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요약>

사람의 내면에서 성품(性 성)·감정(情 정)·의사(意 의)·의지(志 의)를 포함하는 주체.

 

 

[내용]

마음은 지각하고 사유하고 추론하고 판단하며 자신을 통제하는 역할을 한다.

마음은 좁은 의미로서 육신에 상대되는 지각능력을 중심으로 인식되기도 하고,

넓은 의미로서 우주와 마음을 일치시키는 유심론적(唯心論的 : 우주의 본체를 정신적인 것으로 보며 물질적 현상도 정신적인 것의 발현이라는 이론)세계관의 마음 개념이 있다.

 

곧 원효(元曉)는 “삼계(三界 : 중생이 생사 왕래하는 세 가지 세계)가 곧 마음이다.”라 하여 우주를 하나의 마음이 일으키는 현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일상어 가운데 ‘마음자리’·‘마음결’·‘마음씀’·‘마음씨’라는 단어가 있다. 근원적인 마음의 바탕(體 체)과 그것의 움직임(動 동)과 그것의 발현(用 용)과 그것의 모양(狀 상)이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마음자리’는 마음의 바탕을

‘마음결’은 마음의 움직임을,

‘마음씀’은 마음의 발현을,

‘마음씨’는 마음의 모양을

나타내는 단어라 할 수 있다.

마음을 바탕·움직임·발현·모양의 4가지 범주로 구분하여 각각의 설명과 아울러 이에 해당한 단어군(單語群)을 살펴볼 수 있다.

 

첫째, 마음자리는 ‘마음의 근원’, ‘마음의 바탕’, ‘심지(心地)’, ‘심원(心源)’이라 풀이되는 일체 마음의 근본을 나타내는 단어다. 그것은 마음의 근본을 이룰 뿐이요, 아직 밖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니 관념적 인식의 대상이다.

 

그것은 선과 악(善惡 선악)이나 아름다움과 추악함(美醜 미추)이나 깨끗함과 더러움(染淨 염정)도 떠나 있는 것이다. 붙잡을 수도 보고 들을 수도 없이 다만 고요하고 담담(湛然 담연)한 것이다.

그러나 이 고요하고 담담한 마음자리는 외물에 감응이 되면 물결을 일으키게 된다. 감응의 물이 가라앉으면 다시 본연의 상태로 돌아간다. 마치 바람이 불면 물결을 일으키다가도 바람이 자면 고요한 상태로 돌아가는 바다와도 같다.

원효는 이러한 마음을 ‘일심(一心)의 바다’라 표현했다. 이러한 마음은 바탕을 이루기 때문에 만물을 낳은 하늘이 하나인 것처럼 ‘마음자리’도 하나로 인식한다.

 

둘째, 마음자리는 아직 밖으로 나타나지 않은 것이지만, 마음결은 외물에 감응되면 쉽게 물결을 일으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 물결을 일으키는 상태가 ‘마음결’이다. 바다나 강물은 천년이라도 고요함을 지킬 수 있지만 태풍을 만나면 격랑을 일으키고, 벼랑 아래에서는 용솟음치고, 탁류를 만나면 물색이 변한다.

이러하듯이 마음자리도 외물에 감응하면 그 외물의 속성대로 물결을 일으킨다. 마음자리도 외물에 감응되면 외물의 속성대로 결을 일으킨다. 여기에 해당한 단어들은 ‘마음결’ 외에 ‘마음가짐’과 ‘마음보’ 등이 있다.

 

셋째, ‘마음씀’이다. ‘마음결’이 마음의 움직임을 뜻한다면 ‘마음씀’은 ‘마음결’이

실제 밖으로 드러나는 발현이다.

물론 ‘마음결’과 ‘마음씀’을 다 같이 마음의 발현으로 묶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을 미세하게 쪼개어 보면 마음이 동요하는 단계와 그것이 실제로 밖으로 드러나는 단계로 나눌 수 있다. 마음은 움직이지만 그 움직임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은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의 움직임과 마음의 발현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넷째, ‘마음씨’다. 이것은 마음결이 일어날 때와 마음씀이 드러날 때 어떤 모양으로 일어나고 드러나느냐 하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이다. 곧 마음에 관련된 형용사는 모두 이에 해당한다. 이처럼 일상어에 나타난 마음은 그 구조상으로는 바탕·움직임·발현·모양의 체계를 가지고 있다. 하나밖에 없는 마음의 바탕이 움직임·발현·모양으로 전개되면서 많은 단어를 파생시키는 것을 알 수 있다.

 

불교에 나타난 마음을 고찰할 때에는 마음을 마음자리→마음결→마음씀→마음씨의 구조에서 화살표를 거꾸로 놓아 마음자리←마음결←마음씀←마음씨의 구조를 주목한다. 이 구조는 마음을 근원적인 마음자리로 되돌리는 구조다.

마음자리는 선과 악이나 아름다움과 추악함을 넘어선 담담하고 고요한 그 어떤 경지이다. 마음은 외물에 감응되어 선하고 아름답고 깨끗하게도 되지만 악하고 추악하고 더러움에 물든 것이 되기도 한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망심(妄心)이라 표현한다. 그러기에 마음결과 마음씀에서 생겨나는 망심을 끊어버리고 마음자리로 되돌아가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벗어 던져버리고, 이른바 해탈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불교나 유교에서 어렵게 설명하고 있는 수심론(修心論)은 마음결과 마음씀에서 생겨난 망심을 끊어버리고 본질적인 마음자리를 찾아 나서는 방법이다. 불교의 심론(心論)은 마음의 본체에 대한 설명과 그 본체를 가리우는 심식(心識)과 연기가 일어나는 까닭을 밝히고 그것을 씻고 본체에 이르는 방법으로 돈오(頓悟)와 점수(漸修)를 타이르는 이론이라 할 수 있다.

심론의 과정을 불교경전 속에서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첫째, 마음의 본체에는 상(相)이 없다. “지난날의 마음을 잡을 수가 없고, 현재의 마음도 잡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잡을 수 없다.”(般若經 반야경), “마음은 안에도 있지 않고 중간에도 있지 않다.”(維摩經 유마경),

“마음의 자성(自性)은 공적(空寂 : 空은 그 어느 것도 형상이 없음을 이르고, 寂은 일어나거나 스러짐이 없음을 이른다.)하여 대립도 없고 소멸한 일도 없다. 그것은 처음인 것도 아니요, 가운데나 뒤인 것도 아니며, 삼세(三世)를 초월하여 그 모습이 허공과 같다.”(華嚴經 화엄경), “마음이란 본래 있는 것이 아니어서 번뇌에 더럽혀질 여지가 없으니, 어찌 마음이 탐(貪)·진(瞋)·치(痴)에 의해서 더럽혀지며, 삼세에 속하는 온갖 것에 무엇을 마음이라 하랴.”(心地觀經 심지관경) 등이 있다.

 

둘째, 다음으로 마음의 본체는 평등하다. “모든 중생은 같은 불성을 가지고 있어서 차별이 없다.”(涅槃經 열반경), “마음의 본성은 청정하여 더러움에 물드는 일이 없다. 마치 하늘에 연기와 먼지나 구름 그리고 안개 따위가 뒤덮여 맑고 깨끗하지 못하다 하더라도 하늘의 본성이 더럽혀지는 일이 없는 것과 같다.”(勝思惟梵天所問經 승사유범천소문경), “심성의 청정함은 물 속의 달과 같다”(大寶積經 대보적경) 등이다.

마음의 본성은 모든 사람이 누구나 가지고 있다. 또 그것은 상(相)이 없으니 더럽혀 질 까닭도 없다. 마음은 오염과는 관계 없이 청정하기만 한 하늘이나 물 속에 비친 달과 같은 것이다. 이것이 마음의 본성이요 불성(佛性)이다. 그런데 이러한 마음이 무엇 때문에 더럽혀지는가? 그것은 마음에는 심식(心識)과 연기(緣起)가 있기 때문이라 한다. 다음의 구절들은 마음의 심식과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마치 달 속에 여러 가지 물체의 모습을 보는 것과 같아서, 세상이 무실(無實)하지만 분별함을 따라서 그것이 일어난다. 분별하는 까닭에 분별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大乘破有論 대승파유론), “중생이 경계를 망령되이 인정하므로 마음의 차별이 생긴다.”(起信論 기신론),

“마음은 본래부터 생긴 일도 일어난 일도 없어서 그 본성이 언제나 청정할 뿐이다. 그러나 바깥에서 들어온 티끌과 번뇌(客塵煩惱 객진번뇌)에 의해서 더럽혀진 까닭에 분별하는 마음이 있게 되는 것이다.”(持世經 지세경), “대해의 물결이 사나운 바람으로 인해 일어나면 큰 파도가 바다에 물결쳐서 끊일 새가 없게 된다. 알라야식(阿賴耶識 아뢰야식)도 그래서 경계의 바람이 불어와 흔들면 여러 가지 식(識)의 물결이 치솟아 날뛰고 자꾸 생겨나기 마련이다.”(入楞伽經 입능가경)

 

심식과 연기는 마음결이나 마음씨(씀)를 의미한다. 원래 마음의 본성, 곧 마음자리는 바다처럼 고요하고 청렴한 것이지만 외계의 사물에 부딪게 되면 마음자리의 경계를 깨뜨리고 곧장 동요하게 된다. 마치 바다에 바람이 불면 파도가 치는 이치와 같다. 그것을 ‘식(識)’이라 하였다.

‘식’은 여덟 가지로 팔식(八識)이다. 사람에게는 감각과 의식의 기능이 있다. 그것이 안식(眼識)·설식(舌識)·후식(臭識)·이식(耳識)·신식(身識)·의식(意識)의 육식(六識)이다. 이 중에서 앞의 오식(五識)까지는 감각기능이고 제 육식(第六識)인 의식은 사고(思考)에서 나타난 정신적인 인식이다. 이외에 말나식(末那識)이라는 제 칠식(第七識)은 자아의식(自我意識)에 해당한다. 또한 불교 특유의 제 팔식(第八識)을 ‘알라야식’이라 한다. ‘장식(藏識)’이라 번역하기도 한다.

‘알라야식’은 의식을 초월한 것

'공 부 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삼법인 사성제 팔정도  (0) 2017.03.20
○무명(無明)이란 무엇인가?  (0) 2017.03.16
양자물리학과 깨달음의세계  (0) 2016.02.08
선禪의 본질本質과 의미意味 (고우스님)  (0) 2015.12.29
연기緣起란?  (0) 2015.12.29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