威儀寂靜分 第二十九
須菩提(수보리)야 若有人(약유인)이 言(언)하되 如來(여래)-若來若去若坐若臥(약래약거약좌약와)라하면 是人(시인)은 不解我所說義(불해아소설의)니 何以故(하이고)오 如來者(여래자)는 無所從來(무소종래)며 亦無所去(역무소거)일세 故名如來(고명여래)니라
『수보리야! 만일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여래께서 만약 왔다거나 간다거나 앉았다거나 눕는다거나」한다 하면 이 사람은 내가 말한바 뜻을 알지 못하는 것이니라. 왜 그러냐 하면 여래는 어디로부터 온바가 없으며 또한 어디로 가는 것도 없으니 그러므로 여래라 이름하는 때문이니라.』
第二十九 威儀寂靜分--위의 또한 공적하다
[科 解]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출현하시어 팔상성도(八相成道)을 나투시고 열반해 보이시고 하는 것은 다 중생을 제도하시기 위해서 만행만덕(萬行萬德)을 지으신 복덕의 보응으로 응화신(應化身)을 나타내시어 베푸신 자비연극입니다. 위의적정분(威儀寂靜分)이란 말은 거래좌와(去來坐臥)의 네 위의가 다 공하여서 공적한 가운데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허깨비 놀음을 보인 것에 불과하다는 뜻으로 붙인 이름입니다. 여래의 법신인 마음자리에는 오고 가고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룸비니 꽃동산에 강탄하신 것을 오셨다(若來)하고 사라수 수풀에서 열반해 보이신 것을 가셨다(若去)하는데, 부처님은 오셔도 온 게 아니고 가셔도 간 게 아니며 그렇게 오셔서 오신 것도 가신 것도 아니란 뜻으로 위위적정분이라 한 것이니, 위의(威儀)라 함은 육신의 거동, 행주좌와(行住坐臥)·어묵동정(語?動靜)의 일체를 가리킵니다.
原 文 : 須菩提 若有人言 如來 若來若去若坐若臥 是人 不解我所說義
[解 義] 『수보리야!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 하거나 여래께서 열반을 하여 이 세상을 떠나가셨다 하거나 부처님께서 가부좌하고 앉아계시다고 하거나 대중과 같이 누워 계시다고 하면 이 사람은 내가 설명하는 근본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니라.』
현재의 지구설(地球說)로 보더라도 우리는 지금 거꾸로 매어달린 것으로 됩니다. 따라서 누워 있는 때가 지구에 붙어서 서 있는 때입니다. 중생들이 각각 제 입장에서 판단하기 때문에 앉았다 섰다 누웠다 하는 것으로 보일 뿐이고, 여기서 보니까 동쪽에 서 있는 것으로 보이고 저쪽에서 보니까 서쪽으로 보이지만 과학적으로 보더라도 이것은 성립 될 수 없는 말입니다.
우리가 보니까 이것은 머리고 발이고 그렇지, 부처님은 발가락으로 말씀도 하시고 음식도 잡수시고 대소변도, 듣기도 보기도 하시고 다 하십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석가여래께서 앉고 서고 하시지만 이치로나 현상으로나 위 아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앉아 계시구나, 누우셨구나.」하고 말하는 사람은 불법같은 얘기도 못들은 사람입니다. 설사 들었더라도 두 귀의 고막이 다 없어진 귀머거리에 벙어리가 되어가지고 지나가는 바람소리 들은 거나 한가지고 벼락소리 들은 거나 한가지입니다. 이렇게 들은 사람은 부처님 40년 동안 모시고 다녀도 부처님 법문 한마디 못들은 것이 됩니다.
原 文 : 何以故 如來者 無所從來 亦無所去 故名如來
[解 義] 『왜 그러냐 하면 여래는 어디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고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니니, 그것을 마음의 성품 자리로 봐도 그렇고 현상적으로 보아도 그런 것이니 그래서 이름을 여래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바리때 들고 장삼 입으시고 탁발(托鉢)나가신다」고 하면 그것은 불법을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이지 부처님은 탁발을 하셨지만 사실은 탁발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을 탁발이라고 하는 것뿐입니다. 내가 오늘 하루 종일 밭 맸다고 치고 누가 나에게 말하기를, 「당신 오늘 밭 매느라고 수고했소.」하는 사람은 나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또 오늘 내가 누구하고 싸움을 했다 해도「싸움한 그게 싸움한 게 아닌데, 그런 싸움을 싸움했다 한다. 싸움 아닌 싸움이다.」 그렇게 말해야 합니다. 이번에 금강경 법문을 들으신 분들은 누가 고약한 놈이라고 욕을 하더라도「그 욕이 욕이 아닙니다. 그런 것을 욕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모든 일이 다 이 세 마디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말하고 실천하면 선정도 잘되고 성불도 빨리 됩니다. 그러니 사구게까지 갈 것도 없습니다. 있다 해도 좋고 없다 해도 좋고 무슨 짓을 해 놓고도 이 세 마디만 하면 됩니다.
이 마음자리는 작기로 말하면 바늘로 찔러 볼 수도 없는 자리고 크기로 말하면 무한대의 우주가 되고 부처님의 화장세계인데 이게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니면서 그런 속에 필름만 돌리면 온갖 것이 다 나오는 영화의 화면처럼 가는 것 같은 것이고 오는 것 같은 것으로 벌어진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오는 것이 오는 게 아니고 그렇게 오는 것이며, 가도 가는 게 아니고 그렇게 가는 것입니다.
[說 義]
현상계의 모든 것이 환인 줄을 확실히 알면 현실에 구애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신통조화를 부리게 되지만 그런 걸 모르는 사람은 제 마음으로 주위 환경을 만들어 가지고 구속이 되고 속는데 사실은 속는 것도 아닙니다. 밥 먹고 물 긷고 산에 가서 나무하고 장사하고 농사짓고 하는 것이 모두 신통묘유(神通妙有)입니다.
그러므로 있다 하면 용(用)이고 없다 하면 체(體)이고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라 하면 체와 용을 초월한 것이며, 「이렇게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그런 것을 체와 용이라 이름 할 뿐이다.」하면 체와 용을 겸한 것이 되는데 이것이 불교의 사구(四句)가 됩니다. 이것을 현상계의 삼라만상은 있는 것이 공해서 없는 것이 아니라는 소견을 제일구(句)의 유문(有門)이라 하고, 모든 것은 그 근본을 자세히 따지고 보면 있는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없는 공이라고 보는 것을 제 이구의 공문(空門)이라 하며,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면 제 삼구인 역유역공문(亦有亦空門)이라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면 제사구의 비유비공문(非有非空門)이라 그럽니다.
나쁘다고 보는 사람이 있으면 다른 사람은 반드시 좋다고 보는 사람이 있는데 또 한 사람은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반합(正反合)의 서양 논리로는 이렇게 긍정 부정해서 그 양자를 종합해서 진보하는 정반합의 법칙으로 끝나지만 불교에서는 하나가 더 있습니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 이론이 다 끝난 것 같지만 하나 더해서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그래야 마지막 이론이 끝납니다. 그러니 이것으로 보더라도 정반합의 변증법적 논리보다 불교의 사구논법이 훨씬 완전한 논법임을 알 수 있습니다. 천문학이나 자연과학이나 모든 학문을 하는데 있어서도 이 사구의 이론으로 하면 더욱 완전하게 더욱 빨리 성공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해서 활용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 사구에 사구백비(四句百非)라는 말이 있습니다. 백까지가 아니다, 곧 온갖 것 온갖 이치를 다 부정하여 어떠한 존재나 이론, 원리 무엇이든지 용납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백비라 한 것이고 사구 자체에 이미 백 가지로 부정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는 뜻으로 사구백비라 한 것입니다. 사구로 네 번 부정하는 것만 가지고는 만족할 수 없어서 백비란 말을 붙였지만 사실은 사구 가운데 이미 백비의 원리가 다 들어있는데 그 뜻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서 그렇게 풀이해서 붙인 이름입니다.
처음에 있다 하는 것은 없는 것이 아니라는 부정으로 봐서 제일비(非)가 되고 다음에 없다 하는 것은 있는 것이 아니란 <제이비>입니다.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 <제삼비>가 되고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는 말은 <제사비>가 됩니다. 그런데 또 중생들이 이 사구의 논법에 집착해서 사구의 본래 뜻을 바로 깨달을 줄은 모르고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는 그것만을 주장하니까 그런 주장을 부정하는 제 오비가 나오게 됩니다, 마치 아인슈타인이 물질의 본질은 에너지도 아니라고 했듯이 물질의 본질을 원소라고 하지만 원소의 근본체는 무엇이냐 하는 것이 연구돼야 하고 원자, 전자라고 하더라도 역시 원자, 전자를 이루는 본질이 또 있어야 하기 때문에 끈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반합을 부정하고 사구를 부정하고 거기다 다시 아니 비(非)자를 하나 더 붙이면 긍정이 되는데 다시 또 비(非)자를 붙이면 부정이 됩니다. 이렇게 비차를 천자, 만 자 지구를 몇 바퀴 돌 수 있는 비자를 붙여서 사고·관념을 초월하자는 궁극적인 듯을 밝히려는 목적으로 백비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말하는 이 자리, 산보고 높은 줄 아는 이 자리는 사구로도 설명될 수 없고 백구(百句)로도 안 됩니다. 말을 붙이면 붙이는 대로 모순만 나오기 때문입니다. 작다고 하면 바늘로 찌를 수도 없이 작고 몇 천만 억 배로 확대해 볼 수 있는 현미경으로도 살펴 볼 수 없는 자리입니다. 또 크다고 할 때는 몇 천만 억 배의 우주를 제망중중 무한대 수로도 비교할 수 없이 마지막으로 큰 이 마음자리는 작으면 작은 대로 큰 거고, 크면 큰 대로 작은 자리입니다. 그런 자리에 무엇이 가고 올 것이 있겠느냐는 겁니다. 천 백억 화신을 나타내서 천 백억 세계에 부처님의 몸을 한 분씩 나누어 중생들을 모두 제도했지만 오고 간 것이 아닙니다. 소승경전만 잘못 본 사람은 실달태자가 이 세상에 실제로 오셔서 팔상성도(八相成道)하셨고 79세에 진지를 잘못 잡수시고 혹은 돼지고기 잡수시고 잘못되어 돌아가신 것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승경의 도리를 아는 이 부처님의 참 모습, 마음자리를 아는 이는 부처님께서 몸뚱이로 이 세상에 출현하셨지만 온 것이 아니고 가셨어도 간 것이 아닌 줄로 압니다.
그러므로 금강경의 지혜, 대승의 지혜로 볼 때는 신이 나타나고 하느님이 나타나는 것이 다 도깨비이고 설사 시방제불이 나타났다 해도 다 도깨비들이 나타난 것밖에 안됩니다. 상(相)으로 나타난 그것을 참으로 있는 것으로 보면 속는 것이고 견성성불과는 천리만리 떨어진 것입니다. 하물며 부처님께서 오시고 가시고 앉고 눕고 하신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부처님의 육신상을 보고 하는 말이므로 참 부처를 본 것이 아닙니다.
'금강경(청담)' 카테고리의 다른 글
知見不生分 第三十一 (0) | 2018.09.11 |
---|---|
一合理相分 第三十0 (0) | 2018.09.11 |
不受不貪分 第二十八 (0) | 2018.09.11 |
無斷無滅分 第二十七 (0) | 2018.09.11 |
法身非相分 第二十六 (0) | 2018.09.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