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우리가 무엇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지 절대성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자칫 잘못하면 언어로 표현된 것이 절대화 되면 폐해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주먹을 쥐고 있는 사람이 물건을 집으려면 손을 펴야 합니다. 그때 ‘손을 펴라’ 하고 말해서 손을 편 건 그 상황에 맞는 행동입니다. 즉, 이건 주먹을 쥐고 있을 때 그것을 뛰어넘는 자유를 향해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때 손을 펴는 것이 진리라고 절대화 하면 이 사람은 오므려야 할 때 다시 못 오므리게 됩니다. 손이라는 건 필요에 따라 오므리기도 하고 펴기도 해야 물건을 집기도 하고 놓기도 할 수 있습니다. 물건을 집을 때는 손을 오므려야 하고, 물건을 놓을 때는 손을 펴야 합니다.


물건을 집어야 하는데 손을 펴기만 하고 있으면 그 사람에게는 ‘손을 오므려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시간이 지나 이제는 물건을 놓아야 하는데 계속 손을 오므리고 있으니까 이 상황에서는 ‘손을 펴라’라고 말하는 겁니다.

제31분 지견불생분(知見不生分)은 누군가에게 손을 펴라고 말할 때 펴는 것만 알아서는 안 되고, 손을 오므리라고 말할 때 오므리는 것만 알아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즉, 둘 중 어느 하나를 고집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예요. 아무 생각도 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라 둘 중 어느 것도 고집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누가 ‘서울에 가려면 어디로 갑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동쪽으로 갑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때 질문자의 경우 ‘금강경에는 상을 짓지 말라고 하는데 왜 동쪽으로 가라고 하느냐’ 하고 되묻는 것과 같습니다. 현실에서는 동쪽으로 가야 서울로 갈 수 있는 상황에 있는 겁니다. 즉, 인천에 사는 사람이 서울에 가려고 하면 동쪽으로 가는 길을 제시해야 합니다. 여기서 ‘동쪽으로 가라’고 하는 것이 상을 짓는 게 아니에요. 그 말을 듣고 ‘동쪽으로만 가야 된다’고 고집하는 것이 상을 짓는 것입니다. 질문하는 사람이 인천에 있는지 수원에 있는지 현재 위치는 고려하지 않고 동쪽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상을 짓는 거예요.

대부분의 종교는 성인의 말씀을 절대화 합니다. 그러나 금강경의 위대함은 부처님의 말씀도 절대화 하면 안 된다고 말하는 데 있습니다. 부처님이 질문한 사람에게 동쪽으로 가라고 말한 것은 동쪽으로 가도 되고, 서쪽으로 가도 되고, 남쪽으로 가도 되고, 북쪽으로 가도 되는데도 동쪽으로 가라고 한 걸까요? 그 사람은 꼭 동쪽으로 가야 하기 때문에 동쪽으로 가라고 한 걸까요? 그 사람은 동쪽으로 가야 서울로 갈 수 있기 때문에 동쪽으로 가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왜냐하면 질문한 사람이 인천에 사는 사람이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질문하는 사람이 수원에 사는 사람인 경우에는 부처님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한다고 해서 진리에 맞는 대응이 나오는 게 아닙니다. 상황이 달라졌기 때문에 가는 방향도 그에 맞게 달라져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쪽으로 가라’는 말을 고집해서는 안 됩니다. 즉, 어느 한 견해를 고집해서는 안 됩니다.

견해를 고집하지 말라는 말의 뜻을 ‘앞으로 누가 물어도 동쪽, 서쪽, 남쪽, 북쪽에 대해 말을 하지 말아야 된다’라고 이해한다면 ‘상을 짓지 말아야 된다’는 새로운 상을 짓는 겁니다. 상을 짓지 말라고 했더니 이번에는 ‘상을 짓지 말아야 된다’는 상을 또 짓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어느 길로 가야 합니까?’ 하고 묻는데 ‘무유정법이다’라고 대답하는 것과 같습니다. 무유정법(無有定法)이란 ‘정해진 길이 없다’는 뜻입니다. 갈 길을 묻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가야 할 길을 묻는데 자꾸 정해진 길이 없다고만 하면 답답할 수밖에 없죠.


금강경에서 ‘어떤 견해도 짓지 말라’는 말은 아무 생각도 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에요. 상을 짓는 것도 고집해서는 안 되고, 상을 짓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고집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자꾸 사람들이 ‘이것이다’라고 상을 지으니까 그 상을 깨기 위해서 ‘이것도 아니고’라는 말이 나오는 거예요. 반대로 ‘저것이다’라고 상을 지으니까 다시 그 상을 깨기 위해서 ‘저것도 아니고’라는 말이 나오는 겁니다. 더 나아가서 이제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라는 상을 지으니까 그 상을 깨기 위해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니고’ 이런 표현이 나오는 거예요.

이 말은 어떤 상도 짓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것이라는 상도 짓지 말고, 저것이라는 상도 짓지 말고, ‘아니다’라는 상도 짓지 말라는 뜻입니다. 늘 주어진 상황에서 구체적인 방향이 나오는 것이지 미리 절대화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다’라고 해도 극단이고, ‘저것이다’라고 해도 극단입니다. ‘이것이다’라는 극단을 피하기 위해 ‘이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고, ‘저것이다’라는 극단을 피하기 위해 ‘저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고, ‘이것이 아니다’라는 극단을 피하기 위해 ‘이것이 아닌 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고, ‘저것이 아니다’라는 극단을 피하기 위해 ‘저것이 아닌 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를 파악하며 읽지 않으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니라는 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 이렇게 반응하기가 쉽습니다. ‘이게 아니면 저것이든지, 저게 아니면 이것이든지,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든지, 이렇게 무엇이라고 정해져야 하지 않느냐?’ 하는 진리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겁니다. 이것은 관념이지 진리가 아닙니다.

고정관념을 내려놓아야 유연해지고 늘 상황에 맞는 적절한 길을 찾게 됩니다. 이것을 불교의 근본 가르침에서는 ‘중도(中道)’라고 하고, 금강경에서는 ‘무유정법(無有定法)’이라고 하고, 반야심경에서는 ‘공(空)’이라고 합니다.

공(空)이라는 말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 어떤 것도 고정화시킬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공(空)이라는 의미를 잘못 이해해서 공(空)이라는 상을 지으면, 누가 무슨 말만 하면 ‘공(空)이다’ 이렇게 대답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실제로 공(空)을 이해하는 게 아니라 공(空)이라는 상을 지은 겁니다.


금강경에 나오는 ‘어떤 견해도 가져서는 안 된다’ 하는 말은 정확히 표현하면 ‘어떤 견해도 고집해서는 안 된다’ 하는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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