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에 읽은 경전의 내용은 부처님이 이 말씀을 하신 유래가 있습니다. 어느 날 기원정사에서 철야정진이 있었다고 해요. 인도는 날씨가 더우니까 법회를 밤에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늘 철야법회가 있다’ 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와서 초저녁부터 정진을 했다고 해요. 그러다가 밤이 깊어지니까 집에 가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배고프다고 힘들어 못하겠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졸려서 못하겠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집에 가서 부인하고 잠자리를 해야 되겠다 하고, 이런 식으로 뭔가 이유를 대고 한 명 한 명 집으로 돌아갔다고 해요.

원래는 법문을 듣고 정진을 하고, 또 법문을 듣고 정진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안 했다는 거죠. 그리고 남은 사람들마저도 법문 할 때 계속 졸았습니다. 명상할 때도 졸고, 법문 할 때도 졸고, 이런 모습을 보고 부처님께서 이렇게 게송을 읊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법이 있어도 어리석은 사람은 그것을 듣고 깨우쳐서 괴로움이 없는 세계로 나아가지 못한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법문을 듣고 자기 양식으로 삼아서 생사고해의 바다를 건너서 열반의 세계로 나아간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와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
옛날에 어떤 분이 저한테 이런 질문을 했어요.

‘부처님께서는 왜 2600년 전에만 출현하고, 지금은 출현하지 않나요?’


만약 부처님이 지금 출현하면 자신도 구제를 받을 수 있을 텐데 그러지 못한다는 거죠. 그러나 부처님 당시에도 부처님을 부처님인 줄 아는 분이 많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이 그냥 밥 얻어먹는 거렁뱅이 정도로 인식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일반적인 수행자인 줄로만 인식했지 깨달음을 얻으신 분이라고 알아보지 못했어요. 소수이긴 하지만 부처님을 알아보신 분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행해서 괴로움이 없는 열반의 저 언덕으로 가는 큰 이득과 공덕을 쌓았지만, 부처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런 기회를 놓쳤습니다.

부처님이 처음 성도한 후에 어떤 브라만이 지나가다가 부처님께 ‘어떤 것이 성스러운 것입니까?’ 하고 질문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마음이 청정한 자가 성스러운 자다’ 하고 대답하니까 그 브라만이 콧방귀를 뀌면서 “흥! 아마 그럴지도 모르지!” 이렇게 말하고 지나갔다고 합니다.

또 숲을 지나가던 상인은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는데, 오직 자기의 재물을 보호하고 자기 목숨을 보호하는 복만 얻으려고 했지 부처님께 법을 청하지 않았습니다. 또 가난한 뱃사공은 부처님께서 강을 건너기 위해 배를 태워달라고 하니까 ‘나는 먹고살아야 되기 때문에 뱃삯을 주면 태워 주겠다’라고 해서 공덕을 쌓을 기회를 놓쳤습니다.


어떤 사람은 가난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너무 지식이 많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교만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복을 너무 구하기 때문에, 이렇게 자기가 목적하는 바에만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진정한 자유와 행복의 길에 대해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어요.

법문을 듣고 깨우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복을 주는 얘기를 하면 눈이 번쩍 뜨이지만, 어리석음을 깨우쳐서 지혜롭게 사는 길을 얘기하면 졸리고 잠이 옵니다. ‘여기 있느니 집에 가서 밥이나 먹고, 술이나 한잔 하고, 자는 것이 낫겠다’ 이런 생각이 들게 되죠.

그래서 부처님이 오시더라도 부처님을 알아볼 수 있는 자기 눈이 있어야 되고, 부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자기 귀가 있어야 됩니다. 아무리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다고 하더라도 내가 보는 눈이 없고 듣는 귀가 없으면 부처님인 줄 알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수없는 부처님이 내 앞을 지나갔고, 수없는 법문을 들었지만, 나는 보지 못하고 듣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부처님의 아버지인 정반왕도 ‘내 아들이다’ 하는 그 생각에 빠져서 부처님의 법문을 제대로 듣지 못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을 존경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반왕은 ‘우리 아들이 훌륭하다’ 하고 자랑삼을 줄만 알았습니다. 무엇을 먹는지, 무엇을 입는지, 잠을 어떻게 자는지, 세상 사람들이 어떤 대우를 하는지, 이런 것에만 관심이 있었지 부처님의 법문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없었습니다.

처처에 부처님 아니 계신 곳이 없다
부처님을 알아보려면 어느 정도 자기 눈이 트여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에게 인생을 전환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가 주어지게 됩니다. 성인이 출현하지 않는 것을 한탄하거나, 스승이 없다고 한탄할 것이 아닙니다. 먼저 우리에게 성인을 볼 수 있는 눈과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어야 돼요. 그게 없으면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늘 자기 생각에 빠져서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줄 모릅니다.

여러분들의 남편이나 아내, 부모나 자식 중에도 어쩌면 그런 성인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 있을 수 있어요. 그러나 여러분들은 ‘내 남편이다’, ‘내 아내다’, ‘내 자식이다’, ‘내 부모다’, ‘내 친구다’ 하는 이 생각에 빠져서 다른 것은 보이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안 된다고 짜증내고 성질낼 줄만 알지 그들의 말을 귀담아듣지 못합니다.


그러나 마음의 문이 열리면, 망나니 같던 아들이, 술 먹는 남편이, 성질내는 아내가, 어느덧 여러분에게 나를 깨우치는 보살로 인식됩니다. 자기 마음이 열리면 천하 만물이 다 부처로 보입니다.

부처가 나 밖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에요. 나의 무지와 사로잡힘에서 벗어나면 천하 만물이 부처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처처불상 사사불공(處處佛像 事事佛供, 곳곳마다 부처님이 안 계신 곳이 없고 하는 일마다 불공 아닌 것이 없다)이 되어야 우리의 일상이 ‘평상심이 도(道)이다’ 하는 경지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어떤 자극에 긴장을 하거나 반응을 한다고 하더라도 나뭇잎이 바람 불면 흔들렸다가 바람이 지나가면 멈추듯이 금방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오뚝이처럼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그런 경지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가 정진을 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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