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이 아파서 108배를 하기 힘들어요

(제가 무릎이 좀 안 좋아서 108배와 바닥에 앉아서 하는 명상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명상은 의자에 앉아서 하는 것으로 조정을 해서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래도 괜찮은지 묻고 싶어요. 그리고 108배는 서서 반배하는 것으로 108배를 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괴로움에서 벗어나 괴로움이 없는 편안한 삶을 사는 것이 목적입니다. 어떤 철학적 논쟁을 하자는 것도 아니고, 무엇을 믿자는 것도 아니고, 죽어서 천당을 가겠다는 것도 아니고, 죽어서 다음 생에 부자가 되겠다는 것도 아니고, 오래 살겠다는 것도 아니고, 지금 내가 아무런 번뇌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삶을 가볍게 살 수 있느냐는 것이 목적입니다. 지나간 어제 얘기도 아니고, 다가올 내일 얘기도 아니고, 지금 내가 어떠냐가 중심입니다.

상대가 나를 비난할 때도 내가 편안한가? 겨울인데도 내가 편안한가? 여름인데도 편안한가? 오늘 먹을 음식이 없어도 편안한가? 누가 위협을 해도 두려움이 없는가? 어떤 상황에서든 편안하게 사물을 대할 수 있는가? 내가 늙어도 편안한가? 내가 병이 들어도 편안한가? 나이 들어 죽음을 맞이할 때도 편안한가?

어떠한 경우에도 마음이 편안한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나머지는 거기에 가기 위한 수단들입니다.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가장 큰 장애가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가 장애가 있지만 그 가운데 가장 큰 장애는 ‘하고 싶다’, ‘하기 싫다’ 하는 우리들의 욕망입니다. 하면 안 되는 상황인데 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기 때문에 고통을 받게 됩니다. 해야 될 상황인데 하기 싫다고 안 하려고 하기 때문에 고통을 받게 됩니다. 우리들의 욕망이라는 것은 ‘하고 싶다’, ‘하기 싫다’, 이 두 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은 해도 될 때가 있고, 하면 안 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나의 욕망과 바깥 상황을 결합시키면 네 가지 경우의 수가 나옵니다. 내가 하고 싶고, 상황도 해도 괜찮은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하고 싶은 대로 해도 괜찮습니다. 하기 싫은데, 상황도 하지 말아야 할 상황이 있습니다. 이때는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됩니다. 이 두 가지 경우는 특별하게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고 싶지만 하면 안 되는 상황이 있습니다. 그때는 하게 되면 손실이 따릅니다. 반대로 하기 싫은데 해야 될 상황이 있습니다. 그때 하기 싫다고 안 하게 되면 손실이 따르게 됩니다. 이 두 가지 경우가 우리에게 고통을 가져오는 겁니다.

비만에 걸린 사람은 먹고 싶은 대로 음식을 먹으면 건강에 해롭습니다. 그래서 먹고 싶더라도 먹지 말아야 합니다. 이 음식에 독성이 있다면 그걸 먹게 되면 건강을 해칩니다. 즉 먹고 싶다고 먹으면 손실이 생깁니다.

앞에 아름다운 여인이나 멋진 남자가 있습니다. 그와 포옹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걸 하게 되면 성추행이 됩니다. 그 결과 비난을 받거나 감옥에 가게 됩니다. 그때는 포옹하고 싶더라도, 손을 만지고 싶더라도, 만져서는 안 됩니다. 하고 싶은 건 무조건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에요. 하고 싶지만 손실을 가져오는 것은 멈추는 게 나한테 이익이라는 겁니다. 욕망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욕망을 무조건 따라갔을 때 큰 손해를 초래한다는 거예요.

어리석은 사람은 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서 스스로 자기에게 손해를 끼치는 일을 합니다. 이런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기보다는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자기를 해치기 때문입니다. 물론 타인을 기준으로 볼 때는 나쁜 행동이라고 표현할 수는 있어요. 그러나 불교는 주로 자기를 기준으로 해서 보기 때문에 자기에게 해가 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말라고 표현합니다. 반면에 지혜로운 사람은 그것이 좋아 보이고, 하고 싶지만, 손해를 가져오는 과보를 미리 알기 때문에 하고 싶지만 그것을 멈춥니다.


나에게 해를 끼치는 것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어요. 첫째, 나에게도 해를 끼치고 타인에게도 해를 끼치는 것도 있습니다. 둘째, 타인에게 해를 안 끼치고 나만 해를 끼치는 것이 있습니다. 비만인데도 음식을 많이 먹는 것은 남에게 피해를 주는 건 아니에요. 나만 해칩니다. 그러나 다른 이를 껴안는 것은 나에게도 손해이고, 타인에게도 손해가 되는 일이에요. 즉,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말라는 것은 나쁜 행동을 하지 말라는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말이 이해가 되세요?”

“그러면 나에게도 나쁜 행동을 하지 말라는 말씀이신가요?”

“나에게 하는 행동은 나쁜 행동이라고 하지 않고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합니다. 내가 나를 손해 끼치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에요. 그래서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은 나쁜 행동에 들어가지만, 나를 죽이는 자살은 어리석은 행동에 들어갑니다. 나를 기준으로 보면 어리석은 행동 안에 남에게도 손해가 되는 나쁜 행동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으면 나쁜 행동은 저절로 없어집니다. 그래서 자기를 해치는 어리석은 행동은 아무리 하고 싶어도 멈춰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고 싶은 것이 멈춰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손해를 보는 거예요. 그것을 ‘과보를 받는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설령 참아서 행동을 멈추면 멈췄다 하더라도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나한테 손해라는 것을 확실히 알아버리면 행동을 멈출 때도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요.

비록 하기 싫어도 이익이 된다면 하기 싫은 것도 능히 할 줄 알아야 됩니다. 하기 싫다고 하지 않으면 손실이 따르고, 하기 싫지만 행하면 이익이 된다면, 하기 싫음에 구애받지 않고 능히 행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고 말합니다. 물론 욕망이 일어나지 않으면 저절로 해결되지만, 욕망이 일어나더라도 욕망에 끌려가서는 안 됩니다.

아침에 5시에 일어나서 매일 기도하기로 약속을 했는데 막상 일어나기 싫다면, 그때는 일어나는 게 수행입니다. 명상하고 절하는 것만 수행이 아니라 그때는 일어나는 게 수행입니다. 절을 하기로 했는데 절하기가 싫다면, 그때는 절을 하는 게 수행입니다. 절이 핵심이 아니라 하기 싫은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게 수행의 핵심입니다.

몸이 건강하고 다리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단지 하기 싫은 마음에 사로잡혀서 절을 안 하면 수행이 아닙니다. 절을 한다고 해서 몸에 이상이 생기는 게 아니잖아요. 사실은 육체적으로 따져도 절을 하는 것은 운동이 되기 때문에 하면 좋은 일입니다. 그럴 때는 싫어도 하는 것이 수행입니다.


그런데 다리를 다친 것이라면 또 다른 문제입니다. 절을 하게 되면 다리를 더 다치게 되기 때문에 절을 하는 것이 자기에게 손해를 가져오게 됩니다. 이럴 때는 절을 하는 것이 수행이 아닙니다. 몸을 다쳐서 안 하는 것과 하기 싫어서 안 하는 것은 구분이 되어야 합니다.

명상을 한다, 절을 한다, 염불을 한다, 이렇게 어떤 특정한 형식을 갖고 수행이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수행이란 하고 싶거나 하기 싫은 마음을 극복해서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어떻게 성냄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느냐. 어떻게 어리석음을 깨우치느냐. 그래서 두려움이 없고 괴로움이 없는 경지로 나아갈 수 있느냐. 거기에 도움이 되면 수행이고, 도움이 되지 않으면 수행이 아닙니다.

다만 다리가 아픈 정도가 의학적으로 봤을 때 절을 하면 안 되는 상태인지, 오히려 천천히 절을 함으로 해서 재활치료 효과가 나서 도움이 되는지, 이것이 정확하게 규명이 되어야 해요. 명상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나 다 처음 가부좌를 하면 다리가 아프고, 허리도 아픕니다. 그 통증을 이겨냄으로 해서 자세가 오히려 더 교정이 되고 좋아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개중에는 정말 허리를 다쳐서 그렇게 하면 몸 자체에 잘못이 생기는 경우도 있어요. 이것이 정확하게 규명이 되어야 ‘의자에 앉아서 하세요’, ‘절을 하지 마세요’ 이렇게 답변을 해줄 수가 있습니다.”

“젊었을 때는 절을 하거나 앉아서 명상하는 것에 전혀 문제가 없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나이가 57세이고, 지난 5년 동안은 점점 힘들어지기 시작했어요. 무릎이 아파서 물리치료를 받고 있는데, 물리치료를 받고 나면 괜찮아졌다가 다시 안 좋아지고를 반복합니다. 아마 제 나이 때문에 관절염이 있는 것 같아요.”


“절을 하거나 가부좌를 꼭 해야 수행이 아니라는 것을 제가 얘기하는 거예요. 반대로 다리가 조금 아프다고 해서 ‘의자에 앉아서 하겠다’, ‘절을 하지 않겠다’ 이렇게 해도 안 됩니다.

제가 10년 전에 LA에서 명상을 지도할 때였습니다. 60대 넘은 남자분이 수련에 참가했는데, 자기는 허리를 다쳐서 땅바닥에 앉지 못한다고 해요. 베트남 전쟁에 참여했는데 그때 허리를 다친 이후로 한 번도 땅바닥에 앉아보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의자에 앉아서 명상을 하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제가 하루만 바닥에 앉아서 해 보고, 도저히 안 되면 그때 의자에 앉도록 해줄 테니까 오늘 첫날은 바닥에 앉아서 해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통증 때문에 너무 아프다고 했어요.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가부좌를 풀고 있어도 계속 아파요?’
‘가부좌를 풀고 나면 조금 덜 아픕니다.’

그래서 하루만 더 해보자고 했습니다. 이튿날은 정말 눈물이 날 정도로 아프다고 고통을 호소했습니다.

‘일어나도 계속 아파요?’
‘일어나면 조금 덜 아픕니다.’

그래서 하루만 더 해보자고 했습니다. 이렇게 고통을 호소하면서 5일 명상을 마쳤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끝날 때 이렇게 말했어요.

‘지난 30년 동안 한 번도 바닥에 안 앉아봤는데 이제는 바닥에 앉아도 되겠어요’


이분은 재활치료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어요. 처음에는 엄청나게 저를 미워하다가 갈 때는 고맙다고 몇 번을 인사했습니다. 고통은 멈춰야 할 게 있고, 이겨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의사에게 먼저 진단을 받아야 해요. 관절이 닳았다든지, 엉덩이뼈가 어긋났다든지, 이런 구체적인 진단이 나오면 그에 맞게 수행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면 절하는 속도를 늦추든지, 방석을 조금 높이든지, 약간의 조정만 하면 됩니다.

절이나 명상 자세가 핵심이 아니에요. 질문자의 마음 속에 있는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핵심입니다. 앞으로도 극복해야 될 것이 수없이 많습니다. 이런 것들을 자꾸 피해 가면 결국은 열반에 이르기까지 가기가 어려워집니다.

몸에 문제가 있으면 절을 안 해도 돼요. 서서 반배하는 그런 형식을 굳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수행이란 하기 싫은 마음을 극복하는 것이기 때문에 절을 하는 대신 다른 수행을 하면 됩니다. 그러나 천천히 절을 한다든지, 방석을 하나 더 놓는다든지 했을 때 괜찮다면, 조금 통증이 있더라도 그것은 이겨내야 할 대상입니다.

절을 해야 한다고 집착해도 안 되고, 절이 수행이냐며 절을 안 해도 안 됩니다. 몸이 다쳤는데 절을 해야 된다고 집착하면, 그것은 절을 해도 수행이 아니에요. 몸이 괜찮은데 조금 통증이 있다고 해서 절을 안 하겠다면 그것 또한 수행이 아닙니다. 만약 티베트 식으로 절을 했을 때 무릎이 괜찮다면, 티베트 식으로 절을 하셔도 됩니다.


얘기가 좀 길어졌네요. 이 분의 질문을 통해서 수행이 무엇인지,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하는지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이것이 부처님이 말한 중도, Middle way입니다. 수행하는 목표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다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이 법을 이해하고 실천해서 괴로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게 중요합니다. 내가 먼저 약을 먹고 나아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아픈 사람을 보면 내가 이 약을 먹고 나았으니 당신도 한번 먹어 보라고 적극적으로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쉽고 명확합니다. 이 길이 굉장히 멀고 어렵게 느껴진다면 여러분이 자기가 가진 습관, 욕망을 딱 움켜쥐고 안 내려놓으려 하기 때문이에요. 아침 5시에 일어나기로 했으면 어제 몇 시에 잤든지 따지지 말고 싹 일어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싫은 것도 능히 할 수 있고, 좋아하는 것도 딱 멈출 줄 알아야 합니다. 근데 좋고 싫음에 매여서 ‘싫은데 어떻게 해. 좋은데 어떻게 그만둬.’하고 전전긍긍하면 아무리 불교를 많이 알아도 해탈은 못 합니다. 자기 까르마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자기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삶이 훨씬 가볍고 밝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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