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18. 一體同觀分 (한 몸으로 동일하게 봄)
須菩堤, 於意云何 如來有肉眼不. 如是 世尊, 如來有肉眼. 須菩堤, 於意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유육안부. 여시 세존, 여래유육안. 수보리, 어의
云何 如來有天眼不. 如是世尊, 如來有天眼. 須菩堤, 於意云何, 如來有蕙
운하 여래유천안부. 여시세존, 여래유천안.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유혜
眼不. 如是 世尊 如來有蕙眼. 須菩堤, 於意云何 如來有法眼不. 如是世
안부. 여시 세존 여래유혜안.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유법안부. 여시세
尊 如來有法眼 須菩堤, 於意云何 如來有佛眼不. 如是 世尊, 如來有佛
존 여래유법안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유불안부. 여시 세존, 여래유불
眼. 須菩堤 於意云何 如 恒河中所有沙 佛說是沙不. 如是世尊, 如來
안. 수보리 어의운하 여 항하중소유사 불설시사부. 여시세존, 여래
說是沙. 須菩堤, 於意云何 如一恒河 中所有沙 有如是沙等恒河 是諸
설시사. 수보리, 어의운하 여일항하 중소유사 유여시사등항하 시제
恒河 所有沙數 佛說世如是 寧爲多不. 甚多 世尊 佛告 須菩堤 爾所
항하 소유사수 불설세여시 영위다부. 심다 세존 불고 수보리 이소
國土中所有衆生 若干種心 如來悉知 何以故. 如來說諸心 皆爲非心
국토중소유중생 약간종심 여래실지 하이고. 여래설제심 개위비심
是名爲心 所以者何. 須菩堤, 過去心 不可得 現在心 不可得, 未來心 不可得.
시명위심 소이자하. 수보리, 과거심 불가득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
모든 사람을 부처님으로 보라
"수보리야, 여래는 육안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육안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여래는 천안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천안이 있습니다. "
"수보리야, 여래는 혜안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혜안이 있습니다. "
"수보리야, 여래는 법안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법안이 있습니다. "
"수보리야, 여래는 불안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불안이 있습니다. "
"수보리야, 항하에 있는 모래에 대하여 부처님이 설명하신 일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그 모래를 설명하셨습니다. "
"수보리야, 항하에 있는 모래수 같은 항하 이 모든 항하에 있는 모래수와 같은 수의
삼천대천세계가 많다고 생각하느냐?"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시되,
"이러한 많은 수의 국토에 있는 중생들의 가지가지 마음을 여래께서는 다 아시느니라. 왜냐하면 여래가 설하신 마음이라는 것은 전부 분별하여 생기는 것이며, 그것을 이름하여 마음이라 하느니라. 때문에 수보리야 마음은 과거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 마음도 얻을 수 없느니라.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육안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육안이 있습니다.”
육안(肉眼)이란 고기눈이라는 말로서 보통 사람의 눈입니다.
당연히 부처님은 육안이 있겠지요.
여기서 부처님의 5안이 나옵니다.
보통 사람은 눈이 한 개인데 부처님은 5개나 됩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천안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천안이 있습니다.”
천안(天眼)은 하늘의 눈인데 세상을 다 보는 눈입니다.
하늘 자체가 부처님의 눈입니다. 그러니까 지상에서 약간 위도 하늘이니까
허공이 즉 부처님의 눈이라는 말이고 허공은 어디고 없는 곳이 없으니까
부처님은 세상을 다 본다 하였습니다.
부처님의 6가지 신통중에 하나가 천안입니다.
그러니까 다 숨겨도 부처님은 숨길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은 다 알고 다 보십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혜안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혜안이 있습니다.”
혜안(慧眼)은 지혜의 눈입니다.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것이 바로 이 혜안인데 천안이나 불안 등은 부처님만 가지고 있는 신통이므로
감히 따라갈 수 없으나 혜안은 누구든지 얻을 수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를 믿어야 얻을 수 있습니다.
진리를 통달한다면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혜안입니다.
참선을 많이 하고 경을 많이 읽고 염불을 많이 하면 저절로 얻어지기도 합니다.
매사를 지혜로 보는 눈입니다. 반야심경에 (不垢不淨)이라했어요.
더러움도 없고 깨끗함도 없으니라 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사실을 알려준 말씀입니다.
우선 이것이 확실히 그렇다 이해했다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세상의 명예는 한낱 꿈과 같고 허망한 것입니다.
불교계에서 대중에게 인기가 좋은 어느 스님은 가끔 엣세이를 쓰는데
거기에 보면 간혹 '인간은 고독한 존재'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것은 혜안을 가지고 있다면 이런 말이 나올 수가 없어요.
인간은 원래 고독한 존재가 아니라, 고요한 존재입니다.
스스로 한 생각 일으켜서 고독한 감정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만약 바뻐서 생각을 일으킬 시간이 없다고 가정해보세요.
정신이 지금 매우 바쁜데 고독한 감정을 낼 시간이 어디 있겠어요.
그렇다면 그 사람은 고독을 모르고 살 것입니다.
만약 고독한 존재라면 바쁘거나 안바쁘거나 항상 고독해야 해요.
인간의 마음이 원래 고독이라면 말입니다.
그러나 생각이 일어나지 않을 때는 고요하고 생각이 일어났을 때는 고독하다면
생각이 고독을 부르는 것이지 고독해서 고독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 스님은 산 속에서 워낙 혼자 오래 살았어요.
해질무렵도 혼자....
한 밤중에도 혼자....
아침에도 혼자....
낮에도 혼자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늘 고독을 느끼고 살지요.
그런데 그것은 자기가 그렇게 살아서 고독한 것이지
인간이 원래 고독하다고 하면 안됩니다.
인간은 고요합니다.
상황에 따라 감정이 달라지는 것일 뿐입니다.
원래 고독이면 늘 그래야 되는데 그렇지 않을 때도 있잖아요.
고독은 시간이 간다고 없어지지 않습니다.
생각을 끊고 대무심에 들어가지 않고 일상사 느낌에
안주하면 절대 고독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명예는 한낱 물거품같고 허망한 것입니다.
그럴바에는 편안하게 좋은 친구 만나서 함께 살아도 되련만
그러면 한순간에 명예는 땅에 떨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그럴 염두도 내지 않고
낼 모래 죽을 나이에 이제 친구 만나서 적응하면서 산다는 것도 귀찮은 일이고
그래서 혼자 사는데 ..그럴바에는 이제라도 철저히 무심으로 들어가는 공부를 하여야 합니다.
한 생각 일어나는 것을 놔두고 죽으면 다음 생에 다시 생각을 일으키는 윤회를 면치 못합니다.
그러니까 스님이 안 되고 일반인이 되면 차라리 편해요.
명예는 없지만 언제라도 장가갈 수 있고 자식이 있고 손자가 있고.....
일이 있고....친구가 있고 그렇다보면 외로울 시간이 없지요.
명예는 허망한 것입니다.
사람은 보통 사람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하였을 때 유명해져요.
장가가지 않고 스님이 부인도 없이 혼자 산골짜기에 살면서
지내니 얼마나 대단합니까?
명예 뿐더러 스님 말씀대로 다 허망 하지요!
그래서 알아주고 훌륭하다고 해요.
그런데 이것에 따라가는 사람도 헛된 것을 찾아가는 사람이고
이것을 훌륭하다고 존경하는 사람도 헛된 꿈에 빠져있는 사람이어요.
더러움도 깨끗함도 없다고 부처님께서 그러셨는데
그것이 무슨 그리 존경받고 훌륭한 일이겠습니까?
그것은 그냥 그러한 일일뿐.... 존경받은 일은 아닙니다.
부처님은 그렇게 산속에서 혼자 사시지 않았어요.
대중과 함께 사셨지요.
부처님은 그렇게 사람을 피해 숨어사는 것도 인위적이고 헛된 것임을 아셨어요.
바로 혜안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매사를 지혜의 눈으로 봐요.
그래서 어떤 것도 똑같을 뿐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기 장가를 10번간 노인이 있고
단 한 번도 안간 스님이 있다면
여러분은 그 스님이 존경스럽겠으나 부처님은 그렇지 않아요.
똑같이 봅니다. 누가 청정하고 더러운 것은 없어요.
사람은 다 같아요. 평등하게 보고 대우해요.
그러니까 헛된 명예를 버린 분이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은 명예란 꿈과 같이 허망한 것이므로
왕이 되고 세계대왕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어요.
그냥 자기의 길을 가기를 원했죠.
그래서 당신의 길을 간 것입니다.
혜안이란 바로 보는 눈입니다.
이것이 있으면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아주 조그마한 모래처럼 보여요.
그래서 수행자에게는 이 혜안을 얻는 것이 꿈입니다.
세상을 전혀 다르게 보는 눈! 진실에 입각하여 보는 눈!
자기의 감정에 빠지거나 독단적이지 않고 보는 눈!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는 눈!
이것이 청정한 눈이요, 부처님의 눈이고, 혜안입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법안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가 법안이 있습니다.
법안(法眼)은 진리의 눈이지요.
진리로 보는 눈입니다.
언듯보면 혜안과 진리의 눈은 같은 것으로 보이지만 약간 다릅니다.
혜안은 응용의 눈이고요. 진리의 눈은 진실대로 보는 눈입니다.
그러니까 좀 쌀쌀맞겠죠.
철칙대로 보니까....냉정해요.
글자 그대로 법칙대로 보는 눈입니다.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냉철함이 있어야 해요.
사견이 붙으면 안되고 어디서 보아도 진실어야 진실이라고 말합니다.
부처님의 법은 어디서 보아도 올바른 시각입니다.
여기 금강경도 누가 읽어도 손색이 없는 경입니다.
아직까지 금강경을 읽고 비판하는 사람없습니다.
그만큼 누구에게나 설득력있는 말씀이죠.
이런 냉철한 진리를 가지고 있는 눈이 법안입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불안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불안이 있습니다.”
불안(佛眼)은 부처님의 눈입니다.
▶ 부처=붓다=깨달은 사람=覺者
깨달은 자의 눈입니다.
일체 모든 진리를 깨달으면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달라집니다.
중생을 보되 안타깝게 보고 자비한 눈으로 보고
편안한 눈으로 보지요.
욕심이 없는 눈이고 분노가 없는 눈이고
시기가 없고, 미움이 없는 편안한 눈입니다.
사람들이 부처님의 눈을 보기만 해도 편안해져요.
선량한 눈!
때묻지 않은 눈!
자비를 간직한 눈!
동요심이 없는 눈!
가장 편안한 사람의 눈이 바로 부처님의 눈입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의 눈이 부처님의 눈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미 이것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단지 마음을 쉬면 그 눈이 드러나나
마음이 움직이면 탁한 눈이 되어있을 뿐입니다.
깨달음은 깨닫는 순간 일어나는 생각을 싹 밀어버리고
다시는 동요하지 않는 마음을 얻는 것입니다.
깨달음은 무엇을 아는 데에 있지 않아요.
자꾸 깨달음을 무얼 많이 아는 것으로 생각하고
어떤 것을 아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 기회에 고치세요.
아는 것이 아니고 순간 버리는 것입니다.
순간 어리석은 생각을 확 밀어버려서 다시는 동요되지 않는 마음을 얻는 것입니다.
옐들어 의사가 당신 "폐암 4기요!" 했을 때
당사자는 순간 싹 바뀌어져요.
자신에 대하여 엄청난 사실을 안 것입니다.
그 뒤부터 2갑씩 피우던 담배를 요구하는 마음을 확 밀어버려요.
단번에 끊습니다. 연습이 필요없어요.
자기 몸의 상태를 깨닫는 순간 확 바꿔요.
단번에.............
이처럼 우리가 부처님 말씀을 듣고 순간 확 인생이 바뀌면
깨달음이나 듣고도 시간이 지나자 도로 잊은 듯 하고
여전히 분별하고......... 더럽다 하고 깨끗하다 하고......
부자가 있고, 가난이 있고....... 미운 자가 있고 예쁜 자가 있으면
아직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많이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실천되는 것이 중요하잖아요.
그래서 스님들은 산중에서 참선을 합니다.
참선할 때 화두 하나로 죽 밀어부치면
자유로운 자고 화두 생각했다가.....망상했다가.......끊어졌다가 이어졌다가 하면
그러면 그것은 아직 자기를 맘대로 할 수 없는 사람이어요.
아무리 깨달아도 무슨 일이 닦치면 동요해요.
예를 들어 친구가 돈떼먹고 도망가면 ....... 속에서 열불이 나요.
그것도 한 2억 떼먹고....내 집문서 다 팔아먹어서 ....
나는 자식과 부인과 거리에 나앉고 그놈은 어디가서 행복하게 잘 산다하면
전국을 그 놈 찾아다니면서 혈안이 되어요.
그때는 아무리 인생이 꿈이라고 주문을 걸어보아야 소용없고
그동안 다니면서 도반들에게 뭘 안다고 떠들던 것도 다 허사고....
마음은 연일 분하고....죽고 싶고....술마시고 싶고.... 이래요.
그래서 결국 폐인이 됩니다.
화두 들때 나타나는 망상이 대표적인 무의식이요,
전생의 업보입니다.
이것을 확 밀어내지 않으면 절대 자기를 맘대로 끌고 가는 자라고 말할 수 없어요.
일이 생겼을 때 아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그래서 확 깨닫지 못했으면 하루종일 화두로써 망상을 제거하는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스님들은 경계를 못 만나니까 화두할 때 망상을 경계삼아 물리치죠.
화두들 때 망상에 끌려가는 마음으로는
절대 무엇을 알아도 알았다 할 수 없습니다.
알면 무얼합니까. 행동이 안되는 것을.........
그것은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순간 깨달아서 생각과 망상을 확 밀어버리라고 하는 것이고
아니면 화두 공부해서 망상을 제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공부를 잘하기 위해서는 전심전력해야 하고
한 곳에 모아야 되므로 공부할 때는 다른 것은 다 중요하지 않고
이것만 중요하다 해야 해요.
일할 때만 빼고, 걸으나, 가나, 앉으나....누우나.....
해서 화두 지속이 길어지면 자기를 좀 맘대로 하는 경계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런데 끊어지지 않는 일행삼매를 얻는 것이 오래 수행해야 얻어지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마세요.
경험자들이 다 한결같이 7일에서 1달이나 3개월이면 충분하다고 했어요.
그렇지 못한 것은 마음이 진실하지 못해서 그래요.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저 항하가운데 있는 모래를 부처님이 설하신 적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그 모래를 말씀하셨습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저 한 항하에 있는 모래 수와 같이 이렇게 많은 항하가 있고
이 많은 항하에 있는 바 모래수 만큼의 불세계가 있다면 이는 얼마나 많음이 되겠느냐?"
"심히 많겠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저 국토 가운데 있는 중생의 가지가지 종류의 마음을 여래는 다 아느니라.
아무리 가지 가지의 마음이 있다고 하여도
부처님은 이 5안으로 다 알고 다 봅니다.
그래서 손오공을 부처님의 손바닥 안이라고 했어요.
5안이면 그 누구도 숨길 수 없고 감출 수 없어요.
그래서 아무리 많이 알았다해도
그가 깨달았는지 못 깨달았는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부처님은 압니다.
한번 턱 내려놓으면 모든 것이 내려지는데
그걸 못내려놓고 명예에....재산에.....사랑에....생각에 얽매여있기 때문에
진리가 안보여요. 그러니 깨달을 수도 없지요.
명예....재산.....사랑....정의로움....이런 것들은
모두 허망한 의미들입니다.
이것을 잡으려고 하다가는 더 큰 행복은 놓치고 말아요.
작은 것을 가져 행복하려다가 큰 불행을 만나는 것이지요.
부처님은 다 아시니까 매일 부처님께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물으시고
기도가 안되고 화두가 안되면 진실한 마음으로 자기의 어리석음을 참회하시고
길을 열어달라고 간절히 발원하면서 해보세요.
그러면 부처님과 보살을 감동시켜서 감응하여 반드시 들어갈 날이 있을 것입니다.
한번 무심 삼매에 들어가면 그 뒤에는 쉬워집니다.
일사천리로 하나를 들으면 그것만 있어요.
시간이 지나감을 못느끼고...
고요한 심성으로 편안한 마음으로 오직 화두와 하나가 되어요.
그때 모든 것이 드러나지요.
탁수가 가라앉았을 때 물 밑의 것이 나타나듯이 모든 것이 드러나요.
그래서 이것은 쉬지 않으면 절대 모른다 했어요.
무슨 까닭인가, 여래가 설한 마음은 다 마음이 아니요 그 이름이 마음이기 때문이니라.
부처님이 모든 마음을 낱낱히 다 아시는 것은 마음을 형체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형체로 본다면 각양각색의 모양을 다 보아야 하기 때문에 다 못볼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은 형체가 없기 때문에 형체를 보는 것이 아니고 마음의 근원을 보아요.
그래서 부처님은 다 아는 것입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하나의 이름일 뿐이고 마음을 마음이라고 하면 안되요.
마음은 이름이고 그 실체는 자기 마음을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을 확실히 보고 깨달았으면 일체 중생의 마음이 보여요.
왜냐면 중생의 마음은 모두 빈 마음에서 선설된 것이라
근원을 알면 거기서 생긴 것은 다 알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부처님은 한 마디 척 들어보면 저 사람이 병이 어디에 있는지 압니다.
어느 때는 눈만 보아도 알아요. 눈도 말하기 때문이어요.
화두를 깨달으면 제일 먼저 보여지는 것이 중생의 심리상태여요.
척 하면 저 사람이 어떻게 되겠다 알아요.
아무리 이론을 세우고 자기를 감추어도 근원에 들어간 사람 앞에서는 자기가 다 들어날 수밖에 없어요.
이것은 마치 산 꼭데기에서 내려다 보는 것과 같아요.
밑에 있는 사람은 위에 있는 사람을 모르나 위에 있는 사람은 밑에 있는 사람을 알아요.
누가 말해도 객관적이고 고요해요.
그것은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지 하려고 해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깨달은 부처님은 아무도 속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남들이 보지 못했던 곳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것을 말하신 것이 바로 경의 진리입니다.
우리도 열심히 해서 부처님처럼 다 알고 다 봐서 고요하고 행복을 얻은 사람이 됩시다.
까닭이 무엇인가 하면 **수보리야, 지나간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느니라.**
마음에 대한 설명이네요.
금강경에서 유명한 말입니다.
한자로 말하면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임다.
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
모두 외우세요
과거 현재 미래로 외우면 됩니다.
과거의 마음은 지나갔어요. 그러니까 볼 수 없죠
미래의 마음은 오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알 수 없고....
현재라고 하지만 금방 과거로 가니..무엇을 현재심이라고 해야할까요?
설사 어떤 사람이 현재의 내 마음을 보았다고 하여도...
천신만고 끝에 마음을 잡아서...마음을 중지시켰다고 가정합시다.
그럼 마음을 볼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은 마음에 때가 뭍은 것이 확실하다고 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렇게 본 것은 마음을 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마음은 아무도 볼 수 없어요.
오직 깨달은 사람만 마음에 대하여 확실히 알아요.
그러니까 마음은 볼 수는 없어도 깨달아 알 수는 있습니다.
아, 이것이 마음이구나 하고 알 수 있어요.
그런데 설사 안다고 하여도 그것은 형체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틀린 것입니다.
안다는 것은 틀려요. 형체가 없는데 무엇을 압니까?
그러나 깨달을 수는 있습니다.
아, 이것이구나 하고 깨달아서 아는 것이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들여다 보고 자기의 성품인 마음을 깨달은 것이지 알려고 하지 마세요.
알려고 하면 할수록 더 모르는 것이 마음입니다.
자기를 보고 있다가 어느날 깨달으세요.
아무개야 하고 부를 때 대답하는 그 자가 바로 마음이어요.
우리는 마음의 작용을 통하여 마음을 깨달을 수는 있어도 볼 수는 없습니다.
이유는 마음은 형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형체가 없다는 것은 비었다는 것이고
비었다는 것은 자기 성품이 자기 본질이 비었다는 것이니 그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즉 자기는 원래 무심이요, 무아라는 것을 깨달으세요.
그렇다면..그렇게 비었다면 어떻게 마음을 얻겠습니까?
그래서 부처님은 마음은 마음이라는 이름뿐이지
마음이라는 것은 없다 하였어요.
그 이유로 과거 현재 미래의 마음은 볼 수 없고
얻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뭘 아는 것은 그대로 실천하기 위해서 알잖아요.
알았으면 바로 마음이 비었음을 아시고 한 생각도 내지 마시고 편안하게 사세요.
그러면 바로 여러분이 부처입니다.
만일 어떤 생각이든지 일으켜 세웠다 하면 자기 마음을 낸 것이 아냐요.
어떤 사람이 부인을 정말 사랑했어요.
그런데 그 부인이 연애때 나이타를 선물했습니다.
은으로 된 나이타인데 비싼거예요.
그것을 한번도 안잊어버리다가
한 20년쯤 지나서 어느날 잊어버렸어요.
항상 그것을 자랑하고 사랑의 징표라고 하고
담배필 때 꼭 가지고 다녔는데 잊어버렸어요.
그런뒤 이 사람은 자꾸 불안한 생각이 들어요.
부인이 혹시 바람피지 않을까?
헤어지지 않을까?
그것을 잊을게 뭐야?
무슨 징조가 아닐까?
불안해서 대낮부터 술을 마셨어요.
그리고 저녁에 또 술마시고 나이타 생각만 해요.
친구들한테고....회사에서고....
자식에게도....네 엄마 나이타 잊어버렸당....
다음날 또 술먹고..... 다음날 또 술먹고.....
그러는 자기가 한심해서 술먹고.......
이것이 바로 중생의 병입니다.
물건은 언제든지 떠나가요.
부인도 죽습니다.
자기도 죽고....
그런데 나이타가 뭐 대수여요.
그냥 잊으면 되는데
그것은 사랑이 아니고 집착입니다.
건전하고 좋은 부인에 대한 사랑이 아니고 병적인 집착이어요.
그래서 의처증이 있고.... 의부증이 있는 것입니다.
모두 집착이잖아요.
그런 집착은 병입니다.
모두 한생각 일어난 것이고
그 생각을 방치하여 결국 병이 들었으니
나이타 잊어버리고 병을 만든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빈 마음이 자기인 줄 알고
필요한 것은 사용하되 필요치 않는 것은 일으키지 마세요.
자꾸 안된다고 하는데 잘 됩니다.
한번 사실로 받아들이면 그렇게 하게 되어있어요.
자성 부처님의 위대한 능력이지요.
알면 됩니다. 그러니까 알면 끝이어요.
저것은 하수도 물이다......네....
너는 폐암 4기다!..........네.....
너는 이 나라의 왕자야!...........네....
너는 이 집안의 장손이다........네....
너는 바로 부처이다.........네....
모두 이렇게 알고 자기 처신에 맞는 행동을 하였지 따로 배운 것은 없어요.
알면 행(실천)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행하려고 하지 노력하지는 말아요.
한번 알면 어느 순간이든지 즉시 하는 것이지
하지는 않고 앉아서 해야지..해야지..해야죠..이러지 말아요.
언젠가 당신이 해야 깨달을 것입니다.
비가 새요. 부인이 "여보! 빨리 지붕에 올라가서 기왓장 좀 살펴봐요."
"응, 그래....해야지...." 그리고는 비 새는 것을 쳐다보면서
해야지.....해야지.....이래봐요. 그러면 비가 안샙니까?
언젠가는 일어나서 바로 사다리를 올려놓고 올라가야해요.
이렇게 행동만 필요하지 해야지.....해야지....이것은 필요없습니다.
바로 비워진 마음대로 살아야 습관되고 그쳐지고....바르게 잡아져요.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도 되고....
그러니까 마음이 빈 것을 바로 아시고 무심의 인생을 즉시 살아가세요.
중국에서 설봉 스님과 암두 스님을 깨닫게 했던 덕산 스님이라는 분이 있었어요.
그 분이 깨달을 때입니다.
이 스님은 원래 절에서 스님들에게 경을 가르치는 강사스님이었는데
10년간 금강경을 연구하여 주석서를 짓기도 하였으므로 성이 주(周)씨라, 사람들이 주금강(周金剛)이라고 부를 정도로 유명한 금강경 대가였습니다.
덕산 스님은 평소에 수많은 세월을 계를 지키고 닦아야 부처가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남쪽에서 '마음이 곧 부처' 라고 하면서 이것을 깨달으면 바로 부처라고 하는 소리를 듣고
말도 안 되는 마구니들을 다 쳐부수리라 마음을 먹고 주석서를 짊어지고 남방으로 갔습니다.
처음 풍주(豊州) 땅에 도착하여 길거리에서 떡 파는 노파가 있기에
금강경 주석서를 내려놓고 떡을 사서 점심(點心)을 먹으려고 하였는데 노파가 물었습니다.
"등에 지고 있던 것이 무엇입니까? "
"금강경 주석서요."
"내가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는데 만일 스님이 대답한다면 떡을 그냥 드리겠으나 대답 못한다면 다른 곳을 찾아가 먹도록 하십시오."
"묻기만 하시오."
"금강경에 과거심불가득(過去心不可得) 현재심불가득(現在心不可得) 미래심불가득(未來心不可得)이라 하였는데
스님은 어느 마음에 점심(點心:마음에 점을 찍다)을 하시려고 하오? " 했어요.
점심은 점찍을 점자, 마음심자입니다. 원래 점심이라는 말이 여기서 유래되었어요.
아, 떡을 먹어야 겠구나 했을때
어디에다 '먹어야지....'하고 콕 찍었냐 그말입니다.
아, 배가 고프구나 했을 때
어디에서 한 생각 일어났는가 그말이어요.
과거, 현재, 미래중에 어디에서 순간 일어났습니까?
덕산 스님이 대답을 못하였습니다.
그렇게 금강경을 십년씩이나 연구하고 배운 스님도 말을 못했어요.
그러자 노파가
"난 또 금강경 대가인줄 알았더니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구려, 그것을 알려면 용담(龍潭)스님에게 가보시오." 라고 하였습니다.
대단한 노파죠?
중국의 선사열전을 보면 노파가 자주 등장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럴 정도로 노파들이 불교를 열심히 신행했어요.
참선도 많이 했고....
모두 한소식 얻어서 당당하게 살다가 스님을 만나면 한번 시험해봐요.
제대로 아나, 모르나 하고요....이 노파처럼말야요.
우리나라도 빨리 그런 시대가 도래해야합니다
여러분이 다 깨달아서 언젠가 대한민국을 휘저을 것입니다.
여기 열심히 나오세요.
다른 데 가면 못깨달으나 여기 있으면 언젠가 깨달아요.
왜냐면 이것은 오래 되면 저절로 알게 되어있어요.
마치 안개에 젖듯이 차차 젖어서...나중에 마침내 다젖어버리듯이 부처가 되어있을 것입니다.
얼마전에 무불선원이라는 간판을 보고 누가 찾아왔어요.
교장하시던 노보살인데 나이가 83살인가 하데요
이동네 사는데 송광사 구산 스님 밑에서 한 10년 참선 공부했데요.
아주 열심히 했다고 하데요.
그래서 우리나라 전국 큰 스님한데 다 다니면서 법거래하고 ..그만하면 됐다 하고...인가를 받았데요
경봉스님, 전강스님, 향곡스님, 성철스님, 등등....
이름만 들어도 쟁쟁해요.
그분이 와서는 이동네에 공부하는 스님이 있다고 해서 왔데요.
그래서 한참 반갑고 해서 뭐라고 말해봤는데
다 좋았는데, 법을 논하고 아는 것은 다 좋았는데
자기가 다니던 절 스님이 뭘 잘못해서 신도들이 들고 일어났는데
그때 자기는 신도 회장이었는데 이쪽 편도 저쪽 편도 아니었데요.
그말에 제가 그것 잘못하셨네요 그랬어요.
구산스님밑에서 공부하신 분이 어째 사람을 살리지 못합니까? 했어요.
그 스님 나도 잘 아는 스님인데 장차 훌륭하게 될 스님인데
그런 것이 흠이 되면 안되잖아요.
잘못해도 그때 덮었으면 반성하고 크게 될 것인데
신문에 내고....프랑카드 내고 하는데 어찌 회장님이 보고만 있었습니까?
순간 소신이 흔들리셨네요 하고 지적해주었지요. 그랬더니 그렇다고 하데요.
공부는 일상사에 있어요. 어찌 머리 속에 아는 것이 공부이겠어요.
그런데 이 보살님이 제 법성게 강의 책을 달라해서
하나 드렸더니 한 7일후에 오더니 스님 공부가 많이 되셨데요
그런데 아직 더해야 합니다. 조금 더하세요. 해요. 그래서 제가 '네 감사합니다'
하고 더이상 말안했어요. 결국 서로 인정 안한 것입니다.
그러니 대단한 노인이지요.
자기는 자기가 부족한 것을 인정하고 아직도 한가지 해결되지 않은 것을 해결하겠다고
아직도 참선한데요. 그러면서 참선하는 스님 만나서 반갑다고 하면서 갔어요.
한참되었는데 요즘 연락이 없네요.
어찌 되었건 여러분이 여기 한참 나오면 젖습니다
반드시 깨달을 것이니까 열심히 나오세요.
노파에게 대답을 못하여 떡을 얻어먹지도 못한 덕산 스님은
바로 용담 스님 회상으로 갔습니다.
대개 남의 집안은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잘 모릅니다.
도량에 들어서면 아무도 없는 것처럼 조용해 보여요.
덕산 스님은 여전히 오만을 버리지 못하고 용담 스님 도량에 들어가 한번 휙 돌아보더니
"용도 없고 연못도 없구먼. "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용담 스님이 나타나서
"자네가 용담에 도착하였네.(子親到龍潭)" 하고 말했습니다.
용(龍)은 불교에서 상징입니다. 백수의 왕이죠.
마음에 한 점의 생각도 없어야 그것이 용이고,
그런 사람들이 사는 곳이 바로 용이 사는 연못이라는 말입니다.
덕산 스님은 용담 스님의 첫 법문을 들었는데도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절하고 물러났습니다.
저녁에 다시 용담 스님을 찾아가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선불교의 세계를 새롭게 이해하게 되자 덕산 스님은 마음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경을 보고 불교를 이해한 사람은 끝까지 앎으로서 도(道)를 이해하려고 해요.
도는 앎을 떠나있는 것인데, 앎 이전에 있는 것은 도통 보지 못합니다.
선사는 바로 가는 사람이지만 제자는 둘러 가는 사람이라 그런 사람과 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니 말로써는 더 이상 깨닫게 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용담 스님은 밤도 늦었으니 이제 처소로 돌아가라고 했어요.
덕산 스님이 문밖을 나서니 캄캄하여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되돌아 와서 밖이 어둡다고 하니까,
용담 스님은 이때가 바로 덕산을 깨닫게 해줄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용담 스님이 굵은 초에 불을 밝혀서 내주었는데,
덕산 스님 받으려고 하자 용담 스님이 바로 훅 불어서 불을 꺼버렸습니다.
순간 덕산 스님은 무언가 보고 크게 깨달았습니다.
덕산 스님이 절을 하자,
"네가 무엇을 보았기에 갑자기 절을 하느냐? "
"지금 이후로 다시는 천하 선지식 스님들의 말씀을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했어요.
이것이 바로 줄탁동기입니다.
제자가 불법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고 마음도 동요가 없는 경지에 이르렀을 때 스승은 간단한 말이나 행동으로 제자를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최후의 가르침입니다.
만약 제자가 충분한데도 스승이 인도하지 않으면
제자는 깨달을 시기를 놓쳐 못 깨닫고 마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스승도 제자를 잘 만나야 하고 제자도 스승을 잘 만나야 합니다.
그런데 순간 덕산 스님은 무엇을 보았을까요?
불이 꺼진 순간 무언가 보았습니다.
이 사실적인 가르침에 덕산 스님은 크게 깨닫고 만 것입니다.
그러니까 덕산 스님도 수행을 많이 해서 깨달은 것이 아니고
순간 선사를 잘 만나 깨달은 것이지요.
이것이 선불교입니다.
그때 무엇을 보았을까? 여러분도 한번 두고 두고 생각해보세요.
이튿날 용담 스님이 상당하여 법문을 하였습니다.
"만일 이빨은 칼로 된 숲과 같고 입은 시뻘겋게 크게 벌리며
한 방망이 얻어맞고도 뒤도 안 돌아보는 놈이 있다면 후일
그는 고봉정상에서 나의 도를 세울 것이다."
대단하잖아요.
이빨이 칼로 된 숲과 같다고 했으니 함부로 말하지 못하겠죠
살덩이들을 벨테니말입니다.
그러니까 입은 크게 벌리고 다물줄 몰라야 되요.
그런 상태에서 크게 한 방망이를 얻어맞아도 눈도 꿈쩍 않고 뒤도 돌아보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는 반드시 나의 도를 알고 말리라 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누가 발만 밟아도....반응을 보이고...
힘들어죽겠는데 부탁하면 신경질석인 목소리로
보면 몰라! 하고 대뜸 소리칠턴데 입에 칼을 물고 누가 때려도 꿈쩍않는 자라야
그럴 정도의 굳건한 기백이 있는 자라야
그런 고집이 있고 세계가 무너져도 움직이지 않아야 이 도를 보리라...라는 말입니다.
용담 스님의 법문을 들은 덕산 스님은 드디어 금강경 주석서를 법당 앞에 놓고 횃불을 들고 말하였습니다.
"현묘한 변론을 다하여도 마치 넓은 허공에 하나의 털을 둔 것과 같고,
세간의 가장 중요한 것을 모두 갖추었다 하여도
이는 큰 바다에 물 한 방울을 던지는 것과 같다. "
아무리 많이 알고 미묘한 법문을 쏟아내도 도의 세계,
진실의 세계에서는 한낱 티끌과 같을 뿐이라는 말입니다.
말을 마치고 주석서를 다 태워버렸습니다.
아는 것은 인생을 사는데 그리 크게 도움을 주지 않습니다.
물론 모르는 것보다는 아는 것이 훨씬 나으나 아는 것보다
아는 대로 실천됨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불교는 알지 말고 깨달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같은 앎이나 깨달아 아는 것은 그 강도가 다릅니다.
물론 아는 것 하나로... 소신 하나로 성공한 사례도 많으나
그것은 모두 마음 외적인 것에서 그렇습니다.
즉, 재산을 일구고 명예를 얻는 일에는 아는 것이 성공의 밑거름이 됩니다.
그러나 마음의 행복, 영원한 행복을 얻는 것에는 아는 것과 소신은 오히려 병(病)이 됩니다.
그런 앎과 소신은 상대를 만들기 때문에 오히려 불행을 불러옵니다.
도는 아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참다운 인생은 아는 것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행복해집니다.
그런 도,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에 들어선 사람이 어찌 앎을 가만 두겠습니까?
모두 태워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철저히 마음을 비운 것입니다.
그것이 행복으로 가는 길임을 알고 즉시 버린 것입니다.
버리고 나면 모든 것이 자기를 향해 옵니다.
그토록 찾으러 다녔고 구할 때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돈과 명예와 기타 것들이 일시에 내달려옵니다.
그래도 행복한 사람은 그런 것에 눈도 돌리지 않고 황금을 돌처럼 보듯이 보고 자기의 길을 가게 됩니다.
이리하여 중국 선불교에서 임제스님과 함께 덕산의 방(榜), 임제의 할(喝)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크게 사람을 교화한 인재가 나왔으니 그가 바로 덕산선감(德山宣鑑) 스님입니다.
그후 덕산 스님은 공부가 많이 되어 큰 스님들을 찾아뵈러 다녔는데 한번은 위산 스님 도량에 들어갔습니다.
바랑을 멘 채로 법당에서 동쪽에서 서쪽으로....서쪽에서 동쪽으로 왔다 갔다 하더니 뒤돌아보며 "없다, 없어!" 하고 말하고는 곧바로 나가버렸어요.
덕산 스님이 문 앞에 이르러서는 '경솔해서는 안되지' 하고 몸가짐을 가다듬고 다시 들어가 위산 스님을 뵈었습니다.
접객실에서 기다리다가 위산 스님이 들어와서 앉으려고 하자 마자,
덕산 스님이 방석을 집어들면서 "스님!" 하고 불렀습니다.
위산 스님이 불자를 집으려고 하자
덕산 스님이 큰 소리를 지르고는 소맷자락을 떨치고 나가버렸어요.
그리고는 법당을 뒤로하고 짚신을 신고 곧바로 떠나버렸습니다.
참 대단한 그릇입니다.
덕산 스님은 방석을 들고 무엇을 보여주려고 하였고 위산 스님은 또 무엇을 보았기에 불자를 들어 응대하려고 하였을까요?
(불자는 선사가 가르칠 때 사용하는 먼지털개처럼 생긴 것입니다.)
먼지털이개....알죠? 그것처럼 생겼어요. 휠씬 크죠
큰스님 영정에 보면 들고 있는 털이개가 있을 것입니다. 나중에 어디 가서 함 보세요.
그런데 불자를 잡기도 전에 덕산 스님이 '꽥' 하고 큰 소리를 지르고 나갔으니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겠습니까?
무언가 선사들이 암중에서 주거니 받거니 한 것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원오 스님이 한 마디 붙이길
"불여우 같은 견해로다. 이 한 소리에 방편도 있고 진실로 있으며 관조(觀照)함도 있고 활용도 있다. 자유자재하기가 마치 구름을 몰고 안개를 움켜쥐려는 자들 중에서도 더욱 뛰어난 것과 같다. " 라고 하였습니다. 원오 스님은 또 무엇을 보았을까요?
여기서 제가 한 마디 하자면,
위산 스님은 덕산 스님에게 속지 않았고 원오 스님은 덕산 스님에게 속았고
이 세 스님은 화살 하나에 모두 관통 당하였으므로 훗날 남에게 말 한번 변변하게 하지 못하였다 하겠습니다.
위산 스님이 저녁나절에 수좌에게 물었어요.
"아까 새로 찾아온 스님은 어디에 있는가?"
"그 당시에 법당을 등지고 짚신을 신고 바로 떠났습니다."
"이 사람은 훗날 고봉정상에 암자를 짓고 부처를 꾸짖고 조사를 욕할 것이다."
라고 말했어요.
여기에 원오 스님이 또 한 마디 붙이길
"도적이 가버린 뒤에 활을 당기는군. 천하의 납승들이 덕산 스님을 뛰어넘지 못하리라."
라고 했습니다.
덕산스님은 방석을 들고 스님! 하고 불렀고
위산 스님은 불자를 들려고 하자
덕산 스님이 즉시 꽥 하고 소리지르고 간 것이 이 이야기의 전부입니다.
그런데 이런 덕산의 선기에 천하의 납승도 누구도 어쩌지 못한다고 한 것입니다.
어째서 그런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런데 여기서 위산 스님은 어째서 덕산 스님이 훗날 부처를 꾸짖고 조사를 욕한다고 했겠습니까?
칭찬입니까? 꾸중입니까?
저보고 말하라 하면
"어허, 오늘이 3월 22일이네." 라고 말하겠습니다.
붓다들이여, 여러분에게 이미 이것을 아는 자가 내부에 있으니 꺼내놓고 한번 물어보십시오.
꺼내놓기만 한다면 물 위에서 아무리 달려도 신발이 젖지 않는 도리를 꽐꽐 쏟아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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