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상을 짓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말하는 지에 대한 스님의 답변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상을 짓지 마라할 때 이 ()’은 어떤 것을 상이라고 하느냐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 물병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컵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뚜껑이 있습니다. 다 보입니까?”

“(대중들) .”

그러면 이 컵을 기준으로 해서 제가 물어볼 테니까 편안하게 얘기하세요. 이 컵은 이 물병보다 큽니까, 작습니까?”

“(대중들) 작습니다.”

이 컵은 뚜껑보다 큽니까, 작습니까?”

“(대중들) 큽니다.”

이 컵은 물병보다 큽니까, 작습니까?”

“(대중들) 작습니다.”

이 컵은 뚜껑보다 큽니까, 작습니까?”

“(대중들) 큽니다.”

, 그러면 컵은 큽니까, 작습니까?”

“(대중들 웅성)”

다시. 이 컵은 큽니까, 작습니까?”

“(대중들)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습니다.”

 

이 컵을 가지고 이 컵은 크다’, ‘이 컵은 작다라고 할 때 이 크다, 작다는 건 무엇을 뜻할까요? 크다는 것은 객관적인 이 존재, 즉 컵이 크니까 크다고 하는 게 아니냐고 보통 생각합니다. 또는 컵이 작으니까 작다고 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합니다. 즉 크다고 하는 것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내 눈이 그 컵을 보고 큰 것을 크다고 인식을 하고, 작은 것을 작다고 인식한다고 여기는 것이죠. 나는 바깥에 있는 사물을 그대로 인식한다고 대부분 생각해요. 가령 ‘1킬로미터라는 거리를 길기 때문에 길다고 인식했다하거나 ‘1킬로미터라는 거리는 짧기 때문에 짧다고 인식을 했다라고 인식합니다. 사실대로 인식을 했다고 여겨요.

그런데 제가 여러분께 질문을 했을 때 여러분들이 지금 느끼듯이 이 컵이 물병과 함께 있을 때, 즉 이런 조건에서 내가 이 컵을 인식할 때는 작다고 인식이 됩니다. 그런데 이 컵이 이 뚜껑과 비교해서 인식할 때는 크다고 인식이 됩니다. 그러면 이 컵은 객관적으로 큰 것이고, 객관적으로 작은 것입니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지요. 이 컵은 인식 상에서 크다고 인식이 될 때가 있고, 작다고 인식이 될 때가 있는 거지요. 크다, 작다는 것은 객관적 사물에 있는 줄 알았는데 객관적 사물에 크고 작음이 있는 게 아니라 나의 인식 상에서 크다, 작다는 인식이 일어나는 거예요.

, 그러면 이 컵 자체는 어떻습니까? 이 컵 자체는 크다고 말할 수도 없고, 작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이게 질문자의 용어를 빌려서 제가 대답하는 방법이에요. 질문자가 크냐, 작냐고 물었으니까 제가 크다고 할 수도 없고, 작다고 할 수도 없다고 답한다는 거예요.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그 컵은 다만 컵일 뿐이다.’ 이거예요.

이렇게 ‘크다’ 라고 말할 때 우리가 ‘상을 지었다’고 말합니다. 상을 지었다는 건 인식 상의 문제를 객관의 문제로 되돌린 것을 뜻해요. 내 눈에 크다고 보인 것을 존재 자체가 큰 것이라고 규정할 때 ‘크다는 상을 지었다.’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용어를 이해하셨어요?”

.”

내 눈에 빨갛게 보인 것이지 실제 그 색깔이 빨간지 아닌지는 우리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만약 빨간 색깔의 안경을 끼고 바깥 사물을 보면 흰 벽이 빨갛게 보이겠지요. 빨간색이기 때문에 내가 빨갛게 인식한 건지, 무색인데 내가 쓴 안경 때문에 빨갛게 보인 건지, 내가 현재 상태에서 그것을 알 수가 없어요. 그럴 때 내 눈에는 빨갛게 보입니다’, ‘내 눈에는 작다고 인식이 됩니다’, ‘나한테는 크다고 인식이 됩니다.’ 이렇게 아는 것이 사실을 사실대로 아는 거예요. ‘있는 그대로 보라라는 말의 뜻은 큰 건 크다고 보고, 작은 건 작다고 보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해하셨습니까?”

.”

내 눈에 크게 보였다고 아는 게 사실대로 아는 겁니다. 이걸 공이다라고 아는 게 사실대로 아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내 눈에는 빨갛게 보입니다’, ‘내 눈에는 크게 보입니다’, ‘내 관점에서는 작게 보입니다.’ 라고 아는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착각합니다. ‘작기 때문에 작다고 했지’, ‘크니까 크다고 했지’, ‘비싸니까 비싸다고 했지.’ 이렇게 주관을 객관화시킵니다. 이런 것을 상을 지었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인식 상 오류입니다.

금을 은이라고 착각을 했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큰 걸 작다고 내가 인식을 잘못했다.’ 이런 의미가 아니예요. 크다, 작다는 것은 객관적인 존재가 그런 것이 아니라 나에게 인식이 될 때 인식 상에서 그렇게 보인다는 겁니다. 그런데 나는 그 객관적인 존재가 크다거나 작다고 잘못 알고 있어요. 이것을 상을 지었다라고 말하는 거예요.

아까 상을 짓는 건 나쁩니까?’ 라고 물었는데, 이건 나쁘다, 좋다는 도덕적 개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류를 범하는 것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 대부분은 죽을 때까지 이 오류를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크니, 작니, 비싸니, 싸니, 옳으니, 그르니하면서 갈등하는 거죠. ‘어떻게 이 큰 걸 저 사람은 작다고 말할 수 있느냐?’, ‘어떻게 이 작은 걸 저 사람은 크다고 말할 수가 있느냐? 동네 사람들한테 다 물어봐라’, 이렇게 남한테도 물어보라는 말을 하는 이유는 그것이 객관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상을 지었다는 뜻입니다. 이해하셨어요?”

“(대중들) .”

주관을 객관화시키는 것이 상을 짓는 것입니다. 이런 오류는 그대로 가져가야 되겠어요? 아니면 개선을 해야 되겠어요? 개선을 해야 되겠지요. 오류니까요. 윤리 도덕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렇게 인식을 개선하면 번뇌가 없어집니다. 어떤 분이 우리 남편이 나쁜 인간이에요.’ 한다고 했을 때 그 남편은 실제로 나쁜 인간일까요, 그냥 존재일까요?”

“(대중들) 존재.”

, 그냥 하나의 존재예요. 그리고 술을 마신다는 것도 그냥 하나의 행동이에요. 그런데 내가 술을 안 마셨으면 좋겠다는 관점에서 바라보니 나쁜 행동인 거예요. 이해되세요?”

“(대중들) .”

그러니까 나쁘다는 것은 나한테서 일어난 인식이지, 존재에서 오는 게 아니에요. 반대로 나는 한 잔 마시고 싶은데 남편이 안 마신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럴 때 남편은 멋도 모르고, 풍류도 모르고, 답답한 인간이고, 그래서 나쁜 존재로 인식돼요. (모두 웃음) 그러니 여러분들에게 온갖 갈등, 미움, 원망, 슬픔, 이런 게 있었다면, 이 제법의 본질을 딱 꿰뚫어 알게 되는 순간 슬퍼할 일도 없고, 기뻐할 일도 없고, 괴로워할 일도 없고, 미워할 일도 없게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또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럼 목석같은 존재가 되어야 합니까?’ (모두 웃음) 이 때 우리는 구체적으로 그 인연을 살펴봐야 됩니다. ‘컵이 큽니까, 작습니까?’ 그랬을 때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답을 외우면 안 됩니다. ‘이 물병보다 큽니까, 작습니까?’ 라고 물으면 ()입니다라고 대답하는데, 이것은 또 법상에 빠진 경우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물으면 무조건 공입니다라고만 답하는 거예요.

‘제법이 공한데, 좋고 나쁨이 어디 있습니까’ 하는 분들이 있는데, 여기도 그런 병 걸린 사람 많을 거예요. 이런 분들은 대부분 책으로 불법을 공부한 사람들입니다. 아내한테 절에 뭐하러 가노? 부처가 따로 있나? 내가 부처다. 그 스님이 부처가 아니고, 그 돌이 부처가 아니고, 내가 부처다, 내가!’ 이런 소리나 하고, 아내가 뭐라 하면 공이다. 좋고 나쁜 게 어디 있나? 본래 없다는 거 안 배웠나?’ 이런 소리나 하게 되는 거예요. 자기는 뭘 좀 안다고 그러는 것 같은데, 그건 병이에요. 그런 병을 법집이라고 합니다. 아집은 자기 생각을 고집하는 것이고, 법집은 진리라는 잣대를 만들어서 자기 변명하는 데에 써먹는 거예요.

그래서 금강경은 부처님 말씀이라는 잣대 하나를 가지고 내내 써먹는 사람들에게 그 법에도 실체가 없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집을 타파하고, 동시에 법집도 타파하는 힘이 있지요. 크다, 작다는 걸 타파하는 게 아집을 타파하는 것이라면,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라는 정답을 하나 만들어서 움켜쥐고 있는 게 법집입니다. 이해하셨어요?”

“(대중들) .”

누가 부처님께 서울을 가려면 어디로 갑니까?’ 하고 물었어요. 그럼 우리는 어디로 간다.’ 이러는데, 부처님은 그 사람이 어디 사는 사람인지를 먼저 살피셨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인천 사람이라면 동쪽으로 가세요.’ 하는 거죠. 그런데 우리는 그 사람이 인천 사람인 건 고려도 안 하고 서울 가는 길은 동쪽이다는 것만 외워서 법칙을 만듭니다. 그래서 누가 또 와서 서울을 가려면 어디로 갑니까?’라고 하면 내가 압니다.’ ‘어느 쪽인데요?’ ‘동쪽이에요!’이러는 거지요.

그런데 그때 부처님께서 서쪽이다.’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또 부처님도 틀렸다!’고 하든지, 아니면 , 내가 잘못 알았네. 한 가지 길만 있는 줄 알았더니 두 가지 길이 있구나.’ 하는 거죠. 부처님께서 서울 가는 길이 서쪽이다라고 말씀하신 건 그 사람이 춘천 살기 때문인데, 법집을 만든 사람은 그걸 또 외우는 거예요. 교리를 외우는 거죠. ‘서울은 동쪽과 서쪽으로 가는 두 가지 방법이 있구나. 그런데 방금 남자가 물으니 동쪽이라 했고, 여자가 물으니 서쪽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남자는 동쪽으로 가야 되고, 여자는 서쪽으로 가야 되는 거구나.’ 이렇게 규정을 짓는 거예요.

그 다음에 또 한 남자가 물었어요. 부처님께서는 이번엔 북쪽으로 가라.’ 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남자는 남자인데 어린애인 거예요. 그래서 , 어린애가 물으니까 북쪽이라고 대답하는구나.’ 이렇게 또 해석을 붙이는 거예요. 그런데 부처님은 그 사람이 어린애여서가 아니라 수원에 살기 때문에 북쪽이라고 대답하신 거예요.

그 사람이 어느 위치에서 질문하는지를 고려하지 않고 그냥 서울 가는 방향을 정할 수는 없는 겁니다. 이걸 무유정법(無有定法)’이라고 합니다. ‘정할 수가 없다는 말은 서울 가는 길이 없다는 말이 아니에요. 또 정해지지 않았으니까 아무렇게나 가면 서울을 갈 수 있다는 얘기도 아닙니다. 이것도 치우치는 거예요. ‘없다를 단견(斷見), 무견(無見)에 떨어졌다고 말하고, ‘무수히 많다. 아무렇게나 가면 된다는 게 상견(常見), 유견(有見)에 떨어졌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서울 가는 길은 정해져 있지 않다는 말은 인연을 따라 가라는 말입니다. 인천이라면 동쪽이지요. ‘인천인데도 세 방향으로 가도 된다.’ 이런 건 없어요. 인천이면 서울 가는 길은 동쪽이고, 춘천이면 서쪽이에요. 그 인연에서는 그렇게 정해집니다. 그런데 그 인연에서 그렇게 정해졌다고 해서 그것을 동쪽이라고 확정 지으면 안 돼요. 우리는 왜 이렇게 자꾸 치우치는 걸까요? 여러분들은 자꾸 뭘 확정짓고 싶어 하거든요. 어릴 때부터 늘 정답을 만들어온 습관이 있기 때문에 정답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무유정법이란 인연을 따라서는 만 가지 길이 나올 수도 있다는 뜻이에요. 그 인연을 따라서 가야지 그냥 만 가지 방향으로 아무렇게나 가면 안돼요. 예를 들어 늘 옷을 입어야 됩니까, 벗어야 됩니까? 그 중에 어느 하나라고 말할 수 없어요. 옷은 입어야 된다고 말할 수도 없고, 벗어야 된다고 말할 수도 없는 거죠. 목욕탕 안에서는 벗어야지요. 밖에서는 입어야 되지요. 그런데 그것도 또 세세하게 들어가면 딱 안 맞아요. 인도 여자들은 목욕탕 안에서도 옷을 입거든요. 어릴 때부터 평생 옷을 입고 목욕을 합니다.

이런 것을 두고 인연을 따른다고 말하는 거예요. 이걸 법성계에서는 불수자성 수연성(不守自性 隨緣成)’이라고 합니다. ‘불수자성(不守自性)’, ‘스스로의 성품을 지키지 아니하고’, 다시 말해서 크다, 작다, 동쪽이다, 서쪽이다, 하는 것을 지키지 아니하고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하다. 정한 바가 없다는 뜻입니다. ‘수연성(隨緣成)’, 인연을 따라 이루어진다는 거예요. 이걸 반야심경에서는 공즉시색(空卽是色)’을 말합니다. ‘동쪽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인연을 따라 동쪽이라 이름 할 수 있다는 건 금강경 식 표현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사상(四相), 즉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子相)이 뭐냐?’ 하는 것은 지식에 속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그 네 가지가 본질이 아니고, 또 그 네 가지는 학자에 따라 규정하는 방식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울타리를 작게 치든, 크게 치든 울타리를 친다, 모양을 짓는다는 것이에요. 어떻게 울타리를 치든, 아상을 치든, 중생상을 치든, 수자상으로 치든, 울타리를 치면 그건 이미 보살이 아니니 그 네 가지에 너무 집착하지 마라는 거예요. 이해하셨어요?”

“(대중들) .”

그러니까 내가 너를 구제했다’, ‘내가 너한테 줬다.’ 이런다면 이미 니 하는 울타리를 쳤다는 거예요. 그게 아상으로 치든, 인상으로 치든, 중생상으로 치든, 수자상으로 치든, 뭐라고 치든 이미 울타리를 쳤다, 모양을 지었다는 거예요. ‘모양을 지었다면 이미 너는 깨달았다고 할 수가 없다. 번뇌가 없어졌다고 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보디사트바라고 할 수가 없다. 보살이 아니다.’ 이게 핵심입니다. 여러분들이 울타리를 치거나 모양을 지으면, 여러분들이 사물을 인식할 때 자기도 모르게 크니, 작니 상을 지었다면 번뇌나 미움, 또는 괴로움이나 슬픔 등이 생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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