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受不貪分 第二十八

 

 

須菩提(수보리)야 若菩薩(약보살)이 以滿恒河沙等世界七寶(이만항하사등세계칠보)로 持用布施(지용보시)하고 若復有人(약부유인)이 知一切法無我(지일체법무아)하야 得成於忍(득성어인)하면 此菩薩(차보살)이 勝前菩薩(승전보살)의 所得功德(소득공덕)이니 何以故(하이고)오 須菩提(수보리)야 以諸菩薩(이제보살)은 不受福德故(불수복덕고)니라 須菩提(수보리)-白佛言(백불언)하사대 世尊(세존)하 云何菩薩(운하보살)이 不受福德(불수복덕)이니잇고 須菩提(수보리)야 菩薩(보살)의 所作福德(소작복덕)은 不應貪着(불응탐착)이니 是故(시고)로 說不受福德(설불수복덕)이니라.

 

『수보리야! 보살이 항하의 모래 수와 같은 많은 세계에 칠보를 가득 채워서 보시했더라도, 만일 또 다른 사람이 일체 법에 내가 없음을 알아서 참다운 진리를 이루어 얻었다면, 이 보살이 앞의 보살이 얻은 공덕보다 더 뛰어나리라. 왜 그러냐 하면 수보리야! 모든 보살은 복덕을 받지 않기 때문이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어 말씀하셨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보살이 복덕을 받지 않는 것이옵니까?』

『수보리야! 보살이 복덕을 짓는 것은 탐착해서가 아니니 그러므로 복덕을 받지 않는다고 말하느니라.』

 

 

第二十八 不受不貪分--보살은 복덕을 탐하지 않는다.

 

[科 解]

불수불탐(不受不貪)이란 주관·객관을 초월하여 선악을 여윈 자리에는 화복을 받는 주체도 객관도 없으며 미추호오(美醜好惡)가 붙을 수 없으므로 탐착할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마음속에 나와 남이 있고 부처와 중생이 남아 있는 한 아무리 물질적인 복덕을 많이 짓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상대적인 인과이므로 한계가 있고 생명이 있는 생사법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없는 <참 나>의 자리, 상에 머무르지 않는 <응무소주>의 마음자리를 깨달아서 체득해야만 참다운 큰 복을 지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4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의 말씀처럼 상에 머무르지 말고 보시하고 만행을 하라는 것입니다.

상에 머무름 없이 아무 조건 없이 남을 위해서 장사도 하고 농사도 하고 보시·지계·인욕을 하는 보살의 무심한 자리에 탐착이 있을 수 없고 복덕도 받을 것이 없는 것입니다. 몸뚱이가 없으니 밥이 필요 없고 옷이 필요 없으며 돈, 생명까지 다 떨어진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原 文 : 須菩提 若菩薩 以滿恒河沙等世界七寶 持用布施 若復有人 知一切法 無我 得成於忍 此菩薩 勝前菩薩 所得功德

 

[解 義] 『수보리야! 만일 어떤 보살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보살이 항하강의 모래수와 같이 많은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찬 칠보를 가지고 온 세계에 있는 모든 중생에게 보시한 보살이 있고, 또 다른 어떤 보살은 「일체법이 내가 없다. 몸뚱이가 내가 아니다. 이제까지의 모든 지식이 참된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무아의 경계이고 유정무정(有情無情)이 다 응무소주의 경계구나.」하는 진리를 깨쳐서 완전히 증득했다면 이 보살의 공덕이 앞에서 칠보를 보시한 공덕보다 더 많으리라.』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연등부처님에게 만법이 무아인 도리를 깨쳤습니다. 나만 무아가 아니라 만법이 다 무아이기 때문에 성불할 수 있는 도리를 깨쳤습니다.

인욕하는 것도 처음에는 힘이 들지만 이것도 자꾸 노력을 하고 무아의 도리를 닦아 나가면 도가 높아지는데 따라서 힘 안들이고 잘됩니다. 그 전에 어떤 노장님이 인욕을 아주 참 잘해서 평생에 노한 얼굴 한 번 안한 분도 있습니다. 성나는 것만 참는 것이 아니라 아픈 것도 참아야 하는데 몸을 톱으로 켜고 칼로 찌르더라도 아픔이 없는 경지에 도달해야 합니다. 그러나 법력이 아직 그렇게 되지는 못했지만 말만이라도 그렇게 할 수 있어야 발심한 불자입니다.

내가 한 30년 전에 맨발로 짚신만 신고 다니며 방에 불도 안 때고 안국동 선학원(禪學院)에서 한동안 인욕공부를 하며 지낸 일이 있습니다. 요사이 추위는 30년 전 추위에 비하면 훨씬 덜 춥습니다. 그때 장안에는 선학원에 장사 중이 하나 나왔다고 떠들썩한 일이 있었지만 나는 그때 몸뚱이를 내 버리고 인욕하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그대로 견디어 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참는 것도 석가모니부처님께서 500생 동안 인욕선인(忍辱仙人)으로 계실 적에 가리왕에게 사지백해(四肢百骸)를 찢길 때처럼 아무 생각 없이 참을 줄 알아야 하고 또 제석천왕(帝釋天王)이 전당포라는 하늘나라의 고약을 가지고 와서 찢어진 육신을 완전하게 치료해 줄 그때에도 조금도 기쁜 마음을 내지 않으셨던 것처럼 참는 것 없이 참아야 합니다.

이렇게 도할양무심(塗割兩無心)의 경지에 도달하면 단순한 참음이 아니라 마음의 참 바탕자리를 튼튼하게 지키고 일체의 객관경계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참 나>의 진리를 체득했다는 뜻을 가진 인(忍)이 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득성어인(得成於忍)의 <인>(忍)은 어긋나고 모순되고 거슬리는 경계를 잘 참고 성내지 않으며 좋다 싫다는 생각이 없어서 갚음이 없는 것을 말하며, 무생법인(無生法忍)의 생멸(生滅)이 없는 진리에 머물러서 그 마음이 도할양무심으로 움직이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原 文 : 何以故 須菩提 以諸菩薩 不受福德故 須菩提 白佛言 世尊 云何菩薩 不受福德 須菩提 菩薩 所作福德 不應貪着 是故 說不受福德

 

[解 義] 『수보리야! 저 모든 보살은 한량없는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를 채워서 보시한 공덕보다도 더 큰 복을 지은 그런 보살들은 다 생멸이 없는 진리, 곧 무생법인을 체득했으니 그러므로 그 보살들은 복덕을 받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복을 받느니라.』 보살은 복을 하나도 받지 않는다는 부처님 말씀을 듣고 수보리존자는 깜짝 놀라서 부처님께 여쭙니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복을 하나도 받지 않는다는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수보리야! 보살이 복을 짓는 것은 무엇을 탐착해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복덕을 받지 않는다고 말하느니라.』

중생들 소견으로는 「복을 받지 않는 것이라면 그런 복은 지으나 마나 한 것이 아니냐?」고 의심할 것입니다. 그런데 보살은 자기를 위해서 무엇을 할 필요 없이 된 분이고 수행을 하거나 불법을 할 필요가 없이 된 분입니다. 몸뚱이가 내가 아니니 밥이 필요합니까? 옷이 무슨 필요 있습니까? 생각이 아니니 지식도 소용없습니다. 그러니 무량대복을 짓지만 아무 소용이 없는 짓입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복을 지을 필요가 있느냐? 그것은 이치(理)에만 착하지 말고 사(事)에도 자유롭자는 것입니다. 곧 원리로만 통할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현상계에 대해서도 자유로워야 마지막 자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지혜만 닦아 놓았을 뿐 복을 닦지 않은 것은 마치 열, 백가지 박사학위를 받은 대천재가 있다 치고 이 사람이 비록 아는 것은 세계 제일이지만 그러나 어느 백화점이던 조그만 구멍가게에 들어가서 바늘 한 개만 집어오면 당장 도둑으로 몰려 잡혀가는 것과 같습니다. 가서 구경을 하는 데는 백화점 주인이거나 거지나 한가지지만 그 물건을 직접 내가 소유해서 쓰려고 할 때는 복이 없으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말하고 듣는 <마음자리>, <참나>의 본성자리에서는 복이니 복이 아니니 선이니 악이니가 또 생사니 열반이니가 붙을 수 없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중생들은 욕심으로만 살다 보니까 우주를 다 차지해도 만족이 안 됩니다. 본성을 깨쳐서 정혜(定慧)만 닦으면 욕심이 다 떨어져서 중생도 부처도 없으니 아침나절에 성불해 가지고 저녁때 열반합니다. 복을 안 지어서는 나한테 제도 받을 중생이 하나도 없으니 그러므로 그래서 복도 중생이라 그러는데 시방제불이 복을 갖추어서야 비로소 중생을 제도하시지 지혜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복에만 치우쳐도 안 되고 그래서 부처님은 복혜(福慧)를 쌍으로 구족하신다고 그럽니다. 곧 복에서 완전히 자유롭고 지혜로도 완전히 자유로우면 이것이 복혜구족(福慧具足)이고 성불입니다.

그래서 보살이 육바라밀을 닦고 복을 짓는데, 보살은 자기를 위해서 복을 짓지 않습니다. 자기 살림살이 늘리기 위해 복짓는게 아니고 보시를 해도 저절로 되고 아무 생각없이 오직 중생만을 위해서 살생 안 하고 도둑질 안 하고 일체의 악은 다 안 하고 꼭 선행만 하고 복을 짓지만 복에 탐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불수복덕(不受福德)입니다.

 

 

[說 義]

부처님께서 어느 두 보살의 과거세의 역사를 말씀하셨는데, 그야말로 <일체법무아>의 법인을 체득해서 불수복덕(不受福德)의 무량복을 짓는 내용입니다.

이 보살이 어느 부처님 말법시대(末法時代)에 태어나서 정법(正法)을 심어 주기 위해 사법(邪法)과 싸우게 됐습니다. 그때도 지금 우리 한국과 같이 정법이 사법에 몰리는 말세였습니다. 석가세존 불법에는 정법(正法) 천 년, 상법(像法) 천 년, 말법(末法) 만 년인데 현재 불멸기원(佛滅紀元) 2500년이 세계통일년대이므로 말법의 운수는 아직도 구천 오백년이 남아 있고 지금은 말법의 초기입니다. 그런데 그때는 지금 우리 한국보다도 더한 말법시대가 되어서 비구승들이 전부 장가가고 술 고기 먹고 다 가짜 중 썩은 중들만 있고 정말 수행을 하는 참 비구는 이 보살 한 분만 남았습니다. 불교 신도도 말이 불자지 전부 마구니 신도고 그럴 때입니다. 그래서 술, 담배 먹고 곰탕, 불고기 먹어가며 참선도 하고 기도를 해야 속히 견성성불한다는 것입니다. 하루저녁에 열 여자하고 자더라도 생각이 있으면 안 되지만 아무 생각 안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교가 엉망으로 되어 마구니떼로 변해가고 있으니 이 보살은 피눈물을 흘리며 원력을 세우고 정진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세밀한 계획을 잘 세워서 서울 같으면 먼저 파고다공원에서 법문을 한번 하고 다음에는 장충공원에서 한 번하고 역전에서, 시청 앞에서 이렇게 돌아가며 설법을 합니다. 청중들 가운데 신심이 있는 신도도 있고 불교를 연구하는 지식층 인사도 끼여서 들어보고는 「이제야 정말 참 불법 바로 하는 스님 한 분 우리가 만났다. 이 대사님을 옹호해 가지고 정법을 펴자.」 이렇게 하여 모여든 대중이 몇 만명이 됐습니다.

그러니 그 반대편에 있는 삿된 무리들이 우리 한국 같으면 만신·무당·불법을 삿되게 하는 불교인들, 막행막식주의(莫行莫食主義)로 하는 불교인 천주교·기독교·천도교·유교 등 이런 것도 모두 삿되게 하는 무리들이 원체 많은데 전부 단결해 가지고 일거에 대항해 옵니다. 그 스님이 공부도 대단하고 원력도 커서 목숨을 돌보지 않는데다 그 교세가 일취월장(日就月將)으로 팽창돼 가고 있으며 자기네 신도들을 다 빼앗기게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컨데 저쪽에는 몇 백만명이 되고 이쪽은 몇 십만 되는 많은 신도들이 도처에서 생명을 걸고 싸움질을 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정법의 신도들이 다 죽어 갑니다. 이때에 마침 그 나라 국왕은 불교를 깊이 연구하고 있었으며 과거세부터 불법을 많이 공부했던 인연이 있는 이어서 경을 바로 보는 안목(眼目)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군중들을 소집해 가지고 「이제 정법이 망하면 나라가 망한다. 지금 우리나라가 이렇게 혼란한 것도 다 불교가 이렇게 혼란한 때문이다. 이제 다행히 옳은 스님이 한 분 나오셨는데 무자비한 사도들에게 목숨을 잃을 직전에 있으니 다 같이 가서 구하자.」고 호소했으나 군중들은 그릇된 신앙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으므로 국왕의 호소에도 잘 호응하지 않았습니다. 그 나라의 당시 국법으로도 도와 줄 수 없고 국회 같은 회의나 조정대신들도 다 반대했으므로 국왕은 할 수 없이 자기의 직속 호위병들 정도만 이끌고 그 스님을 보호하기로 했습니다. 그렇지만 저 쪽이 원체 수가 많아서 이쪽은 다 몰살당할 지경에 이르렀는데 그러자 스님을 한 가운데 두고 둘러싸서 모셔 놓고 「우리는 다 죽더라도 이 스님만은 살려야 한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국왕도 왕위를 걸고 헌신적으로 나섰지만 이쪽은 자꾸만 밀리고 무너져서 이대로는 그 스님을 보호할 수 없게 됐습니다. 그래서 국왕은 속임수로 진을 하나 더 만들어 놓고 「우리는 다 죽어도 좋지만 스님 한 분만은 꼭 사셔야 합니다. 어서 피해서 누더기 옷이라도 입고 살아 계셔야만 저 마구니들이 이 나라를 다 점령하더라도 스님께서 이 나라에 생존해 계신 한 그만한 덕이 될 것입니다.」하며 피하도록 했습니다. 스님도 할 수 없이 그 길로 산으로 피해 가서 변형(變形)을 하고 공부만 하면서 기회를 보았으나 인연이 맞지 않아서 그대로 돌아가셨습니다. 그 나라 국왕도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부처님께서 그 두 보살의 과거의 보살행을 이렇게 설명하셨는데, 열반경(涅槃經) 같은 데도 보살이 과거에 어떤 나라의 국왕으로 있었다는 등의 내용이 많이 나옵니다.

이런 보살님들의 다생겁래의 모든 행은 다 자기의 복덕이나 자기의 무엇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며 아무 생각 없이 무심으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도할양무심의 행이기 때문에 탐착이 아니며 복덕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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