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묘행무주분 여리실견분

나의 무지를 깨우치면 나의 괴로움이 없어지고 나의 괴로움이 없어지면 다른 사람에게 도움 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소승불교 사상의 요지입니다. 반면 대승불교 사상의 요지는 내가 다른 사람을 돕겠다는 마음을 내면 나의 괴로움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소승불교는 나의 괴로움이 먼저 없어지고 난 후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다는 관점이고, 대승불교는 다른 사람을 돕는 마음을 내면 내 괴로움이 사라진다는 관점이에요. 먼저 깨닫고 남을 돕는 게 아니라 남을 돕는 마음을 내면 내 깨달음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승 수행법은 어떤 어려운 환경에 처했을 때 회피하거나 이 세상을 떠날 필요가 없이 그 상황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오히려 괴로움을 극복한다는 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대승적 관점을 갖고 타인에게 베푼다 하더라도 베풀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바로 괴로움이 생기게 됩니다. ‘내가 베풀었다하는 생각을 하면 왜 괴로움이 생길까요? ‘고마워하겠지혹은 나중에 갚겠지하는 기대하는 마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를 도와줬다’, ‘내가 너를 구제했다이렇게 생각할 때는 늘 기대하는 마음이 뒤따르게 됩니다. 기대하는 마음은 곧 괴로움으로 돌아오게 돼요. 그래서 베풀었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오늘 배울 내용에 대한 강의가 이어졌습니다.

 

금강경 제4분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은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의 공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어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는 도와줬다는 기억을 잊어버린다는 뜻이 아니에요. 도와줬다는 생각을 하면 기대가 생기기 때문에 도와줬다는 ()’을 짓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마음이나 생각으로 짓는 것을 객관적 사실이라고 착각하는 것을 ()’을 짓는다고 표현해요. 즉 주관을 객관화한 것을 ()’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내 눈에 빨갛게 보인다고 저것은 빨간색이다라고 생각할 때 상을 짓는다라고 합니다.

 

작다고 할 수도 없고, 크다고 할 수도 없다

우리는 흔히 키 큰 사람’, ‘키 작은 사람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객관적 사실이 아니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상()을 지어서 객관적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키가 170인 사람이 180인 사람하고 같이 있으면 키가 작은 사람이 되는 것이고, 키가 160인 사람하고 같이 있으면 키가 큰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키가 170인 사람은 큰 사람도 아니고 작은 사람도 아닙니다.

 

나이가 50세인 사람이 60세인 사람과 같이 있으면 젊은 사람이 되고, 30세인 사람하고 같이 있으면 늙은 사람이 됩니다. 50세라는 나이는 많은 것도 아니고 적은 것도 아니라는 것이 객관적 사실입니다. 늙은 사람, 젊은 사람이라는 표현은 객관적 사실이 아니에요.

 

누구하고 비교하느냐에 따라서 크다’, ‘작다’, ‘넓다’, ‘좁다’, ‘길다’, ‘짧다이런 인식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주관적 인식을 객관적 사실이라고 잘못 알고 있기 때문에 옳으니 그르니 하는 시비가 일어나는 거예요. ‘크다’, ‘작다’, ‘넓다’, ‘좁다’, ‘비싸다’, ‘싸다하는 건 주관적인 것인데 이것이 객관적 사실이라고 착각하는 것을 상을 지었다라고 말합니다. 상을 지었다는 것은 주관을 객관화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상은 허망하다고 표현합니다. 작다고 할 어떤 실체도 없고, 크다고 할 어떤 실체도 없습니다. 그 조건에서 그렇게 인식되었을 뿐이에요.

 

크다고 할 수도 없고, 작다고 할 수도 없다고 하니까, 그럼 큰 것도 없고 작은 것도 없다는 뜻이냐고 물을 수 있겠죠. 그런 뜻은 아니에요. 우리는 항상 어떤 조건 속에서 인식을 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어떤 조건에서는 클 수도 있고, 어떤 조건에서는 작을 수도 있는 거예요. 어떤 조건에서 서로 비교했을 때 크다’, ‘작다하고 말할 수 있지만, 일괄적으로 크다’, ‘작다하고 말할 수 있는 실체는 없습니다. 인연을 따라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한 거예요.

 

내가 베풀었다는 상을 짓게 되면

마찬가지로 남을 돕거나 베풀고 나서도 내가 베풀었다하는 상을 짓지 말라는 겁니다. 괴로움이 생기지 않으려면 얻으려고 하지 말고 베풀어야 하고, 사랑받으려 하지 말고 사랑해야 하고, 이해받으려 하지 말고 이해해야 한다는 원리는 제3분에 대해 강의할 때 이미 설명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베풀고 나서 내가 베풀었다하는 상을 짓게 되면 또다시 괴로움이 생긴다는 것이 제4분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수보리가 부처님께 마음을 어떻게 머물러야 합니까?’ 하고 물은 겁니다. 부처님의 대답은 상을 짓지 말고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목이 묘행무주’(妙行無住)‘예요. 상을 짓지 않는 미묘한 행은 머문 바가 없다는 뜻입니다.

 

제가 30년 전에 미국의 어느 절에 있을 때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그 절에 매일 와서 기도하는 노보살님이 계셨어요. 그분은 기도를 절대로 빼먹는 법이 없고, 저보다 더 열심히 기도를 했어요. 어느 날 점심을 먹고 노보살님과 얘기를 나눌 시간이 생겨서 노보살님에게 어떻게 기도를 하루도 안 빠지고 그렇게 열심히 하는지 물어보았어요. 그랬더니 노보살님이 저는 하루라도 기도를 안 하면 못 살 것 같아서 이렇게 죽기 살기로 기도를 합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노보살님의 얘기를 들어보니 이랬습니다.

 

결혼해서 첫째 아이를 낳고 둘째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 6.25 전쟁이 터졌어요. 남편이 전장에 나갔는데 사망 통지가 왔답니다. 살 길이 막막한 상태에서 아이 하나는 손잡고 아기 하나는 등에 업고, 절에 가서 지극정성으로 관세음보살을 부르면서 기도를 했다고 해요. 믿음이 없었다면 살지 못했을 텐데 지극정성으로 관세음보살을 부른 공덕으로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살아낼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런 기도 덕택인지 장사를 하면서 조금씩 생활이 풀리고 아이들도 잘 자라주었습니다. 아이들이 커서 첫째는 서울대 의대를 가고, 둘째는 서울대 공대에 들어갔습니다. 둘 다 국비 장학생으로 미국에 유학을 가게 되었어요. 아들 둘이 미국으로 떠나고 혼자서 한국에서 가게 운영을 하고 살았는데, 미국에 사는 두 아들이 이제 자기들도 충분히 살 형편이 되니 한국에서 고생하지 말고 미국에 와서 편안히 사셨으면 한다는 거예요. 그래도 미국 가서 아들들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혼자 장사하고 살았는데 점점 나이가 드니 몸이 불편해져서 가게를 싹 정리한 돈을 가지고 미국에 와서 그 돈을 아들에게 보태서 집을 사고, 아들 집에서 함께 생활하게 되었어요.

 

처음에는 두 아들이 성공해서 평생 고생한 보상을 받는다고 주위에서 칭찬하고 그랬는데, 막상 미국에 와서 살아보니 생지옥이었습니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와 같은 생활이었기 때문입니다. 두 아들과 며느리들 모두 일하느라 바쁘고, 본인은 혼자서 외출을 할 줄 모르니, 차에 실어서 이 집에 갖다 놓으면 이 집에 있고, 저 집에 갖다 놓으면 저 집에 있어야 했습니다. 하루하루 지나니까 숨이 막혀왔습니다.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절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어 절을 찾아온 거였어요.

 

남이 볼 때는 아들 둘 다 성공했고, 기도도 열심히 하고, 보시도 많이 하는 훌륭한 보살이었지만 속마음은 죽을 지경이었던 겁니다. 키울 때 온갖 정성을 다해서 키웠는데 자기 일 바쁘다고 엄마를 팽개쳐두는 큰 아들에게 몹시 섭섭해서 작은 아들 집에 갔습니다. 작은아들도 똑같이 행동하니까 또 섭섭해서 큰 아들 집에 가고, 두 집을 왔다 갔다 하다가 요즘은 이제 거의 절에 와서 살고 있었던 거예요.

 

아들 생각만 하면 울화가 치밀어 올라요, 어떡하죠?

노보살님은 아들 생각만 하면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며 저에게 하소연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한국 갈 때 자기를 좀 데려가 달라고 부탁을 했어요. 자기가 평생 장사를 했기 때문에 비행기표는 한국 가서 돈을 벌어 갚겠다고 하면서요. 아들에게 한국에서 가져온 내 돈만 돌려주면 한국에 돌아가서 가게 운영하면서 살겠다고 했는데 아들이 왜 그 고생을 하려고 하냐면서 안 보내 준다는 겁니다. 이 분이 금강경을 매일 하루에 일곱 번씩 읽었거든요. 그래서 제가 보살님에게 물었습니다.

 

금강경에 무주상보시라는 걸 아세요?’

 

베풀고 나서 베풀었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러면 아들 낳고 키울 때 나중에 효도받으려고 키웠습니까?’

 

아니요.’

 

그런데 왜 아들한테 그렇게 섭섭한가요?’

 

내가 무언가를 기대하고 안 키웠다 하더라도 사람이라면 부모한테 잘해야 할 거 아닙니까?’

 

그 말도 일리가 있는 얘기지만 보살님이 바라니까 섭섭한 거죠. 너희 둘이 잘 커서 고맙다는 마음을 가지면 왜 섭섭하겠어요.’

 

그래도 성공을 했는데 어떻게 부모를 이렇게 둘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살님은 불법을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냥 관세음보살 부르는 소리만 내는 거예요. 절하는 건 다리 운동이지 그건 불법이 아닙니다. 보살님은 절에 헛다녔습니다.’

 

이 분이 신심이 굳기로 소문난 사람인데 절에 헛다녔다는 말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스님한테 동정을 좀 받아서 어떻게든 한국에 가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어쩜 그렇게 매몰차게 얘기하느냐는 거죠. 그래서 왜 절에 헛다닌 것인지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보살님, 이렇게 절에 다닐 바에야 절에 안 다니는 게 나아요. 그러니 내일부터 오지 마십시오.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건 결국 나를 섭섭하게 한 저 두 아들에게 벌 좀 주라는 거 아닙니까? 설령 보살님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더라도 결과적으로 보살님의 속이 시원하려면 그렇게 되어야 하는 거잖아요. 관세음보살을 부르지 말고 아들만 보면 앞으로 저 자식 남이다이렇게 염불을 하세요.’

 

이 말을 듣고 진짜 충격을 받았는지 보살님이 그다음 날부터 절에 안 나오는 거예요. 저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죠. 절에 오는 게 그나마 숨통을 트이게 했는데 절에 안 오면 이 보살님이 얼마나 힘들겠어요. 그래서 저도 매몰차게 얘기는 했지만, 좀 찜찜해서 사람들한테 물어보니 전화도 안 받으신다는 거예요.

 

한 달이 조금 지났는데 이 보살님이 드디어 절에 오셨어요. 그래서 제가 보살님, 왜 그동안 절에 안 오셨어요하고 반갑게 인사를 하니까 부처가 꼭 절에만 있습니까하고 웃음을 보였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법당에 앉아서 대화를 하는데 보살님이 예전보다 훨씬 화통해져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동안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습니다.

 

그 날 대화하고 나서 집에 돌아가니까 아들만 보면 더 화가 치밀었어요. 그 전에는 절에 와서 바람이라도 쐬면 좀 나았는데 이제는 절에도 못 가겠고, 어떻게 보면 법사님도 얄밉고, 어떻게 보면 법사님 말이 맞는 말 같기도 했어요. 제가 평생 절에 다녔는데 절에 헛다녔다는 말을 들었으니까요. 그러다 어느 날 아들이 문을 열고 탁 들어오는데 아들을 보자마자 열이 확 오르면서 머리가 깨질 것 같아 저도 모르게 저 자식 남이다이렇게 불렀어요. 그때 정말 아들이 남으로 보였습니다. 아들이 남으로 보이는 순간 가슴에 있던 화가 얼음이 녹듯이 싹 내려갔습니다. 큰아들 집에 있어도 고맙고, 작은 아들 집에 있어도 고맙고 절에 있어도 고맙기만 하니까 어디 있어도 감사하고 자유로워진 것입니다. 이것이 무주상보시의 한량없는 공덕입니다.’

 

남이라면 누가 이 할머니를 이렇게 먹여주고 재워주고 구경도 시켜주겠어요. 아들이 남이라고 생각하니까 엄청나게 고마운 사람들이 된 겁니다. 이것이 바로 상을 버렸을 때 괴로움이 소멸되는 이치입니다.

 

상이 허망한 줄 알면 곧 여래를 보리라

이런 이치를 간략한 형식으로 요약한 금강경의 핵심 게송을 사구게(四句偈)’라고 합니다. 사구게 중에 하나가 제5분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에 나옵니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무릇 상은 다 허망합니다. 허망하다는 말은 실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실체가 없다는 말은 꿈같고 아지랑이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다는 의미예요. 그래서 상이 허망한 줄 알면 곧 여래를 보게 됩니다. 이 말은 진실을 알면 괴로움이 사라진다는 뜻이에요.

 

금강경은 이렇게 상을 짓는 것을 타파해서 여실히 진실을 보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또 잘못하면 금강경이 최고다하는 상을 또 짓게 됩니다. 그래서 금강경을 많이 읽으면 복을 받는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는 과오를 범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이 사구게(四句偈)를 읽으면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로 가득 채워 보시한 공덕보다 더 크다는 구절이 뒤이어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을 읽고 금강경만 열심히 읽으면 복을 한량없이 받겠네하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벌써 복이라는 상()을 지어서 금강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나 버린 겁니다.

 

이렇게 우리는 진리에 대해서도 상()을 짓기가 쉽습니다. 이런 상()을 법상(法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노자님께서도 ()를 도()라 하면 이미 도()가 아니다라고 하셨죠. 그 말은 이것이 도()이다하는 상()을 지어버리면 이미 도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종교와 철학이 이렇게 상()을 짓게 됨으로써 시대의 변화에 뒤처지게 되었습니다.

 

종교가 가장 진보적이어야 하는데 요즘 우리 사회에서 가장 보수적인 것이 종교입니다. 진리라는 상을 쥐고 우상을 숭배하듯이 거기에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정해져 있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뭔가 좋으면 또 그 좋은 것에 대해 상을 지어서 집착합니다. 언제나 상을 짓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늘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해요. 그럴 때 괴로움이 없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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