應化非眞分 第三十二
須菩提(수보리)야 若有人(약유인)이 以滿無量阿僧祗世界七寶(이만아승지세계칠보)로 持用布施(지용보시)라도 若有善男子善女人(약유선남자선여인)이 發菩提心者(발보리심자)하야 持於此經(지어차경)하되 乃至四句偈等(내지사구게등)을 受持讀誦(수지독송)하며 爲人演說(위인연설)하면 其福(기복)이 勝彼(승피)하리니 云何爲人演說(운하위인연설)고 不取於相(불취어상)하야 如如不動(여여부동)일지니 何以故(하이고)오 一切有爲法(일체유위법)이 如夢幻泡影(여몽환포영)하며 如露亦如電(여로역여전)하니 應作如是觀(응작여시관)하라 佛說是經已(불설시경이)하시니 長老須菩提(장로수보리)와 及諸比丘比丘尼(급제비구비구니)와 優婆塞優婆夷(우바새우바이)와 一切世間天人阿修羅(일체세간천인아수라)가 聞佛所說(문불소설)하고 皆大歡喜(개대환희)하야 信受奉行(신수봉행)하니라.
『수보리야! 만일 어떤 사람이 한량없는 아승지세계에 가득 찬 칠보를 보시했더라도, 다른 선남자 선여인이 보살심을 내어 이 경전을 지니되 내지 사구게만이라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어 남을 위해 연설해 주면 그 복이 저 복보다 더 뛰어나리라. 어떻게 하는 것이 남을 위해 연설하는 것인가. 상을 취하지 않고 여여하여 움직이지 않는 것이니라. 그 까닭은 이러하니라.』
『일체의 함 있는 법은 꿈같고
꼭두각시·거품·그림자이며
또한 이슬 같고 번개 같거니
마땅히 이와 같이 볼지어다.』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여 마치시니, 장로 수보리와 비구·비구니와 우바새·우바이와 여러 세계의 하늘사람·세상사람·아수라가 부처님 말씀을 듣고 모두 다 크게 기뻐하며 믿고 받들어 행하였다.
第三十二 應化非眞分--응신·화신 참된 것 아니다
[科 解]
제32 응화비진분(應化非眞分)은 부처님의 응신(應身)이나 화신(化身)은 참다운 법신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한 대문입니다. 물질적인 보시를 아무리 많이 해도 설법하는 공덕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데 「참다운 설법은 이 세상의 온갖 현상에 대해 마음을 이끌리지 말고 여여부동하라.」 곧 응무소주 이생기심의 도리로 하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확실히 꿈인 줄 알면 무엇에 집착할 것이 없으며 꼭두각시를 조종하는 사람이 뒤에 있는 줄만 알면 꼭두각시에 홀리지 않게 되는 것처럼 현상계에 대해서도 그렇게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응화비진분의 내용은 「須菩提 若有人以滿에서 應作如是觀」까지이고 그 다음 「佛說是經已」에서 끝까지의 내용이 유통분(流通分)에 해당합니다. 제일 처음 법회인유분(法會因由分)을 설명할 때 말한 것처럼 어떤 경이든지 경 전문을 서분(序分)·정종분(正宗分)·유통분(流通分)의 세 부분으로 나누는데 그 가운데에는 부처님의 말씀뿐이며 본론에 해당하는 정종분과 서분과 유통분은 경을 결집할 당시 아란존자의 말씀으로 엮어진 것이며, 부처님 말씀 앞뒤에 붙여서 법회(法會)를 하기 전과 마친 뒤의 경위를 간략히 설명한 부분입니다.
原 文 : 須菩提 若有人 以滿無量阿僧祗世界七寶 持用布施 若有善男子善女人 發菩薩心者 持於此經 乃至四句偈等 受持讀誦 爲人演說 其福勝彼
[解 義] 『수보리야! 만일 마음이 넓고 훌륭한 어떤 사람이 있어서 무량아승지세계에 칠보를 가득 채워서 남에게 자선을 베풀었다면, 즉 옷 없는 사람에게 옷을 주고 밥 없는 사람에게 밥을 주고 병든 사람에게 약을 주고 고학생에게 장학금도 주고 실업자에게는 직장을 주는 등의 온갖 좋은 일을 하였다면, 이 사람의 복덕이 한량없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선남자 선여인이 보살심을 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서, 위로는 보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을 낸 보살이 이 금강경을 정성으로 받아 지니고 잘 배우는데, 어려우면 내지 사구게만이라도 받아서 지니고 읽고 외며 또한 남을 위하여 잘 설명해 준다면 그 복이 아까 삼천대천세계의 칠보를 보시한 사람의 복 보다 더 뛰어나리라.』
물질을 보시하거나 몸뚱이를 보시해서 얻은 공덕이 금강경을 수지독송해서 남에게 연설해 주는 공덕보다 못하다는 말씀은 여러 번 하셨습니다. 여기서도 같은 뜻으로 하시는 말씀인데 그러나 남을 위해 금강경의 뜻을 설명해 주려면 마음을 어떻게 가지고 어떻게 일러 주어야 하느냐 하는 근본적인 마음가짐을 끝으로 말씀하십니다.
原 文 : 云何爲人演說 不取於相 如如不動
[解 義] 『어떻게 하는 것이 참으로 남을 위해서 하는 연설이냐, 부처님의 깊고 깊은 법을 남에게 잘 가르쳐 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것은 모든 상을 취하지 않고 여여하여 부동하는 것이다. 내가 남을 위해서 법문을 해 줬거니 하는 생각을 가지면 그것도 불법을 설했다는 상에 떨어진 것이니 여여하게 까딱도 하지 말라.』
내가 남에게 백만 원쯤 주어서 살게 해 주었더라도 내가 누구를 위해 보시를 했거니 하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곧 상에 떨어진 것입니다. 「금을 보시했다, 옷을 보시했다, 고아원을 만들었다, 양로원을 만들었다, 절을 지었다.」하는 생각을 두지 않는 것이 불취어상(不取於相)입니다.
여여부동(如如不動)은 마음자리는 생노병사·남녀노소·빈부귀천이 없고 천지음양·시간공간·주관객관을 다 초월한 자리이므로 항상 그대로고 변하지 않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여여부동이라 한 것인데, 그러면 우리가 이 정도라도 법문을 들어 놨으니 「불취어상 여여부동하라.」하면 그 뜻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지, 그렇지 않고는 사회의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불취어상 여여부동하라.」 그러면 곧 깜깜하게 꽉 막힙니다. 시간, 공간이 나누어지기 이전, 생사 유무 이전의 자리이므로 여여부동하게 되고 좋고 싫은 것이 없고 주관 객관이 떨어진 자리에서 하는 것이므로 상을 취할 것도 없습니다.
原 文 : 何以故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解 義] 『왜 그러냐 하면 일체의 유위법, 곧 할 수 있는 법, 조작이 있는 생사법은 다 꿈과 같고 환과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그런 것이니 마땅히 이렇게 볼지어다. 이렇게 허망한 꿈인 줄 확실히 알았다면 그것을 소유하겠다고 집착할 것도 없고, 그것 때문에 기쁘다든지 슬프다든지 놀라고 할 것이 없지 않겠느냐? 그러니 오직 상에 떨어지지 말고 여여하여 부동해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하시어 금강경 본문의 대단원의 마지막 끝마무리를 하셨습니다.
일체 유위법이라 함은 상대세계의 생사법 일체를 말합니다. 춘하추동이 유위법이고 음양조화가 유위법이며, 있는 것 없는 것이 유위법이고, 할 수 있는 것 하여지고 있는 것 변하는 것 이루어지는 것은 다 유위법입니다. 부처니 중생이니가 다 유위법이며,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사구게를 설명하는 것도 유위법이고 부처님께서 49년간 설법하신 팔만대장경도 유위법입니다.
이와 같은 유위법은 다 아침에 잠깐 있다 해가 반짝 나면 없어지는 이슬 같은 것이므로 초로인생(草露人生)이라고 하듯이 언제 날아갔는지 없어진 줄도 모르게 사라집니다. 또 번쩍하는 번갯불이고 물거품 같고 꼭두각시 허깨비 같으니, 물거품은 일어나면서 한쪽으로 꺼지는 것이고 꼭두각시는 요술하는 사람이 물건을 가지고 사람처럼 만든 것을 말하며 허깨비는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헛보는 것이니, 눈병이 나면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 꽃이 피어 보이는 등의 예를 말합니다. 현상계가 그대로 꿈이고 인생의 현실이 그대로 꿈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꿈과 같다고 말하지만 같은 것이 아니라 그대로 꿈입니다.
그러므로 아무 생각 없이 농사짓고 아무 생각 없이 시집가고 아무 생각 없이 장가가서 좋은 일만 하고 상에 취하지 말아야 하며 여여부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여여부동한 마음으로 이생기심(而生其心)하여 중생제도도 하고 성불도 합니다.
原 文 : 佛說是經已 長老須菩提 及諸比丘 比丘尼 優婆塞 優婆夷 一切世間天人阿修羅 聞佛所說 皆大歡喜 信受奉行
[解 義] 『부처님께서 이 금강경을 다 말씀하시고 다시 장로 수보리와 비구 비구니와 우바새 우바이, 곧 청신남 청신녀를 비롯해서 일체 세간의 하늘사람 인간 세상사람 아수라 등의 백만 억 중생들이 설법하시는 것을 듣고 마음에 아주 기쁘고 좋아서 받들어 행하였다.』
장로 수보리의 장로는 나이가 많고 덕이 높고 지식이 높다고 하여 지어진 존칭입니다. 그러므로 장로라는 존칭을 쓴 것은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 아란존자께서 엮은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이 경을 다 말씀하시고 나니 장로 수보리(佛說是經已 長老 須菩提)」에서부터 끝까지는 유통분(流通分)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는 출가해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독신수행을 하는 승려를 가리킵니다. 처음 출가하면 사미계(沙彌戒)를 받아서 승려 후보로서 수행생활을 하다가 스무살이 되면 남자는 250계를 받아서 비구가 되고 여자는 348계를 받아서 비구니가 됩니다.
작년 가을에 합천(陜川) 해인사(海印寺)의 비구니 승방에서 대중공양할 때 고등학교를 졸업한 대전 처녀가 승려가 되겠다고 찾아 온 일이 이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집에 있는데 어서 시집가라는 어른들의 성화가 있었지만 학교 다닐 적에 절에 다니며 무상법문을 여러 번 들었고 사회의 혼란한 것도 직접 보고 해서 발심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불교계에는 이 비구총림(比丘叢林)이나 비구니총림(比丘尼叢林)이 하나씩만 있어도 중노릇 잘할 수 있는 처녀 총각이 많이 있습니다. 중노릇 하려 절에 갔다가도 참다운 수행의 길로 인도하는 사람이 없고 청정한 수행도량의 모습도 보기 어려우며 머리 깎아 봐야 별 수가 없을 것 같아서 되돌아서는 사람도 많습니다.
우바새(優婆塞)는 청신남(淸信男)·선남자 곧 남자신도를 뜻합니다. 우바이(優婆夷)는 청신녀(淸信女) 선여인, 곧 여자 신도를 뜻합니다.
한 20년 전쯤 되는 일인데 내가 직접 들은 얘기입니다. 그때만 해도 대개 그랬지만 부모가 정하여 처녀 총각이 얼굴도 모르고 결혼식을 올린 신부 신랑이 있었습니다. 손님들이 다 물러가고 신랑이 신방에 들어갔는데 어찌된 일인지 신부는 윗목에 딱 앉아 가지고 밤새도록 까딱도 하지 않고 참선만 하고 있습니다. 신랑은 그 광경을 보고 놀라서 새벽이 되어서는 별별 무서운 생각이 다 들어 그 이튿날 그대로 혼자 도망을 갔습니다. 집에 일이 있으면 조석이든 무엇이든 일을 다 해놓고 틈만 있으면 그렇게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색시 부모들이 여러 가지로 알아보니 참선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참선에 어느 정도 맛을 안 것입니다. 정신이 밝아서 참 좋고 모두 다 내 세상이니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보다 훨씬 더 좋았던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출가해서 비구니가 되면 큰 공부를 할 사람이고 재가해서 우바이가 되어도 많은 정진을 할 사람입니다.
요새 세상은 총각으로 믿고 시집갈 데 없고 어떤 처녀 믿고 장가갈 수도 없다는 말까지 나옵니다. 서양풍속이 자꾸 들어와서 좋지 않은 것만 본뜨다 보니 서로 의지하고 믿고 살 수 있는 처녀 총각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되는 문명인지 거꾸로 후퇴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개도 새끼 날 때 되면 흰 개 검은 개 정해서 몇 번 교미하고 그러는 것인데 소위 인간이라면서 정조나 지키려 들고 그러면 그것은 18세기다 미개했다고 그러니 가만히 생각해 보면 현대인의 사상이라고 하는 이런 사고방식이 다 유물론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참으로 기가 막히는 일입니다. 부부간에도 서로 믿을 수가 없이 된 이런 세상에 불법이 하루 바삐 널리 전해지지 않고서는 안심하고 살 수 없습니다.
부처님 경전에는 남녀 간의 애정에 대한 말씀도 한량없이 많습니다. 중생들은 오히려 그렇게 자신이 살고 있지만 잘 모릅니다. 술 취한 사람이 자기 상태를 모르는 것 같고 아주 만취(滿醉)가 되면 아무 것도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춘원 이광수가 연애소설을 아주 잘 쓴다고 하지만 내가 얘기를 하면 몇 백배 더 죽고 못 살 재미있는 연애방법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스님은 소설도 안 보고 신문도 안 보면서 어떻게 그런 걸 아느냐고 그러지만 그것은 다 경전을 보고 아는 것입니다. 또 부처님 법의 원리를 듣고 공부를 좀 해서 마음이 맑아지면 문일지십(聞一知十)으로 한 가지 들으면 열 가지 백 가지를 알아집니다. 그래서 중생살이의 내용을 다 알고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서 남편이나 아내에게도 말 못할 숨은 살림살이를 끄집어내서 그 실지를 말해서 이 금강경의 정법을 신수봉행해 주니까 고독해지고 서러워지고 불법에 마음을 돌리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인생의 근본문제를 참으로 해결하기 위해 발심한 구법불자(求法佛子)들이 많이 나와서 계행도 잘 지키고 경도 바르게 배운 뒤 목숨을 걸고 철저한 참선을 해서 견성(見性)을 하면 더 좋고, 견성은 못 했더라도 이런 금강경의 정법을 신수봉행할 줄 아는 비구·비구니·우바새·우바이가 많이 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정법이 무엇인지 하는 것만이라도 바로 육도만행(六度萬行)하여 여시항복기심(如是降伏其心)하는 선지식(善知識)이 나오면 말할 것도 없지만 정법이 무엇인지 하는 것만이라도 바로 아는 사부대중(四部大衆)이 많이 나와야 우리 한국불교가 바로 되고 그래야 우리나라가 잘되며 세계평화의 길이 열립니다. 금강경의 아공·법공·구공의 도리를 잘 알고 아상·인상·사상(四相)을 여의고 응무소주하여 이생기심할 줄 아는 불자들이 많이 나와서 이 금강경의 정법을 널리 펴야만 이 혼란한 사회가 바로잡히고 정말 살기 좋은 나라가 될 것입니다.
[說 義]
▶꿈의 실상(實相)
경전을 천독 만독 억만독하라는 것은 한 번 읽어서는 경의 깊은 뜻이 이해되지 않지만 두 번 읽고 세 번 읽고 여러 번 읽는 동안에 그 뜻이 조금씩 깨달아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이 내가 한번 한 얘기를 또 하고 또 하게 되는데 이제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 더 해야겠습니다. 꿈이 과학이라는 것은 사람이 확실히 경험할 수 있는 심리학적 내용을 가지고 있는 문제이기 때문인데, 그리고 꿈에 대해 그 동안 여러 가지 측면에서 얘기해 왔는데, 먼저 꿈에 대한 시간을 말하겠습니다.
사람이 자는 시간은 대체로 하룻밤에 7시간 내지 8시간이므로 내가 잠이 든 전 시간 동안 꿈을 꾸었다고 해도 8시간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꿈속에 들어가서는 8시간만 경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잠자는 동안 꿈속에서 경험하는 시간은 닷새 사는 때도 있고 한 달 사는 때, 몇 해 사는 때, 까딱 잘못하면 한평생을 사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밤을 새워 가며 꿈을 꾸었다 하더라도 여덟 시간밖에 소요되지 않았는데 그것이 꿈에 들어가서는 일평생이 되는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루나 반나절 꿈도 꾸지마는 저녁마다 일평생 꿈을 꿀 수도 있는 것이므로 생시에 산 시간보다 꿈속에서 사는 시간이 훨씬 더 많게 됩니다. 그러면 「꿈을 꾼 실제의 시간은 얼마 동안이냐?」 꿈을 꾼 시간을 조사해 보는 방법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가운데서 제일 쉬운 방법은 잠이 들어 있을 때 눈동자의 움직임을 보아 알아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눈 위에다 가만히 가볍게 손을 대고 있으면 꿈을 꾸는 사람은 눈동자가 움직인다고 합니다. 눈동자는 우리가 눈 감고도 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눈동자가 놀지 않고 가만히 있는 때는 꿈을 꾸지 않는 때로 판단합니다. 이제 꿈꾸는 시간이 5분 동안이라면 눈동자가 움직이는 시간도 5분 동안이 되는데 단 5분 동안에 꾼 꿈을 이야기 하라고 하면 꿈속에서는 하루도 살고 이틀도 지내고 때로는 한 달 산 것도 이야기합니다.
꿈을 꾸는 실제의 시간은 연구 조사한 사람에 따라서 일정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의 조사 결과는 45분 걸렸다고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36분 걸렸다, 35분 걸렸다, 이렇게 차츰차츰 줄어서 심지어는 결국 모든 꿈은 단 1초 동안에 이루워진다는 결론까지 나옵니다. 이렇게 보면 현실에서는 1초 동안의 짧은 시간이지만 꿈속에 들어가서는 50년, 60년의 긴 생활을 경험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면 45분 가지고 10년, 50년을 봤다는 얘기는 일초를 가지고 10년, 50년을 만들어 살았다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45분이 10년이 될 수 있고 10년이 또한 단 5분이 될 수 있는 거나 1초 가지고 10년 살았다는 얘기나 마음대로이기는 마찬가지고 45분이나 1초나 시간을 초월했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원리라 하겠습니다.
또 한걸음 더 나아가 생각하면 1초보다도 훨씬 작은 몇 만분의 1초쯤 되는 시간을 가지고 몇 해의 긴 꿈을 꾸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차츰차츰 올라가다 보면 나중에는 시간도 아닌 것, 시간이 채 움직일까 말까하는 아주 짧은 순간에 과거·현재·미래의 무궁한 세계를 꿈에 가서 창조한 것이 됩니다. 시간이 아닌 것을 가지고 우리가 꿈에 가서 항상 시간을 만들어 살았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시공을 창조
우리는 마음으로 꿈속에서 시간을 창조하여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해서 아들 딸 낳고 그 아이 기르고 교육을 시킵니다. 유치원에서 국민학교로 중·고등학교에 보내느라고 가정교사를 대어 입학시험준비도 시키고 해서 교육을 마치고 나면 또 결혼을 시켜 가지고 슬하에 손자를 많이 두게 됩니다. 우리가 생시의 현실사회에서 한평생 산 그대로 꼭 생시와 똑같은 남녀가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까 말한 것처럼 꿈속에서 이렇게 한평생을 살았다는 것은 실제에 있어서 시간이 움직이기도 전의 순간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여하튼 시간도 아닌 것을 가지고 세월을 보냈다는 말이 되는데, 그렇다고 하면 그 곳에도 공원이 있고 공장이 많았을 것이며 사회가 있고 우주가 있으니 이것은 무한대 공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한대 공간 이것은 참말 공간이냐 하면 그것도 작은 점에 불과한 것을 가지고 이런 무한대 공간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하면 억만분의 일에 해당하는 점을 가지고 무한대 공간을 본데 불과하고 자꾸 자꾸 이렇게 추구해서 따져 나가다 보면 점도 아닌 것을 가지고 무한대의 공간으로 창조한 것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꿈이란 확실히 마음이 창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궁한 시간이나 무한대의 공간이 찰나도 점도 아니어서 말하자면 시간도 아니고 공간도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공간도 아닌 것 시간도 아닌 것을 물질이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가지고 우리가 시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물체가 움직이고 있는 것이 시간이라는 정의에 의해서 평소에 시간이란 물질계의 한 현상이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랬고 무엇인가 움직인다고 하는 인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시간, 공간이 현실적으로 존립하는 것으로 인식되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꿈에 시간이란 하나의 물질현상이라고 볼 수 있는데, 꿈에는 공간도 아니고 시간도 아닌 것을 가지고 무궁한 세월이 흘러갔다고 생각하고 무한대의 공간이 벌어져있는 것 같이 생각하는 관념이 꿈을 꾸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원리가 현실적으로도 존재하는가 하는 것을 한번 비유해서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가령 여기서 조그만 거울을 가지고 남산에 올라가서 시내를 비추어 보기로 합시다. 그러면 서대문에서 동대문·남대문·청량리까지 다 들어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작은 거울 속에 거울의 몇 억 만 배도 넘는 큰 서울의 질량이 그대로 변함없이 나타납니다. 사람만한 것은 사람만 하게 보이고 자동차만한 물건도 빌딩도 각각 자기의 크기 그대로 비춰져서 나타납니다. 또 거리도 1미터 떨어진 것, 100미터 떨어진 것, 1키로 2키로의 거리가 각각 조그만 차이도 없이 그대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거울에 나타난 서울은 한 개의 그림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림이라고 하면 또 실제의 청량리가 거울 안에 들어와 똑같은 크기로 나타날 수는 없는 겁니다. 작은 손바닥만 한 렌즈 속에 큰 서울을 그대로 옮겨다 떼어 놓는다면 북악산이 깨알 만큼한 크기로 될 것이고 남산이 콩알만한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실제로 남산에 가서 거울을 비춰 보면 확실히 서울만한 질량이 그대로 보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것을 착각하는 것입니다. 광학상(光學上)의 원리가 그렇다고 하지만 광학 자체도 결국 우리의 감각작용상 작은 것을 큰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힌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보이느냐? 이유 없이 그렇게 보인다고 해야 합니다. 꼭 무슨 이유가 있다면 우리의 이 마음이 신기해서 신통으로 그렇게 작은 것을 크게 본다는 것입니다. 이 거울 반만한 작은 거울을 가지고 비추어 보더라도 역시 서울은 큰 거울과 똑같이 보이게 됩니다.
만약 이것을 더욱 작은 것으로 차츰차츰 더 줄여서 나중에는 사람들이 육안으로는 못 볼 정도의 작은 거울이라 하더라도 그 속에 비춰진 서울은 그 크기가 변함없이 그대로 보일 겁니다. 그러니까 나중에 과학이 발달해서 산소나 수소나 원자처럼 작은 거울이 나타났다면 원자 크기의 거울 거기에도 역시 서울만한 것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작아지고 작아지다가 작은 것까지 없어진 것 나중에는 작은 것이 없어진 것까지도 없어진 상태에 도달하면 우리 마음의 참 거울이 드러날 것입니다.
▶아무 것 아닌 것조차도 아닌 것
우리의 이 시간 공간이 본래 마음이고 보면 지금 우리가 꿈을 꾸고 있다는 것 이것은 시간도 공간도 아니기 때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이무 것도 아닌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이 지금 말 듣고 앉아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이 경을 읽고 있는 그 마음자리가 참 거울입니다. 돌을 갈아서 무엇을 비추게 했다든지 유리의 뒤에 약을 붙여서 비추게 하든지 해서 만든 거울은 죽은 거울이고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보배거울이 있습니다. 이것은 허공도 아니고 공기가 없는 진공도 아니고 물질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며 아무 것도 아닌 것조차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여기에도 무엇이 나타났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하나씩 가지고 있는 보배 거울인 것입니다. 지금 내가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유리가 물질로 만든 거울은 다 죽은 거울들이고 여기 우리의 마음은 즉 산 거울입니다. 아는 능력을 지닌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이 보배 거울은 생명이라고도 얘기할 수 있고 나의 참 모습이라 할 수도 있으며, 마음이라고도 할 수 있고 불성(佛性:부처될 요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마음은 무엇이든지 자기 마음에 맞지 않았을 경우에는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 마음은 작다고 한다면 작다가 작은 것도 없어져버린 경지, 말하자면 무한소(無限小)가 됩니다. 이 무한소는 결국 무한대(無限大)와 동일한 통일경(統一境)이 되어 마침내 모두가 다 <마음>뿐이고 <나>일 뿐입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나의 법문을 듣고 앉아 있는 여러분의 이 <아무것도 아닌 것>, <마음> 오직 그것뿐입니다.
무한소가 무한대로 통한다는 것은 우리의 전 우주가 다 이것으로 충만해 있기 때문이고 무한소·무한대로 한계가 없기 때문에 하늘·땅·태양계·은하계 할 것 없이 가득 차 있다는 말입니다.
한계가 있다면 어디는 있고 어디는 없어야 할 것이지만 이 마음은 무한소 그대로 무한대이고 전 우주 그대로이기 때문에 꿈을 꾸는 찰나에 우주를 이루고 시간세계·공간세계를 창조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작고 작은, 작은 것조차 없어진 이 무한소(無限小), 바로 그곳에 무한대의 세계인 대 우주가 나타났다는 겁니다.
우리가 꿈을 꾸는 그 꿈속의 우주나 생시에 보는 이 우주나 똑같은 우주인데 그 우주가 이 아무것도 아닌 여기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구도 있고 태양도 있고 별들도 있고 무한대 허공도 있고 모든 온갖 것이 다 이루어져 있는 겁니다.
▶꿈으로 불법을 이해하면 쉽다
이와 같이 마음을 꿈으로 풀어 보면 확실해지고 재미있습니다. 저녁마다 꿈속에서 우리가 대우주를 창조합니다. 그렇지만 꿈 세상이 생시에 살던 세상과 너무 똑같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꿈인 줄 모릅니다.
어머니가 나를 낳아서 유치원, 대학까지 공부시키고 했는데, 그리고 내 아들 딸들도 내가 나온 대학에 다 들어갔는데, 우리 어머니가 나를 낳아 키운 이 몸 말고 내가 어디 또 따로 있기에 이것을 꿈이라고 하느냐? 생시가 따로 있을 수 있느냐, 이렇게 됩니다. 감히 꿈이려니 의심도 안합니다. 그 꿈 세상이 참이고 생시라고만 믿고 살 뿐, 정말 생시는 아예 부인합니다. 그러다가 꿈을 깨고 나면 웃어 버립니다. 그래서 꿈이 되고 생시가 됩니다.
그런데 꿈속에서 수십 년을 살면서 아들 딸 다 낳고 교육시키고 하지만 꿈을 깨고 나면 손목시계는 1분도 안 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생시의 1분 이것은 참말로 알고, 꿈속의 수십 년은 거짓말인줄 알지만, 꿈나라의 시간도 역시 60초가 1분이고, 60분이 1시간이고, 24시간이 하루고, 365일이 1년인 그런 시간으로 아들 딸 여러 남매를 낳아서 키웠으면서 이것은 소홀히 압니다. 그러나 꿈은 천년 만년이지만 생시는 모아봐야 10년도 안됩니다. 이런 꿈과 생시가 번갈아 반복되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참말이고 어떤 것이 꿈이냐 한번 생각해 볼 일입니다. 1분전에 살던 생시를 꿈에 가서는 부인하지만 우리가 저녁마다 꾸는 꿈은 생시에도 부인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우리 머리에 어느 것이 더 많이 남아 있습니까? 꿈에 들어가서 깜박 잊어버리는 얼마 안 되는 생시, 이것이 꿈인가. 생시에도 잊지 못하는 천 년 만 년 되는 꿈이 생시인가. 생시를 깨면 꿈에 들어간 꿈이 되고 꿈을 깨면 생시에 들어온 꿈인데, 생시를 깬 꿈에는 생시는 완전히 부정됩니다. 또 간밤 꿈만 꿈이 아니라 생시에는 사는 것도 살아 놓고 보면 다 꿈입니다. 지나가고 나서만 꿈이 아니라 생시가 지나가기 전에도 깨어 있는 이대로 꿈입니다. 왜냐 하면 꿈을 깨기 전까지는 꿈인 줄을 확실히 모르기 때문인데 깨지 않고 꿈인 줄 모르는 그대로가 꿈이듯이 생시도 똑 같습니다. 생시가 꿈인 줄 모르는 생시 그대로 생시 그것도 꿈입니다.
한국 갑부가 되어 돈을 마음대로 쓰면서 몇 십 년 호강을 했다 하더라도 그렇게 하는 전체가 다 꿈입니다. 돈이 모였다는 것, 갑부가 되었다는 것도 꿈이고 거지가 되어 돌아다녔다는 것도 꿈이고 모두 헛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낮 꿈으로 나와 있으니까 이 낮 꿈을 깨기 전에는 이게 꿈인 줄 알 도리가 없지만 그것은 꿈속에서 꿈인 줄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꿈속에는 꿈 아닌 소식, 꿈밖에 있는 자기 참 얼굴은 모르고 꿈속에 행동하는 겉마음밖에 모르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래서 먹어야 한다는 관념 때문에 생존경쟁을 해야 하는 것인데, 이런 것들이 다 생시가 꿈인 줄을 모르기 때문에 저지르는 짓들입니다. 꿈에도 사실은 때가 되면 밥을 먹어야 하고 하루 세 그릇씩 꼭 먹어야 합니다. 그래서 꿈에도 싸움을 하고 전쟁을 하고 생존경쟁을 합니다. 1초도 안 되는 시간에 많은 싸움을 하고 생존경쟁을 하면서 수십 년 사는 꿈으로 됩니다.
연애 꿈을 꾸었을 때는 그게 꿈이 아니었더라면, 깨지나 말았더라면 할 것입니다. 연애도 오래 해 보고, 부자가 되어 자가용차도 타고 수천 명 부하를 거느리고 멋지게 살아봤으면 하고 꿈에서라도 이 소원을 성취할 수 있게 꿈 좀 꾸어 봤으면 좋겠다고 할 것입니다.
▶한 달 동안 꿈만 꾼 여인
옛날 평안도 어느 산골에 감자 농사나 지어서 겨우 살아 나가는 외딴 농가가 한 집 있었습니다. 하루는 사람을 사서 감자 밭의 풀을 매게 됐습니다. 아내는 집에서 감자를 가지고 적도 부치고 수재비도 만들어서 일꾼들의 점심을 해가지고 오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점심시간이 두세 시간이나 지나도 아내가 오지 않자 남자가 집으로 달려가는 도중에 아내를 만났습니다. 그는 점심을 가뜩 해 오다가 길옆에 내려놓고는 누워서 뒹굴고 웃고 헛소리를 하고 미쳐 있는 것이었습니다. 남자는 즉시 약을 먹이고 침을 놓고 온갖 수단을 다 썼지만 효과가 없었습니다. 들과 산으로 돌아다니고 춤도 추고 노래 부르고 웃고 또 내외간에도 말 못할 이야기도 막하고 그럽니다.
남자는 할 수 없이 아내의 손발을 묶어 방안에 가두고 재워 놓았더니 거의 한 달 후에 깨었습니다. 이리하여 제 정신이 돌아오기는 했는데, 웬일인지 자꾸 울기만 합니다. 하도 이상해서 친정어머니가 한 달 이상을 두고 달래면서 물어 보니 아버지한테 절대로 말하지 말라고 몇 번을 당부한 뒤에 다음과 같은 사연을 말했습니다.
「사람을 사서 일하던 그날 밥을 해 가지고 밭으로 나가려는 참인데, 웬 초립동 소년이 예쁜 당나귀를 타고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초립동을 보니 옷도 잘 입고 얼마나 잘났는지 세상 사람들과는 대조할 수도 없이 뛰어나 보였습니다. 이 초립동이 자기 옆에 탁 무릎을 꿇고 앉았다가 일어서서 하는 말이 ‘대단히 실례입니다. 우리 집은 아무 데에 있고 우리 부모는 누군데 정승 판서 집이고 농사는 수만 석을 하는 부자입니다. 내가 1년 전에 부잣집 처녀에게 장가를 들어 정이 깊이 들었는데 자식도 하나 낳아 보지 못한 채 금년 봄에 죽었습니다. 이렇게 홀로 된 나는 궁리하기를 죽은 마누라는 다시 만날 수 없으므로 할 수 없이 마누라와 똑같은 여자를 만나서 살겠다고 결심하고 이렇게 팔도강산을 헤매고 있던 중 오늘 이곳을 지나다 보니 당신은 우리 마누라와 조금도 안 다르고 똑같이 생겼습니다. 당신이 이런 두메산골에서 감자농사나 지어먹고 살면 되겠습니까? 지금 당장 이 당나귀를 타고 이 길로 곧장 갑시다. 이 당나귀는 하루에 천리를 가는 말이니 잠깐 가면 됩니다.’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만 마음이 끌려 살림살이고 뭐고 정신이 다 나가버린 채 그 당나귀를 타고 같이 가는데 어찌나 빨리 달리던지 삽시간에 강과 들판을 지나서 산골짜기를 들어가니 남녀 하인들이 마중을 나와 인사를 합니다. 그들 하인이 입은 옷 모양과 미모가 어찌 뛰어났던지 자기 같은 것은 곁에 서지도 못하게 잘 생겼습니다. 동구(洞口)안으로 들어가니 큰 동네가 있는데 전부가 기와집이고 낙원 같은 좋은 집에서 조부모 시부모도 마중 나와 환영해 주었습니다. 나는 데운 물로 목욕을 하고 그곳에서 주는 옷을 갈아입고서 거울에 내 얼굴을 비춰보니 내가 언제 이렇게 예뻤던가 싶을 정도였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살면서 해마다 아들딸을 자꾸 낳고 그 집의 살림살이도 다 차지했습니다. 예쁘고 잘난 얼굴만 해도 천당에 사는 느낌인데 아들들도 재주가 다 좋아서 공부 잘하고 참 재미나게 한 십년 호강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뜻밖에 전신이 아프고 몸이 부자유해서 고함을 질러 보니 꽁꽁 묶여 있는 것이었습니다.」하고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달 미친 짓하는 동안 15년을 살았고 그래서 꿈속에서 정든 아들과 남편이 보고 싶어서 우는 것이니, 이 소리를 누구 보고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이라도 한 번 더 미쳐 가지고 가 봤으면 좋겠다.」하면서 그 꿈이 그리워 운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꿈을 못 잊고 사는 것이 인간이기도 합니다.
▶꿈속에 평생을 산 조신대사
여하튼 중생인 우리는 마음을 깨치지 못하는 한 모두 꿈속에서 사는 것인데 전부 자기 마음으로 꿈을 꾸어 가지고 그 속에서 시집간다, 장가간다, 살림살이 차린다, 아들딸 낳는다 하는 것이니 마치 아까 산골 밭에서 정신 이상 된 여자가 정상(正常)을 잃은 채 웃으며 행복한 생활을 의식하는 꿈속의 생활과 같습니다. 요새 꿈에 대한 학자가 과학적으로 연구한 바에 의하면 꿈이란 큰 꿈이나 작은 꿈이나 최고의 시간이 45분이 걸린다는 것입니다. 이 45분이면 며칠도 되고 몇 년도 되고 일평생 되는 꿈으로도 된다는 것입니다.
조신대사의 실제 꿈을 이광수 선생이 「꿈」이란 역사소설로 엮어서 세상에 발표한 일이 있습니다. 옛날 신라 때 조신대사라는 스님이 강원도 낙산사(洛山寺)에 있을 적인데 법당에 사시마지(巳時供養)를 올려놓고 경쇠(법당에 있는 작은 종)를 땡하고 치는 사이 깜박하고 졸음을 조는 동안에 80년 긴 꿈을 경험했습니다. 이 경쇠라는 종은 천천히 때리면 소리가 죽고 힘껏 빨리 때리고 가만히 있어야 소리가 죽지 않습니다. 그 경쇠를 때리는 순간은 몇 10분의 1초에 불과합니다. 깜박하고 조는 순간 중노릇하는 현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꿈속에 들어가서 그 고을 사또님 심부름으로 마을에 내려가는 도중이었습니다. 내려가다 보니까 단골 신도인 무남독녀 딸 하나가 있는 신도 집이 있는 곳을 지나게 됐습니다. 그 집은 다른 일가친척도 없고 살림은 한 300석 하는 시골의 부자였습니다. 그 처녀에게 장가를 들면 누구든지 300석을 얻어 팔자가 핍니다.
그 집은 1년에 몇 번씩 조신대사가 있는 절에 오는 것으로 알고 있었고 그때마다 그 처녀가 어머니를 따라오는 것을 보아 왔는데 이제는 시집갈 때가 되었던 것입니다.
조신대사는 지나가는 길에 그 집에 들러서 인사나 하고 가기로 마음먹고 잠깐 방문했습니다. 사또님 심부름으로 어디까지 가는 연유를 말하니 돌아오려면 저물겠다고 하면서 집에 와서 저녁 자시고 가라고 친절히 해 줍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해 놓고 볼일 보고 늦게야 올라오다 보니 어두워지고 나서야 그 신도 집에 도달하게 됐습니다. 그 신도 집에서는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까 반찬감만 장만해 놓고 밥도 안 짓고 반찬도 안 만들고 있다가 조신스님이 들어오니까 하인에게 「밥해라, 반찬해라.」하며 부랴부랴 시켜 놓고는 스님과 법담을 하고 있었습니다. 집안식구 모두인 모녀도 이제까지 밥을 먹지 않고 조신대사가 오면 같이 먹는다고 기다렸다가 밥상이 들어오니 같이 먹도록 했습니다.
그때는 불교가 크게 융창했고 스님들에 대한 대우가 대신보다 더 존경하던 신라 때였습니다. 딸 방에서 진수성찬을 차린 저녁 밥상을 놓고 셋이서 같이 먹고는 법문해 달라고 해서 아는 대로 얘기해 주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이들은 그만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을 모른다는 식으로 시간이 오래 지나가서 한밤중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 사람들이 다 잠을 자는데 십여리나 가기도 어렵고 그 집에서는 자고 가라고 붙잡는 바람에 그대로 자게 됐습니다. 그리고는 어머니 신도는 어떻게 된 건지 그만 자기 딸과 조신대사를 한 방에 가두어 놓고 문을 잠가 버렸습니다.
조신대사는 그래서는 안 될 것인 줄은 알지만 어려서부터 잘 알고 서로 얘기도 하고 친숙하게 지내다가 그렇게 되어 놓으니까 그만 그날 저녁에 장가를 들어 버렸습니다. 이제 절에는 다 갔습니다. 그래서 지금 심부름 갔다 온 사정을 보고할 수도 없고 그만 그 집에 숨어 가지고 머리를 길러서 상투를 얹고 결혼식할 새도 없이 신혼생활을 했습니다.
그 해에 단번에 아들을 하나 낳았고 소문도 없이 감쪽같이 그러고 있는 판입니다. 그러데 해 마다 아들을 낳아 꼭 달팽이 같은 아들을 수두룩하게 낳았습니다. 그 놈들이 자꾸 크고 2살 3살 되면 천자 다 외고 글도 가르치고 했는데 공부를 다 잘합니다. 이렇게 해서 8년만에 아들 8형제를 낳았습니다. 그때는 한문 짓는 어려운 문장인데도 글 잘 짓고 글씨 잘 쓰고 그림 잘 그리고 말 잘하고 얼굴도 잘 생겼고 이래서 서울에 올라가면 단번에 급제를 합니다.
아들들이 경상 감사·전라 감사도 있고 평안도 충청도 나중에는 팔도강산에 다 자기 아들들이 있게 돼서 나라 임금보다 오히려 권력이 센 편이 됐습니다. 집안 살림도 300석짜리가 이제는 10만석이 넘었고 아까 나귀 타고 간 처녀보다 훨씬 더 재미나게 잘 삽니다.
그런데 큰 아들이 죽고 둘째 아들이 죽었고 그리고 나서 한 10년이나 지났는데 아들 딸 형제가 다 죽고 며느리 다 죽고 손주들까지도 다 죽어 버렸습니다. 이렇게 하여 끝내는 자기 마누라도 죽고 자기 혼자 늙은 몸으로 나쁜 부하들한테 재산도 다 빼앗기고 이제는 하인들까지 전부 다 달아나 버려서 자기 혼자만 남게 됐습니다. 아차하다가는 그 놈들한테 맞아 생명도 위험하게 되었고, 재산을 다 빼앗기고 보니 있는 돈이나 꾸려 꽁무니에 차고는 팔도강산 유람차 나섰습니다. 구경 다니는 판입니다.
세상이 허망해도 그렇게 허망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까 꿈을 깨어 가지고 자꾸 울어대는 그 여자보다 더 허망할 것입니다. 그래 이리저리 한없이 돌아다니다가 가을이 됐는데 해는 저물고 배도 고프고 다리도 아파서 길가 잔디밭에 두 다리를 뻗고 앉아서 신세 한탄을 하며 쉬고 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산 위로부터 절에서 종치는 소리가 은은히 울려 내려옴을 느끼고 근처 어딘가에 절이 있는가 보다 하고 가만히 살펴보노라니 자기가 10여 년 전에 살다가 떠났던 집 근처 낙산사에서 울려오는 종소리였고, 자기가 앉은 그 자리가 바로 자기가 살던 그 집터였습니다. 지금은 잔디밭이 되었고 쑥대들이 나오고 거기 있던 동네는 어디로 갔는지 다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제는 꼼짝없이 큰일 났습니다. 내 나이 벌써 아흔이 다 되어서 이제는 오늘밤에 죽을는지 내일 아침에 죽을지 모르는 판이 됐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하지 말라던 250가지 계를 낱낱이 다 파계하고 팔만 가지 세행(細行 : 주의할 작은 계)다 부숴 버리고 이제 눈만 감으면 꼼짝없이 지옥에 갈판이니 생각하면 전신이 떨려옵니다. 이제 곧 죽게 생겼는데 부처님께서 하지 말라는 것은 다 범해 놨으니 진작 이렇게 허망한 줄 알았으면 차라리 장가 안 가고 그날 저녁 내가 절로 올라갔으면 되었을 것이 아닌가. 그 하루 저녁을 못 참고 장가를 들었기 때문에 이제 죽기만 하면 지옥행은 끊어놨고 아들딸이 또 그렇게 다 죽을 줄도 모르고 있다가 이제 몸은 늙고 곰곰이 신세를 생각해 보니 기가 막힙니다.
그동안 하던 공부나 열심히 했더라면 성불했을지도 모르는데 아무것도 아닌 자기가 아무것도 한 것 없이 이 모양 이 꼴이 됐으니 내가 그렇게 어리석었던가 하고 탄식하며 두 다리를 뻗고 방성통곡하고 울다가 깨었습니다.
눈을 떠보니 자기가 깜빡하고 졸기 전에 경쇠를 치던 망치를 잡은 채 그대로여서 경쇠의 종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이었습니다. 몇 10분의 1초가 지났을까 말까 한 짧은 찰나에 90살이 지났으니 당시 스님의 나이 스물 대여섯 살이 되었다고 치면 한 60여년 근 70년쯤 지난 것입니다. 조신대사의 실제의 생활 경험이었고 인생의 일대 교훈이었습니다. 인간 세상이라는 게 일체의 꿈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생시는 곧 낮 꿈
지금까지 여러분한테 밤 꿈을 얘기했지만 우리가 깨어서 활동하는 생시라는 것도 낮 꿈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밤에 가서 꿈속의 생시라는 것도 만드는데 내 마음 가운데서 무한대 우주를 낮과 똑같이 건립한 때문입니다. 현 생시에 에너지로부터 모든 여러 가지가 창조되어 우주의 현실이 벌어졌듯이 이 꿈에도 가보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꿈속에서도 사업을 하게 되고 생활을 하게 되는데 불은 뜨겁고 물은 차갑고 소금은 짜고 설탕은 달고 하여 생시의 이 자연계와 똑같은 자연계가 있는데 그것은 모두 마음이 건립한 것입니다. 마음이 만들은 것이라기보다 마음이 그렇게 되었다고 해야 할 일입니다. 마음이 산도 되고 물도 되고 남자 여자 호랑이도 되고 구렁이도 되고 온갖 유정물이 되어 가는 것이 꿈의 세계, 즉 꿈의 우주인데 이렇게 될 수 있는 것은 다 전체가 마음뿐인 때문입니다.
가령 밤에 잠이 들어 자다가 이불 속에 자기 몸뚱이와 처자를 다 그대로 놓아둔 채 마음만 나와 가지고 꿈속의 세계를 새로 만듭니다. 그러나 나온 것도 들어간 것도 아니고 어디로 갔다 안 갔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만일 마음이 어디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한다면 세포 하나를 가지고 말하는 경우에도 이 마음은 수 억만 가지로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나를 중심으로 사는 중생이면서 제일 작은 것이 제일 큰 것이 되고 큰 게 작은 것이 되는 원리와 하나가 되다 보니 어디까지가 경계인지 그 한계를 지을 도리가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이 마음자리가 꿈에 가서 대 우주를 창조하게 될 능력이 있다 보니 꿈속에서 자기 몸뚱이를 끌고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고 아이도 낳아 기르고 하다가 그 살림살이 그대로 다 내 버리고 어딘가 다른 세계로 나오는데 그것을 소위 생시라고 말합니다. 꿈에 가서도 우주를 창조할 능력이 있으니까 생시에 나와 가지고도 다시 현실의 우주를 창조합니다. 생시에 마치 활동사진의 필름을 바꿔서 새로운 화면이 갑자기 나타나는 것과 같이 금강산이 나왔다, 지리산이 나왔다, 석굴암이 나왔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꿈을 깬다 하는 것은 내가 꿈을 꾼 그 자리에서 필름이 바뀌어 딴 필름이 돌아가게 되어 소위 생시라는 그런 영화가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밤의 꿈속에 있는 영화나 생시에 있는 영화나 다 마음의 조화로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건 밤 꿈이고 이건 낮 꿈이고 하지만 또 따지고 보면 꿈도 없는 것이어서 생시도 꿈도 아닙니다. 지금 말하는 이대로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러면서 밤 꿈은 확실히 낮 꿈과는 또 다른 겁니다. 다른 꿈이니까 밤 꿈은 낮 꿈이 아니고 낮 꿈은 밤 꿈이 아닌 것입니다. 밤에도 마누라도 있고 낮에도 그 남편 그대로이고 모든 것이 다 그대로 있는 것 같지만 확실히 밤 꿈에 만난 자기 마누라는 지금 생시에 있던 그 마누라는 절대로 아닙니다.
꿈에 같이 산 그 마누라가 틀림없는 자기 마누라이고 꿈인 줄도 모르고까지 살게 됩니다. 모든 것이 똑같으니까 서로 부둥켜안아 봐도 다를 바 없습니다. 그렇지만 낮에 있던 마누라는 꿈 세계로 들어갈 때 자기가 재워 놓고 간 자기 몸뚱이 옆에 자고 있으니까 밤에 있는 마누라와 다르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밤 꿈에 있던 자기 몸과 생시의 자기 몸과는 다릅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서 정말 다르지 않은 게 있습니다. 이것이 곧 <마음>입니다. 밤 꿈에서도 이 마음 그대로이고 낮 꿈에서도 밤 꿈에 있던 그 마음이 그대로 낮 꿈을 꾸는 격입니다. 여기에 대우주의 꿈을 똑같이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밤 꿈이 순전히 마음의 조화라고 말한다면 낮 꿈도 역시 마음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밤에 굉장한 창조의 힘을 발휘했다고 한다면 낮 꿈인 지금 이 순간에도 역시 그런 힘이 그대로 발휘되고 있을 것입니다. 꿈이나 생시나 마음은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조화하고자 하는 그대로 밤 꿈이나 낮 꿈이나 필름대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꿈속의 객관은 곧 나
마음의 본성을 깨치지 못한 범부중생들은 꿈속에 들어가서 꿈을 꿈인 줄 모르듯이 생시 이것도 낮 꿈인 줄 모르고 생시라고만 보는 겁니다. 우리가 꿈을 꿀 때 그것을 생시라고 느낄 뿐 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꿈이기 때문에 꿈을 깨 봐야 그것이 꿈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밤 꿈에 들어가서는 그것이 밤 꿈이고 생시의 낮 꿈이 있는 것을 알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실제로는 낮 꿈에 와서는 밤에 꾼 꿈을 기억할 뿐 밤 꿈에 있었던 일을 말 못할 내용도 있습니다. 가령 사람을 죽였다든지 윤리도덕을 어기면서까지 범행을 저질렀다든지 그야말로 생시에는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을 밤 꿈에 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말은 못하지만 기억은 하고 있습니다.
밤 꿈속에서 몇 시간 며칠을 살았지만, 끔을 깨어 보면 실제는 1분도 채 경과하지 않은 시간이지만, 그 1분전에 살던 낮 꿈 소식을 전혀 모르게 되는 것이 밤 꿈입니다. 다시 말하면 밤 꿈에 가서는 낮 소위 생시가 있다는 것을 부정해 버립니다.
밤 꿈에 생시를 모르고 밤 꿈을 꿈인 줄 모르게 되는 원인에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꿈이 현실과 너무나 똑같기 때문에 그걸 꿈인 줄 모르는 동시에 꿈 아닌 현실이 있다는 것을 전혀 망각하게 됩니다. 또 생시가 있었다는 것을 꿈에 들어가 아무리 설명을 하고 설득을 한다고 하더라도 듣지 않습니다. 우리 엄마가 우리 아버지와 연애해서 결혼하여 나를 낳아서 유치원에서 대학까지 보내고 내가 유치원 대학까지 나온 학교가 다 이렇게 엄연히 있는데 이 몸뚱이 말고 또 내가 어디 있겠느냐고 항의하게 됩니다. 이것이 왜 꿈이겠느냐? 소위 현실을 완전히 부인한다는 말인데 절대 부당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밤 꿈속에는 꿈 그것이 생시입니다. 소위 생시라는 것은 기억에서 사라지기 때문에 밤 꿈에 가서는 낮 꿈을 완전히 부인해 버립니다. 그러나 생시에는 밤 꿈을 우리가 부인하지 못합니다. 이런 걸 보면 소위 생시라는 이것도 밤 꿈을 깨듯 낮 꿈을 깰 수 있는 꿈이 아니겠느냐? 이렇게 생각할 수 있고 이것을 좀 에누리해서 밤 꿈 낮 꿈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밤 꿈에 들어가서는 낮 꿈을 다 부정했는데 이것은 낮 꿈 꿀 때 생각해 보면 참 섭섭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밤 꿈에서는 언제나 낮 꿈을 부정해 버리고 밤 꿈에 있는 그 몸뚱이만 참이라고 하고 낮에 있는 건 다 거짓이라고 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오늘 저녁에 꿈을 꾸어 대우주가 나타나고 또 이 마이크가 내 기억에 잠재해 있다가 꿈에 나타나서 대중이 가득한 이 법당 안에 내가 이 마이크 앞에서 법문을 하게 된다면 이 마이크도 내 마음을 나타난 것이고 이 육체도 똑같이 내 마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이 육체를 만약 <나>라고 한다면 이 마이크도 <나>라는 말이 됩니다. 내 마음에서 모두 다 나타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몸뚱이를 <나>라고 한 것처럼 여기에 있는 이 탁자도 나고 저 촛불도 <나>고 저 석등도 <나>고 종도 <나>고 이 앞에 정자나무도 <나>라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왜 그런 것들은 다 <나>를 안 닮았느냐? 그것은 이 육체에는 자유가 있고 감각이 있어서 연장에 발을 다치든지 고장이 조금만 나도 아픔을 느낍니다. 그런데 왜 다른 물건들은 다쳐도 아픈 줄 모르느냐? 그것은 다같이 <나>로 나타난 것이지만 객관으로 인정하고 <나>로부터 떼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찔리거나 부러지거나 불에 타거나 아무걱정도 안됩니다. 이 몸뚱이는 <나>라고 하고 애착을 했기 때문에 그래서 손등에 가시만 들어도 큰 문제이고 우주의 제일 큰 사고입니다. 이 육체의 경우도 몸뚱이가 <나>라는 애착을 완전히 떼어 버리면 객관처럼 도끼로 발을 찍어도 정말 아픈 줄 모릅니다. 객관의 물질들이 아무 것도 모르듯이 지금 이 몸뚱이도 꿈이거나 생시거나 마음에서 애착을 떼어 버리면 톱으로 몸뚱이를 썰어 내려가더라도 아픈 줄 모릅니다. 마음이 오로지 살아 있을 뿐입니다. 이 몸뚱이는 한 객관의 물질이고 <참 나>가 아니다. 그러므로 정말 몸뚱이를 완전히 버려 버린다면 창자가 썩어서 흘러 내려간다 해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낮 꿈의 현실도 나
꿈 자체가 마음에서 나타난 것이며 동시에 꿈속에 있는 객관들도 다 내 마음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따라서 마이크 기둥도 저 나무도 탑도 석등도 종도 전부 다 <나>라는 것을 앞에서 말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원리는 밤 꿈의 세계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고 낮 꿈의 현실에도 적용된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낮 꿈, 밤 꿈을 다 깨어서 밤 꿈도 없어지고 낮 꿈도 없어져서 마음이 오직 드러난 밝은 세계, 그래서 거짓으로 존재하는 객관과 이 몸뚱이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인데 그것은 기분을 완전히 떠나는 것입니다. 좋다 싫다 하는 기분, 밉다 예쁘다 하는 기분을 떠나야 됩니다.
모든 만물을 대할 때 모든 선입관·분별심 모든 기분을 떼어 버리고 무심하게 되면 곧 만물하고 나하고는 둘이 아니고 거리가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경계가 끊어져 버려서 객관·주관의 분간을 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부처님은 부처님이고 중생은 중생이고 보살은 보살이고 또 천당은 천당이고 지옥은 지옥이고 완전히 각각 다르게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중생들이 스스로 그렇게 다르게 만들어 놓으니까 그럴 뿐 실상은 다르지 않은 것이 달라져 있는 것입니다. 내가 늘 하는 얘기이지만 육체만을 나라고 애착하기 때문에 모두 객관이 되어 주객이 벌어졌고 전 우주가 다 그렇다는 것입니다.
꿈에 보는 태양도 억만리 허공 위에 떠가지고 열과 광을 발산하여 제일 무더운 삼복중엔 머리가 뜨거워 모자 안 쓰고 우산 안 들고는 도저히 밖에 나갈 수 없습니다. 저 태양은 여러 수억만 년 동안 저 허공 위에서 열을 쬐고 있다고 하겠지만 그러나 그것도 「태양은 저 높은 위에 뜨겁게 있는 거다」는 기억이 다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태양은 또 저렇게 먼 데 무한대로 먼 공간에 있는 것이라고 하는 생각이 꿈에 가서 무한대의 허공을 나타나게 합니다. 생각 그것이 그대로 나타난 겁니다. 따라서 그 생각하고 태양하고는 거리가 없습니다. 생각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나타난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 주관하고 객관하고는 거리가 없습니다. 주관 객관은 본래 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육체를 <나>라고 하는 착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거리를 인정하게 된 것뿐입니다.
<나>의 발하고 머리하고 사이에는 거리가 있겠지마는 「나」하고는 거리가 없듯이 몸뚱이의 어느 곳이든 <나>하고는 거리가 없습니다. <나>하고는 뒤도 등도 아닙니다. 이게 그대로 나입니다. 내 등이 내 뒤가 아니고 가슴이 내 앞이 아닙니다. 그저 이렇게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 전체가 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앞뒤도 없고 좌우도 없습니다. 발이 곧 <나>자신이므로 <내>밑에 있는 것이 아니고 머리 또한 <나>이므로 머리가 내 위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와 같이 내 마음에서 나타난 객관 일체가 다 <나>이니 거기에도 거리가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경계와 경계가 없고 주관 객관 사이에 거리가 없습니다. 전 우주 무한대의 극대(極大)와 원자·전자 같은 제일 작은 극소(極小)가 서로 거리가 없습니다. 곧 하나라는 말이니 현실의 객관이 <나>고 마음이며 <내>가 곧 현실이고 마음이어서 둘이 아닙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앞에서 말한 것처럼 조그만 거울에 서울이 나타났듯이 우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소위 현실이라고 하는 대우주가 곧 아무 것도 아닙니다. 대우주라고 하는 것이 작은 점 속에 있기 때문에 눈으로 볼 수 없고 현미경으로도 절대 볼 수 없을 겁니다. 작다가 작은 것까지 없어져 버렸단 말입니다. 그런 것들을 가지고 우리가 대우주라고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렇다보니 있다고 하는 대우주라는 것이 점도 아니고 점 속에 다 들었다 하더라도 점 그것마저 없어져서 없는 것조차 없다는 말입니다. 가령 없는 거라고 정한다면 있는 것이 없는 거고 없는 것이 있는 것이 됩니다.
「반야심경」에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것이 이것입니다. 색불이공은 있는 현재의 모든 것은 허공과 같고 아무 것도 없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뜻입니다. 또 「공불이색」은 아무 것도 없는 것 빈 것이라 해도 그 가운데 온갖 것이 다 숨어 있다 그 말입니다.
마치 텅 빈 방에 사람이 대여섯 명이 잠을 자는데 한 사람은 대구 꿈을 꾸고 한 사람은 부산 꿈꾸고 한 사람은 오대산 꿈, 또 한 사람은 설악산 꿈, 또 한사람은 서울 꿈을 꾸고 있다면 방 하나에 대구를 건설하고 설악산·오대산·서울을 만들고 별별 세계가 다 건설되어 있는 셈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업에 따라 천당도 지옥으로 볼 수 있고 복 지은 사람은 지옥을 가도 거기가 천당입니다. 착한 일 했으니까 착한 마음에서 나타난 행복스러운 영화가 생긴다는 말입니다. 죄 많은 사람은 천당에 올라가도 지옥으로 보인다는 겁니다.
제 마음이 나타난 것이므로 지옥과 천당을 자유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그 결과를 임의로 도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과에 따라 탄생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곧 마음이 지옥으로 나타나고 마음이 천당 사람 몸뚱이로 태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있다 없다 살았다 죽었다 하는 말이 안 된다는 겁니다. 가령 죽었다 살았다 하는 것도 꿈속에서 중생이 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과학을 한다, 철학·종교를 한다, 전쟁을 한다 해서 어느 나라는 지고 어느 나라가 이겼다고 하는 이 모두가 꿈입니다. 전부 거짓말이라는 겁니다. 석가여래께서 성불했다 그래서 49년 동안 중생을 제도했다는 그것도 모두 거짓말입니다. 이것이 다 꿈에서 하는 소리입니다. 내 꿈에 석가여래께서 지나가신 겁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이 몸처럼 보이게 된다는 겁니다. 없는 것같이 보이고 있는 것같이 보인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있는 게 없는 거고 없는 게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있다 없다」말하는 것이 다 틀린 겁니다. 있다 해도 안 맞고 없다 해도 안 맞고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라 해도 다 틀리고 하나도 없고 말도 없고 글도 없는 것입니다.
글자는 본래 내용이 없습니다. 가령 있을 유(有)자를 본래 없을 유자라 했다면 없을 유자라고 현재도 사용할 것입니다. 글자 자체는 아무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있다 없다는 글자가 따로 있다는 말은 확실히 있다는 말이고 없다는 말은 없다는 말이 틀림없으며 있다는 말이 없다는 말도 아니고 없다는 말이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확실히 우리는 다른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러나 무엇을 가지고 어떤 게 있느냐는 것을 깊이 따져 보면 있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지금 없다고 그러지만 무엇을 가지고 없다고 하느냐? 허공을 있다고 하겠습니까? 그러면 허공도 없어지면 그때 가서 없어지는 거냐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모두 내 생각입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내 생각이 이러니까 모두 생각으로 그렇게 보이는 겁니다. 또 생각이 그렇게 되면 그것이 나타나 보이게 됩니다.
▶부처도 중생도 생각도 몸도 다 꿈이다.
이 모두가 꿈이라는 겁니다. 부처도 꿈이고 중생도 꿈이고 우리가 보고 듣고 생각할 수 있는 게 전부다 꿈입니다. 하나도 실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있다고 해도 말이 되고 없다고 해도 말이 되고 있다 해도 말이 안 되고 없다 해도 말이 안 되고 이렇게 안 되기도 하고 안 되고 된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보고 자유라고 하겠습니까? 다 없어져 버린 것뿐입니다. 철학자·과학자·종교가가 와도 모든 문제에 대해 그 사람하고 똑같이 이해하고 얘기하고 듣고 긍정할 수도 있지만 또 그것을 근본적으로 절대 부인할 수도 있습니다. 부처님까지도 꿈이고 다 쫒아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쫒아가는 것도 다 꿈이고 이론으로 거부하는 것도 꿈이고 모두 꿈인 것입니다.
인생과 우주의 현실 그대로가 낮 꿈 밤 꿈인 줄을 대오(大悟)해서 모든 것을 쳐부술 수도 있고 다 받아들일 수도 있는 경지에 들어간다면 정말 마음 턱 놓고 이제 할 일도 없고 생각할 것도 없고 낮잠을 잘 수도 있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인생의 생사대사(生死大事)를 해결할 수 있고 어떤 마음도 가질 수가 있지만 이와 같은 마음의 바탕에 못 들어갔다면 어떤 이상을 가지고 마음 놓고 실현할 수 없습니다. 무엇인가 한 가지 근심걱정이 생기게 됩니다. 있을 것이 없어 걱정이 되고 없었던 사건이 또 생길까 걱정이 됩니다. 꿈에 가서도 걱정이고 잠을 자도 잠 속에서 잠재의식에 사로잡혀 몸부림치게 되어 언제나 마음이 편하지 못합니다. 잠재의식이 꿈에 나타나기도 하고 안 나타날 때도 항상 마음속에서 잠재력으로 영향되고 움직입니다.
가령 우리가 한편으로만 누워 있게 된다면 아파서 다른 방향으로 돌아눕게 됩니다. 이 몸뚱이가 정말 있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꿈에 가서도 자꾸 돌아눕게 되고 오래도록 앉아 있게 되면 궁둥이가 아파서 일어났다 앉았다 하게 됩니다. 꿈속에 있는 궁둥이가 정말 이렇게 아프겠습니까? 그건 아플 수도 없고 앉을 수도 없는 겁니다. 아무렇지도 않아야 할 꿈의 몸뚱이입니다. 그러나 꿈에서도 감기 들어 놓으면 약을 먹지 않고는 일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또 기도해야 병이 낫습니다. 만약 현실이 확실히 꿈인 줄로 증득되지 않는다면 「오늘까지 한 공부가 다 되었나 보다」하는 생각을 지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제 이 세상은 꿈과 같다. 그러니까 「이 생시가 허망한 것이구나」하고 단정하게 되는데 꿈과 같은가 보다 하는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가지고는 그것은 착각입니다. 그렇게 생각해 볼 도리가 없습니다. 그런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가지고는 그것은 착각입니다. 그렇게 생각해 볼 도리가 없습니다. 그런 정도의 생각으로 경을 봐서는 팔만대장경 거꾸로 외워내더라도 부처님 말씀 한 마디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정말 꿈인 줄 알면 금강경 전체 내용이 하나도 어려울 것 없습니다.
제17 구경무아분(究竟無我分) 가운데 일체법이 즉비일체법 시고명일체법(卽非一切法 是故名一切法)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일체법이라고 하는 것은 저것은 동물이고 이것은 사람이고 저것은 나무고 이것은 돌이다 하는 현상계의 삼라일체를 통털어 말합니다. 우리는 이것은 불법이니까 정법이고 저것은 모두 다른 교당에 나가는 외도니까 사도라고 합니다. 불법이 마음의 법인데 마음 밖에서 진리를 구한다고 해서 이름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혜안(慧眼)으로 보면 일체법이 따로 있고 불법 아닌 다른 외도가 있고 외도가 아닌 불법이 홀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꿈에 가서 부처가 있고 석가가 있다 해도 꿈에 도깨비가 나와서 설법한 것에 불과합니다. 불교도 유교도 기독교도 다른 외도도 다 꿈에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꿈의 전부는 마음의 한 개 장난의 조화입니다. 그러니까 옳고 그른 것도 없고 전부 꿈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 몸뚱이 하나만을 내라고 해 가지고 하루 밥 세그릇 먹어야 하는 이 사고 때문에 전쟁을 해야하고 새파란 젊은 사람들이 총을 메고 싸움터에 나가야 합니다. 죽게 되니까 전쟁에 나가서 죽는 그 시간만이라도 더 살아 보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불쌍한 것이 인간입니다. 어서 깨어나야 할 꿈입니다.
▶미친 것도 꿈
일본 식민치하에 있을 때 만주에 가 있던 한국 사람들이 모여 사는 부락이 있었습니다. 그때 만주에서 일본사람들이 만주를 점령하려고 만주 동쪽 땅을 토벌하려는 때였습니다. 그런데 한국인 한 사람이 어디를 갔다 오는데 자기 부락이 온통 수라장이 된 것을 보았습니다. 일본사람들이 와 가지고 무조건 한국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이 있기만 하면 총살시켜 버리고 석유를 뿌려 불을 질러 참멸시킨 것입니다.
동포와 가족들은 죽은 시체로 나둥그러져 있고 집과 재산은 탄 채 재만 남았고 온통 쑥밭이 된 것입니다. 이 사람이 그런 비참한 광경을 보고서 그만 미친 사람 모양으로 고성을 지르고 대성통곡을 하며 웁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어디 두고 보자, 내가 꼭 이 원수를 갚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부산 가는 기차에 막 뛰어 오는 겁니다. 기차를 못 타게 하면 막 죽이려고 합니다. 「너희 놈들만 타라고 만든 기차냐? 왜 조선 사람은 못타느냐? 네 놈들만 잘 살 줄 아느냐?」고 두서도 없이 욕을 마구 하며 달리는 차에 뛰어올랐습니다. 감시원도 감당할 수가 없어서 그대로 목적지인 부산까지 갔는데 차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경찰서로 들어가서는 서장을 보고 내가 지금 돈이 하나도 없으니 당신이 돈을 내라는 겁니다. 하도 기세가 대단하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당신이 누구요, 무슨 용건으로 왔소?」하며 호통을 쳐도 어서 잔말 말고 내가 필요한 돈이나 내 놓으라고 생떼를 쓰고 막 쓰러져 버리는 겁니다. 서장도 그 기에 눌려서 그만 얼떨결에 돈을 주어 보냈는데 이 사람은 도리어 고약한 놈이라고 마구 욕을 하며 고맙다는 말도 없이 그냥 나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 모두 나누어 주고 올 떼 갈 떼 없는 거지에게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정말로 미쳐 가지고 그러는 것이 아니고 너무 분개한 일념으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초인간적인 힘을 발산하는 것입니다. 울다가 웃다가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독립만세를 부르기도 하고 몇 달씩 제대로 먹은 것도 없는데 얼굴도 별로 축난 것도 없고 힘도 더 셉니다.
이 사람의 소문이 굉장하게 나 있었을 무렵 그해 칠월 백중날 내가 어느 절에 가서 있을 적인데 마침 어느 날 그 절에 이 사람이 온 일이 있었습니다. 내가 곁에 가서 「선생님 심정을 내가 잘 알고 있습니다. 평생을 두고 울다 죽어도 분함이 풀리지 않겠지마는 마음을 진정하시고 방에 잠깐 들어가서 이야기나 좀 합시다.」하며 좋게 대해 주고 자기 심정을 알아준다고 하니까 아무 말도 않고 방에 따라 들어 왔습니다. 「그동안 음식을 제대로 잡숫지도 않으셨을 텐데, 여기는 음식도 많은 데니까 오늘 여기까지 오신 김에 한번 실컷 잡수시기 바랍니다.」하고 상을 차려서 갖다 주고 옆에서 많이 드시라고 권하면서 먹는 걸 봤는데, 몇 달 동안 먹지 않고 있다가 먹으니 굉장합니다. 밥이 적은 듯싶어서 남은 밥 다 갖고 오라고 하여 주었더니 나물하고 김치하고 국하고 밥하고 주머니 속에서 자기가 차고 다니는 고춧가루를 꺼내서 큰 그릇에다 한데 붓고는 숟가락을 댓 개 가지고 척척 비비면서 침을 꿀꺽꿀꺽 넘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 밥을 잡수시는 데까지 한번 잡숴 보십시오.」하니까 먹기 시작하는데 그 많던 밥을 다 먹는 겁니다. 소금보다 짠 김치를 막 먹고 고춧가루를 너무 많이 넣어서 보통사람은 도저히 먹지 못할 짜고 매운 것을 막 먹는 겁니다. 원체 마음이 한데 몰려서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아무 음식이나 의식과 애착이 없다는 겁니다. 이 많은 밥을 다 먹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위장이 늘어나지도 않고 아무 탈이 없습니다. 소화도 잘 될 거라고 마음을 과감하게 먹었기 때문입니다. 옆의 일행에게 물어보니 석 달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도 얼굴 하나 축나지 않았고 기운도 펄펄하다는 겁니다. 마음속에 일본 사람 죽이려는 생각 하나뿐 해가 뜨고 지는 것도 모르는 정신일도(精神一到) 상태이기 때문에 밥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그것을 생각하지 않는 까닭입니다. 그러니 굶었다는 생각만 안 하면 배도 고프지 않고 축이 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거리에 다른 미친 사람들을 보아도 남자, 여자 미쳐가지고 열흘씩 한 달씩 아무 것도 안 먹고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있지만 얼굴이 그렇게 흉하게 축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그 사람들 나체로 다닌다고 미쳤다고 하지만 이 사람 사실 미친 것이 아닙니다. 가령 연애하다 실패했다고 한다면 보고 싶은 그 한 생각뿐이어서 보고 싶으면 봐야 하는데 어떤 장애가 생겨 가지고 소원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그 분한 생각, 보고 싶은 생각 일념뿐이지 먹었든지 굶었든지 그런 것은 다 귀찮다는 겁니다. 이렇게 한 생각으로 미쳐서 딴 세상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 남자도 이렇게 일본 사람에 대한 적개심 일념으로 미쳐서 일본 경찰만 보면 욕을 하고 그러다가 결국은 경찰서에 붙들려 유치장에 갇히었습니다. 독방을 정해 주고 음식도 자기 집에서 먹는 이상으로 갖다 주고 건강진단까지 해서 가두었는데 음식을 먹지 않습니다. 하루 이틀 동안은 먹지 않는다 해도 닷새 이상은 굶을 수 없겠지 생각했는데 그러나 닷새가 되어도 계속 안 먹습니다. 그럭저럭 일주일이 되었을 때까지 물 한모금 안 마셨는데도 얼굴이 축나지 않고 눈 딱 감고 꼭 참선하는 사람모양 앉아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3주일이 되던 날 담당 의사를 불러 체중을 달고 건강진단을 했는데 3주일 전에 달아 보던 체중이 변함없이 그대로 있더라는 것입니다. 진맥을 해 봐도 그대로 있고 그래서 이 사람이 어찌하여 이러냐고 물으니까 담당 의사 말이 내가 알고 있는 의학지식으로서는 도저히 판단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본인 보고 얼마나 더 건강을 유지할 수 있겠느냐고 물으니, 「나는 그것을 대답할 기력도 없지만 내 추측으로는 이 체질 가지고 3주일 동안 조금도 축나지 않았으니 앞으로 또 3주일까지는 이렇게 더 있을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의 이런 추측이 어떤 근거가 있어서 하는 말은 아니다.」하면서 굳은 표정으로 나가더라는 겁니다.
그 후 또 3주일 동안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동상같이 앉았는데 마지막 3주일째 되던 날 그대로 쓰러져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6주일 40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은 채 동포를 학살한 일본 경찰들, 그리고 자기를 유치장에 가둔 사람을 원망하고 간 겁니다. 「고약한 놈들, 나쁜 놈들, 내가 뭐 잘못했다고.」 이렇게 원망하는 일념으로 차라리 내가 사형을 당하느니 네 스스로 깨끗이 이곳에서 죽자는 일념으로 지낸 겁니다. 처음 3주일 동안은 날짜가 지나간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는데 담당자가 3주일이 지났다는 얘기를 해 주어서 비로소 3주일이 지나갔다는 인식을 했습니다. 만일 이 때 주위 사람들이 이 사람에게 6주일이란 날짜를 인식시켜 주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 보다 더 살아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 사람의 꿈이 깨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육체가 꿈인 줄 몰라서
육체를 <나>라고 하기 때문에 공포증이 나고 분하고 억울하고 편하지를 못한 마음이 항상 우주에 가득 차 있습니다. 시집을 가면 별수 있을까 하여 트집을 잡고 시집을 가보지만 별수 없습니다. 첫날 저녁부터 맞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시집을 가나 안 가나 1초도 마음 편할 시간은 없습니다. 잠이 들어도 편하지 못합니다. 홧김에 술이나 한 잔 먹자고 병으로 되로 들이마셔도 마음이 편하지 못합니다. 술이 취하면 마음이 더 불안해 집니다. 취중에 진정하라고 술이 만취돼 버리면 할 소리 안 할 소리 평소에 비밀로 간직해 놓았던 불평불만을 다 얘기해 버리게 됩니다. 나중에는 그 불평을 털어 놓은 줄도 모르고 코 깨지고 소리치고 다 해 봤자 하나도 편하지를 않습니다. 본마음을 잘 모르고 인생을 잘못 살아가기 때문에 마음속이 항상 편하지 못합니다. 아무 것도 모를 것 같지만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다 무의식적으로 하게 됩니다.
미쳐서 옷을 훌렁 벗어버리고 나체가 된 채 길을 활보하는 미치광이를 더러 볼 수 있습니다. 혹은 요즘 히피족 모양으로 옷에 온갖 잉크를 다 바르고 살에도 바르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의젓하게 다니는 광인도 있습니다. 이들은 쓰레기통에서 썩은 고기·창자·닭 창자 이런 것을 주워 먹습니다. 그래도 아무렇지도 않고 병도 안 나고 또 석 달, 넉 달 밥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은 채 돌아다닙니다. 평소에 십 배, 백 배나 떠들면서 굶고 돌아다니지만 성한 사람보다 기운이 몇 배 나 더 셉니다. 소위 미쳤다고 하는 그때는 모든 속박으로부터 마음을 탁 놓았기 때문입니다.
처녀가 십년동안 열렬히 연애를 하다가 남자로부터 버림을 당해서 마음에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머리를 풀고 나서면 그때에는 세상에 아무 것도 쓸데없이 됩니다. 믿고 믿었었는데 그 자식 그런 줄 누가 알았느냐? 이젠 남자는 다 싫어졌고 다시는 연애 안 하고 시집 같은 거 안 간다는 겁니다. 탁 놔 버리면서 하하 웃고 나서는 그때부터 자유입니다. 아무것도 근심 걱정이 없게 되는 겁니다. 또 미친 사람이 하는 말들은 대개 다 옳은 말만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소위 미쳤다 고하는 그때가 제일 건전한 상태입니다. 하고 싶은 말 그 자리에서 바로 다 하고 죽는 거, 사는 거 걱정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아무것도 믿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나도 못 믿겠다는 겁니다. 내가 나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그 청년이 나를 괄시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총각만 보면 보기도 싫어집니다. 다 그놈이 그놈일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을 탁 놔 버리게 됩니다.
남자도 여자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참 불쌍한 인간 현황입니다. 이렇게 되면 어떤 일도 마음에 맞을 수 없고 믿을 사람도 없습니다. 이 우주는 한 곳도 믿을 데도 없고 의지 할 수도 없고 그래서 모든 것을 단념하고 마음 탁 놓게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미치지 못해 가지고 어디에 구속되어 있는 셈입니다. 혹 행여나 싶어서 구속되어 견디어 보면 좀 나아지려니 하고 날마다 해마다 속아서 나중에는 70, 80된 후에 늙어서 죽게 됩니다.
여자는 말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시집 잘못 간 한탄이 굉장합니다. 이 문둥이 같은 인간한테 시집을 잘못 와서 내가 이 고생을 한다는 것입니다. 늙은 여자는 나중에 자식에 대한 원망이 큽니다. 자식한테 천대를 받고는 다 젊어 시집 잘못 간 것 후회합니다. 청춘과부도 자식들 불쌍해서 돌보기 위해 머리가 하얗게 세도록 어려운 고비도 다 참아 가며 남한테 천대 받아 가면서 시집 안 간 것인데 자식들은 이제 와서 어머니 고생한 것 만분의 일도 안 알아줍니다. 그런 얘기를 하려 하면 들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이럴 줄을 알았으면 벌써 시집이나 갈건 데 괜히 청춘과부로 늙었다고 후회가 되어 죽겠다는 겁니다.
▶꿈인 줄 몰라 철저한 원수로
이것은 여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남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하나 들면 청년 순경 한 사람이 후처를 잘못 얻어 자식에게 못할 일을 한 비통한 얘기가 있습니다.
그 순경은 본래 자기 아버지가 새로 맞아들인 어머니한테 무서운 천대를 받았습니다. 밥도 안 먹이려 하고 옷도 안 입히려 하고 학교도 보내지 않으려 했는데 겨우 아버지 덕으로 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학교수업이 끝나면 자기 아버지한테 갑니다. 자기 아버지도 순경이었으므로 학교에서 지서로 갔다가 저녁에 아버지하고 같이 집으로 갑니다. 그것은 계모가 자꾸 때려주고 구박을 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순경은 자기 아들을 가만히 쳐다보면 피를 토할 것 같은 심정입니다. 그렇지만 이제 와서 새 마누라를 도로 가라고 하지는 못하겠고 자식한테 대하는걸 보면 당장 총살이라도 하고 싶지만 그러지도 못하고 부자가 함께 눈물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은 결심하기를,「나는 어린 자식을 두고 마누라 죽으면 절대 장가 안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자기도 불행하게 마누라가 일찍 죽었습니다. 젊은 몸으로 혼자 살 수는 없으니까 장가를 가고 보니 그 사람 아들이 자기 어렸을 때처럼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기도 또 순경이 되었는데 학교 안 가는 일요일에도 아버지 없이는 하도 구박을 하기 때문에 밥도 먹을 수 없고 집에 못 들어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꼭 데리고 가서 옆에 앉혀 놓고 밥을 먹는다는 겁니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 아침에 아들이 자기하고 밥 먹고 나서 역시 낮에도 집으로 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데리고 바람도 쐴일 겸 들로 나갔다가 그 아들이 어느 다리에 올라서서 기둥에 걸터앉아 있게 되었는데,「네가 이렇게 살면 무엇을 하느냐」는 생각이 든 아버지는 등 뒤에서 총을 쐈습니다. 자기도 총을 쏴서 부자가 죽었다는 얘기입니다.
꿈속의 아무 것도 아닌 인간인데 철저한 원수가 되어 가지고 내생에 또 만나서 그 여자하고 아버지하고 아들하고는 서로 원수가 되어 너 때문에 내가 죽고 나 때문에 네가 죽고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중생생활을 하다 보면 그 누구도 이러한 경우를 만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불법도 낮 꿈 밤 꿈 깨자는 것
마음을 깨쳐 자아완성을 하면 남자가 여자를 봐도 아무런 생각이 안 나고 남자를 봐도 아무 생각도 안 납니다. 이렇게 일 없는 한가한 사람이 되고 부처가 되어야 마음이 편하고 태산같이 든든해지고 우주가 나 자신이고 우주의 일이 전부 내 일입니다.
따라서 중생은 한이 없기 때문에 중생 하나하나를 다 따라다니며 타이르고 깨워 줘야하고 밥 먹여 줘야 하고 옷 입혀 줘야 하고 이렇게 거들어 주면서 발심시켜 꿈을 깨도록 해 줘야겠습니다. 결국 부처님 49년 동안 설법하신 것도 꿈을 깨라는 말씀뿐입니다. 이제 꿈을 완전히 깨어서 꿈속의 의식을 깨고 잠재의식까지 깨워야 됩니다. 그러니까 의식이 통일되고 잠재의식이 통일되어야 하는데 잠재의식에도 계단이 있고 깊이가 있습니다. 잠재의식이 7할쯤 움직이는 것도 있고 또 좀더 들어가면 5할 움직이는 것, 또 깊이 더 들어가면 10분의 5할 움직이는 것, 10분의 1할 움직이는 것, 그것도 만분의 1할 움직이는 것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이 모든 잠재의식이 다 정리되어지도록 공부하는 법이 있습니다. 그 공부는 먼저 공부한 선각자(先覺者)한테 의지해야 합니다. 공부를 해 보면 정말 재미있습니다. 돈 모으는 것 보다 훨씬 더 재미납니다. 점점 마음과 정신이 밝아지고 깨끗해지고 아무 근심걱정이 없고 해탈의 경지에 깊이 들어가게 되어 모든 것을 차차 다 알아지게 됩니다. 아까 강원도 여자가 밭에 점심을 가지고 가다가 도깨비한테 홀려 15년 동안 잘 산 것처럼 확실히 그 여자는 꿈속에 애착을 가지고 생시와 다름없이 15년을 잘 산 것인데 생시의 보름이 꿈속의 15년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마음이 도깨비에게 홀린 격이지만 그래도 꿈 복이 있었기 때문에 아주 잘 사는 도깨비에게 시집을 가서 애기도 낳아 주고 호강도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낮에는 낮 꿈이 되어 있고 밤에는 밤 꿈이 되어 있듯이 그 도깨비한테 홀려간 것도 사실은 도깨비한테 홀린 것이 아닙니다.
지금 산골에서 호미로 밭을 매고 있는 것도 꿈이라는 점에서는 결국은 도깨비한테 홀린 것과 공통됩니다. 거기서도 도깨비한테 홀려가지고 있는 것이고 지금 말하는 생전이라는 것도 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 기왕에 홀린 바에는 다시 한 번 좋은데 홀려 가지고 그 당나귀 타고 다시 한 번 더 가보면 좋겠다는 그 말은 무리가 아닙니다.
이 모두가 다 꿈이라는 것입니다. 이것도 꿈이고 저것도 꿈이고 또 현실이라면 이것도 현실이고 꿈도 역시 현실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똑같으니까 무시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깨닫고자 하는 이 마음이 전부 이렇게 만들어서 천당 꿈을 꾸어 보고 지옥 꿈을 꾸어 보고 중생 꿈을 꾸어 보고 남자 꿈·여자 꿈·아이 꿈·어른 꿈도 꾸어 보고 그런 중생놀음을 하고 있단 말입니다. 제 마음 뜻하는 대로 선(善)이 아니면 악(惡), 악이 아니면 선, 선도 악도 아닌 멍청한 짓 중에 어느 짓을 하게 됩니다. 소위 수도(修道)한다고 하는데도 멍청하게 선도 악도 아닌 무아지경에 들어섰다 하고 정신 통일했다 하고 자기 마음을 깨우친다고 하지만 의식에서 망상을 내고 있거나 망상을 갈아 치라고 거부합니다. 또 망상을 그대로 두어도 안 되고 망상을 떼어도 안 되는 것이며 성불한다는 생각도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가 정신통일하고 선정(禪定)상태에 들어가는 것을 번뇌망상을 쉰다고 합니다. 번뇌망상을 쉬어 가지고 더욱 정밀하고 깊은 선정에 들어가 오래 있으면 신통이 난다고 합니다.
실달태자가 마음을 깨쳐 석가여래께서 될 수 있었던 것도 6년 동안을 꼬빡 앉아 가지고 이렇게 선정을 닦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섣달 여드렛날 새벽에 별 뜨는 걸 보고 묘하게 깨쳤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깨친 뒤에 보니 내가 실달태자로 있을 적에 세상이 허무해서 싫다고 짜증을 내고 그랬는데 그 놈이 바로 그놈입니다. 실달태자가 한참 인간염증이 나서 「왜 늙어야 하고 병들고 죽어야하는가?」하고 생각하던 바로 그 마음을 깨친 것이며 깨치고 보니 바로 그놈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생각을 깨친 것은 아니며 생각을 내는 마음을 깨친 것인데, 마음을 깨치면 깨친 그 마음으로 생각을 알고 세상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게 묘법이란 것입니다. 묘한 깨침이란 말입니다.
불법은 마음 깨치는 공부이므로 지식이나 학문하는 태도로 임해서는 석존의 깨달음을 몸소 자기 것으로 체득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그 경지에 도달해서 성불하기 전에는 불가능하며 이것은 오직 석가여래 한 분만이 우리에게 전해 준 소식입니다.
이제 마음을 깨치는 선법(禪法)에도 전문적으로 하는 달마선(達磨禪)과 천천히 닦아 익히는 의리선(義理禪)이 있습니다. 달마선이란 <마음>을 곧 깨치는 선법으로 고속으로 가는 방법이고 의리선은 과학적·철학적·이론적으로 따져 볼 것 다 따져 가며 닦는 방법입니다.
비유하면 여러 수억만㎞의 거리를 올라가는데 제트기나 우주선 로켓 같은 것을 타고 가는 것이 달마선인데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다 위험한 것입니다. 인력거나 자동차나 우마차를 타고 천천히 올라가는 것이 의리선인데 그러나 의리선도 지도자 없이는 정말 위험합니다. 중간에 가다 보면 자꾸 주저앉게 되고 또 마음 세계의 과정을 모르고 잘못되면 허황된 또 다른 꿈속 세계에 빠져서 잘못되기 때문입니다.
▶꿈과 같은 것이 아니라 꼭 꿈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모든 것이 너의 업으로 있다. 하나의 환상이고 몽환(夢幻: 꿈)이지 이것이 참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여몽환(如夢幻)하니까 이 세상이 꿈과 같다, 이렇게만 해석을 하고 넘어가는 데 있습니다. <여몽환>이란 여(如)자가 비슷하다 같다는 뜻이 아니라 꼭 그렇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꼭 꿈이다, 참 꿈이다.」 그래야 합니다. 불교에서는 여여(如如)다 진여(眞如)다 그러는데 이때 여(如)자의 뜻은 「비슷하다 닮았다」 그런 뜻이 아니고 「꼭 그렇다 바로 그것이다」이렇게 새깁니다. 그러면 <여몽환>(如夢幻)의 여(如)도 비슷하다는 뜻이 아니라 <여여>하다 꼭 같다는 뜻으로 봐야 합니다. 그러므로 불교 이대로가 정말 과학이고 물질세계의 그대로가 꿈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자연계 이대로가 꿈이라는 겁니다. 꿈이라는 게 아무 것도 아닌 게 아니고 요새 공산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유물사상 그것이 꿈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만일 이것이 꿈인 줄 모르고 참선하는 이는 신도이거나 스님이거나 간에 참선이 잘 안됩니다.
무언가 자기가 이 세상에 원한이 있다고 오인하게 되고 그 한이 가슴 속에 남아있는 한 사람을 원망한다든가 하게 되어 아무리 참선을 해도 안 됩니다. 어떤 여인이 첩 때문에 억울하게 남편을 뺏기고 아들딸과 집까지 뺏기고 입은 옷 그대로 쫓겨난 여자가, 분하고 세상이 원망스러워서 비구니가 되었다고 하면 그 귀여운 자식들 생각이 눈에 선하고 남편에 대한 원망이 마음속에 가득 차게 됩니다.
이것이 곧 업장(業障)인데 이 장애의 경계선이 가로막혀 절대로 안 됩니다. 그러므로 참선을 하려면 우선 남을 사랑하는 생각이나 미워하는 생각을 일체 다 버리기 전에는 절대 견성을 할 수 없습니다. 그걸 일단 떠났을 때 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런 대로 발심을 한번 해 놓으면 됩니다. 어느 땐가는 선지식(善知識)만 만나 가지고 이런 법문 듣고 번뇌망상 탁 집어 내던질 기회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인연이 되는 것인데, 만일 또 그렇더라도 이런 보통 사람은 마음 속 깊이 남아 있는 집착을 잘 모릅니다. 말로는 「나는 집착 다 떼어 버려서 없다」고들 하지만 없기는 뭐가 없습니까? 잠재의식 속에 꽉 막혀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업장이 잠재의식으로 남아 있어서 참선이 잘 안되거나 염불이 잘 안되고 다라니를 해도 일념(一念)이 안 될 때에는 참회를 하라는 것입니다. 부처님한테 절을 천배 만 배하고 참회를 하여 업장이 녹아 내려가고 나도 모르는 잠재의식이 뿌리째 뽑아져 버리기 전에는 참선도 견성도 아무것도 안됩니다. 그래서 옛날 스님들도 공부하다 안 되면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업장과 잠재의식을 완전히 참회하지 않고 참선하다가는 크게 잘못될 수가 많습니다. 참선을 열심히 해서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며칠 안 있으면 견성할 정도가 되었을 때 미쳐 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공부하다 미친 사람은 완력도 광장하고 무서워서 갈 수도 없습니다. 벽이나 돌담 같은 것도 탁 치면 무너지는 정력이 나옵니다. 그래서 어쩌다가 마음을 쉬어가지고 약을 먹고 미친병이 다 낳아서 다시 공부를 시작했을 때 견성 직전쯤 가면 다시 미쳐버립니다. 이런 사람은 다 그 사람의 중죄업장(重罪業障)이 잠재의식 속에 남아 있다가 참선할 때 참선한 큰 힘을 타고 나타난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다 공부가 되고 다른 망상은 뿌리가 뽑아졌는데 마지막 그놈만은 잠재의식 속에 있다가 참선을 하게 되면 참선과 싸웁니다.
우리가 참선할 때 졸음이 오면 화두(話頭 : 참선하는 마음을 이끌어 가는 과제)하고 잠싸움하는 것과 같습니다. 온 마음하고 잠하고 싸우다가 지치면 화두가 졸음에 지듯이 나중에는 업장 그놈만 남아서 마음이 감당을 못하게 되면 미쳐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업장이 지중한 사람은 업장하고 옥신각신 싸우다간 미치기 쉬우니, 이런 사람은 참선이나 다라니보다는 먼저 관세음보살님이나 지장보살님한테 기도해 가지고 업장이 다 없어지는 상서라도 있어서 꿈이거나 생시거나 이런 징조를 먼저 얻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번에 금강경 산림을 마치신 분들은 모두 다 금강경의 정법을 신수봉행(信受奉行)하는 비구·비구니·우바새·우바이가 되시고 또한 더욱 많은 불자들이 나오도록 정법을 널리 펴시면 이 혼란한 사회가 바로잡히고 정말 살기 좋은 나라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번에 모두 금강경 설법 듣는다고 너무 많이 애를 쓰셨습니다. 한번 죽죽 새겨서 읽는 정도로 하면 한 3시간 좀 더 걸리면 되고 약간 설명을 해도 한 3일이면 될 것인데, 이것을 3주일이 넘어 4주일이나 되도록 지루하게 해서 여러분이 큰 고역을 했습니다. 눈도 깜짝거리지 못하게 하고 땀이 바짝바짝 나게 했으니 아마 내가 죄가 많을 겁니다.
원이차공덕(願以此功德) 원컨대 이 공덕
보급어일체(普及於一切) 온 누리에 두루하여
아등여중생(我等與衆生) 온 중생 우리와 함께
개공성불도(皆共成佛道) 모두 다 성불해지이다.
나무석가모니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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