離相寂滅分 第十四

 

 

爾時(이시)에 須菩提(수보리)--聞說是經(문설시경)하시고 深解義趣(심해의취)하야 涕淚悲泣(체루비읍)하사 而白佛言(이백불언)하사대 希有世尊(희유세존)하 佛說如是甚深經典(불설여시심심경전)하심은 我從昔來(아종석래)의 所得慧眼(소득혜안)으론 未曾得聞如是之經(미증득문여시지경)이니이다 世尊(세존)하 若復有人(약부유인)이 得聞是經(득문시경)하고 信心淸淨(신심청정)하면 卽生實相(즉생실상)하리니 當知是人(당지시인)은 成就第一希有功德(성취제일희유공덕)이니 世尊(세존)하 是實相者(시실상자)는 卽是非相(즉시비상)이니 是故(시고)로 如來說名實相(여래설명실상)이니이다 世尊(세존)하 我今得聞如是經典(아금득문여시경전)하고 信解受持(신해수지)는 不足爲難(부족위난)이어니와 若當來世後五百歲(약당래후오백세)에 其有衆生(기유중생)이 得聞是經(득문시경)하고 信解受持(신해수지)하면 是人(시인)은 卽爲第一希有(즉위제일희유)니 何以故(하이고)오 此人(차인)은 無我相(무아상)하며 無人相(무인상)하며 無衆生相(무중생상)하며 無壽者相(무수자상)이니 所以者何(소이자하)오 我相(아상)이 卽是非相(즉시비상)이며 人相衆生相壽者相(인상중생상수자상)도 卽是非相(즉시비상)이라 何以故(하이고)오 離一切諸相(이일체제상)이 卽名諸佛(즉명제불)이니이다 佛(불)이 告須菩提(고수보리)하사대 如是如是(여시여시)니라 若復有人(약부유인)이 得聞是經(득문시경)하고 不驚不怖不畏(불경불포불외)하면 當知是人(당지시인)도 甚爲希有(심위희유)니 何以故(하이고)오 須菩提(수보리)야 如來說第一波羅蜜(여래설제일바라밀)이 卽非第一波羅蜜(즉비제일바라밀)일새 是名第一波羅蜜(시명제일바라밀)이니라 須菩提(수보리)야 忍辱波羅蜜(인욕바라밀)도 如來說非忍辱波羅蜜(여래설비인욕바라밀)일새 是名忍辱波羅蜜(시명인욕바라밀)이니 何以故(하이고)오 須菩提(수보리)야 如我昔爲歌利王(여아석위가리왕)에 割截身體(할절신체)로되 我於爾時(아어이시)에 無我相(무아상)하며 無人相(무인상)하며 無衆生相(무중생상)하며 無壽者相(무수자상)이니라 何以故(하이고)오 我於往昔節節支解時(아어왕석절절지해시)에 若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약유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면 應生瞋恨(응생진한)이니라 須菩提(수보리)야 又念過去於五百世(우념과거어오백세)에 作忍辱仙人(작인욕선인)하야 於爾所世(어이소세)에 無我相(무아상)하며 無人相(무인상)하며 無衆生相(무중생상)하며 無壽者相(무수자상)이니라 是故(시고)로 須菩提(수보리)야 菩薩(보살)이 應離一切相(응리일체상)하고 發阿?多羅三?三菩提心(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이니 不應住色(불응주색)하고 生心(생심)이며 不應住聲香味觸法(불응주성향미촉법)하고 生心(생심)이요 應生無所住心(응생무소주심)이니라 若心有住(약심유주)면 卽爲非住(즉위비주)니라 是故(시고)로 佛說菩薩(불설보살)은 心不應住色(심불응주색)하고 布施(보시)라하니라 須菩提(수보리)야 菩薩(보살)이 爲利益一切衆生(위이익일체중생)하야 應如是布施(응여시보시)니 如來說一切諸相(여래설일체제상)이 卽是非相(즉시비상)이며 又說一切衆生(우설일체중생)이 卽非衆生(즉비중생)이니라 須菩提(수보리)야 如來(여래)는 是眞語者(시진어자)며 實語者(실어자)며 如於者(여어자)며 不?語者(불광어자)며 不異語者(불이어자)니라 須菩提(수보리)야 如來所得法(여래소득법)은 此法(차법)이 無實無虛(무실무허)하니라 須菩提(수보리)야 若菩薩(약보살)이 心住於法(심주어법)하야 而行布施(이행보시)하면 如人(여인)이 入闇(입암)하야 卽無所見(즉무소견)이요 若菩薩(약보살)이 心不住於法(심부주어법)하야 而行布施(이행보시)하면 如人(여인)이 有目(유목)하야 日光明照(일광명조)에 見種種色(견종종색)이니라 須菩提(수보리)야 當來之世(당래지세)에 若有善男子善女人(약유선남자선여인)이 能於此經(능어차경)에 受持讀誦(수지독송)하면 卽爲如來(즉위여래)--以佛智慧(이불지혜)로 悉知是人(실지시인)하며 悉見是人(실견시인)하나니 皆得成就無量無邊功德(개득성취무량무량무변공덕)하리라

 

그때 수보리가 이 경 설하심을 듣고 그 뜻을 깊이 알고는 눈물을 흘리고 슬피 울며 부처님께 사뢰었다.

『참 희유하시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심히 깊은 이 경전을 말씀하시는 것을 제가 예로부터 오면서 얻은바 지혜의 눈으로는 일찍이 이와 같은 경을 얻어 듣지 못하였나이다. 세존이시여! 만약 어떤 사람이 이 경의 말씀을 듣고 신심이 청정하면 곧 실상이 생긴 것이오니 이 사람은 제일 희유한 공덕을 성취할 줄로 마땅히 알겠나이다. 세존이시여! 이 실다운 상이라는 것은 곧 상이 아니오니 그러므로 여래께서 실다운 상이라고 이름하셨나이다.

세존이시여! 제가 이제 이와 같은 경전을 얻어 듣고 알아서 받아 지니는 것은 어렵지 않사오나, 만일 이 다음 세상 후오백세에 어느 중생이 이 경을 얻어 듣고 믿고 알아서 받아 지닌다면 이 사람은 곧 제일 희유한 사람이옵니다. 왜 그러냐 하오면 이 사람은 <나라는 생각>도 없고 <남이라는 생각>도 없고 <중생살이라는 생각>도 없고 <오래 산다는 생각>도 없는 까닭이옵니다. 왜그러냐 하오면 <나라는 생각>이 곧 관념이 아니오며 <남이라는 생각> . <중생살이라는 생각> . <오래산다는 생각>도 곧 관념이 아닌 때문이옵니다. 왜그러냐 하오면 일체의 온갖 상을 다 여읜 것을 부처님께서라 이름하는 때문이옵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다, 그러하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경을 듣고 놀라지 않고 겁내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으면 이 사람은 참으로 희유한 사람인 줄 알라. 왜 그러냐 하면 수보리야! 여래께서 말한 제일바라밀이란 곧 제일바라밀이 아니니 그래서 제일바라밀이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인욕바라밀은 인욕바라밀이 아니라 이름을 인욕바라밀이라 한다고 여래께서 말하였느니라. 왜 그러냐 하면 수보리야! 내가 옛날에 가리왕에게 몸뚱이를 베이고 찢기었을 적에 내가 그때에 <나라는 생각>·<남이라는 생각>·<중생살이라는 생각>·<오래 산다는 생각>이 없었나니, 어찌한 까닭이냐 하면 내가 지난 날 마디마디 사지를 찢길 때에 만약 <나라는 생각>·<남이라는 생각>·<중생살이라는 생각>·<오래 산다는 생각>이 있었다면 마땅히 성내고 원망하는 마음을 내었을 것이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또 생각하니 과거 오백세 동안 인욕선인이 되었던 저 세상에서도 <나라는 생각>이 없었고 <남이라는 생각>도 없었으며 <중생살이라는 생각>도 없었고 <오래산다는 생각>도 없었느니라. 그러므로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일체의 상을 여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킬 것이니, 물질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내며 마땅히 소리·향기·맛·부딪침·법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낼 것이며 마땅히 머물은 바 없이 마음을 낼 것이니라. 설사 마음에 머물은 것이 있어도 머물은 것이 아니니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보살은 마음을 물질에 머물지 말고 보시하라.」고 말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은 일체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위하여 이와 같이 보시하나니, 여래께서 말한 일체의 상도 곧 이 상이 아니며 또한 온갖 중생이라 한 것도 곧 중생이 아니니라.

수보리야! 여래는 이 참다운 말을 하는 이고 실다운 말을 하는 이며 진여의 말을 하는 이며 속이는 말을 하지 않는 이며 다른 말을 하지 않는 이니라. 수보리야! 여래께서 얻은 바 법은 이 법이 진실한 것도 아니고 허망한 것도 아니니라.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마음을 법에 머물러 보시를 행하면 어두운 데 있는 사람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것 같고, 만일 보살이 마음을 법에 머물지 않고 보시를 행하면 밝은 눈으로 햇빛이 밝게 비칠 적에 갖가지의 온갖 물건을 보는 것과 같으니라. 수보리야! 다음 세상에 만일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능히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면 곧 여래께서 부처의 지혜로써 이 사람을 다 알고 다 보나니 한량 없고 가 없는 공덕을 성취하느니라.』

 

 

第十四. 離相寂滅分-(초현상의 적멸 경계

 

[科 解]

 

이상적멸(離相寂滅)이라 함은 제상비상(諸相非相), 곧 모든 상이 상이 아니므로 그 상을 모두 떠나 버리면 적멸(寂滅)해진다는 뜻입니다. 마음 가운데 일체 죄악이 다 정적(靜寂)해지고 모든 혼란이 다 없어지니까 적멸하게 되고 일체 악한 생각이 다 무너져 없어지니까 적멸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불교는 적멸을 앞세우니 허무적멸지도(虛無寂滅之道)라고 유생(儒生)들이 종래 욕해 왔었습니다. 허무적멸지도라고 욕을 하긴 했지만 한쪽만 보면 그게 옳게 말한 소리이기도 합니다. 금강경 이론을 듣고 「참 그렇겠구나」하고 좋아하며 쓸데 없는 번뇌·망상·지식을 청산합니다. 자꾸 청산해서 청산했다는 생각도 내면 안되고 「내가 부처가 되리라 해도 안되겠구나.」 하는 것도 번뇌이고 망상입니다. 자꾸 이런 식으로 들어가면 점점 백척간두(百尺竿頭)로 마음이 깊어 들어 갑니다. 나중에는 송곳 끝도 올려 놓을 데가 없이 올라갑니다. 이렇게 자꾸 해서 실제로 번뇌를 해탈하고 초월하다 보니까 나중에는 참말로 적멸이 현전(現前)해 집니다.

그러므로 이상적멸분(離相寂滅分)은 모든 상이 상 아닌 도리를 사무쳐서 번뇌·망상·현상을 여의고 본체자리, 산 보면 높은 줄 알고 물 보면 깊은 줄 아는 마음자리만 오로지 남아서 드러나는 도리를 밝히는 대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적멸이라고 허공처럼 아무것도 없는 자리만 지키고 있으면 소승(小乘)에 떨어집니다. 「나 혼자 생사를 해탈했고 자유자재(自由自在)하게 됐으니 그만이지, 우주가 깨지거나 온 중생이 고해(苦海)에 빠졌거나 말았거나 나 하고는 아무상관없는 일이다.」 하여 적멸만 지키고 있으면 이것은 그야말로 허무적멸지도(虛無寂滅之道)가 됩니다. 그러므로 대승보살(大乘菩薩)은 이러한 적멸(寂滅)만을 지키고 거기에 빠져서 혼자만의 안락(安樂)에 만족하지않고 무심(無心)한 그 자리에서 마음을 내어 남을 위해 온갖 것을 다 보시하고 육도만행(六度萬行)을 하라는 것입니다. 곧 응무소주(應無所住)하여 이생기심(而生其心)하는 보살행(菩薩行)을 뜻하는 이상적멸(離相寂滅)이라야 합니다.

 

原 文 : 爾時 須菩提 聞說是經 深解義趣 涕淚悲泣 而白佛言

希有世尊 佛說如是 甚深經典 我從昔來 所得慧眼 未曾得聞 如是之經

 

[解 義] 그때 수보리존자는 부처님께서 이 경전을 이렇게 자세히 설명해주시는 걸 듣고 그 이치가 거룩하고 묘한 데로 돌아가는 것을 깊이 잘 알고서는 감격해서 두 눈에서 눈물이 죽죽 쏟아졌습니다. 그래서 흐느껴 울면서 부처님께 사뢰기를, 『참 희유하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심히 깊은 경전을 설명해 주신 것은 제가 40년 전부터 부처님을 모시고 다니며 공부를 해서 얻은 저의 지혜 안목으로서는 일찍이 이와 같은 경전을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40년 후인 지금에서야 금강경의 정체를 알아듣겠아오며 여지껏 이렇게까지 깊은 도리를 가르쳐 주시는 것은 듣지 못했사옵니다.』하고 감격해서 사뢰었습니다.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란 경전(經典)도 있고 염불(念佛)도 있고 계율(戒律)도 있지만 오조홍인(五祖弘忍)대사나 육조스님도 이 금강경을 가지고 단속을 해서 범부를 딱 벗기는 도리를 밝히셨습니다. 육조대사께서는 금강경에「응무소주 이생기심」을 듣고 그 자리에서 견성을 했으니 이 금강경이 그런 것인데, 중생들은 문자를 잘 못 봅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 절에서는 강당(講堂)에서 먼저 경을 가르치고 한편으로는 선방(禪房)을 만들어서 참선시키고 그랬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역시 그러셨습니다.

옛날 우리 한국의 도인(道人)이라 하면 선교(禪敎)를 다 통해야 되는 것이므로 세계에서 제일 어렵습니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모두 자기 전문이 따로 있고 그 전문분야에 따라 절이 따로있습니다. 금강경 하면 금강경 잘하는 법사가 금강경만 전문으로 강의하는 강당을 만들어서 그 금강경 전문강원(專門講院)에 학인(學人)들이 경책(經冊)을 싸가지고 다니게 마련입니다. 우리 한국 강사(講師)는 무엇이든지 잘해야 하고 또 견성(見性)까지 해야 선지식(善知識)이라 하게 됩니다. 이런 선지식네들의 말을 들어 보면 훨씬 티를 벗어서 탁 트입니다. 이렇던 한국 불교가 근래에 와서 잘못돼 가지고 「경전 보지 마라, 그걸 보면 사람 버린다. 그 경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공공연(公公然)하게 말하면서 「그 맛있는 고기를 무엇 때문에 안먹느냐? 먹기도 좋고 기도 나고 건강해져서 속히 성불(成佛)한다.」는 겁니다. 「시래기 산초나 뜯어 먹고 노랗게 시들어 앉아 있으면 그거 언제 성불할 수 있겠느냐?」 이런 식으로 변 했습니다. 경을 못 보고 발심이 잘못 되면 자기도 잘못 되고 남도 역시 그릇됩니다. 정법(正法)을 비방(誹謗)하는 이런 사람들의 과보(果報)는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지고도 납습니다.

 

原 文 : 世尊 若復有人 得聞是經 信心淸淨 卽生實相 當知是人 成就第一希有功德 世尊 是實相者 卽是非相 是故 如來說名實相

 

[解 義] 『세존이시여!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있어서 이 경전을 얻어 듣고서 신심(信心)이 청정하면「틀림없이 그렇겠다. 꼭 그와 같이 해야 겠구나. 사실 그런 게 있다. 내가 그런 존재다. 이 말하는 게 바로 그것이로구나. 내가 듣고 앉아 있는 이 마음자리가 부처님과 조금도 손색이 없는 자리겠구나. 단지 현상계를 보고 좋으니 나쁘니 하고 집착하는 그것이 허물이구나. 그러니 일체 생각만 내 버리면 되겠구나.」하는 실다운 상이 생길 것이옵니다. 이렇게 생각해 가지고 마음이 청정해져서 나중에는「아아 이것도 틀렸구나.」하고 차근차근 밤 껍데기 벗기듯이 한겹 두겹 벗겨 들어갑니다. 밤 껍질 자꾸 깍다 보면 재미가 나서 나중에 밤도 어디로 가고 없어지도록 깎습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영락없이 부처입니다. 그래서 신심이 청정하면 곧 실상(實相)이 나온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야 참말로 철저하다는 말도 되고 때 없는 신심이니까 아무 것도 붙은 게 없는 것, 티 없는 옥과 같이 되어 간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즉 실상(實相)입니다. 곧 그 자리에서 그 사람한테는 실상자리가 생길 것이니, 실상자리만 남아서 즉견여래(卽見如來)하면 여래를 보고 곧 부처가 될 겁니다.

『마땅히 제일 가는 마지막 최후위 참 희유한 공덕을 성취하는 사람인 줄 알겠나이다. 그 법문을 이렇게 듣고 그 자리에서 실천해 가지고 실상자리까지 체득해 버리니 참 맹렬한 사람이오며 아주 약고 영리한 사람이옵니다.』 그러십니다.

『세존이시여! 그렇지만 이 실상이라는 것도 상이 아니고 있는 것이 아니오니 이름이 붙을 수 없는 자리이므로 그렇기 때문에 세존께서 실상이라 이름하셨아옵니다.』(實相者 卽是非相 是故 如來說名實相)

수보리존자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의 조리가 논리에 맞는지 안 맞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실상이라고 하는 것은 온갖 것 다 정리해 버리고 즉견여래(卽見如來)한 자리입니다. 신심이 청정한 그 자리, 앉은 자리에서 얻어 낸 그 실상이라는 것을 무엇이든 얻은 것이 있다고 잘못 알까 염려하여 이렇게 또 그 잘못된 생각 . 덧붙이기 생각 . 가질 거 있는 것으로 아는 그걸 떼려고 하신 겁니다. 사실 그 이름을 실상이라고 했지마는 그것을 실상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실상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객관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객관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사실 그것이 실상이 아닙니다. 실상이라고 하는 인식을 일으키면 벌써 인식하는 주관이 있고 인식된 객관이 있어야 하므로 그것은 실상이 아닙니다. 그러니 그게 실상도 아니고 실상이 아닌 것도 아니므로 그래서 이름을 실상이라고 합니다.

『마음을 정리해서 번뇌 망상을 해탈하면 실상이 현전(現前)한다, 견성한다.』 는 말입니다. 그러니 성품이 다 드러나면 사실 그것은 성품자리도 아닙니다. 성품자리라고 하는 것은 견성하기 전에 내가 말하는 그 근본자리인데 모르는 사람이 하는 소리지 아는 사람한테는 그것을 성품이라 하면 야단 벼락을 맞을 소리입니다. 그러니 일반적인 논리로는 「이것이 성품이 아닙니다. 성품이 아닌 것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해서 실상이라고 설명할 수도 없는 겁니다.」 이래야 논법에 맞습니다.

따라서 일반적인 논법으로는 「세존이시여! 이 실상자리라고 하는 것은 곧 실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실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해야 할 것인데, 「실상이 아니므로 이것을 실상이라고 합니다.」했으니 이 말의 조리가 어떻게 된 것입니까? 공부하는 사람이 구공만 지키고 앉았으면 나한(羅漢)이고 소승이 됩니다. 그래서 보시(布施)·지계(持戒)·인욕(忍辱)·정진(精進)하는 데 범부처럼 보시한다는 생각에서 보시해도 안 되고 보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므로 그러니 무주색(無住色)하고 보시하라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적멸(寂滅) 그것 하나만 자꾸 내세우면 그 구공(具空) 그것만 지키라는 말로 돌아가게 되는 데 이 금강경에서는 구공을 체득한 사람이거나, 체득하지 못한 사람이거나, 응무소주해서 자꾸 육도만행(六度萬行)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승불교와 소승불교가 다른 점입니다. 이런 뜻에서 이름을 실상이라고 한다는 말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도 어긋난 것인가. 옳은 것인가. <응무소주 이생기심>에 맞는 것인가 맞추어 보십시오.

우리가 견성하기 전이라도 견성할 수 있는 발심이 잘못되면 가령 몇 천만 겁을 선방(禪房) 한 복판에 앉아 참선만 해도 그 사람이 부처가 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신심이 똑바로 발심(發心)되어야 합니다. 범부 때 불교를 무엇 때문에 믿는지 어느 곳으로 향해서 성불할 수 있는 것인지 발심이 바로 되어야지 그렇지 않고 사신(邪信)이 앞서 있으면 참선보다 더한 방법으로 앉아 정진해도 안 됩니다.

그래서 부처가 되고 난 그때 부처님 마음이나 부처님께서 맨 처음에 중생으로서 연등불한테 처음으로 발심한 그 때 초발심한 그 마음이나 다 무분별(無分別)입니다. 그 두 마음이 다르지 않고 하나입니다. 그렇지만 처음 발심하는 마음과 마지막 성불하는 마음, 그 두 마음 가운데 처음 발심을 잘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그래서 옛글에도 「發心究竟二不別如是二心先心難(발심구경이불별여시이심선심난). 마음을 처음 낸 것과 마지막을 성취한 것과 그 둘이 다르지 않은데 이 두 마음 가운데 먼저 낸 첫 마음이 어려우니라.」라고 한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그러니 이와 같이 발심(發心)을 바로 해 가지고 화두(話頭)를 잘 드는 것 그것이 수좌(首座)이고 중이지 다른 것은 중생과 똑같습니다. 술도 마시고 고기도 먹을 수 있고 남녀도 서로 알고 다른 것 똑같은데 화두(話頭) 드는 그것이 다릅니다.

 

原 文 : 世尊 我今得聞如是經典 信解受持 不足爲難 若當來世 後五百歲 其有衆生 得聞是經 信解 受持 是人 卽爲第一希有

 

[解 義] 보살님네들은 팔지(八地) 이상 십지(十地)·등각(等覺)보살까지 부처님께서 거의 다 되신 이런 분들도 부처님께 법을 청하실 때에는 역시「앞으로 말세가 돼서 법이 해이(解弛)해지면 계정혜(戒定慧)삼학(三學)이라든지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布施 持戒 忍辱 精進 禪定 智慧)의 육바라밀(六波羅蜜)이라든지 보살만행을 닦을 적에 자기자신을 위해서 대도(大道)를 수행해야 하겠다고 하는 것은 둘째 셋째 넷째이고 단지 그날 그날 생활을 계획하기 위해 무량한 죄만 지어서 스물 네 시간을 심지어는 꿈에 나가서까지도 무량한 죄만 짓는 이 불쌍한 중생들을 위해서 부처님께서 미리 좀 법을 설해 주십시오.」하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청합니다.

이런 경문(經文)을 가만히 읽다가 생각하면, 현재 우리 목전에 세계 인류가 이렇게 도탄(塗炭)에 빠져서 참 그야말로 얼키고 설켜서 수백명이 물에 한꺼번에 빠져 가지고 서로 저만 살겠다고 남을 아래로 짓눌러 밟고 위로 올라서려고 하다가 그게 한 덩어리가 되어 함께 죽어 가는 판입니다. 오늘도 그렇고 옛날도 그랬습니다. 그 중에서 제일 혼란(混亂)한 게 대한민국일 것입니다. 이런 혼란한 가운데 없는 사람 살아나갈 양식을 돌보지 않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만 잘 살겠다고 긁어 모아서 한시간에도 몇 십만원씩 소비하고 그저 주색잡기에 두드리고 놀고 먹고 하는 그런 사람들이 옛날이나 지금이나 얼마나 많습니까? 지금 이 시간에도 한량 없을 겁니다. 우리들은 눈으로 이런 것을 보고도 눈물은커녕 아무렇지도 않게 느끼고 삽니다.

그렇지만 2천년, 3천년 전에 보살님들은 오늘날 형편이 이렇게 될 것을 미리 아시기 때문에 그 불쌍한 중생들을 생각해서 부처님께 법을 미리 좀 설해 주시라고 눈물을 흘리면서 청합니다. 마치 어린 귀한 자식이 몹쓸 중병에 걸려서 숨이 넘어 가려고 헐떡이고 신음하는 것을 보는 부모마음처럼 차마 눈을 뜨고 볼수 없어서 애태워하는 불보살님의 대자비를 경을 읽다 보면 환하게 알 수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이제 이와 같은 경전을 얻어 듣고 절대적으로 믿고 그걸 그대로 잘 알고 받들어 실천하고 지니는 것은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하오나 만일 당래세 후 오백세 2천 5백년 뒤에 어떤 중생이 이 경을 얻어 듣고 신해수지(信解受持)한다면 이 사람은 참으로 제일 희유한 사람이옵니다.』 그랬습니다.

 

原 文 : 何以故 此人 無我相 無人相 無衆生相 無壽者 相 所以者何 我相 卽是非相 人相 衆生相 壽 者相 卽是非相

何以故 離一切諸相 卽名諸佛

 

[解 義] 어째 그러냐 하면 이 사람은 곧 수보리처럼 금강경을 옳게 알아들은 사람일 것이니 아상(我相)이라는 주관(主觀)의 관념이 없어진 사람이고 남이라는 객관에 대한 관념, 곧 다른 것이 있다는 생각(人相)이 없어질 것이고 다 허망한 존재이니까 시집간다 장가간다 살림한다 하는 중생살이(衆生相)하는 생각도 없고, 설사 시집가고 장가 간다하더라도 마누라니 남편이니 그런 생각도 없을 것입니다. 저 사람이 우리 남편이라는 게 인상(人相)이고 내가 마누라라는 생각이 아상(我相)이고, 살림살이한다는 생각이 있으면 그것이 곧 중생상(衆生相)이기 때문입니다. 중생 살림살이한다는 생각이 있으면 그것이 곧 중생상(衆生相)이기 때문입니다. 중생 살림살이 차리는 그런 생각도 다 떨어져 버려서 내가 누구집 맏며느리인지 누구 맏아들인지 그런 것을 다 없애 버리고 나면 앞뒤가 끊어진 인간이 됩니다.

또 수자상(壽者相)이 떨어져서 이 몸뚱이가 죽고 사는 게 나한테 무슨 상관이 있느냐? 죽어도 죽는 게 아니고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게 아니다.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니까, 이것이 사는 것이고, 죽을 수도 없고 죽어도 죽는 게 아니니 그렇게 죽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왜 그렇게 되느냐 하면, 아상이 즉시비상(我相卽是非相)이어서 아상이 곧 아상이 아니고, 맹꽁이를 가지고 아상(我相)으로 삼는 것처럼 몸뚱이를 가지고있는 그 당시에도 확실한 실체가 아니라 번개가 번쩍하듯 찰라의 도중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말 알아듣는 사람이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다 안 끊어지겠습니까? 그래서 수보리 존자께서 ‘금강경을 똑바로 알아듣는 사람이 무슨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겠습니까?’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것은 중생상·수자상이 즉시 비상(非相)이기 때문이니 왜냐하면 상을 다 떠나 버리고나면 그것이 모든 부처님께서기 때문입니다.』(何以故 離一切諸相 卽名諸佛) 이런 사람은 곧 부처님 경지에 들어섰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 이 사상(四相)이 완전히 녹아 없어지면 불과(佛果)를 증득한 셈입니다. 수보리존자 모양으로 구공(俱空)을 증득해서 아직 불과는 증득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사상(四相)은 다 떨어졌으니까 구공 한 쪽으로는 부처가 다 된 셈이 아닙니까?

 

原 文 : 佛告須菩提 如是如是 若復有人 得聞是經 不 驚不怖不畏 當知是人 甚爲希有

 

[解 義] 부처님께서 수보리존자가 분명히 자신 있게 들어선 것을 보시고 참 고마워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렇다 그렇다.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얻어 듣고 놀라지도 않고 조금도 두려워하지도 않고 조금도 겁내거나 근심 걱정 다 없이 참 그렇겠다고 긍정을 한다면 그래서 청정한 신심을 내고 참다운 실상을 낸다면 마땅히 알아라, 이 사람이 참 심히 희유한 사람이니라.』

이렇게 희유한 것을 맹구우목이요 침개상투라(盲龜遇木 針芥相投)라는 문자로 비유합니다. 아주 힘들다는 뜻입니다. 태평양 한 복판의 제일 험하고 깊은 곳에 두 눈이 다 먼 거북이가 하나 있었는데 삼천년 만에 한 번씩 물위에 머리를 내 밀고 떠올라 구경은 못해도 맑은 공기를 한 번 크게 호흡을 하고 들어 갑니다. 그런데 요행히 바다 가운데 거북이 머리가 들어갈 만한 구멍이 뚫려 있는 널판에 머리를 걸쳐 놓을 수 있어야 숨을 쉬게 됩니다. 목을 걸쳐 놓고 둥둥 떠서 헤엄칠 것도 없이 한참을 있다가 물속 생각이 나서 다시 고개를 빼고 내려가면서도 참 어쩌다가 평생에 이런 좋은 기회를 한 번 만났는가 하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시 삼천년 만에 또 올라왔는데, 구멍 뚫린 널판 또 만날 수는 없을는지 우리네 참선하듯이 간절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나무가 풍파에 시달려 태평양으로 갔다 대서양으로 갔다 인도양으로 갔다 북대서양으로 갔다 하는 판이므로 눈먼 거북이로서는 날마다 그것만 찾아서 몇 십만년을 헤멘다 하더라도 못만날 것입니다. 그런데 삼천년 만에 한 번 나올 때 우연히 썩은 나무 구멍에 목이 들어가기는 하늘의 별 따기보다 더 어려우므로 이것을 어려운 것애 비유하여 <맹구우목>이라 합니다.

침개상투(針芥相投)는 하늘 가운데도 맨 꼭대기 하늘인 색구경천(色究竟天)에서 바늘을 떨어 뜨려 이 땅 위에 지정된 곳에 겨자씨를 맞히는 것을 말합니다. 바늘 끝으로 겨자씨를 맞히기로 말하면 한 길위 한 미터 위에서도 어려울 것인데 높은 빌딩 위에서 맞히라 거나, 비행기를 타고 공중에 높이 떠서 맞혀보라 하면 이것은 거의 불가능(不可能)한 일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초음속(超音速) 비행기나 인공위성(人工衛星)을 타고 몇 평생을 가도 도달할 수 없는 하늘 꼭대기의 아득한 먼 거리에서 바늘을 떨어뜨려 조계사(曹溪寺) 마당에 작은 접시를 놓고 그 위에 겨자씨를 담아 가지고 맞히라 하면 그것은 아마 불가능의 불가능이 될 것입니다. 겨자씨(芥子)는 식물 중에서 가장 열매가 작으므로 흔히 제일 작은 것에 비유해서 씁니다.

이 세상에 아주 드문일, 있을 수 없는 일이 있는 것을 맹구우목(盲龜遇木)·침개상투(針芥相投)에 비유해서 설명하는 경우가 불경(佛經)에 종종 많은데 우리가 사람의 몸뚱이로 타고나기가 이렇게 어렵다고 그럽니다. 사람 중에서도 대장부 남자로 태어나기가 어렵고 또 남자로 태어나도 불법(佛法)을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불교 이론을 배운다 하더라도 참다운 정법을 배운다는 것, 가령 금강경을 연구한다고 하면 금강경을 문자로 생각으로만 배우지 말고 부처님 뜻에 따라서 아상(我相)·인상(人相)·중생상(衆生相)·수자상(壽者相)이 떨어진 상태에 들어가야 합니다. 만일 사신(邪信)이 앞서 놓으면 천하 없는 짓을 해도 성불할 수 없습니다. 참선이 아니라 우참선을 해도 근본으로 꼬부라진 생각이 붙어 놓으면 안 됩니다. 신심이 청정해서 한 생각도 없는 실상(實相)을 배워야 합니다. 그 이론을 똑똑히 알아 가지고 단지‘이 무엇인가.’하나만 남고 과학이고 철학이고 종교고 이런 것은 더 할말도 없고 들을 말도 없고 배울 것도 없고 단지 이 문제 하나만 해결하면 다 돼 버리는 것으로 딱 들어서야 합니다.

그러니 정법을 만나기 어렵다고 한 것입니다. 불법을 만나도 모두 의식적(儀式的)으로 불공·시달림이나 하고 식은 밥이나 벌어 먹고 사는 그런 불법을 하기가 쉽습니다. 또 「다라니를 한다. 염불을 한다.」해도 모두 무엇을 구하는 생각에서 하기가 쉽지, 보리심(菩提心)을 일으켜서 염불을 하던지 주문을 외우든지 참선을 하든지 하는 정말 성불하는 방법으로 하기는 어렵습니다. 정말 정법을 성취한 선지식(善知識) 밑에서 배워서 연구를 하든지 염불 참선을 하면 가령 경을 안 봐도 눈먼 장님이 눈 뜬 사람한테 끌려가는 것 한가지로 바른 길로 바로 갈 수 있으니까? 이게 참 어렵고 난득(難得)입니다.

 

原 文 : 何以故 須菩提 如來說第一波羅蜜 卽非第一波 羅蜜 是名第一波羅蜜

 

[解 義] 제일바라밀(第一波羅蜜)은 구공소식(俱空消息)을 말하고 지혜바라밀(智慧波羅蜜)을 말하니 성불하는 데 근본법이 됩니다. 이 <智慧波羅蜜>이 육바라밀(六波羅蜜) 가운데 제일 끝이 되지만 성불하는 데는 지혜를 제일 앞세워서 바로 들어가는 성불의 첫째 조건이 되므로 이것을 제일바라밀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래께서 제일바라밀을 말한 것은 이것이 곧 제일바라밀이 아니라 이름이 제일바라밀이라고 하셨는데, 공했다는 생각까지 다 떨어져 버려서 완전한 실상만 남아 있는 것, 이렇게 해서 온전한 자기 정신만 자유자재하게 된 그때라야 자기가 자기로 말미암아 있는 것이고 객관의 어디에도 의지한 데가 없는 때입니다.(自由) 영감한테도 의지하지 않고 아들한테도 의지하지 않고 이 천지에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 부처님한테도 의지하지 않습니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의 실상을 깨달으면 곧 내가 여래께서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제일바라밀>이라 말합니다.

그런데 「내가 제일바라밀을 설했다」라는 이 구공(俱空)이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이 완전히 몰락(沒落)되고 탈락(脫落)해 버린 참 순수한 자유자재의 경지를 말합니다. 자기 정신이 오로지 자기로 말미암아 저 하나만이 있다는 뜻으로 자유자재(自由自在)라 하는데, 그렇게 자유자재하여 딱 자기 마음만 오똑할 뿐이니 이렇게 되면 그때는 만법(萬法)이 자유가 됩니다. 안팍으로 마음대로 되는데 안이 먼저 자유자재해야 밖으로 자유자재합니다. 여기서 제일바라밀을 설했다 함은 법공(法空)해서 그것까지도 공했다는 생각도 내 버리는 구공소식(俱空消息)이어서 참말로 자유자재한 그것을 <제일바라밀>이라 이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지혜바라밀>이 <반야바라밀>이 아니고 내가 그 경지를 소개하기 위해 할 수 없이 <반야바라밀>이라 이름한 것뿐이라는 것입니다.

 

原 文 : 須菩提 忍辱波羅蜜 如來說非忍辱波羅蜜 是名 忍辱波羅蜜 何以故 須菩提 如我昔爲歌利王 割截身體 我於爾時 無我相

無人相 無衆生相 無壽者相 何以故 我於往昔 節節支解時 若有 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應生瞋恨 須菩提 又念過去於五百世

作忍辱仙人 於爾所世 無我 相 無人相 無衆生相 無壽者相

 

[解 義] 인욕이라 함도 참는 겁니다. 욕을 해도 참고 때려도 참고 현풍 곽씨네 깡패 처녀 하나 데려다 발심시켜서 사람 만들려고 그 신랑이 지독하게 참듯이 참으라는 것입니다. 내가 늘 하는 말이지만 공자(孔子)님도 칠거지악(七去之惡)을 만들어서 여자 내쫒는 법을 두셨는데, 그 신랑은 안될 뻔한 일을 해낸 것을 보면 암만해도 불경을 본 사람이었는가 생각됩니다. 이 사람이 전생에라도 불법을 닦지 않고서는 이렇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보살이 나와 가지고 그 여자 하나 제도하라고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걸 인욕이라고 하는데, 욕되는 걸 참을 뿐 아니라 남이 날 나쁘다고 입으로 욕을 하든지 때로 때리든지 칭찬을 하든지 마음에 움직임이 없이 전부 참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는다는 것은 억지로 참는 것만을 뜻하지 않고, 억지로 참는 것도 참는 것이지만 생각없이 참는 것이 정말 참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인욕에 참 굉장한 얘기가 나옵니다. 『어째서 그것이 인욕바라밀이 아니라고 하느냐 하면 수보리야! 내가 저 옛날에 가리왕(歌利王)이란 폭군에게 사지(四肢)와 몸뚱이를 찢겼지만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어서 성내거나 원한이 없었느니라.』고 하십니다. 가리라는 말은 포악(暴惡)이란 뜻인데 아주 포악한 성질을 가진 임금입니다. 중국의 걸주(桀主) 같은 포악한 임금이 역사상에 더러 있습니다. 이 포악한 가리왕이 깊은 산으로 사냥놀이를 갔다가 자기 궁녀들이 산 속에서 수도하고 있는 인욕선인(忍辱仙人)과 얘기하는 것을 보자 노하여 칼로 사지(四肢)와 온 몸뚱이를 갈기갈기 찢은 일이 있습니다. 그때 그 인욕선인이 과거세의 부처님의 전신(前身)이니 석존이 전세에 참는 공부를 하는 도인이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때 인욕선인 시절의 내가 온 몸을 찢기어 죽어 가면서도 그 가리왕에 대해 조금도 원망하거나 미워하는 마음을 내지 않았는데 그것은 그때 이미 나는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만일 그때 배까지 잘라서 창자를 끄집어낼 때 내가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었다면 그 즉시에 원한이 일어나고 성이 났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그때 아무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참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뜻입니다. 아상이 있으면 아픕니다. 우리가 당장 코를 벨 때, 참으려 해도 눈을 찡그려도 됩니다. 참을 수 없이 아플 때 안 찡그릴 수 있습니까? 팔이며 다리를 떼어 놓을 때 그렇게까지야 참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주 지독한 사람은 참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아픈 것을 억지로 참는 것입니다. 6.25사변 직후에 경남 고성(固城)에서 공산당 청년이 한 사람 붙잡혔는데 고성 경찰서에서 잡아 놓고 고문을 합니다. 그때는 빨갱이라고 하면 고생하던 일을 생각해서 대번에 모두 씹어 먹으려하고 참 지독한 원수를 갚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이 참 똑똑하게 생겼고 얼굴도 잘 생긴 대학 졸업생이었습니다. 이 청년이 그때 모진 고문을 당했는데 억지로 참는 걸 본 일이 있습니다. 이런 청년이 길을 잘 못 들어서 그렇지, 길을 바로 들어섰더라면 큰 일을 할 수도 있는 청년인데 그렇게 일찍 오사(誤死)를 한 그런 청년을 보고 몹시 애석해 한 일이 있는데 이것도 참는 것으로 참는 인욕입니다.

그렇지만 부처님 말씀에는 인욕바라밀이 인욕바라밀이 아닌 경지에서 그렇게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때는 마음이 공해 있어서 아공·법공·구공(我空 法空 俱空)이 드러나 있게 되니까 이 몸뚱이를 탁 잊어버리면 전신을 송곳으로 쑤시고 불에 그슬러도 하나도 뜨거운 줄을 모르는 겁니다. 마음이 무심경계(無心境界)에 들어가서 생각이 없으면 경계가 침범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도 침범을 못하고 불도 행세를 못합니다. 그래서 육조대사께서도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전부 네 마음이 움직이고 있는 그림자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림자라는 것보다도 있는 채로 내 마음이고 전부 허공입니다. 그러니까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이어서 모든 상이 상 아닌 겁니다. 이런 무심으로 참는 게 정말 참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또 말씀하십니다. 『수보리야! 내가 또 생각해보니 저 과거에 오백생 동안을 계속해서 인욕선인 노릇을 했는데 그때에도 내가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었느니라. 오백 생을 계속해서 한 번도 아상을 일으키지 않고 무슨 잡념이란 한 번도 일어난 일이 없었느니라.』하십니다.

말세에는 괜히 대중 간섭하고 살림살이 간섭하고 남 시비하고 이래가지고 공부룰 해서 좀 알아 놓고도 그만 뒷수습을 못합니다. 그래서 아나마나하게 배워 놓은 겪인데, 이것 참으로 애타는 일입니다.

 

原 文 : 是故 須菩提 菩薩 應離一切相 發阿?多羅三?三菩提心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生無所住心

 

[解 義] 『수보리야! 보살은 일체상을 떠나서 아뇩다라 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킬 것이니라.』(須菩提菩薩應離一切相發阿?多羅三?三菩提心) 하셨는데 일체 생각이 떠나 버렸으면 그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인데 발 한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고 호통을 하고 그 자리는 한 생각 까딲만 해도 안 되고 거기다가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 한다는 말이 어디 붙을 수 있느냐고 큰소리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이런 사람은 한쪽 눈만 가지고 한쪽만 공부한 사람입니다. 적멸(寂滅)에 들어앉아서 적멸을 체득했다는 생각도 없는 그 지경에서 비로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체득해야 하겠다고 발심해서 불과(佛果)가 나타나도록까지 어떻게 되는 것인지 경전도 더 봐야 할 것이고 용맹정진(勇猛精進)도 해야 합니다. 그런걸 모르고 공부하면 그만 낭패 당하고 맙니다. 그러니 이생기심이 주장입니다. 응무소주하되 이생기심하는 겁니다. 거기가서 응무소주하여 거기서 온갖 서원을 다 세우는 겁니다.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 그것이 곧 이생기심입니다. 또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이라는 뜻은 아직 불과가 증득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서원을 한다는 겁니다. 그런 것을 안 하면 또 아무 생각 없는 적멸 속에 천만 겁을 앉아 있어 봐야 불과(佛果)를 얻을 수 없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할 수 없고, 그야말로 일체종지(一切種智)가 생길 수 없으며 무소불능(無所不能)한 절대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또 말씀하십니다. 『똑똑히 마땅히 색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라(不應住色生心) 물질에 주하지 말고 생심을 해라. 보살행 육바라밀을 행하라.』하셨는데, 이것이 이생기심하고 똑 같은 말입니다. 이것을 「마땅히 색에 주해서 마음을 내지 말라.」이렇게 새기면 마음을 내지 말라는 데 치우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색에 머물지 말고 생심하라. 저건 산이다 물이다 보는데 무슨 허물이 있느냐?」 그게 생심이고, 또 보시도 하고 인욕·지계·정진 하는 게 그게 생심입니다. 그러니까 색에도 주하지 말고 부주성향미촉법심(不住聲香味觸法心) 내지 불법까지라도 열반까지에라도 어디에고 마음을 두지 말고 <이생기심>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부주성향미촉법의 법(法)에는 보리·열반까지 부처님 법·중생의 세속법 할 것 없이 다 들어가 있습니다. 그런 데에도 주하지 말고 보시도 하고 지계도 하고 정진하라 그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이 경문 중간에다가 토를 하나 더 달아서 「불응주색하야 생심하고」(不應住色하야 生心하고) 「불응주성향미촉법하고 생심하라」(不應住聲香味觸法하고 生心하라) 이렇게 새깁니다. 무소주심을 생하라(應生無所住心), 처음부터 끝까지 생하라는 것만 주장한 겁니다. 지금 나한들을 대승으로 끌고 올라가려는 것이니까 그렇게 돼야 할 것입니다. 현상을 떠나가지고 자꾸 고요한 것만 좋아해서 푹 잠들고 있는 모양으로 중생제도고 뭐고 천하가 다 망하거나 말거나 보살행 안 한다는 겁니다. 「그놈이 망하거나 말거나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래가지고는 성불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새기는 게 좀 가깝지 않은가 합니다. 또 전혀 틀렸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새기나 저렇게 새기나 아주 틀린 것은 아닙니다.

 

原 文 : 若心有住 卽爲非住 是故 佛說菩薩 心不應住色布施 須菩提 菩薩 爲利益一切衆生 應如是布施 如來說一切諸相 卽是非相 又說一切衆生 卽非衆生

 

[解 義] 만일 마음이 어디에 머물던지 생사번뇌의 망상심을 내고 앉아 있거나 그 마음이 무심한데 머물거나, 그렇지 않으면 유심(有心)으로 몸뚱이를 내라고 하고 범부와 같이 현상에 머물거나, 생사에 머물다가 열반에 머물다가 하거나, 우리 본 마음이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거기 있을 때나 또 그전 몸뚱이가 간섭해서 아프다고 생각하던 중생 때나, 열반을 아는거나 아픈줄 아는거나 아는 생명의 본체는 조금도 줄지도 않고 늘지도 않고 본래의 그대로 입니다. 이래도 알고 저래도 알 따름입니다. 그러니까 어디에 주하던지 그건 불법이 아닙니다. 열반이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열반이 좋다는 마음이 있어서 낙착이 되면 거기는 벌써 온전한 열반이 아닙니다.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그 가운데서 다 놀아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만일 마음에 머무는 게 있으면 유주(有住)하면 즉위비주니라. 이 비주라는 것은 「그릇된 주다」이렇게 새길 수도 있고 「주가 아니다」 이렇게 새길 수도 있는데 「주가 아니다.」로 새길 때에는 주(住)자 앞에 바를 정(正)자가 숨어 있는 것으로 「정주(正住)가 아니다」 이렇게 새겨야 합니다(若心有住 卽爲非住).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보살이 심불응주색하고 보시하라, 마음에 머무는 것 없이 보시하라.」고 하셨습니다(是故 菩薩 心不應住色布施). 항상 보살을 보살심(菩薩心)이라 하여 마음심(心)자를 위로 붙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게 붙이면 조금 어색한 것 같습니다. 『이런고로 불설하시되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보살이 마음을 마땅히 물질에 주하지 말고 아무 생각없이 보시하라고 했느니라. 금을 주거나 밥을 주거나 옷을 주거나 옷이나 밥을 주었거니 하는 생각을 하지 말고 보시를 하라.』 그런 뜻입니다.

『수보리야! 보살이 일체 중생을 이익하게 해 주기 위해서 마땅히 이와같이 보시할 것이니라』(菩薩爲利益一切衆生 應如是布施) 아무 생각 없이 무조건 무심으로 주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이익이 되고 나중에는 이 중생이 보리심을 발할 때가 있게 되고 그러면 그 중생도 또 나를 보고 남과 같이 무심히 받을 수가 있지, 나한테 밥그릇이나 얻어 먹었다고 나를 보면 그만 황공무지해서 고개를 못들고 뭣 좀 줬다고 그렇게 만들면 되겠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가르쳐야 합니다. 아들 딸 낳아서 자꾸 무주상하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야 우주의 대통령이 되지 조그만 나라의 대통령쯤 해서 뭘합니까?

『여래께서 일체 모든 상이 곧 이것이 상이 아니라고 설명했고 또한 일체 중생이 곧 중생이 아니라고 내가 이제까지 설명하지 않았느냐?』(如來說一切諸相 卽是非相 又說一切衆生卽非衆生) 더구나 말세중생들을 위해서 말을 지어 글을 만들어 놓으려니까 고구정녕(苦口丁寧)으로 두 번 세 번 열 번 백 번 말씀하시는 것인데 또 원체 어려운 말씀이고 들었다고 해도 돌아서면 중생들은 잊어버리니까 이런 까닭에 이렇게 설명을 하십니다.

 

原 文 : 須菩提 如來 是眞語者 實語者 如於者 不狂語者 不異語者 須菩提 如來所得法 此法 無實無虛

 

[解 義] 『수보리야! 여래는 진어자(眞語者), 곧 진실한 말을 하는 이 진리대로만 말하는 이고, 실어자(實語者), 곧 사실대로 말하는 이며, 여어자(如於者), 곧 조금도 변동이 없이 말하는 이니』 한 번 생각하고 말하면 마음을 변경하지 않아서 국가의 법률처럼 꼭 그대로 집행한다는 그런 뜻이 아니고, 부처님의 진실의 실재를 법 그대로 된 걸 객관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이지 중생이 부처님한테 잘못 했다고 해서 벌을 준다든지 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제가 잘못해서 제가 제벌을 받는 거지 부처님께서 그 사람을 나쁘게 봐서 벌 줄 마음으로 곱사가 되게 하고 문둥이 되도록 하는 그런 심술을 하나라도 가지신 것은 아닙니다. 앞에서 인욕선인(忍辱仙人)으로 도를 한참 닦을 때나 처음 불교를 닦을 때에도 도할에양무심(塗割兩無心)으로 뼈를 부수고 사지를 찢을 때 가리왕(歌利王)에게나 몸을 원상복구시켜 준 제석천(帝釋天)한테나 두 군데 다 밉다는 생각, 고맙다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그때 벌써 아상이 없어서 그런 것인데 부처님께서 되시고 나서야 하물며 분별심·생사심(生死心)·생멸심(生滅心)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도 꼭 그와 같은 무심을 배워야 됩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진리 그대로 변동이 없는 말씀만 합니다.

『불광어자(不狂語者), 곧 미치광이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며, 불이어자(不異語者), 곧 이렇다고 하다가 저렇다고 하면서 자꾸 바꿔 가며 말하는 이가 아니니라.』하십니다. 부처님께서 대승과 소승을 말이 다르게 하시지마는 그런데는 다를 수 있는 이유, 조리를 가지고 하시는 말씀이지 그 근본 마음자리의 실재는 항상 불변입니다.

『수보리야! 여래 소득법(所得法), 곧 여래께서 얻은 법이라고 하는 것은 이 법이 실다운 것도 없고 헛된 것도 없어서 참된 진리란 법도 아니고, 그리고 허망한 법이 있느냐 하면 그런 것도 없으며 허망법(虛妄法)이 있을 수도 없고 진실법(眞實法)이 있을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항상 하나이니까 하나도 아니고 절대이니까 절대도 아니니 그러면 무엇이냐? 배고프면 밥 생각하는 게 무슨 허물이 있느냐』 그것입니다.

 

原 文 : 須菩提 若菩薩 心住於法 而行布施 如人入闇 卽無所見 若菩薩 心不住法 而行布施 如人有目 日光明照 見種種色

 

[解 義]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마음을 어떤 것에 머물러 가지고 보시를 행하게 되면 마치 어떤 사람이 깜깜한 어두운 방에 들어가서 아무것도 못보게 되는 거와 마찬가지로 장님 놀음과 같으니라. 만일 보살이 마음이 일체 법에 주하지 않고 불법에도 주하지 않고 내 자신에게도 주하지 않고 아무 생각 없는 데서 보시를 하면, 그것은 무엇과 같으냐 하면, 어떤 사람이 두 눈이 밝고 건전한데 또 가을 하늘 처럼 맑은 태양이 잘 비치는 가운데 모든 물체를 환히 볼 수 있어서 붉으면 붉은 대로 검으면 검은 대로 큰 것은 큰 대로 작은 것은 작은 대로 똑 바로 제대로 아는 것 같으니라.』 아무런 생각 없이 보시를 하면 똑 떨어진 보시가 됩니다. 그야말로 평등하고 청정해서 깨끗한 사람, 「참인간」하나 생긴 것입니다.

 

原 文 : 須菩提 當來之世 若有善男子善女人 能於此經 受持讀誦 卽爲如來 以佛智慧 悉知是人 悉見是人 皆得成就無量無邊功德

 

[解 義] 『수보리야! 당래지세에, 곧 이 다음 세상에 어떤 선남자와 선여인이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읽기도 하고 외우기까지 했다면 여래께서 부처님의 지혜로서 이 사람이 한량없는 공덕을 성취하는 것을 다 아시기도 하고 다 보시기도 하느니라.』하십니다. 요새 여기 모이는 여러분은 선남자 선여인이십니다. 그렇지 않고는 이 지루한 잔소리깨나 하는데 또 이렇게 어려운 얘기만 하는데 이렇게 앉아 배기지는 못할 것입니다. 십리길 동행하는 것도 오백 생의 인연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 하룻밤 함께 자는 것도 여럿이 함께 자는 것도 과거세에 천생 만생의 인연이 없으면 그런 결과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당히 오랜 시일을 두고 이렇게 부처님 법문 가운데 이 존중한 금강경 살림을 한 법당에서 한다는 것은 무한 겁래로 불법에 같은 인연이 있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내세에 또 불법을 만나고 세세생생(世世生生)이 불법을 만나서 이 금강경의 한량 없는 공덕을 반드시 성취하실 것입니다.

 

 

[說義]

 

▶신해수지(信解受持)

불교는 신해수지(信解受持)의 네 가지에 의지해서 점점 깊이 들어갑니다. 첫째, 믿어야 하고 둘째, 그것을 이해하고 깨쳐야 합니다. 금강경 산림법회(金剛經山林法會)를 한다는데, 실달태자(悉達太子)님이 깨달으셨다 하는데, 모든 사람에게 그것이 있다는데, 어떤 것인지 나도 좀 들어야겠다고 해서 들어서 이해하고 토론(討論)을 하고 연구를 하는 이것이 해(解)입니다. 이유 없는 믿음은 그건 미신(迷信)이고 사신(邪信)이 됩니다. 너는 생각하지 말고 어디까지나 내 말만 들으라고 하는 식이 미신입니다. 기독교의 독신자(篤信者)는 감기가 들어도 약을 안 먹습니다. 쌍화탕을 먹으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니 하나님이 나에게 이만큼 시련(試鍊)을 주고 고생을 주신 것인데 내가 약을 먹는다고 하는 것은 하느님의 명을 거역하는 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맹목적(盲目的)인 믿음이고 무조건적(無條件的)인 믿음입니다.

불교에서는 신(信)을 앞세우고 해(解)가 뒤로 갑니다. 가령 불교에 처음 들어와서 여시(如是)가 어떤 것인지 전혀 모르던 분들도 계셨을 것인데, 이번 금강경 산림(山林)에 나와서 자꾸 듣다 보면 캄캄한 밤중 같던 여시(如是)의 뜻이 요새는 조금 알듯말듯할 겁니다.

불교는 이렇게 믿음 뒤에 해가 따라가는 것이므로 무조건 맹목적 믿음의 미신과는 다릅니다. 그러데 또 뭣을 좀 따져서 알았다고 해서 예컨대 이번의 금강경을 조금 들어서 「불교가 이런 것이구나.」하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됐다고 해서 신심(信心)이 없어지면 「불교가 별거 아니구나, 내가 부처인데 뭐 절에 갈 것도 없고, 내가 마음만 착하게 쓰면 안되겠느냐?」하고 맙니다. 이래 가지고는 신앙생활이 되지 않고 그 이상은 들어가지 못해서 수도가 되지도 않고 대도(大道)를 성취하지도 못합니다. 다 되지도 않았으면서 다 된 것 같기도 하고 안 된 것 같기도 하여, 남이 부처가 되려 해도 틀렸고 안 되려 해도 틀렸고 까딲하면 틀렸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산보고 까딱하면 안 된다고 까딱거리고 물보고 까딱하면 안 된다고 까딱거리고 하여 까딱 안 하는데 걸려가지고 건방져서 그야말로 입으로만 하는 구두선(口頭禪)입니다.

실상 비슷한 이런 원리를 좀 알았더라도 관조반야(觀照般若)를 철저히 알기위해서 또 다른 교리를 들어야 하고 그래서 삼장(三藏)까지라도 다 통해야 합니다. 칠식(七識), 팔식(八識)에 잠재해 있는 깊은 허물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견성(見性)을 하고도 계정혜(戒定慧) 삼학을 두루 익히고 오십이위(五十二位)의 보살행을 닦는 것입니다. 부처가 될 때까지 이렇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먼저 신(信)이 앞잡이로 끌고 나가고 다시 그에 대한 이유를 자꾸 연구해서 그럴 수 있겠다고 하는 진리를 깨달아 들어가고 그렇게 돼야 철저한 수행을 할 뜻이 더해져서 잘 받들어 지니게 되므로 이렇게 하여 잘 수지(受持)하게 되면 마침내 실상(實相)을 체득(體得)하게 되고 이렇게 함으로서 완전히 부처가 됩니다. 이것이 신해수지(信解受持)의 뜻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아무나 몇 천명이라도 다 부처님을 만났으니까 신(信)할 수 있고 깨달아 질 수도 있고 했지만 말세(末世)의 혼란할 때에는 일념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이 복잡하고 혼란해서 머리 속에 번뇌 망상이 왔다 갔다하고 들끓어대는 그러한 때에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신해수지하면 참 그야말로 이 세상에 다시없는 제일 가는 희유한 일이라고 수보리존자께서 찬탄하셨던 것입니다.

구공(俱空)을 실제로 체득하신 대아라한(大阿羅漢) 수보리존자께서 부처님의 아주 고구정녕(苦口丁寧)하신 참 대자대비하신 이 지도한 생각이라도 그르칠까 잘못 들었을까 해서 이렇게 참 애를 써서 일러 주신 것을 제가 40년동안 부처님을 모시고 법을 들었지마는 이렇게까지 남김 없이 조금도 아낌 없이 일러 주시는 것은 이번에 처음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대아라한과(大阿羅漢果)를 증득(證得)한 이니까 부처님은 아니지마는 성인입니다. 이런 분이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부처님께서 참으로 너무나 감사하시고 대자대비하시게 남김 없이 조금도 아낌 없이 이렇게까지 사람을 지도해 주실 수가 있는가 해서 자연히 눈물이 났을 것입니다. 이제 이런걸 우리가 한편으로 보면 이것이 역시 감사해서 눈물이 쏟아지기도 했겠지마는 그 수보리존자 편으로 본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이 그저 잘 먹고 잘 살고 호강하다가 죽게 되면 죽는 다고 하는 이러한 생각으로 허망한 세상을 부득이해서 그러나 저러나 살 수 밖에 없다는 식으로, 할 수 없이 살던 우리가 이렇게 생사를 해탈하고 또한 생사에 자유로운 완전무결(完全無缺)한 인간이 될 수 있도록 하는 이런 지도의 말씀을 들을 때에는 자기도 한쪽으로 감사를 느끼고 동시에 만약에 부처님같은 어른을 만나지 못했다면 내 신세가 어떻게 될 뻔했느냐, 그저 멋도 모르고 전생(前生)이 있는지 우리는 그런 것도 모르고 앞으로 영원한 미래세(未來世)가 다하도록 생사고해(生死苦海)를 헤매고 그 참 어디 호소할 데도 없이 자업자득(自業自得)으로 제 죄를 제가 지어서 끝없는 고생을 할 뻔한 이 신세가 참 다행히도 이렇게 마지막 높은 도, 최후의 길을 걸어서 완전한 해탈을 얻게 된 자기자신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불교를 듣기 전에는 머리를 들고 갈 곳이 없었습니다. 참으로 다행히 이렇게 생사를 초월하고 또한 우주의 주재자(主宰者)로서 영원불멸한 자기의 생명을 건지게 된 것을 생각해 보니 과거를 회고(回顧)할 때 자연히 눈물이 나온 것입니다.

 

▶성불도 신해수지(信解受持)의 인과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뜰을 거닐고 계실 때입니다. 마침 비둘기 한 마리가 매나 독수리한테 쫓겨 가지고 대중 앞에 탁 떨어졌습니다. 정신을 못 차리고 벌벌 떨고 어떻게 할 줄 모르고 사람한테 살려 달라고 오기는 왔지마는 사람 역시 어쩔는지 알 수가 없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짐승들은 큰 짐승한테 쫓겨서 죽게 되면 꼭 사람 집에 들어옵니다. 그런데 자기 집에 꿩 같은 것 한 마리 쫓겨 들어 왔다고 재수 좋다고 볶아 먹어 버립니다. 살려 달라고 들어오는 짐승을 잠아 먹으니 보통 사람은 인과(因果)를 모르니까 그렇지 반드시 좋지 않은 재앙이 생깁니다. 부처님께서 이것을 사리불존자 뒤에다 갖다 놔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리불은 나한과(羅漢果)도 증득한 성인이니 안심할 것인데 그런데도 마찬가지로 떱니다. 부처님께서는 다시 ‘내 뒤에 갖다 놓아 봐라.’하셔서 부처님 뒤에 갖다 놓았더니 갖다 놓은지 얼마 안 돼서 꼬부리고 앉아서 꼬박꼬박 졸고 앉아 있습니다. 그래서 다 같은 성과(聖果)를 증득한 성인이시므로 거리가 얼마 아닐 건데 그렇게 차이가 나는 것이 이상해서 여쭈어 보았습니다.

나한을 증득하기 전의 과거세(過去世)에 그 살생하던 악의(惡意), 곧 남의 생명을 죽이기도 하고 해롭게도 하고 살해하던 살해심(殺害心)이 덜 떨어져서 미세(微細)한 습기(濕氣)가 남아 있으므로 그래서 그 밑에 가서는 안심을 못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독한 그림자가 비치고 나쁜 냄새가 나고 하는 것을 짐승들이 촉감(觸感)으로 압니다. 우리가 마음속에 살인이라도 할 독한 마음을 품으면 대번에 오장(五臟)이 푹푹 썩는 냄새가 납니다. 입에서도 나고 정신으로 풍깁니다. 사리불존자가 「언제 부터 불법을 만나서 출가하여 중이 됐습니까?」하고 여쭈었더니 「지금 이 생까지 오백생을 살생한 일이 없느니라.」하십니다. 오백생을 계속해서 지금까지 쭉 연속해서 살생해 본 일이 없고 풀 한 포기도 밟아 본 일이 없는 수행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백생전에 살해하던 습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달이 멏 번씩 우리가 신도단체에서 방생불사(放生佛事)를 합니다. 죽게 된 것을 살려 주는 게 복가운데 가장제일 큰 복이 됩니다. 재산 . 지구덩어리를 다 줘도 그 사람의 생명을 살려 주는 것만 못합니다. 미꾸라지가 죽으나 사람이 죽으나 고기나 개미가 죽으나 생명이 죽기싫어하는 생각은 똑 같습니다. 또 부처님께 「죽기 싫어하는 이 비둘기가 언제나 비둘기를 면하고 사람이 되어서 또 이불법을 만나서 대법(大法)을 성취하겠습니까?」하고 여쭈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도로 십대제자들에게 물어 보라 하십니다. 그래서 신통제일(神通第一)인 목련존자(目連尊者)에게 물었습니다. 그래서 목련존자가 가만히 천안(天眼)으로 보니까 언제까지나 자꾸 비들기로만 계속합니다. 비둘기의 몸 바꾸기가 좀처럼 어렵게 지독스런 업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겁(一劫)만 해도 굉장한 세월인데 목련존자만 해도 여러 천만겁(千萬劫)의 과거를 보고 미래를 보는 신통입니다. 몇 천만겁 동안 어느 생엔 뭐가 되고 어느 생엔 뭐가 되고 하는 것이 다 있습니다. 내생에도 비둘기로 태어나서 어디서 콩 먹고 저희끼리 어디가서 쌍쌍이 되어 사는 것까지 모든 현실이 하나하나 다 보이고 그러는데 이렇게 오랜 세월을 두고 사람의 몸을 받지 못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업이 한 번 막히면 어려운데 그 가운데도 남자가 여자되기 어렵고 여자가 남자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부처님께 여쭈니까 부처님께서는 인제 몇 겁을 지난 뒤에 다른 뭐가 되어 가지고 언제 또 사람으로 인도환생(人道還生)하지만 불법을 만나지는 못한다. 그 뒤에 다시 삼악도(三惡道)를 왔다갔다하다가 얼마 뒤에는 다시 사람이 되어가지고 불법을 만나서 사리불 네가 후세에 성불하면 그때는 부처님의 호(號)가 무엇이고 그렇듯이 비둘기도 아득한 내세에 성불해 가지고서 필경 일체 중생을 제도(濟度)하는 시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일체 중생이 필경 성불을 다 하는데 그것도 인연이 있어야 하는 것이니 만큼 이 비둘기도 지금 오늘 우리에게 뛰어와서 숨겨주고 감춰 달라고 하는 그것도 인연이 있어서 그런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필 우리가 나오자 이 시간에 독수리한테 쫒겨 가지고 여기와서 내 그늘에서 잠을 자는 게 이런 게 다 앞으로 사람이 되어 가지고 중이 되어서 수도를 철저히 해서 성불하는데 기초적인 인연을 밑천으로 더욱 깊은 인연을 맺게 된다는 것을 설명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불법을 신해수지(信解受持)한 인과(因果)도 필경 성불(成佛)할 인연이 됩니다.

초견성이 제일바라밀이 아니다.

이광수 선생이 법화경(法華經)을 번역한다고 해서 어떤 스님이 크게 걱정하며 나에게 가보라고 하여 겪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때는 이광수 선생이 불교를 안 믿고 예배당에 다닐 시절인데, 그 분이 법화경을 보고 글이 좋고 내용이 매우 이상적으로 기록돼 있어서 소설적으로 불교를 보았을 뿐, 경문 그대로를 다 진리라고 볼 수는 없다고 판단하고 있을 적입니다. 그러면서 그이가 세계 종교서적 가운데 완전한 체제를 가지고 있는 것이 법화경이라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세존께서 49년 동안 설명하신 것을 총합해 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완비해 놓은 부사의한 경인데 춘원(春園)으로서는 소설적으로 들으면 구수하니 그럴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러니 그 청년이 예술적으로만 보는 그런 소견으로 법화경을 번역해 놓으면 그 사람의 솜씨나 권위 때문에 좀처럼 다른 사람이 손을 대 봐야 잘 안될 터인데 이 한국 불교는 그만 망치고 말 것이니 내가 춘원을 찾아가서 설교를 해 가지고 불교 신도가 되도록 한 번 해 보라는 것입니다. 나와 춘원선생은 전부터 인연이 있어서 서로 안면(顔面)이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춘원이 자하문(紫霞門) 밖에 집을 짓고 있을 때 입니다. 그 옆에 소림사(少林寺)에 춘원선생이 돈을 내 가지고 나를 있게 하면서 일 주일이고 한 달이고 한 번 토의 해 보자는 것입니다. 아침만 먹고 내려오면 깔 것 하나씩 들고 산이나 개울가에 앉아서 얘기하다가 둘이서 점심 때가 되면 올라가서 점심 먹고 또 개울이나 산이나 아무데나 가마니 하나 깔고 누워서 얘기하고 앉아서 얘기하고 이렇게 해서 나흘 동안까지는 자기는 자기 얘기하고 나는 내 얘기 하고 공산주의하고 자본주의 하고 유엔총회하듯이 그랬습니다. 이렇게 나흘이 되니 내가 한 쪽으로 슬그머니 분한 마음도 일어나고 또 한 쪽으로 내 부족을 느껴지기도 하고 그러다가 닷새가 되는 날까지 얘기를 하니까 춘원선생 얘기는 다 끝이 났습니다. 그런 뒤에 내가 이렇게 저렇게 주장을 하면 말이 안된다고 질문을 하고 그러면 나는 대답하고 해서 하루 종일 얘기하고 밤새도록 얘기해서 엿새 이레까지 됐습니다.

그 때 마침 내가 법화경 육신통(六神通)을 말했는데 사람이 어떻게 육신통을 할 수가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경 가운데 이상한 것 불교에서 말한 일체 부사의한 얘기는 낱낱이 묻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중에는 사람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됐고 불경을 보는 태도가 전에 보던 것과 지금과는 차원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예술시(藝術視)했고 소설시(小說視)했으며 신화시(神話視)했는데, 이제는 글자 한 자만 빼도 안 되는 내용이며 그것이 다 온전한 참말이고 진실한 과학의 소리·철학의 소리며 완전한 종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자라도 잘못 됐다고 생각되는게 있으면 말하라.」하니까 「이제는 없다. 사실로 다 인정을 하겠다.」 이렇게 됐습니다.

심지어 조선 독립문제까지 불교적으로 나오고 민족개조론(民族改造論)을 가지고 자기가 주장했다는 얘기도 나왔는데, 사람의 근성(根性)을 가르쳐서 우리가 바르게 살도록 해야지 오백년 동안 나쁜 습성(習性)이 있어서 나라가 이렇게 된 것이니 일본이 차지 안했다면 소련이 차지했든지 중국이 차지했든지 그렇게 되었을 것입니다. 온 국민이 다 잘 살 수 있도록 복을 지어야 나라 운수가 왕성해져서 백전백승(百戰百勝)하게 됩니다. 이런 인과의 원리를 쭉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는 과연 그렇겠다고 민족의 잘못된 관념을 먼저 개조해야 한다는 데 합치했습니다.

마지막에는 법화경을 펴 놓고 품품(品品)마다 평소에도 한 번만 보면 안 잊어버리는 기억력(記憶力)인데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물어보면 설명을 하고 해서 법화경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의심없이 경문(經文) 그대로 다 신해(信解)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깐 앉아서 둘이 얘기하는데 몇 천만년이 지나갔다는 그런 소리 저런 소리 시공(時空)이 모두 마음대로 자유자재하게 된다는 얘기, 불교의 인과설(因果說) 십계 이백계를 꼭 지켜야 하는 까닭을 모두 인정하게 됐습니다. 그래도 내가 말하기를 「그렇지만 법화경을 이렇게만 읽어 가지고 번역하지 마시오. 아직도 법화경 읽어 볼 때마다 모르는 게 또 나타날겁니다.」 그랬습니다. 지금 우리가「제일바라밀이 곧 제일바라밀이 아닌 이것을 제일바라밀이라 한다」는 내용을 앞에서 백 번도 더 했고 오늘도 종일 내가 그 얘기를 했지만 아직 확실히 알지 못하는 것처럼 그랬습니다. 그래서 내가 원각경(圓覺經) . 능엄경을 읽어 보라 했습니다.

원각경(圓覺經)은 상하(上下) 두 권으로 금강경의 몇 배나 될 겁니다. 그래서 원각경을 읽어 보고 법화경을 읽어 보라 그랬습니다. 그리고 한 3년 후에 만났는데 원각경을 읽어 보고 또 새로 법화경을 읽어보니 법화경에 대해서 정말 모르겠다는 겁니다. 자꾸 읽어 볼수록 모르는 게 더 많아지고 전에 알았던 게 뭐라고 어떻게 알았었는지, 전에 알았던 생각도 다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때부터 불교의 독신자(篤信者)가 된 셈입니다. 한국 불교인으로 춘원 이 한분이 청년 남녀에게 불교 포교한 것이 대처승(帶妻僧) 7천명이 한 것보다 몇 10배나 더 됐습니다. 내가 그때 해방 전에도 그런 소리를 대처승에게 늘 했습니다. 그 뒤에 자기가 참선(參禪)도 하고 진실한 불자가 되고 철두철미한 민족주의자(民族主義者)가 되었습니다.

이 춘원의 경우처럼 이 구공소식(俱空消息) . 제일바라밀(第一波羅蜜)도 알 듯 하면서 자세히 보면 아직 덜 알았고 또 이것은 이론이나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니 아는 것으로 알 수도 없습니다. 또 설사 깨달았다 그래서 초견성(初見性)쯤 했더라도 제일바라밀을 다 안 것은 아니며 응무소주(應無所住)해서 이생기심(而生其心)하는 보임행을 해야합니다.

신통은 반야가 아니다.

이 반야바라밀은 말도 아니고 생각도 아니고 이것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그야말로 절대(絶對)도 아니며 말로 할 수도 없고 생각을 어떻게 붙일 수 없는 실재(實在)입니다. 그런걸 어떻게 바라밀이라고 이름지을 수 있습니까? 생각하면 벌써 바라밀이 아니고 바라밀이란 생각이 있을 뿐 그것이 바라밀은 아닙니다. 그런데 또 이렇게만 생각하다보면 또 아무것도 아닌 걸로만 있는 것인가 보다 하는 데 떨어집니다.

그러니 이렇게 「바라밀이 무슨 바라밀이냐? 바라밀은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하여 없다는 생각에 한편으로 치우쳐서 응무소주(應無所住)에만 집착하고 이생기심(而生其心)의 도리는 빠뜨리게 됩니다. 아무데도 주한 데 없는 것, 어떤 생각에도 이끌리지 않는 것 그것에만 치우치게 되므로 제일바라밀과 그것이 제일바라밀이 아닌 것과 두 개가 뭉친 것을 뜻하여 「제일바라밀을 설한 게 그게 곧 제일바라밀이 아니니 그것이 제일바라밀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물이 곧 파도고 파도가 곧 물이고 그런 뜻입니다. 중생들은 절대자성(絶對自性) 자리에서 듣지 않고 들으려 하여 상대적으로 움직이는 분별심(分別心)으로 들으니까 허물이 생깁니다. ‘마음자리는 절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말 한다고 하면 말로만 더 구별하는 것이 됩니다. 「있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 해 놓고 보면 보통 문장으로 공부하는 사람이나 말로만 하는 사람은 깨치지는 못했지만 알기는 다 알았다고 그럽니다. 그런데 이것도 실제로 비판해 보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고 할 때 이것은 한 번은 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이라 말한 것이고 그 다음에는 그것을 다 내 버린 없는 거라고 한 번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는 말이고 보니 있는 거 한 번 생각해 보다가 없는 거 한 번 생각해 보다가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이러는 거지 이것이 어째 실재의 면목(實在面目)을 생각하는 것입니까? 근사한 생각도 아닙니다. 그런 생각 내 버리고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고 들어야 합니다. 있는 게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고(言語道斷) 마음이 갈 곳이 없는 것, 곧 이것이 따져 볼 것 없이(心行處滅) 그렇게 듣는게 실체(實體)인데 그게 무어냐 하면 「반야바라밀이 제일바라밀」이다. 그게 근본이기 때문인데, 그렇지만 그게 또 바라밀이라고 할 수가 없는 내용이다 그러한 「바라밀이다.」 그러니까 아는 사람은 「바라밀이라」 해도 허물이 없고 「바라밀이 아니다」 해도 더 철저한 실재(實在)를 얘기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바라밀이 아니기도 하고 바라밀이기도 하고 바라밀이라고 해도 괜찮고 바라밀이 아니라고 해도 허물이 없고 그런 바라밀입니다. 그게 무엇이냐 하면 「지금 수보리 너하고 부처님 나하고 얘기하는 이대로가 실상이다, 중생하고 부처가 둘이 아니다. 이런거를 자꾸 얘기하는 이대로가 실상이다, 중생하고 부처가 둘이 아니다.」 이런 것을 자꾸 얘기하려고 하는 것이 금강경입니다.

소승불교가 염세주의(厭世主義)가 되어서 적멸(寂滅)만 자꾸 지키고 그것을 애착하고 인정도 모르고 없는 것만 애착하는데 이것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한 번은 진묵(震?)대사가 길을 가다가 강을 건너게 됐는데 얼굴이 참 예쁘게 생긴 사미동자(沙彌童子)가 나타났습니다. 애기 중이 나타나서 공손히 인사를 해서 「물이 깊어서 못가는데 어디로 가는지 길을 아느냐?」 물었더니 「소승만 따라 오십시오. 제가 이 물을 잘 압니다.」「그래 그러면 앞에 건너가 봐라.」하고 따라 갑니다. 앞에 가는 사미승을 보니 물이 무름 밖에 안 차서 껑충껑충 건너갑니다. 진묵대사도 안심하고 따라가는 데 갑자기 물이 목까지 쑥 빠져 버렸습니다. 그게 나한(羅漢)이 나와서 그런 것인데 진묵대사가 대승 불교의 진리를 깨쳐서 반야바라밀을 알고 있지마는 신통(神通)은 아직 나한만 못합니다. 그래서 대승 보살 한 번 골려 먹느라고 나한들이 그런 짓을 했다는 것입니다. 진묵대사 같은 이는 나한님을 모셔 놓은 법당에 가서 주장자를 가지고 머리를 똑똑 두들기면서 「아무개는 자식이 없다는데 이거 마지밥(佛供) 얻어 먹고 자식 하나 점지해 줘라.」하는 그런 식입니다. 신통이 없고 이래도 법이 높으니까 그래도 나한들이 꼼짝 못하고 나한들은 큰 스님 명령이니 할 수 없다고 또 아들 하나 점지 해 주고 그럽니다. 이것이 대승사상(大乘思想)과 소승사상(小乘思想)의 비교하는 예입니다.

그러므로 말은 다르지만 「제일 바라밀이 즉비 제일바라밀 시명제일바라밀(第一波羅蜜 卽非第一波羅蜜 是名第一波羅蜜)」이라는 말이 내내 「실상자 즉시비상 시명실상(實相者 卽是非相 是名實相)」과 똑 같은 논법(論法)이고 내용도 같고 이름만 다를 뿐입니다.

 

막행막식은 바라밀이 아니다.

이런걸 모르는 무식한 선지식은 음주식육무방반야(飮酒食肉無妨般若)라고 막 놀아 납니다. 그래 가지고 중생까지 버려 놓고 나중에 공부하는 중들 다 버리고 그렇게 떠들던 분들이 해방이 돼서 이제 불교정화(佛敎淨化)가 됐지만 그렇게 우리 비구들 가운데에도 그런 분들이 수십명 있습니다. 무식하기는 해도 발언이 세고 주먹질 잘 하고 그렇게 불량하게 사는데, 소견이 비뚤어져서 불법이 어디로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무식하니까 마구잡이로 그런 사람들은 그런 패대로 젊은 수좌들이 해제(解制)하여 다니다가 만나면 마구잡이로 가르칩니다. 우리는 사월보름과 시월보름이 되면 모두 금족(禁足)을 하고 석달동안 전부 용맹전진합니다. 그걸 결제(結制)한다고 그러는데 구십일이 지나면 해제를 해서 동, 서, 남, 븍 모두 돌아다니다 사월초승께쯤 되면 그 절에 전부 다 모입니다. 공부하는 장소에 모이면 제가끔 공부하고 싶은 데로 가고 늘 이러는데, 그 날 처음 오는 날 식을 거행하고 금강경을 펴든지, 그걸 내 놓고라도 깨친 소식을 한 번 보여 주고 알아듣드지 말든지 그리고 또 깨치려면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한다고 전부 가르쳐서 모두 정신 가다듬도록 만들어서 석달동안 용맹정진하도록 일러 주눈 법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큰 방으로 들어가서 술 먹으라는 겁니다. 술을 안 먹는 수좌가 있으면 저 놈 막걸리도 먹을 줄 모르는 자식이 무얼 하려고 그런다고 이러면서 막 쫒아내는 겁니다. 계를 지킨다고 틀어박혀서 소승불교(小乘佛敎)나 하고 그래 가지고 뭐가 되겠냐고 욱박지릅니다. 그래서 한 번 두 번 이런 식으로 하면 그 사람은 결국 술이나 먹고 그렇게 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것도 그런 식으로 또 깨달은 것이 조금 있어서 남 못한는 다른 소리도 할 줄 알고 이래 가지고 모두 그 정신이 옳은가 싶어서 아리숭하게 만듭니다. 경전도 그만 똥걸레처럼 만들어서 이게 다 무엇이냐고 하여 확실히 그렇게 알도록 만듭니다. 이런 소중한 금강경 같은 것도 그렇게 만들고 성불하는 데 방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죄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아무리 제가 일승법(一乘法)을 뭣좀 아는 것 같다 해도 정법을 비방한 그 과보는 이제 세세생생 지옥고(地獄苦)를 몇 천만겁을 받는 법이고, 어쩌다가 아수라가 되어 가지고 지옥보다는 조금 났지마는 여러 백천만겁을 비둘기보를 면하지 못하듯이 축생계를 돌아다니다가 어쩌다 인도환생(人道還生)을 하면 모두 문둥이 만신창이 생긴다는 겁니다. 부처님 말씀을 거역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대처승들이 생기기 시작하고 사오십년 동안에 몇 번씩 공적으로 사적으로 웃으면서도 싸우고,찡그리면서도 싸우고 한정 없이 싸웠습니다. 이래 가지고 수좌들이 그만 마구잡이로 행동했음이 불애보리요(行盜行?不碍菩提)요, 도둑질하고 음행하는 게 보리에 무슨 거리 낄게 있으며, 음주식육무방반야(飮酒食肉無妨般若),술먹고 고기 먹는 것이 반야세계에 무슨 장애가 될 게 있느냐? 「반야바라밀이 그게 뭔데 그게 어디가 걸리고 막히느냐?」 이래가지고 막행막식(莫行莫食)을 했는데 듣고 보면 그 말이 어려운 법담(法談)같이 들립니다. 그러나 정법에 턱도 안 닿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말이 그럴듯하고 어렵게 하는 수도 보여 유혹이 되고 대중이 따라갑니다. 그래서 「파 . 마늘 . 먹지마라. 중이면 이렇게 해야한다.」하면 몰아 세우고 어디가서 이런 얘기를 할 수도 없이 됐습니다. 술 생기면 술 먹고 여자 생기면 계집질하는 것 이것 떼기보다도 파 마늘 안먹기라는 건 보통 정신으로는 안 되는 겁니다. 이제 마음이 약해서 눈물을 흘려가면서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정말 발심한 사람이면 항복기심(降伏其心)을 해 보려고 하는 그 마음으로 보시 . 지계 . 인욕 . 정진 . 선정 . 지혜를 닦으라는 것입니다. 마음 한 번 항복 받기라는 게 내가 완전한 인간이 되는 게 그렇게 어렵구나 하는 이론을 자세히 치밀하게 알면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도할양무심(塗割兩無心)의 인욕

가리왕은 본래 폭군인데 따뜻한 어느 봄날 대신 장군들을 이끌고 큰 산으로 사냥을 가게 됐습니다. 이날은 특별히 궁녀들도 따라 갔는데 산에서 놀다가 가리왕은 몸이 좀 피곤해서 잠이 들었습니다. 임금이 잠이 들면 궁녀들이 옆에 있다가 행여나 개미라도 기어 올라갈까 염려되어 모두 시위를 하고 있는 법인데, 이 날은 대신과 장수들도 많고 그러니 궁녀들 수십명이 산 구경하자고 임금 곁을 떠났습니다. 궁 안에만 갇혀 있다가 모처럼 산에 오라오니 여기저기 구경하다가 돼지 막처럼 지어 놓은 토굴(土窟)이 하나 있는 것이 눈에 띄어 그 안을 들여다 보니 사람이 하나 앉아 있는데 얼굴을 보니까 인간세상 사람은 아니고 백옥 같은 선풍도골(仙風道骨)의 도사(道士)였습니다. 세상에서 욕심만 꽉 차고 심술이 꽉 차서 속된 욕심이 줄줄 흐르는 인간만 대하다가 욕심이 뚝 떨어진 신선(神仙)을 보니 아무것도 모르는 범부 눈이라도 존경심(尊敬心)이 생겨서 「선생님,여기서 무얼 하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아무것도 하는 게 없다.」 「그러면 아무것도 하는 거 없이 무엇 때문에 여기 앉아 계십니까?」이렇게 문답을 하는데 그만 시간이 간 줄 모르고 한 시간이 넘었습니다.

그때 임금이 잠이 깨어 일어나서 궁녀들 수십명이 어디로 가고 없는 것을 보고 눈이 휘둥그래졌습니다. 옛날에 나쁜 제왕(帝王)들이 시기 질투 많고 참 고약했습니다. 자존심만 많아 가지고 날 조금이라도 덜 좋아하는 눈치가 있는 여자 하나라도 있으면 당장 목숨이 달아나고 그렇게 지독합니다. 그런데 가리왕은 궁녀가 없어졌으니 그만 골이 잔뜩 나서, 여기 저기 찾다가 궁녀가 있는 곳으로 단 걸음에 달려와서 보니 조그만 초막 안에 거기 다 함께 들어가 있는데 극도의 시기심이 일어나 가지고 다짜고짜로 막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너희들 나 아닌 어떤 놈하고 얘기하느냐 싶어서 자세히 살펴 보니 얼굴이 그럴 듯 하게 잘 생긴 도인 남자하고 저희끼리만 앉아서 갖은 얘기 다 했을 것이라 생각해 보니까 당장 그 놈을 칼을 빼서 전부 목을 베어야 하겠지마는 거기까지는 너무 심한 것 같고 또 옷은 다 제대로 입고 있는 걸 보고는 훑어보기만 합니다.

궁녀들은 잠깐 한 십분 동안만 갔다 온다는 것이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고 그만 임금이 잠이 깨도록 있었으니 이젠 죽었다 싶어서 뜰아래 꿇어 엎드려서 대죄(待罪)를 합니다. 가리왕은 그 신선에게 「네가 이런 산중에서 혼자서 뭘하느냐?」 「아무것도 아니합니다.」 「그러면 아무것도 안 한다면 여기 무슨 재미로 있느냐? 사농공상(士農工商)에 뭐 하나 책임을 지든지 그렇지 않으면 산 중에 와서 도를 닦든지 뭐 하나 해야 할 것이 아니냐?」하며 이렇게 꼬집어 묻는데도 아무것도 안 한다는 것입니다. 「정말 네가 아무것도 안 하느냐?」 이제 칼이 곧 빠지려고 하는 판인데 「제가 참는 공부를 좀 하고 있습니다.」 마지 못해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러면 네가 참는 공부를 했으면 잘 참느냐? 참는 거 몇 해나 공부했느냐?」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네가 어느 정도까지 참느냐?」 「참는 데까지 참습니다.」 극도로 노해 있는 국왕의 무서운 모습에도 아랑 곳 없이 냉정한 태도에 왕은 더 괘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 네 신체를 도려 내도록까지 참겠느냐?」 「글쎄요, 참는 데까지 참지요.」 그러자 왕은 칼을 쑥 빼어 가지고 한쪽 눈을 푹 도려내 버렸습니다. 피가 툭 터졌는데도 신선은 가만히 남은 눈을 꼼짝도 안하고 앉아 있습니다. 이놈의 자식 항복도 않하고 이런 나쁜 놈이 있느냐고 또 한 눈을 마져 빼 버렸습니다. 그래도 아무 말도 않하고 찡그리지 않고 등상불 모양으로 그대로 앉아 있습니다. 가리왕은 참는 공부를 한다고 하더라도 임금의 말대접을 해서라고 항복을 해야 할 테인데 이 놈이 임금을 이기려고 한다고 더 화가 나서는 「네가 참는 데 까지 잘 참는다고 했으니 참아 봐라.」하고는 그만 양쪽 귀를 싹싹 오려 버립니다. 아, 그래도 선인은 까딱 안하고 앉아 있습니다. 양 볼을 다 베어서 서른 두 개 이빨이 다 나오게 했습니다. 그래도 신선은 아무 말도 안합니다. 요런 죽일 놈 보라고 두 팔을 짤라내고 두 다리를 짤라 내어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몸뚱이 동체만 남았는데 그리고는 또 두 젖을 도려내고 그래도 선인은 까딱 안 하고 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도리천(?利天)하늘의 제석천(帝釋天)은 둘째 하늘의 천주(天主)인데 위에서 내려다 보니 가리왕의 소행이 하도 악해서 더 참을 수가 없어서 곧 내려와 가지고는 태풍을 일으켰습니다. 뇌성벽력을 하고 바윗돌이 갔다왔다 산이 막 무너지는 판입니다. 그래 훍이 수 백길씩 올라갔다 내려치고 하니 가리왕이 겁이 나서 「아, 천벌(天罰)이 내리는구나.」하고 꿇어 엎드려서 살려 달라고 빌고 대신들이고 궁녀들이고 돌에 묻혀 죽을 판입니다. 그런데 그 때 선인이 제석천에게 자기는 다 죽게 되어 말도 할 수 없을 정도지만 말하기를 「오늘 내가 참는 이 인욕이 정망 인욕다운 인욕이거든 내 앞에 있는 가리왕을 해롭게 하지 마옵소서.」합니다. 이것이 참는다고 하는 생각이 조금도 없는 인욕 곧 참으려고 억지로 참는 게 아니고 인욕바라밀이 즉비 인욕바라밀입니다. 무심한 지경에 들어서서 하는 인욕입니다.

그러나 태풍이 싹 꺼지면서 앞에 참 거룩한 이가 하나 나타났는데 하늘에 옥황상제가 자기 본신(本身)을 그대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천동천녀(天童天女)를 함께 데리고 와서 무수한 절을 인욕선인에게 하면서 하늘에 전당포라는 신기한 약이 있는데 이것을 가지고 팔을 갖다 붙이고 눈도 제자리에 붙이고 귀도 약을 발라서 붙이고 그리고 나니 그게 본래대로 되었습니다. 그리고 천당에서 미리 준비했던 음식으로 천공(天供)을 올리고는 미래세(未來世)에 성불하시거든 부디 저 부터 먼저 제도해 달라고 간청을 하고 하늘로 올라 갔습니다. 그런데 이 인욕선인(忍辱仙人)은 제석천에 대해서 고맙다는 생각도 없고 가리왕에 대해 아무 괘씸한 생각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도할에 양무심(塗割兩無心)이라 합니다. 전당포로 발라 줄 때에도 무심하고 할절신체(割截身體)로 사지백해(四肢百骸)를 찢어 놓을 때에도 무심했습니다. <전당포>를 발라 주는 제석천한테나 내몸뚱이를 잘라 낸 가리왕한테나 똑같이 양무심(兩無心)으로 아무 생각 없이 여여부동(如如不動)하다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부루나존자의 인욕

설법제일(說法제일)인 부루나존자(富樓那尊者)께서 체험하신 거룩한 인욕의 일화(逸話)가 있습니다. 부루나 존자는 마음에 움직임이 없이 전부 참는다는 것입니다. 또 이 세상의 허무 함을 여실히 깨닫고 중될 사람 중 되어 철저히 수행하도록 하고 신도될 사람 있으면 특별한 신도가 되도록 설법을 제일 잘 하는 분입니다. 십재제자가 다 대아라한(大阿羅漢)이고 다 성인이시지만 수보리존자는 아공·법공·구공의 원리를 제일 잘 깨달은 해공제일(解空第一)이고 계를 잘 지키는 분이 우바리존자(優婆離尊者)시고 이렇게 각각 특별히 잘하는 분이 열입니다. 부루나 존자께서는 한 번은 아직 불교가 전도되지 외딴 지방에 가서 포교할 생각을 냈습니다. 그때는 일거일동(一擧一動)을 부처님께 반드시 다 여쭈고 실천했습니다. 부처님곁을 떠나는 것을 어린아이들이 어머니 아버지한테 하듯 지금 국민학교 학생이 선생님한테 하듯이 그랬습니다. 그때만 그러는 게 아니라 지금도 그렇게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선생이 있으면 제자로서 그래야 할것이고, 부모가 있으면 아들 딸이 꼭 물어서 행동을 해야 할 것입니다. 설사 제자가 스승보다 났다 하더라도 스승은 선각자(先覺者)이니 물어서 해야 하고, 부모가 설사 대학을 못 나오고 아들만 못하다 하더라도 나보다 경험이 많은 분이니까 상의하고 물어서 하면 부자간(父子間)이고 내외간이고 그 사이가 서로 이해하게 되고 달라 질 겁니다. 또 동네 노인들한테도 그래야 할 겁니다. 아무리 무식하고 농사만 짓고 있더라도 그래도 내가 평생 못한 경험을 갖고 있는 것도 있을 것이니 공경해야 합니다. 사람이 겸손해야 하고 그만큼 얌전해야 하고 틀림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 「아무 지방으로 가서 전도를 하고 싶은데 가도 되겠습니까?」하고 여쭈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가기는 가거라 마는, 그 지방 사람들이 불법이 없고 아주 강강난폭(剛剛亂暴)한 탐재호색(貪財好色)하는 중생들만 사는 곳이니 요새 말로 깡패 투성이의 우범지대(虞犯地帶)인데 거기 가서 전도하기 힘들 것이다. 만일 네가 가서 피땀 흘려서 아는 것, 공부한 것, 애써서 일러 주지만 한 사람도 잘 들어서 받들지 안하고 도리어 무슨 미친 소리인지 개 같은 소리 자꾸 하고 돌아다닌다고 하나도 네 말 듣지 안하고 비방만 하면 어찌할테냐?」하고 물으십니다. 「그래도 대단히 어질고 착한 중생이라고 생각하고 듣고 안 듣고간에 전도를 계속하겠습니다.」 「그러면 욕만 하면 다행인데 봉변을 하고 몽둥이로 매질을 당한다면 그 때는 어떻게 하겠느냐?」 「그래도 대단히 착하고 어진 중생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아 사람을 때리고 돌질하고 병신 만들어 놓는데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어질고 착한 중생이냐? 억지로 지어서 하는 소리 아니냐?」 「아니 올시다.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 하오면, 나에게 달려 들어 죽이는 것보다는 어질고 착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건 그렇 겠다. 그러면 그만 달려 들어서 사정없이 머리에 돌멩이질을 해서 죽게 하면 어찌할 것이냐?」

십대 제자 가운데 실제로 이렇게 포교하다가 돌에 맞아서 죽은 이도 있습니다. 신통이 제일 가는 목련존자가 그랬습니다. 태산도 뚫고 들어가고 바위 속에도 뚫고 들어가는 신통이 있는 이가 돌맹이에 맞아 죽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사실은 바윗돌로 때려 봐도 허공으로 아무것도 없는 허공 때리는 것 같아서 아무렇지도 않을 건데 그렇지만 맞아 죽는 법이 또 있습니다. 이와 같은 예가 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부루나 존자는 「그래도 어질고 착한 중생이라 생각하겠습니다.」 「사람을 죽인 중생을 어째서 어질고 착한 중생이라 하느냐?」 「부처님, 저희들이 억겁다생(億劫多生)으로 이 생사고해(生死苦海)를 면하지 못하는 것은 그때그때 받아서 태어난 육신(肉身) 이것을 가지고 항상 <나>라고 했기 때문에 그래서 중생이 이 생사를 못 면합니다. 그래서 중생이 죄업(罪業)을 제가 일부러 지어서 만들어 가지고 제죄 제가 받는 것이지 누가 어디 다른 사람이 하겠습니까, 그 죄의 원인은 단지 허망한 육신을 애착(愛着)하는 이것 때문에 저희가 이렇게 생사고해를 허덕이는 것이오며 아무 까닭도 이유도 없는 고생의 대가(代價)도 없는 없는 고통뿐입니다. 그런데 이 육신을 그만 두드려 깨 부셔서 해탈시켜 저의 법신(法身)·참나·진아(眞我)를 드러나게 해 주니 그것이 어질고 착한 대보살이고 부처님 행위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참으로 감사하고 어질고 착한 부처님께서라 믿고 아무 원한이 없겠습니다.」 그때에야 부처님께서 고개를 끄덕끄덕하시면서 「그래, 네가 전도할 자격이 있다.」고 허락하셨다고 합니다.

이와같이 법사(法師)라면 자신부터가 이만한 각오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도 각오부터 먼저 하고 그리해야 할 이유부터 이론으로 철저히 따져서 알고, 그런 다음에 오늘 실천을 못했지만은 내일은 기어코 실천하리라 결심하고 다짐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부처님께서 전도하러 가라는 허가의 말씀을 안 하십니다. 네가 전도가 뭐야, 너도 안 배운 주제에 설법이 뭐냐고 그렇게 걱정을 하실 건데 부루나존자는 설법제일부루나(說法第一富樓那尊者)라고 아는 것도 많고 설법도 잘 하지마는 사실 설법할 자격이 되어 있고 참 머리 깍을만 했고 먹물 옷 입을만한 분이 되었습니다.

인욕을 하여 이렇게 까지 들어서면 적이 없습니다. 나를 죽이는 사람도 적이 아니요, 살리는 사람도 은인(恩人)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를 해롭게 하고 괴로움을 주는 사람한테 원한(怨恨)을 품지 않는 것은 오히려 쉽습니다. 기가 막히게 죽자하고 그야말로 나를 숭배(崇拜)하고 나를 따르고 온갖 것 갖다 대접하고 그게 생명을 바쳐서 나를 위하려고 하고 나를 따르는 그런 이를 고맙게 안 생각하는 것이 맞아 죽어 가면서 원망 안하기 보다 참 어렵습니다. 날마다 황금을 한 말씩 갖다 주고 불사(佛事)에 보태쓰고 용돈 쓰라고 매일 그렇게 하는 신도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거는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가 보다 하고 그렇게 생각할 것도 없는 겁니다. 누가 가져 왔는지도 몰라야지 사실 또 어디 가져온 사람 있습니까? 가져온 사람 있다고 생각해야 옳겠습니까? 그러면 비보살(非菩薩)이지 보살이 아닙니다.

조건부로 이렇게 저렇게 세상을 사니까, 이 세상이 이렇게 혼란해서 도무지 살 수가 없지 앞으로는 우리가 무주상세계(無住相世界)가 될 겁니다. 그래서 사바세계(娑婆世界)이름을 고쳐서 무주상세계(無住相世界)라 그럴 겁니다. 이번 금강경 산림이 끝나면 우리가 금강경 부대(金剛經部隊)를 조직해 가지고 무주상세계로 개조(改造)하는 역군이 되고 독립군이 되어야 할 겁니다. 이렇게 배우는 것이 인간을 개조하는 공부를 하는 게 아닙니까? 그렇게 되어야 우리가 안심할 수 있는 시간이 있을 수 있겠다고 꿈에라도 안심할 수 있을 겁니다. 아까 부루나존자처럼 그렇게 굉장한 인욕일지라도 그런게 인욕이 아니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십니다. 인욕이 아닌데 그러나 억지로라도 하기는 해야 합니다. 참아야겠다. 참아야겠다. 이러며는 머리 끝까지 골이 올라와서 당장 때려 죽일 놈인데 그래도 「참아라, 참아라, 그래도 참아야지.」이렇게 하다보면 도인(道人)이 됩니다.

 

모든 것은 실상으로부터

이러한 인욕도 실상자리를 깨쳐서 무심한 마음의 본체를 깨닫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실상자리가 배고프면 밥 생각하고 산 보면 높은 줄 아는 것이니, 모든 것은 근본실상(根本實相)이 하는 일이고 무심체(無心體)가 아는 거지 생각이 따로 있어 아는 것은 아닙니다. 이 자리는 생각하면 안 되는 것이니 금송아지 얘기처럼 이 마음 자체가 무슨 관념이 있는 것이고 어떤 생각이 있는 존재라면 다른 것은 모릅니다. 제 생각이 벌써 하나 정해져 있어서 딴 것은 귀에 들어오지 않고 보이지도 않으니까 그런데 이것이 일체 생각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닥치는 대로 압니다.

산 보면 높다 물 보면 깊다고 아는 것은 높은 것도 깊은 것도 아니기 때문에 두 가지를 다 압니다. 거울에 먼지 투성이가 시꺼멓게 붙어 있으면 무엇을 비춰도 안 나타납니다. 중생 범부들은 탐심 . 치심 . 욕심덩어리의 온갖 먼지가 마음자리에 묻은 셈입니다. 일상생활(日常生活)의 쉬운 예로 차려 자세를 해도 몸이 가만히 오래 있는 사람이 아주 드문데 이것도 그 마음에 때가 많이 묻고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이 세계에서 부동자세를 잘 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 실상자리와 마음이 쉽게 계합(契合)할 수 있는 소질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실상자리인 마음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있게도 보이고 없게도 보이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유정 무정(有情無情)이라는 관념도 응무소주(應無所住)해서 봐야 유정 무정이 다 부처가 돼 있는 내용을 알게 됩니다.

이것을 또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하는데 있어도 있는 걸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있는 걸로 없고 없는 걸로 있고 있는 것 그대로가 없는 것이니 그것이 곧 진공입니다. 없는 것도 있는 것도 아닌 참말로 없는 겁니다. 있는 채로 없는 게 참말 진공이지 요새 진공이란 아무 것도 없는 겁니다. 있는 채로 없는 게 이것이 참말 진공이지 요새 진공이란 아무 것도 없는 겁니다. 현상이고 보니까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 마음도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은데 부르면 네 하고 똑똑히 대답을 합니다. 무슨 일을 하라고 시키면 그대로 가서 하고 이렇게 하는 걸 보면 있는 것이고, 또 그렇다고 해서 찾아 가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시방(十方)을 초월하고 유무(有無)를 초월하고 부처도 중생도 아닌, 생사도 열반도 아닌 이것이 없는 겁니다. 이렇게 없는 가운데서도 분명히 설법을 하고 여기 이렇게 듣고 앉아 있습니다. 듣는 것인 줄도 알고 말하는 것인 줄도 아니까 하는 말인데 부처님께서 가리왕에게 사지를 찢기고 마디마디를 찢길 때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참았지, 만일 그때 내가 내라는 생각을 내든지 육체를 내라고 단정해 버렸다면 도할양무심(塗割兩無心)의 인욕을 할 수 있었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무심경계에 못 들어갔더라도 정말 발심을 했다면 아파 죽으면서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잘못했습니다 하고 죽지만, 남을 조금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불교 이론을 확실히 알아 놓으면 원망해야 내 신세만 낭패고 죽어서 삼악도(三惡道)로 갈 텐데, 내가 맞아 죽는 것도 억울한데 남을 원망해서 삼악도 까지 가면 내 신세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단식하고 순교할 각오로 하는 것은 정법으로 죽는다는 게 마음입니다. 옳고 바른 생각 아무 생각 없는 데서 죽고 그리고 나를 죽이는 사람을 도리어 빌어 줍니다. 이것이 이생기심(而生其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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