究竟無我分 第十七

 

 

爾時(이시)에 須菩提(수보리)-白佛言(백불언)하사되 世尊(세존)하 善男子善女人(선남자선여인)이 發阿?多羅三?三菩提(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하면 云何應住(운하응주)하며 云何降伏其心(운하항복기심)하리이까 佛告須菩提(불고수보리)하사되 若善男子善女人(약선남자선여인)이 發阿?多羅三?三菩提心者(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자)는 當生如是心(당생여시심)이리니 我應滅度一切衆生(아응멸도일체중생)하리라 滅度一切衆生(멸도일체중생)이되 而無有一衆生(이무유일중생)도 實滅度者(실멸도자)니라 何以故(하이고)오 須菩提(수보리)야 若菩薩(약보살)이 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유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면 卽非菩薩(즉비보살)이니라 所以者何(소이자하)오 須菩提(수보리)야 實無有法(실무유법)이 發阿?多羅三?三菩提心者(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자)니라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如來(여래)-於燃燈佛所(어연등불소)에 有法(유법)하야 得阿?多羅三?三菩提不(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부)아 不也(불야)니이다 世尊(세존)하 如我解佛所說義(여아해불소설의)하여는 佛於燃燈佛所(불어연등불소)에 無有法(무유법)하야 得阿?多羅三?三菩提(득라뇩다라삼먁삼보리)하니이다 佛言(불언)하사되 如是如是(여시여시)니라 須菩提(수보리)야 實無有法(실무유법)하야 如來得阿?多羅三?三菩提(여래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니라 須菩提(수보리)야 若有法(약유법)하야 如來得阿?多羅三?三菩提者(여래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자)일댄 燃燈佛(연등불)이 卽不與我授記(즉불여아수기)하사되 汝於來世(여어내세)에 當得作佛(당득작불)하야 號釋迦牟尼(호석가모니)련마는 以實無有法(이실무유법)하야 得阿?多羅三?三菩提(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일새 是故(시고)로 燃燈佛(연등불)이 如我授記(여아수기)하사 作是言(작시언)하시되 汝於來世(여어내세)에 當得作佛(당득작불)하야 號釋迦牟尼(호석가모니)라하시니라 何以故(하이고)오 如來者(여래자)는 卽諸法如義(즉제법여의)니라 若有人言(약유인언)하되 如來得阿?多羅三?三菩提(여래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면 須菩提(수보리)야 實無有法(실무유법)하야 佛得阿?多羅三?三菩提(불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니라 須菩提(수보리)야 如來所得阿?多羅三?三菩提(여래소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於是中(어시중)에 無實無虛(무실무허)하니라 是故(시고)로 如來說一切法(여래설일체법)이 皆是佛法(개시불법)이니라 須菩提(수보리)야 所言一切法者(소언일체법자)는 卽非一切法(즉비일체법)이라 是故(시고)로 名一切法(명일체법)이니라 須菩提(수보리)야 譬如人身長大(비여인신장대)이니라 須菩提言(수보리언)하되 世尊(세존)하 如來說人身長大(여래설인신장대)는 卽爲非大身(즉위비대신)이요 是名大身(시명대신)이니이다 須菩提(수보리)야 菩薩(보살)도 亦如是(역여시)하야 若作是言(약작시언)하되 我當滅度無量衆生(아당멸도무량중생)이라하면 卽不名菩薩(즉불명보살)이니 何以故(하이고)오 須菩提(수보리)야 實無有法(실무유법)이 名爲菩薩(명위보살)이니 是故(시고)로 佛說一切法(불설일체법)이 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무아무인무중생무수자)라하니라 須菩提(수보리)야 若菩薩(약보살)이 作是言(작시언)하되 我當莊嚴佛土(아당장엄불토)라하면 是不名菩薩(시불명보살)이니 何以故(하이고)오 如來說莊嚴佛土者(여래설장엄불토자)는 卽非莊嚴(즉비장엄)이요 是名莊嚴(시명장엄)이니라 須菩提(수보리)야 若菩薩(약보살)이 通達無我法者(통달무아법자)면 如來說名眞是菩薩(여래설명진시보살)이니라.

 

그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어 말씀했다. 『세존이시여!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이는 마땅히 어떻게 머물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 받아야 하나이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이는 마땅히 이와같이 마음을 낼 것이니, 내가 일체 중생을 제도하리라 하여 일체 중생을 다 제도하지만 실은 한 중생도 제도된 자가 없느니라. 왜 그러냐 하면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그것은 실로 어떤 법이 있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이가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네 뜻이 어떠하냐? 여래께서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어떤 법이 있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뜻을 제가 아는 바로는 부처님께서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어떤 법이 있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 아니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고 그러하다. 수보리야! 실로 어떤 법이 있어서 여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 없느니라. 수보리야! 만일 어떤 법이 있어서 여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면, 연등불께서 곧 나에게 「네가 다음 세상에 마땅히 부처를 이루어서 호를 석가모니라 하리라.」고 <수기>를 주시지 않으셨을 것인데, 실로 어떤 법이 있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 없으므로 그래서 연등불께서 나에게 수기를 주어 말씀하시기를 「네가 다음 세상에 마땅히 부처가 될 것이니 호를 석가모니라 하리라.」하셨느니라. 왜 그러냐 하면 여래라 함은 곧 모든 법이 같다는 뜻이니, 만일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여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하더라도 수보리야! 실로 부처님은 어떤 법이 있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 없느니라, 수보리야! 여래께서 얻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이 가운데에는 실다움도 없고 허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여래께서 말하기를 「일체 법이 다 이 불법이라」고 하였느니라. 수보리야! 이른바 일체법이라 함은 곧 일체법이 아니니, 그러므로 이름이 일체법이니라. 수보리야! 비유컨대 사람의 몸이 아주 큰 것과 같으니라.』

수보리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사람의 몸이 아주 크다고 말씀하신 것은 곧 큰 몸이 아니라 그 이름이 큰 몸이옵니다.』 『수보리야. 보살도 또한 이와 같으니 만일 「내가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했노라.」하고 말하는 이라면 곧 보살이라 할 수 없느니라. 어째서 그러냐 하면, 수보리야! 실로 어떤 법도 두지 않는 것이 보살이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일체법>이 <나>도 없고 <남>도 없고 <중생살이>도 없고 <오래산다는 것>도 없다.」고 하셨사옵니다.』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내가 마땅히 불국토를 장엄했노라.」하고 말한다면 이 사람은 곧 보살이 아니니, 왜 그러냐 하면 여래께서 말씀한 불국토의 장엄은, 곧 장엄이 아니라 그 이름이 장엄이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나>없는 진리를 통달했다면, 여래께서 「참으로 이것이 보살이라」 말하리라.』

 

 

第十七 究竟無我分--마침내 나 없다

 

[科 解]

여기서는 처음에 선현기청분 제2(善現其請分 第二)에서 수보리존자께서 부처님께 여쭈어 보았던 금강경의 최초의 문제이며 근본문제인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심한 이가 「어떻게 마음을 가지며 어떻게 마음을 항복받을 것이냐」에 대한 법문을 다시 한 번 여쭈어 봅니다. 그러므로 이제까지의 법문을 다시 한 번 정리해서 되풀이하여 여쭈어 보는 것과 같습니다.

중생들은 아직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키지 못한 번뇌망상 속의 범부들이므로 「마음을 가지는 법과 번뇌망상 항복하는 법」을 한두 번 말씀했더라도 확실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그 요령과 핵심을 마음 깊이 간직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시 한 번 거듭 여쭈어 본 것입니다. 수보리존자는 아공·법공·구공의 도리를 남김없이 완전무결하게 깨달으신 해공제일(解空第一)의 부처님 상수제자(上首弟子)이시므로 이미 보리심을 일으킨 보살의 닦는 길을 다 알고 계시지만, 그렇지 못한 당시의 대중과 미래 중생들을 위해 거듭 여쭈어 보는 것이며, 동시에 <항복기심>하고 닦는 자가 누구인가를 거듭 밝혀 주시기를 여쭈어 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무량중생을 제도 하셨지만 한 중생도 제도되었음을 보지 않으시니 보살은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기 때문이라」고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의 대의를 말씀하시고, 어떤 법이 있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키고 얻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며 일체법이 다 불법이어서 마침내는 불법이니 일체법이니의 구별이 없으며, 불국토를 장엄하는 것도 없다는 말씀을 차례대로 연결하여 이야기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이제까지 말씀하신 금강경 상권을 종합정리해서 함축성 있게 말씀해 주신 것이 이 <구경무아분>입니다. 발심한 <나>도 없고 중생을 제도한 <나>도, <중생>도 없어서 이 <무아>의 진리를 통달해야 한다는 뜻으로 <통달무아분>이라 한 것입니다.

 

原 文 : 爾時 須菩提 白佛言 世尊 善男子善女人 發阿?多羅三?三菩提心 云何應住 云何降伏其心

 

[解 義] 그때 수보리께서 부처님께 『세존이시여! 선남자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이는 마땅히 어떻게 마음에 머물며 어떻게 마음을 항복하겠습니까?』하고 사뢰었습니다. 이것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하려면 이렇게 새길 수도 있습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발하는 것을 견성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해서 토를 그렇게 답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하려고 하면 어떻게 그 마음을 가지며 어디다 그 마음을 두며 어떻게 우리가 한량없는 번뇌망상을 항복 받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나중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여쭈어 본 것으로 푸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건 범부로서 불교가 지금 어디가 붙었는지, 견성한다는 것이 무엇을 깨닫는 것인지,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묻는 소리인데 범부로서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할 수는 있습니다. 견성하기 전에 선지식을 만나고 훌륭한 법사스님을 만나 가지고 지도를 받아서 「아! 이 말하고 말 듣고 하는 이것이, 배고프면 밥 생각하는 이것이 영원불멸의 <참 나>의 존재이겠구나.」 이렇게 알아서 아직 깨치지는 못했지만 자기가 그렇게 믿을 수 있도록 이론을 배웠다고 하면, 그래서 「사람이 다른 거 하는 것보다 견성을 해서 해탈해야 하겠구나.」하는 도리를 확실히 알았고 「지금 말하고 밥 먹고 남과 싸우고 온갖 짓을 다 하는 이것이 곧 이미 성불한 것이로구나.」하는 이런 이론에 아무 의심 없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역시 범부로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겁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달아 얻는 일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할 게 없는 것을 확실히 안 것입니다.

이런 것을 위해서 부처님께서 40여년 동안을 이렇게 횡야설 수야설(橫也說竪也說)로 해서 잠시도 쉴 새 없이 말씀을 해서 남겨 놓으신 것이 대장경(大藏經)입니다. 그래서 자꾸 이렇게 말하고 저렇게 설명하지만 못 알아차리니까 말씀을 하셔서 자꾸 여기까지 몰고 오는데, 이제 내가 어지간히 알기는 알았는데 한 부처님 뜻을 확실히 알아서 내가 부처님한테 배운 것도 없고 증득한 것도 없고 확실히 내가 그렇게 된 줄 알고 있는데, 그래도 행여나 싶어서 한 번 더 여쭈어 보는 겁니다. 내가 혹 어디 결점이 있나 하고 조심하는 것이니 배우는 사람은 이렇게 정신자세가 돼야 할 겁니다.

그래서 공부하는 수좌들은 완전히 알았다 싶어도 또 선지식한테나 도인 스님네 한데 또 물어 보고 물어 보는 겁니다. 자기가 아는 소리를 가지고 이리도 묻고 또 달리도 물어보고 같은 소리로 또 물어 보기도 하고 이런 것이 그게 참 조심성 있게 공부하는 태도입니다.

호리유차(毫厘有差)면 천리현격(千里懸隔)으로 약간만 틈이 있어도 천리가 멀어지는 것이니 부처님 성불하는데 그만 뒷걸음이 됩니다. 또 하나는 나는 위대한 법을 똑바로 알아듣고 깨달았지만 후세의 중생들이 내가 깨치듯이 깨칠 수 있을까? 그게 염려되어 또 물으시고 부처님께서 되풀이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조금은 다른 것 같아도 같은 이야기입니다. 여시아문부터도 내내 그 소리가 그 소리인데 그게 모두 조금조금 달라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 중생은 이렇게 법문을 들을 때는 그럴 듯해도 돌아서면 또 잊어버리고 그냥 탐진치로 중생심이 그대로 일어납니다. 좋은 거 궂은 거 우리가 구별할 수 없는 건데 평소에 좋은 거라고 생각하던 게 앞에 나서니 관습적으로 좋다는 생각을 냅니다. 보기 싫은 사람 볼 때에 보기 싫다는 미운 생각이 앞에 나와 놓으면 미워하게 되는 것이 중생입니다. 그래서 금강경 산림을 하기 전이나 마찬가지가 되니 육두문자(肉頭文字)로 금강경 들으나 마나 한가지입니다. 그러니까 배우는 제자나 가르치는 스승이나 이 수보리존자처럼 이렇게 묻고 저렇게 대답하고 하여 철두철미하게 해야 합니다.

 

原 文 : 佛告 須菩提 若善男子善女人 發阿?多羅三?三菩提心者 當生如是心 我應滅度 一切衆生 滅度一切衆生 已而無有一衆生 實滅度者

 

[解 義] 수보리존자가 마음 가지는 법과 번뇌 항복 받는 법을 다시 또 여쭈어 본 데 대해 부처님께서는 앞에서와 똑같이 대답하신 것입니다.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이는 마땅히 이와 같이 마음을 낼 것이니, 내가 마땅히 한 중생도 남기지 않고 일체 중생을 다 제도 하리라.』 이렇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지장보살(地藏菩薩) 같은 분은 처녀 때 이런 법문을 듣고는 어디를 가다가 옷을 벗고 떠는 거지를 만나서 옷을 홀딱 벗어 줍니다. 그리고 자기는 벌거벗은 나체의 몸을 남한테 보일 수 없으니 땅에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서 가만히 앉아 있습니다. 그래서 땅에 몸을 감추었다고 해서 <지장보살>이라고 합니다.

중생도진아성보리(衆生度盡我成菩提) 「중생을 다 제도해서 마친 뒤에라야 내가 대보리를 증득하리라」하는 원리입니다. 지장보살은 일체 사생육도(四生六道)의 분신(分身)으로 변화신(變化身)까지 나타내시어 제도하시지마는 치우쳐서 지옥을 많이 가십니다. 지옥 문 앞에 딱 섰다가 들어가는 중생보고 개심(改心)을 시켜서 알아듣고 착한 생각 내도록 해 가지고 도로 인간 세상이나 천당에 올라가게 하는데 그렇게 내 보내 놓으면 금방 눈 깜박할 사이에 또 되돌아오고 합니다. 그래서 지옥 문전에 지장보살이 눈물 마를 새가 없다고 합니다.

지장보살님처럼 우리도 보리심을 발했거든 마땅히 이와 같은 마음을 낼 것이니 「내가 마땅히 일체중생을 다 제도하리라」고 마음먹고 또 「일체중생을 다 제도해 마치고 나서는 실로는 한 중생도 멸도를 얻은 자가 없다, 제도된 중생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라.」 그러셨습니다.

대용맹심을 내서 인간적으로 아주 훌륭한 인간이 되고 한 번 아무 생각 없이 되어 남보다 잘났다고도 안하고 뒤 떨어지려고도 안하고 무심경계에 들어가서 천지가 내 집이라 하는 게 도리어 약한 소리입니다. 천지가 그만 내 주머니 가운데 들어있는 이런 배짱으로 해야 합니다. 사실이 또 그런 것입니다. 밥은 아무데서나 얻어먹고 방방곡곡 다니며 금강경의 사구게(四句偈)를 일러 주어서 중생교화를 하지만 교화했다는 생각도 없고 교화한 중생도 없이 해야 합니다. 이것을 줄여서 말하면 「생각 없이 일하자」하는 간단한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일체 중생을 제도하리라.」 이런 생각을 갖고 그 생각대로 일체 중생을 다 제도해서 마쳤지마는 다 제도된 걸 보고는 역시 「한 중생도 제도했거니」하는 생각을 안 합니다. 실제로 사실 중생이 제도 받은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原 文 : 何以故 須菩提 若菩薩 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卽非菩薩 所以者何 須菩提 實無有法 發阿?多羅三?三菩提心者

 

[解 義] 보살이 일체중생을 제도했는데도 아무도 제도한 이도 없고 한 중생도 제도 받은 사람도 없는 까닭을 부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만일 보살이 <아상>이 있거나 <중생상>이 있거나 <수자상>이 있으면 이런 이는 곧 보살의 자격이 없는 때문이니, 그 까닭이 무엇이냐 하면 수보리야! 실로 어떤 법이 있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것이 없느니라.』

<아상> 하나만 있으면 밑에 삼상(三相)이 따라 나옵니다. 찰나에 연기법(緣起法), 곧 상대법으로 일어납니다. <나>라고 할 때 벌써 저쪽을 상대로 해서 또 저쪽 때문에 <나>라는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는 저쪽과 동시에 일어나는 생각입니다. 그렇게 되면 <중생상>이 벌어지는 것이니 사람은 사회적인 것이기 때문에 모든 것은 사회적으로 단체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며 따라서 서로 어울려 가지고 <중생상>으로 중생놀음으로 살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또 칠팔십은 넘도록 살아야겠다고 또 살 것이라고 믿고 또 그렇게 살려고 애쓰는 것 그게 <수자상>입니다. 만일 이런 것들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니까 아무리 견성 아니라 그 무엇을 해도 보살하면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증득해야 보살이라고 그럽니다.

그렇지만 그게 만일 아상이 있을 때에는 무생법인을 증득한 채 그대로 중생이고 깨쳐 놓은 그게 그만 사도(邪道)가 됩니다. 그러니 불법 깨친 게 아니라는 그말인데, 이런 것은 용심(用心)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금방 사도가 됐다가 번쩍 정도가 됐다가 들락날락하는 게 초심보살(初心菩薩)입니다.

『그것은 왜 그런고 하니 수보리야! 「사실 어떤 법이 있어서 그런 발심을 할만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할 만한 그런 법이 없기 때문이니라. 그래서 어떤 마음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다 설명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이 없고 어떠한 발심 그것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한다. 본래부터 보리심 발했다, 나중에 견성해야 보리심 발한 것이다, 또 부처님께서 확실히 될 때에야 사실 보리심이 증득된 것이다」하는 말은 했지마는 사실 그런 법은 없다.』고 하신 겁니다. 그 이유를 누가 한 번 말씀해 보십시오. <대중대답생략>

 

原 文 :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於燃燈佛所 有法 得阿?多羅三?三菩提不 不也 世尊 如我解佛所說義 佛於燃燈佛所 無有法 得阿?多羅三?三菩提

 

[解 義] 부처님께서 무량아승지 겁전의 과거세에 연등불(燃燈佛)한테 법문 듣고 발심해서 견성하고 수행해서 성불했습니다. 그래서 세존께서 수보리존자에게 물으신 것입니다.

『수보리야! 네 생각에는 어떠냐? 여래께서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어떤 법이 있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 있느냐 없느냐?』

이에 대해 수보리존자는 <어떤 법>이 있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내용이 있어서 「이것이 부처님께서 증득하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다.」하고 내세울만한 게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석존께서 범부 때 처음으로 연등부처님의 설법을 들은 적도 있지만 그것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기 전이고 도깨비 소리를 도깨비가 들은 것이며 꿈 속에서 꿈 사람이 꿈 얘기 하는 것이니, 꿈 가운데 부처, 꿈 가운데 중생은 부처도 아니고 중생도 아닙니다.

석존께서 무량아승지겁(無量阿僧祗劫) 전의 과거 연등불한테 법문 듣고 발심 수행하고 참선해서 견성했습니다. ‘일체 부처는 부처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게 부처다. 그러니까 법문 하신 법문도 없고 법문 들었다고 하면 나는 벌써 도깨비 말을 들은 것이니, 도깨비 말 듣고 도깨비 사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한 가지는 정리가 되어야 할 판인데 이런 얘기는 뚝 떨어진 말입니다.

그러니까 뚝 떨어진게 글자 한자 한자를 전부 다 그렇게 배우고 나면 자꾸 그 뜻을 외워야 합니다. 하루 한 번씩이라도 경책을 펴지 않고 외우게 되면 그때는 눈을 감고 앉아서 「여시아문하사오니」이렇게 죽 외워야 합니다.

이때 「여시는 말도 아니고 글자도 아니고 이건 참 뭐라고 할 수 없는 그런 내용이 있겠다」하는 걸 배웠습니다. 그런 <여시>자 부터 끄덕이면서 읽어야 합니다. 「참 그렇다. 부처님한테 옳은 말씀 들었고, 세상 어디를 다녀 봐도 들을 수 없는 말씀을 몇 억만생을 살면서 오묘한 진리의 법문 처음 듣는 법문이로구나. 꼭 그렇겠구나.」 하면서 참선하는 마음으로 읽어야 합니다.

 

原 文 : 佛告 如是如是 須菩提 實無有法 如來得阿?多羅三?三菩提 須菩提 若有法 如來得阿?多羅三?三菩 提者 燃燈佛 卽不與我授記 汝於來世 當得作佛 號釋迦牟尼 以實無有法 得阿?多羅三?三菩提 是故 燃燈佛 如我授記 作是言 汝於來世 當得作佛 號釋迦牟尼

 

[解 義] 수보리존자의 대답을 들으신 부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렇다. 그렇고 말고, 옳은 말이다. 수보리야!실로 어떤 법이 있어서 여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 없느니라. 수보리야!만일 내가 어떤 법이 있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면 연등불께서 나에게 「네가 참 불법을 바로 깨달았으니 이 다음 세상에 사바세계에 태어나서 석가모니라는 부처님께서 되어 팔만사천 법문의 법문의 장광설(長廣說)을 하여 많은 중생을 제도하리라」 하고 <수기>(授記)를 주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실로 얻은 법이 없기 때문에 연등불께서 나에게 예언하시기를 「네가 이 다음 세상에 많은 보살행(菩薩行)을 닦아서 무한한 공덕을 쌓고 사바세계에 나아가서 석가모니라는 부처님께서 되어 그 첫 번째 법회에서 다섯 비구를 설법하여 도를 깨닫게 하고 또한 많은 중생을 제도 하리라」고 <수기>를 주셨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왜 내가 얻은 게 없기 때문에 그 수기를 받게 됐다.」고 하겠는가. 내가 얻은 게 있으면 불법적멸(佛法寂滅)에 들어서지 못한 것이니 수기를 줄 수 있습니까? 얻을 게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직 불법과는 십만 팔천리 밖에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저 밖에 일주문(一柱門) 안에는 못 들어간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남한테 보시도 안하고 지계 . 수행도 다 집어치우느냐 하면 그건 또 그대로 해야 합니다. 그런 거 저런 거 다 안 한다고 하면 복도 안 짓고 열반에만 주하는 나한이니 그렇게 되면 아무리 자기가 진보했다 하더라도 중생제도를 안 한 사람이므로 불법을 성취할 수 없고 또 그건 발심 못한 사람이며 이생기심 못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성불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역시 발심해야 하고 일체중생을 아무 생각없이 제도해야 합니다.

일체보살이 즉비보살 시명보살(一切菩薩 卽非菩薩 是名菩薩)로 모든 보살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에 보살이라 한다는 것이며, 일체세계가 즉비세계니 시명세계(一切世界 卽非世界 是名世界), 곧 일체 우주는 곧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그걸 우주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래께서 내려온 것도 아니고 안 온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법신에도 육신에도 치우치지 말아야 하는데 왔다 하면 법신에 치우치고 열반 . 적멸에 치우친 것이며, 안 왔다 하면 현상계 . 중생세계에 치우친 것이 됩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들은 둘 다 분별 못하는 소리입니다.

그러므로 열반을 해서 성불하는 부처님한테도 뜻을 두지 말고, 또 그렇다고 해서 망상 탐진치에도 이끌리지 말라, 거기에도 뜻을 두지 말라, 만일 마음을 생사나 열반이나 어느 한곳에 주하거나 하면 그것은 한쪽에 떨어진 것이니, 하나는 없는 데 떨어지고 하나는 있는 데 떨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응무소주(應無所住)가 아닙니다.

 

原 文 : 何以故 如來者 卽諸法 如義

 

[解 義] 부처님께서 실무유법(實無有法)에 대한 이유를 말씀하시는데 <여래>(如來)의 뜻을 들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왜그러냐 하면, 여래 곧 불께서 실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게 있으면 수기를 안 주시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여래>라 함은 모든 법이 같다는 뜻이기 때문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여래(如來)라 함은 같다는 뜻인데 한문 5만자 가운데 하필 왜 여(如)자를 놓았나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이 글자는 같을 여(如)자 인데 같다는 말은 첫째 변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어제도 그 모양, 오늘도 그 모양, 내일도 그 모양, 늙기 전에도 그 모양, 늙은 뒤에도 그 모양, 죽은 뒤에도 그 모양, 여기 사바세계에 있을 때도 그렇고 극락세계 갔을 때도 그렇고 성불해 놓아도 그것이어서 안 변한다는 뜻입니다. 변하지 않는다는 게 같다는 말이고 같다 하는 게 변하지 않는다는 말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게 또 불생불멸(不生不滅)한다는 뜻입니다. <여래> 이 두 글자에 불법의 뜻이 다 들어가 있습니다. 하고 많은 글자 중에 이 두자를 갖다 놓았을 때는 이유가 있습니다. 자꾸 같아서 참말로 같다는 말이니, 이 <여>라는 건 물질도 아니고 형상도 아니요, 엄연한 진공도 아닌 이 말 듣는 그 자리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허공 이것도 움직일 수 없는 건데, 이건 허공 보다도 더 없는 겁니다. 그런데 래(來)는 <올래>(來)자이니 온다는 뜻인데 변동을 할 수 없는 그게 어떻게 오고가고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있는 것 같으면 오고가고 하겠는데 없는 것이 오고 간다는 것은 말이 안 되니 그러고 보면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있는 것은 더욱 아니고 그러니까 이렇게 얘기할 줄 알고 들을 줄도 알고 이러는 겁니다. 그래 가지고 그게 그런걸 주장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나오기도 하고 앖어지기도 하니 이것이 부처님입니다.

그러니 여기 온거다. 그러니 오고가는 자체가 있어서 여기에 오는 게 아니라 와도 온 게 아닙니다. 부처님의 이 <여>는 갈 수도 없고 올 수도 없는 말이니 이 온다는 말이 온다는 의미가 아니고 오는 게 곧 오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이것을 오는 거라고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여래는 모든 법이 같다는 뜻이다」하셨는데, <여래>(如來)란 <여>는 모든 법이 <여래>(如來)하다는 뜻이므로 부처님께서 성불하셨기 때문에 성불해서 오되 그 <여>가 왔지 온 걸로 온 게 아니다. 그래서 일체법이 다 그와 같다(諸法如意)고 한 것입니다. 곧 모두가 불생불멸한 존재라는 뜻이니 이것도 이 초도 불멸(不滅)이라는 것입니다. 초를 여기다 켜 놓으면 한 치 이상 탔지만 하나도 안 탔다는 것입니다. 이 초는 공장에서 만들기 전에 여기 벌써 서 있는 것이고 공장에서 만든 초가 온 게 아닙니다. 여기서 타는 것은 본래 있던 게 타고 있는 것이고 타도 타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공장에서 초를 가지고 온 것 같지만 사실은 가지고 온 것이 아니라 우리가 착각으로 그렇게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법여의이며 이번 금강경 살림을 통해서 그런 것 쯤은 누구나 쉽게 알 게 됐습니다. 이번에 우리가 금강경을 이렇게 듣고 배우고 연구하고 또 되풀이하고 이러는 데 따라 한국 불교가 바로 됩니다. 이것이 참 기도이고 부처님께서 춤을 추실 것입니다.

 

原 文 : 若有人言 如來得阿?多羅三?三菩提 須菩提 實無有法 佛得阿?多羅三?三菩提 須菩提 如來得阿?多羅三?三菩提 於是中 無實無虛 是故 如來說一切法 皆是佛法

 

[解 義] 부처님께 말씀하시기를 『만일 어떤 사람이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를 얻었느니라.」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렇다고 하더라도 수보리야! 실로 부처님께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게 없느니라. 수보리야! 여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하는 것은 그 법은 사실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허망한 것도 아니니라.』하셨는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수보리야! 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시방세계에다 공포하고 떠들었지만 설사 내가 그렇게 선전하지 안했더라도 내가 깨달았다는 것 때문에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그것을 다 아신다. 사실 또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게 없는데 그렇지만 또 얻긴 얻었지만은 얻은 그게 실지도 아니고 거짓도 아니라」고 하셨으니, 없다 해 놓고 있다고 했다가 하여 이리저리 잡아 떼십니다. 「실도 없고 허도 없어서 참말도 아니고 거짓말도 아니라」 했으니 얻었다는 말씀도 이상한 말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또 말씀하시기를, 「여래께서 말한 일체법이 다 불법이라」고 하셨으니,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긴 얻었는데 그 얻은 것이 내용으로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여 무인무과(無因無果)이니 그러기 때문에 또 일체만법이 그대로 불법이라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49년간 설법하신 것이 그게 불법이 아니라 즉비불법(卽非佛法)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어느 정도 알아듣게 됩니다.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 아무 쓸데 없는 경이니, 그러기 때문에 누가 경을 밟으려고 하면 우리가 밟지 못하게 말립니다. 가만히 있으면 죽어서 지옥에 갈 것이니 일체 불법이 불법이 아니기 때문에 내 목숨이 죽었으면 죽었지 경전을 어무렇게나 함부로 밟고 다니도록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체불법이 즉비불법이니 시명불법(一切佛法 卽非佛法 是名佛法)의 도리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기는 얻었는데 실다운 것도 아니고 헛 것도 아니다.」 하는 말씀은 「말할 수 없는 내용이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얻었다는 말이 참 심원(深遠)한 뜻이 들어 있어서 깊다면 한량 없이 깊은 것이고 얕다면 바늘로 찔러 볼 수도 없이 깊이가 없는 도리입니다. 그러니 발심한 것이 없기 때문에 아무런 내용도 없는 이름만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니 그것은 정법(正法)도 아니고 사법(邪法)도 아닙니다. 여기 까지는 어느 정도 이해가 다 가실 줄 압니다만, 그 다음에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일체법이 다 불법이라고 한다.」한 이 말씀은 또 엉뚱한 말씀이고 생소합니다. 그런데 부처님 말씀은 염주 알을 차례대로 쭉 꿰듯이 그 조리가 딱 들어 맞게 되어 있습니다. 그 말씀을 바로 알아 듣는 사람은 틀림 없이 성불합니다. 이런 사람은 머리깍고 중이 되거나 농사하고 장사하는 신도로 있거나 성불 안 할 도리가 없는 겁니다.

부처님께서 49년 설법하신 것이 그게 불법이 아니라 즉비불법(卽非佛法)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어느 정도 알아듣게 됐는데 일체법이 다 불법이라는 말은 세속의 법도 불법이고 출가의 법도 불법이라는 말이고 유정무정(有情無情)이 다 불법이고 초도 불법이라는 뜻이며 또 불법이란 그 말은 모두가 부처라는 말이 됩니다. 근본 마음자리가 불교라는 그건 한쪽 얘기는 다 됩니다. 물이 파도고 파도가 물이라 해서 우리 탐진치 번뇌망상이 직접 보리와 열반이라 그런 말이고,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다 다른 것이 아니며(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 현상계와 본체계(本體界)인 마음의 경계가 다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다운 것도 허망한 것도 아니라고 했으며, 일체법이 곧 불법이라고 한 것입니다. 설사 중생들이 싸운다 하더라도 싸우고 싶은 마음을 내는 그 자리는 변동이 없으니 그러므로 이 자리에선 싸운다는 것이 불세계에서 싸운다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마음자리 하나만 얘기하는 데는 통과가 되는데 일체법(一切法)이라고 할 때는 마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부처가 되는 불법과 생사법과의 두 가지를 말해 왔습니다. 사서삼경(四書三經) 다 읽고 성경 . 도덕경(道德經) 아무리 해 봐야 그것은 다 생사법이고 세속법이어서 생사 안에 있는 일일 뿐입니다. 과학이니 심리학이니 철학이니 다 생사법이지만 오직 그렇지 않은 것은 불법입니다. 팔만대장경 어디를 펼쳐 보든지 생사 밖에 일이고, 우리가 지금까지 들은 게 생사를 초월할 수 있는 얘기이고 확실히 선도를 행하는 근본 . 실상(實相) 자리이고 아무 생각없는 이것이 모든 행동의 주체가 되어서 성인이 될 마음으로 발심해서 중이 되도록 수도해서 불쌍한 중생제도를 하자는 것입니다.

늙은 때나 젊은 때나 변하지 않는 이 자리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자성자리가 착한 마음을 내 가지고 선한 행동을 해서 복을 받고 악한 생각을 내 가지고 악한 행동을 해서 고생을 하니 인과가 다 그런 것입니다. 따라서 선할 때나 악할 때나 한 사람이 하지 두 사람이 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 이건 말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 자리는 악도 선도 아니니 아무것도 안 하는 가운데서 악은 안 하고 선만 합니다.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풍(家風)이니 이렇게 해서 복과 지혜를 닦아 올라갑니다. 그래서 이것을 제악막작 중선봉행(諸惡莫作 衆善奉行)이라 합니다, 만일 이것이 악한 생각을 내어 극악하게 되면 서울 사람 다 때려 죽이는 그런 짓을 능히 하는데, 이런 생각이 다른 데서는 나올 곳이 없습니다. 육체에서도 나올 수도 없고 나만 알지 다른 사람은 알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러면 무었이냐? 그것은 불생불멸(不生不滅)하는 실재이고 실상 자리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다 알 수 있는 문제이고 말로도 분명합니다. 그런데 일체법(一切法)이라는 것은 유정무정(有情無情)을 다 통해서 하는 소리인데 이야기할 때는 모든 것은 다 공한 것이고 실재(實在), 곧 실상자리의 그림자라고 하지만 이 초 대 현상계의 근본 도리를 이대로 불법이락고 할 때에는 조금 아름해집니다. 이것도 온갖 생각이 불생불멸(不生不滅)하는 <나>로부터 나왔고 실상자리인 여(如)로부터 나왔다고 하는 것을 설명하듯이 만법 이대로 다 불법이라는 도리도 설명이 돼야 할 것입니다, 그 이유를 다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그 논법 역시 생각을 해 봐야 할 문제입니다.

 

原 文 : 須菩提 所言一切法者 卽非一切法 是故 名一切法 須菩提 譬如人身長大 須菩提言 世尊 如來說人身長大 卽爲非大身 是名大身

 

[解 義] 부처님께서 일체법이 다 불법이라고 하는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수보리야! 소언 일체법자(所言一切法者)는 일체법이라 하는 것은 즉비일체법(卽非一切法)이니, 곧 그것이 일체법이 아니니 그러므로 그걸 일체법이라 이름했다.』 하셨습니다.

「일체법이 불법이라고 한다.」 여기까지는 삼단논법이 딱딱 떨어지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비유로 그 실례를 하나 들면, 사람 몸뚱이가 굉장히 커서 9척 장신만하다든지 백두산만하다든지 그렇게 몸뚱이가 큰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비유도 이상스럽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수보리존자의 대답입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사람의 몸뚱이가 큰 것을 보고 크다고 설명하신 것은 곧 몸뚱이가 아닙니다. 그것은 이름을 큰 몸뚱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부처님과 수보리존자가 물으시고 대답하시는 내용이 시비사정(是非事情)에 척척 잘 들어맞습니다. 우리의 몸뚱이는 결국 따지고 보면 물질적 요소로 묘하게 만들어진 구성체(構成體)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물질적 현상은 본체를 캐어보면 아무것도 없는 공한 것이므로 그것을 크다 작다 하는 것은 실체(實體)를 보지 못하고 거짓 모습인 겉만 보고 하는 소리입니다. 또 크다는 것은 작은 것에 비유해서 하는 소리고 작다는 것도 큰 것에 비유해서 하는 소리지 절대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설사 지구만하고 우주만하더라도 그것은 마음에 비하면 크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수보리존자는 여래께서 크다고 하신 말씀은 큰 몸이 아니라 이름을 크다고 하는 것 뿐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다 비유로 하신 말씀이고 실제로 크다는 뜻은 아닙니다.

 

原 文 : 須菩提 菩薩 亦如是 若作是言 我當滅度無量衆生 卽 不名菩薩 何以故 須菩提 實無有法 名爲菩薩 是故 佛說一切法 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

 

[解 義] 『수보리야! 보살이 또한 이와 같아서, 보살의 사상 . 내용 . 정신 가짐 곧 소주지처(所住之處)가 이와 같고 마음 항복하는 법이 이와 같아서 만일 어떤 보살이 「내가 마땅히 한량 없는 중생을 제도 했다.」 이렇게 말한다면 그는 곧 보살이라고 할 수 없느니라.』 이것이 보살의 용심(用心)을 설명한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수보리야!사실 어떤 법이 있어서 그것을 성취해야 보살이다 할 만한 내용이 없다. 이렇고 이런 것이 보살이다, 초견성(初見性)을 해야 보살이다. 마하반야바라밀을 체득해야 보살이다 그러는데 어떤 내용이 마하반야바라밀이냐 하면 그런 것이 없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일체법에 <나>도 없고 <너>도 없고 <중생 살림살이>도 없고 <오래 살려니 하는 생각>도 없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느니라.』

 

原 文 : 須菩提 若菩薩 作是言 我當莊嚴佛土 是不名菩薩 何以故 如來說莊嚴佛土者 卽非莊嚴 是名莊嚴

 

[解 義] 부처님께서 또 보살이 무량한 중생을 제도하고 불세계를 이루는 것도 없는 가운데 무심으로 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이와 같은 말을 하기를, 내가 마땅히 불국토를 장엄했다. 자꾸 공부를 하고 정진을 하고 보시하고 지계하고 육도만행(六度萬行)을 해서 내가 사는 세상이 모두 극락세계처럼 되고 천상국토가 되어 장엄되고 있다. 지옥을 가도 불세계요, 천당을 가도 불세계요, 오탁악세도 불세계요, 우리 중생의 사바세계가 모두 불세계다. 내가 중생일 때에는 모두 험악한 세상이 되고 모진 고통과 불평과 불안과 고독함만 느끼던 험한 세상이더니 이제 그렇지 않다.』 그런 사람이 있으면 그건 보살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건 부처님께서 불국토를 장엄하신다는 말씀은 곧 장엄이 아니란 말입니다. 장엄하는 생각이 아니라 아무런 생각 없이 무심(無心)히 체득되어 있기 때문에 생사나 열반에 주하지 않고, 불법에도 치우치지 않고, 중생법에도 치우치지 않습니다. 왜 그러한지 그걸 발견해야 할 겁니다. 쉽게 말하자면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에 무심하기 때문에 없다는 것도 없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자꾸 업장이 녹아 없어지는 동시에 중생되기 전 미하기 전에 본래 있던 불세계가 자꾸 드러나는데 이것이 굉장한 장엄입니다. 굉장한 화장찰해(華藏刹海)의 세계를 만든다는 생각이 있으면 절대 그런 화장찰해의 불세계가 안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장엄한다는 게 생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아무런 생각도 없이 하는 그걸 가지고 장엄이라고 그럽니다. 그러므로 장엄도 아닙니다. 또 그렇기 때문에 장엄이 되는 것입니다.

 

原 文 : 須菩提 若菩薩 通達無我法者 如來說名眞是菩薩

 

[解 義] 부처님께서 이 <구경무아분>(究竟無我分)의 결론으로 <무아>(無我)를 말씀하십니다.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통달무아법자>(通達無我法者),<나>없는 진리를 확실히 통달하면 그래서 「육체가 내가 아니로구나」하는 진리를 통달하면 그것이 참된 보살이니라.』하셨습니다.

온갖 지식이나 사상이 모두 망상이고 과학자니 철학자니 하는 사람들 정신 빠진 사람들이어서 뭐가뭔지 모르고 도깨비 얘기하고 글 써 놓은 것이니, 만일 그것을 내가 배웠다면 그래서 내가 대학에까지 졸업하고 석사 . 박사가 됐더라도 그것은 모두 가질 바 지식이 못되니 다 포기해야겠다는 것입니다.

일자무식인이 되어야 할 것인데 그걸 내가 옳게 배웠다고 남에게 얘기한다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지식도 버리고 버릴 것 다 내 버려서 버릴 망상이 없어진 상태의 번뇌장(煩惱障)이 아닌 소지장(所知障)까지 다 버리고 나면 이런 거 딱 떼어 놓고 보니 정말 참 통달무아(通達無我)입니다. 진실한 마음자리 이것은 <나>다, 이렇게 생각하면 그것도 또 불법을 아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게 무아법(無我法)인데 그러면서 농사도 짓고 장사도 하고 참선도 하고 경전도 보고 염불도 하고 모두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통달무아하면 그게 정말 진실한 보살이다. 틀림 없이 성불해 가는 사람이다. 정말 내 제자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런 생각 없이 공연히 머리만 깍아 가지고 「중입니다.」하고 「신도입니다.」 그래봤자 정말 큰 일 납니다.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집니다. 머리를 깎지 않아 껍질까지 다 깎았더라도 큰일납니다.

 

 

[說 義]

 

▶ 부주열반 부주생사

「그 마음을 어떻게 두고 어떻게 가져야 하며 번뇌 망상을 어떻게 항복 받느냐?」(云何應住 云何降伏其心) 하는 데 대해서 이론적으로 「내가 꼭 불법을 체득해야 하겠다. 확실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달아 증득해야 하겠다.」고 하는 마음이 결정된 사람의 입장에서 묻는 것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고, 또 실제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달은 초심보살(初心菩薩), 곧 견성한 입장에서 묻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앞에서 <응무소주>(應無所住)해서 이생기심(而生其心)하라는 도리를 여러 백번도 더 말했지만 이것은 생사에도 주하지 말고 열반에도 주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정말 진실하게 발심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까딱하다가는 열반에 주하지 않으면 생사에 주하거나 두 군데 다 주하게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수보리존자가 대아라한(大阿羅漢)이니 욕심을 떠난 아라한 가운데 제일 가는 이욕아라한(離欲阿羅漢)이라」고 하셨듯이 수보리존자는 이미 팔만사천대겁(八萬四千大劫)을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가만히 앉아 일초 동안에 지나간 것처럼 잠깐 지낼 수 있는 공부가 된 분입니다. 그래서 수보리존자는 열반에 들어가 있지만 나는 나한이라는 생각도 없고 이런 걸 증득했다는 생각도 없고 생각 없다는 것도 없고 그런 줄 알고 앉아 있는데 그렇게 된 수보리를 지금 아상 . 인상 . 중생상이 있다는 걸로 부처님께서 몰아 세웠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해 보고 저렇게도 말해 보고 갖은 짓을 다해 가지고 수보리가 알아챘습니다. 이제는 생사열반에 주하지 않고 그리고 나한들처럼 중생제도 집어치우고 염세주의자로 앉아 있지 않고 이제는 보살행을 해야 하겠으니 세상에 나와 보시도 하고 계행까지도 낱낱이 잘 지켜서 여자를 대하여서도 아무 생각이 없이 지킬 수 있는 분이 된 것입니다. 나한만 되면 일체 생각이 뚝 끊어지지만 이 현상계 생사고해에는 안 나가려고하여 열반에 애착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너는 진짜 열반이 아니다. 진짜 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열반도 아니고 생사도 아니고 부주열반 부주생사(不住涅槃 不住生死)하는 것이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면 그게 어떤 것이냐, 한 생각도 없는 열반에 머물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망상 번뇌에도 머물지 않고 그러면 그런 보살의 주체가 어떤 것이냐? 그것은 지금 자꾸 따지고 캐내려는 게 그겁니다.

일체 중생이 중생이 아니기 때문에 그게 중생이고 또 일체 부처가 부처가 아니기 때문에 부처고 일체 불법이 불법이 아니기 때문에 그게 불법이고 이러는 것이 지금 열반에도 주하지 않고 생사에도 주하지 않는 그걸 알아차리도록 하느라고 「일체 불법이 불법이 아니기 때문에 그게 불법이다.」 하는 말이 여기저기 도 주하지 않고 지도한다는 그 말인데 이 말이 어디로 떨어지느냐는 것입니다.

 

▶ 자셔야 자신거죠

생각으로 아무리 생각해 봤자 될만큼 되고는 더 안됩니다. 그러므로 이러니저러니 망상 내지 말고 네가 할 수 있는 일 아무 생각없이 부지런히 해라. 망하든지 흥하든지 집착할 것 없이 농사짓게 되거던 농사짓고 장사하게 되거던 장사해야 합니다. 흉년이 들던지 풍부하게 되려는지 앞으로의 일을 알 수 없습니다. 볏단 거두어 놓고도 그렇고 타작 다 해서 곳간에 들여 놔도 그런줄 알고 하면 아무렇게 해도 안심이 되는 겁니다.

여기 인과를 믿는 기이한 얘기가 있습니다. 스님이 상좌를 하나 뒀는데 이 상좌가 꼭 스님에게 어겨서 반대로 말을 합니다. 무슨 뜻이 있는 말인데도 그렇게 합니다. 봄에 산 한쪽에 밭을 일구어 가지고 모밀을 갈았는데 그것을 갈아 놓고 와서는 「야, 야, 금년 가을에는 모밀은 실컷 먹겠다.」 그러면 그 상좌는 「자셔야 자신거죠.」하고 빗대서 대답합니다. 「네, 그렇겠습니다.」 하고 대답하면 마음이 편할 건데 이것도 수양이 덜 돼서 그런 겁니다. 「저놈이 꼭 내가 말을 하면 긍정을 안하고 반대로만 하고 고약한 놈이다.」 속을 썩입니다.

그 뒤에 모밀이 꽤 커서 김 매고 거름을 뿌려 주고 나서 「이만큼 잘 됐으니까 가을엔 꼭 먹는가 보다.」 이러니까 이놈이 또 「암만 해도 자셔야 자신겁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이 가만히 생각해 보면 말은 옳아서 나무랄 수도 없고 속으로만 꽁해 가지고 그럭저럭 모밀이 다 익어서 다 베어가지고 와서 타작해 가지고 마당에 널어 놓고는 두들기면서 스승이 하는 소립니다. 「인제 내년까지는 잘 먹겠다.」 「암만 그러셔도 자셔야 자신거지요.」 그 말은 그렇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어른 대접을 하여야 할텐데 속이 상해서 빨리 말려 가지고 가루를 만들어 가지고는 「오늘 저녁은 많이 먹어 놨구나.」하니 상좌가 또 「암만 그러셔도 자셔야 자신 겁니다.」 반죽을 하고 물을 뿌려 가며 연방 누루면서 「참 오늘 저녁에 냉면 한 그릇 잘 먹겠구나.」 「암만 그려서도 자셔야 자신 거지요.」 그래서 이놈 봐라 두고 보자 하고는 냉면을 실제로 좋은 동치미국에다 말아 놓고는 「너도 냉면 먹고 나도 이렇게 참 냉면 한 번 잘 먹는 게 아니겠느냐?」하니 역시 「그래도 자셔야 자」 거지요.」 그래서 냉면 그릇을 밀뜨리면서, 「이놈의 자식 어른을 놀리느냐?」 그러니까 「보십시오 자셔야 자신 게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 아이 말이 옳은 겁니다. 세상에 믿을 게 하나도 없는거지요, 그게 스님이 아이한테 딸리는 겁니다. 인격적으로 모자라고, 하는 것도 딸리고 생각도 딸리고 아이가 웃을 일입니다. 스님도 그런 줄 알고 말이 옳은 줄은 첫마디부터 알긴 알지만 내가 어른이라는 그런 <아상>이 있어서 그 <아상> 때문에 그러다 결국은 그만 국수를 못 먹었습니다. 「아 ! 거 네말이 옳구나.」 그랬으면 마음이 편히 지냈을 건대 서로 안 지려는 <아상> 때문에 둘이 똑같긴 같습니다. 나중에는 생기든지 말든지 사발이 깨질 때 깨지더라도 농사를 또 부지런히 지어야 합니다. 또 다른 사람이 누가 먹더라도 그것도 먹는거니 아무 생각 없이 농사를 지어야 합니다. 또 다른 사람이 누가 먹도라도 그것도 먹는거니 아무 생각 없이 농사를 지어야 합니다. 아무 생각없이 장사를 하고 오고가는 데도 난리가 나도 아무 생각 없이 남이 뛰면 나도 뛰어서 피난간다고 가도 그게 죽으러 가는 건지 어떻게 압니까? 그렇지만 그렇게 갑니다. 중국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부자집 외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산에 들에 놀러 다니다가 좋은 천리마(千里馬)를 얻어서 기뻐하니 마을 사람들이 아버지한테 와서 좋은 경사(慶事)라고 치하를 하러왔습니다. 그러니 그 영감도 「먹어야 먹는 거라」 는 사미 모양으로 「어찌 그게 화근(禍根)이 아닌 줄 알겠느냐」 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니 모두 인사 간 사람들이 싱거워졌습니다. 수천 냥짜리 좋은 말을 얻었는데 그 아들이 그것을 타고 밤이고 낮이고 만날 좋다고 돌아다니다가 나무에 걸려 떨어져 가지고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그러니 이번엔 동네 사람들이 「그 영감이 보통이 아닌 것 같다. 다리가 부러질 것을 미리 알고 대답한 것 같았다.」 고 하면서 모두들 가서 「참 안 됐습니다.」 하며 위로하니까 그 영감 말이 「그것을 어찌 복의 근본이 아닌 줄 알 수가 있겠느냐?」 또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그 놈의 영감 알기는 아는 모양인데 말은 어찌 저렇게 하느냐고 투덜거리며 모두 돌아갑니다. 그 뒤에 난리가 나서 젊은 사람은 다 군대에 불려 나가는데 그 아들은 군대를 안 갔습니다. 이때는 다리가 부러진 게 덕이 됐습니다.

세상 일이라는 것이 그때그때 어떻게 됐다고 해서 그게 아주 망하는 건가, 이렇게 말할 수도 없는 거고, 지금 한참 잘된 것이 나중에는 큰 화근이 되어 백 년 살 것을 십년도 못 살고 죽는 일이 생겨 날지도 모르는 겁니다. 좋은 일이 아무리 생겨도 그것을 좋다고 생각 안 하고 아무리 지금 불행한 일이 생겼다 하더라도 그것도 나중에 복 받을 일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오히려 조작이 붙은 속입니다. 그것도 저것도 없는 도대체 아무 생각 없이 하는 것이 무소주(無所住)입니다.

 

▶ 현실은 마음의 그림자

옛날 공자나 맹자의 사서삼경(四書三經)이나 장자 남화경(南華經)이나 노자 도덕경(道德經)을 많이 보든지 하면 마음이 벗어납니다. 이 인간 세상살이에 꽁꽁 얽매여서 그만 장아치로 사는 게 중생인데 이것을 털고 세상을 훨훨 살아 보자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사람이 일을 거칠게 하느냐 하면 안 그럽니다. 오히려 누구보다도 일을 야무지게 합니다. 몸을 아끼지 않으니까 종일 일해도 피곤을 모르기 때문에 훨씬 잘 합니다. 또 억세다 하더라도 이제 무심한 사람처럼 억센 사람이 없습니다. 무심해야 이렇게 끝까지 나오는 기운이있지 무심치 못하고 무슨 조건이 붙어 가지고 있는 사람 같으면 그렇게 최후까지 큰 힘이 나오지 못합니다. 아무런 거리낌 없는 무심한 사람이 되면 그 마음이 무한 동력인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명대사(四溟大師)께서 처음으로 승려의용군(僧侶義勇軍) 육천명을 데리고 수십만 왜군을 평양서 부산까지 밀었습니다. 일본사람 가등청정(加藤淸正)이고 누구고 만나는 대로 칼을 다 빼 놓고 갑니다. 그런 이는 다 마음을 깨친 높은 도인이니까 생각하는대로 제대로 됐지만 대중 범부는 이런 금강경 법문을 듣고서 마음을 쉬어 버리면 훨씬 편해집니다. 조그마한 생각들 그 개미 생각, 개미 발톱 같은 생각, 오냐오냐 만날 해봐야 뭐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밤낮 해 봐야 나한테 돌아오는 것은 밥 세 그릇 뿐이지 아무 딴 것이 없습니다. 밥 세 그릇 옷 한 벌 밖에 아무것도 더 되는 것도 없는데 그런 것 때문에 사람이 괜히 동네 사람이 다 굶어 죽어도 밥 한 그릇 안 내 놓으려 하고 거기에 애착이 돼 가지고 행여나 죽을까 싶어 그러니, 이렇게 사람이 궁색하게 비열하게 살 게 뭐 있습니까? 여기 중들이 걸망 하나 지고 돈 없이 다니는 그런 사람을 운수객(雲水客)이라 하는데, 구름 같고 물같은 손님이란 뜻으로 지어진 이름입니다. 절도 내 집이 아니라 잠깐 여기 와서 공부하고 가는 곳입니다. 그런 가운데도 옆에 도반(道伴)이 감기 몸살을 앓든지 중병을 앓든지 하여 한달 두달 앓고 이러면 우리가 전부 약을 끓이고 혹시 어떻게 쓰려고 감추었던 돈 십원 . 백원 비상금을 모아서 한쪽에다 놓아 둡니다. 그래서 밤중이라도 약 지으러 가고 그래서 구원하게 됩니다. 약 지어 오면 내가 다리겠다고 제일 잘 다린다고 이러면서 하나같이 그럽니다. 그래 복 짓는 거고 내가 하심(下心)하는 것도 지혜를 닦는 거고 모두 이런 것입니다.

그래도 돈이 누구보다도 많은 건 누구인지 대중이 다 아는데 탐심이 많은 사람은 십원 한 장 없다고 안 내 놓습니다. 그런 사람은 나중에 병이 들든지 그래도 남이 도울 수 없는 그런 장소에 가서 앓습니다. 그 사람의 마음의 그림자가 다른 사람에게 비쳐 가지고 대중은 아무도 도와 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옷도 한 두서너 벌 있으면 없는 사람과 나누어 입고 그런 사람은 아무데 나가서도 의식주 걱정이 안 됩니다. 또 서로가 그래집니다.

어떤 사람은 대중 가운데서 인색하여 양말 한 켤레라도 떨어진거 꼭꼭 집어 넣어 쌓아 놓습니다. 당초 남한테 보이지도 않게 돌아앉아 일하고 남을 도울 줄 모르는 그런 사람은 평생 남의 덕을 못 봅니다. 인과는 틀림없이 그림자와 한가지입니다. 꼿꼿한 놈은 그림자도 꼿꼿하고 굽은 놈은 그림자도 굽듯이 꼭 그럽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어떤 귀부인들 스물 다섯명이 있었는데 인도 사람처럼 새까만 깜둥이고 눈도 코도 없고 무슨 흙으로 뭉쳐 놓은 것같이 이상스럽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법문이 하나도 들리지 않고 거룩하게 보이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 여쭈었더니, 『아 그게 인과가 있다. 과거에 저희들이 창녀들인데 그때 마침 어떤 나한이 바리때를 들고 다니는 길에 밥을 얻으러 그 집을 들르게 되었느니라. 그러니 창녀들이 되어 놓으니 남성 만났다고 놀리는데 얼굴이 못생겼다, 떨어진 누더기에다 거지처럼 꾸몄다, 아이고 얼굴도 못났지만 저렇게도 못났느냐 하며 온갖 흉을 다 봤습니다. 눈도 눈같지 않고 코도 코같지 않다고 하면서 갖은 욕을 다 했다. 그러다가 밥을 좀 달라고 그러니깐 복 지으려는 마음으로 공양은 서로 많이 줘서 바리때로 하나 가득 담아 올렸는데, 그러니 이 노장이 바리때를 들고 시방 삼보에 공양을 하고는 그 창녀들을 위해서 ‘오늘 나를 위해 공양한 인연으로 해서 죄가 되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를 하고서 마당 한 가운데서 바리때를 들고 공중으로 날라서 부처님 처소에 간 일이 있다. 창녀들이 그만 그 자리에서 놀래가지고 우리가 성인에게 잘못 했다고 하며 마당에 내려가서 무수히 배례를 하고 참회를 했다. ‘이제 그 과보(果報)로 한량 없는 지옥고(地獄苦)를 받은 뒤 그 나한 마음에는 아무런 생각도 없었지만 제가 죄짓고 자기발로 지옥에 들어가서 그 고생을 했고 아귀(餓鬼)가 되고 축생이 되어 돌아다니며 고생하다가 그래도 그때 참회를 하고 또 예배를 드리고 또 밥을 많이 올렸으므로 여럿이 나누어 먹었는데, 그 공덕으로 부처님께서 출세하신 이 세상에 같이 태어났고 참회한 공덕과 또 밥을 많이 시주한 공덕으로 이제 저 사람들이 부자로 사는 것이며 그때 나한을 비방했기 때문에 평생에도 내 얼굴울 보지 못한 것이다.』하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 말씀을 듣고 있던 대중이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저 중생을 위해서 무슨 방법이 없습니까?』 『있다, 그때 그 나한이 대승불교를 해 가지고 보살이 되었으니 그때 나한으로 있던 그 이름을 부르고 백일기도를 하라. 그러면 나의 장륙금신(丈六金身)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여자들이 참회를 하고서 곧 백일기도를 충실히 했더니, 기도 마치는 날 밤 꿈에 좋은 상서가 보이고 그 이튿날부터 부처님의 거룩한 얼굴을 봤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생의 죄업이 녹아서 마음의 나쁜 그림자가 사라져서 그렇다는 것인데, 이런 얘기가 마음을 항복 받는 데 도움이 됩니다.

 

▶ 일체가 오로지 꿈

인생은 꿈 같은 것이 아니라 그대로 꿈입니다. 꿈으로 한 일 그게 사실로 한 게 아니고 모두 거짓말로 한 것입니다. 성불했다는 것도 역시 거짓말 입니다. 성불 아닌 것 때문에 상대적으로 성불했다는 말이 있는거지 성불 해야겠다는 말까지도 그게 꿈입니다. 정말 실상(實相)자리에서 보면 본래 제대로 돼 있으니 누가 꿈꿀 사람도 없습니다. 조신대사가 눈 깜빡하는 사이에 눈 뻔히 뜨고 잠도 아니고 정신이 희미해진 것도 아니고 부처님 법을 배우려는 이 생각 그대로 팔십이 돼 버린 것입니다. 이건 깜빡 잠자는 순간에 그렇게 된 것도 아니고 사실로 꿈에서 한 일이니 거짓말이고 헛일입니다. 그러므로 또 일초 동안에 꿈을 꾸어서 그 일초 동안에 했다는 그것도 거짓말입니다. 그러니까 했다는 것도 엮시 그런 내용이고 나중에 아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확실히 체득해서 부처가 됐다는 것도 역시 그렇게 말할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다 몽중지사(夢中之事)입니다.

그런데 몽중가외몽중몽(夢中可畏夢中夢)이라, 꿈 가운데 겁낼만한 꿈은 꿈 속에서 또 꿈꾸는 일입니다. 홋꿈도 겨운 일인데 꿈속에 또 한 겹 더 들어가서 또 꿈을 꾸니 언제 생사를 면할는지 그것 참 큰일 날 일입니다. 몽중막작몽중몽(夢中莫作夢中夢)하소. 꿈 가운데서 또 꿈울 꾸는 것은 아예 하지마소. 헛 꿈이나 꾸라는 것입니다. 일초에 일초돈파생사몽(一超頓破生死夢)하면 하루 아침에 몽땅 생사대몽(生死大夢)을 탁 부수고 나면 산하진처역무몽(山河盡處亦無夢)이라 산하대지 없어진 곳에 또한 꿈도 없어졌다. 전부 꿈만 가지고 마음 깨치는 글을 지은 시인데, 우리가 돌아다니는 이 현실이 모두 그런 형편이란 것을 표현한 겁니다.

그러니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어떤 결정된 모양을 갖고 있는 그런 것이라고 할 뭐가 있느냐?」 그런 뜻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렇게 다 됐다고 하시지만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것과는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그런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이 아닙니다. 또 부처님은 이래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고 저래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고 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립니다.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존재이고 제망중중(帝網重重)의 존재이고 무슨 짓을 해도 그게 완전합니다.

돌이 되고 바윗덩이가 되어 가지고 길 가에 있지만 그렇더라도 그것이 돌이 아닙니다. 또 돌 중에도 완전한 돌이고, 바위 그대로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입니다. 그런데도 두들겨 부셔서 가루로 만들어 봐도 돌 가루지 그게 다른 것은 아닙니다. 제망중중도 없고 그것도 하나의 신통(神通)입니다. 이미 중생이 그렇게 만들어 가지고 있고 부처님도 역시 그렇게 만듭니다. 우리와 같이 아무리 나무를 쪼개 봐도 오동나무는 오동나무고 감나무는 감나무지 오동나무 속에 감나무 성질이 안들어 있고 돌은 돌이고 나무는 나무입니다. 우리 중생과 똑 같이 신통을 부립니다. 그렇게 나타나기도 하고 또 그러면서 그게 단불(單佛)이냐 하면 단불이 아니고 제망중중의 내용을 가지고 있으면서 일체가 곧 하나로만 보이고 하나가 일체로 보이기도 합니다.

 

▶ 결정할 수 없는 법

그러니까 어떤 내용이 있어서 또는 어떤 모양을 쳐들어서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한 법이다 진리다.」 그렇게 말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결정된 법이 없는데 그렇다고 결정된 법이 없는 것으로 말하고 말면 또 그 내용이 결정됩니다. 그러니까 즉량할 수 없는 불가사의(不可思議)가 그러한 실재이고 실상자리입니다.

범부가 처음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있다는데 그것을 얻어서 내가 성불해야겠구나, 견성해야 겠구나.」하는 이런 이론을 확실히 믿고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도 또 그런 생각 안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 이론을 의지해서 그런 개념을 얻어야 비로소 성불할 수 있으니 성불할 수 있는 공부를 할 수 있고 견성을 할 수 있고 참선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역시 성불하는 마음이지 딴 마음은 아닙니다. 도둑질 하는 마음도 아니고 협잡하는 마음도 아닙니다. 성불하려는 마음이니까 그래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이 아닌 것도 아니고 범부로서 마음을 낼 수도 있는 겁니다. 또 그래 가지고 견성을 할 수 있는 거니까 그것이 또 한쪽 견성(見性)이지만 보살초심(菩薩初心)까지 이룰 수 있겠다 생각하고 애를 쓰고 그렇게 견성을 합니다.

그래 가지고 사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체득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고 어떤 내용이냐 하고 정면으로 따져 들려면 또 범부가 처음에 이론으로 발심한 것도 딱 맞는 소리는 아닙니다. 그렇게 해 놓고도 그 발심을 가지고 근기(根氣)가 약해서 참선하다가는 미쳐 나가는 수도 있습니다. 뭐 어디 조그만 이상한 게 보이면 「아 이제 다 된 게 아니냐?」 이래가지고 방향없이 덤비는 사람도 있습니다. 처음에 근사하게 발심을 가졌지만 그게 도깨비도 되고 미친 놈도 되는 방법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 「틀림없이 견성한다.」 그렇게도 못 믿어 집니다. 이를테면 배우기는 똑같은 선생한테 똑 같이 배워가지고 열이 앉아서 참선 한다고 하더라도 열이면 열이 다 같이 옳게 견성을 하느냐 하면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열이면 아홉은 견성을 하고 하나는 잘 못 되는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다음 생에 어느때인가는 잘 못된 그 한사람도 견성해서 성불하는 날이 있겠지만, 그러나 만일 그 법이 꼭 결정된 법이라면 열이면 열 백이면 백이 다 금생에 성불해야 할 것이며 만의 하나라도 낙오자가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근기에도 달려있고 또 발심을 부족하게 한 데도 달려 있어서 그런 것도 알아야 합니다.

 

▶ 무실 무허(無實無虛)

이 금강경 三十二分의 말씀이 비슷비슷하여 같은 말씀 같은데 자세히 보면 약간씩 다릅니다. 약간 다른 게 아니고 많이 다르지만 나중에 결론을 맞춰 보면 똑 같은 말입니다. 이렇게 한소리를 되풀이 하지만 거기 있는 말의 조리가 각각 달라서 마치 서울역에서 하는 안내와 대구역에서 안내하는 말소리와 평양역에서 하는 안내소리가 조금씩 다르듯이 경문의 소리도 조금씩 다릅니다.

어떤 때는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게 있느냐?』고 물으시면 수보리 존자께선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신 일이 없습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그런 법도 없고 사실 얻은 일도 없으십니다.』하고 없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다시 『수보리야! 여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내가 너에게 그런 말을 했는데 사실 얻긴 얻었지만 그 얻은 법이 그건 무실무허(無實無虛)해서 실다운 것도 없고 허망한 것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또 부처님께선 일체법이 다 불법이라 하느니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의 조리는 결국 따지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게 어떤 걸 꼭 꼬집어서 「요것이다」 할 수도 없고 또 「이렇기도 하고 저렇기도 하며 이렇지도 저렇지도 않은 것을 몽뚱그려서 이것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다.」 그렇게 말할 수도 없으며 또 「그것도 저것도 전부 아니다.」 그렇게 해도 안 맞고 이래도 안 맞고 저래도 안 맞는 것입니다.

이것이 만일 물질적으로 있는 것이라면 변동조화가 있는 무상의 존재일 것이며 따라서 그렇게 변동하는 어느 한 모퉁이를 집어서 이거다 저거다 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마치 꿈을 깨어 보면 아무것도 아닌 허망이지만 꿈을 깨기 전엔 확실히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꿈을 꾸고 있을 때 꿈 가운데 있는 그게 참으로 있는 거냐 하면 그게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어서 실다운 것도 아니고 허망한 것도 아닙니다. 꿈속에서도 전혀 허무한 것은 아니어서 사실 배가 부르면 배가 뿌듯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참말로 진실한 불변의 존재냐 하면 또 그런 것은 더구나 아닙니다. 그런데 꿈에 있는 사람도 그렇고 천지만물도 다 그렇습니다.

그러니 무실무허한 것도 그와 같아서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하시는 것은 범부가 「이 마음자리, 말하는 이것은 불생불멸의 존재구나 하는 원리를 의지해서 그걸 한 번 깨달아 봐야겠다.」고 확실히 인식이 돼서 하나서부터 열까지 목숨을 걸고 할 일이 이것뿐이라고 마음 속에 깊이 작정이 되면 이것은 범부의 발심입니다. 그렇게 하다가 정진해서 계행을 지키고 만행(萬行)을 닦아 점점 깊어져서 아공 . 법공 . 구공을 초월해서 뭐라고 이름지을 수 없는 그런 자리에 이르면 그걸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그럽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 나중에 일여(一如)하게 되어 구공의 일심을 체득했다고 해서 불법이 여기까지만 되고 말았다면 그건 소승불교 밖에 안 됩니다. 그뿐 아니라 다른 외도(外道)까지라도 이 적멸(寂滅)하는 정도가 얕긴 하지만 어느 정도는 다 체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이도 끊어지고 생각도 끊어지고 모양도 끊어지고 일체 것이 다 끊어진 그 속에 들어가 놓으면 팔만 사천 외도가 서로 모여 살며 너나 내가 똑 같다 하고 그 때는 다 실력행사합니다. 그렇지만 정도(正道) 앞에 사도가 꼼짝 못하는 것은 외도는 공을 얻어도 상대적인 내용이 완전히 떨어지지 않아서 정도의 정력(定力)에는 비교되지 못합니다. 정도의 정은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까지 떨어져서 그 신통이 비교도 안 되게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 당시에도 마왕파순(魔王波旬)이 백만억 마구니 권속을 데리고 와서 온갖 짓을 다 해도 부처님께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고요히 앉아 계셨는데, 마왕의 하는 꼴이 하도 안타까와서 부처님께서 마왕 파순에게 「네가 아무리 그래봐도 소용없다. 그러니까 네 신통이 얼마나 되는지 내가 한 번 시험해 볼테니 네가 날 이기면 내가 너한테 항복하고 법문도 안 하고 그냥 내가 열반하마.」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물 떠 자시는 물병 같은 빈 수통을 촛대처럼 세워 놓으시고는 「너 혼자 하든지, 네 권속을 다 데리고 와서 하든지, 또 삼천대천세계 중생을 다 데리고 와서 하든지, 네 재주로 시방제불을 다 모시고 올 수 있으면 일체 부처님 보살님 다 데리고 와서 하든지, 이 통을 한 번 넘겨뜨려 보아라.」 마왕은 「뭐 그것쯤이야 가만히 앉아서 넘어가라 하면 넘어갈 텐데.」 생각하고는, 자기 신통을 다 발휘했지만, 되지 않았고 나중에는 쇠줄 같은 것을 걸어가지고 마귀 권속을 다 데리고 와서 소 . 말 몰 듯이 채찍질해서 수억만명이 끌어도 끄덕도 안합니다.

그것은 부처님께선 아무 생각도 없는 적멸을 증득했기 때문에 적멸 속에 들었을 그때에 어떤 생각을 해서 이것을 안 넘어 가게 한다든지 한 번 정해 놓으면 마음 전체, 우주 전체의 힘이 그렇게 하나가 되어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한 부처님께서 한 번 마음에 정하면 시방제불(十方諸佛)이 다 와서 같이 힘을 합해서 하는 것과 같이 됩니다. 이것이 제망중중의 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든지 듣던지 하는 것이 온갖 망상의 틈바구니에서 요것도 하나 해보자 하는 일부의 쪼각 힘이므로 그것은 망상의 힘일 뿐입니다. 와도 이 병은 안 넘어 갑니다. 그러니 마왕 파순은 할 수 없이 필경에는 항복을 하고 맙나다.

우리 육체의 힘도 실제로 알고 보면 참는 데서 나옵니다. 금생에 많이 참으면 내생에는 아주 장사가 됩니다. 평생 감기 한 번 안 걸리고 건강하게 있다가 죽을 시간이 되면 앓지도 않고 돌아앉아 죽습니다.

부처님께서 이런 정력을 얻었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하지만 얻었다 하는 것은 즉시비득 곧 얻은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所謂得法卽是非得).

 

▶ 일체 유심(一切唯心)

단유언설도무실(但有言說都無實)이란 말로만 있지 실제는 그런 일이 없다. 도무지 실다운 뜻이 없다는 뜻입니다. 연기법칙(緣起法則) 상대성 원리로 보아도 그렇게 됩니다. 많다고 하면 벌써 부분입니다. 정말 마지막 말로 전체를 많다고 하더라도 그건 하나뿐이니까 많은 것도 아니고 사실 또 하나도 아닙니다. 더구나 많다 적다는 안 됩니다. 벌써 많다고 할 때는 적은 것, 많지 않은 것을 이미 상대하고 있으므로 그건 전체에서 그만한 부분을 빼고 하는 말이므로 그것은 전체에 비하면 적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니 작다고 하는 그것이 작은 것도 아니고 작다 했으니까 그건 크다는 말도 되고 또 작지도 않다는 말도 되고 그런게 아니란 말도 되고 그럽니다. 그것은 다 환(幻)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선 꿈 밖에서 꿈을 깨어 가지고 「그대로 전체가 꿈 아니라」고 하신 그게 바로 무실무허(無實無虛)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참으로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거짓말로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한마디로 하자면 환의 존재이기 때문에 허망하다 실답다 하는 말을 붙일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일체법이 다 불법이라 한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그것도 무실무허(無實無虛)하다가도 그 경지에 들어서 놓으면 참다운 것도 있고 허망한 것도 있고 그렇게도 됩니다. 이렇게 하나가 되어진 그 경지는 시간을 여의어 일체 생각이 다 끊어진 때고 무분별지(無分別智) 본래의 실상자리인데 그러면서 거기서 내내 중생살림살이와 똑같고 하지만 보고 듣고하는 마음을 지어서 작심으로 하는 게 아니라 무위(無爲) 무심으로 하는 겁니다. 그 경지에 가면 부처님 살림살이일 뿐이고 마음 하나뿐입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하여 일체가 모두 마음으로 만들었다 그러는데, 마음이 만들었다고 하면 만든 마음과 만들어진 객관이 있게 되어 거기에는 주관 객관이 또 벌어질 수 있으니 일체유심(一切唯心)이라 지을 조(造)자 하나를 빼 버려야 알기 쉽습니다. 「오직 마음 뿐이다.」 일체가 마음이다. 그러므로 일체가 불법이다. 그런 뜻이 됩니다.

주관이 곧 객관이고 거리가 없습니다. 거울 가운데 동서남북이 있어 보이지만 이것은 빛으로 그림자로 거울 면에 나타난 것이지 거울을 뚫고 들어가서 동서남북 상하 중간이 된 것은 아닌 것과 같습니다. 꿈도 역시 그와 같아서 전체 그대로가 거리가 없는 거고 실제로 멀어 거리가 있으면서 또 그대로 없는 거고 그대로 전체가 마음이고 그러니 일체법이 개시불법(一切法皆是佛法)이고 무실무허(無實無虛)한 지경까지 하나가 되고 한 덩어리가 되어서, 주관 . 객관의 관념이 없어져서 없어졌다는 생각조차 없어지면 구공(俱空)인데 그래도 구공됐다는 잠재의식이 남아 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공의 도리가 하나로 쉽게 활용되지 않다가 점점 닦아서 수치(修治)돼 들어가면, 참 그야말로 미세한 습기(濕氣)까지 전자가 움직이고 에네르기가 움직이는 것보다 더 미세한 폭으로 움직이는 그 <습기>까지 마음에서 다 끊어지면 그때는 전체가 하나가 됩니다. 그러면 그것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전체를 뭉뚱그려 한덩어리로 만들어 놓는 거냐 하면 그런 것이 아니라 제망중중(帝網重重)의 도리로 그 가운데는 모래도 있고 흙도 돌도 있지마는 모래 한 알 그게 또 우주 . 인생 전체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전체가 하나가 되었다. 그러니까 큰 걸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런 것이 아니고 여기 먼지 한알이 그와 같아서 그 가운데 어떤 거 하나를 들추어 이것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다 이렇게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 전체가 하나고 하나가 전제

전체가 하나이고 하나가 전체이면서 또 차별이 있고 고금이 있고 동서가 있습니다. 또 그대로가 없는 것이어서 고금이 아니고 현상이 아니고 모두가 아닙니다. 이 촛대가 모두 이렇게 섰는데 우주전체가 모두 이 촛대 선 자리에 같이 서 있습니다. 그 거리가 있는 게 아니고 이 촛대가 선 곳이 내내 모든 것이 선 자리이고 저기 선 것이 여기 입니다. 이와 같이 포개 있는 거리 없는 것을 보는 것이 불가사의한 신통을 부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있으니 과학적 . 철학적 . 종교적으로 따져 가지고 그 실상을 알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생각하고 따져도 끝이 안 납니다. 자기 실상 . 마음자리만 깨쳐 버리면 그게 참 진공묘유(眞空妙有)이고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 없는 불가사의입니다. 그러니 완전히 중생처럼 중생이 본 그런 자리 한바탕 있고 또 그러면서 원융무애한 그대로의 소식으로 제망중중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혼란하냐 하면 조금도 그런 것이 없고 또 질서정연하냐 하면 또 거리가 없으니까 질서정연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전체가 하나란 소리가 일체가 다 불법이란 소리와 한가지이니 일체법이 다 불법이고, 일체법이 다 불법이란 소리가 일체가 다 마음이라는 뜻이고 마음이 부처라는 뜻이 됩니다. 그러다 보니 마음대로 변해서 제망중중으로 이 초 하나에 한량없는 백성이 들어가 있는 그것이 한 번에 봐도 낱낱이 따로따로 보입니다.

오색물감을 물에 떨어뜨려 놓으면 그 빛이 무슨 물감인지 우리가 이름지을 수가 없지만 부처님께서는 그걸 낱낱이 보십니다. 또 부처님은 만고에 불변하는 중생의 근본불성도 보시고 중생의 이런저런 용심도 보시고 다 보십니다. 마음을 깨닫고 보면 제 자체가 그러는 게 아니고 전부 우리 관념이고 생각이며 우리 마음이 모두 그런 장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는 말이 얻은 게 아니라 실제로 얻은 게 아니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됐다.‘ 그 말인데, 또 됐다 하는 것은 마치 무슨 작품을 만들 듯 새로 되는 것을 뜻하는 것 같지만 그런 것도 아닙니다. 내가 본래 그대로 부처였다는데 쓸데 없는 딴 생각을 한 번 냈던 것을 놓아 버리니까 제자리로 됐다, 본래 그렇더라는 뜻으로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그런 일체법이 곧 일체법이 아니니 그것을 일체법이라 한다.”고 하신 것이니, 경전 다르고 촛대 다르고 접시 다르고 책상 다르고 그런 게 아니라 그건 모두 하나라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일체가 다 아니니까 하나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또 그걸 이름해서 일체라 한다는 것입니다.

 

▶ 환으로 크고 환으로 작다

사람 몸뚱이가 크다는 말은 안 크다는 말이니 크다고 할 때는 벌써 작은 걸 상대로 해서 작은 걸 떼어 놓은 큰 것이므로 참말로 큰 것은 아닙니다. 또 사실로 현상은 환으로 있는 것이므로 정말 크거나 정말 작거나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조그만 종지 속에 독을 집어 넣어도 종지가 넓어지지도 않고 독은 줄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독이 참말로 크냐 하면 환으로 큰 것처럼 보이는 것이고 종지가 작은 게 아니라 작은 것같이 보이는 환이니까 정말로 큰 게 아닌 독이 정말로 작은 게 아닌 종지 속에 들어 갈 수 있는 것이고, 안 들어갈 수도 없는 것이고, 또 못 들어갈 수도 없는 겁니다. 또 종지가 깨지거나 터지면 터졌지 독을 그 안에 집어 넣을 수 없는 법도 있고 도대체가 모두 마음의 작용이고 마음의 짓입니다.

그러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 놓고 보니 크다 하면 벌써 큰 게 아니고 크다 할 수 있는 건 어떤 존재적 한계가 있는 것이므로 설사 우주 전체라 해도 우주 전체가 아닌 것을 상대로 전제한 관념이고 모자라는 것 제외해 놓고 크다는 뜻이며, 그러니 그건 정말로 큰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큰 것은 전체하나뿐일 때는 크다고 이름지을 수도 없는 것이며, 상대적으로 크다 하면 벌써 크지 않다는 말이고 전체도 아니란 말이고 또 실제가 환으로 된 것입니다.

손바닥만한 거울을 가지고 서울을 비치면 동서남북으로 이십리 이상되는 큰 서울이 입체적으로 다 들여다 보입니다. 상식적인 이론으로는 손바닥만한 거울 안으로 서울이 들어가면 큰 빌딩이 깨알보다도 작게 축소해서 보여야 할 겁니다. 그렇지만 손바닥만한 거울 안에 몇 억만배나 되는 서울이 그대로 들어가는 것 처럼 큰 것과 작은 것이 서로 구애 없이 들어갑니다.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닙니다.

40년 이상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익혀서 공의 원리를 누구보다도 잘 아시고 현상계의 모든 존재가 다 환으로 있다는 진리를 부처님 다음으로 잘 아시는 수보리존자이므로 그 진리를 한 마디에 다 알아들으시고 몸이 큰 것은 큰 것이 아니라고 말씀 드렸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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