能淨業障分 第十六

 

 

復次須菩提(부차수보리)야 善男子善女人(선남자선여인)이 受持讀誦此經(수지독송차경)하야 若爲人輕賤(약위인경천)이면 是人(시인)이 先世罪業(선세죄업)으로 應墮惡道(응타악도)언마는 以今世人(이금세인)이 輕賤故(경천고)로 先世罪業(선세죄업)이 卽爲消滅(즉위소멸)하고 當得阿?多羅三?三菩提(당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하리라 須菩提(수보리)야 我念過去無量阿僧祗劫(아념과거무량아승지겁)하니 於然燈佛前(어연등불전)에 得値八百四千萬億那由他諸佛(득치팔백사천만억나유타제불)하야 悉皆供養承事(실개공양승사)하야 無空過者(무공과자)니라 若復有人(약부유인)이 於後末世(어후말세)에 能受持讀誦此經(능수지독송차경)하면 所得功德(소득공덕)이 於我所供養諸佛功德(어아소공양제불공덕)으로 百分不及一(백분불급일)이며 千萬億分乃至算數譬喩(천만억분내지산수비유)로 所不能及(소불능급)이니라 須菩提(수보리)야 若善男子善女人(약선남자선여인)이 於後末世(어후말세)에 有受持讀誦此經(유수지독송차경)하야 所得功德(소득공덕)을 我若具說者(아약구설자)댄 或有人聞(혹유인문)하고 心卽狂亂(심즉광란)하야 狐疑不信(호의불신)하리니 須菩提(수보리)야 當知是經(당지시경)은 義不可思議(의불가사의)며 果報(과보)도 亦不可思議(역불가사의)니라

 

『또 수보리야!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을 수지독송하는데 만약 남에게 업신여김을 당한다면 이 사람은 선세 죄업으로 응당 악도에 떨어질 것이지만 이 세상 사람이 천히 여김으로써 선세의 죄업이 곧 소멸되고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니라. 수보리야! 내가 생각하니 과거 한량없는 아승지겁 전에 저 연등부처님 앞에서 팔백사천만억나유타 수의 모든 부처님을 만나서 다 공양하고 받들어 섬기며 그냥 지나쳐 버린 적이 없었느니라. 만일 또 다른 사람이 이 다음 말세에 이 경을 받아 지니고 독송한다면 그 공덕은 내가 모든 부처님께 공양한 공덕으로는 백분의 하나도 미치지 못하며 천만억분 내지 어떤 수의 비유로도 능히 미치지 못하느니라.

수보리야! 만일 선남자 선여인이 이다음 말세에 이 경을 받아 지니어 독송하는 이가 얻는 공덕을 내가 다 갖추어 말한다면 어떤 사람은 그 말을 듣고 마음이 곧 미치고 어지러워 여우처럼 의심하고 믿지 않으리라. 수보리야! 마땅히 알라, 이 경은 그 뜻도 가히 생각할 수 없고 그 과보 또한 가히 생각할 수 없느니라.』

 

 

第十六 能淨業障分--업장을 밝힘

 

[科 解]

 

이 대문은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는 공덕으로 능히 지난 세상에 지어온 많은 죄업이 깨끗이 소멸된다는 뜻을 밝힌 대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경을 수지독송하는데도 남의 천대를 받는 수가 있습니다.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는 공덕이 한량없다고 하였는데 어찌하여 남의 천대를 받는 일이 있게 되는가. 그것은 다 깊은 뜻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니 곧 그 사람이 지난 세상에 지은 죄업으로 장차 지옥에 떨어질 것인데 금강경을 읽어 외운 인연 공덕으로 그 무거운 죄업이 소멸되어 이 세상에서 남에게 천대 받는 과보로써 그 지옥 죄과를 소멸한다는 것입니다. 무거운 업을 가볍게 받는다고 하여 이것을 중업경수(重業輕受)라고 그럽니다.

왜 금강경을 받아 지니고 읽어 외운 공덕이 그처럼 신비로운가. 금강경은 모든 부처님의 최상승(最上乘)으로서 <나라는 생각>·<사람이라는 생각>·<중생살이라는 생각>·<오래 산다는 생각>조차 초월하여 주관적으로 나라는 관념이 텅 비고 객관적으로 법(진리)이라는 생각도 공하고 주관 객관이 다 공한 절대의 경계를 설한 경이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과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다 이 경으로부터 나온다고 한 것이 그것입니다. 이 경이 이러한 위대한 신력을 지닌 경전이므로 이 경을 모셔 둔 곳에는 부처님의 큰 제자나 부처님의 사리탑을 모신 것과 같다고 하였고, 이러한 위신력을 지닌 경이므로 능히 지옥에 떨어질 죄를 지었더라도 이 세상에서 사람의 천대를 받는 과보로써 대신한다고 하셨는 바 이것이 능히 업장을 맑힌다는 대문의 대의입니다.

 

原 文 : 復次須菩提 善男子善女人 受持讀誦此經 若爲人輕賤 是人先世罪業 應墮惡道 以今世人 輕賤故 先世罪業 卽爲消滅 當得阿?多羅三?三菩提

 

[解 義] 『또한 다시 수보리야! 선남자선여인이 이 경전을 수지독송도 하고 또한 남을 위해 해설도 잘 해 주는 어떤 사람이 남한테 천대를 받는 수가 있으니, 이 경전을 아수라 . 인간 . 천상 사람이 모두 호위를 하고 공경을 한다는데 도리어 역효(逆效)가 난다면 이것은 어찌된 것인가. 그것은 이 사람이 과거의 선세, 저 전생의 전생으로부터 지어 온 한량없는 죄업 때문에 삼악도(三惡道)에 저 깊은 지옥으로 갈 사람이니 이 몸뚱이가 죽고 나면 당장 그대로 곧 삼악도로 갈 것인데 이 경전을 읽는 공덕으로 해서, 인간 세상에서 천대를 받는 그걸로 해서 지옥으로 갈 죄를 면해 버리게 되느니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게 되는데 그 길로부터 금강경을 알고 깨닫지는 못했더라도 금강경의 지취가 어디로 간다 하는 것, 곧 마음 씀씀이를 어떻게 하고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을 벌써 짐작을 하게 되므로 결국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얻게 되는 원인이 되느니라.』는 뜻이 됩니다.

법화경에 상불경보살(常不輕菩薩)이라고 있습니다. 사람을 만나면 아이나 어른이나 그저 남녀 노소간에 만나기만 하면 합장을 하고 절을 공손히 하고 「내가 당신 업신여기고 천대하지 않습니다. 왜 그런고 하니 중생 그대로 부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부처님께 대해서 어떻게 공손하지 않고 업신여기거나 천대를 하겠습니까?」 그럽니다. 사실 일체 중생이 즉비중생이니 시명중생(一切衆生 卽非衆生 是名衆生)입니다. 중생이 중생이 아니면서 부처란 말로 되어 있고 육체가 이대로 모두 다 환이란 말입니다. 「이런 것이 사실 있는 거로 있는 게 아니다.」 그런 뜻도 있고 시명중생(是名衆生)이라 하면 중생이 곧 부처고 부처가 중생이고 그런 굉장한 뜻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불경보살이 그렇게 하는데, 그 따위 소리 하지 말라고 그래도 또 하고 하니 이번엔 이 놈 매나 맞아라, 나중에 그런 소리 또 하면 때려죽인다고 하고 차고 밟고 그럽니다. 안 맞으려고 쫓겨 도망가고 또 따라오면 멀찍이 달아나서 서 가지고 안 따라오면 다시 합니다. 「내가 당신네들 공경합니다.」 이렇게 자꾸 합니다. 그럴수록 듣기 싫다고 매를 무수히 맞았습니다. 이 보살도 일종의 경천보(輕淺報)를 받는 것입니다. 지옥 갈 사람이 금강경을 읽어서 그 죄가 가벼워져서 경천보를 받는 것은 금강경을 읽어 복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가 원체 많은 사람은 금강경을 읽고 천대를 받는 것으로 면하는데 그 경천보를 받는 종류가 가지가지입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일수록 내가 전생의 업이 무거운 것을 이제 경전보로 대신하는가보다 하며 조금이라도 해태해지면 신심이 부족하거나 정신이 모자라서 그런 줄로 알고 더욱 더 자꾸 읽어야 할 텐데, 이런 것을 모르는 사람은 내가 금강경 덕을 못 봤다고 해서 그 경전 다 거짓말이라고 이럴 수가 있느냐고 하면서 섭섭해 하고 신심을 안 냅니다. 이런 사람은 금강경을 잘못 배운 것입니다.

 

原 文 : 須菩提 我念過去 無量阿僧祗劫 於然燈佛前 得値八百四千萬億那由他諸佛 悉皆供養承事 無空過者 若復有人 於後末世 能受持讀誦此經 所得功德 於我所 供養諸佛功德 百分不及一 千萬億分 乃至 算數譬喩 所不能及

 

[解 義] 『수보리야! 내가 또 생각해 보니 저 과거 무량 아승지겁 전에 그때 연등불이 계셨는데 내가 그 연등부처님 앞에서 팔백사천만억 나유타 부처님께 공양하고 받들어 모시셨느니라.』하십니다. 요새 우리 수자는 만까지는 열배하는 십진법이고 만부터는 만을 만하면 억이고 억을 만하면 조(兆)이고 조를 만배하면 경(京)하여 만배법(萬倍法)입니다. 동양에서는 이렇게 하여 24단위 밖에 없지만 불교가 온 뒤에는 불교 숫자를 뒤에다 붙여서 많이 쓰고 있습니다. 불교의 수는 구지(俱只)에서 부터 배수입니다. 인도의 낙차(洛叉)라는 숫자가 우리 수로 십만인데 십만을 백배로 하면 그게 구지(俱只), 곧 1천만입니다. 그 구지를 구지배로 하면 천만을 천만배로 한다는 말인데, 그러면 1아유타(阿由他)라 합니다.

또 아유타를 아유타배하면 나유타(那由他)인데 이렇게 해서 나간 수의 단위가 124자입니다. 그런데 아승지 이 숫자는 105번째 나오는 수의 단위이니 아승지라는게 우리의 일반수학 상식으로는 생각지도 못할 만큼 그런 굉장한 수자입니다. 아승지수의 무량아승지라 했는데 무량도 숫자입니다. 아승지 바로 위에 있는 104번째 숫자입니다. 팔백사천만억 나유타수의 부처님들을 연등부처님 불자로서 부처님 모시고 있는 동안에 다 친견하셨다는 것입니다. 공부가 높고 신통이 많은 대 도인들은 시방에 한량없는 부처 여기 앉아 계신 것을 다 친견합니다. 최면술을 걸어 놓으면 여기 앉아서 동경가서 보고 얘기하고 그렇듯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만억 이런 지구를 직선으로 지나가서 우리 사바세계하고 똑같이 극락세계가 있다고 그랬는데 여기 이대로 앉은 채 찰라 사이에 십만억 세계를 지나가서 우리하고 얘기하듯이 아미타불을 친견(親見)하고 법문도 듣고 묻기도 하고 그럽니다. 본체 자리에서 보면 항상 시간도 공간도 아닌 조그만 초점 안에서 극락세계니 십만억 국토를 지나가느니 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는 거 없이 가고 다 알고 보고 그렇게 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연등불을 만나 가지고 연등불을 모시고 있는 그 동안에 팔백사천만억 나유타 모든 부처님을 만나서 내가 다 그 부처님에게 모두 음식도 올리고 옷도 올리고 향도 올리고 꽃도 올리고 온갖 시봉도 다 해서 공경 공양했고 도량청소도 하고 변소도 모두 소제해 드리고 부처님 제자를 시봉했는데 이렇게 하기를 한량없는 백천만억나유타 모든 부처님께 한분도 빠짐없이 공양 안 드리고 간 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내가 공양한 공덕을 그때 참 많이 지었지만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저 후오백세 말세에 지금(이 때입니다.) 혼란한 말세에 능히 이 경전을 받아 가지며 읽고 외우고 하면 내가 지은 그 공덕으로는 백분의 일도 미치지 못하고 천만억분의 일도 안되는 거고 내지 124자를 다 써서 비유를 한다 해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십만억국토의 미진수분의 일도 안 됩니다. 부처님 세상에는 모두 선지식 천지이니까 아무나 할 수 있고 아무나 들을 수 있지만 이 말세에 이 금강경을 옳게 알아들을 수 있는 그런 금강경 학자가 나와서 일한다면 참 하늘에 별따기 같은 일이고 맹구우목(盲龜遇木)같은 참 희유한 일입니다. 그렇듯이 대단히 희유한 일이 되느니라. 그러셨습니다.

 

原 文 : 須菩提 若善男子善女人 於後末世 有受持讀誦此經 所得功德 我若具說者 或有人聞 心卽狂亂 狐疑不信

 

[解 義] 부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수보리야! 만일 선남자 선여인이 저 말세에 사람들이 이 경전을 수지독송하고 또 이 경전을 수지독송한 공덕을 얻는 그걸 내가 만일 갖추어서 다 말한다면 혹 어떤 사람이 듣고 나면 마음이 미쳐서 혼란해 지고 미칠 것이다.』했습니다. 향적세계(香積世界)라는 불세계가 있는데 거기서는 말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중생을 제도하시려면 향을 한 대 향로에 꽂아 놓으면 백년이고 천년이고 그 향내가 뻗혀 나갑니다. 그러면 그 불세계에 사는 중생들은 누구나 그 향내를 맡으면 그만 고집멸도(苦集滅道)의 네 가지 진리를 깨쳐 버립니다.

「아 ! 이 세상이 다 고로구나. 이 세상이 다 허망한 것이 모여가지고 거짓 있는 것이고 흩어져 가는 도중에 있는 것이구나.」하고 곧 압니다. 그리고 그 부처님께서 주먹을 번쩍들어 보이면 그만 대중이 전부 다 깨달아 버립니다. 이건 말이 없는 불세계입니다.

이와 같이 향으로 하는데, 꽃으로 하는데, 또는 음식으로 하든지 그 교화 방법이 불세계마다 각각 다릅니다. 그런데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교화하시는 이 사바세계는 교체(敎體)가 무엇이냐 하면 음성교체(音聲敎體) 곧 음성으로 가르치는 곳입니다. 문자만 가지고도 또 안되고 글로 된 경전이 있지마는 그것보다도 꼭 혀를 놀려서 가르쳐야 빠릅니다. 글도 역시 혀의 표현이긴 합니다. 그래도 여기는 어디까지나 음성이 교체가 되어 있고 향적세계 같은 데는 향이 교체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제석천천당에 올라가면 굉장한 복력으로 저절로 생긴 궁전이 있습니다. 우리도 꿈에 가면 큰 도시가 있고 우리 집도 있고 그런 것이 생각으로 저절로 생겨 가지고 있는 것이며 누가 목수를 데려다 지은 것도 아니고 그렇듯이 제석천궁도 제석천의 복력으로 생긴 것입니다. 그 궁전의 크기를 아주 줄이고 줄여서 우리 한국 땅덩이만 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법당에도 바깥 천정에 비들기나 새들이 못들어가게 그물을 쳤는데 제석천궁은 새 똥이 걱정돼서가 아니라 장엄으로 장식을 하느라고 진주·다이야몬드 같은 아주 좋은 보석으로만 그물을 칩니다. 그런데 이쪽 구슬이 저쪽 구슬에 비춰지고 하여 이 구슬끼리 전부 서로 통하여 비춰가지고 있으니 우리 한국만한 궁전이라고 한다면 그 구슬의 수가 몇 개나 되겠습니까? 그 많은 구슬이 한 구슬 속으로 그림자가 다 들어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구슬 이것이 그 여러 억천만개나 되는 구슬의 그림자가 밑으로 보이고 동서남북으로 들어와 가지고 그 전체를 받아 가지고 그 옆에 구슬에 비추니까 이거는 전체가 하나고 하나가 전체로 보입니다. 이것을 받아 저쪽에 넘기고, 제 구슬의 것을 또 이쪽으로 넘기고, 저는 저대로 받아 있습니다. 제 그림자 가지고 있으면서도 저 쪽을 비춰주고 또 저놈이 제 구슬을 가지고 있으면서 또 받고 이러면 복수(複數)로 자꾸 곱수로 됩니다. 이런 것이 한 시간만 되면 그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고 두 개 구슬로만 해도 무한의 수가 될 것인데 이것은 정말 아승지의 수자 보다 더 많습니다. 일백 스물 넉자라도 못 따라 갑니다. 이런데 그 구슬과 구슬 전체가 또 다 그러니 전체가 전체를 전부 포함한 그것이 여러 수 억만 불찰미진수 아승지 항하사 숫자 이런 게 모두 다 들어옵니다. 그래서 그것을 중중무진(重重無盡)이라 하고 제망중중(帝網重重)이라 합니다. 지금도 자꾸 그렇게 점점 비쳐 나갈 것이며 서로 반사가 될 것이니 그런 수를 누가 세겠습니까? 그렇지만 부처님은 그 제망 중중 구슬들을 서로 비쳐서 만년 아니라 몇 아승지 겁을 지나도 이 수를 다 아십니다.

부처님의 반야법문이 600권이라고 하지만 그 실제로는 미진수의 법문이 있다고 합니다. 21년간 말씀하신 것이 우리 인간만 듣는 게 아니라 천당 사바세계 할 것 없이 다 듣도록 말씀하십니다. 부처님께서 같은 말씀을 하셔도 여러 세계의 중생들이 각각 다 자기 말로 알아듣도록 하십니다. 이 금강경도 이제 「운하응주 운하항복기심」 이 두 가지만 가지고도 다 되는데 상하 두 권이나 되는 것은 화엄경 같으면 하나만 물어도 몇 가지로 대답하시듯이 백 마디 물으면 천 가지가 나오고 만 가지가 나오고 그런 식으로 나오는 게 부처님 말씀입니다. 그래서 어떤 제자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경전 수가 모두 몇 권이나 되며 사실 그걸 다 펼쳐 놓으면 모두 얼마가 되겠습니까?」 물으니까 백억 세계를 두드려 무슨 미진수 전자수와 같이 많은 장수(張數)가 있다는 것입니다. 중중무진의 시방세계에서 불보살님까지 「저 사바세계의 석가여래께서 출세를 하셔 가지고 중생을 제도하시느라고 마지막 법화경을 설하신단다, 금강경을 설하신단다.」 이래 가지고 막 모여옵니다. 그러니 허공이 가득차고 이러는데 또 제 몸을 포개고 또 그 보살이 보살을 포개가지고 중중으로 포개지만 하나도 머리가 안 아프고 밑에 깔리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원융무애(圓融無碍) 원만하고 두루하고 그래서 서로 방해도 안 되고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로서는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닌 그 희유한 경계를 상상할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는 이런 희유한 도리를 다 설명하신다면 근기가 여간 높지 않아 가지고는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호의(狐疑)라는 말을 여호 같은 의심이라고 하는데 이런 의심이 있는 사람은 성불 못합니다. 사람들이 여호를 찾겠다고 쇠고기나 돼지고기나 그 속에다가 무슨 폭발물 같은 것을 넣든지, 무슨 독약을 넣든지 하고는 겉으로 냄새를 피우지 않게끔 잘 밀봉해서 여우 다니는 데다 놔둡니다. 이놈이 무엇 주워 먹으러 다니다가 돼지고기가 한 뭉치 있는 것을 보고 생각하기를 「이게 이런데 떨어질 수가 없는 건데 필연 무슨 조화가 붙어 있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것을 들고 요리저리 벼른 뒤에 여기 좀 맡아 보고 저리 맡아 보고 하다가 아무래도 못 먹겠다 하여 그대로 놓아두고는 한 댓 발 간다는 겁니다. 가다가는 그 놈이 또 아까와서 냄새라도 맡아 보고 가야지 하고는 다시 되돌아와 보고 하기를 열번 백번 하다가 나중에는 할 수 없어 먹어 버립니다. 까불다가 탁 터져 죽는 수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먹고 나서 몇 시간 뒤에 그만 죽기도 하는데 어떤 놈은 기어코 먹지 않는 놈도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호를 중생들 중에 제일 의심이 많고 제일 영리하다고 하고 사람도 호의(狐疑)를 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 「말로 들어 봐서는 꼭 그럴 것 같기는 한데 참 그럴까」하고 괜히 그런 생각 저런 생각 갖다 붙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남을 의심 많이 하는 성질이 있어 군자를 만나도 도인을 만나도 의심을 많이 하는 성질이 있어서 이렇게 호의증에 걸려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장가가면 의처증(疑妻症)이 걸리고 또 의부증에 걸려서 영감을 의심하고 그럽니다.

그렇게 의심할 게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런가 보다 내버려 두고 그런 세상을 살면 편한데 의심을 하면 사람의 마음이 안 편해지고 의심이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은 백사불성(百事不成)으로 아무것도 되지 않습니다. 만날 사사건건 의심만 붙어 있으니 무슨 일을 누구하고도 같이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原 文 : 須菩提 當知是經 義不可思議 果報亦不可思議

 

[解 義] 『수보리야! 마땅히 알아라. 이 경전의 뜻은 참으로 불가사의하고 동시에 그 과보도 불가사의하느니라.』

이 경전을 읽고 나면 그때부터 금생에서부터 차차 이 경전 읽은 공덕을 받기 시작하여 두고두고 세세생생에 자꾸 견성해 올라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걸 다 설명하라고 하면 듣는 사람이 놀라서 기절할 정도로 그 뜻과 과보도 공덕도 불가사의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번에 금강경 살림에 참여한 분들은 금강경의 이런 도리를 깊이 믿고 대게 그게 그럴거라고 십분 이해했으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금강경(청담)' 카테고리의 다른 글

一體同觀分 第十八  (0) 2018.09.11
究竟無我分 第十七  (0) 2018.09.11
持經功德分 第十五  (0) 2018.09.11
離相寂滅分 第十四  (0) 2018.09.11
如法受持分 第十三  (0) 2018.09.11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