莊嚴淨十分 第十

 

 

佛告須菩提(불고수보리)하사대 於意云何(어의운하)오 如來昔在然燈佛所(여래석재연등불소)하야 於法(어법)에 有所得不(유소득부)아 不也(불야)니이다 世尊(세존)하 如來在然燈佛所(여래재연등불소)하사 於法(어법)에 實無所得(실무소득)이니이다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菩薩(보살)이 莊嚴佛土不(장엄불토부)아 不也(불야)니이다 世尊(세존)하 何以故(하이고)오 莊嚴佛土者(장엄불토자)는 卽非莊嚴(즉비장엄)이니 是名莊嚴(시명장엄)이니이다 是故(시고)로 須菩提(수보리)야 諸菩薩摩訶薩(제보살마하살)은 應如是生淸淨心(응여시생청정심)이니 不應住色(불응주색)하고 生心(생심)하며 不應住聲香味觸法(불응주성향미촉법)하고 生心(생심)이요 應無所住(응무소주)하야 而生其心(이생기심)이니라 須菩提(수보리)야 譬如有人(비여유인)이 身如須彌山王(신여수미산왕)이면 於意云何(어의운하)오 是身(시신)이 爲大不(위대불)아 須菩提言(수보리언)하사대 甚大(심대)니이다 世尊(세존)하 何以故(하이고)오 佛說非身(불설비신)이 是名大身(시명대신)이니이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네 생각에 어떠하냐? 여래께서 옛적에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얻은바 법이 있느냐 없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실로 얻은 법이 없사옵니다.』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보살이 불토를 장엄하느냐? 안 하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하오면 불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곧 장엄이 아니오며 그 이름이 장엄이옵니다.』

『그러므로 수보리야! 모든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청정한 마음을 낼 것이니, 마땅히 물질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내며, 또 소리·향기·맛·부딪침·법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낼 것이니, 마땅히 머무름 없이 그 마음을 쓸 것이니라.』

『수보리야! 비유하건대, 어떤 사람의 몸이 수미산왕만 하다면 네 생각에 어떠하냐? 이 몸이 크다고 하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매우 크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 하오면 부처님께서는 몸 아닌 것을 말씀하시어 큰 몸이라 이름하시었기 때문이옵니다.』

 

 

第十 莊嚴淨 十分

 

[科 解]

제10분은 장엄정토분(莊嚴淨土分)인데 장엄은 꾸민다는 말입니다. 요새 말로 도시미화(都市美化)한다, 곧 가로수(街路樹)를 심고 길을 넓혀가지고 여러 가지 치장을 잘하는 것이란 뜻입니다. 정토(淨土)는 부처님 세계 곧 불토(佛土)를 가리키는데, 우리 본심 자리가 점령하고 있는 전체 우주를 흙 토(土)자 하나로 말한 것입니다. 현상계는 흙이 대표적이니까 그렇게 말합니다. 불토(佛土)라 그러면 한 부처님께서 깨달아서 점령하고 있는 세계를 가리키는 말이므로 정토를 장엄한다 함은 불세계를 미화한다는 뜻이 됩니다. 우리 중생들은 장엄이 안 되어 있어서 모두 오줌·똥·고름·썩은 거름·송장 부스러기 같은 것들이 썩은 더러운 것을 먹고 험악하게 삽니다. 그런데 우리가 소승불교에 초과(初果)·이과(二果)·삼과(三果)·사과(四果)를 증득해 올라가면 차차 이 세계가 정화됩니다. 더럽고 험한 것이 없어지고 차차 먹지도 않고 그러다 보니까 대·소변도 필요 없어지고 그러므로 해서 몸이 점점 환화공신(幻化空身)으로 되어 갑니다.

그래서 보살이 52위(五十二位)를 증득(證得)해 올라감으로써 십신보살(十信菩薩)로부터 십지보살(十地菩薩)로 자꾸 올라갈수록 그 복과 지혜가 더욱 더 많아져서 계를 어렵게 지키고 보살행(菩薩行)을 하는데 따라 세계가 점점 장엄 미화되어 올라갑니다. 전에 말하던 28천(二十八天)의 하늘도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수명(壽命)이 길고 인격이 고상하며, 천상의 환경도 올라갈수록 점점 화려해져서, 인간세상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그런 화려한 세상으로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다 위로 올라갈수록 복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차차 높이 올라가면 갈수록 전부 얼굴도 더 거룩해지고 거대한 국토가 미화되어 올라가고 장엄이 되어 올라갑니다.

우리가 사는 여기는 오탁악세(五濁惡世)이니 다섯가지 욕심을 탐내서 죄만 짓고 서로 살육(殺戮)을 안하면 안 될 이런 환경을 만들어 가지고 사는 세상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남을 위해서 희생할 수 있는 마음 한 번만 돌이켜서 정화를 해 놓으면 그때는 세계가 또 달라져 가고 산천초목(山川草木)까지 전부 달라져 갑니다. 거기는 일체 중생의 마음도 정화(淨化)가 되어 거룩하게 삽니다. 그러나 인간세계의 장엄은 뭐니 뭐니 해도 극락세계에 비하면 냄새가 나고 사람 자체부터 추하고 못생겨서 극락세계의 변소만도 못합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세계를 장엄한다 함은 장엄하는 장엄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무심(無心)에서 이루어진 장엄 아닌 장엄이며, 하는 것 없는 마음으로 중생을 이끌어 제도한다는 뜻으로 장엄정토(莊嚴淨土)라 했습니다.

 

原 文 : 佛告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昔在然燈佛所 於法 有所得不 不也 世尊 如來 在燃燈佛所 於法 實無所得

 

[解 義] 부처님께서 수보리존자에게 또 같은 뜻을 물으십니다. 『여래께서 아득한 과거세(過去世)에 연등부처님 앞에서 교화를 받고 보리심을 일으켰는데 그때에 내가 어떤 법을 얻은 바가 있었느냐, 견성(見性)을 해서 깨달은 법이 있느냐?』하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수보리존자는 부처님께 여쭙니다. 『아니옵니다. 부처님, 여래께서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법을 얻었다는 것은 말뿐이지 실제로 아무것도 얻으신 법이 없습니다. 얻을 수 있는 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 법은 없사옵니다.』하고 대답하셨습니다.

범부가 보기에는 석가여래께서 모든 것을 새로 깨달았으니 그것은 얻은 법입니다. 인생이란 밥먹고 똥싸다 죽는 것인 줄 알았는데 뜻밖에 부처님을 만나서 「확실히 내가 죽는 것이 아니구나, 내가 우주의 본 바탕이요, 절대자유(絶對自由)의 존재로구나, 완전하고 영원불멸(永遠不滅)하는 존재로구나」하는 것을 부처님 설법(說法) 듣고 믿게 되었고 과연 그렇겠구나하는 도리를 알았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내가 연등불(燃燈佛) 처소에서 발심(發心)을 해가지고 그 후부터 열심히 수도를 하고 난행고행(亂行苦行)을 하고 보살행(菩薩行)을 닦아서 오늘날 성불(成佛)했노라고 늘 말씀하셨는데, 부처님께서 성불하신 뒤 40년동안 항상 이렇게 설법하셨는데, 40년이 지난 지금 금강반야바라밀경을 말씀하시면서는 시치미를 떼고 「여래께서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법을 얻음이 있느냐?」고 물으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근본자체는 견성(見性)하기 전이나 그 뒤나 항상 마찬가지이고 부처님 만나 볼 때나 안 만나 볼 때나 그 자체는 아무런 증감(增減)도 없어서 지옥(地獄)에 가 있을 때나 굼벵이 버러지로 있을 때나 그 자리는 여여(如如)한 자리로서 아무도 엿볼 수 없고 주고받을 수도 없고 깨칠 수도 없고 미할 수도 없는 자리이지만 중생은 그런 줄을 모르기 때문에 지도자(指導者)를 만나서 그 법을 의지하지 않으면 믿을 수도 없게 되고 깨달을 수도 없게 됩니다.

연등부처님께서 설사 이리해라 저리해라 하셨다 하더라도 석가모니 자신이 자기 마음을 자기 자신이 닦아서 깨달았지 연등부처님으로부터 어떤 법을 가지고 와서 닦은 것은 아니며 애당초부터 없던 것을 연등부처님한테 비로서 얻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성불(成佛)을 다 마치기 전 까지는 연등부처님의 가르침을 버려서도 안 되고 마음에 기억을 해서 잘 간직해 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공부를 하는데도 마음에 의지하는 소의경전(所依經典)을 세워 가지고 염불(念佛)이나 참선(參禪)을 하게 됩니다. 부처님도 과거에 아무데도 의지하지 않고 성불을 하신 것은 아니므로 얻은 것이 전혀 없다고는 못합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내가 연등불한테 아무것도 얻은 법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겉으로 봐서는 거짓말한 것과 한가지입니다. 확실히 연등부처님을 의지해서 발심했고 그 지도에 의지해서 성불하신 것인데 「얻은 것이 없다(無所得)」고 하심은 마치 제자가 스승을 배신(背信)하여 전부 「나 혼자 배웠지, 아무한테도 배우지 않았다.」고 하는 것처럼 생각할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수보리 존자께서 「안 될 말씀이십니다. 연등부처님 앞에서 깊은 것이나 얕은 것이나 참된 법이나 거짓된 법이나 얻은 바가 조금도 없습니다.」하셨고 부처님께서도 「너의 말이 옳다」고 긍정(肯定)하셨습니다. 체와 용이 둘이 아닌(體用不二) 본체 자리의 본래청정(本來淸淨)한 본바탕인 마음자리를 강조(强調)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마음 자체가 유무(有無)를 초월하고 시공(時空)을 초월한 자리임을 알고 이제부터는 술이니 고기니 재산이니 가정·국가·민족이니 하는 일체의 집착·분별·망상을 초월하여 공부를 완전하게 마치기까지는 달리 한 번 해봐야 할 것입니다. 마치 장래를 위해서 부모의 슬하를 떠나서 조국과 가정을 버리고 먼 외국으로 유학(留學)가는 것과 같이 불교가 본래는 구세(救世)의 종교지만 내가 먼저 도(道)를 구하여 알 때까지는 조용한 곳을 찾아가서 산중수도(山中修道)하는 뜻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본체로 봐서는 영원상주(永遠常住)의 존재니까 닦는다고 해도 안 되고 닦으려는 마음을 내면 벌써 때 묻히는 것이 됩니다. 깨달은 사람이 깨달았다 해도 안 되는데 더군다나 깨치지도 못한 사람이 이걸 닦는다면 그것은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더 깨치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범부로서 모순(矛盾)된 방법에 의해서 깨치는 길이 묘하게 있기 때문에 귀신도 모르게 지도하는 길이 있는 것을 나중에는 필경 알게 됩니다. 깨친다는 것도 기묘(奇妙)한 일이고 깨쳐 놓고 봐도 참 기묘한 거짓말 같은 사실입니다.

우리의 실상자리(實相), 마음자리를 봐서는 이렇다 저렇다가 다 끊어져서 가르칠 수도 없고 배울 수도 없고 배울 것도 가르칠 것도 없으며 얻을 것도 줄 것도 없지만, 범부로서 학문이니 과학이니 철학이니 유물(唯物)이니 유심(唯心)이니 하고 생각이 미치는 데까지 사상을 만들고 개념을 지어서 미혹(迷惑)되어 있다가 불법에 들어와서 상대세계(相對世界)의 생사법(生死法)을 초월해서 차차 도가 높아지면 마음의 터울이 단계적으로 굳어 올라갑니다. 그래서 1학년 2학년 구별이 있듯이 초지보살(初地菩薩)·이지보살(二地菩薩)하여 처음 깨달아서 부처가 되기까지 크게 나누어도 무려 52위(位)의 계층(階層)이 있는데 그것이 다 무엇에 의지해서 하긴 합니다. 깨달은 본체 자리에서 보면 계급이 있을 수 없고 닦을 것이 없지만 다겁(多劫)으로 오면서 지어 온 업습(業習)을 닦아 없애는 데 따라서 그런 계급이 생기게 되고 그것을 따라 점점 아는 것도 더 많아지고 신통(神通)이 늘어납니다. 이렇게 차츰차츰 닦아가는 과정에 있어서 모두 다 무엇에 의지해서 배우고 닦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얻은 법이 없다고 하신 말씀은 이와 같은 보살인위(菩薩因位)가 없었다는 뜻이 아니고 그것을 꿈속에서 거짓으로 있었던 일이고 실제로 실상으로는 없는 것이란 말씀이신 것입니다. 내가 본래 얻은 것이고 연등부처님 만나 뵙기 전부터 내게 본래 있던 것이므로 그것은 연등불한테 얻은 법이 아니니 그래서 소득(所得)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또 말씀하십니다.

 

原 文 : 須菩提 於意云何 菩薩 莊嚴佛土不 不也 世尊 何以故 莊嚴佛土者 卽非莊嚴 是名莊嚴

 

[解 義] 『수보리야! 그러면 네 생각에 어떠하냐? 보살이 중생의 마음을 거룩하게 교화하여 불토를 장엄하는 것이 아니냐? 어떻게 생각이 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 하오면 보살이 중생의 마음을 청정하게 교화하여 불토를 장엄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이름이 장엄하는 것이지 실제로 하는 장엄은 아니기 때문이옵니다.』하고 수보리존자께서 대답하십니다.

장엄불토(莊嚴佛土)란 것은 아무 생각 없이 무심함으로 해서 무심한 것이 가장 큰 복을 짓는 것을 뜻하니, 복의 근본이 무심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복은 우주를 자유할 수 있는 것을 뜻하는데 그것은 곧 무심입니다. 중생들은 이와 반대로 유심(有心)하기 때문에 범부중생이니, 유심이라는 말은 소유욕이고 점령이고 욕심입니다. 차지하려 하기 때문에 자꾸 없어져 가고 욕심을 부리면 망해 가고 욕심을 덜면 부자가 됩니다. 우리가 지금이라도 욕심만 초월해 보십시오. 먹을 것도 넉넉해집니다. 지금 대한민국이 경제가 곤란하다 해도 서울 생활수준을 보면 지금 불란서 파리나 영국 런던과 같이 하는 이가 많습니다. 물질이 없는 게 아니라 욕심이 많은 사람들이 국가사회를 위해서 일을 잘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농사짓는 사람은 뼈 빠지게 농사를 짓게 되고 장사하는 사람은 이문 적게 먹고 저기 있는 것 여기 갖다 주고 여기 있는 거 저기 갖다 주고 하루 밥 세끼 있으면 그만입니다. 또 대통령은 온 국민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를 잘 살피어 제가끔 뜻에 맞도록 해주어서 모든 분야가 잘 발전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뿐입니다. 욕심을 내서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한국도 장엄불토를 해야 하고 남북통일도 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게 욕심으로 되는 것이냐 하면 무심함으로 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무심이라 해도 작심(作心)으로 하기는 하지마는 무심입니다. 천당도 올라가면 28천(二十八天)이 있는 데 그것도 다 욕심이 적고 복을 많이 심은 정도에 따라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불보살은 무심하다 보니 장엄하고 싶은 마음으로 하지 않고 무심으로 하는 장엄이기 때문에 극락세계(極樂世界)같은 굉장한 장엄을 합니다. 극락세계의 장엄은 뭐라고 말할 수도 없는 장엄입니다. 극락세계를 가보면 다이아몬드 나무가 있고 다이아몬드 잎이 열고 모두 금·은·칠보로서 도로가 장엄되고 팔공덕수(八功德水) 못이 있는데, 바닥에는 금·은·칠보로 된 모래가 깔리고 잔디가 있고 그 물속에 들어서면 키가 작은 사람은 작은 대로, 큰 사람이 들어서면 큰 대로 다 알맞게 물이 되고 백 명이 한 번에 들어가도 키가 작고 큰 것을 따라 모두 다 목욕하기 적당한 높이로 또 물이 찹니다. 발목쯤 닿았으면 하고 생각하는 찰나에 발목쯤으로 물이 내려가고 허리쯤 왔으면 하고 생각하면 곧 허리쯤으로 올라오는 그러한 자유신통한 연못입니다. 도로에 있는 가로수(街路樹)도 서울이나 영국 런던이나 워싱턴 뉴욕 같은 시가를 극락세계에 비하면 변소도 안 될 정도의 장엄이 경전에 쓰여 있습니다.

삼국시대 신라 고려의 문화가 그렇게 발달하고 불교의 예술이 극치(極致)에 이르렀던 것도 타방세계(他方世界)부처님세계의 굉장한 장엄을 경에서 그대로 보고 구상(構想)하고 설계를 하여 절을 짓고 탑을 조성했기 때문입니다. 절을 짓고 불상(佛像)을 조성(造成)하는 경우에도 정신을 일념으로 모아서 무심한 경지에서 했기 때문에 석굴암(石窟庵)같은 위대한 예술품을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금강경 주제(主題)로 되어 있는 운하주(云何住) 운하항복기심(云何降伏其心)에 대해서 「마음을 어디다 두며 마음을 어떻게 먹으며」,「번뇌와 망상을 어떻게 항복받으며」하는 말씀인데, 마음을 어디다 둔다 해도 틀린 말이고 마음을 어떻게 먹는다 해도 틀린 말이고 마음을 가진다 해도 틀린 말입니다. 마음은 마음이지 그걸 두려고 하며, 가지려고 하며, 먹으려고 해서 되겠습니까? 그래서 「응무소주(應無所住)」하라 「아무데도 주하지 말라」 주한다는 생각조차 내지 마라. 아무데도 주하지 않는 그게 본래 주이고 또 본래의 그 자리에 주하라 그런 말입니다. 내 본심자리는 생각을 내면 틀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중생들은 망상이 죽 끓듯이 끊으니까 일체 만상(萬像)에 색신(色身)이니 성향미촉법(聲香味觸法)에 전부 주하고 의지해 가지고 집에 주하고 남편한테 주하고 아들딸한테 의지하여 모두 거기에 주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망상을 다 항복 받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금강경 전체의 대의(大意)입니다.

이 망상을 항복받는 게 불교공부인데 산중(山中)의 절에 있으면 요 근래까지도 그런 실례를 많이 들었습니다. 공부하다가 흔히 노루나 토끼가 와서 도망가지 않고 옆에 와 있습니다. 나중에는 정이 들어 안 가려고 하는 정도입니다. 얼마 있다 다른 절로 가려고 하면 자꾸 따라옵니다. 그러면 사람들한테 붙들릴 거고 그래 돌멩이질을 하고 막 야단을 치고 이러면 또 눈을 끔벅끔벅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올라갑니다. 올라갔다가 자꾸 내려다보다가 그만 또 뛰어 내려옵니다. 그래 그놈 잡아가지고 온갖 설교를 해서 타이르고 「네가 여기 내려가면 잡혀서 죽으니까 너희 동무하고 놀아라」 그래도 잘 가지를 않습니다. 나중에는 할 수 없이 몽둥이로 때려 주고 돌멩이로 엉덩이를 한번 되게 때려 주면 그때는 안 옵니다. 옛말에「불탐이면 야식 금은기」(不貪 夜識金銀氣)라고 하여 탐심이 없으면 그믐밤에 금과 은의 서기가 보인다고 합니다. 그리고 「원해면 조간 미록유」(遠害 朝看?鹿遊)라고 하여 아무 해물지샘(害物之心)이 없으면 아침에 일어나 뜰에 나가도 사슴과 노루가 뜰 앞에서 자고 사람이 나와도 안 달아납니다.

이런 마음 공부하는 것이 보살장엄(菩薩莊嚴)입니다. 국토를 이렇게 장엄하여 악한 짐승도 악한 사람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집니다. 내 마음이 완전히 그렇게 청정해지면 다른 것은 다 모두 내 마음의 그림자니까 따라서 다 청정해집니다. 이렇게 공부를 자꾸 해서 응무소주하는, 주하지 않는 보리(菩提)의 마음을 깨쳐 가지고 견성(見性)해 가지고 항복기심(降伏其心)을 해서 해물지심(害物之心)이 없어지고 춘삼월(春三月)에 눈 녹아 가듯이 온갖 욕심이 사라지고 이 세상이 참말로 있는 것인 줄 알고 허덕대는 마음, 이런 마음이 자꾸 눈 녹듯 얼음 녹듯이 녹아 내려갑니다. 그래서 불성자리만 드러나서 서로 해롭게 할 그런 일이 없으니까 이 세계가 차차 극락세계가 되어 가는 겁니다. 극락세계에도 새가 있고 나무가 있지만 모두가 불보살의 화현(化現)이어서 축생 그대로가 아미타불(阿彌陀佛)이며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보현보살(普賢菩薩)이고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나 보살님들이 불토(佛土)를 장엄한다 하는 것은 아무 생각 없이 하는 것이니 그 마음에 한 점의 티도 없이 청정하므로 그 거룩한 마음의 광명이 장엄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따라서 사바세계에서 법당(法堂)에 단청(丹靑)하고 남대문에 단청하듯이 울긋불긋 오색 칠하는 게 아니고 궁전을 짓고 도로를 닦고 하는 게 아니며 오직 무심만 하면 그게 곧 장엄이고 장엄 안 하는 걸로 장엄하는 것을 장엄이라 이름하여 부를 따름이라는 것입니다.

 

原 文 : 是故 須菩提 諸菩薩摩訶薩 應如是生淸淨心 不應住色 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 生心 應無所住 而生其心

 

[解 義] 부처님께서 결론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수보리야! 모든 보살 마하살들은 뻑뻑이 마땅히 이와같이 청정한 마음을 낼 것이다.』 하셨는데 무심한 것, 곧 청정심이 드러나도록 수도를 하고 그래서 견성(見性)하자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중생들은 전생의 과거업(過去業)이 있어서 처음 견성한 사람으로서는 아무래도 업이 들락거립니다. 그러니 아주 본성(本性)에 깊이 들어서면 모르지만 이제 처음으로 초견성(初見性)쯤 해서는 고운 여자는 한번 더 쳐다보게 되고 행동만 안 하지 그런 것은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또 당부하시느라고 「이렇게 청정심을 내라」고 하신 것이니 이런 것은 선부촉제보살(善付囑諸菩薩) 선호념제보살(善護念諸菩薩), 곧 「모든 보살들을 잘 당부하시고 보호해 주시는 것」이라고 합니다.

「설교할 때도 내가 잘하거니 남모르는 소리를 하거니」 그런 생각이 있으면 불교를 설법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아무 생각 없이 자기 소견대로 틀렸거나 잘 알았거나 얘기한 것이고 또 듣는 사람도 들어서 부처되는 길을 확실하게 바로 알기만 하지 누구한테 들었다 할 필요도 없고 다만 바른길 그대로 바로 알아 가지고 바로 갈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청정심」, 부처님께서 또 말씀하시기를 「불응주색(不應住色)하고 생심(生心)」하라 하셨는데, 나는 여기다 토를 답니다. 보통은 「불응주색생심(不應住色生心)하며 뻑뻑이 색에 주하여 생심(生心)하지 말며」 이렇게 새기는데, 나는 색에 주하지 말고 생심하라. 「마음을 내라」는 뜻을 강조하기 위해 「생심」위에 「하고」토를 달아서 해석합니다. 「네 소유 재산 있거든 내 재산이라 생각하지 말고 있는 사람에게 주지 말고 없는 사람에게 주라」 그 말입니다.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도 같은 이유로 「뻑뻑이 마땅히 주한 바 없이 어디고 마음이 걸린 바 없이 조건 없이 마음을 내어서 보살행을 하라」는 뜻으로 새깁니다. 이것이 보살행(菩薩行)이고 청정한 마음을 내어 쓰는 것입니다. 그러니 청정한 마음자리만 깨달아 가지고 견성했다 하여 가만히 있으면 나한(羅漢)·소승(小乘)이 되어서 거기에 굳어 가지고 중생제도(衆生濟度)하기를 싫어하게 되고 그러면 불과(佛果)를 증득(證得)할 수 없고 아무리 해 봐야 소승나한(小乘羅漢)밖에 안 됩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만일 뻑뻑이 마땅히 색에 주하지 말고 생심하라(不應住色 生心). 또한 성향미촉법에 주하지 말고 생심하라(不應住聲香味觸法 生心). 이렇게 해석하지 않고 「색에 주해서 생심하지 말고」 이렇게 새기는 경우에는 나한들 모양으로 염세주의자(厭世主義자)가 되어 가만히 정적(靜寂)만 지키고 앉아서 침공체적(沈空滯寂)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허공처럼 빈 것, 진공에 가라앉고(沈空), 적적(寂寂)한데 체했다 고요한데 걸렸다(滯寂)는 뜻입니다. 대승불교(大乘佛敎)의 보살행(菩薩行)은 천당 지옥으로 중생을 쫓아다니며 제도(濟度)해 주고 아무 보수(報酬)도 생각 없이 하면 그것은 안 한거나 한가지고 안 한 것도 아니고 한 것도 아니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고 자꾸 정적(靜寂)만 지키려 하고 어디 가서 설법(說法)도 하고 이 일 저 일 돌아다니다 보면 이것 참 손해 아니냐, 망상 아니냐 하면서 나한테 며칠 쉬어도 될 텐데 지독한 업보중생(業報衆生)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지금도 있습니다. 「아 수고한다.」 칭찬이나 하면 좋을 건데 같은 말이면 업보(業報)라 하고 망상이라 욕한다고 싫게 들으면 욕도 아니고 칭찬도 아닌 말을 가지고 그렇게들은 내가 또 잘못 들은 것입니다. 아무데도 머무름 없이 아무 조건 없이 응무소주(應無所住)해서 옳으니 그르니 좋으니 나쁘니 하지 말고 중생을 위해서 보시하고 제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미했다 깨달았다 하는 게 다 거짓말인데 또 거짓말이지만 중생의 현실 세계에는 사실처럼 있는 꿈이니까 그런 줄 알고 설법도 하고 중생제도도 하라. 이렇게 해서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했지만 실로 한 중생도 제도 받은 사람이 없다고 보는 그것이 마음을 항복 받는 법(降伏其心)이라고 하신 것이고 금강경이 전부 보살행 하라는 것입니다.

 

原 文 : 須菩提 譬如有人 身如須彌山王 於意云何 是身爲大不 須菩提言 甚大世尊 何以故 佛說非身 是名大身

 

[解 義] 『수보리야!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의 몸의 크기가 백두산만 하다든지 지구덩이만 하다면 이 사람의 몸이 큰 것이냐, 안 큰 것이냐?』 하고 엉뚱한 말씀을 물으십니다. 여기서 수미산은 지구를 말합니다. 왕은 제일 큰 것을 뜻하니 산왕(山王)이라 함은 왕산(王山)입니다. 가령 한국은 백두산(白頭山)이 왕산이고 세계에서는 히말라야산이 왕산이 될 것입니다. 「왕산만한 몸뚱이를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 몸이 큰 것이냐」하고 물으심에 대해 수보리는 『아주 크옵니다. 왜냐 하오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뜻은 몸 아닌 것을 큰 몸뚱이라 하셨기 때문이옵니다.』하고 여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의문되는 것은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라는 말씀 다음에 수미산만한 몸뚱이 이야기를 말씀하신 논리(論理)의 연결입니다. 앞의 말과 뒤의 말의 뜻이 서로 통하지 않으니 그 까닭은 알고 넘어가야 합니다.

「응무소주(應無所住)해서 이생기심(而生其心)하라. 아무 조건 없이 중생구제해 주고 보살행 하라. 소승 모양으로 적멸만 지키지 말고 중생을 제도해 복을 닦으라. 아무 생각 없이 해야 공덕이 크니라.」 이렇게 말씀하시고도 크다는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 또 기묘(奇妙)한 턱없는 말씀을 하십니다. 「수보리야! 비컨대 어떤 사람의 몸이 저 수미산왕만 하다면 그 몸뚱이가 크냐 안 크냐?」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러니 또 수보리 존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참 굉장히 큰 몸입니다. 세존이시여! 왜냐 하오면 부처님께서 몸뚱이가 아니라고 설명하셨기 때문에 크다고 합니다.」 소나무에 감나무 접을 붙여 놓은 것 같은 말씀이지만 앞에 한 말씀과 앞으로 나오는 말씀과 자세히 보면 엉뚱한 말씀도 아니고 동문서답(東問西答)도 아니고 앞뒤 조리(條理)가 딱 들어맞는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말씀한 내용을 여기서 종결짓는 구절(句節)인데 보통 책 소설 보듯이 「여시아문 보살마하살」하고 읽어 넘어 가서는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런 정도로 하고도 법문 들었다고 참배하고 가기는 갑니다마는 그것은 남의 잔치 구경한 것밖에 안 됩니다.

「응무소주 이생기심」. 나오기 전에부터 지금까지 「큰 것이 큰 게 아니고 있는 게 있는 것이 아니고 없는 게 없는 것이 아니며 중생이 중생이 아니고 32상(三十二相)이 32상 아니라」고 전부 그렇게 나왔습니다. 그래서 제5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에서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 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 諸相非相 卽見如來)「모든 상이 상이 아니다.

현상계가 현상계가 아니다. 이 모든 것이 확실한 존재가 아니라 그지없이 허망한 존재라고 할 수도 없이 덧없는 것들이다.

이 모든 현상이 현상 아닌 줄을 알면 곧 여래를 보리라」고 한 이 말씀을 대표적으로 들어서 「금강경 사구게」(金剛經 四句偈)라 그럽니다. 이미 32상(三十二相)이 32상도 아니고 몸뚱이가 몸뚱이 아니라고 그랬으니 사실 그대로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미산이 아니라 우주덩어리만 하다고 하셨더라도 그것은 없는 것이며 비신(非身)이고 비상(非相)이라는 말입니다. 수미산만 하다고 거기에 걸려서 그러는데 「부처님 32상이 아니고 또 중생이 중생 아니고 현상계가 현상계도 아니고 제상(諸相)이 비상(非相)이다」라는 것을 다시 설명한 것입니다. 중생들은 이런 사람들을 봤다면 「오늘 큰 산만한 사람 봤다」고 모두 밥만 먹으면 만나는 사람마다 얘기하고 야단인데 그러면 벌써 거기에 떨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불자는 신도거나 선남선녀거나 비구 비구니거나 그렇게 큰 걸 봐도 크다고 생각 안 합니다. 그게 다 모두 꿈속이고 그게 실지 있는 게 아니고 환(幻)의 존재여서 물질적으로 있는 것같이 보이지만 현재 파멸(破滅)되는 과정에 있는 비상(非相)으로 봐 버립니다. 「아까 그 사람 굉장히 크네」하고 큰 것 작은 것 분별하면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에 떨어져 거기에 주한 사람이니 번뇌망상에 쌓여서 7전8도(七顚八倒)로 일어섰다 자빠졌다 하게 됩니다.

그래서 수보리 존자께서 한술 더 떠서 「참 큽니다」 이렇게 나온 겁니다. 그것을 속아서 대단히 크다고 한 것 같으면서도 곧 「부처님께서 그 몸뚱이가 몸뚱이가 아니라고 설명하는 걸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엉터리로 크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 대답입니다. 우리가 이론으로는 「응무소주 이생기심」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큰 사람 하나 만났을 때 그 생각 놓치기 쉽습니다. 크다는데 그만 다 잊어버리고 주해 버립니다. 산을 보면 큰 데 넘어가고 꿀을 먹으면 달콤한 맛에 빠져서 다 잊어버립니다. 그것은 견성(見性)한 이도 혹 어쩌다 24시간 제대로 가다가도 속는 시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정말 속지 않도록 도가 아주 높아져서 잠도 없어지고 번뇌망상도 없고 열반(涅槃)도 아니고 생사(生死)도 아닌 신비한 지경에 합치(合致)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논리상(論理上)으로는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란 말이 모순(矛盾)됩니다. 응무소주면 응무소주고 이생기심이면 이생기심이지 어떻게 「내는 게 안 내는 거고 안 내는 게 내는 거」라는 말이 성립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수보리 존자가 크다고 한 말씀은 바람소리나 물소리같이 아무 뜻이 없는 대답입니다. 우리 마음자리는 이것은 크니 작으니 말할 수 없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은 다음에도 많이 나옵니다. 앞에서도 이미 「32상(三十二相)이 32상이 아니므로 그래서

32상이라 했고, 일체중생이 곧 중생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중생이라 한다.」 그랬으니 여기서는 직접 사실적(事實的)인 실례(實例)를 들어가지고 도가 7전8도(七顚八倒)로 움직이지 않는가 하고 시험해 보는 것입니다.

선종(禪宗)에 보면 선지식(善知識)이나 도인들끼리는 별짓을 다 해서 흥청거리고 시를 짓고 노래를 부르고 야단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점잖게 말씀하셔서 어디까지나 범부중생이 알아듣도록 고구정녕(苦口丁寧)으로 입이 닳도록 설명을 하시느라고

이렇게 순수하게 말씀하신 것이고 수보리 존자와 부처님 사이에는 그런 정도라도 척척 넘어갑니다. 도인들끼리 법담(法談)할 때에도 그야말로 석화광음(石火光陰)으로 찰나에 알게 됩니다.

 

 

[說 義]

 

▶배움도 얻음도 없다.

세간에서는 국민학교로부터 대학을 나와서 결혼을 하고 사회에 진출(進出)하는 개체성장(個體成長)이 확실히 있습니다. 그래서 졸업한 학교가 있고 배운 지식이 있고 그 지식을 평생토록 기억하여 이용을 해야 하는 소득(所得)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불법(佛法)을 배우는 것은 불법의 맨 첫자부터, 소승불교(小乘佛敎)에서부터 배울 것도 없고 수도할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는 무소득(無所得)을 목표로 합니다. 제구 일상무상분(一相無相分)에서 말한 소승불교의 수다원(須陀洹)·사다함(斯陀含)·아나함(阿那含)·아라한(阿羅漢)이 다 내가 「아라한」이란 생각이 없고 맨 처음부터 불교의 원리를 배워서 닦을 것도 없고 깨달을

것도 없고 미할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요사이 최면(催眠)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강제최면(强制催眠)하는 정도까지만 돼도

내 정신이 통일되어 있거니 하는 관념(觀念)이 없습니다. 정신통일이 되어 있지만 통일된 줄도 모르고 있고 그런 생각 가질

필요도 없고 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가르치는 사람도 아무것도 배울 것 없고 깨달을 것도 미할 것도 없는 것을 가르치고 배우는 사람도 그렇습니다. 선지식(善知識)이나 보살이나 부처님도 다 그런 사상(思想)입니다. 완전한 대성자(大聖者)가 되기 전에는 감기 몸살이 들면 쌍화탕(雙和湯)이라도 먹어야 하고 병원에 가야겠구나 하지만 쌍화탕 먹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건강하려고 하는 것이 목적이듯이

불법 배우는 것도 육체가 무슨 소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래의 마음자리 그대로가 부처로구나 하는 것을 깨닫자는

것이 목표입니다. 나머지는 다 허튼 소리고 육도만행(六度萬行)을 해라 하는 것도 부득이 해서 다른 종교에서처럼 천당(天堂)에 가서 늘 편안하게 살려고 하나님에게 어기지 않고 늘 복종(服從)하는 것도 아니며 어떤 지도자의 부하(部下)가 되기 위해서 하는 것도 아니고 모르던 진리를 깨달으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제 마음자리 그대로가 곧 진리이니 이 자리를 깨달아야 하겠다는 것을 확인할 때 비로소 불교 믿는 냄새도 나고 불교 믿는 신도이며 참다운 신행(信行)이고 그렇습니다.

금강경의 원리를 들어서 배운 그때부터, 공(空)의 도리(道理)를 증득(證得)해 놓은 그때부터 이런 경계가 나타납니다. 앞으로 금강경을 얼마를 더 배우더라도 우리가 배운 것은 남길 것 없는 것을 배우니까 남겨 놓을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남길 것 없는 그 자리가 빨리 증득되지 않으니 이젠 듣는 게 주장(主張)이지만 쓸데없는 것 자꾸 듣는 것이고 간직할 것 하나도 없고 지식이라곤 아무것도 없습니다. 견성(見性)해서 성불(成佛)한 뒤에만 그런 것이 아니고 견성성불(見性成佛)하기 전에도

아무것도 소득(所得)이 없는 것을 배우고 법(法)을 줄 것도 없고 애초에 주고받고 얻어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수보리 존자께서 실로 얻은바 법이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피장부아장부(彼丈夫我丈夫)

피장부아장부(彼丈夫我丈夫), 너도 대장부고 나도 대장부니 피차 똑 같은 부처자리인데 어쩌다 같은 사람끼리 한 사람은 곡차(穀茶) 잔이나 먹어서 비틀거리는 것 붙들어 주는 턱입니다. 술이 취해서 부처와 중생이 똑같은 자리, 똑똑하게 아는 그 바탕이 흐뭇해진 것뿐입니다. 학문이다 지식이다 과학이다 종교다 하고 따지고 배우고 연구하며 내가 어떻게 하든지 남보다 잘 살아야겠다는 생존경쟁심으로 머리를 짜내고 잠을 안자고 온갖 꾀를 내어 별별 짓을 다 하지만 이런 것은 다 그릇된 착각(錯覺)이고 지식의 장애라는 뜻으로 번뇌장(煩惱障)·소지장(所知障)이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일체(一切) 아는 것을 다 포기(抛棄)해서 지식을 초월했으므로 산이 높다는 생각 없이 산을 보고 쇠가 돌이나 나무보다 무겁다는 관념(觀念)이 없이 일체의 지식, 망상을 다 초월해 버리고 나면 시간이니 공간이니 하는 것을 다 초월한 아무것도 아닌 존재, 그러면서 그것이 우주 전체(宇宙全體)인 자기 본래의 마음자리를 깨치고 보면 먼 데 것도 아니고 가까운 데 것도 아니고 전체가 환히 다 드러난 것입니다. 요새 물리학(物理學)·화학(化學)·천문학(天文學)등의 과학(科學)이 환상(幻想)이거나 과거(過去)에만 있고 지금은 없는 것이거나 인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서 눈으로 볼 수 없고 증명(證明)할 수 없는 학문이 아니듯이, 우리 마음자리를 깨친 경계도

그와 같이 사무쳐 뚜렷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부처님은 과거사(過去事)를 다 아신다고 신통(神通)이라고 하지만 성불(成佛)하고 보면 사실은 본래 그런 것뿐이고 모든 착각을 가지고 있지 않을 뿐이어서 종소리가 깡깡이다 땡땡이다 하고 듣는 그런 업을 해탈(解脫)했기 때문에 전에는 과거를 과거인 줄 알고 봤던 것인데 이제 보니 항상 목전지사(目前之事)입니다. 비유하면 어린 아이들에게 하나에 둘을 더하면 몇 개냐고 물으면 한, 둘 꼽아 보고서야 셋인 줄 알고 어른들도 좀 복잡한 계산은 수학적인 지식을 빌어서 알게 되지만 부처님은 항상 나타나 있으니까 연구하고 셈을 해서 아시는 것이 아닙니다. 일체를 분별하지 않고 즉각으로 아는 무분별지(無分別智)입니다.

그러므로 과거 일을 알되 더 잘 알고 종소리를 듣되 과거 중생인 때 듣던 땡땡, 강강으로 들을 줄도 아시고 또 일체 중생이

그런 식으로 듣고 있는 줄도 아십니다. 그러니까 당신도 강강으로 들으면 그렇게 들리기도 하고 그리고 강강 땡땡을 초월해서 종소리의 실상(實相)을 들으실 줄 아시는 것이 부처님께서 우리보다 우월(優越)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꿈 가운데 들어가서도 자유하고 꼭 꿈 같이 꿈 사람하고 중생의 살림살이를 차리시기도 합니다. 예컨데 석가여래께서 범부중생이 볼 때엔 밥 먹고

오줌 누고 대변 보고 저녁때면 잠자고 다 합니다. 그렇지만 도가 높은 보살님들이 볼 때는 부처님은 음식을 잡수신 일 없고 육신으로 부처님을 보는 것이 아니므로 부처님께서 오신다 가신다 주무신다 그런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불보살님의 경지에서는 시간이니 공간이니 하는 것이 한낱 환상(幻想)일 따름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과거사(過去事)를 알고 부처님께서 신통(神通)하다고 하지만 성불(成佛)하고 보면 신통이 아닙니다. 우리 중생에게는 현실 세계가 실재(實在)해 있는 것 같고 육도세계(六道世界)에 윤회(輪廻)하는 것이 사실인 듯 하지만 실상은 우리가 꿈속에서 천당(天堂)갔다, 지옥(地獄) 갔다, 돌아다니는 것이고 참말로 간 것이 아닙니다. 최면술(催眠術)에 걸린 사람이 몸뚱이는 가만히 앉아서 동경 갔다 왔다 하고 꿈을 꿀 때에도 몸뚱이는 가만히 놓아두고 비행기를 타거나 날개를 붙여서 돌아다니지만 전부 거짓말이고 꿈을 깨고 나면 다 허사(虛事)입니다. 조신대사(調信大師)가 잠깐 동안의 꿈속에서 팔십년을 살았듯이 과거(過去)니 미래(未來)니 하는 것도 사실로 있는 과거·미래가

아니라 지금의 현재입니다.

불이 꺼져도 눈으로 깜깜하게 어두운 것을 보고 불이 켜져도 환하게 밝은 광명을 보는 것이니 어두운 때나 밝은 때나 보는 눈은 변동이 없고, 이 마음자리는 볼 때나 안 볼 때나 변하지 않습니다. 중생들은 미래 것은 모르고 과거의 기억(記憶)은 희미해져서 망각(忘却)해야 되는 것은 번뇌망상(煩惱妄想)으로 경계를 치고 그 틈바구니에 끼여 있기 때문에 망상 그것만이 나인 줄 알고 깨끗하고 자유자재(自由自在)한 본체(本體)가 있다고 여간 설명해 줘 봐도 좀처럼 인정(認定)할 생각을 내지도 않습니다. 그렇지만 망상이 어떤 자체가 있어서 능동적(能動的)으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그러는 것이고 마음의 본체가

그러는 것입니다. 마치 파도(波濤)와 물이 따로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물의 움직임이 파도고 파도 자체가 물이듯이 실상 망상도 마음을 떠나서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마음이 착각(錯覺)을 한 것이 망상일 뿐 마음을 다 정리해 놓고 보아도

그전 마음 그대로입니다. 산은 높은 그대로 있고 물도 깊은 그대로이며 성불(成佛)을 해도 항상 그대로입니다.

가령 우리가 중생살이 꿈속·생사대몽(生死大夢)·천당(天堂)·지옥(地獄)으로 돌아 다녔지만 그것이 참말로 돌아다닌 것이 아닙니다. 마치 최면술에 걸린 아이가 그 몸뚱이는 가만히 두고 꿈속에서 모양으로 비행기를 탔거나 날개를 붙여 가지고 동경을 갔다 왔다 하지만 그리고 본인도 그런 줄 알지만 꿈을 깨보면 그것이 전부 거짓말이고 전혀 허사이듯이 우리의 천당·지옥의 중생놀음 이것도 역시 최면술에 걸려 가지고 왔다 갔다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조신대사(調信大師)가 눈 뻔히 뜨고 80년을 꿈 가운데 있었듯이 중생의 생멸심으로 과거니 미래니 하지만 과거사(過去事)라고 하는 것이 실제의 과거가 아니라 알고

보면 곧 현재고 미래도 그런 것입니다.

억만년 전의 과거가 지금이고 몇 만겁을 지낸 미래도 역시 현재입니다(?萬古而長今 歷千劫而不古). 그러니까 우리가 듣기에는 타심통(他心通)이니 숙명통(宿命通)이니 하지만 그게 타심통도 아니고 숙명통도 아니고 오직 항상 눈앞에 있는 목전지사(目前之事)입니다. 그러면서 분별(分別)이 아니고 망상(妄想)이 아닙니다. 흔히들 체(體)니 용(用)이니 하는 개념(槪念) 때문에 잘못 생각하기 쉬운데 체와 용이 둘이 아닙니다. 우리 눈은 아까 불이 꺼져도 어두운 것을 보고 있고 불이 켜져도 밝아진 것을 보고 있으니 어두운 때나 밝은 때나 보는 눈은 변동이 없고 항상 상주(常住)하듯이 볼 때나 안 볼 때나 이 마음자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본래가 혼란도 아닌 가운데 혼란을 일으켜 가지고 혼란이지만 그것도 본체(本體)인 내가 그러는 것이지 망상 자체가

따로 있어서 독자적(獨自的)으로 그러지는 못합니다. 마치 파도와 물이 본래부터 그 본체가 다른 것이 아니라 물이 움직이는 것이 파도고 물과 파도가 둘이 아닌데 우리가 착각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착각을 떼어 버리고 마음을

다 정리해 놓고 보면 그때도 산은 높은 그대로 있고 물은 깊은 그대로 있어서 성불을 해 놓은 뒤에도 피장부아장부(彼丈夫我丈夫)의 본래 면목 알 줄 아는 성품은 그대로입니다.

 

▶체와 용은 둘이 아니다(體用不二)

그러므로 혜(慧)는 일체 생각을 내지도 않고 작용(作用)을 내지 못하는 자리지만 용(用)을 일으키면 온갖 것이 중생과 같을 수 있다는 것이 체용(體用)의 개념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역시 금강경 말씀하시기 전 법공(法空)을 말씀한 때는 그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소위 우리 자성을 항상 참되고 불변한다고 해서 진여(眞如)라고 하는데, 이 진여가 허공처럼 영원불변하는 진여도 있고 또 현상계(現象界)의 인연을 따라서 용을 일으키는 진여도 있어서 대승시교(大乘始敎)에 들어오면 두 가지로 말합니다만 그런데 지금 금강경 설명(說明)하실 때만 해도 그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금강경의 경지(境地)는 관조반야(觀照般若)·실상반야(實相般若)가 둘인 듯해도 실상은 하나이어서 관조반야가 내내 실상반야고 실상반야가 그대로 관조반야다. 물이 곧 파도고 파도가 곧 물이다. 체니 용이니 가리려고 하면 이미 불교가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는 게 금강경의 특색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무분별지(無分別智)로 분별없이 아시고 과거사(過去事)도 미래사(未來事)도 분별없이 아시고 중생을 제도하시는 것도 분별없이 제도하십니다. 그것은 왜 그런가 하면 견성(見性)하는 그날부터 종일설이미진설(終日說而未盡說)로 하루 종일 말을 해도 말한 것이 아니다. 견성을 하고 나면 무슨 색안경을 끼고 어떤 조건으로 무엇을 하지 않고 다만 무심한 마음으로 무심중에서 말을 하고 듣고 하므로 마치 바람소리와 물소리와 같습니다. 그래서 둘이다 셋이다 하는 것도 앞에 나타나니까 무심히 알지 우리 모양으로 어떤 선입주견(先入主見)을 가지고 아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거울에 물건이 비치는 것과 같은데 가만히 그림만 비치는게 아니라 일체 동작을 우리와 같이 하는 것은 움직임이 곧 움직임이 아닌 때문입니다. 꿈속에서 움직였다는 것이 꿈 밖에 가면 사실 아무것도 아닌 전혀 거짓말이듯이 사실로 가도 간 것이 아니고 와도 온 것이 아니고 가도 오도 안했다고 해도 가도 오도 안 한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아까 그 최면술에 걸린 애가 동경을 왔다 갔다 했지만 안 갔다 해도 말이 안 되고 안 간 걸로 간 거고 간걸로 안 간 거와 같이 부처님의 지경(地境)은 이런 부사의경계(不思議境界) 이어서 체니 용이니를 가지고 비판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반야경, 금강경 전에는 체와 용을 나누어서 일체를 망상이라 하고 심지어는 부처님께서 중생을 제도하는 것도 망상이라 봅니다. 그러나 대승종교(大乘宗敎)인 법화경(法華經) 열반경(涅槃經) 화엄경(華嚴經)에 들어가면 체용이 둘이 아닌 수즉파 파즉수(水卽波波卽水)로 물이 곧 물결이고 물결이 곧 물인 도리로 설명합니다. 그래서 모두가 무심하기 때문에 무심 자체(無心自體)의 본 마음이 아무 생각이 없어서 미한 것도 아니고 깨친 것도 아닌 한 생각도 없는 그 자리에서 49년간 설법도 하고 또 인도에만 나타나셨다 하지만 천백억 화신을 나타내시어 색구경천(色究竟天)에 노사나불(盧舍那佛)도 석가여래(釋迦如來)의 화신(化身)이고 그럽니다. 그렇지만 석가여래께서는 한 생각 까딱해 보신 일이 없습니다. 생각으로 하는 것이 아닌 무분별(無分別) 그 자체가 그대로 아무 생각 없이 설법을 하고 제도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녹음기나 라디오와 한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종일 일해도 괴로운 줄 모르고 피로하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 모양 체용(體用)이 다르다면 하는 일이 힘들고 괴로움이 따를 겁니다. 사실은 중생들도 체용(體用)이 다르지 않고 하는 대로 생각하는 대로 되는 셈입니다. 중생들의 마음의 본 바탕자리는 무심(無心)이니까 무심 자체(自體)가 천당업(天堂業)을 지녀가지고 천당생각을 내면 천당이 나타나고 부처님 역시 천당 생각하면 천당이 나타납니다. 다만 중생은 그것에 속고 부처님은 속지 않으실 뿐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무심경계(無心境界)에서는 체용(體用)이 둘이 아니므로 생각이 움직여도 무심히 움직인 것이어서 움직인 게 아닙니다. 마치 물이 일어나고 꺼지고 해도 물의 본성질에는 아무 변동이 없듯이 이 무심히 움직인다고 하는 것은 체용이 둘이 아닌 구경(究竟)의 자리입니다. 이 자리는 부처님뿐 아니라 중생들이 제가 몰라서 그렇지 중생들 자신도 본래는 다 그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자리는 모든 개념이 다 떨어진 근본 자체이고 그야말로 나 하나뿐이므로 대 자유한 것이며, 이 자리는 생각해 볼 수도 없는 부사의경계(不思議境界)인데 체용(體用)을 가르는 따위는 용납(容納)될 수 없습니다. 부처님의 십대제자(十代弟子)를 비롯한 큰 비구승들이 유마거사(維摩居士)에게 가서 모두 한 방망이씩 맞는 것도 대승불교(大乘佛敎)의 체용불이(體用不二)의 도리를 보이는 대문(大門)입니다. 아란존자(阿難尊者)께서 참기름을 얻으러 갔다가 마침 유마거사의 집으로 가게 됐는데 유마거사는 「그것을 무엇하려고 하는가.」하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등에 종기가 나셔서 기름을 발라 드리려고 합니다.」라고 그랬습니다. 부처님의 몸은 해탈공신(解脫空身)이고 환신(幻身)이라서 부스럼같이 보이지만 사실 부수럼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본래 꿈이니까 시방제불(十方諸佛)이 꿈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했음을 보이시기 위해 중생과 똑같이 그러하신 것입니다. 본래 환(幻)의 존재고 망(妄)의 존재인데 우리는 육신을 참말로 있는 물질적 과학적인 실재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온갖 나쁜 업(業)의 버릇을 정리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했다는 소리가 본래 면목을 증득했다는 말인 동시에 환(幻)을 증득했다, 삼계가 환임을 체득(體得)했다는 뜻으로 증득제환(證得諸幻)이라 그럽니다.

이렇게 완전한 환이기 때문에 무슨 짓을 해도 거리낄 게 없으며 돼도 안 된 것이고 안 된 것이 된 거고 되고 안 된 것도 없고, 그러면서 그것이 말과 이론이 다 끊어진 자리가 무심체(無心體)이고 불보살의 마음자리입니다. 부처님께서 어떻다 하지만 사실 우리도 그 무심체가 움직이는 대로 지옥으로도 되고 천당도 나타나고 사생육도(四生六道)가 다 나타나고 그러면서 거기 딴 개념을 하나 더 가진 것 그게 중생의 허물입니다. 주관·객관이 따로 있고 육체가 나 인줄 알고 개나 소나 사람이나 중생 노릇 밖에 못하는 허물, 그것은 사실 그런게 아닌데 잘못 안 허물입니다. 돌이 돌도 되고 쇠도 되고 사람도 되고 세계도 되고 공간도 되고, 허공도 온갖 게 다 되는 데 이 돌은 부셔 봐도 돌가루일 뿐 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그렇게 되는 것뿐입니다. 꿈속에 있는 바윗돌이 무거워서 들지 못할 것이라는 관념 때문에 못 드는 것입니다.

중생들이 이렇게 망념(妄念), 착각(錯覺) 때문에 모든 것에 걸려 있고 마음대로 안 되지만 사실은 마음대로 안 되는 것도 내가 마음대로 안 되도록 해 놓은 것이고 사물에 얽혀 있는 것도 부자유한 것도 내가 부자유하게 만들어 놓은 것이므로 결국은 마음대로 되고 있는 셈 입니다. 그러니 한쪽 신통은 얻은 셈이 됩니다. 이렇게 한 쪽 신통만 고집하다 도리어 구속당하는 중생의 허물을 벗어나는 비밀방법은 오직 한 길 무심(無心)뿐이니 인간은 모든 생각 비울 것 밖에는 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중생들은 그 전체를 쓰지 못하고 한쪽 신통만을 고집해서 도리어 구속을 당하는 것입니다.

 

▶육조스님과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主而生其心)

육조혜능(六祖慧能)스님이 나무를 팔고 돌아서다가 금강경의 사구게(四句偈)의 설명하는 것을 듣고 대번에 깨치셨는데, 그 구절이 바로 이 장엄정토분(莊嚴淨土分)의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입니다. 육조스님은 팔십 노모(老母)를 혼자 모시고 산에서 나무를 해다 시장에 팔아서 어머니를 효성으로 봉양(奉養)하고 지내는 일자무식(一字無識)의 가난한 소년이었습니다. 어느 날 여관방에 나무를 팔아 가지고 돌아가려고 지나치다가 어떤 스님이 읽는 금강경 글귀를 듣게 됐습니다. 세상이야기가 아니고 인생일대사(人生一大事)에 대한 이야기, 생사(生死)를 초월하는 인생문제(人生問題)의 이야기 같아서 귀를 기울이니 결론을 짓는 대문(大門)같은 이야기가 나오는데 바로 이게 「응무소주하야 이생기심하라」는 대문이었습니다. 육조 스님은 이 글을 여기서 한 번 듣고 대번에 깨치셨기 때문에 이 글귀는 더욱 유명해졌습니다. 마음을 어디다 두지 말고 그 마음을 내라. 보시(布施)도 하고 지계(持戒)도 하고 육도만행(六度萬行)을 하라는 것입니다. 소승 모양으로 가만히 정적(靜寂)만 지키고 앉았으면 역시 정적에 주하는 것이 되고 그렇다고 해서 생사에 주해도 안 되고 보살은 열반에도 주하지 않고 생사에도 주하지 않는 것을 응무소주(應無所主)라 한 것입니다.

육조스님은 여기서 이 생각도 저 생각도 아닌 궁극(窮極)을 확실히 깨달아서, 알았다는 생각도 요달했다는 생각도 없이 오로지 말하는 이 마음자리만 환하게 남아 있는데, 그러면서 일체 번뇌 생사나 열반에나 아무데도 주하지 않고 중생을 위해 마음을 내는 보리심(菩提心)을 사무쳐 깨달으셨습니다. 육조스님은 무식한 나무꾼으로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主 而生其心)하라는 소리를 듣고 곧 견성(見性)하셨는데 그리고는 오조(五祖)스님을 찾아가려 했으나 늙은 어머님을 내 버리고 갈 수도 없고 하여 당황하니까 경 읽던 스님이 금을 여럿 냥(兩)을 주면서 어머니를 그동안 봉양(奉養)하도록 하고 노자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팔십 노모(老母)를 자기 친구한테 부탁하고, 「나는 천생 지금부터 오조 홍인(弘忍) 대사를 찾아뵙고 내가 바로 깨친 것인지 아닌지를 물어봐서 인가(印可)를 얻어와야 하겠고, 그리고 내가 모자라는 게 있으니 더 배워야 하겠네. 나의 인생이 나무해서 어머니나 모시다 돌아가신 뒤에 나도 죽고 하는 줄 알았더니 희한한 도를 한 번 듣고 내가 깨침을 얻어서 꼭 스승을 찾아가야 하겠네.」 하고 간청을 해서 승낙을 받고 떠났습니다. 나중에 홍인대사한테 참배하고서 지내는 동안 여러 가지 얘기가 있습니다만 오조 스님께서 마지막 날에 말씀하시기를 「앞으로 네가 많은 중생을 제도할 사람이니 금강경을 한 번 더 배우라」 하시면서 저녁에 데리고 앉아서 일러 주셨는데 여기서 「응무소주 이생기심」하라 하는 소리에 또 한 번 더욱 깨달았습니다. 두 번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오조께 다음과 같은 오도의 게송(悟道頌)을 지어 바쳤습니다. 「어찌 자기 성품이 본래부터 청정함을 알았으며, 어찌 자기 마음이 본래 생멸하지 않는 자리임을 알았으며, 어찌 자기 성품이 본래 동요하지 않을 줄 알았으며 어찌 자기 성품이 만가지 법을 내는 줄을 알았으리(何期自性 本自淸淨 何期自性 本不生滅 何期自性 本自具足 何期自性 本無動搖 何期自性 能生萬法)」이라 했습니다.

현상계니 형이상학(形而上學)이니 형이하학(形而下學)이니 하는 온갖 법이 다 마음 가운데 일이고 마음의 장난입니다. 대자연의 원리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하나님 조물주가 한 것도 아니며 오직 자기 마음에 만법이 구족해 있다는 것을 깨친 게송(偈頌)입니다. 이렇게 해서 육조스님은 부처님 때부터 전해 내려온 가사와 바리때와 금강경을 받아 가지고 오조스님 지시하신 대로 남쪽으로 피해 가셨습니다. 그때 오조스님 문하(門下)에는 칠백 대중이 있었는데 대중 가운데 신수(神秀)대사는 제일 학덕(學德)이 높아서 그이가 오조홍인대사의 의발(衣鉢)을 전해 받고 신수 문하의 대중들이 그걸로 해서 출세하려고 생각하는데 뜻밖에 저 남방 광동(廣東)에서 온 아주 시골뜨기 무식꾼처럼 생긴 자가 바리때와 부처님 가사를 가져갔다고 하니까 그럴 수 없다는 중생심으로 잡으러 가고 한 소설 같은 이야기가 많습니다. 이렇게 15년 동안이나 피해 다니다가 광주(廣州) 법성사(法性寺)에 우연히 지나치게 되었는데 마침 그 절에 큰 재가 들어서 울긋불긋한 깃발들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는 것을 보고 공부하는 젊은 학인(學人)들이 한 열 댓명이 토론(討論)을 하게 됐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저 기가 흔드는 것이냐? 바람이 흔드는 것이냐?」하고 문제를 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은「기가 흔든다.」하고 또 하나는 「바람이 흔든다.」고 말하여 두 편으로 갈라져서 싸움이 벌어지게 됐습니다. 「바람은 통과한 것 뿐이고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니까 또 반대편에서는 「기는 만년을 꼽아 봐도 바람 안 불면 가만히 서 있는데 바람이 기를 흔들지 어찌 기가 혼자 흔들 수 있느냐?」 이렇게 한참 시비가 벌어져 판단이 나지 않고 있는 판에 혜능(惠能) 스님이 마침 옆에 앉아 있다가「그것은 기가 흔든 것도 아니고 바람이 흔든 것도 아니며 오직 그대들 마음이 흔듭니다.」 그랬습니다. 기도 마음이요 바람도 마음이니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학인들이 혜능행자(惠能行者)와 몇 마디 해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닌 것 같아서 그곳 주지스님에게 말했습니다.

그때 주지 인종 화상(印宗和尙)이 그 말을 듣고 생각하기를 「육신보살(肉身菩薩)이 남방에 한 번 출현하실 거라고 칠백년 전부터 예언(豫言)이 있었고, 홍인대사의 의발(衣鉢)을 전해 받은 부처님 법을 다 깨달은 이가 남방으로 나왔다고 하단데 아마도 이분인지 무르겠다.」했습니다. 그때까지 혜능 행자는 스님이 되지 못한 채 스님 견습생(見習生)인 행자였었는데 몇 마디 문답을 통해 높은 경지의 법을 통한 사람임을 안 인종 법사는 「오조스님의 의발(衣鉢)이 남방으로 왔다는 말이 있는데 필시 행자가 아니십니까?」하고 열반경법문(涅槃經法文)을 청하여 들었고, 또 혜능행자의 머리를 깎아 주고 범부가 처음 들어와 계를 받듯이 10계를 받고 250계를 낱낱이 받았습니다. 밥 먹는 것, 걸음 걷는 것, 앉는 방법, 문 출입하는 것, 팔만가지 세행(八萬細行)과 위의(威儀)를 다 받았습니다.

이때부터 육조대사는 38년간 정법(正法)을 크게 밝히셨는데 그 밑에 법을 이은 자가 43인이나 되고 도를 깨달아 견성한 이가 천 수백이나 되기에 이르렀고, 이들이 중국의 사백여주(四百餘州)에 흩어져 크게 교화를 일으켰던 것입니다. 그래서 육조대사 이래 금강경은 더욱 선종의 소의경전으로 되었고,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主 而生其心)의 구절(句節)은 달마 선종(達摩禪宗)과 깊은 관계를 갖게 되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일을 하라.」 이것이 보살행(菩薩行)이고 그것이 대승행(大乘行)입니다.

 

▶수월, 혜월 스님의 무심도행

부산 혜월노장(慧月老丈)님은 견성한 스님입니다. 한번은 절에서 산꼭대기 절 근방에 논을 몇 마지기 일구어 놓고 농사를 지었는데 산돼지가 벼를 전부 뜯어 먹어도 놓아두므로 한 수좌가 노장님 보고 『저 산돼지 좀 지키십시오.』『그러지.』이렇게 대답하고는 옆에 가만히 서서 돼지가 오면 돼지 잘 먹으라고 숨도 크게 안 쉬고 있습니다. 나중에는 노장님이 왔다 갔다 해도 돼지가 도망을 가지 않습니다. 스님들이 와서 『노스님! 돈을 얼마나 들여 해놓은 농사인데 돼지가 다 먹으면 어쩌라고 그럽니까?』『우리는 이 벼가 아니라도 먹을 게 있지 않은가. 돼지란 놈은 농사를 짓나 장사를 하나 천생 좀 먹어야 할 게 아니냐?』 그런 식으로 나옵니다. 또 마당에 벼를 널어놓고 새가 오면 그것 좀 쫓아 달라고 하면 『그리하지.』하고 서 있는데 노장님 앞으로 새가 몰려와 주워 먹고 있습니다. 그거 먹으면 안 된다고 손을 내저어 쫓으면 저쪽으로 가서 주워 먹고 그리 가면 또 이쪽으로 오고 새가 그 노장님을 전혀 겁내지 않습니다. 사람이 살생할 마음으로 해물지심(害物之心)이 없어지면 그렇게 됩니다. 남을 해칠 마음이 없어지면 온갖 것이 나에게 따르는 법입니다. 또 그 노장님이 있던 어느 절위에 한참 올라가면 암자가 있는데 가는 길에 바위 모퉁이를 지나야만 법당으로 올라갑니다. 그런데 혹 바위 모퉁이에 시퍼렇게 생긴 살모사 한 마리가 웅크리고 앉아 있다가 부처님께 올리는 마지를 들고 아이들이 올라가면 머리를 딱 쳐들고 짝짝 소리를 내고 씩씩거리며 혀를 내두르고 있어서 지나갈 수가 없게 되면 아이들이 『노스님 저 나쁜 독사 놈 좀 쫒아 주십시오.』그럽니다. 『그리하지, 나쁘기는 너희가 나쁘지 독사가 나빠.』하고 이 노장님이 가서 독사를 쓰다듬어 주면서 『너를 나쁘단다. 저희가 나쁜 줄 모르고 그러니 참 뭐가 나쁜지 모르겠다.』이래 가면서 독사 머리를 들고 있으면 이놈이 죽은 모양으로 흔들지도 않고 축 늘어져서 가만히 있습니다. 저쪽으로 가만히 놓으면 그 쪽에 가만히 도사리고 앉아 있습니다. 그렇게 해도 평생을 앓지도 않고 솔방울 같은 거나 따 먹고 빗자루 만들어 가지고 가난한 집에 나누어 주고 그런 게 일입니다. 평생을 그렇게 지냈는데 일화(逸話)가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중국에 누구누구 일본에 어떤 선사라 하지만 우리나라에 참 희한한 얘기가 많습니다. 한 번은 그때 돈으로 25원을 들여서 산골짜기를 돌, 나무로 막아 놓고 그 위에 흙을 져다 부어 놓고는 팥을 갈았는데 가을에 팥을 타작해 보니까 반 말 닷 되가 나왔습니다. 옛날 돈으로 25원이면 팥을 여러 섬 살 때입니다. 수좌들이 모두들 한 마디씩 합니다. 「아 노스님! 돈 25원을 들여 가지고 고생만 하시고 겨우 이것뿐이니 이거 밑지는 장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멍텅구리 아니냐? 돈 25원은 이 세상에 어디에 그대로 있어. 팥만 반말 공짜로 생겼지.」 일평생 사는 게 그런 식으로 삽니다.

저 북간도에 가서 돌아가신 수월(水月)스님이라는 도인(道人)이 있었는데, 내가 젊어서 평생 모시고 도를 배우다 같이 죽으려고 내가 그때 개운사강원(開運寺講院)에 있다가 여름방학을 이용해서 한 번 갔는데 그 분은 평생 40년 동안 그곳에서만 계십니다. 그 스님이 누구에게나 「나 한테 농사지은 양식이 있으니까 탁발(托鉢)하지 말고 이거 먹고 공부하라」고 늘 이랬는데, 어찌된 일인지 나한테는 나가라고만 하셔서 아마 일부러 시험해 보는 게 아닌가 하고 별 짓을 다 했는데도 나에게는 기어코 나가라고만 하시는 겁니다. 가만히 보니까 진짜로 나가라는 것 같아서 나오기로 작정한 뒤에 동량이나 한 댓새 해서 양식이나 좀 보태드리고 떠나야겠다고 동량을 나섰습니다. 그곳에서 조금만 더 가면 흑룡강(黑龍江)이 나오고 한국 독립군들의 근거지인데 일본 토벌대들이 비행기를 가지고 가서 만주사람, 한국사람 무수히 죽인 바로 그 뒤에서 무서운 개를 많이 기르고 그럽니다. 여러 사람들에게「수월스님을 어떻게 아느냐?」 이러니까 나이 많은 노장님 한 사람이 동량이나 해 먹고 사는 분으로 알지, 별사람으로 안 본다는 겁니다. 모두들 수월 노장을 이렇게 모른다고 하기에 내가 우리 고국(故國)에서는 굉장한 도인으로 안다고 수월 스님에 대한 얘기를 해 주니까 그때에야 얘기를 듣고 보니 정말 도인인가 보다고 하면서 이 얘기를 합니다.

만주 개는 셰퍼드보다 더 무섭습니다. 사람을 잡아먹을 정도이고 키도 셰퍼드보다 더 큰데 그 개한테 내가 혼이 난 적이 있습니다. 수백리 먼 길을 가게 되서 길을 묻고 싶어도 개가 나올까봐 일부러 다른 곳으로 피해서 산을 넘어 다니고 그럽니다. 그 곳에 한국 사람이 한 7백호 살고 중국 사람이 한 3백호 사는데 수월노장님의 모습이 참 기이하다는 겁니다. 옷도 다 떨어져서 빨간 것·푸른 것·흰 것 모두 누덕누덕 기어입고 짚신도 상주(喪主)들 신 모양으로 불룩해 가지고 머리에 쓴 것도 이상스럽게 걸레인지 모자인지 모를 정도로 이런 걸 쓰고 오는 걸 보면 그야말로 죽은 개도 기겁을 해 짖게 생겼는데도 그렇게 사나운 개들이 그 노장님 보고는 가만히 엎드려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수월 스님 보고는 무서운 개가 짖지 않는다 하는 소문이 있다는 겁니다.

이와 같이 탐진치(貪嗔痴)의 삼독(三毒)이 뿌리째 딱 떨어지면 호랑이와 함께 있을 수가 있고, 토끼나 노루가 그 사람 앉아 있는 곳에 뛰어 들어오고 그러는데 그렇게까지 없어져야 하는 겁니다. 그때 나는 나를 보고 자꾸 짖어대는 개를 보고 속으로 참 부끄럽고 고개를 못 들었습니다. 명색이 장삼 입고 수도하는 중이라면서 개가 짖도록 되어 놨으니 이게 말이 됩니까? 그 해물지심(害物之心)이 남아 있어서 그럽니다. 지금도 우리가 정화(淨化)한다고 이러지만 교단종풍(敎團宗風)을 바로 잡아서 앞으로 이제 무수한 도인이 나오도록 하느라고 전체를 위해 하는 짓이지마는 한쪽으로는 많은 사람이 싫어하는 짓을 기어코 해 놨으니 남한테는 나쁜 과보(果報)도 생기기도 합니다. 그런 시기심(猜忌心)이 있고 해물지심이 있으면 개가 짖습니다. 가령 사냥꾼이 아무리 목욕을 깨끗이 하고 몸에 향수(香水)를 바르고 새 옷을 입고 다녀도 개가 틀림없이 그 사람만 오면 문둥이 오는 것처럼 짖어 댑니다.

 

▶견성한 뒤에 보림 수행

도가 높아지면 죽을 때 몸뚱이를 옷 벗듯 벗고 갑니다. 실은 죽는 것도 아니지만 육체가 죽는다고 보고 지게를 지고 가다 지게를 세워 놓듯이 합니다. 그렇게 놓고도 어머니 뱃속에 들어 갈 때는 미(迷)해서 망상(妄想)이 일어나고 하는 자세한 이야기는 여러 가지 있지만 탁한 마음, 곧 색정(色情)이 일어납니다. 금생의 자기 몸뚱이는 옷 벗듯이 했지만 어머니 뱃속에 들어갈 때 깜박 미해서 피로 엉켜서 있습니다. 그런데 도가 더 높은 사람은 뱃속에 들어갈 때는 미하지 않고 자기 공부 그대로 하고 있는데 그렇게 열달 동안 가만히 하는 이도 있고 아홉달 만에 자기 공부하던 걸 나와서 미한 사람도 있고 또 여덟달에 미한 사람, 한달에 미한 사람, 또 열달을 다 선방에 앉아서 공부하는 모양으로 정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280일 동안 하다가 어머니 뱃속에서 나올 때 그 속에서 나오느라고 큰 고통을 겪게 되므로 출태(出胎)할 때 제일 미합니다. 그래서 깊고 완전하게 될 때 까지 계속 닦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렇게 견성하고 닦는 것을 보임(保任)이라 합니다. 옛날에도 견성해 놓고 20년·30년·40년 수도를 하는데 얼굴에 흙칠하고 잿더미 바르고 미친 사람 짓을 하면서 남들이 미친놈, 미친놈 하는 그 가운데 자기는 멀쩡하게 천하태평이 되어 개 닭소리 안 들리고 사람 오지 못하는 산중에 깊이 들어가서 토굴(土窟)하나 만들고 솔잎이나 도토리나 먹고 들어 앉아 있습니다. 선가(禪家)에서는 자성(自性)을 잘 보호해서 임의로 거기에 맡겨서 조금도 탈선(脫線) 행동이 없도록 하고 「응무소주 이생기심」되도록 한다는 뜻으로 보임(保任)이라 한 것입니다. 범부가 탐진치(貪嗔痴)로 움직이는 마음과는 달라서 무심(無心)으로 움직이는 이것은 움직이는 것도 안 움직이는 거고 안 움직이는 것도 움직이는 거고 안 움직인 자체가 움직이는 것이어서 마치 물과 파도가 둘이 아니어서(水波不二) 사람이 그것을 파도라 할 뿐 물 자체는 파도가 아니고 움직였다 해도 달라진 것도 아니고 가만히 있다고 해서 물이 더 깨끗해진 것도 아니며, 물은 움직인 때나 항상 그런 것처럼 도를 깨쳐 놓고 자기 마음자리를 응무소주(應無所住)하며 이생기심(而生其心)하는 것도 종일 설법해도 설법한 게 아니고 이와 같이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부지런히 농사짓고 종일 일해도 고된 줄 모르고 생각 없이 일합니다. 이게 내 일이라 생각 말고, 꼭 나만 먹을 거다 이런 생각 말고, 아무나 배고픈 사람이 먼저 먹을 거고 헐벗은 사람이 먼저 입을 옷이라 생각하여 열 벌이고 한 벌이고 장만하는 것이 도인이 하는 행동이며 모든 중생을 구제할 수 있는 대보살이고 자기도 완전히 의식주를 초월하고 생사를 벗어날 수 있는 길입니다.

마음이 이렇게 수양이 돼서 맑아지면 소탈해지고 번뇌가 없어져서 남의 사정을 잘 알게 됩니다. 마누라를 대할 때도 그렇고 영감을 대할 때도 그렇고 제 감정으로 대하면 영감 말이 제대로 안 들어옵니다. 그래서 마음이 상했을 때 미운 생각으로 대하면 좋게 말해도 밉고 나쁘게 말해도 밉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대하면 영감이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하는지 그것을 척 알게 되니까 마음을 맞추어 나갈 수 있고 해결할 도리가 나옵니다. 그렇지만 감정이 앞선 중생이 되어 놓으니깐 마누라가 무슨 소리를 해도 귀에 안 들어오고 팔월 추석이 되면 아이들 고무신 하나 사주고 옷가지나 사주자고 이렇게 말하는 어머니의 심정을 이해해서 그렇겠다고 얼른 주고 돈이 없으면 어디가 빛을 내 오든지 해 보자고 하고 빚도 못 낼 형편이면「거 참 마음이야 아프겠지만 돈이 없어 참 안됐다고 아이들도 불쌍하지만 당신 말을 못 들어주니 참 안 됐다」고 말이라도 고맙게 해 주면 서로 섭섭한 눈물을 흘리며 목을 안고 울 수도 있는 거고 아무 시비가 없는 세상인데, 꼭 막혀 있으니까 큰 방에 가면 시어머니 말이 옳고 부엌에 가면 며느리 말이 옳고 그러니 시어머니 사정 모르고 며느리 사정 모릅니다. 응무소주로 아무 생각 없이 대하면 시어머니가 무엇 때문에 잔소리를 저렇게 하시는가 하는 걸 환히 알기 때문에 거기에 맞추어 줄 지혜가 나옵니다. 「응무소주 이생기심」을 우리가 모르고 있기 때문에, 안하기 때문에 주관이 있기 때문에, 자꾸 지옥으로, 삼악도로만 가서 인간세상이 혼란해집니다.

아무데도 머물지 않는 무소주(無所住)는 옳게 머무는 것이고 머무는 것은 그릇되게 머무는 비극(悲劇)이며 또 중생을 위해서 자기를 위해서 육도만행을 행해야 하니까 그게 이생기심(而生其心)인데 「해도 한 것도 없이하라」 항복기심(降伏其心)이 됩니다. 일체 중생 무량무수 중생을 제도했지만 사실 제도한 나도 제도한 생각이 없고 또 제도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고집멸도(苦集滅道)의 법문을 듣고 그 방법 배우고 있는 범부 때 그 자체가 앉아서 배웠고 잠깐 지나간 생각이고 흘러간 강물과 같아서 무슨 이야기를 들었다고 할 것도 없고 무슨 말을 해 줬단 말도 안됩니다. 그러니까 「종일 얘기해 본 일 없이 얘기하라」하는 게 항복기심(降伏其心)이니 레코드나 녹음기보다도 더 무심한 것입니다. 범부라도 억지로 이렇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조직으로 하는 것이지만 하면 할수록 그 만큼 근사해지고 좀 탈속(脫俗)해져서 마음이 편해지고 일은 일대로 잘 됩니다.

구경에는 마음과 육신이 하나

무아경(無我境)이라 하지만 그것도 하나의 관념(觀念)이 나타난 것에 불과한 것이지 본체(本體)자리는 아닙니다. 이 본체의 실재(實在)는 있기는 있지만 생각이 일어날 수 없는 사량부도지처(思量不到之處)고 시간공간을 초월한 무극 이전(無極以前), 태극 이전(太極以前)이며 원자 전자가 성립되기 이전 우주의 생성이전(生成以前)이며 유무(有無)를 초월하여 선악시비(善惡是非)가 일어나기 전입니다. 깨치는 방법이 있는 것은 부득이해서 의지할 지언정 그것이 어떤 존재라고 인식(認識)한 게 있으면 벌써 착각(錯覺)이 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의 지도를 받았느니 안 받았느니 하는 생각이 붙을 수 없으며 맨 처음부터, 중생 때부터 지도할 수도 받을 수도 없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예불(禮佛)할 때도 계향(戒香)·정향(定香)·혜향(慧香)·해탈향(解脫香)·해탈지견향(解脫知見香)하고 오분향례(五分香禮)를 하는데, 부처님께 예경(禮敬)을 함에 있어 음식이나 떡을 올리는 헛된 예경이 아니라 마음을 닦는 참된 예경을 올린다는 뜻입니다. 먼저 계를 지켜서 닦는 마음의 향으로 예경하고 또 참선을 하여 정(定)을 닦는 마음의 향으로 예경하고 지혜의 향, 해탈의 향으로 예경을 올린다는 뜻이니, 해탈했다고 해서 그곳에 머물러 있으면 그것도 소승(小乘)이 되어 반쪽 해탈 밖에 안 되므로 그것까지 없어야 한다는 뜻으로 해탈지견향의 예경을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유무 주객을 초월하여 생사에도 주하지 않고 열반에도 주하지 말라는 것이니, 도인이 밭 갈고 농사도 하고 장사도 하고 좀 더 내라, 덜 받아라, 그런 소리를 해도 조금도 업이 되도록 이익(利益)을 위해서 싸우는 게 아니니 탐진치 삼독(貪嗔痴三毒)으로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때까지 육체를 나라고 하여 자기 본위로만 살다가 이제 견성(見性)을 하고 보니 정말로 자기라는 것은 누가 해롭게 할 수도 없고 보태서 이롭게 해 줄 수도 없는 존재이므로 사는 것도 아니고 죽는 것도 아닌 그저 항상 불변하는 존재이니 정말 자기를 위해서 할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제까지 이 몸뚱이 때문에 천사만려(千思萬慮)를 일으키고 온갖 망상(妄想)을 다 일으켜서 수단방법(手段方法)을 가리지 않고 죄업을 저지른 것은 육체가 나인 줄 알고 저질렀던 짓이었는데 그것도 이제는 필요 없게 됐습니다. 오직 일체중생을 구제하는 것만이 일이라면 일입니다. 그렇지만 이야기를 해도 이야기하려고 생각하는 게 아니고 깨우치는 것 일러 주는 것도 아무것도 내가 바랄 게 없습니다. 마음자리를 깨닫고 보니 돈도 소용없고 옷도 밥도 소용없고 차차 도가 높아 가면 육신이 실제로 그렇게 자유자재(自由自在)하게 되어서 불에 앉아도 아무렇지도 않고 물에 들어앉아도 괜찮습니다. 신라 때에도 그렇고 중국에도 그런 일이 많이 있습니다. 밤에 우물 속에 물이 한 댓 길 되는데 그 물 속에 가만히 들어가 밤을 새고 앉아 있다가 날이 새면 나와서 밥 얻어먹고 돌아다니며 절도 하고 중생제도도 하고 그랬습니다. 마음이 점점 무심해 지면 망상이 없어져서 이 육체가 본래 환(幻)이라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에 그렇게 됩니다. 이 몸뚱이도 본래 망상 때문에 호흡이 필요해지는 것인데 망상이 죽 끓듯 하는 큰일이 생기면 호흡이 급하게 됩니다. 모든 망상이 뚝 떨어지면 호흡의 필요가 없어져서 줄어집니다. 처음에는 차츰차츰 호흡이 1분간에 1호흡하다가 나중에 2분간에 하다가 한 시간 하다가 극도에 다다르면 자연 호흡이 끊어져서 모공호흡(毛孔呼吸)만 가지고 만족하게 되는데 더욱 깊어지면 모공호흡도 필요가 없어집니다. 그러면 그것이 환신(幻身)인데 그래서 시방제불이 증득제환(十方諸佛證得諸幻)이라 한 것입니다. 범부 중생한테 처음에는 할 수 없어서 육신은 물질로 된 색신(色身)이니까 무상(無常)한 거고 부처님도 몸이 돌아가셔서 화장을 해서 사리(舍利)가 나오고 하는 것으로 말합니다. 그리하여 소승(小乘)네에게는 아무리 성불해도 색신(色身)은 죽어 없어진다고 말해 주지만 이것은 아직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도리를 모르는 단계이기 때문에 그렇게 대승(大乘)에 올라오면 차차 환화공신(幻化空身)이 곧 법신(法身)인 것을 설명해 줍니다. 왜냐 하면 현상이 본래 환(幻)이기 때문입니다. 제불이 증득적멸심(諸佛證得寂滅心)이라고 하는 것이 곧 증득제환(證得諸幻), 모든 것이 환임을 증득한 것이므로 그때는 육신과 내 마음자리가 다르지 않고 둘이 아닌 하나의 도리로 설명합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경계로 보면 말하는 마음자리와 육체는 둘입니다. 꿈속에서 온갖 활동을 하다가 꿈을 깰 때는 꿈에 있던 몸뚱이는 없어지고 또 현실의 딴 몸뚱이를 뒤집어쓰고 나와서 종일 활동을 합니다. 만일 몸뚱이와 마음이 하나라면 마음이 가는 곳이면 어디나 이 몸뚱이도 함께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최면술에 걸린 아이가 이야기 몇 마디 하는 순간에 동경까지 왔다 갔다 하는 것이 그게 모두 다 거짓말이라면 거짓말이고 참이라면 둘 다 참이고 그런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육신 말고 마음이 따로 있어서 꼬집어보면 육신이 아픈데 사실은 육신이 아픈 게 아니라 마음이 아픈 것이지만 육신이 아픈 걸로 우리 마음이 알고 있어서 그런 것일 뿐, 실제로는 이것은 본래 육신과 마음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다 돼 가지고 환화공신(幻化空身)의 색신(色身)과 법신(法身)이 둘이 아닌 경계가 된 거나, 지금 우리가 미(迷)해 가지고 몸뚱이 이것만을 나라고 생각하므로 해서 물질적 요소로 구성된 육체가 아프지도 않고 안 아프지도 않고 아무것도 아닐 텐데 불에 닿으면 뜨겁고 손 등을 꼬집으면 손등이 아프고 배를 꼬집으면 배가 아프고 다른 데는 아프지 않은 것이 다 마음과 몸이 한 덩어리가 된 때문입니다. 마치 육신과 법신이 다르지 않은 하나가 되어 버려서 하나가 되었다는 점에서는 부처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다만 몸뚱이가 환(幻)이고 현실이 꿈인 줄을 모르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부처님을 여래(如來)라 하는데, 여(如)라는 것은 진리인 법신의 본체자리를 말하며 이 여로 부터 여여(如如)하게 중생의 세계로 오셨다는 뜻으로 한 존칭(尊稱)으로서 그러니 내(來)는 오는 것 없는 걸로 오신 것이고, 여(如)는 변동을 안 하는 것인데 어디를 왔다 갔다 할 수 있습니까? 진공처럼 변동할 수 없는 자리이고 움직일 수 없는 자리인데 부처님께서 육체적으로나 법신(法身)으로나 근원적으로는 부와 같은 것입니다. 아무래도 우리가 보기에는 몸뚱이와 마음의 두 덩어리가 있는 것 같고 싣달다태자(悉達多太子)라는 분이 이 세상에 나와서 견성성불(見性成佛)했고 또 천당의 도솔천(兜率天)에 계시다가 이 세상에 내려오시니 부처님을 따라 배우고 모시던 하늘의 대중들도 부처님을 옹호(擁護)하느라고 전부 따라 내려와서 49년 동안 부처님 불사(佛事)하는 것을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돕게 되었는데, 그러니 부처님도 보살의 몸으로 계시던 도솔천 내원궁(內院宮)때의 몸뚱이는 없어지고 또 보살의 몸이 지하로 내려가신 것으로 중생은 봅니다. 그러나 부처님 경지에서는 도솔천 내원궁이 곧 마야부인의 태중(胎中)이고 마야부인의 뱃속이 곧 내원궁이어서 오고가고 할 거리가 없는 것이니 가비라국이 그대로 내원궁에 앉아 있는 것이고 인도의 정반왕국(淨飯王國)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 하면 이 자리는 작다고 할 때는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아무 것도 아닌 그 속에 도솔천도 있고 정반왕궁도 있고 오고가고 할 게 없는 자리입니다. 현재도 우리가 마음 쓰는 이대로 이렇게도 되고 저렇게도 되는 절대 자유로운 것인데 우리가 미한 중생이 되어 망상으로 보고 쓸데없이 부자유(不自由)한 짓을 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망상이 자꾸 났다는 것뿐이지 열반(涅槃)이니 생사(生死)니 정법(正法)이니 사법(邪法)이니 이런 것도 생각하지 말고 아무 생각 없는 실상(實相)자리에 눈 깜짝해 보면 합치될 수 있습니다. 지금 이렇게 이야기 듣고 앉았다가 그렇게 될 수도 있고 오늘이라도 육조 스님처럼 깨치는 사람이 생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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