如法受持分 第十三

 

 

爾時(이시)에 須菩提(수보리)-白佛言(백불언)하사대 世尊(세존)하 當何名此經(당하명차경)이며 我等(아등)이 云何奉持(운하봉지)리잇고 佛(불)이 告須菩提(고수보리)하사대 是經(시경)은 名爲金剛般若波羅密(명위금강반야파라밀)이니 以是名字(이시명자)로 汝當奉持(여당봉지)하라 所以者何(소이자하)오 須菩提(수보리)야 佛說般若波羅蜜(불설반야바라밀)은 卽非般若波羅蜜(즉비반야바라밀)이니 是名般若波羅蜜(시명반야바라밀)이니라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如來(여래)-有所說法不(유소설법부)아 須菩提(수보리)-白佛言(백불언)하되 世尊(세존)하 如來(여래)-無所說(무소설)이니이다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三千大天世界所有微塵(삼천대천세계소유미진)이 是爲多不(시위다부)아 須菩提言(수보제언)하사대 甚多(심다)니이다 世尊(세존)하 須菩提(수보리)야 諸微塵(제미진)은 如來說非微塵(여래설비미진)이라 是名微塵(시명미진)이며 如來說世界(여래설세계)도 非世界(비세계)라 是名世界(시명세계)니라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可以三十二相(가이32상)으로 見如來不(견여래부)아 不也(불야)니이다 世尊(세존)하 不可以三十二相(불가이32상)으로 得見如來(득견여래)니 何以故(하이고)오 如來說三十二相(여래설32상)이 卽是非相(즉시비상)일새 是名三十二相(시명32상)이니이다 須菩提(수보리)야 若有善男子善女人(약유선남자선여인)이 以恒河沙等身命(이항하사등신명)으로 布施(보시)어든 若復有人(약부유인)이 於此經中(어차경중)에 乃至受持四句偈等(내지사구게등)하야 爲他人說(위타인설)하면 其福(기복)이 甚多(심다)이니라

 

그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마땅히 이 경전을 무엇이라 이름하오며 저희들이 어떻게 받들어 지녀야 하겠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경전 이름이 금강반야바라밀이니 이 이름으로써 너희가 마땅히 받들어 지녀라. 왜냐하면 수보리야! 부처님께서 반야바라밀이라고 말하는 것은 반야바라밀이니 아니라 이름이 반야바라밀이니라.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여래께서 어떤법을 설명한 바가 있느냐 없느냐?』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아무것도 말씀하신 바가 없사옵니다.』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냐?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모든 먼지의 수를 많다고 하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심히 많사옵니다, 부처님께서시여.』

『수보리야! 여래는 이 모든 먼지를 먼지가 아니라고 말하나니 이것이 이름이 미진이며 여래께서 말하는 세계도 그것이 세계가 아닌 것이니 이것이 이름이 세계니라.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가히 32상으로써 여래를 친견할 수 있느냐 없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가히 32상으로써 여래를 친견할 수 없습니다. 왜냐 하오면 여래께서 삼십 이상이라 말씀하시는 것은 곧 상이 아니오라 이름을 32상이라 하시는 것이옵니다.』

『수보리야! 만일 어떤 착한 남자나 착한 여인이 있어서 항하사 모래 수와 같은 몸과 생명을 가지고 보시한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이 이 경전 가운데 내지 네 글귀만이라도 받아 지녀서 남을 위해 설명해 주었다면 그 복이 심히 많으니라.』

 

 

第十三 如法受持分-(법답게 받아지니다

 

[科 解]

 

이제 오늘 저녁엔 제 십삼분(第十三분) 여법수지분(如法受持分)인데 부처님 뜻에 어기지 않도록 이 경전을 받아 가진다, 수지(受持)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경의 문자(文字)를 받아 가지는 형편에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견성(見性)을 해 가지고 이 문자이전(文字以前)의 실상(實相) 자리의 내용을 체득(體得)해서 수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또 완전히 성불(成佛)해 가지고 부처님을 수지하는 이도 있을 것입니다. 「하여간 범부가 우선 부처님 흉내라도 내어야 할 것이니 먼저 근본적으로는 견성을 해라. 그래서 부처도 아니고 중생도 아닌 중간 보살이라도 되어서 육도만행(六度萬行)을 행하라.」 그것이며 나중에 필경에는 부처가 되어야 겠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불법을 지니는 것을 법답게 진리와 같이 이 경전(經典)의 정법(正法)인 부처님 법을 받아 가진다는 뜻으로 여법수지(如法受持)라 한 것입니다.

 

原 文 : 爾時 須菩提 白佛言 世尊 當何名此經 我等 云 何奉持 佛告須菩提 是經名爲 金剛般若波羅蜜 以是名字 汝當奉持

 

[解 義] 이제 수보리 존자께서 40년 동안 부처님을 모시고 밤낮 없이 많이 듣기는 했지만 질서 정연하고 조리(條理) 분명한 논리를 가지고 있어서 누구든지 배우기만 하면 제나름대로 깨닫고 했는데, 이번에 금강경 설명하시는 것을 들으니 참 그야말로 대각세존(大覺世尊)이시라고 느껴졌고 마음이 기뻐서 「이 경전 이름을 뭐라고 저희들이 이름하여 받들어 모시겠습니까?」하고 여쭈었더니 부처님께서 경 제목을 약하여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 하셨습니다. 이 금강경의 금강철퇴를 가지면 무엇이나 두들겨 부수어서 안 깨지는 것이 없고 다른 것을 가지고는 이것을 깨뜨릴 수가 없는 보물(寶物)입니다. 이것은 여물기만 해도 안 되고 날카롭기만 해도 안되며 굳세고 날카롭고 아주 불생불멸(不生不滅)하면서 만사만능(萬事萬能)하며 환하게 통달해서 세간중생들 법이나 출세간의 성불하는 보살들 법이나 부처님세계 할 것 없이 하나 빠짐 없이 환히 다 통달한 지혜에 견주어 붙인 이름이 금강입니다. 말하는 이 자리 말 듣고 앉은 자리, 그 자리가 불멸의 존재고 영원불멸의 생명체인 동시에 만사만태(萬事萬態)를 다 통달해 가진 금강반야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금강에다 이 마음 자성자리를 비유한 것입니다.

이것은 곧 지혜이므로 반야라 한 것이니 반야는 곧 지혜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배웠던 지식은 과학이니 철학이니 종교니 하는 것으로 이런 지혜는 근본적으로는 사람의 본분(本分)을 망치도록 하는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모든 사람을 결과적으로 지옥으로 보내고 꽁꽁 뭉쳐져서 생사에 윤회하도록 만드는 이야기뿐입니다. 금강과 같은 그런 존재가 있는데 말하는 이것이 바로 그것이라 하는 것을 가리키는 이야기가 참된 반야고 지혜입니다. 이렇게 자성(自性)만이 오직 있는 참 구공(俱空)까지 된 그것이 실상반야(實相般若)인데 그러나 그 실상반야를 깨달아 가지고 거기 가만히 머물러 있으면 소승나한(小乘羅漢)이 되어 버릴 뿐이므로 그 때문에 성불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육도만행(六度萬行)을 조금도 어기지 않고 행해야 하는 것이니 그것이 복혜쌍수(福慧雙修)입니다. 그 방법은 곧, 보시 . 지계 . 인욕 . 정진 . 선정 . 지혜(布施 持戒 忍辱 精進 禪定 智慧)의 여섯 가지인데 이 육바라밀(六波羅蜜) 중 마지막 바라밀인 지혜바라밀 하나만 빼 놓고는 앞의 선정하는데 까지는 전부 복을 닦는 수행입니다. 한량 없는 복 닦는 방법이니 우주를 점령해서 마음대로 소유할 수 있는 그만한 신통조화(神通調和)를 성취하기 위해 닦는 것이 앞에 다섯 가지 복짓는 방법입니다. 마지막 지혜바라밀이 곧 복혜쌍수(福慧雙修)인 것입니다.

또한 이런 법을 다 듣고 그렇게 해야 하겠다고 깨닫는 그것이 반야이고, 필경 견성(見性)까지 해서 견성한 뒤에 하는 수도(修道)가 진짜 수도인데 그렇게 해 가지고 수지(受持)해 올라가야겠구나 하는 것도 내내 그 자리가 하는 것이고 수지 할 것도 없는 것이지만 그것이 반야입니다. 그래서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 이름하라 하셨고 이런 뜻으로 받들어 지니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原 文 : 所以者何 須菩提 佛說般若波羅蜜 卽非般若波 羅蜜 是名般若波羅蜜

 

[解 義] 그 다음에 부처님께서 왜 금강반야바라밀이라고 이름지어 가지고 가지라했느냐 하는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부처님께서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는 것은 문자반야바라밀 . 관조반야바라밀 . 실상반야바라밀의 세 가지 종류로 나누어서 이제까지 그게 실지로 말하면 반야바라밀이 아니다. 내가 이렇게 설명해서 이 문자반야는 어떻고 또 관조반야는 어떻게 살피는 것이라 했지만 실은 살필 것도 없다. 마지막 자성자리인 실상반야는 어떻고 어떤것이라 설명 했지만, 또 그래서 그것을 실천해서 바라밀을 해서 부처가 되고 하는데 지혜가 제일이니까 그랬지마는 사실은 그게 반야바라밀이 아닌 것이므로 그래서 금강반야바라밀이라고 이름을 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늘 긍정하시는 것 같으면서 부정하시고 긍정도 부정도 아닌 것으로 언제나 같은 말씀 같은 그런 내용이지만 그러나 언제나 그 말씀하시는 구절(句節)에 의지해서 그 구절은 해결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반야바라밀을 여지껏 고구정령(苦口丁寧)으로 이십년 동안 설명하셨는데 이제 「사실은 그게 반야바라밀이 아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문자나 반야에 의지해서 걸려 있지 말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보시하는 것이나 계행 가지는 것이나 인욕이나 다 잘하면 세상에 알려지고 저절로 밖으로 드러납니다. 또 정진하는 것도 모두 보고 알 수가 있고 또 선정한다고 앉아 가지고 며칠씩 먹지도 않고 하게 되므로 그것도 알 수 있습니다. 요새 미술가 들도 선정과 같은 그런 것이 있습니다. 한 일 주일씩 안 먹고 삼매(三昧)에 들어가서 구상을 합니다. 우리 한국에도 그런 굉장한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이 일 주일씩 어떤 땐 한 달씩 자기도 모르고 앉아서 구상하고 그럽니다. 이렇게 일종의 선정삼매(禪定三昧)에 들어가면 자연히 지혜가 나옵니다. 이 여섯가지 바리밀 가운데 구경(究竟)에 들어가면 다 하나가 됩니다. 이금강경은 반야바라밀을 밝히는 경전이고 반야를 역설(力說)하는 경전이기 때문에 복짓는 수행도 따라오게 됩니다. 그런데 수즉파파즉수(水卽波 波卽水)로 물과 물결을 둘로 나눌 수 없는 것 처럼 복 짓는 것이나 지혜를 닦는 것은 둘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반야바라밀을 그렇게 애써 설명했지만 그게 반야바라밀이 아니니 그래서 금강반야바라밀이라 이름 해라.」 하신 말씀에 이해가 잘 안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뜻은 앞에서 말한 것과 역시 같은 뜻입니다. 견성하기 위해 참선한다고 벽을 향해 돌아 앉아 있지만 그것은 초학자(初學者)가 금강반야(金剛般若)를 체득해야 하겠으니 이 마음자리를 깨닫는 방법으로 하는 것이지, 실상금강이란 마음자리에서는 그것은 다 버려야 할 지식 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금강반야의 실체는 아니고 하나의 방법으로 설명하느라고 이름한 것 뿐입니다.

바라밀이다, 도피안이다, 하는 말은 생사니 번뇌니 망상이니 하는 것이 떨어져서 불생불멸하고 영원불멸하는 생명체가 온전히 티 하나 없이 드러나면 도피안이고 이것을 성불했다, 생사를 해탈했다, 그럽니다. 그때 가면 일체가 무소부지(無所不知)하고 무소불능(無所不能)한 본체의 지혜가 나타납니다. 그걸 설명하느라고 금강이니 반야바라밀이니하고 또 부인(否認)하고 그럽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 마음 자체가 곧 반야바라밀이 다 되어 있습니다. 이미 말씀은 다 끝나신 것이지만 이것을 문자로 설명하면서 틀림없이 이론으로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는 일을 위해 「불설 반야바라밀은 곧 그것이 반야바라밀이 아니니라. 그래서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 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原 文 :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有所說法不 須菩提 白 佛言 世尊 如來 無所說

 

[解 義] 『수보리야! 여래께서 어떤 법을 설한 게 있느냐?』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설한 바 아무 법도 없으십니다. 제가 지금까지 모시고 다녔지만 한 번도 입을 떼신 일이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반야경을 네 곳에서 십 육회의 법회를 가지면서 설법하셨습니다. 그런데 「내가 무슨 말한 법이 있느냐?」 물으니까 「아니 올시다. 부처님께서 입 떼신 일도 없고 언제 누구 보고 법문한 말씀 못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부처님은 지금 계속 얘기하시고 계시면서 하는 말씀입니다. 사실 실상반야는 말로나 생각으로 미치지 못하고 문자로 기록 할 수는 더욱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도 당신께서 소개하고 싶은 것을 소개하는 말씀이 아니라 필경 아무도 모르게 되어 있는 자리고 말로서는 소개 할 수 없는 자리입니다. 깨친다고 하는 것은 번뇌 망상을 제거해서 장난치던 그 사람이 장난 안 하고 앉아 쉬는 것입니다. 그러니 천당 지옥의 생각을 해서 꿈을 꾸고 돌아 다니다가 꿈 꾸는 생각을 걷어 버리니까 눈뻔히 뜨고 꿈꾸는 것이고 꿈을 깨 놓고 보면 잠 자본 일도 없고 꿈꾼 일도 없고 그렇습니다. 꿈속에도 그 사람이고 꿈 밖에도 그 사람일 뿐입니다. 그렇게 되니까 사실 부처님께서 당신 말씀하고 싶은 그 얘기를 한번도 얘기해 보지 못합니다. 꿈 속에서 꿈꾸는 사람한테 나도 꿈꾸는 몸뚱이를 하나 만들어 가지고 그 꿈속에 들어가서 얘기를 실컷 하는 격이니,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게 아니고 그저 헛말 하고 앉아 있는 것이고 잠꼬대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잠꼬대를 가지고 얘기한다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꿈을 깨고 보면 꿈속에서 하던 일은 없는 것이니, 그러므로 수보리 존자 말씀이 「부처님께서 언제 무슨 말씀하셨습니까?」하고 반문을 했고, 부처님께서도 「네 말이 옳다.」고 하신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것은 몽중지사(夢中之事)니 꿈꾸는 중생들과 상대하는 얘기인데 또 다시 술에 취해 가지고 여기가 동쪽인지 남쪽인지도 모르고 헤메는 판이므로 이렇게 달래 주는 것이지만 턱도 안 닿는 얘기입니다. 비록 술이 취해서 정신의 착란을 일으키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달라진 것은 아닙니다. 이런 잠꼬대 같은 말을 가지고「내가 말한 일이 있느냐」고 하니까 「말이 안됩니다. 금강경이고 반야고 이걸 들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듣는 그게 무엇인지 그 주인공 주체를 찾으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어떤 법도 금강경도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하신 것입니다.

 

原 文 : 須菩提 於意云何 三千大千世界 所有微塵 是爲 多不 須菩提言 甚多 世尊

須菩提 諸微塵 如來 說非微塵 是名微塵 如來說世界 非世界 是名世界

 

[解 義] 부처님께서 또 수보리 존자에게 물으십니다.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먼지, 삼천대천세계를 구성한 그 전자의 수가 많으냐 많지 않으냐?』 하셨는데, 수보리존자 경계로 봐서는 우리가 콩 한 개 보는 만큼 쉽게 압니다. 그래서『참 많습니다, 세존이시여.』하고 사뢰었습니다. 그러나 수보리 존자의 경계로 봐서는 엄청날 것도 없습니다. 여기서는 일반 중생을 대신해서 하는 말씀이므로 「참 많으옵니다.」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리고 수보리야! 이 먼지 이 미진 그것을 부처님은 미진이 아니라고 한다. 지금까지 미진이라고 내가 설명했던 미진이 그게 곧 미진이 아닌데 그것을 미진이라고 말하며, 여래께서 말하는 세계도 세계가 아니니 이 이름이 세계니라.」하셨습니다. 천백억 지구덩이 별세계가 모인 것을 사바세계라하고 극락세계도 무수한 불세계(佛世界)중 하나인데, 화엄경(華嚴經) 같은 데에서는 화장찰해(華藏刹海)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맨 밑에 무한대의 허공 가운데서 무엇 하나를 근거로 해 가지고 이십중광대찰(二十重廣大刹)이 이루어져서 스무 층의 세계가 벌어집니다. 이 한 층계 세계의 거리가 얼마냐 하면, 삼천대천세계의 열 배, 곧 백억의 지구의 열배에 해당하는 세계를 부순 먼지를 십중찰미진수(十重刹微塵數)라 하는데 이 미진수가 다하도록 별나라 하나에 먼지 하나씩 놓아서 이 미진수가 다 하도록 무한히 올라간 거리 그것이 화장세계의 한 계층의 거리입니다.

여기서 찰(刹)자는 절찰자로만 알지만 세계란 뜻입니다. 십중찰세계 곧 지구덩이 백억배에 해당하는 삼천대천세계의 열 배나 되는 지구덩이들을 전자나 원자로 환원시킨다면 그 수가 불가사의한 무한대의 수일 것입니다. 불보살이나 헤아릴 수 있는 이렇게 많은 수의 전자 원자를 가지고 지구덩이 하나 지나갈 때마다 한 개씩 놓고 올라가서 그 전자가 다하도록 수 없이 많은 지구를 일직선으로 통과해 올라갑니다. 이렇게 해서 십중찰세계의 미진수가 다 하도록 올라가서 이렇게 하기를 동서남북과 네 간방(間方) 상하방(上下方)의 사방으로 다 올라간 세계, 거기엔 부처님 계신 세계도 있고 안 계시는 세계도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안 계신 세계는 범부 세계인데, 지금 우리 세계는 불세계 아닌 것으로 됐습니다. 그렇지만 대장경이 아직 남아 있으니까 아주 불세계가 아닌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십주찰세계의 전자 . 원자가 다하도록 한 것을 한 계층으로 해서 이렇게 이십층이나 올라간다고 그랬는데 이것이 하나의 화장찰해입니다.

현대의 천문학자들도 이렇게 광대무변한 세계는 측정(測定)하지 못했는데 부처님 께서는 그렇게 굉장한 세계를 설명해 놓으셨지만「그건 세계가 아니니 그래서 세계라고 하느니라」 그러셨습니다. 「미진은 미진이 아니기 때문에 그걸 미진이라 하고 세계가 세계가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세계라 한다.」하신 것이 그것입니다.

 

原 文 : 須菩提 於意云何 可以三十二相 見如來不 不也 世尊 不可以三十二相 得見如來

何以故 如來說 三十二相 卽是非相 是名三十二相

 

[解 義]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냐? 어떻게 생각하느냐? 가히 32상으로, 부처님의 설흔 두가지 거룩한 특별한 상과 여든가지 뛰어나게 생긴 모양(八十種好)으로 여래를 친견(親見)할 수 있느냐? 부처님을 뵐 수 있느냐 없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가히 32상으로써 여래를 친견 할 수 없는 것이옵니다. 어째 그러냐 하오면 여래께서 32상이라 말씀하시는 것은 곧 이것이 상이 아니기 때문이옵니다. 그래서 이것을 <삼삽이상>이라 하신 것이옵니다.』

부처님의 32상도 비록 육도 만행(六度萬行)을 하고 억만겁 동안 몸뚱이와 온갖 것을 남을 위해 보시한 공덕으로 얻어진 거룩한 상호(相好)이긴 하지만 그러나 그것도 역시 세계나 먼지 처럼 상대적으로 있는 허망한 거짓 존재이며 따라서 상(相)이 아닙니다. 육체의 오장육부(五臟六腑)나 혈액(血液)과 신경(神經)등이 다 물질에 불과하고 그 물질은 곧 있는 것이 아니므로 32상은 곧 상이 아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32상 이라고 한다.」고 하셨는데 이것은 아주 없는 것이 아니라 역시 다생겁(多生劫)으로 보살의 인행(因行)을 닦으면 그 정도에 따라서 상호도 거룩해지고 하나하나 갖추어지게 되며 그래서 없는 것도 있는 것도 아닌 도리를 밝힌 말씀입니다.

 

原 文 : 須菩提 若有善男子善女人 以恒河沙等身命 布 施 若復有人 於此經中 乃至 受持四句偈等 爲 他人說 其福甚多

 

[解 義] 『수보리야!만일 어떤 착한 남자나 착한 여인이 있어서 항하사 모래수와 같은 몸뚱이와 생명을 가지고 보시를 했다면 옷 없는 사람 . 돈 없는 사람 . 밥 없는 사람을 위해 돈도 주고 옷도 주고 재산 다 털어 주고 나서 더 줄 것이 없으면 코도 떼 주고 온갖 것을 다 보시하기를 항하의 모래수처럼 많은 몸을 버려서 보시한 사람이 있고 다른 사람이 있어서 이 경전 가운데 내지 사구게만이라도 잘 수지해 가지고서 다른 사람을 위해 설명해 준다면 그 복이 심히 많나니라. 삼천대천세계에 먼지 수 같은 몸뚱이를 가지고 여러 백천 겁을 두고 약도 되어 주고 잡아 먹혀서 양식도 되어 주고 나면 그 복이 한량 없을 겁니다. 그러나 재산이나 칠보를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히 채워서 보시 했다 해도 그것은 한 생각 비우면 할 수 있지만 몸뚱이 생명을 보시한다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그것도 한 해 두 해도 아니고, 한 평생 두 평생도 아니고, 한량없는 세월을 두고 한량없이 몸만 남한테 보시 했다면 그 공덕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렇지만 이 금강경의 사구게(四句偈)만이라도 남에게 설명해 주는 공덕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사리불 존자가 공부하고 앉아 계시는데 한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부처님 제자이시죠. 부처님 제자는 다 대자대비 하시다죠.」 「네 그렇습니다.」 「그러면 무엇이든지 다 보시 할 수 있습니까?」 「아 그렇습니다.」 「스님 왼 눈이 하나 필요한데 빼 주실 수 있습니까?」 사리불 존자는 자기 스스로 자기 눈을 빼 줍니다. 그 사람은 그걸 받아서 더럽다고 탁 침을 뱉아가지고 집어던지더니 발로 비벼서 짓이겨 버립니다. 남은 애써서 아픈 눈울 빼서 줬는데 필요 없어서 내 버리더라도 자기 안 보는 데 가서 했으면 좋을 텐데 그 빼 준 사람 앞에서 그러니 아무리 사리불이라 해도 마음이 동해서 고약한 놈이라고 속으로 꾸짖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 말이「아 스님이 발심을 덜 했습니다. 철저히 발심을 했으면 내가 그걸 갖다가 똥 속에 집어 넣거나 발로 밟아 버리거나 주는 것 뿐이요. 무심 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안색을 보니까 속으로 마음이 동한 것 같으니 아무래도 응무소주한 보시가 아닙니다.」 하면서 자기는 제석천(帝釋天)인데 스님을 시험해 보느라고 그랬다고 하면서 부처님 비슷한 제석천의 본신(本身)을 나타냈습니다. 그리고 「내가 대단히 죄송스럽습니다. 나는 그것도 못합니다.」 사리불 존자는 그 말을 듣고 부끄러워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직 깨닫기 전이라도 이런 경전을 읽고 배워서 마음을 조복을 받고 항복하는 법을 익혀 나가면 자기 목을 못 빼 준다 하더라도 이 목을 못 빼 줄 때 마다 마음이 아프고 참회가 되고 진실히 중 노릇을 잘 하고 인욕도 하고 보시도 하고 모두 잘 할 줄 알면 깨친 뒤에 훨씬 수월해 집니다. 경을 읽을 때 마다 하루에 열번 읽어도 읽을 때 마다 부끄러운 생각이 나고 꼭 이래야 하겠다는 다짐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길을 지나가다가 개가 날 보고 짖으면 마음에 부끄럽고 부처님 뵙기에 황송하고 신도를 대하기에 얼굴이 화끈하고 이런 식으로 정진되어 올라가야 오늘은 안 돼도 내일은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법문 들을 때만 그렇겠다 생각해 놓고는 개가 짖거나 말거나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냐 이런 식으로 되어서는 천만 겁을 가도 큰 수행이 안됩니다. 내 것을 주고 내가 다 참아야 할 것을 남더러 주라 하고 참아 달라고 해도 안 되는 일이고 내가 참지 않으면 안 되고 내 것을 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설사 억만겁을 두고 몸뚱이를 보시하고 재물을 보시하고 큰 공덕을 지었다 해도 그것은 물질로 지은 복이고 몸뚱이라는 형상으로 지은 공덕인데 물질이나 몸뚱이 자체가 허망한 존재이고 상대적인 한계가 있는 존재이므로 그 공덕 또한 무한대한 절대적 공덕에 비하면 비교도 할 수 없는 한 부분에 불과합니다. 또 상대적인 공덕으로는 생사를 해탈 할 수가 없고 자기 자성을 체득하지 못한 중생의 경계일 수밖에 없지만 이 금강경의 사구게(四句偈)는 자성을 깨달아 우주를 소유하고 주재하며 생사대사(生死大事)를 해탈하여 영원불멸의 대성자인 부처님을 성취하는 비결(秘訣)이므로 그 복이 비교도 안되게 더욱 많다(其福甚多)고 하신 것입니다.

 

 

[說義]

 

문자반야는 곧 실상반야

반야라는 말은 우리말로 눈이 보배란 말이고 소견(所見)이 있어야 한다는 말인데, 소견이란 말은 역시 지혜라는 뜻이 됩니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도 머리를 쓸 줄 알아야 하는데, 머리를 아무리 쓰려고 해도 안 되는 것은 탐진치(貪嗔痴) 욕심만 꽉 차 있기 때문입니다. 미친사람이 제가 미친 줄 모르듯이 욕심 때문에 어리석은 줄을 모르고 욕심을 더욱 더 부릴 따름입니다. 그러나 옳든 그르든 세상의 지혜도 반야는 반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 경의 제목을 풀이할 때 반야에 대해서 자세히 말했지만 관조반야(觀照般若) . 실상반야(實相般若) . 문자반야(文字般若)를 말했는데 이 세 가지가 실상은 하나입니다. 문자반야인 이 경전이 우리가 성불할 수 있는 실상반야 . 관조반야의 조리를 알아들을 수 있도록 기록한 것이므로 이 뜻을 나중에 참말로 성취하고 보면 문자반야가 곧 실상반야고 그래서 문자가 곧 실상이고 문자가 문자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곧 마음자리입니다. 그 실상반야가 있다는 것도 문자가 소개해서 알고 관조반야를 옳게 가지는 방법도 역시문자가 지도하는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경전의 문자가 역시 참으로 소중해서 이 경전이 계시는 데는 곧 부처님께서 계시는 데고, 이 경전을 설명하는 분은 곧 부처님과 같이 공경하라 하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부처님 께서 반야바라밀이라고 늘 말씀하셨지만 그것이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그래서 이 경이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고 말씀하셨으니, 그 말 조리가 어떤 것인지 똑 떨어져야 될 것입니다. 이것은 산 보고 높은 줄 알고 물 보고 깊은 줄 아는 목전지사(目前之事)를 설명한 것이니까 수보리를 불러서 「개미나 굼벵이를 하나 놓고 이 자체가 금강반야바라밀이니라.」한 것과 같은 말씀입니다. 굼벵이나 지옥 중생이나 천당 중생이나 누구든지 지도를 하면 전부 금강반야바라밀의 존재이니 이게 모두 그런 것을 설명 해놓은 말씀이고 사람이 모두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금강경 본문울 말하기 전에 이것이 지금 완전히 꿈이라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원자니 전자니 하는 것 그게 그대로가 환의 존재인데, 그렇다고 해서 과학적인 사실을 부인한 것도 아니고 또 그렇다고 해서 유물론자가 인식하듯이 그런 전자냐하면 그런 것도 아니고 사실 진공이고 없는 존재고 그런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면 유정 무정 이것도 금강반야바라밀의 존재일 따름입니다.

여기까지 하면 금강경 설명 다 된 편입니다. 부처님께서 「반야바라밀을 설명한 것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다, 반야바라밀이 아니니 그러기 때문에 이 경전의 이름을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 했다.」하셨으니, 이러면 설명이 다 된 셈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금강경 한 번 죽 들어서는 어느대문에 어떤 내용의 골자(骨字)가 있는지 기억에 잘 안 남지만 이것을 천독 만독(千讀萬讀)을 하면 확실히 내 지식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거듭 거듭 이렇게 저렇게 말씀하시는 이것이 문자반야바라밀이고 이 문자반야바라밀이 아무것도 아니지마는 반야를 차차 자꾸 익혀서 실제로 알아지고 깨닫게 해 주는 공덕이 되기도 합니다.

혹 무한동력(無限動力)을 말하지만 아무리 물질절대론자(物質絶對論者)가 있다 해도 상대성 원리에 의해서 존재하고 절대적 존재란 하나도 없는 것이 현상계인데 무한동력도 마음 내 놓고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마음 이것만이 아무렇게나 해도 죽지도 않고 가만 있지도 않고 사실상 무한동력입니다. 제가 내었던 욕심을 만족하려고 할 때 가령 안 죽으려고 하는 사람의 욕심은 무한인 만큼 남이 나를 죽이려고 해서 하나가 달려들면 하나 죽이고 둘이 달려들면 둘울 죽이고 백명이 달려들면 백명을 다 죽입니다. 또 27억이 다 달려 들어도 할 수만 있으면 27억을 다 죽이고라도 나는 살아야 합니다. 마음이 악할 때는 무한히 무섭고 악하기도 하면서 또 가장 착하기도 한 존재이어서 착한 생각을 내면 이보다 더 착할 수 없는 짓을 합니다.

그러면 무엇을 가지고 실상(實相)이라고 하느냐 하는 것을 지금까지 부처님께서 역설하셨고, 내가 그것을 또 어떻게든지 바로 인식하도록 하려고 애를 써서 이야기했습니다. 말 하고 있는 이 자리, 말 듣고 있는 이 자리가 실상입니다. 실존철학자(實存哲學者)들이 말하고 있는 바 그 실존 자리는 산 보면 높다 하고 물 보면 깊다고 알 줄 아는 자리, 공산당은 죽일 놈들이라고 서로 적대시하는 그 자리가 실상자리입니다. 허공도 그 생각 못 내고 물질도 그 생각 못 내는 것이니 이 실상자리 빼 놓고는 그런 생각 내 놓을 곳이 없습니다. 육체도 못 내고 아무 것도 못 내는데 오직 마음자리 이것 하나만이 그렇게도 하고 저렇게도 합니다. 이것은 어두운 밤에 켜 놓은 촛불처럼 항상 드러나 있고 이것은 숨을 곳도 없고 사라질 곳도 없는 아무 것도 아닌 자리입니다. 깨달아야 하겠다는 생각, 견성해야 하겠다 또 무엇을 체득해서 증득을 해야 하겠다 하는 생각 때문에 사실 막히게 되고 그게 역시 장애입니다. 이 자리는 다 드러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놈이 얘기하다가, 법문을 듣다가 깨치고 육조대사가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법문 듣고 그 자리에서 깨쳐 버리는 게 다 드러나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거지 그게 어디 이론으로 설명할 정도로는 그렇게 안됩니다. 그러니까 아는 것을 어디까지나 깨쳐야 하겠다는 이것이 가장 큰 근본지장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견성하기가 아주 쉽다는 겁니다. 다 드러나 있기 때문에 세수하다 코만지기보다 쉽다는 것입니다.

산 보면 높은 줄 알고 미운 것 보면 밉다고 싸우기도 하는 이것이 금강반야입니다. 또 보리심을 발해 가지고 닦는다고 하는 것이 금강의 용(用)인데, 실상이 용이고 용이 실상입니다. 우리가 실제로 깨달아 체득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개념이나마 확실히 그렇겠다고 생각해야 이것이 불교를 깨달을 수 있는 밑거름이 되고 신심(信心)이 튼튼해집니다. 범부로서 일으키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곧 자성(自性)에 대해 그 존재가 어떤 거라고 개념으로나마 깨치기 전에 알 수 있을 정도로 부처님께서 설명을 자주 해 주십니다. 그렇지만 사실 부처님께서 애써서 소개하시고 싶은 것은 말 듣는 그 자리, 일체 시비언설(是非言說)이 다 끊어져서 이것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동시에 곧 이것이 없는 거로 있는 거고 있는 것으로 없는 그 자리입니다. 그러니 논리를 초월한 자리이지만 부득이 억지로 말을 붙여서 금강반야바라밀이라 한 것이므로 실상은 금강반야바라밀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소개하고 싶어하는 그 내용은 문자도 아니고 그러면서 역시 마음에서 나온 겁니다. 마치 「바람이 움직인 것도 아니고 깃발이 움직인 것도 아니고 전체가 그대들 마음이라.」고 하신 육조대사의 말씀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반야바라밀이라고 임시로 이름을 만들었지, 그 자체가 어디 이름을 가졌느냐는 것입니다. 깨치기 전에 아무리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는 그런 무슨 객관적인 진리가 있는 것 같이 인식을 하고 그러지만 그 실상과는 멀리 어그러집니다. 그 실상은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그런 내용을 가진 것을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름을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고 붙이라고 하는 것이니 실지는 금강반야바라밀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놈은 이름도 아니고 우리가 그런 얘기 듣고 추상(推想)할 수 있는 그런 내용도 아니고 생각조차도 아니란 뜻입니다.

 

욕도 칭찬도 없는 자리

요사이 구두선(口頭禪)이란 말을 많이 하는데, 우리 절에서 쓰는 문자가 하나씩 하나씩 사회에 나간 말입니다. 선을 입으로 배운 사람이지 참말로 앉아서 정진한 사람은 아니라는 뜻을 구두선이라 한 것입니다. 사회에서는 거짓말 하는 것, 책임 없는 말, 실천 없는 말을 뜻하는데 그러나 부처님께서 법화경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큰 집에 불이 났는데 집안에서 장난에 정신 빠진 자식들을 살리기 위해 아이들이 평소에 좋아하던 양수레(羊車) 사슴수레(鹿車) 소수레(牛車)가 밖에 있으니 나와서 가지고 놀라』고 하여 아이들을 불덩이의 재난 일보직전에서 무사히 구출해 냈다는 얘기입니다. 이렇게 자식들을 살리려고 부모가 거짓말한 것은 거짓말이 아니라 참말보다 더한 참말입니다. 부처님께서 49년동안 고구정녕으로 말씀하신 8만 4천의 법문도 사실은 중생들의 꿈을 깨워 주기 위한 방편일 뿐 그 실상자리는 말로 표현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살아계신 박고봉(朴古峰)스님이라고 공부를 잘하는 스님인데 만공스님(宋滿空)제자입니다. 한번은 고봉 스님이 만공스님 계시는 토굴을 내려다보고 「도둑놈 만공아 송만공아, 네가 견성을 했어, 이 도둑놈아, 견성을 좀 내놔 봐라.」 이렇게 욕을 한 나절이나 퍼부어 놓고는 절 큰방에 내려가 앉아 있었습니다. 그 절에 참나무 절구대가 큰 게 있습니다. 보통 사람은 찧을 수도 없는 것인데 만공스님은 이것을 들고「이 놈을 이것으로 쳐 없앨 수 밖에 없다. 욕을 해도 분수가 있지.」하며 이 몽둥이를 들고 찾아 다닙니다. 만공스님의 힘이 장사입니다. 밥 푸는 놋주걱, 놋 그릇 두꺼운 것을 종 만든다고 많이 모았는데, 만공스님 혼자 앉아서 종이 포개듯이 접어서 갭니다. 우리가 평생에 만공스님 힘쓰는 것을 이때 처음 봤습니다. 만공스님이 힘이 장사인 줄울 대개 알고 있는 것은 김좌진 장군과 팔씨름을 하면 왼팔은 만공스님이 이기고 오른팔은 비기어 승부가 없을 정도입니다. 김 좌진장군과 잘 알아서 가끔 놀러 오고 그랬는데 뚝심으로 우뚝 쓰는 힘은 만공스님의 힘이 훨씬 셉니다. 그것은 생각없이 쓰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 스님 하품하는 소리가 이십리 밖에 까지 들린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만공스님이 「이 놈의 자식 세상에 망신을 줘도 분수가 있지 이렇게 까지 할 수가 있느냐, 비구니,비구가 다 있는 데서 이게 무슨 짓이냐? 용서할 수 없다. 이 놈이 여기 있느냐? 어서 큰 방문을 열어라.」 호통을 칩니다. 그러자 고봉스님은 문을 활짝 열고 쓱 내다보면서 「스님 왜 그러십니까?」하고 태연하게 인사를 합니다. 그러니까 만공스님은 「허 허」하며 돌아 서 가면서 바윗돌을 번개처럼 때리는데 바윗돌이 갈라져서 몇 동강이 나 버렸습니다.

「스님 왜 이러십니까?」하는 소리는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가 지금 금강경을 배웠으니 알 수 있는 소리입니다만 송만공이라는 존재가 뭐 있느냐는 말입니다. 존재가 아닌 존재인데 그것은 욕을 할 수도 없는 거고 칭찬도 할 수 없는 거고 껍데기가 욕을 할 거고 욕은 실제로 없는 것이고 그런 것인데 화를 낸다는 것은 더 우스운 알이 아니냐는 뜻입니다. 만일 성내는 마음이 생기면 언제 성불하려고 그러느냐는 겁니다. 그렇지만 깨쳤어도 한편에 역시 중생이 남아 있고 한편엔 근본자리를 부처님과 같이 깨쳐 놨고 아직 수치가 덜 떨어져서 그런 것입니다. 자성을 깨쳐서 자기 본래의 면목을 보면 그중에 공부를 옳게 하거나 약간 잘못 하거나 시장을 돌아 다닐 때도 그것을 보고 산중에 있을 때도 그것을 보고 전부 그겁니다. 가만히 앉아 있을 때도 그것을 보고 돌아 앉을 때도 그것을 보고 그런 경지인데 만공스님 고봉스님 두 분이 서로 충고한 것입니다.

당나라 당시 조주(趙州)스님이라는 굉장한 도인이 있었는데, 그 분이 계시던 절에서 십리 밖 산 밑에 한 노인이 호떡 장사를 벌리고 있었습니다. 공부하는 스님네들이 조주 스님을 한정없이 찾아오는데 처음오는 사람은 그 노인이 있는 곳에 갈림길이 있어서 자연히 길을 묻게 됩니다. 그러면 그 노인은 절로 가는 길이 아닌 다른 길을 가르쳐 줍니다. 그 행인은 바로 가는 줄 알고 한참 올라가면 그 노인이 스님 스님 불러놓고는 아 그리가면 절이 없으니 이리 가라고 합니다. 그래서 되돌아서서 내려와서는 다시 올라가서 절에 가기 마련입니다. 이것이 한 사람 두 사람도 아니고 열 사람 백 사람이 그렇게 당하고 보니 「늙은이가 처음부터 바로 길을 가르켜 주지 않고 꼭 한 번 저쪽으로 잘못 가리켜 놓고는 다시 불러서 가리켜 주고 스님네를 놀린다.」고 여론이 일어났습니다. 이 소문을 들은 조주스님이 당장 주장자를 들고 「오늘 이자를 타살(打殺)해야겠다. 공부하는 스님네 한 시간이 바쁜데 이리 가라 저리 가리 하니 당장 때려 죽여서 지옥업보(地獄業報)를 적게 받게 할 수 밖에 없다.」고 하면서 내려 가십니다. 그러니 스님네들도 뒤에 멀찍이 떨어져서 어떻게 하나 하고 따라갑니다. 조주스님은 일부러 다른 데서 처음 오는 사람처럼 노인 있는 데로 옵니다. 노인한테 길을 물어 보니까, 역시 비뚜로 가르쳐 줍니다. 조주 스님은 가리켜 주는 대로 얼마를 가니까 또 불러서 잘못 됐다고 다시 가리켜 줍니다. 그래 스님들은 저놈의 늙은이 오늘 혼난다고 하면서 어떻게 되는가 하고 지켜보고 있는데 조주 스님은 그저 고맙다고 하고 그냥 올라옵니다. 그리고는 절에 와서 앉아 계십니다. 이것이 조주 스님이 그 늙은이를 쳐서 타살한 것입니다. 그게 어찌해서 타살인가.

여러분 스스로 한 번 풀어 보십시오. 천번 만번 설명한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이 원자가 우주의 궁극체(窮極體)인줄 알았는데 요새는 또 더욱 분석이 돼서 전자니 중성자니 양성자니 하는 것을 밝혔고 또 그게 마지막인 줄 알고 이렇게 생각했더니 더 근본이 되는 에너지를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개념으로 알지 사실은 어떤 것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세밀한 그것도 물질은 물질이겠는데 이 놈이 때로는 물질로 전자로 양자로 중성자로 보이고 어떤 때는 그게 또 그것도 저것도 아닌 에너지 존재로 보인다 그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물질도 아니고 전자도 아니고 에너지도 아닙니다. 이래도 보이고 저래도 보이고 하니까 마치 종소리가 강강도 댕댕도 아니라고 하면 사실 종소리의 실상은 우리가 모르고 있는 것과 한 가지 입니다.

그러니 아인쉬타인이 현상계가 아니고 먼지가 먼지 아닌 이 이치까지는 충고를 해 준 턱입니다.

그러니까 이렇다 저렇다 생각할 수 있는 것 말할 수 있는 것은 다 참 진리인 실상과 현상계는 틀립니다. 우리가 어떤 사물(事物)의 이름을 듣고 어떤 개념을 가졌을 때 그 개념과 딱 맞는 사실 똑 같은 물건은 하나도 없습니다. 내가 그 이름을 듣고 그 내용을 설명을 듣고 짐작해서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추측하는 것과 사실과는 맞춰 보면 전혀 반대로 있고 또 비슷한 것도 있지마는 딱 맞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가령 비행기의 경우에도 세밀한 설계를 해 가지고 그대로 잘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이미 조립해서 내어 놓은 그 시간 부터 숨쉬는 시간 부터 설계와는 달리 부패해 가는 세상입니다. 또 만드는 그 도중에 설계와는 달라지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모든 것은 찰라도 쉬지 않고 변멸하는 것이므로 완성품(完成品)의 반만 만들었다해도 실제의 설계와는 천지 차이가 있습니다. 천 시간쯤 비행해도 모르지만 엄밀하게 따져서 물질적으로는 변동을 하고 있다는 그 말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설계에 맡는 건축도 제대로 할 수 없는 거고 현상이란 본래 그런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까지 세밀하게 따지는 분입니다. 그런데 불교를 비과학적이라고 하는 것은 불교의 불자(佛字)도 안 들어보고 하는 소리 밖에 안 됩니다. 이런 식으로 따진 게 금강경이니 글자의 뜻은 전부 확실하지 못한 것이 됩니다.

삼천대천세계도 세계가 비세계(非世界)고 이렇게 됩니다. 그러니 불교는 과학적이요 철학적이요 동시에 완전한 종교입니다. 과학이 아닌 과학 . 종교가 아닌 종교 . 초과학 . 초 종교인 동시에 초(超)도 아닙니다. 그런데 더구나 아무것도 없는 걸 가지고 몇 억만배 했다면 말이 안되고 그게 몇 배나 되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맑아지면 없는 걸 없는 것으로 보는 도수가 있고, 그와 동시에 사실은 아무 도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뵈는 것이니 도수가 있다고 하면 마지막이고 없다고 하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전부 과학적으로 완전히 이해 할 수 있는 것이고, 현대의 과학이나 철학이 고도로 발달할 지언정 이런 원리를 떠나서 허황되게 설명한 것은 한 자도 없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미진 전자 같은 요소(要素)들이 뭉쳐서 태양이니 지구덩이니 화성이니 목성이니 금성이니 하는 세계가 이루어진 것이므로 세계가 아닙니다. 그러니 이제까지 세계라고 말하고 중생이라 말했지만 그게 세계가 중생이 아니며, 있다면 꿈같이 있는 것입니다.

파초 줄기 속에 알맹이가 있는지 자꾸 베껴 보면 껍데기뿐이고 알맹이는 없습니다. 이 처럼 현상계 전체를 파고 들어가면 나중에는 아무 것도 없는 데 도달합니다. 그래서 허공이나 마찬가지가 되어 전자 이전 에너지 이전에 허공이 변해서 이렇게 되었다는 것을 추측하게 됩니다. 역시 광명이 멀리가서 소모되고 없는 데로 돌아가는 걸 보니 역시 물질이 생긴 것도 없는 데서 생겨 없는 데로 돌아가는 게 아니냐 하는 것을 과학자들도 인정하는 단계에 도달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우주의 구성이 아무 것도 아닌 허공인데 허공이 우주나 전자 . 산소 . 수소로 보면 보일 뿐 참으로 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반야심경에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그러는데 아무 것도 없는 것이 물질, 곧 색이요 지금 있는 것이 곧 없는 거라는 그 말입니다. 금강반야바라밀다경은 오천여자나 되는 요점을 이백 칠십자로 종합해서 기묘하게 되어 있는 데 이 반야심경의 첫 구절이 「색즉시공 공중시색」입니다. 즉 「있는 것이 곧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이 곧 있는 것」이니 진공(眞空)에 돌아가서 소모되어 없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없는 것이고 있은 채로 없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현실이 꿈이기 때문이고 내 자신이 꿈을 일으켜 놨기 때문에 있는 채로 없는 것입니다. 이 손이 아무것도 거리낄게 없는데 괜히 쓸데 없이 여기 초가 있고 손도 있는 것으로 알고 초가 부러지기 전에 손이 통과 되지 않는다는 관념이 있기 때문에 손에 초가 걸리게 되는 것입니다. 즉, 이렇게 생긴 티끌로 쪼개기 전에 물체인 채 그대로 지구가 아니라는 말이 되고 그러므로 미진 자체가 미진이 아니라는 게 어디까지나 물질의 근본을 얘기 하는 말이면서 그것이 합해서 지구라는 이 현상계 모든 물건도 그대로 곧 물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도 그렇고 동시에 바다 . 물 . 보배다 하는 현상계의 존재 그대로 역시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걸 세계라 하고 미진이라 한 것이므로 곧 미진이 미진이 아니고 세계가 세계가 아닌 것입니다.

그걸 무엇 때문에 문제로 삼았느냐 하면 「이게 지구다, 요거는 우리 대한민국이다, 저거는 중공이다.」 그런 생각 이런 착각을 갖고 쓸데없는 객관에 대한 욕심을 가지게 하는 데서 문제가 벌어진 것입니다. 내가 사는 동안에 천지도 있는거고 만일 천지가 날 죽이려고 하는 존재라면 천지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 천지는 두드려 부숴야 할 것입니다. 모든 것은 <나>라고 하는 생명의 실재(實在)로 부터 시작되는 것인데 이 <나>를 도외시하고 공자니 맹자니 노자니 예수니 하는 분들이 객관이나 신에게 자신을 예속시켜서 구속되고 얽히게 만들고 그랬지만, 인류의 5천년 문화와 사상은 다 <나>를 중심으로 해서 생긴 것이고 존재하는 것인데 이 <나>를 밝히지 않고 항상 객관에서 진리를 구하려고 한 데서 잘못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불교는 이 <나>의 실재를 깨닫는 것으로 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현인(賢人)이나 성인(聖人)은 불교에서 말하는 불보살의 근처에도 못가는 정도입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있는 것도 없는 것도 틀린 겁니다. 모두가 다 마음의 그림자이고 꿈이고 환(幻)으로 있는 겁니다. 그러니 미진이 미진이 아니기 때문에 그걸 미진이라 한다는 말은 미진이라 이름지을 수 있는 것은 존재가 아니라는 말이고 무엇이든지 이름을 붙여주면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크다고 하면 안 크다는 말이고 작다고 하면 크다는 말이고 이렇게 정반대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요새 상대성 원리를 연구한다고 하지만 아인쉬타인은 수박겉 핥기로 조금 얘기하려고 하다 갔지 불교에서 말하는 근원을 철두철미하게 알맹이까지는 미처 모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마음을 탁 놓아 버리고 세상을 살면 수월 합니다. 돈 모으는 것도 참말로 모으려는 욕심으로 모으는 게 아니고 아무 쓸데 없는 짓이라 생각하고 하는 것이므로 남 주는데도 아무 힘 안들이고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시수물 삼자(施受物三者)가 청정한 것입니다. 누가 내 눈이 필요하다면 눈도 빼 주고 코도 베어 주고 온갖 것을 다 보시하자는 것입니다. 삼천대천세계의 먼지 같은 몸뚱이를 가지고 여러 백천겁을 두고 약도 되어 주고 잡아 먹혀서 양식도 되어주고 하면 그 복이 한량 없을 겁니다. 그런데 재산이나 칠보를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히 채워서 보시하는 것은 한 생각 비우면 할 수도 있지만 몸뚱이 생명을 보시하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그것도 한 해 두 해도 아니고 한 평생 두 평생도 아닌 한량없는 세월을 두고 한량없이 많은 몸을 남에게 보시 했다면 그 공덕이 한없이 많겠지만 그러나 아까 조주스님(趙州)이 길을 잘못 가리켜 주는 노인을 타살(打殺)하겠다고 내려가서 별일 없이 고맙다고만 하고 돌아온 소식, 만공스님(滿空)이 절구공으로 고봉(古峰)스님을 때려 죽인다고 하다가 「스님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하는 한 마디에 박장대소하고 그만 둔 그 소식을 체득하지 못하고서는 참으로 큰 공덕을 지을 수는 없으며 법 다웁게 금강반야의 도리를 받아 지닐 수도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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