며 불응취비법不應取非法이니라.

이시의고以是義故로 여래상설如來常說키를 여등비구汝等比丘여지아설법知我說法은 여벌유자如筏喩者이니 법상응사法尙應捨 커늘 하황비법何況非法이랴.

그러므로 마땅히 법을 취하지 말 것이며, 마땅히 법 아님도 취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이러한 까닭으로 여래는 항상 말했다.

너희들 비구들아!

나의 설법이 뗏목과 같음을 아는 자는 법조차 마땅히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법이 아님에 있어서랴!” 따라서 공부인이라면 법의 상이 없을 뿐만 아니라 법의 상이 없다는 생각조차 없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수미산만큼의 유견有見을 일으켜서도 안 되겠지만 겨자씨만큼의 무견無見을 일으켜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운문 스님과 조주 스님은 항상 ‘좋은 일도 없느니만 못하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산승이 오늘 법문을 마무리짓고자 합니다.

운문 스님은 광명을 ‘부엌 창고 삼문三門이’이라고 해 놓고 또 ‘좋은 일도 없느니만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선사께서는 평소에 법문을 할 때는 한 구절로 주로 대답을 했는데 왜 여기서는 두 구절로 말했겠습니까?

앞에서 말한 “부엌 창고 삼문三門이니라.”는 구절은 우리들을 위하여 간단하게 한 가닥 가느다란 방편의 길을 터 놓고서 알도록 한 것입니다.

영리한 자라면 이를 듣자마자 눈썹을 치켜 세우고 바로 떠나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운문 스님은 납자들이 여기에 집착할까 봐 두려워하여 “좋은 일도 없느니만 못하느니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여전히 납자들을 위하여 자취마저도 쓸어 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밝은 빛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곧장 눈을 똑바로 뜨고 ‘어디가 부엌이며 창고이며 어디가 삼문이냐?’고 말들을 하지만 이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의도하는 바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는 눈으로 보는 것에도 있지 않고 또한 경계에도 있지 않습니다.

모름지기 지견이 끊기고 이해득실을 망각하여

말끔히 훌훌 벗고 텅텅 비어 말끔한 각자 자기자신 속에서 알아차려야 할 것입니다.

 

심월고원 心月孤圓하니

광탄만상 光呑萬象이로구나.

마음의 달이 호젓하게 밝으니

광명이 온갖 것을 삼키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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