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體同觀分 第十八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오(어의운하)오 如來(여래)-有肉眼不(유육안부)아 如是(여시)니이다 世尊(세존)하 如來有肉眼(여래유육안)이니이다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如來(여래)-有天眼不(유천안부)아 如是(여시)니이다 世尊(세존)하 如來(여래)-有天眼(유천안)이니이다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如來(여래)-有慧眼不(유혜안부)아 如是(여시)니이다 世尊(세존)하 如來有慧眼(여래유혜안)이니이다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如來有法眼不(여래유법안)아 如是(여시)니이다 世尊(세존)하 如來有法眼(여래유법안)이니이다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如來有佛眼不(여래유불안부)아 如是(여시)니이다 世尊(세존)하 如來有佛眼(여래유불안)이니이다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如恒河中所有沙(여항하중소유사)를 佛說是沙不(불설시사부)아 如是(여시)니이다 世尊(세존)하 如來說是沙(여래설시사)니이다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如一恒河中所有沙(여일항하중소유사)히 有如是沙等恒河(유여시사등항하)하고 是諸恒河所有沙數(시제항하소유사수)로 佛世界(불세계)-如是(여시)하면 寧爲多不(영위다부)아 甚多(심다)니이다 世尊(세존)하 佛告須菩提(불고수보리)하사되 爾所國土中(이소국토중)에 所有衆生(소유중생)의 若干種心(약간종심)을 如來悉知(여래실지)하나니 何以故(하이고)오 如來說諸心(여래설제심)이 皆爲非心(개위비심)이요 是名爲心(시명위심)이니 所以者何(소이자하)오 須菩提(수보리)야 過去心不可得(과거심불가득)이며 現在心不可得(현재심불가득)이며 未來心不可得(미래심불가득)일새니라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께서 육안이 있느냐?』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육안이 있사옵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께서 천안이 있느냐?』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천안이 있사옵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께서 혜안이 있느냐?』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혜안이 있사옵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께서 법안이 있느냐?』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법안이 있아옵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께서 불안이 있느냐?』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불안이 있사옵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항하에 있는 모래에 대해 부처님께서 그 모래를 말한 적이 있느냐?』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이 모래를 말씀하셨사옵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한 항하 가운데 있는 모래와 같은 수의 항하가 있고 이 모든 항하의 모래와 같은 수의 불세계가 있다면, 참으로 많다 하겠느냐?』 『매우 많사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저 세계 가운데 있는 바 모든 중생의 갖가지 마음을 여래께서 다 아느니라. 왜 그러냐 하면 여래께서 말한 모든 마음은 다 마음이 아니고 그 이름이 마음이기 때문이니, 그것은 수보리야! 지나간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第十八 一體同觀分--온갖 것 하나로 보다
[科 解]
부처님의 마음자리에서 보면 일체의 현상계가 다 곧 마음 하나이므로 마음과 객관을 떼어서 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중생의 마음도 그 근본을 살펴보면 중생이 아니고 알고 보면 다 부처님의 마음과 같은 자리에서 나온 한마음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다섯가지 신통도 따지고 보면 마음 하나고 중생들의 온갖 번뇌망상도 과거심·미래심·현재심도 다 한가지 마음일 뿐이므로 하나로 봐야 한다는 뜻에서 일체동관분(一體同觀分)이라 한 것입니다.
原 文 :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肉眼不 世尊 如來有肉眼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天眼不 如是世尊 如來有天眼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慧眼不 如是 世尊 如來有慧眼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法眼不 如是世尊 如來有法眼
[解 義] 부처님께서 이번에는 다섯가지 눈을 가지고 물어 보십니다.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여래께서 육안(肉眼)이 있느냐? 고깃덩이 눈, 짐승 같은 눈이 있느냐?』하고 물어 보십니다. 『그러하옵니다. 부처님께서도 육안이 있으시옵니다. 마야 부인의 몸에서 받아 나온 그런 육안이 우리 같은 육안이 있으시옵니다.』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부처님께서 천안(天眼)이 있느냐?』 천당사람이 가진 눈은 땅 속도 들여다보고 극락세계도 보고 지옥도 보고 다 보는 눈입니다. 눈앞에 구슬을 들여다보듯이 삼천대천세계를 우리가 앞에 있는 물건 보듯이 다 보고 있습니다. 『그런 천안이 부처님한테 있느냐?』하고 물으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그런 천안이 있으십니다.』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냐? 여래께서 혜안(慧眼)이 있느냐?』 혜안이라 하는 것은 근본 자성자리를 통달해서 일체 만법이 둘이 아닌 것을 아는 지혜의 눈입니다. 있는 것 없는 걸 다 초월해서 아공·법공·구공까지 들어가면 없는 것 조차 없어졌고 부처님도 중생도 모두 다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오로지 자기 정신만 있어서 만법이 평등해진 근본지혜를 보는 눈을 <혜안>이라 그럽니다. 수보리존자께서 대답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그런 혜안이 있으시옵니다.』
『수보리야! 네 뜻이 어떠하냐? 여래께서 법안(法眼)이 있느냐?』 <법안>이란 산은 물이 아니고 물은 산이 아니며 촛대는 책상이 아니고 책상은 촛대가 아니며 안경이 시계가 아니고 시계도 안경이 아닌 그런 차별상을 잘 알아서 미한 건 중생이고 깨달은 건 부처고 그런 현상계의 차별원리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잘 아시는 밝은 눈을 말합니다. 만고 평등하여 구별이 없는 그 가운데 또 구별이 분명히 있어서 확실히 하나는 둘이 아니고 둘은 하나가 아니란 그런 걸 아는 눈을 <법안>이라 그럽니다. 그러므로 혜안으로 볼 때는 여자니 남자니 하는 구별이 붙을 데가 없고 그렇지만 현상계로 보면 남자, 여자의 확실한 구별이 있어서 육체조직부터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종소리를 듣는 경우에도 한국 사람은 댕댕으로 듣고 일본 사람들은 강강으로 듣고 하지만 그러나 종소리는 강강도 땡땡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댕댕으로 들으면 댕댕으로 들리고 강강으로 들으면 강강으로 들리지만 그건 사실 참다운 종소리는 아니며 우리가 듣고 보는 것이 다 그렇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강강도 아니고 땡땡도 아닌 참 종소리, 본래의 종소리를 들으실 줄도 아시지만 또 강강으로 우리가 들은 그대로도 들을 줄 아시니 틀린 대로도 알고 안 틀린대로도 아시어서, 본체계(本體界)의 진실일여상(眞實一如相)과 현상계의 만법차별상(萬法差別相)을 다 아십니다. 그래서 수보리존자는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법안이 있으시옵니다.』그랬습니다.
原 文 :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佛眼不 如是 如來有佛眼
[解 義] 다섯가지 눈 가운데 마지막 눈인 부처님 눈(佛眼)에 대해서 물어보십니다.
『수보리야! 네 뜻이 어떠하냐? 여래께서 불안(佛眼)이 있느냐?』 『그러하옵니다. 부처님께서는 불안이 계시옵니다.』
앞에서 말한 네 가지 눈, 곧 혜안·법안·천안·육안을 다 하나로 합한 것을 불안이라 합니다. 조각 조각이 아니고 마음이 하나이면서 그렇게 차별이 있습니다. 만법을 다 차별로 알고 차별 아닌 것도 다 아는 근본 마음은 하나이지 눈이 여럿이 달린 것은 아닙니다. 육안이 불안이고 법안이고 혜안이고 천안이지 육안은 고깃덩어리고 흙으로 만들어 놓은 것인데, 그게 홀로 어떻게 무엇을 봅니까? 그러니 모두 부처님께서 되어 놓으면 육안·천안·법안·혜안·불안의 5안을 다 갖춥니다. 천당 사람들의 천안도 자기 공부한 만큼 그 한계만 보이고 그 이상은 못 봅니다. 그래서 천당에도 28천의 구별이 있게 되어있습니다. 신선이 돼도 정신통일해서 어느 정도 공부만 돼도 그렇고 정신통일한 사람도 그렇고 이 혜안, 법안이 다 있기는 있는데 그 능력이 얼마 안 됩니다.
부처님처럼 철저히 깨닫고 보면 우리가 과거에 잘못 생각했던 과학이니 철학이니 종교니 심지어 불법도 팔만대장경까지도 배운 것 다 잊어버립니다. 평등청정한 자성이 본래면목(本來面目) 그대로 돌아가면 쓸데없는 망령을 낼 필요가 없고 기억할 것도 없고 그러니 자꾸 무심해 갑니다. 중생은 꽁해서 듣기 때문에 천만년 가도 안 됩니다. 꽁한 그것만 내버리면 영감이 옆에서 아무리 욕을 해도 「제욕 제 마음대로 실컷 하고 욕만 해서 시원치 않으면 마음껏 때리시오.」하고, 꽁한 것만 없으면 그만 만사태평입니다. 당장 그 자리에서 복 받고 집안이 조용하고 동네가 조용하고 세계가 평탄해집니다.
그러니 이 꽁해서 이 방정맞은 놈이 이것이 버릇이 되어 가지고 문제니 이걸 두드려 부숴야 합니다. 이 꽁한 생각이 나오거든 사정없이 쳐부숴서 이렇게 항복기심하는 것입니다. 이게 항복하는 방법이니 망상이 움직일 수 있는 버릇을 고쳐야 합니다.
중이 남이 나를 욕한다고 얼굴을 붉히며 골을 내고, 신도들이 좀 잘해준다고 그게 내 신도라고 다른 절에 가지 말라 하고 남의 법문 소리 듣는다고 샘을 하고 그러면 그것은 중 같은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이렇게 「응무소주 이생기심」하는 것이며 승속 간에 이대로 번뇌망상을 다스려 나가야 올바른 신도가 되고 승려가 되는 법입니다.
그러니 부처님은 제망중중(帝網重重)의 현상계가 있다고도 못하고 없다고도 못하고 하나라 해도 안 되고 여럿이라 해도 안 되고 그런데 이런 제망중중의 촛대요, 시계요, 종이요, 목침이요 이런 것을 낱낱이 아시는 것이 육안이요, 법안이요 그런데 이게 혜안이요, 사실은 모두 불안 하나입니다. 우리 중생도 불안이 있어서 실제로는 마음 자신이 직접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불안이 있느냐?』하시니 『그러하옵니다. 부처님께서는 불안이 있으십니다.』하신 것입니다.
原 文 : 須菩提 於意云何 如恒河中所有沙 佛說是沙不 如是 世尊 如來說是沙 須菩提 於意云何 如一恒河中所有沙 有如是沙等恒河 是諸恒河 所有沙數 佛世界 如是 寧爲多不 甚多世尊
[解 義] 『수보리야! 네 마음에 어떠하냐? 여러 만리나 되는 항하 가운데 있는 강 모래를 부처님께서 그걸 모래라고 설명했느냐? 설명하지 안했느냐?』 『옳습니다. 부처님은 그걸 모래라고 하셨습니다. 항하에 한량없는 모래가 있다고 설명하셨습니다.』 『수보리야! 네 뜻이 어떠하냐? 한 항하 강 가운데 있는 모래 수만 해도 한정이 없겠는데 그 모래 수와 같은 항하강이 또 있다고 하고 그 모든 항하에 있는 모래 수와 같은 그런 부처님 세계가 있다고 하면 그 세계가 얼마나 많은 것이냐?』 『예, 그 참 많사옵니다. 부처님, 그건 굉장하게 많습니다.』하고 수보리가 대답했던 것입니다.
原 文 : 佛告須菩提 爾所國土中所有衆生 若干種心 如來悉知
[解 義] 항하사수 모래와 같은 항하강, 이렇게 한량없는 이 많은 강에 있는 모래 수처럼 많은 세계 그 가운데 사는 중생들의 마음 씀씀이, 그 낱낱의 심리를 부처님께서는 한 몫에 일목요연 하게 탁 보면 다 알아 내십니다. 누구는 무얼하고 누구는 어떤 생각을 하고 하는 것이 다 말로 되어 가지고 들리기도 하고 모양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마음의 근본자리에서는 생각이 말이고 음성이 생각이기 때문에 말로도 들리고, 생각이 보이고 촉감처럼 느껴서도 다 아십니다. 밤에 꿈속에서 말하는 음성, 그게 목소리가 아니고 마음 소리이고 생각 소리입니다. 생각 그 자체가 소리로도 들리고 또 그 생각이 냄새로도 되어 알아집니다. 생각 따라서 욕심내서 나는 냄새가 다르고 또 진심으로 화를 내는 냄새가 다르고 그런 것이어서 한 마음이 냄새도 나고 소리도 되고 빛깔도 됩니다. 꿈을 보면 마음이 모두 눈도 되고 코도 되고 온갖 피부도 되고 동시에 코로 맡는 냄새도 되고 그럽니다.
이와 같이 중생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온갖 탐진치가 다 냄새로 되고 빛깔도 되고 소리도 되어서 다 아시게 되는데 그것이 왜 그러냐 하면 부처님께서 말한 한량없이 많은 모든 중생들의 온갖 마음은 곧 마음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한 두 중생의 마음만 해도 제8장식(第八藏識)에 붙어서 움직이는 미세한 번뇌망상의 용심(用心)만 다 세어서 알려고 하더라고 우리 중생이 다 달려들어서 여러 겁을 센다 하더라도 다 헤아리지 못합니다. 한 사람의 마음을 완전히 분해한다는 것은 그건 곧 우주 전체의 분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물질계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 곧 우리 마음의 지적활동, 그 가운데 우리가 사는 그것이 이 지구덩이 하나만 없애 가지고 전자시대로 돌려보내더라도 그 수가 한 없이 많을 텐데 그것이 다 마음이 움직여서 만들어진 마음의 그림자입니다. 한 사람 망상만 해도 그러니 그 수없이 많은 무한 수의 우주세계에 가득 찬 온갖 중생의 굵은 생각, 미세한 생각 온갖 생각을 다 안다는 것은 정말 참 불가사의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이걸 다 아십니다. 그 이유를 다음에 말씀하십니다.
原 文 : 何以故 如來說諸心 皆爲非心 是名爲心
[解 義] 부처님께서 일체 중생의 온갖 마음을 다 아는 것은 왜 그러냐 하면 그것은 마음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부처님께선 말씀하십니다. 「일체 중생이 이런 생각 저런 생각하는 건 그건 생각이 아니고 마음도 아니다. 그것을 곧 마음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정말 마음이 아니기 때문에 남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도 일반적인 논법으로는 이상한 데가 있습니다. 「부처가 되면 온갖 중생의 마음, 망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걸 보기도 하고 모양도 나타나고 냄새로도 알고 생각으로도 알고 마음으로도 알고 남김없이 다 아시는데, 그것은 왜 그렇게 알게 되느냐 하면 그게 마음이 아니기 때문에 알 수 있다.」고 하셨으니. 「마음이 아니기 때문에 알 수 있다.」는 말씀의 조리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이것은 금강경을 천독 만독을 자꾸 하면 그 뜻이 풀어져서 이런데 걸리지 않게 됩니다. 그것은 온갖 생각이 아니라 물위에 떠 있는 파도나 한가지란 뜻입니다. 중생이 아무리 그 마음이 많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생멸(生滅)이 있어서 가령 「여기 사람이 하나 있는데 그게 사람이 아니다.」 그러면 그것은 사람이 아니라 껍데기 그림자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게 또 그런 사람이면서 그건 또 진실한 사람이란 말도 되고 부처란 말도 되고 그런 말이기도 합니다.
부처님께서 큰 적멸(寂滅)에 드시어 대열반(大涅槃)에 계시니까 다른 중생은 다 부처님의 대열반의 마음이 바다 위에 떠 있는 파도처럼 드러났다 꺼졌다 하는 것이며, 내 몸 위에 나타나는 현상이므로 환히 알게 되고 보인다는 것입니다. 만일 중생이 한생각도 까딱 안하고 모두 성불해 가지고 중생제도도 하지 않은 채 모두 본연자세 그대로만 있으면 부처님도 그걸 볼 수가 없습니다. 생각이 아니고 모양도 아니고 보는 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니까 일체가 다 떨어진 자리를 불불(佛佛)이 서로 볼 수가 없는 자리입니다. 볼 수 있는 것, 알 수 있는 것은 벌써 어떤 형태의 존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탐진치의 생각에 얽매인 이 마음, 그것은 참 마음이 아니고 마음의 그림자에 불과하기 때문에 마음이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原 文 : 所以者何 須菩提 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
[解 義] 『그건 왜 그러냐 하면 수보리야! 일체 마음을 마음이 아니라고 한 것은 과거의 마음도 얻기 어렵고 현재의 마음도 얻기 어렵고 미래의 마음도 얻기 어렵기 때문이다.』라고 부처님께서 마지막 결론을 하십니다.
과거심이란 아까 내가 무엇을 물었을 때는 묻고 싶은 그 마음을 가지고 물었지만 그것이 지나고 나면 그 다음에는 한 번 지나가 버린 그 생각은 다시는 거두어들일 도리가 없으니 과거는 현실화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생각은 그 시간에 일어나서 그렇게 설명하고 다른 생각으로 넘어올 때 벌써 완전히 소멸되어 없어지고 또 다른 걸 생각하게 됩니다. 예컨대 경을 새기는 데 있어서도 한 자 한 자 새겨 내려가면 먼저 새기던 마음은 자꾸 과거심이 되어 없어지니 그게 불가득입니다.
또 현재심도 불가득입니다. 지금 현재 이렇게 설명하는 이 마음이 한 자 한 자 새길 적마다 과거심으로 자꾸 넘어갑니다. 과거심이라 하는 경우에도 과(過)하는 생각 다르고 거(去)하는 생각 다르고 이렇게 찰라 찰라 변하는 이것이 현재심입니다. 말을 열 마디 하면 생각이 열 번 지나가게 되니 마치 한강 물처럼 자꾸 흘러가는 것의 연속일 뿐이어서 그 가운데 어떤 것을 한강 물이라고 지적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한강에 흐르는 물은 인천 바다에 들어가느라고 흘러가는 동안 지금 잠깐 통과하는 것뿐이고, 이것이 한강 물이라고 할 만한 물은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시아문(如是我聞)」 첫 번부터 금강경을 쭉 읽어 보든지 강의를 해도 역시 글자 한 자 한 자를 설명할 때 마다 그 뜻이 다르므로 그걸 우리가 소위 현재심(現在心)이라고 하지만 글자마다 뜻이 다르니 천 자나 만 자나 벌써 과거로 흘러서 현재·과거·현재·과거로 넘어갔으므로 어느 것을 지적해서 이것이 현재라고 할 만한 현재는 없이 과거로 되어 버립니다. 마음심(心)할 때도 ‘마음심’의 심까지 읽고 난 순간 벌써 과거 마음이 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생각 상(想)할 차례라면 생각 상은 아직 안 나왔으므로 미래이니 <마음 심>은 과거로 떨어지고 <생각 상>은 미래로 남아 있고 이러다 보니까 현재는 항상 없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 범부가 생각하면 현재심이 있는 것으로 봤지 사실 <현재심불가득>이란 말은 지금 당장 이 마음도 잡아 쥐어 볼 수 없고 챙겨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과이부지(過而不止), 곧 자꾸 지나가고 머물지 않으니 지나간 마음, 아직 오지 않은 마음, 금방 현전해서 자꾸 지나가는 마음이니까 다음 생각 다음 말이 머리를 내 밀면서 붙잡을 수 없이 광선 모양으로 달아납니다. 그래서 현재심을 얻을 수가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또 미래심(未來心)은 마음이 나오기 전이니 예컨대 유심(有心)의 두 글자를 새기는 경우에 지금 위에 있을 유(有)자를 새기고 있으면 아직 마음심(心)하는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니 미래 마음은 생기지도 않은 것이므로 그것도 붙잡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결국 삼세심불가득(三世心不可得), 곧 과거심·현재심·미래심의 삼세심(三世心)은 얻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說 義]
▶참 마음은 볼 수 없다
사람들은 흔히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고 하는 서양 철인의 말을 그대로 믿는 것 같은데, 그러나 이것이 적어도 철인의 말이라면 심히 서글픈 일입니다. 생각은 어디까지나 주인공인 나로부터 창조되어진 2차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좋아하고 싫어하고 이것저것 생각하는 것은 마음의 본체는 아닙니다. 당나라 때 인도에서 스님 한 분이 오셨는데 이 분이 모르는 게 없어서 뭐든지 물으라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일체중생의 마음을 다 알아맞히는 신통을 얻은 이입니다. 이것을 다른 이의 마음을 안다고 타심통(他心通)이라고 합니다. 그때 남양혜충국사(南陽慧忠國師)라고 육조 스님의 법을 이어받은 조사님이 계실 때입니다. 이 어른이 국사로 계실 적에 그런 소문이 나서 인사를 하러 가셨습니다. 혜충국사 말씀이 「소문을 들으니 스님께서 타심통까지 하셔서 모든 사람의 마음을 잘 아신다는 데 사실 그렇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그럼 내 마음 좀 알아맞혀 보십시오, 자 그럼 내 마음이 지금 어디 있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이때 혜충국사는 강가에 배를 타고 놀던 일을 생각했습니다. 「국사님께서는 지금 아무 강가에서 뱃놀이를 하십니다.」 혜충국사는 이번에는 다른 생각을 하며 「지금은 어디에 있습니까?」 「아 대선사님이시고 일국의 국사님이 어떻게 원숭이하고 같이 노십니까?」 그때 혜충국사는 창경원 같은데서 보던 원숭이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건 속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또 이번에는 다시 마음을 대 선정에 두시고는 「지금은 내 마음이 어디에 있습니까?」하고 물으니 그는 「알아맞힐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혜충국사에게 귀의하여 정법(正法)을 닦았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생각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만 알아도 안 됩니다. 우리가 흔히 체니 용이니 하고 말하지만, 「아무 생각 없는 게 자기 근본성품이다. 이것을 발견해서 깨달아 가지고 나중에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것인가 보다.」 그렇게 알고 있고 이 반야경도 그렇게 새겨 있기도 하지만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실제로 체득하신 것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일이 없다.」고 딱 잡아떼시다가 「얻긴 얻었지만 참말로 얻은 건 아니다. 그게 무실무허한 법이라 실로 얻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허무한 것도 아니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그런 내용이기 때문에 하신 말씀 또 하신 것입니다.
▶시간은 무엇인가
사람들은 흔히 「과거·현재·미래,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다.」 하지만 과거나 미래는 다 현재를 기준으로 해서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이 오후 6시라면 6시 1분 뒤는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니 미래의 시간이고 5시 59분까지는 지나갔으니 과거라 하겠고, 그러면 5시 59분 1초부터 6시 0초까지는 현재가 되는데 그 1분을 60초로 나누어 생각할 때 59분 30초가 현재라면 59분 29초는 과거고 59분 31초는 미래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1초를 현재라고 하더라도 1초의 시간을 만분의 1초 백만분의 1초로 나누어 생각할 때는 그것도 현재라고 지적할만한 시간의 표준은 없어집니다. 왜냐하면 시간이란 강물처럼 흘러가는 것이므로 흐름의 연속일 뿐 어느 순간도 정지되어 있는 순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시간이 흐르는 것을 우리가 육안으로 보지 못할 뿐입니다.
만일 시간이 흘러갈 수 있는 것이라면 하나의 물질이어야 합니다. 최소한 에너지라도 되어 가지고 흘러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에너지나 물질을 가지고 시간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또 물질의 운동을 가지고 시간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또 물질의 운동을 가지고 시간이라고 말하지만 그럴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물체의 운동법칙이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일치하는 표준이 없으면 같은 한 시간이 긴 것도 있고 짧은 것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 물질의 움직임이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으므로 어느 순간을 가리켜 현재라고 할 만한 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현재는 있을 수 없다고 하면 무엇을 기준으로 해서 과거나 미래는 성립될 수 없는 말입니다. 다만 우리가 가정을 해서 하는 말에 불과합니다. 진실 그대로를 말한다면 삼라만유의 모든 존재가 다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것입니다. 물질 그 자체가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변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과거라고 하는 것은 지나간 일을 추억한다는 말이지만 작년은 이미 작년으로 지나가 버렸습니다. 작년 365일 다 흘러가 버린 것이므로 작년이라고 하는 사실은 다 소모되고 없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것을 현실이라고 할 것인가. 우리는 흔히 현실 현실하고 현실주의를 내 세우지만 우리들이 말하고 생각하는 그 내용을 따지고 보면 사실 그런 현실이 있을 수 없습니다. 물론 현실을 무시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언제든지 있는 것만이 현실이지 지나가 버린 것은 현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제는 추억으로 인식될 수 있지만 어제를 다시 만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어제라는 것은 생각뿐이지 어제란 확실한 시간이란 게 없습니다. 일초도 쉬지 않고 돌아가는 시계바늘도 우리 눈으로 볼 수 없지만 한 시간이면 어김없이 한 바퀴를 돕니다. 죽순(竹筍)이 밤사이에 한 길을 크지만 크는 모습은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죽순이 크는 속도나 시계바늘이 돌아가는 속도가 최고 속도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는 어느 정도의 속도는 볼 수 있지만 속도 이전의 움직임을 볼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컨대 프로펠러가 처음 돌기 시작할 적에는 확실히 보이지만 빨리 돌면 차차 안 보이다가 나중에는 동그라미만 보이게 됩니다. 우주 만물은 끊임없이 성주괴공(成住壞空)이 되어가고 있으니 현실을 볼 수 없고 1초라도 머물러 있는 순간이 없어서 과거나 미래를 가지고 생각하는 것뿐이므로 현실은 있을 수 없습니다. 어느 순간에는 그 본래의 형태는 없습니다. 보이지 않게 돌아가는 시계 바늘이 어떤 장소에 잠시도 머무르지 않듯이 아무 것도 없는 데서 자꾸 커가고 나중에는 없는 데로 자꾸 돌아가는 한 개의 과정을 보는 것이지 현실을 보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볼 수 있는 현실은 없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객관세계인 이 우주에는 현실이란 없습니다. 그러나 현실을 무시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현실이 절대존재가 아니라는 확실한 안목을 가지고 현실을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교는 염세철학(厭世哲學)이 되어서 「염세다. 우상이다. 무상이다.」하여 현실을 무시한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현실을 있는 것으로 있는 줄로 잘못 알았기 때문에 중생들은 자꾸 속아서 고해의 길을 세세생생을 잘못 살아가게 마련인데, 이런 중생들로 하여금 이런 현실을 바로 살게 하며 속지 않게 해서 복과 지혜가 원만한 정토(淨土)의 참다운 현실을 살게 하자는 것이 불교입니다. 이런 뜻에서 현실이란 무엇인가 하고 뚜렷하게 말하자면, 현실이라 할 수도 없고 무엇이라 대답할 수도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덕산화상과 삼세심(三世心) 불가득
당나라 때 선풍(禪風)을 크게 떨쳤던 덕산(德山)스님이란 유명한 조사스님이 계셨습니다. 별명을 주금강(周金剛)이라고 했는데, 금강경에 대해 하도 잘 알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던 것입니다. 당시 금강경에 대해 하도 잘 알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던 것입니다. 당시 금강경에 대해 공부한 이들은 모두 제 나름대로 주석해 놓은 것이 있었습니다. 간단하면서 뜻이 한량없이 깊기도 하므로 불법 전체의 대의를 금강경에서 끄집어 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지간하면 여기에 붓대를 듭니다. 그래서 팔백대가(八百大家)나 되는 많은 이들이 금강경 주석을 해 놓았는데 주금강도 자신이 직접 주석하여 짊어지고 다녔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남방에 육신보살(肉身菩薩)이 한 분 나왔는데 일자무식한 나무꾼으로 견성을 해서 그 종지를 크게 떨친다는 소문을 들은 주금강은, 「여러 백천만겁 아승지겁을 닦아서 구공을 얻고 보살행을 해야 한다고 일체 경전에 쓰여 있는데 땔나무꾼이 견성을 하다니 그리고 또 쉽게 성불한다고 하니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 어디서 마구니가 왔는가 보다. 내가 한 번 가봐야겠다.」하고 나섰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팔백여가를 집대성하고 자기가 쓴 것이 제일 완전하게 됐다고 하여 항상 「금강경은 나한테 물어라.」하며 돌아다니는 판인데, 육조대사가 나와서 이런 요망한 소리를 하여 부처님 뜻에 어긋나는 내용을 가지고 수많은 제자가 있다니 이들한테 항복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금강경을 짊어지고 남방 양양 밑에 광동(廣東)으로 수만리 길을 걸어가는 중이었습니다. 한참 가다가 한 노파가 길가에서 호떡을 팔고 있는 집을 보고 「점심을 좀 먹어야겠으니 호떡 좀 팔으시오.」했습니다. 그 노파 말이 「호떡은 팔기가 어렵지 않은데 스님 짊어진 게 무엇입니까?」하고 묻습니다. 「이것이 금강경입니다.」 「금강경에 대해서 내가 의심나는 게 있는데 물어 보면 대답할 수 있습니까?」 「아 금강경이라면 다 잘 알고 있으니 무엇이나 물으시오.」 「금강경에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이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있습니다.」 「그걸 좀 설명해 주십시오.」 그래서 지금 내가 설명한 것처럼 우리 모두 삼세심뿐인데 이름이 삼세심이지 과거심 미래심뿐입니다. 그러니 삼세심이 불가득이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듣고 있던 노파가 묻기를, 「잘 알아들었습니다. 그런데 삼세심이 불가득인데 점심이라 하셨으니 어느 마음에 점심을 합니까?」하고 추궁합니다. 점심이란 배고프다는 생각을 없애기 위해서 마음에 점을 찍는다. 잠깐 요기한다는 말인데, 그러니 어느 마음에다 점을 칠 것이냐는 뜻입니다. 이 물음에 금강경 대강주(大講主)인 주금강의 입이 탁 틀어 막혔습니다. 과거심에다 점을 칠겁니까? 현재심에다 점을 칠겁니까? 말도 실수고 생각해 봐도 알 수가 없습니다. 불교라면 자기 혼자 하는 판인데 그야말로 무식한 호떡장수 할머니에게 꼼짝 못하게 됐습니다. 호되게 방망이를 맞은 주금강은 태도를 고치어 「이 근방에 어디 선지식이 계신 절이 있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여기서 조금만 들어가면 용담선사(龍潭禪師)라고 아주 큰 선지식이 있습니다.」하고 가리켜 줍니다.
그래서 자못 심각해져 가지고 거길 들어가서 여러 가지 얘기 많이 하고 금강경 펴 놓고 그 얘기를 저물도록 하다가 어두워서 자기가 잘 방으로 가려고 하는데 용담스님이 등불을 하나 켜 줬습니다. 덕산스님은 고맙게 받아서 들고 문을 열고 막 나가려고 하는 찰나에 용담선사가 등이 깨지도록 쳐서 불을 홱 껐습니다. 그 바람에 덕산스님은 확철대오해서 그 이튿날로 자기의 손수 쓴 금강경주석을 뒷산에 올라가서 다 불 질러 버렸습니다. 「내가 큰 죄를 지을 뻔했다.」고 그러면서 문자법사니까 글을 잘 새기고 불법종취(佛法宗趣)가 이렇다 하는 정도지 견성한 이가 아닙니다. 실상반야 없이 문자반야란 말입니다. 문자반야도 그대로 잘하면 문자견성(文字見性)으로 그 조리를 잘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껍데기만 해석하는 데는 잘 안다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견성하면 그렇다 하더라, 부처가 되니까 이렇다 하더라.」하는 정도였지 실제로 자신이 깨달아 보지는 못했는데 이제 참 깨치고 보니 참 굉장한 이가 됐습니다.
그래서 그때 선방에 가면 선지식 같은 이가 혹 견성을 했다거나 뭣 좀 아는 것같이 하는 학인이 있으면 이것을 물어 봅니다. 「그때 어떻게 해야 덕산스님이 그 노인한테 호떡을 얻어먹었겠느냐?」는 겁니다. 과거심불가득·현재심불가득·미래심불가득이고 모두 불가득인데 어느 마음에다 점을 칠 것이냐? 그걸 대답하면 내가 떡을 거져드리고 그걸 대답 못하면 떡을 안 준다는 그 노파의 말을 어떻게 대답해야 할 것인가를 시험합니다. 인제 어떻게 해야 떡을 얻어먹겠느냐는 겁니다. 여기 꼼짝 못하고 떡을 내 주는 법이 있습니다. 그러니 여기 숙제가 하나 더 붙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