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相無相分 第九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須陀洹(수다원)이 能作是念(능작시념)하되 我得須陀洹果不(아득수다원과부)아 須菩提言(수보리언)하사대 不也(불야)니이다 世尊(세존)하 何以故(하이고)오 須陀洹(수다원)이 名爲入流(명위입류)로되 而無所入(이무소입)이요 不入色聲香味觸法(불입색성향미촉법)일새 是名須陀洹(시명수다원)이니이다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斯陀含(사다함)이 能作是念(능작시념)하되 我得斯陀含果不(아득사다함과부)아 須菩提言(수보리언)하사대 不也(불야)니이다 世尊(세존)하 何以故(하이고)오 斯陀含(사다함)이 名一往來(명일왕래)로되 而實無往來(이실무왕래)일새 是名斯陀含(시명사다함)이니이다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阿那含(아나함)이 能作是念(능작시념)하되 我得阿那含果不(아득아나함과부)아 須菩提言(수보리언)하사대 不也(불야)니이다 世尊(세존)하 何以故(하이고)오 阿那含(아나함)이 名爲不來(명위불래)로되 而實無不來(이실무불래)일새 是故(시고)로 名阿那含(명아나함)이니이다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阿羅漢(아라한)이 能作是念(능작시념)하되 我得阿羅漢道不(아득아라한도부)아 須菩提言(수보리언)하사대 不也(불야)니이다 世尊(세존)하 何以故(하이고)오 實無有法(실무유법)하야 名阿羅漢(명아라한)이니 世尊(세존)하 若阿羅漢(약아라한)이 作是念(작시념)하되 我得阿羅漢道(아득아라한도)라하면 卽爲着我人衆生壽者(즉위착아인중생수자)니이다 世尊(세존)하 佛說我得無諍三昧人中(불설아득무쟁삼매인중)에 最爲第一(최위제일)이라 是第一離欲阿羅漢(시제일이욕아라한)이라하시오나 世尊(세존)하 我不作是念(아부작시념)하되 我是離欲阿羅漢(아시이욕아라한)이니이다 世尊(세존)하 我若作是念(아약작시념)하되 我得阿羅漢道(아득아라한도)라하면 世尊(세존)하 卽不說須菩提(즉불설수보리)-是樂阿蘭那行者(시요아란나행자)라하시련만 以須菩提(이수보리)-實無所行(실무소행)일새 而名須菩提(이명수보리)- 是樂阿蘭那行(시요아란나행)이니이다.

 

『수보리야! 너 생각에 어떠하냐? 수다원이 생각하기를 ‘나는 수다원과를 증득했노라’하겠느냐』 수보리가 여쭈었다.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어. 왜냐 하오면 수다원이라 함은 성인의 흐름에 들어갔다는 말이지만 실은 들어간 것이 아니오니, 물체·소리·향내·맛·촉감·법에 들어간 것이 아니 온데 이름을 수다원이라 하였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사다함이 생각하기를 「나는 사다함과를 증득했노라」하겠느냐』 수보리가 여쭈었다.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어. 왜냐 하오면 사다함이라 함은 「한번 갔다 온다」는 말이지만 실은 가고 옴이 없는 것을 사다함이라 이름한 때문이옵니다.』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아나함이 생각하기를 「내가 아나함과를 증득했노라」하겠느냐?』 수보리가 여쭈었다.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 하오면 아나함은 오지 않는다는 말이지만 실은 오지 않는 것도 없사오니 그래서 이름을 아나함이라 하였기 때문이옵니다.』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아라한이 생각하기를 「내가 아라한도를 증득했노라」하겠느냐?』 수보리가 여쭈었다.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 하오면 실로 어떠한 법도 없는 것을 아라한이라 이름하는 때문이옵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아라한이 생각하기를 「내가 아라한도를 증득했노라」 하오면 곧 <나라는 생각>·<남이라는 생각>·<중생살이란 생각>·<오래 산다는 생각>이 남아 있는 것이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제가 <다툼 없는 삼매를 얻은 사람 가운데 가장 제일이라> 말씀하였사오니 이것이 첫째가는 욕심 없는 아라한이오나, 세존이시여! 저는 「내가 욕심을 여읜 아라한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사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만일 아라한도를 얻었다고 생각하오면 세존께서는 곧 수보리에게 아란나행을 좋아하는 자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을 것이 온데 실은 수보리가 행함이 없기 때문에 수보리는 「아란나행을 좋아한다.」고 이름하셨사옵니다.』

 

 

第九 一相無相分-절대의 하나인 상

 

[科 解]

일상(一相)이란 하나로 됐다는 뜻입니다. 물질과 정신이 하나로 되고 부처님과 중생이 하나입니다. 모든 것이 이렇게 하나로 된 때는 아무 모양이 없습니다. 모양이 없다고 하지만 실은 모양이 없어진 그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어느 때를 말하느냐? 마음이 객관을 상대하지 않는 때를 말합니다(無相). 마음이란 성품자리(品 : 性根本實在)이고 불성자리(佛性 : 깨달음의 본바탕)인데 이렇게 말할 줄 아는 이 마음이 아무것도 상대하지 않고 부처도 사바도 상대하지 않으며, 있고 없는 것도 상대하지 않으며 심지어 좋고 싫은 것도 상대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고 내가 모든 기분을 내기 이전인 때를 가리킵니다.

이런 지경에 들어서면 나 자신마저 없는 무아(無我) 지경이 됩니다. 내가 없으니까 모든 상대를 초월해서 마음만 오로지 있는 때이므로 이것은 아무 모양이 아닙니다. 없는 것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없는 것이란 허공을 가리킵니다. 모든 현상은 있는 모양으로 나타납니다. 물질로 만들어진 건 크나 작으나 다 있는 모양이고 없는 모양은 허공입니다. 그런데 공기도 없는 진공은 없는 것으로 확실히 있는 것이나 한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무상(無相)이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란 말이 아니고, 마음이 객관 상대를 두지 않는 것, 일체 잠재의식까지 끊어진 상태입니다. 그런데 잠재의식까지 다 끊어지고 난 그것은 빈 허공이 아닙니다. 허공은 뭘 생각할 줄 모르고 알 줄 아는 능력이 없지만 허공까지 끊어서 초월했는데 순수한 본래 면목 그대로 살아 있는 이 마음은 있는 모양도 아니고 없는 모양도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로 되었을 때, 상대가 없을 때, 오로지 이 마음만 살아 있을 때는 그때는 있다 없다가 아니며 허공 모양도 아니고 물질 모양도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 일상(一相)이란 구공지경(俱空地境)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 생각하다 저 생각하다 일분 동안에도 백천만 가지의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니 이것은 일상이 아니라 다상(多相)이고 복잡상(複雜相)입니다. 이런 번뇌, 망상이 아공(我空)이 되고 법공(法空)이 돼서 공했다는 생각까지 다 놓아 버리어 <구공>이 된 것을 <일상>이라 한 것입니다. 그러니 <구공>이라 하는 그것도 <마음>의 별명이고 뭐라 그래도 제 이름이 아니므로 이것은 <구공>이라 하는 그것도 <마음>의 별명이고 뭐라 그래도 제 이름이 아니므로 이것은 <구공>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고 텅 빈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삼라만상이 그대로 다 있는 것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고 일체상을 다 떠나서 범소유상이 개시허망(凡所有相 皆是虛妄)하니 약견 제상비상 즉견여래(若見諸相非相卽見如來)해서 그 상을 다 초월하고 있는 것이 일상(一相)이고 무상(無相)입니다. 분(分)은 경전 전체의 내용을 몇 개의 대목으로 나누어서 이해하기 좋게 하는 장절(章節)입니다.

 

原 文 : 須菩提 於意云何 須陀洹 能作是念 我得須陀洹果不 須菩提言不也 世尊

何以故 須陀洹 名爲入流 而無所入 不入色聲香味觸法 是名須陀洹

 

[解 義] 『수보리(須菩提)야! 어의운하(於意云何)오, 네 뜻에는 어떠하냐? 네 마음에 어떻게 생각이 드느냐?』 그런 뜻입니다.

『수다원(須陀洹)이 능작시념(能作是念)하되, <수다원>이 이런 생각을 하겠느냐? 다음과 같이 마음을 먹겠느냐? 「내가 이제 <수다원과>를 얻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겠느냐? 안하겠느냐?』 부처님께서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이에 수보리존자 말씀이 『아니옵니다. 부처님, 어째서 그러냐 하오면 수다원은 「흐름에 들어간다」는 말이온데 색·성·향·미·촉·법에 들어가는 것이 아닌 것을 <수다원>이라 했기 때문이옵니다.』 그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수다원>이란 본래 인도 말이지만 그 뜻은 흐름에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곧 본문에 입류(入流)했다고 하는 유(流)란 말은 성류(聖流)라는 말이니 성인의 세계에 들어섰다는 말입니다. 범부가 아니고 이제부터는 성인이 됐다는 뜻입니다. 소승불교의 계급에 四급이 있는데, 학교에 일학년, 이학년 올라가서 사학년이면 졸업하는 것과 같은데, <수다원>은 소승불교 일학년에 입학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학년인 <사다함>에 진급하려면 마음 가운데 일체의 색 ·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에 걸리지 말아서 진리니 비진리니 외도니 사도니 정도니 불법이니 하는 그런 망상이 하나도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정도가 깊지 못하고 도(道)가 얕기 때문에 초과(初果)라 한 것입니다. 맨 처음으로 번뇌망상이 쉬고 조용해져서 해탈했기 때문에 성류(聖流)에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여지껏 산 보고 높다 물 보고 깊다 이렇게 생각하고 소학교에서 대학 졸업하기까지 배운 온갖 것을 기준으로 해서 생각하고 살다가 부처님 덕분에 구공에 대한 법문을 듣고 보니까 참말로 그게 가질 바 참된 지식이 아니란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차차 깨닫는 것은 소승사상만 그런 게 아니고 대승들도 처음에는 깊이 한꺼번에 깨닫는 수도 있지만 조금씩 깨달아 가지고 마지막에는 부처를 이루는 수도 있고 두번 세번 열번 깨닫는 수도 있습니다. 이 소승불교의 초과인 수다원과는 성인의 류에 들어갔다하는 것이니 마음이 해탈이 되고 조용하고 번뇌가 없어졌으니 성류에 들어선 것인데, 그렇지만 사실은 들어간 것이 없습니다(而無所入). 그러면 이게 또 무슨 뜻입니까? 들어갔으면 들어간 것이고 안 들어갔으면 안 들어간 것이지 들어갔는데 들어간 것 없다 그러니 말이 안 됩니다. 산 보고 높다, 물 보고 깊다, 이건 남자다 저건 여자다, 또 학교 가서 선생님 말 배우고 이론이나 지식 익혀서 참 그게 복잡했는데 인제 불교 정법을 듣고나서 그걸 다 해탈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남은 것은 무엇인고 하니 산을 보든 물을 보든 마음자리만 남았으니 인제 그자리 그대로 산 본 자리고 물 보든 생명 그대로이며 그 생명 그 마음자리 그게 어디 나가고 들어간 것도 아닙니다. 그 마음 그대로 조용해진 것뿐이니 어디 들어선 게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가 항상 주관 객관 이런 저런 관념으로 진리라는 게 저 하늘나라 높은데 저 고원 어디에 있는 것으로 여기고 객관적인 진리가 있는 걸로 알아 왔습니다. 그래서 이 약하고 얼마 안 되는 무능한 존재가 사람이라는 인식으로 삽니다. 내가 그동안 애가 타도록 벌써 여러날 불법을 얘기해 줘도 항상 집에 갈 때는 무엇을 깨쳐 가지고 들어가는 그런 관념을 가집니다. 그러니 이런 관념을 떼는 게 불법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본성이 아니고 항상 그대로입니다.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아는 그것입니다. 그렇지만 마음이 쉬어서 그것을 먹어도 좋고 안 먹어도 좋고 기어코 먹을 것도 아닌 걸 안 것입니다. 그래서 수보리존자께서 대답하시기를, 「수다원이 성인의 종류에 들어갔다고 하지만 들어간 데는 없사옵니다(須陀洹 名爲入流 而無所入)」라고 여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현상계, 곧 남자나 여자나 산하대지(山河大地) 어디에도 내 몸뚱이에도 이끌리지 않는 것이 성현의 마음입니다. 산보고 좋다 싫다는 생각 안 내는 것이 그것이 색(色)에 안 들어가는 것입니다. 산 보고 좋다 궂다 하든지 남녀간에 보고 좋다 궂다 하면 벌써 <색>의 현상에 빠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색(色)이라 함은 여색(女色)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령 세계에서 유명한 성악가가 왔는데 노래를 아주 잘 부르니 이 기회에 한번 들어보자 하더라도 들어 볼 생각 없습니다. 또 들어 봐도 좋다고 생각하면 좋고 돼지 목 따는 소리 같다고 생각하면 이것저것 다 내 버리어 번뇌가 아주 없는 수다원은 어떤 목소리를 들어도 아무 생각 없이 듣습니다. 법문하는 소리로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차라리 아무 생각 없이 들으면 하나도 안 들립니다. 그러므로 수다원 같은 성인은 소리 따라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不入聲).

또 좋은 향내가 난다 해도 향 한 대 더 피우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없습니다. 좋은 향내도 나쁘다고 생각하면 나쁜 것입니다. 좋고 나쁘고는 나의 망상이지 듣기 싫어집니다. 돼지 목따는 소리도 「참 불쌍하구나. 죽느라고 저렇게 애를 쓰는구나.」하고 생각할 수도 있고, 「야, 저 놈 죽느라고 노래 한 곡 잘 뽑고 죽는구나.」하고 돼지의 마지막 노래로 들을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좋다 하면 좋고 나쁘다고 생각하면 나쁜 것이니, 목소리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닙니다. 마음속에 있는 향내와 향내를 맡을 줄 아는 주체인 자신과는 관계없는 일입니다. 향내는 냄새가 좋다는 관념이 있을 뿐입니다. 생각이 끊어져서 마음이 삼매에 들어 일념이 되면 똥을 코에 발라도 구린내가 안나고 방안에 향내를 꽉 채워도 향기가 안 납니다. 그러므로 성인은 냄새 같은 객관에 끄달리지 않습니다(不入香).

「어느 식당에 가면 설렁탕 맛이 참 좋다는데 거기 가서 막걸리나 한잔 사 먹어야겠다.」 이런 생각을 안 합니다. 온갖 음식에 생각이 없습니다. 하루 밥 세끼 죽지 못해 먹는 것인데 하루 한끼 먹는 사람도 있는데 난 하루 두끼만 먹자. 이런 식으로 자꾸 육체생활을 줄여들어 갑니다. 그러면 「어디 술집이 새로 생겼는데 술맛이 좋다더라.」하는 류의 소리는 바람소리에 물소리처럼 지나갑니다. 몸뚱이도 세계도 꿈인데 꿈속에 들어가 무엇이 존재하겠는가. 그리고 어느 몸뚱이가 있어 마르고 축나겠느냐? 이렇게 닦아 들어가는 것이 불법입니다(不入味).

남녀간의 이성끼리 만나더라도 생각이 안정되지 않은 범부는 가슴이 설레고 번뇌가 일어나서 들끓습니다. 그러니 설사 이성을 만나더라도 저건 남자거니 여자거니 생각하지 말고 저건 하나의 껍데기다, 바지 껍데기고 육체의 껍데기, 그림자로 봐야 합니다. 똥주머니·오줌·피 ·코·가래의 주머니로 봐야 합니다. 번뇌를 여의고 마음만 오롯하게 드러난 성인의 경지에선 실제로 그렇게 됩니다. 육체에 대한 일체의 애착이 없어지고 온갖 사상 관념이 없어집니다(不入觸).

유교의 교리는 어떻고 예수교의 가르침·철학의 논리·과학의 원리 이 모든 것을 불교에서 법(法)이라고 그럽니다. 모든 이론·종교·학문이 다 법이고 불법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모든 법을 따라가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에 망상이 없으면 불법까지도 따로 지킬 것이 없습니다. 팔만대장경이 모두 다 망상이니 하지 말라는 소리인데, 자아를 완성하여 번뇌를 여의였기 때문입니다. 전지전능한 주인공이 되어 생사를 초월하고 의식주도 필요 없고 영원히 아무 근심 걱정 없는 사람이 되고 나서야 남을 제도한다는 것도 말이 됩니다. 이런 경지에 도달하고서야 오직 남을 위해서만 몸이 닳아 없어지도록 농사도 지어 주고 장사하는 집에 가서는 장사하는 일 거들어 주고 설렁탕집에 가면 설렁탕 나누어 주고 하루 종일 남을 위해서 고된 줄도 모르고 봉사할 수 있고 아무 생각 없이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객관세계에 끄달림 없이 번뇌 망상 다 초월해서 몸뚱이도 없고 생명에까지도 조금도 끄달려 들어가지 않는데 거기에 무슨 법이 필요하고 어떤 진리, 어떤 원리가 필요합니까? 이것을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한 것입니다.

그것은 수다원은 그 마음이 무아가 되었기 때문인데, 그래서 망상이 끊어진 경계에 들어섰지만 그 깊이가 아직은 얕습니다. 마치 학교 교육에 비교해 말하자면 국민학교는 졸업했다는 정도에 해당할 것입니다. 앞으로도 사다함과 아나함과 아라한과의 三과가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이무소입 불입색성향미촉법(而無所入 不入色聲香味觸法)을 새기는데 있어서 잘못 새기면 「들어감이 없으므로 색성향미촉법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새기어 말을 두동강이를 만듭니다. 이것을 「자기 마음을 깨달은 것이고 어디 들어선 것이 없다.」는 뜻으로 <이무소입(而無所入)>이라 했고 그렇다고 해서 객관의 대천세계(大千世界)에 어디에 들어갔느냐 하면 거기도 들어간 것이 없다는 뜻으로 <불입색성향미촉법>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깨달으면 어디로 들어서는 것이 아니니, 안으로나 밖으로나 들어가고 나가는 것이 없다는 뜻으로 한 말씀입니다.

 

原 文 : 須菩提 於意云何 斯陀含 能作是念 我得斯陀含果不 須菩提言

不也 世尊 何以故 斯陀含 名一往來 而實無往來 是名斯陀含

 

[解 義] 부처님께서 또 물으십니다. 『수보리야! 네 생각에는 <사다함>이 자기 스스로 사다함과를 얻었다고 생각할 것 같으냐 안 그러냐?』하고 먼저와 같은 요령으로 말씀하십니다. 이에 수보리존자의 대답은, 역시 『아니옵니다. 부처님 <사다함도 이름은 「한번 왔다 가는 이」라 하지만 사실은 오고 간 것이 없어서 그래서 <사다함>이라 한 것이옵니다.』하고 사룁니다. 이것은 다 第七章에서 말한 무위법(無爲法)이어서 모두 다 하는 것 없이 하기 때문입니다.

요새 최면술하는 사람들이 자기최면(自己催眠)을 통해 아무 생각 없는 지경에 들어 갑니다. 막연히 마음을 희미하게 한다든지 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 가운데 있는 잡념망상을 없애어 무아지경에 도달합니다. 이들은 최면에 들어선 때가 가장 기분 좋은 때라고 합니다. 생각할 수 있는 세상의 사건이란 다 불안 공포들 뿐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걸 모두 치워 버리고 마음만 가라앉히면 일시적으로 <수다원과>가 나타난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은 최면에 들었을 때에만 최면력에 의해 나타난 세계이고 마음을 깨달아서 성위에 들어 간 것과는 물론 다릅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무 번뇌망상이 없는 <수다원>의 경지에 들어가서 산하대지가 다 없어진 이런 사람이 죽으면 천당에 태어나게 되는데 하늘 세상에 태어나서 보면 아직도 미세한 망상, 적은 잡념의 버릇이 조금씩 남아서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번뇌가 보입니다. 그런데 천당은 모든 게 뜻대로 되고 부족한 것이 없이 만족하고 너무 편하고 즐거워서 공부가 안 됩니다. 마치 부잣집 자녀들이 돈 쓰느라고 공부 못하듯이 자기의 선정(禪定)·삼매(三昧)의 힘으로는 하늘나라의 즐거움을 이겨가며 고도의 수행을 할 수 없음을 깨닫고 인간 세상에 다시 내려가서 수도를 더 해야겠다고 결정하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 세상에 어느 집에 태어나야 불도를 만날 수 있으며 어려서부터 출가를 해서 수도를 마치고 또다시 하늘나라에 올라올 수 있을까를 살핍니다. 그리하여 늙도록 아들이 없는 집, 그리고 불교하는 집에 태어나서 7, 8살만 되면 절에 데리고 가서 일찍 중이 되도록 하는 그런 부모를 선택합니다. 늙은 부모 자기는 불도수행을 못 했지만 아들이라도 부처님께 바쳐서 큰 복을 짓자는 불심으로 그렇게 합니다. 이와 같이 불교가 있는 나라, 불심이 있는 집안에 태어나서 한 평생 공부를 더 하면 나머지 번뇌망상이 더욱 없어질 것을 알기 때문에 이 세상에 한 번 더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면 천당에 다시 가더라도 그때는 미세한 번뇌마저도 끊어지기 때문에 천상락(天上樂)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선정을 닦을 수 있으므로 이것을 일왕래(一往來) 한번 또 <왔다 간다>고 하고 사다함(斯陀含)이라 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 세상에 한 번 더 왔다 가기 때문에 <일왕래>(一往來)라고 하긴 하지만 실제로는 왔다 갔다 하는 것도 없습니다. 왜냐 하면 이 마음에 번뇌 망상이 있음으로써 오고가는 흔적이 나타나는 것이지, 몸뚱이도 세계도 없어진 경계에서 정신 하나만 오로지 깨어 있을 때는 무한대의 우주가 그대로 다 내 마음 뿐이어서, 이 세상에 왔다 간다 하지만 내 본 마음에서 보면 오고 간 것이 아닙니다. 전체가 그대로 하나일 따름입니다. 다만 육체가 온 것이고 생각이 간 것입니다. 육체와 생각을 이미 초월하여 마음의 본바탕을 찾은 나에게는 오고 간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세상 한번 왔다 가는 것도 이름만 왔다 가는 것이지 마음자리 자체는 왕래를 하지 않은 것이며, 육체가 그런 것이고 생각이 그런 것이지 우주 전체가 그대로 마음인 입장에서는 왕래할 수가 없는 하나일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사다함은 왕래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왕래하지 않은 것이고 우리 마음 그게 곧 사다함인 것입니다.

 

原 文 : 須菩提 於意云何 阿那含 能作是念 我得阿那含果不 須菩提言

不也 世尊 世尊何以故 阿那含 名爲不來 而實無不來 是故名阿那含

 

[解 義] <아나함>(阿那含)은 <오지 않는다>는 뜻이니 편안해도 공부를 잘 할 수 있는 정도가 된 셋째의 성위(聖位)입니다. 인간 세상에 다시 안 오고 천당에서 그대로 천당의 향락을 돌아보지도 않고 선방처럼 공부할 수 있는 삼학년생입니다. 자기의 참선하는 정진력(精進力)이 용맹스럽고 아무 생각 없는 정력(定力)이 깊고 견고해져서 주위의 향락에 조금도 끄달리지 않고 선정(禪定)을 닦을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수다원과>를 증득하면 비로소 성인의 류에 들은 것인데, 이 성과(聖果)의 일학년인 수다원과에 들어간 뒤 이학년인 <사다함과>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수행을 해야 하고 삼학년인 <아나함과>에 오르기까지는 얼마나 수행을 해야 하느냐 하는 것에 따라 <칠래과>(七來果)·<一來果>(일래과)·<불래과>(不來果)라고 이름하기도 합니다. 자신이 닦은 복력(福力)으로 말하면 국왕·대신이 되고 부귀할 복력이 있지만 일부러 어려서 출가하기 좋도록 조실부모할 집에 태어나서 일찍 출가해서 평생 정진만 합니다. 이렇게 한평생 수도만 하다가 또 죽어서 천당에 가보면 이 세상 잠재의식이 움직이고 있는 걸 알게 됩니다. 그러면 다시 세상에 내려왔다가 또 올라갔다 하기를 일곱 번이나 하는 동안이 제일과인 <수다원과>(須陀洹果)이므로 칠래과(七來果)라 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일곱 번 왕래를 한 다음에는 사다함에 들어섭니다. 그래서 사다함과에서 한 번 더 왕래하는 것을 합하면 모두 팔왕래(八往來)가 됩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왕래하면서도 왕래가 아닙니다. 천당에 갔을 때나 인간 세상에 올 때나 변하지 않는 자리가 있어서 우리의 마음자리, 성품자리가 그런 꿈을 꾸고 꿈이 깨면 생시인 것처럼 천당 가고 지옥 가는 것도 생각이 저 혼자 갔다 오고 업이 독자적인 생명이 있어서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니라, 내내 우리 마음이 오고가고 하는 것인데 이 마음의 본체는 오고 가는 것이 없으며 변하지 않는 자립니다. 거리 내외가 없어서 마치 나와 몸뚱이가 둘이 아니어서 다리도 손도 배도 등도 다 나이고 몸뚱이 부분이나 전체의 구별이 없이 그것이 다 나인 것과 한가지로 온 우주가 <나>이며 전체가 나일뿐입니다. 그러므로 <아나함>이 천상에서 정진만 하고 세상에 내려가지 않지만 그러나 실로는 안 간다는 생각도 없습니다. 항상 마음이 우주에 꽉 차서 가고 안 가고도 없습니다. 그래서 실로는 가지 않는 것도 없다(實無不來)고 한 것입니다.

 

原 文 : 須菩提 於意云何 阿羅漢 能作是念 我得阿羅漢道不 須菩提言

不也 世尊 何以故 實無有法 名阿羅漢 世尊 若阿羅漢作是念 我得阿羅漢道 卽位着我人衆生壽者

 

[解 義] 절에 가면 지금도 나한(羅漢)님, 오백 나한이 있는데 아라한이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었다고 생각하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법을 얻었으면서도 일부러 마음에 두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실무유법(實無有法)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떠한 내용이 있어서 이것이<아라한>이다」라고 할 수 있는 법이 없습니다. 이것이 큰일입니다. 실로는 나한이 됐다 해도 <아라한>이라 지목할 수 있는 그런 이치가 없으니 이 대목 참 어렵습니다. 이 대목이 사학년 졸업반의 마지막 문턱입니다. 나한님들이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다. 내가 사학년생입니다.」이런 생각을 하면 즉위착아인중생수자상(卽爲着我人衆生壽者相)이 꽉 남아 있는 사람이어서 무엇무엇을 해야 한다느니 하고 중생살이를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살림살이 장만하는 게 중생상(衆生相)이고 오래 살려니, 칠십, 팔십 살려 하는 그것이 수자상(壽者相)입니다. 그래서 안심하고 공부도 안하고 나중에 애들 시집 장가 다 보내고 늙어 빠진 뒤 할 일 없을 때에야 염불·참선하려 하지만 그 땐 이미 힘이 다 빠져서 참선해도 안 되고 염불해도 안 됩니다. 참선이나 염불은 젊어서 미성년 때 하는 게 훨씬 좋은 건데 내가 오래 살겠거니 믿고서 할 일 다 하고 늙은 뒤에나 천천히 해 보려는 것도 <수자상>의 그릇된 생각입니다. 아라한이 만일 어떤 법이 있어서 그 이치를 깨달아 얻은 것이 <아라한>이라면, <아라한>은 곧 내가 얻은 것이니 얻어진 법이 있고 얻은 내가 있게 되며, 법은 객관이고 나는 주관이 됩니다. 이렇게 하여 주관인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다 하면 그건 주관 객관이 벌어져서 상대가 안 떨어지고 절대 지경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니,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벌어져서 결국은 중생을 완전히 여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原 文 : 世尊 佛說 我得無諍三昧人中 最爲第一 是第一離欲阿羅漢 世尊 我不作是念 我是離欲阿羅漢

世尊 我若作是念 我得阿羅漢道 世尊 卽不說須菩提 是樂阿蘭那行者 以須菩提 實無所行 而名須菩提 是樂阿蘭那行

 

[解 義] 부처님께서 『수보리는 무쟁삼매를 얻었다.』고 말씀하셨는데 무쟁삼매를 얻으면 남이 무슨 말을 해도 대꾸를 안 합니다. 예쁘다 해도 아무 소리 안 하고 밉다 해도 아무 소리 안 하고 뭘 줘도 아무 생각 없고 빼앗겨도 아무 생각 안 합니다. 항상 남과 다투지 않아서 무슨 소리를 해도 다른 데 가서 그 소리 들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또 누가 법문을 해도 「아 법문 잘한다.」 그런 생각이 없습니다. 만일 옳다 그르다 하면 그것도 시비가 있는 것이고 번뇌가 있는 게 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일체 중생과 다투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삼매를 얻은 것이 나한이고 나한이 되면 저절로 그리 되는 것인데 도대체 마음을 탁 놓아 버리어 자기의 모든 번뇌를 쉬고 나면 현실 세계 이게 모두 공인 줄 알게 됩니다. 이렇게 하여 제 사학년의 아라한과를 얻은 것을 <무쟁삼매>(無諍三昧)라 합니다.

부처님께서 일찍이 수보리에게 「일체 사람과 시비를 안 하고 항상 마음이 편하고 그런 무쟁삼매에 들어서 일체의 다툼을 안 하는 그런 인간이 됐다. 수보리는 특히 모든 나한 가운데 오백나한 가운데 가장 제일이다. 수보리 이 사람은 제일 욕심을 멀리 했다. 그 에게는 아무 사건이 없다. 그래서 남과 시비를 안 하는 <아라한>가운데도 특등 <아라한>이 됐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수보리는 『나는 욕심을 떠난 <아라한>이다. 이런 생각은 안합니다. 만일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다고 생각한다면 세존께선 곧 「수보리가 그 마음이 고요한 나한도의 다툼 없는 나한 중 나한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을 겁니다. 실제로 제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으니 제일 아라한이 될 수도 있고 진짜 나한이 될 수도 있지만 나에게 <아라한>을 증득했다는 생각이 조금만이라도 있으면 부처님께서는 제가< 아란나행>(阿蘭那行)을 즐긴다고 하시지는 않으셨을 겁니다.』 하셨습니다. 아란나행(阿蘭那行)이란 다툼 없고 욕심을 여읜 무쟁삼매(無諍三昧)의 행을 말합니다. 계속해서 수보리는 <실무소행>(實無所行) 실제로 마음 닦은 게 실천한 게 아무 것도 없고 수행이 다 끊어졌습니다. 그래서 <아라한>이란 무학(無學)이라 하는데 아무것도 없는 지위에 올라선 것입니다. 이제 사학년이 되어 어려울 게 없는데 실제는 아무 수행하는 것도 안 하는 것도 없는 그런 무위법(無爲法)의 행을<아란나행>을 좋아 한다고 한 것입니다.

 

 

[說 義]  

 

▶마음이 가고 마음이 온다.

우리가 천당 갔다 지옥 갔다 하고 육도세계를 돌아다니고 윤회를 하고 그것이 다 번뇌의 업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지만, 그러나 번뇌의 잠재의식이 우리의 근본 마음자리를 떠나서 마음으로부터 독립되어 돌아다니는 것은 아니며 본 마음자리가 한 것입니다. 그러니 죽어서 천당에 가도 그 실상 자리, 자기 근본정신이 올라간 것이지 망상 그것이 자체가 있어서 본마음을 떠나서 올라간 것이냐 하면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마음이 우주에 편만(遍滿)했다, 즉 크다고 하지만 그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작은 거냐 하면 바늘가지고 찔러 볼 수도 없는 아무것도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면 아무것도 없는 거면서 그 속에 우주가 다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또 크기로 말하면 비행기 타고 광속(光速)으로 몇 억만년을 달아났다 하더라도 그게 나고 바늘로도 찌를 수 없는 그 작은 극소(極小)안에 무한대가 들어 있고 거리가 있는 것입니다. 사실은 무한한 시간을 달렸다고 해도 내내 돌아앉을 자리도 없는 거기입니다.

마치 손바닥만 한 거울에 동서 이십 리가 되는 서울이 다 비춰 들어오듯이 그런 건데 사실은 그 거울 속으로 뚫고 나간 것은 아닌 것과 같습니다. 거기 동서남북이 있고 왔다 갔다 하고 전차가 다니고 북악산도 있고 비행기도 떠다니고 하는 것은 눈이 속은 것입니다. 이런 것이 다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길이 있지마는 과학으로도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왔다 갔다는 말도 그거는 꿈속에 하는 소리입니다. 지상이나 천당이나 다 공간이 있고 천당 있는 데가 지옥 있는 데고 극락세계 있는 데가 사바세계 있는 데고 그러니까 육체적으로 확실히 거래(去來)가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육체도 <거래>를 안합니다. 내내 그 자리니까 거래할 곳이 없습니다. 사실은 거리가 있다 해도 안 되고 없다 해도 안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왔다 갔다 죽었다 살았다 하는 게 도대체가 이게 망상이고 마음으로 생각뿐이지 사실은 그런 건 없는 것이며 형상으로 나타난 것도 그런 불가사의였고 이건 크고 저건 작다고 하지만 망상일 뿐입니다. 간장독을 종지 안에 집어넣는다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고 미친놈이라 할 겁니다. 몇 짐의 물이 들어가는 독이 찻잔보다도 작은 종지 안에 어느 모퉁이 하나도 남지도 않고 딱 맞게 들어가 버리는 도리가 마음 법입니다. 그러면 간장 종지를 확대해서 넣어졌거나 큰 독이 축소해서 줄어들었거나 두 가지 중의 하나는 돼야 할 겁니다. 그런데 둘 다 작고 큰 그대로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게 불가사의입니다. 그런데 설명할 수 있는 길이 조금 있는 것은 이 크다는 것도 거짓말로 큰 것이고 작다는 것도 거짓말로 작은 것이니, 작은 것이 큰 것으로 작은 것이고 큰 것이 작은 것으로 큰 것입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하면 다 꿈이기 때문입니다. 꿈으로 크고 작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반드시 작은 것도 반드시 큰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크다고 생각하는 것도 우리의 생각이지 참말로 큰 게 아니고 작다고 생각하는 간장 종지도 생각이지 실제로 작은 게 아닙니다. 그렇지 않고는 부처님의 신통이 나올 수가 없는 것이고 화엄의 도리가 아니면 참말로 성불할 사람도 없고 불법을 얻을 도리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실 이 물질 자체도 진공묘유(眞空妙有)입니다. 있긴 있으되 진공으로 있는 것이고 사실로 있는 게 아니라 없는 걸로 있기 때문에 이게 묘유(妙有)입니다. 그러니까 인제 여기 아무 것도 없는 데라 하여 아주 없는 거냐 하면 그건 없는 걸로 없는 게 아니라 눈에 안 보이는 게 있고 이게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니 있어도 거짓으로 있는 것이고 그렇다고 해서 없는 거냐 하면 또 이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게 참말로 없는 것이지 없는 걸로 없는 그것은 없는 걸로 있는 것이며 없는 것의 존재라는 말이 됩니다.

그래서 있다고 하려면 부득이 <묘유>라고 하고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존재라 그럽니다. 우리가 업(業)이 달라서 안 보이는 것뿐이지 여기도 천당도 있고 지옥도 있고 다 건립되어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이대로 앉아 잠이 들면 제가끔의 꿈을 각각 꾸는 것과 같습니다. 독립만세 부를 땐 전부 묶여 들어가서 조금 기대서든지 숙직실이고 유치장이고 빽빽하게 서 있습니다. 밤낮으로 그래 가지고 잠깐 자는 동안에 꿈도 꾸고 그러는데 한 사람은 서울을 차려 놓고 하나는 부산을 건립해 놓고 하나는 대구를, 또 다른 사람은 평양을 건립하고 모두 이렇게 제가끔 백가지 천 가지 꿈을 꾸어도 조금도 혼란하지 않습니다. 제각기 공간을 분리해 가지고 그렇게 꿈을 꾸는데 그게 꿈이기 때문에 될 수 있지 현실 같으면 불가능 합니다. 어떤 사람은 여기가 천당세계인 줄 알고 어떤 사람은 여기가 지옥으로 되었고 그런데 그게 모두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바늘로도 찌를 수 없는 그 작은 존재 안에 천당·지옥·극락세계·사바세계가 다 있습니다. 그것이 큰 걸로 작은 것이므로 그렇게 되는데 이 실상을 우리가 깨닫기 전엔 모릅니다. 우리는 실상자리를 말로는 이렇게 하고 또 말들을 때는 그런 것이구나 생각하지만 말 뚝 떨어지고 돌아서면 깜깜해서 「이건 촛대고 저건 나무고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하고 현상계에 끄달리게 됩니다. 그래서 돌은 물이 아니라고 하고 불은 언제나 물이 아니라고 하고 이렇게 자꾸 해오다가 처음엔 속아서 그랬지만 나중에는 진리라는 고집이 되고 법집(法執)으로 됩니다.

 

▶삼매(三昧)는 마음의 정립

그래서 먼저 참선(參禪)을 하든지 염불(念佛)을 하든지 하여 번뇌를 쉬고 망상을 끊어야 합니다. 번뇌 망상을 쉬는 방법이 팔만사천가지로 많은데, 자꾸 마음공부를 해서 마음을 안정해야 합니다. 가령 <나무아미타불>의 염불일념(念佛一念)에 들어도 하루 종일 여섯 자 그 소리뿐이지 다른 잡념 망상은 다 없어집니다. 이렇게 되면 그것을 염불삼매(念佛三昧)에 들었다고 합니다. <삼매>란 인도 말이고 우리말로 하자면 「마음이 똑바로 정해졌다. 제자리에 들어섰다.」는 뜻입니다. 이리저리 끌리고 현상에 이끌리고 사랑에 이끌리고 돈에 목매어 번뇌 망상에 흔들리고 했는데, 이런 모든 것, 무엇을 보나 아무 생각이 없을 때, 그때엔 마음이 제자리에 바로 선 것입니다. 「일체 생각 없이 마음 저 혼자 아무 상대 없이 꼭 제대로 마음이 섰다.」 대체로 이런 의미를 가진 말이 <삼매(三昧)>입니다.

요새 정립(定立)이란 말을 쓰는데 인생관이 정립됐다, 국가관을 정립한다, 확실하게 결정을 해서 흔들리지 않고 튼튼하게 서 있다, 그런 뜻입니다. 불교에는 또 선정(禪定)이란 말이 있습니다. 참선을 하는데 다른 생각 하나도 없이 <화두(話頭)>만 뚜렷한 그것을 선정이라 하고 삼매에 들었다고 합니다. 염불이나 참선이나 진언이나 어떤 공부를 해서 내 몸뚱이도 없고 생사도 없고 그렇다고 자는 것도 아니며 허망한 환상에 빠진 것도 아닌 깨끗한 정신입니다. 우리는 동서남북으로 마음이 갈가리 찢겨져서 잠도 못자고 마음도 편치 못한데 이 마음이 딱 정립이 돼서 가장 깨끗한 기분, 잡념이 하나도 없는 또렷한 마음만 남아 있을 때, 마음이 정립되어 선정 삼매에 들어섰을 그때에는 사람의 마음이 가장 안락할 때입니다.

잡념 때문에 잠을 못자고 음식을 먹어도 소화가 안 되고 그랬는데 이제 삼매에 들어서 망상이 끊어졌으니, 성인의 지위에 처음 들어섰다, 참여했다는 뜻으로 초과(初果)라 하고 <입류(入流)>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을 <수다원>이라 합니다.

우리 마음이 동서남북 하늘 땅 천당 지옥으로 쏘다닙니다. 어디엘 가면 좋은 음식 좀 얻어먹을까? 어디가면 좋은 사람을 만날까 이런 번뇌망상으로 잠을 못자고 부산 갔다 대구 갔다 하며 이런 짓거리 저런 짓거리로 업(業)을 짓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번뇌의 마음을 버리고 대구 부산 생각하던 그 마음이 없어진 것뿐이지 대구나 부산 생각하던 마음자리까지 어디로 간 것이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니고 <마음자리>만은 영원히 그대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인의 종류에 들어섰다고 해서 어디로 들어갔거나 올라간 게 아니고 아무데도 들어선 데가 없습니다.

미친 사람이 역시 때가 되었는지 밤인지 낮인지 시간도 분간 못하고 밤새도록 떠들고 돌아다닙니다. 그래서 굶었다는 생각이 없기 때문에 몸이 축이 안 나고 그것도 마음 하나이기 때문에 기운이 그렇게 세어집니다. 누구든지 때려 뉘일 자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기운을 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치 암탉이 병아리를 깠을 때 고양이나 개가 달려들면 암탉이 성을 내서 달려들면 개도 도망을 가고 고양이도 도망을 갑니다. 마음으로 지키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 암탉이 모성애(母性愛)에서 무서운 마음으로 달려드는 때문입니다. 정신이 통일되면 마음에 힘이 생깁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것도 안 먹었으니 어쩌나 하는 이런 것 때문에 해탈이 잘 안됩니다. 견성을 해 놓고도 깊이는 못 깨달아 앞으로 점차로 보림(保任)해 가지만 돈오(頓悟)를 해서 자꾸 올라갑니다. 처음에는 깨치고도 범부 때와 마찬가지어서 때가 되면 꼭 밥 먹어야 되고 밤 되면 자고 그렇지만 나중에는 그게 먹는다 굶는다 낮이다 밤이다 삼일 되어서도 아무 생각 없이 되고 모든 사물을 무심코 대하게 되어 그때는 상(相)이 상이 아닙니다. 산이라고 보면 다 산이고 물이라고 보면 태평양 바다가 되고 불이라고 볼 때는 그 놈이 큰 불바다가 되고 그러니 그때는 보는 대로 마음 쓰는 대로 다 되어 버립니다. 이 자리가 우주의 시간 공간의 본체이다 보니까 현상계는 다 본체의 그림자이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데, 도가 거기까지 안 가면 그렇게 자유롭지 못합니다. 소위 팔지보살(八地菩薩)을 육학년 졸업이라 치면 오학년 삼학기쯤 되는 정도에 가면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 되어서 만물이 그 앞에서는 공해 버립니다.

이 자체는 본래 공한 것인데 참말로 있는 거라는 그 망상 때문에 정말 있는 것 같이 되어 있고 바윗돌은 중력이 있는 건데 하는 생각 때문에 아무리 들려 해도 안 들리고 조그만 것은 한 손으로 들리고 그래집니다. 그런데 그 중량이 다 마음으로 정한 것이지 중량이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 진공입니다. 현실도 하나의 꿈인데 여기는 밝은 광명이 나오니 보이고 저기는 광선이 막혀서 껌껌하고 한 이것이 하나의 우리 망상이지 사실로 이런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수보리존자께서 이런 공한 도리를 잘 알고 계시고 구공자리까지 잘 체득한 어른이니까 부처님께 「들어간 게 없고 오고 간 게 없고 얻었다는 생각이 없습니다.」 하고 사뢰었던 것입니다.

마음 스스로는 그렇지만 또 그게 불입색성향미촉법(不入色聲香味觸法)이며 또는 저 물질 세계에도 안 들어갑니다. 만일 거기 가서 좋다 궂다 생각 안 낸다면 그게 안 들어가는 겁니다. 산보고 좋다 궂다 하든지 남녀가 서로 보고 좋다 궂다 그러면 벌써 들어간 것이니 남자에게 들어가고 여자에게 들어가고 빠진 것입니다. 색(色)이란 형상·물질계·현상계니 그리고 과학적·철학적으로 따지는 생각은 무조건 다 내 버리고 나면 산보고 산이라고 해도 산이란 생각도 산 아니란 생각도 없이 무심이 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거기 소위 남이 날 보고 「미친놈아 도적놈아」해도 나는 탓을 안 하고 조금도 언짢아하지도 않으며 또 거룩하고 장하다고 오체투지(五體投地)해서 존경해 줘도 나는 좋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되면 거기 안 들어간 것입니다. 조금만 칭찬하면 좋아서 우쭐하고 욕하면 성내고 그러면 거기 들어간 것입니다. 남이 나를 비방하고 욕한다고 하지만 그것이 다 거짓말이고 헛소리인 것인데 무슨 입장이 곤란합니까? 육신에나 입장이 통하지 말하는 마음자리한테는 입장이 없습니다. 칭찬하고 헐뜯는데 끄달리면 벌써 거기 빠진 것이고 그 속에 들어가는 겁니다. 벌써 누구한테 매여 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넘어가는 것이고 요리조리 놀림을 당하는 것입니다. 요새 보면 일본서 나온 좋은 향을 절에서 많이 갖다 씁니다. 냄새 맡기 좋다고 부처님께서 좋아하시겠지 하고 그럽니다. 그렇지만 부처님은 구린내 나는 것을 가지고 불공을 한다 해도 싫다 안 하고 향내를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불공하는 사람 자기 정성일 뿐이지 물질이 좋고 궂고는 아무 상관없는 겁니다. 같은 값이면 남이 좋아하는 것 가져 오고 싶어서 그러지만 역시 수다원 초과만 증득해도 자기가 오고 가지도 않는 항상 그대로일 뿐 아니라 일체의 객관에도 안 들어갑니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좋지도 않고, 궂은 음식이라도 싫지도 않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어떤 큰 부자가 부처님의 비구 스님네와 바라문교의 승려를 초청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바라문교는 우리나라의 민속신앙이나 기독교처럼 창조주인 브라흐만 신이 있다고 믿는 외도(外道)였습니다. 이 장자가 바라문교의 거두들을 수백 명 초청하고 또 부처님 제자들을 오백 명 초청해서 점심 대접을 잘했는데 그 나라 국왕도 잘 못 먹어 보는 진미공양을 차려 놓고 가만히 지켜봅니다. 거지 밥 주듯이 먹든지 말든지 줘 놓고 보지도 않으면 그건 또 실례이므로 가만히 지켜보는데 이 바라문들은 생전 처음 먹는 음식을 얻어먹으니까 마음이 좋아서 얼굴에 희색이 만면해서 입도 뻥긋뻥긋하고 눈도 끔뻑끔뻑 코도 쫑긋쫑긋하고 어떻게 좋아하는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 입니다. 그런데 머리를 빡빡 깎고 누더기 옷을 입은 비구승들은 좋아서 먹는지 싫어서 억지로 먹는지 알 수 없이 담담하게 먹습니다.

장자는 그 다음에 먼저 왔던 그분들을 한번 또 청했습니다. 그때는 꽁보리밥에다 텁텁한 된장 좀 지지고 시래기 좀 무치고 생비지에 간장 좀하고 먹으라고 내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바라문들은 생전 그런 건 구경도 못한 맛없는 음식이므로 억지로 숟가락을 놨다가 댔다가 하면서 상을 찡그리고 안 먹을 수 없어서 몇 술씩 뜨고는 숟가락을 놓습니다. 거지 차림의 비구승들은 가만히 보니 역시 먼젓번과 같이 담담하니 한 그릇씩 반찬 하나도 안 남기고 싹싹 긁어 다 먹습니다. 그 얼굴을 보아도 좋은지 궂은지 모르겠고 아무런 표현이 없습니다.

그래서 장자는 나중에 공양을 마친 뒤에 비구승에게 물어 봤습니다. 「아, 스님네들 죄송합니다만 저번의 초청은 제가 복을 지으려고 힘껏 차렸는데 바라문 승려들은 그때 참 기쁜 마음으로 자시는 걸 제가 보고 아주 좋았습니다. 그런데 스님네들은 억지로 먹는지 좋은 마음으로 자시는지 얼굴에 나타나질 않아서 하도 궁금하여 이번에는 일부러 내가 시험 삼아 그래 본겁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스님네들은 담담히 다 잡수시고 반찬 한 젓갈도 안 남겨 놓았고 그것도 싹싹 씻어 그 물까지 다 마시고 그러니 그것 먹기 싫은 걸 조작으로 억지로 그렇게 잡수십니까? 좋은 음식을 자시든 나쁜 음식을 자시든 똑 같은 얼굴로 지시는 그 내력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 노장 비구승 한 분이 일어서며 「비구승 입은 아궁이와 같습니다. 불 때는 아궁이는 썩은 놈을 때도 아무 말 안하고 장작 좋은 것 폭탄 터지듯 잘 타는 놈을 때도 좋다고 안하는 것이나 한 가지입니다. 무심함으로 해서 그걸로 생사를 초월하려고 하는데 음식 좀 맛있으면 좋다고 까불고 나쁜 거 준다고 찡그리고 하면 도가 어디에 있고 언제 생사를 면하겠습니까?」 그런 뜻으로 말했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돌아가신 백용성(白龍城)스님이 통도사(通度寺) 건너 안산이 소금강이라 하여 경치도 좋은 데고 해서 거기 내원암(內院庵)에 계실 적입니다. 부산의 혜월(慧月)스님이 물 떠 오라 해서 물 떠 오니까 그게 불법이라고 하듯이 그와 같은 도인 입니다. 백용성 스님이 초심학인들 데리고 수고를 한다니까 혜월스님이 수박을 하나 사 가지고 왔었습니다. 마침 오니까 용성 스님이 점심상을 받아 놓고 다시마 튀김을 입에 넣고 씹는 판이라 혜월노장님이 막 들어가 밥상머리에 앉자마자 다짜고짜로 「아 그거 맛이 어떻습니까? 맛이 좋습니까? 나쁩니까?」 그러니까 「좋지도 나쁘지도 않습니다.」 용성스님 대답이 좋아서 먹는 것도 아니고 나빠서 먹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거 무슨 맛으로 먹습니까?」 「그저 먹을 뿐입니다.」 달리 또 어렵게 하는 법도 있지만 쉽게 남도 알아듣게 하기위해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다 같은 도인들끼리의 경지이니 이렇게 마음이 통하고 말이 통합니다.

나도 한번 흉내낸다고 지금부터 한 삼십년 전 해방 전입니다. 어떤 신도가 내가 항상 다 떨어진 장삼을 입고 다니니까 모시 장삼을 해 왔습니다. 내가 입을는지 안 입을는지 그것도 물어보지 않고 또 스님네 여러분을 청량리 청량사에 청해 가지고 음식을 차려 놓고 대접을 합니다. 나는 무슨 사연인지도 모르고 따라가서 대접을 받았는데 나중에 장삼을 내 앞에 내 놓고 절을 하고 그럽니다. 그래도 나는 가만히 내 버려두고 앉아 있었습니다. 스님을 새로 정하고 불명이나 하나 지어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나는 그리 해준다는 말도 안하고 안 해준다는 말도 안하고 가만히 앉아서 남의 말처럼 그것도 남의 말이니까 덤덤히 있으니, 거기 같이 갔던 스님들이 화를 내고 야단났습니다. 대보살신도가 와서 절을 하고 이러는데 본체만체하고 앉아 있으니 네가 뭐 그리 대단하냐는 겁니다. 자기들이 면구해서 못 앉아 있겠다는 겁니다. 그래도 나는 말도 안하고 있습니다. 칼을 가지고 나를 찔러도 그건 자기네 일이고 내 일이 아닙니다. 그런 뒤에 나를 대단히 좋지 않게 여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촉(觸)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부딪친다, 대지른다, 닿는다는 말인데 남과 서로 부딪치는 겁니다. 그 가운데 여러 가지 촉이 있지마는 가령 남녀 간의 촉이 제일 무겁습니다. 의복도 좋은 거 부드러운 것 비단을 입으면 몸뚱이 촉감이 좋아지고 색정(色情)이 통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거친 걸입으라는 겁니다. 전에 그런 얘기가 있습니다. 칠십 노인이 아들딸도 없이 홀로 사는데 어떤 처녀가 스스로 자원해서 시집을 갔는데 처음에 명주옷을 해 주어서 색정을 회복시켜 가지고 아들을 낳아서 큰 인물로 길렀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수다원과만 얻어도 이런 촉법에 안 걸립니다. 그러나 이런 선정삼매(禪定三昧)를 얻어도 쓸데없는 객진번뇌(客塵煩惱)를 좋다 싫다 하는 그 마음 쓰는 작용은 그대로 있는데 그게 어디 나가고 들어가고 했습니까? 그건 어디 나가서 하는 것도 아니고 어디 들어와서 하는 것도 아니고 항상 그대로니까 또 그게 나가 버렸다 해서 어디 오고 간 것도 아니고 그 자체 그대로니까 본연한 자체뿐이란 뜻입니다.

 

▶중생이 곧 부처

부처님께서 도솔천(兜率天) 내원궁(內院宮)에서 인간 세상에 내려오시어 인도의 가비라왕국(迦毘羅王國) 마야부인(摩耶夫人)의 뱃속으로 들어가셨지만, 그러나 부처님은 도솔천의 법상(法床 : 설법하시는 자리)에서 내리지 않고 그대로 앉아 계신 채였으며, 또한 마야부인의 태중에서 세상에 나오지 않으신 채 일체 중생을 교화하여 마치신 것입니다. 마음을 깨친 청정한 마음자리에서 보면 일체 중생이 모두 다 부처고 부처 아닌 중생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며, 자기가 깨치고 나면 본래부터 자기가 부처인 것인데, 중생이 그런 줄 모르고 육체가 <나>라고 해서 마음이 참 나인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주관과 객관은 현상으로 볼 때에만 대립되어 있고 상관관계에 있는 것이지 마음의 바탕에서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발과 머리 사이에는 서로 거리가 있겠지만 나하고는 발이나 머리는 다 같이 거리가 없습니다. 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와 몸뚱이는 어느 부분과도 거리가 없습니다. 등도 나의 등이면서 나이고 배도 앞가슴도 나의 배 나의 앞가슴이면서 그대로 나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마음자리에서 보면 앞도 뒤도 없고 머리가 위고 발이 아래라고 하지만 머리가 나의 위도 아니고 발 또한 나의 아래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 경계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마음도 작을 때는 바늘 끝 위에도 올라앉을 수 있고, 또 클 때에는 온 우주를 둘러싸고도 모자람이 없기 때문에 그 크고 작은 것을 말할 수 없으며 동시에 거리나 경계가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가장 자리를 볼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마음이 그렇게 우주에 꽉 찬 것이라면 그곳을 우리가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 의아심이 생길 수도 있고 마치 몸뚱이가 큰 코끼리를 보는 몸뚱이가 날렵하고 작은 원숭이가 「저렇게 큰 몸을 어떻게 움직이며 사는가.」하고 걱정하고 사는 것처럼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늘구멍에 실을 꿰는 경우 마음이 들어 왔다 나갔다 하는 것처럼 이 마음이 작을 때에는 바늘 끝에 올라앉을 수도 있고 클 때는 우주에 꽉 찹니다. 그렇다고 마음이 커졌다 작아진 것도 아닙니다. 마음으로 바늘구멍을 들여다 볼 수도 없지만 마음이 우주에 가득 차 있는 채 그대로 보고 있는 것이며 바늘 끝에 날름 올라앉아도 오히려 넓습니다. 그러나 또한 마음이 거기 올라간 것도 아닙니다. 오직 작고 크고가 자유입니다. 이와 같이 마음이 인간 세상을 내려오고 올라가고 하지만 실로 올라간 것도 내려온 것도 아닙니다.

 

아라한도(阿羅漢道)는 소승(小乘)의 이상

불교에서 소승·대승 나누는 데 소승의 아라한도는 소승불교의 성위(聖位)로서 곧 번뇌를 끊어가지고 망상을 쉬고 쉬고 하여 망상을 완전히 끊어서 남음이 없으면 이것이 나한인데 소승은 이것을 지상의 목표로 삼습니다. 이것을 소승열반(小乘涅槃)이라 하는 데 대승에 비해 마음의 경계가 적으므로 많은 사람을 실을 수 없다는 뜻으로 소승(小乘)이라 한 것입니다. 이들은 번뇌 망상만 끊으면 된다는 지론입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도 마침내는 부서져서 수억만번 생겼다 없어졌다 그러는데, 이렇게 지구가 파멸되어 에너지로 돌아갔다가 또다시 지구가 건립되고 그러는 것을 불교에서 생겨서(生) 있다가(住) 부서져(壞) 없어진다(空)는 뜻으로 성주괴공(成住壞空)이라 그럽니다. 그런데 나한이 되면 지구가 부서져 다 없어지는 이때에도 몸뚱이가 허공에 가만히 있다는 것입니다. 늙지도 젊지도 않고 아무 생각도 없고 정말 편한 사람입니다. 이 천지에 허공이거나 아니거나 아무 상관없고 지구가 없어지거나 원자탄으로 부수거나 나는 상관없습니다. 이것이 생사 밖에 뛰어나서 죽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이렇게 생사 밖에 뛰어났으면서 보살들처럼 중생을 제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중생제도만 하면 곧 부처님께서 될 텐데 소승의 나한들은 남의 말 안 듣는 중생들과 이래라 저래라 잘한다 못한다 그러다 보면 번뇌가 또 일어나서 생사 중생에 떨어지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근본적으로 번뇌가 안 쉬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중생제도를 못합니다. 중생 잘못하는 것을 보면 꾸짖고 때려 주고 싶고 그러니 그것은 탐진치가 아직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중생 제도하려다 나중에 도리어 중생이 되겠다는 것이니 소승불교는 결국 공부가 다 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자기만 편한데 들어가 혼자 안주(安住)하고 있으니 이것은 염세주의입니다. 나한은 신통도 굉장한 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삼천대천만 해도 십억이나 되는 지구이니 굉장한 우주공간이지만, 지구의 천백억배 되는 삼천대천세계에 하루 24시간 소나기가 쏟아져 내렸다고 치면 그 소나기는 마치 우주 폭포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방울방울 떨어지는 물방울이 뒤를 따라 연속 내려오니까 쭉 내려오는 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하나의 물방울의 연속인데 이런 소나기가 십억 백억의 지구에 하루 종일 내렸다고 하면 그 물방울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런데 나한님네는 그렇게 내린 비의 물방울 수를 다 알 수 있습니다. 전자계산기나 되면 모르지만 그 많은 빗방울의 수효를 다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번뇌가 없으니 마음이 환하게 밝아서 다 보인다는 겁니다. 나한의 신통이 그만하면 그 마음이 그만큼 굉장하여 대자연계에 자유로운 힘도 그렇게 크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 나한의 특성 중 하나는 옳고 그른 것을 지킨다는 데도 있습니다. 그래서 중생은 그르다는 한계를 두므로 자비심이 부족하고 대승심이 없다는 것이 그 특징입니다.

 

▶대승(大乘)의 자비 구세사상

대승 불법은 중생이 그대로 부처가 다 되어 있으니 몸뚱이가 나라는 생각만 쉬라는 것입니다. 소승불법 모양 저 혼자 나한이 되어 한쪽에 가만히 앉아 있다면 초견성(初見性)만 해도 할 수 있습니다. 남의 상좌가 잘못하면 때리고 그런 가운데 그걸 초월해서 종일 만나 시비를 하였지만 나는 만난 일 없고 시비한 일 없고 그런 심정에서 얘기해 주고 가르쳐 줍니다. 그 사람은 물론 얘기해도 안 한 거고 얘기 안 해도 안 한 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대승불법입니다. 대승불교의 이런 큰 불법을 성취하려면 이 몸뚱이를 초월하여 한국사람처럼 남 잘되면 미워하고 시기 질투하고 도대체 남의 말 잘 안 듣는 그런 중생들 틈에 끼여 그 사람들을 착하게 만들고 불법을 깨닫게 합니다. 그리고 「내가 중생을 교화했다, 그 공이 내게 있다, 그런 생각하지 말고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하라.」 이것이 대승사상(大乘思想)입니다.

소승은 본래부터 번뇌망상이 있는 것이니 이것을 끊어야겠다는 것이고, 대승불법은 내가 망상을 안내면 된다. 그 망상 자체가 있는 게 아니라 내 마음 자리에서 생각을 일으키니 망상일 뿐이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소승불교는 탐진치가 있다고 하여 천만생을 돌아다니며 이걸 끊어 내려는 것이고, 대승불교는 「내가 망상을 자꾸 내기 때문에 번뇌가 계속되는 것이니 내가 생각 안내면 없다. 허공에서 망상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땅속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하여 근본적으로 생각을 안내려 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오히려 빨리 끊어지고 훨씬 수월합니다. 예컨대, 가정에서 어머니가 애들이 잘못하면 나무라고 안 들으면 손찌검도 하고 때리기도 하지만 참말로 미워서 진심으로 그러는 게 아니고 사람 만들려고 벌을 주는 것입니다. 철이 없는 어린애니까 그런 나쁜 일 못하게 하느라고 겉으로 그러는 것이고 자비심으로 하는 거지 참으로 저놈 때려 없애야겠다는 생각이라면 그 사람은 지옥 갑니다. 그러므로 아무 생각 없이 그 사람 바로 잡기 위해서 빨리 부처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아무 이해 상관도 없이 아무 조건 없이 일러 주는 것뿐이며 대승불교는 처음부터 이렇게 나가기 때문에 종일 얘기를 해도 아무 피로를 모르는 실천이며 보살행이고 수행입니다.

그러나 나한들은 이런 것에 대해 귀찮은 생각을 합니다. 두 번째 세 번째 안 들으면 다 내 버리고 그만 도망가 버립니다. 고약한 놈, 바른 말 바른 대로 해 줘도 안 듣고 귀에 담아 줘도 못 알아들으니 그게 미워서 못 봐 줍니다.

그러니 소승은 애초에 번뇌를 끊어야 하고 중생사회를 멀리 해야 한다는 염세적(厭世的) 불교인데 대해, 대승은 번뇌만 없으면 그 마음이 곧 보리 불성자리이며, 중생·마음·부처가 하나이니, 오로지 중생을 제도해야 한다는 구세주의(救世主義)인 불교입니다. 대승불교는 마음을 깨치면 번뇌가 곧 보리이고 중생이 곧 부처이므로 걸림이 없습니다. 밥을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 대승불법은 그렇게 쉬워야 합니다. 「우리가 주다 주다 줄 게 없으면 눈도 빼 주라」는 말은 몸뚱이가 내가 아니고 눈이 보는 게 아니며 이 오관이 아는 게 아니고 마음이 보고 아는 것임을 확실히 인식하고 이 눈 때문에 못 볼 내가 아니니 중생을 위해 완전히 빼 주는 것이며 설사 못 본다 해도 그래도 좋다. 내가 이렇게 착하게 육신을 정리해 가면서 다리 하나 끊어 달라면 잘라 주고 피 좀 빼 달라면 뽑아 줍니다. 그리고 「이 몸뚱이 죽어도 좋다. 당장에 쓰러지지만 내가 더 용맹정진해서 누구보다 자아완성을 위해서 부처 될 수 있다. 그래서 우주에 자유로운 나를 확보 해야지 항상 육체가 나라는 생각에 이끌려서 좋은 일에도 시비하고 나쁜 일에도 시비하고 이렇게 해선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말 안 듣는 못된 중생들을 백번 천번 일러 주게 되더라도 성내지 말아야 합니다. 안 들어도 그 사람 부처가 될 때까지 자꾸 따라다니며 일러 줘야 합니다. 그것이 자기가 성불하는 방법입니다.

 

▶이상사회(理想社會)는 청정한 마음으로부터

금강경도 이런 마음으로 가만히 읽으면 확실히 할 일, 못할 일, 구별이 납니다. 사람이 꼭 할 일이 뭐냐 하면 사람을 생사에서 꼭 건져내야 하는 일입니다. 육체를 나라고 하다가는 고통을 면할 길이 없다고 하는 것을 깨우쳐야 합니다. 1초도 마음이 편안할 수 없고 남과 안 싸울 수도 없고 싸워 봤자 다 버리고 가야 하는데, 밤에 갈는지 70년, 80년 살고 갈는지 모르고 돈이 많다고 밥을 두 그릇 먹느냐 하면 누구나 밥 한 그릇과 옷 한 벌은 마찬가지이니 밥 한 그릇 옷 한 벌 놓아두고는 다 남 주어라, 없는 사람들 내가 안 주면 속으로 날 얼마나 미워할까? 그리고 내생에 만나 형제가 되어 싸우고 자식이 되어 싸우고 곤란을 줍니다. 장학제도도, 병원도 만들어 직공들 처자 다 치료해 주고 직공뿐 아니라 온 동네 사람 온 나라 사람 불쌍한 사람 다 도와 주자. 벌어서 다 뭐 할 것인가. 가지고 가지도 못하고 다 버리고 갈 건데 보시나 좀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본주의는 저만 살겠다는 욕심 버리고, 공산당은 한 사람이 독재를 해서 소처럼 개처럼 부려 먹으려 할 필요가 없어져서 세상은 공산당도 자본주의도 없어지고 평화스런 사회가 됩니다.

불교사상에 들어서면 우리는 모두 남을 위해서 희생해야 합니다. 그러면 가정도 편해지고 내 맘도 편해지고 이렇게 내 맘이 편하면 전 세계가 편해집니다. 내 말이 더러우면 온 중생이 다 더러운 사람이 되고, 내 맘이 청정해지면 온 국민이 다 청정해집니다. 그러니 이 세상을 자유 평화롭게 하려거든 네 맘부터 바로 잡아라. 공연히 세상이 냉혹하다 국가가 어떻다, 정치하는 사람 나쁘고 부패했다 하지만 그렇게 아무리 나쁘다고 해 봤자 근본적으로 고쳐지지 않습니다. 우선 너부터 고치면 모두 좋은 사람 돼 갑니다. 그러니 저만 착해지면 모두 착해 집니다. 따라서 불교는 사회 정화하는 기본 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너부터 나쁜 데 가담하지 말고, 너 자신 하나가 정화되면 그러면 너를 대하는 사람도 다 너같이 된다. 「사람이 나쁘다.」 「세상이 나쁘다.」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나쁜 길로 간다는 건 그 책임이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대승불교의 정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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