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분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에서는 수보리가 부처님께 질문을 합니다.
희유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모든 보살을 잘 두호 하여 생각하시며 모든 보살을 잘 부촉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선남자 선여인은 마땅히 어떻게 머물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합니까?
보살이라는 말을 안 쓰고, 선남자 선여인이라는 보통 사람을 지칭하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대승불교에서는 보살이 따로 있다고 보지 않고, 어떤 사람이 최상의 깨달음을 얻겠다고 마음을 내면 그 사람이 바로 보살이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을 얻겠다고 마음을 냈냐 안 냈냐, 원을 세웠느냐, 발심을 했느냐, 이것이 대승불교에서는 중요합니다. 머리를 깎았냐 안 깎았냐, 출신이 어디냐, 남자냐 여자냐, 이런 것을 중요시하지 않습니다. 대승불교에서 수행자의 기준은 발심을 했느냐 안 했느냐입니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묻습니다.
‘지금 제가 괴로워 죽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제가 괴로움이 없는 경지로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네가 괴로움이 없는 경지로 나아가려면, 모든 중생의 괴로움을 네가 다 해결하겠다고 마음을 내라.’
혹 떼려다 혹 붙인 거죠. 내가 지금 짐이 너무 무거운데, 어떻게 하면 이 짐을 좀 내려놓을 수 있는지 물었는데, 다른 사람이 짊어지고 있는 모든 짐을 네가 다 짊어지겠다고 마음을 내라고 말씀하셨으니까요. 내 짐도 무거워서 어떻게 하면 이 짐을 좀 내려놓을 수 있는지 물었는데,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의 무거운 짐을 네가 다 짊어지라고 하신 겁니다.
이것이 마음을 항복받는 방법이라는 것이 이해가 돼요? 여러분은 이 내용이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에 금강경이 어렵게 느껴지는 거예요. 문자가 어려운 게 아니고 그 이치를 이해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이것이 대승사상의 핵심이라고 해서, 제목에 ‘정종(正宗)’, 바르고 으뜸이 된다는 표현이 들어간 겁니다. 금강경 제1분이 부처님의 일거수 일투족을 통해 말 없는 가운데 대승의 요지를 설명하고 있다면, 제3분에서는 말로 표현해서 대승의 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제가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모든 사람의 괴로움을 내가 다 해결하겠다고 마음을 내라.’
이 두 문장이 대승정종분의 요지이고, 대승사상의 으뜸되는 핵심입니다. 이 정도 설명했으면 여러분 중에 눈이 좀 번쩍 뜨이는 사람이 있을까요? 아직 눈이 안 뜨여지니까 경전을 끝까지 봐야 되겠죠. 지금 눈이 바로 뜨인 사람은 책을 덮고 집에 가도 좋습니다. (웃음)
모든 번뇌가 사라지게 하는 방법
일상생활의 예를 들어서 한번 살펴봅시다. 부부 지간에 혹은 부모 자식 지간에 보통 이런 표현을 자주 하죠.
‘우리 남편이 너무 답답해서 같이 못 살겠다.’
‘우리 애만 보면 답답해 죽겠다.’
답답하다는 말은 괴롭다는 뜻이죠. 왜 답답하냐고 물으면 이렇게 말합니다.
‘애가 말을 안 들어서요.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지 내가 알 수가 없어요.’
상대가 왜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는지 내가 모르기 때문에 답답한 겁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아내에게 또는 아이에게 내 마음을 알아달라고 하잖아요. 상대가 내 마음을 알아주면 행복해 하고, 몰라주면 괴로워합니다. ‘당신이 왜 그런지 난 모르겠어!’ 이렇게 말할 때 답답합니다. 그런데 상대를 이해하면 내 마음이 시원해집니다.
‘아, 애가 그래서 그랬구나’
‘아, 남편이 그래서 그런 말을 했구나’
이렇게 알게 되면 내 마음이 시원해집니다. 우리는 ‘남이 나를 이해해주면 내가 행복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마음의 작용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남을 이해할 때 내 마음이 시원해집니다. 이것이 마음의 원리예요. 이런 마음의 원리를 모르기 때문에 거꾸로 하는 겁니다. 내가 남의 마음을 이해하면 내 마음이 시원해져요.
‘저기 산을 한번 봐. 멋지지?’
‘저기 단풍을 한번 봐. 예쁘지?’
이렇게 산을 좋아하고 단풍을 좋아하면, 내가 기분이 좋아요. 내가 꽃을 좋아하면 꽃이 좋은 게 아니에요. 내가 좋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사람이 나를 좋아해야 내가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거꾸로 된 생각이에요. 금강경은 바로 이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반야심경에서는 이것을 전도몽상이라고 표현합니다.
불을 꺼야 그림자가 사라지는데, 불이 켜진 상태에서 계속 그림자를 피해 다니면, 어디를 가도 그림자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처럼 우리는 괴로움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마음을 냅니다. 그렇기 때문에 괴로움을 없애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없어지지가 않고, 오히려 괴로움이 갈수록 더 커집니다. 관점이 바로잡혀 있지 않으면 일시적으로 해결된 것 같더라도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오히려 괴로움이 더 커집니다.
욕망을 갖고 누군가로부터 뭔가를 얻고자 하기 때문에 그게 안 얻어질 때 괴로운 거예요. 여러분은 부부나 친구 지간에도 ‘내가 얻는 게 많은가, 주는 게 많은가’ 이렇게 모든 걸 다 계산하기 때문에 번민이 생기는 겁니다. 원하는 것을 얻으면 순간적으로 기쁘죠. 그런데 다음에 더 많은 것을 주지 않으면 괴로워집니다. 또한 내가 상대로부터 무언가를 얻으면 기쁘긴 한데 그 사람 앞에 가면 내가 작은 사람이 됩니다. 마음이 위축되고 비굴해져요.
그러나 내가 베풀면 어떻게 될까요? 내가 당당해지고 내가 주인이 됩니다. 길을 가다가 보니까 두 사람이 밭에서 김을 매고 있어요.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주인이고, 한 사람은 일꾼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누가 주인이고 누가 일꾼인지 분간이 안 됩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를 합니다. 그럼 누가 주인인지 알 수 있죠? ‘수고하셨습니다’ 하고 돈을 주면 그 사람이 주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얻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종이 되기를 원하며 산다고 볼 수 있어요. 이런 원리를 금강경에서 지적하고 있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괴로움 없이 살 수 있습니까?’ 하니 ‘주는 마음을 내라’, ‘사랑하는 마음을 내라’, ‘이해하는 마음을 내라’, ‘베푸는 마음을 내라’ 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모든 번뇌가 사라지고 해탈 열반으로 가는 방법입니다.
대승불교에서는 내가 깨달음을 얻고 나서 누군가를 제도한다는 식의 이분법적인 발상을 하지 않습니다. 남을 돕는 것이 곧 내가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라고 봅니다. 내가 깨달음을 얻은 후에 지옥에 가서 중생을 구제하는 게 아니라 지옥에 가서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 곧 내가 부처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대승 보살의 수행법은 상구보리 하고 하화중생 하는 것이 선후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남을 사랑하는 것이 나를 기쁘게 하는 길이고, 남에게 베푸는 것이 곧 나를 위하는 길입니다. 이것을 깨우치는 것이 대승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대승의 수행은 번다한 세상을 떠나고 가족을 떠나 있지 않습니다. 세속 가운데서 관점을 바꿔버림으로써 그대로 해탈합니다. 머리를 깎을 필요도 없고, 옷을 갈아입을 필요도 없고, 이혼할 필요도 없고, 다시 결혼할 필요도 없고, 오고 갈 필요도 없습니다. 시간과 공간, 인간관계에서 괴로움이 오는 게 아니에요. 거꾸로 된 마음, 즉 어리석은 마음이 고뇌의 원인입니다. 그래서 한 생각을 바꾸는 것, 즉 관점을 바꾸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마음이 작용하는 원리를 꿰뚫어 아는 것, 이게 바로 반야, 즉 지혜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법문을 들어도 이해가 잘되지 않을 수가 있어요. 이해했다 해도 일상에 가면 그렇게 안 되죠. 담배 피우는 사람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담배를 끊으면 건강이 좋아진다고 해도 그 좋은 담배를 끊기 싫으니까 이해가 잘되지 않고, 설령 이해하더라도 담배를 끊고 싶지도 않으니까 현실에서는 잘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첫째, 이 원리를 잘 알아야 합니다. 둘째, 체험을 통해서 증득해야 됩니다. 부처님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려고 일부러 거지 옷을 입고, 일부러 구걸하고, 일부러 나무 밑에서 자면서 참고 견딘 게 아닙니다. 그 길이 바로 번뇌가 없는 길이고, 자유로운 길이기 때문에 그렇게 사신 겁니다. 일부러 참으면서 담배를 안 피우는 게 아니라 담배를 안 피우는 것이 건강해지는 길입니다. 담배를 안 피우려고 노력하는 게 아니라 노력할 필요가 없는 경지입니다.
‘이와 같이 한량없고 가이없는 중생을 다 제도하되 한 중생도 제도를 받은 자가 없다’
이 구절이 정말 중요합니다. 내가 다 도와줬는데 실제로 나한테 도움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관점을 가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하면 괴로움이 없는 경지에 이릅니까?’라는 질문에 첫 번째 과제는 괴로운 사람을 다 구제하라는 것이었는데, 이제 두 번째 과제가 주어진 겁니다. 그들이 괴로움이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내가 그들을 구제했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 두 번째 과제입니다. 해탈 열반에 이르려면 이 두 번째 단계까지 가야 합니다.
남을 도왔다 하더라도 도왔다는 상을 짓지 말라
마음을 내고 행동하는 것만 가지고는 안 되고 그 행동을 내가 했다는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보살이 내가 했다는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 있다면 그는 보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보살이 아니라는 것은 아직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왜 그렇게 마음을 내야 할까요? 내가 만일 너를 구제했다는 생각이 있으면 결국은 상(相)을 짓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상이든, 인상이든, 중생상이든, 수자상이든, 상을 짓는 것이기 때문에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중생의 세계에서 윤회하게 됩니다.
여기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만일 지식을 습득하고자 한다면 중요하겠지만 수행에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상을 지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굳이 구분하자면, 아상은 나와 남을 구분하는 상이고, 인상은 사람과 사람 아닌 것을 구분하는 상입니다. 중생상은 생명 가진 것과 생명 아닌 것을 구분하는 상이고, 수자상은 존재와 비존재를 구분하는 상입니다. 일체가 하나로 연기되어 있는데, 상을 짓고 분별하는 자세로 선을 긋고 분리하면 자기 팔과 다리를 자르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너에게’라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나와 남을 구분하는 것이고, 거기에는 기대하는 마음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괴로움이 없는 경지에 이르려면 일체중생을 구제하는 마음, 이해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 돕는 마음을 내되, 그를 도왔다 하더라도 도왔다는 상을 짓지 말아야 합니다. 상을 짓게 되면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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