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생각하면 두려운 마음이 들어요, 어떡하죠?

저는 두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첫째, 반야심경 수업에서 모든 법이 공()한 도리에서는 생()도 아니고 멸()도 아니다라고 하셨는데요. 사람은 태어나서 죽기 마련인 걸 떠올리면 생도 아니고 멸도 아니다는 구절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구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둘째, 생이 있으면 멸이 있듯이 태어났으니 죽는 것은 당연하지만, 죽음을 경험하지 못하기에 막연한 두려움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죽으면 슬프고, 나의 죽음에 대해 생각해도 두려움을 느낍니다. 죽음에 대한 관점을 잡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죽은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할까요, 죽지 않은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할까요?”

 

죽지 않은 사람이요.”

 

 

죽지 않은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건 죽음 때문에 두려운 걸까요, 죽음에 대한 생각 때문에 두려운 걸까요?”

 

죽음에 대한 생각 때문에 두려워합니다.”

 

죽음에 대한 생각에서 두려움이 생겨나는 거예요. 그 두려움은 사실 죽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니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으면 두려움이 생기지 않습니다.

 

첫 번째 질문인 생도 아니고 멸도 아니다라는 구절에 대해서는 파도가 치는 바다를 떠올려보세요. 바다를 보면 파도가 일어나고 사라지고를 반복합니다. 파도를 하나씩 관찰을 해보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게 맞습니다. 이처럼 파도가 생겨나고 사라진다라고 말을 해도 되지만, 바다 전체를 보면 물이 출렁거린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바다 전체의 관점에서는 다만 물이 출렁거릴 뿐 새롭게 생겨나는 것도 없고 사라지는 것도 없습니다. 좁은 관점에서 파도를 하나씩 관찰을 할 때는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으로 보이지만, 넓게 전체를 보면 생겨난다고 할 것도 없고 사라진다고 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생겨났다’, ‘사라졌다고 말하는 건 표현에 불과해요.

 

지구 전체를 보면 풀이 나고 죽고, 나무가 나고 죽고,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게 마치 바다 전체에서 파도가 일렁이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넓은 관점에서 보면 다만 출렁거릴 뿐 태어났다, 죽었다고 할 게 없습니다. 따라서 본질의 차원, ()의 차원, 위에서 넓게 내려다보는 차원에서는 생긴다고 할 것도 없고 사라진다고 할 것도 없어요. 그렇다고 아무것도 생겨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좁은 관점에서 보면 개체가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넓게 보면 사실 생겨난다고 할 것도 없고 사라진다고 할 것도 없는 도리입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은 안 생겨나고 안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생겨났다, 사라졌다고 말은 하지만 넓게 보면 굳이 생겨난다고 말할 것도 없고 사라진다고 말할 것도 없다는 의미입니다.

 

학교를 다닐 때는 입학과 졸업이 있습니다. 한 과정을 놓고 보면 입학과 졸업을 하지만,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동시에 중학교에 입학하고, 또 고등학교에 입학을 했다는 건 얼마 전에 중학교를 졸업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크게 보면 이 학교에 다니다가 저 학교에 가고, 또 그 학교에서 다른 학교로 가는 것이지, 사실 입학과 졸업이라고 할 것이 없습니다. 그저 일상적으로 한 과정에 들어갈 때 입학이라고 말하고, 한 과정이 끝날 때 졸업이라고 말할 뿐이에요. 이건 입학을 안 한다, 졸업을 안 한다는 말이 아니라 한 과정을 시작하고 마칠 때 입학과 졸업이라고 이름을 붙이긴 하지만, 크게 보면 이 학교에서 저 학교로 옮기는 것일 뿐 입학이라고 할 것도 없고 졸업이라고 할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이 방에 갔다가 저 방에 갔다가 할 때, 방 하나만 놓고 보면 사람 수가 늘어났다가 줄어들었다가 하지만 집 전체를 보면 사람 수에 변화가 없습니다. 집 안에서 이 방에 갔다가 저 방에 갔다가 한 거예요. 그러니 좁게 보는가, 넓게 보는가에 따라 표현이 달라지고, 현상으로 보느냐 본질적으로 보느냐에 따라 표현이 달라집니다. 현상에서 보면 생멸(生滅)이라고 말하지만, 본질에서 보면 생이라고 할 것도 없고 멸이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경전에서 불생불멸이라는 구절 앞에는 시제법공상(是諸法空相)’, ()의 관점에서는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습니다.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이라는 말은 모든 법이 공하다는 관점에서 보면 생하다고 할 것도 없고 멸하다고 할 것도 없고, 깨끗하다고 할 것도 없고 더럽다고 할 것도 없고, 늘었다고 할 것도 없고 줄었다고 할 것도 없다라고 표현한 겁니다.

 

이렇게 공()의 차원이 아니라 현상의 차원, ()의 차원에서 보면 생하고 멸하는 게 있습니다. 현실에서는 간다, 온다고도 표현을 하지만 본질의 차원에서 보면 간다고 할 것도 없고 온다고 할 것도 없습니다. 부처의 관점에서 보면 간다고 할 것도 없고 온다고 할 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여래(如來)’ 또는 타타가타(tatha-gata)’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간다, 온다고 할 게 없다는 뜻입니다.

 

집에서 가족이 화투를 치다가 형이 동생의 돈을 따면 형과 동생은 서로 누가 돈을 잃고 땄는지를 따지지만 부모의 입장에서는 그 돈이 그 돈입니다. 부모는 집 전체의 입장에서 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어리니까 자기 호주머니에 있는 돈만 봐요. 자기 호주머니만 쳐다보면 따기도 하고 잃기도 하지만, 집안 전체에서 보면 딴 것도 없고 잃은 것도 없습니다. 여기서 ()의 관점은 부모의 입장에서 본다는 말입니다. 아이의 입장에서는 분명히 돈을 잃었고 형이 돈을 땄지만, 부모의 입장에서는 늘어난 것도 없고 줄어든 것도 없습니다.

 

이처럼 넓은 시선에서 보면 괴로울 일이 없습니다.”

 

, 이해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이해하는데도 현실에서 어떤 문제에 부딪히면 적용이 잘 안 됩니다. 왜냐하면 습관적으로 자꾸 좁은 범위로 바라봐지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좁게 봐 온 습관이 있기 때문에 자꾸 좁게 보는 거예요. 이런 도리를 배울 때는 알 것 같다가도 갑자기 일이 닥치면 자기도 모르게 시야가 탁 좁아집니다. 급할 때는 무의식적으로 늘 지금까지 봐온 관점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법문을 들을 때는 진정된 마음으로 넓은 눈으로 바라보다가도 현실에 부딪히면 탁 좁아져서 감정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법문을 듣고 난 다음에 반드시 연습이 필요합니다. 현실 속에서도 자꾸 본질을 보고 넓게 보는 연습을 꾸준히 해나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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